퇴마록 외전 2 : 대성인의 죽음 (1965년 인도-파키스탄 2차 전쟁 직후) : 5화 – 나는 어쁘랭띠가 아니다
나는 어쁘랭띠가 아니다
그렇게 바바지는 사라졌다. 어쁘랭띠의 주술의 위력이 워낙에 커서인지 바바지 스스로 원해서 어떤 조화를 부렸음인지는 몰라 도 핏자국이나 흉한 자취조차 남기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 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반다와 어쁘랭띠가 뿜어낸 마지막 주술의 여파도 이윽고 완 전히 사라지고 먼지까지 가라앉아 잠잠해졌다. 그때까지 바위 뒤 에 숨어 있던 키르모비치 대령은 질린 표정으로 조심스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다 된 겁니까? 혹시 어디로 사라진 거 아닌가요?”
어쁘랭띠는 땅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성대와 핏자국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몹시 허탈한 듯 복화술로 말했다.
아니, 이제 바바지님은 없소 전혀 존재하지 않아. 최후의 원자 하나까지 이 세상에서는 사라져 버렸소. 그래야 되지. 그래야 되는 거니까. 바바지님을 이루고 있던 육체의 단 하나, 느낌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을 테니까.
키르모비치 대령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흔적은커녕 원자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 이 어떤 의미입니까? 핵분열을 일으켰다고 해도 에너지가 남는 것이 보통…….”
그러나 어쁘랭띠는 경멸하는 것 같은 표정만 힐끗 보낼 뿐, 대 답하지 않았다. 키르모비치 대령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 끼고 다시 말했다.
“하긴・・・・・・ 그런 것은 일반적인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나 그런 거지. 당신들은 그 테두리 밖의 존재들이니……………”
그러면서 키르모비치 대령이 덧붙였다.
“허나 그런 존재들이라도 당신들의 대화는…………….”
갑자기 어쁘랭띠가 무서운 눈으로 키르모비치 대령을 보며 간단히 말했다.
입 다무시오.
키르모비치 대령이 자신도 모르게 놀라 입을 다물자 어쁘랭띠는 다시 고개를 돌리며 짧게 덧붙였다.
영원히.
“그, 그러겠습니다. 어쁘랭띠………….”
할 말이 없어진 키르모비치 대령은 바바지의 빛나는 구체에 갇혀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고반다를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저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저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꺼낼 수 없습니까?”
어쁘랭띠는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딱 저 정도인 쓰레기일 뿐이오. 그리고 바바지님의 힘은 무엇으로도깰 수 없소.
“허어. 그냥 해치울 것이지…………. 저러면 어떤 의미에서는 저자를 보호하는 게 되잖습니까.”
키르모비치 대령이 말하자 어쁘랭띠는 경멸스러운 듯 말했다.
바바지님께서는 어떤 생명도 죽이지 않으시오. 그리고 나나 당신 따위가 상상하지 못할 어떤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허어. 그러나 저걸 어쩐단 말입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하겠지.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시는군.”
키르모비치 대령이 다소 빈정대듯 말하자 어쁘랭띠 역시 차갑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라도 그럴테지. 나 또한 나 자신이 쓸모없어지면 버릴 거요.
저쪽에서 고반다가 몸을 일으켜 타는 듯한 눈으로 어쁘랭띠를 노려보는 것이 보였다. 바바지의 보호막을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그래도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적의에 찬 눈빛이었다.
어쁘랭띠는 이제 완전히 쓸모없어진 돌멩이나 먼지를 보는 것 처럼 그에게는 눈조차 돌리지 않았다. 고반다는 저주와 원망이 가 득 찬 눈빛을 보내며 뒤로 몸을 돌려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신 기하게도 광휘에 찬 보호막은 고반다의 걸음에는 조금도 지장을 주지 않고 고반다의 몸을 따라 계속 움직여 갔다. 그렇게 썰렁한 분위기에서 고반다가 사라지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적막을 견디기 힘들어 말을 걸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어떻게 하다니? 당신이 세운 계획이 있지 않소? 당신의 조국도 배신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다 하지 않았었나?
어쁘랭띠의 말에 키르모비치 대령이 답했다.
“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능력이나 이 괴물 같은 힘을 가지더라도 결코 쉽지 않다고. 당신은 아마 나를 볼 적에 한 마리 벌레처럼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그리 약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소.
“현명하군요. 인간이 가진 조직의 힘은 당신의 능력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고, 또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 면은 알고 있겠지요? 무조건 모든 걸 파괴하는 주술만 가지고 세상에 뭘 할 수 있을까?”
나도 알고 있소.
“당신에게도 조직의 힘은 필요할 테니, 모든 걸 나에게 맡기고 협조하세요. 우리가 계약한 대로…………….”
당연히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소.
어쁘랭띠의 말에 키르모비치 대령이 빠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대강 우리가 짜 놓은 대로 수습됐군요. 나막 대위 와 일행은 저자의 공격 때문에 죽은 것으로 해 두면 되겠지요. 나 혼자만이 모든 것을 목격한 증인이 되니까. 그리고 당신은 예정대로 사라져 버릴 뿐이고. 물론 당신과 바바지, 그러니까 고반다 말입니다. 그렇게 둘 다 일을 끝내고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다가 키르모비치 대령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그러면 저들이 정말 믿을까요?”
저들은 당연히 그럴 거요. 벌레들이니까.
“홍. 뭐, 그렇다면 별문제는 없겠죠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키르모비치 대령은 한 가지 몹시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물었다. “정말 샤스트리 수상이 죽은 게 어떤 주술에 의한 것이 아니었 습니까?”
어쁘랭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상인지 뭔지, 그런 벌레 따위를 없애는 데 이런 힘을 쓰는 바보는 없을 거요. 우리가 보는 세상은 당신들이 보통 생각하는 그런 세상과는 완전히 다 르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것을 빨리 깨닫는 게 하나의 당당한 존재로 내 앞 에 설 수 있는 순간이 오는 계기가 될 거요 알았소. 키르모비치?
그러자 키르모비치 대령은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 고는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같은 배를 탄 셈이니, 딱딱하게 성으로 부르지 맙시다.”
그런가. 당신의 이름은 뭐요?
“안드레이요. 이제부터 안드레이라고 부르시오.”
좋소, 안드레이.
두 사람이 악수하자 이제까지 키르모비치라고 불렸던 안드레이가 말했다.
“이제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조금 더 모아야 할 거요. 당신의 손가락 하나도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당신의 능력은 크지만, 조직 을 결성하고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래도 내가 나을 거요. 허 나 당신 같은 최강의 능력자가 아니면 그런 능력자들을 모으기 어 려울 테니 당신은 능력 면에서 최강자로 존재하고…………….”
뜻대로 하시오.
“그러니 일단 우리가 생각하는 조직…………. 이름을 뭐로 정할지. 능력자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니 대집단도 아닐 거고, 비밀리에 소수가 모여 활동하는 것이니 일종의 서클이라 부르는 게 어떨까 싶소만.”
원하는 대로 하시오.
“그리고ᆞᆞᆞᆞᆞᆞ 그 서클의 총수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내가 맡는 편이…………….”
아………… 당신 마음대로 하시오 난 관심 없으니까.
어쁘랭띠가 계속 시큰둥하게 말하자 안드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라는 건 뭐요?”
안드레이가 묻자 어쁘랭띠는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소. 위대한 스승님이 없어진 이 세상은 이제 공허하기 그지없지. 세상의 힘을 모조리 끌어모을까? 끌어모으면 스승님이 본 경지로 갈 수 있을까? 흠, 힘을 더 모아야겠지. 뭐, 그러려면 악마건 뭐건, 세상의 지옥문이 열리건 말건, 일단 그것부터 실행시켜 볼 일이고.
“원 세상에. 지옥이라니! 그렇다고 세상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멸망시킬 수 있다고 여기오?”
안드레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어쁘랭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드레이는 재촉하듯 말했다.
“대답 좀 해 보시오 어쁘랭!”
그 말에 어쁘랭띠는 거의 발작적으로 휙 고개를 돌려 안드레이 를 노려보며 말했다. 물론 복화술로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의 무시무시한 분노와 흥분의 감정이 사방을 뒤덮었다.
더 이상 나를 어쁘랭따라 부르지 마시오! 알겠소?
그 말의 기세에 안드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몇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섰다.
“아, 알겠소. 내가 무심코 그럼・・・・・・ 그러면 뭐라 부르란 거요?”
나는 이제 더 이상 어쁘랭띠가 아니야.
그는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고 생각한 것처럼 요가의 자세를 취해 순식간에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자신이 바바지가 된 것처럼, 묘 하게 여성적이고 상대를 높여 주는 듯한 투로 말했다.
이제부턴 내가 마스터요.
갑작스런 변화에 정신이 없었지만 안드레이는 기세에 눌려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좋소 마스터.”
우발적으로 내뱉은 말이었고 이제는 자신이 주인이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안드레이의 반응을 보고 그는 조용히,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마스터. 내가 이제부터 나의 마스터고, 모두의 마스터요. 마스터라 부르시오.
안드레이는 겁먹은 듯 고개만 끄덕였다. 모든 것이 파괴된 황량 한 고원의 폐허에 무심한 바람만이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후에 수십 년을 이어 갈 블랙 서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