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2 : 1997년 12월 25일 [퇴마록(혼세편) ’홍수’ 이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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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외전 2 : 1997년 12월 25일 [퇴마록(혼세편) ’홍수’ 이후]


크리스마스다. 거리에는 캐럴이 사방에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 스트리와 산타클로스 복장의 모습도 넘쳐 나는 날이다. 그리고 그 보다도 더 넘쳐 나는 것은 사람들의 즐거운 마음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예년보다는 훨씬 덜하다. IMF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많은 사람이 위축돼 있다. 그래도 사람들은 애써 즐거워하려 한다. 근 거나 유래가 꼭 정확하지 않아도 좋고, 상술이라 해도 좋으며, 분 위기에 휩쓸린다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억지로라도 많은 사람은 즐거워지려 한다. 꼭 기독교를 믿지 않아도, 산타클로스가 실은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정도가 줄어들 뿐, 일단 얻어진 즐거움은 가시지 않는다. 힘들게 얻어서 더 누리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백화점의 음반 진열대 앞에서 한 남자가 싱글싱글 웃는 모습으로 CD를 여러 장 골라 계산대 앞으로 가지고 온다. 웃음 짓는 것 같은 눈매에 입가에는 실제로 덩그러니 기분 좋고 편안한 웃음이 걸려 있는 인상 좋은 남자다. 계산대에서 CD의 바코드를 찍어 입 력하면서 판매원이 말한다.

“클래식 좋아하시나봐요?”

그 남자가 골라온 CD는 대부분 클래식이었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남자는 싱긋 웃으며 말한다.

“예, 좀 좋아해요.”

“그렇군요. 선물하실 건가요?”

그러자 남자는 조금 부끄러운 듯 또 웃는다.

“저 혼자 들을 거예요. 특별히 같이 들을 사람도 없고…………….”

“네에…….”

판매원은 조금 어색했는지 말꼬리를 돌린다.

“그런데 참 잘 웃으시네요.”

이렇게 말하자 남자는 또 웃으며 말한다.

“그런가요? 뭐, 그래요. 요새는 기분이 퍽 좋아서……………. 옛날에 전혀 웃지 못했던 때가 있어서인지, 그걸 보상하려고 요즘은 많이 웃는지도 모르겠고요. 조금 실없어 보이죠?”

“아뇨, 괜찮아요. 보기 좋은걸요.”

CD의 바코드를 다 기록한 판매원이 CD를 한데 모아 쌓아 포장할 준비를 하며 말한다.

“그런데 특별히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으세요?”

“특별히 좋아하는 작곡가는 없어요. 다 좋죠. 딱 한 명만 빼고요.”

“예? 누구요?”

“브람스는 절대 안 들어요.”

“싫어하세요?”

“아뇨.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안 들어요.”


그곳에서 두 블록 정도 떨어진 어느 카페. 수수한 듯하면서도 상당히 세련돼 보이는 특이한 옷차림의 여자가 커피 잔을 앞에 놓 고 계속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다.

노트북 자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가 여자의 옷 차림이 세련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자꾸 끈다. 그리고 무슨 통신이나 워드 문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는 프로그래밍 을 하고 있다. 꽤나 머리가 아픈 듯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다.

프로그래밍을 하다가 여자는 벌떡 일어나 카페에서 전화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당연히 해도 되죠”라고 주인이 대답하자 여자 는 “국제 전화인데요”라고 말한다. 주인이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 자 여자는 살짝 윙크를 해 보이며 말한다.

“충분히 갚아 드릴게요. 급해서 그래요.”

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다. 프랑 스다. 여자의 입에서 불어가 쏟아져 나오고 상대방과 심각한 듯 뭔가에 대해서 떠들자 주인은 슬며시 등을 돌려 자리를 피해 멀어 져 간다. 불어인 데다 프로그램에 대해서 토의하는 것이니 알아들을 사람이 거의 없는 게 당연하다. 그것도 새로운 보안 프로그램의 유형에 대한 이야기다. 수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말한다.

[네트워크를 통해서 컴퓨터 바이러스가 퍼져 나간다는 것은 기 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에요. 마드무아젤 혜영. 아직 그런 바이 러스가 발견되지도 않았는데 보안 체계를 그쪽으로 대비해야 한 다니, 이건 좀 너무 앞서 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닐지……] 혜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한다.

“그거 분명 가능한 일이라고요. 당신도 그런 바보 중 하나예요? 네트워크는 바이러스와 전혀 연관 지을 수 없다고 믿는? 이거 미 리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통신 네트워크라고 하는 게 바 이러스로 온통 뒤덮일지도 모른다고요.”

[하지만 여태 사례가 없었는데 마드무아젤은 어떻게 확신하 ?]

“하아, 정말 뭐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하지만 분명 그건 가능한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미리미리 대비를 해야죠. 가능성을 발견했 는데도 그냥 내버려두는 게 정말 옳은 거예요?”

혜영의 프랑스 프로그래머와의 대화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 다. 프랑스 국제 전화 요금이 도대체 얼마나 나오는지도 모르는 주인은 혜영에게 얼마를 받아야 좋을지 몰라 점점 마음이 무거워 진다.

거기서부터 또 한참 떨어진 어느 아파트 단지 중년의 남자가 자기 집 우편함을 확인한다. 우편함에는 몇 장의 고지서와 함께 척 봐도 유치한 화려함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카드들이 몇 장 배송돼 있다. 남자의 얼굴은 딱딱하고 바싹 마른 데다가 참 멋대가 리 없이 생겼지만 그런 남자의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에도 은은히 미소가 감돈다.

남자는 고지서 뭉치 등 쓸데없는 것은 대충 구겨 주머니에 집어 넣은 뒤 그 자리에 선 채로 카드를 뜯어보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카드에는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라거나 ‘선생님, 크리스마스 축 하합니다’와 같은 글이 쓰여 있고 아이들다운 소박한 그림들이 그 려져 있다. 남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하나 볼 때마다 남자의 얼굴에 따뜻한 웃음이 지나가지만 그중에 한 장 은 조금 더 유달리 뭔가 기억이라도 해내려는 듯 뜯기 전에 뚫어 지게 바라본다. 밑에는 작은 글씨로 보낸 이의 이름이 쓰여 있다. 

“현주. 그래, 현주・・・・・・ 잘 지내고 있구나.”

남자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린다. 그 리고 카드를 꺼내 잠시 그림을 본다.

“그림 재주가 없었지…………….”

현주가 보낸 카드는 다른 아이들처럼 그린 것이 아니라 어디선 가산 것이다. 그 그림은 젖혀 두고 속장을 펼치니 글씨만 보아도 활달하게 잘 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듯 거기에는 조금 여자아이답 지 않게 갈겨쓴 것 같은 활달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선생님, 메리 크리스마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올해는 꼭 결혼하세요.

“아휴.”

남자는 세 번이나 반복된 ‘축하합니다’라는 밑에 ‘결혼하세요’ 라는 글자를 보고 조금 슬픈 얼굴이 된다. 그러다가 남자는 뭔가 를 발견한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쓴 것 같았는데 그 위에 뭔가 회 미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처음엔 뭘 그린 것인지 알지 못했는 데 자세히 보니 물고기 모양이다. 아주 간혹 카드에 등장하는 베 드로를 상징하는 익투스인지 뭔지 하는 물고기 문양은 당연히 아 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답이 나온다.

‘또 북어냐’

현주는 이미 몇 년 전에 가르쳤던 아이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별명은 북어였다. 이 녀석은 아직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듯. 축하하 는 크리스마스카드에다 놀리는 듯 북어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이다. 선생은 한숨을 쉬지만 그래도 웃음기가 가득 섞여 있다. 

“지금도 북어야. 난 평생 못 벗어날 것 같아. 장가도 그렇고……” 

그래도 북어 선생의 표정은 결코 어둡지 않다.


한 아이가 개 목줄을 잡고 달리고 있다. 막 중학생이 된 정도의 사내아이다. 체구도 크지 않고 아주 강건해 보이지도 않지만 분위 기가 몹시 활달하다. 그건 아마도 아이가 목줄을 잡고 같이 달리 고 있는 커다란 개 때문이리라.

아이보다도 훨씬 크고 무섭게 생긴 개인데 아이는 조금도 스스럼없다. 더구나 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계속 말을 걸며 달린다. 심부름도 할 겸 개 산책도 시킬 겸 나온 것이 분명했 지만 개에게 말하는투가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

예를 들면 ‘쫑, 따라와 쫑, 잘했어’ 이런 투가 아니라 ‘쫑. 그런 데 말이지. 지금 기분은 어때? 공기가 참 맑은 것 같지?’ 이런 식 으로 마치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속삭이며 대화하는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계속 활기차게 달려가면서 말하는 것이라 지 나가는 사람들은 별로 느끼지도 못한다. 만약 들었더라도 정말 개를 좋아하는구나’라거나 ‘저렇게 큰 개인데도 친하게 잘 지내 네?’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실상도 그리 다르지는 않지만 나름대 로 사연이 있다. 굳이 남에게 말할 필요 없는 사연이지만 아이는 정말 개를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본다. 개도 영혼이 있는 존재라 는 사실을 믿는 몇 안 되는 아이다. 아이는 급하게 나왔는지 학교 에서 입는 체육복 추리닝을 헐겁게 위에 걸치고 있다. 아마도 잠 깐 나갔다 온 사이 바깥 날씨가 추우니 대충 걸친 것이리라.

그 추리닝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2학년 4반 동민이라고.


그리 넓지 않은 도장 안은 두 사람의 몸에서 뿜어 나온 열기가 후끈 남아 있는 것 같다. 아직도 검도용 호구를 온몸에 걸치고 호 면만 벗은 상태로 주저앉아 있는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입을 연다.

방금까지 격하게 대련을 했던 듯 얼굴은 땀에 흠뻑 젖어 있으나 한 남자의 표정은 밝지 않다.

“마음이 풀리지 않아.”

“그럼 한번 더 해 볼까?”

옆에서 똑같이 땀을 흘리고 있는, 그러나 훨씬 생기 넘치는 남자가 자못 씩씩하게 말한다. 힘없는 남자가 고개를 젓는다. 

“글쎄… 후우…… 이래 봐야…………… 마음이 안 풀리는 걸. 도대 체 이게 뭐야 궁상맞게. 크리스마스인데도 칼질만 하고 말이야. 기분 안 풀리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힘없어 보이는 남자가 반은 농담 삼아 전혀 웃기지 않는 농담을 해대는데도 앞의 남자는 싱긋 웃으며 태연히 받아들인다. 

“뭐, 그러면 나도 괜히 땀 흘린 셈이 되나? 후우. 그런데 말이지.” 

쾌활한 남자가 조금 웃음기를 거두며 눈을 감은 채 말한다.

“참 안됐다. 정말 이 말밖에 할 수 없어서 유감이긴 하지만.”

“후우, 그래그래 됐어. 그만……………. 어차피 다 끝난 일인 걸.” 

“하지만 어떻게 하겠니. 소정 씨도 네가 이렇게 언제까지나 우 올해하는 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잊어 주는 게 어떻겠어?”

그러자 힘없어 보이는 남자는 다시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된다. 그러면서 힘겹게 말한다.

“아후….. 너도 잘 알잖아. 결혼할 거였다고. 그렇게 많이 남지 도 않았었고 기껏해야 두 달……………. 그런데 그렇게 훌쩍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 빌어먹을 놈의 사고 때문에. 후……………..”

“사고였잖아. 네 말대로”

옆의 남자가 차분하게 말한다. 그 말에 힘없는 남자는 정말 울 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한다.

“범준이 넌, 넌 정말 몰라. 너, 너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범준은 남자의 등등 툭툭 쳐 주며 말한다.

“아니,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범준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며 말한다. “헤어졌다고, 이제 영원히 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 정말 헤 어진 게 아닐 수도 있어.”

“뭐 마음속에 남아 있다거나 그런 이야기 말이야? 하… 사춘 기 여자애냐? 그런 싸구려 감상 같은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남자가 더 기운 없이 말하자 범준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죽음이 정말 이별일까? 정말 헤어진 걸 까? 우리만 모르는 걸 수도 있어. 그래서 난 항상 기운을 낼 수 있 는걸.”

“너 좀 이상하게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지? 죽으면 끝이잖아. 누구라도 다 아는…………”

“글쎄, 정말 그럴까?”

범준의 얼굴에는 쾌활한, 삶을 긍정하는 표정이 가시지 않는다. 일일이 설명할 수 없지만 범준은 단언할 수 있다. 죽는 것이 꼭 영원한 이별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은 아니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지만 형과 자신의 관계가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크리스마스라고 모두가 들떠 있을 수만은 없다. 특히 군인이라면 그들도 사람인지라 감정을 억제하기 힘들겠지만 긴장 을 완전히 풀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 같은 휴일에 제군 모두가 이렇게 특별 훈시를 하게 된 이 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단장이기도 한 장인석 소장의 칼칼한 음성이 마이크를 통해 연병장 전체에 퍼진다. 연병장에 집결한 수천 명의 장병은 겉으로 는 군인다운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약간씩 불만이 있 다. 휴일 중의 휴일이라 군에서조차 어느 정도 휴가 인원을 늘리 는 크리스마스다. 이런 날, 아침도 아닌 한낮에 예정에도 없이 남 은 부대원 전부를 모아 놓고 훈시라니 좀 너무하다는 기미가 연병 장 전체에 돈다. 그러나 장인석 소장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국민 모두가 안심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것은 여러 분을 비롯한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평화는 안전할 때 나온다. 안 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코 진정한 평화나 즐거움이 나올 수 없 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의 안전을 책임지는 우리야말로 아무리 방 심하기 쉬운 때라도 긴장의 끈을 절대 늦추어서는 안 되는…………….] 

장인석 소장의 말이 지루하게 이어진다. 물론 장 소장 입장으로 는 그럴 만하다. 지난번에 정말 깨끗이 당했다. 자신은 정말 서울 이 테러로 반쯤 점령된 상태라고 믿었고 일생일대 최대의 군인다 운 용기를 발휘해 부대원과 서울로 진격하려고 했다. 허나 나중에 그것이 일종의 테스트, 그러니까 장인석 소장조차도 알지 못했던 더 상급 기관에서 실시한 일종의 모의실험이었다는 것을 듣고는 몹시 낙담에 빠졌다. 항상 경계했고 전략 전술에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군인의 길을 선택한 것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고 지 금의 위치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다. 그러나 잘 알지도 못하는 자 들의 정보 조작과 교란에 사단 전체를 지휘해야 할 자신이 완전히 속아 넘어가서 하마터면 파멸적인 사태까지 갈 뻔했다는 것은 고 개를 들 수 없는 수치였다.

다만 워낙 비밀리에 행해진 작전이어서 그런지 장 소장은 일단 경질됐으되 얼마 후 복직됐고 직위도 여전했다. 허나 장 소장의 각 오는 그때부터 달라졌다. 물론 이전까지도 부대원을 달달 볶는 사단장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가혹하지 않나 싶을 정도가 됐다. 물론 군 전체로서는 더없이 이득인 일이고 나라를 위해서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부대원들의 불만이 좀 많은 것만 빼고는

[그런 의미에서 제군들의 긴장을 늦추지 않기 위해 행하는 특 별 훈시이니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 평정심과 경계심을 늦추지 말 고 모든 임무에 충실해야만 하는…………]

장 소장은 아직도 의심스럽다. 상부에서 그랬으니 그러려니 싶 지만 그때 자신의 기억과 행동은 평상시의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바가 있다. 뭔가 이상한 것이 나서서 자신을 조종했던 것은 아닌 지. 물론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그런 착각까지 들 정도다. 약물 이나 정신 조작 같은 개입이 없었느냐고 몇 번씩 확인해 보았으 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혹은 답변할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사단장의 위치에서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라면 뭔가 큰 것이겠지만 장소장은 군인답게 이제 잊으리라 마음먹은 지 오래다.

그저 앞으로는 무엇에도 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협박이건 최 면 가스나 약물이건 또는 인간의 경지를, 상상을 초월하는 그 어 떤 것이 닥쳐오더라도 군인답게 뚫고 나갈 것이다. 두 번 다시 속 거나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장 소장은 생각했다. 이런 외면적인 힘 말고 뭔가 자신이 정말 대적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파괴력을 지 닌 군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나. 지난번 사건이 혹 그런 것이었다면・・・・・・ 다행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이해 불가능한 반대쪽 힘이 막아 준 것 아닐까? 진실로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뭔가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 에 대적할 만한 어떤 것도 존재할 듯했다. 아니, 존재하려면 둘 다 존재하리라. 없다면 둘 다 없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외롭지 않았다. 용기가 난다. 군인으로서의 의무를 더 충실히 수행하면 그 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 최선이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장 소장의 훈시는 끝없이 이어진다. 물론 병사들도 지루해하면 서도 장 소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안다. 대부분은 지루하 게 넘겨 버리지만 모두가 흘려듣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병사들 에게도 장 소장의 훈시는 꼭 무의미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몇 명 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자신의 각오를 조금 더 세울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에 행해지는 이런 지루한 연설도 의미는 있을 것이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교외 외곽에 있는 한적한 공원묘지. 크리 스마스 같은 날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크리스마스는 즐거움의 상징이지만 죽어서 헤어진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은 보통은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에.

하지만 이런 날에도 이러한 곳을 찾는 사람은 있다. 많지 않지 만 적지도 않다. 그중 한 사람이 윤영이었다. 윤영은 성의껏 만들 어 온 꽃 두 다발을 묘지 하나 위에 나란히 놓고 나름대로 기도를 하는 중이다. 윤영은 성당에 다닌다. 원래 그녀의 집안은 아무 종 교도 믿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금 기도를 하는 묘는 그녀 어머니의 묘이다. 분명히 어머니의 이름 한 명만 적혀 있는데 윤영이 거기에 바치는 꽃은 항상 두 다발이다. 묘조차 없는 누군가를 위해서다. 한국 풍습에 따르면 너무 어려서 죽은 유아에게는 무덤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자신과 함께 태어났었던 주영이가 그토록 삶에 집착했던 것은. 하지만 이제는 그런 악몽을 꾸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만 선택받아서 대신 살아났다는 죄책감도 마음의 부담으로 와닿지 않는다. 기억해 주면 되니까. 그런 사람이 있었노라 자신 이 기억해 주는 것만이 이미 저질러져 버린 일. 과거에 있었던 비 극적인 사건을 묻어 버리는 단 하나뿐인 해결책이라고 윤영은 생 각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오늘도 열심히 살게요. 엄마. 그리고 언니, 아니면 동 생. 어쨌든 나 네 몫까지 열심히 살 거야.’

이미 꽤나 오랫동안 해 온 일인데도 이 묘 앞에 서서 기도할 때 는 항상 눈물이 난다. 그렇게 슬픈 감정이 아닌데도 아직도 그렇 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세상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고, 나름의 사연은 세상에 가득하 다. 한참 즐거움으로 가득 차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여대생들도 있다. 마치 세상에 자신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즐겁다. 파르페 크림을 한 스푼 가득 뜬 여대생 하나가 킥킥 웃으며 말한다. 

“야야, 너 아직도 그 남자 생각하니?”

그러자 맞은편에 앉은, 단아한 용모의 여대생이 차분한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대꾸한다.

“응.”

“그 남자 잘생겼어?”

“그・・・・・・ 그게 못난 건 아냐. 꾸미질 않아서 나도 잘……”

“그럼 덩치 크고 막 아주 강해 보이고…………. 뭐 그런 스타일?”

“아니. 전혀.”

여전히 담담한,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오자 오히려 상대가 흥분한다. 동석한 다른 여대생들도 모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아, 그럼 왜 그리 못 잊어 아주 친절하고 싹싹해?”

“글쎄, 거의 말을 안 해서.”

“어휴. 이거 점점 궁금해지네. 그럼 뭔데? 너한테 잘해 줬어?”

“응. 내 목숨을 구해 줬다니까.”

“어이, 목숨을 구해 줬다는데 말도 한마디 안 해 봤어? 학벌은? 잘 사는 거 같아?”

“그, 그건 전혀 아닌 것 같았는데.”

대화의 원활함이 조금 끊기자 다른 여대생이 끼어든다.

“그 사람 정말 싱글이었어?”

“그 글쎄. 그때 보니…………… 나를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는 여자가 바싹 붙어 있던데.”

그 순간 동시에 비명처럼 여럿이 외친다.

“모오야아아…… 그럼!”

처음 캐묻던 여대생이 다시 묻는다.

“그 여자 괜찮았어? 너보다 예뻐?”

“자존심 상하지만 솔직히…………….”

다른 여대생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한다.

“야, 너 제정신이야? 잘난 것도 아니고 내세울 것도 없고 임자까지 있어? 왜 그런 남자를 아직까지 생각하니?”

시선을 받은 여대생이 거북해하며 눈을 돌린다.

“그, 그게 근데 말이지. 이상하게 그렇다고 왠지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꼭…….”

“꼭 뭐?”

“우, 웃지 마.”

“안 웃을게 뭔데?”

“그・・・・・・ 뭐랄까. 슈퍼 히어로 같고……………”

약속과는 달리 웃음소리가 0.1초의 여유도 없이 터져 나와 사방 을 메운다.

“아, 우리 정미애 양, 정신이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 버렸구먼요.”

“그러게 내가 이상한 동인지나 만화 그만 보라고 그랬지? 그런거 많이 보면 뇌가 썩는다고 썩어.”

“아,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ᆞᆞᆞᆞᆞᆞ 이젠 뭐 어차피………….”

갑자기 미애가 심각해지는데 이미 웃어 버린 친구들은 덤덤하다.

“뭔데 그래?”

“그ᆞᆞᆞᆞᆞᆞ 그 사람 죽었대.”

“뭐? 어떻게 알았는데?”

“나중에 여기저기 통해서 알아봤는데…………… 이미 죽었더라고.”

분위기가 조금은 숙연해졌지만 이쯤 되자 아무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된다.

“와, 더구나 이젠 죽었다. 너무하다. 정미애.”

“야. 너 뻥이지? 드라마 대본 쓰냐?”

“이제 이쯤에서 망상은 그만두지 그래?”

“네 이년! 치도곤(조선 시대에 죄인의 불기를 치는 데 쓰던 곤장의 하나)을 내기 전에 당장 입 다물지 못할까!”

미애는 조금은 억울하지만 친구들 입장에서는 믿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싶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도 잊어야 한다. 잘 잊히지 않지만 잊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나름대로 고민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어느 커피숍 구석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는 2남 1녀로 구성된 세 사람이 그러하다. 

“아아아! 무슨 건수 좀 없나?”

이제는 여기자가 된 김자영이 울상을 하며 기지개를 켜자 이전 보다도 살이 조금 붙어 한결 후덕한 모습이 된 손민구 기자도 인상 을 쓴다. 넉넉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지치고 쫓기는 표정이다.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이러다 잘리는 거 아냐? 우리 갖고 온기 사는 쓰지도 못하고, 응?”

“그런 걸 얘기할 수 있어야 본격 미스터리 괴담 잡지 아니겠어 요? 그런데 현실성이 없다니. 이게 우리 잡지에서 기사를 자르면 서 나올 말이에요?”

김 기자가 여전히 빠른 말투로 종알대며 불평하자 손 기자도 맛장구를 친다.

“하지만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잖아요. 적당히 지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거겠죠.”

그때까지 가만히 담배만 피우던 안재민 기자가 입을 뗀다.

“적당히 지어내는 건 좋은데 말이야……”

안 기자는 그 유달리 큰 손으로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아주 부숴 버리듯 눌러 비비면서 말한다.

김 기자, 글솜씨 그렇게 없어? 좀 그럴듯하게 못 지어내?”

“그ᆞᆞᆞᆞᆞᆞ 그래도 워낙 소재가……………..”

손 기자가 김 기자 대신 변명처럼 말하자 안 기자는 손 기자에게도 눈을 흘긴다.

“자꾸 그런 소리 할 거야. 손 기자? 소재 탓 좀 하지 말고 더 취재를 하면 될 거 아냐.”

“……완전 편집장이셔.”

“음? 뭐라고 했어? 김 기자?”

“아뇨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예전에 그 강화도 사건 같은거…. 그런 거 있으면…………….”

그러자 안 기자가 갑자기 정색한다.

“그 이야긴 하지 마.”

말만 자른 것이 아니라 안 기자는 새로 담배를 뽑아 입에 무는데 손이 약간 떨린다.

“좀 이상한 놈이었지만 그래도 내 친구였어. 적어도 나쁜 놈은 아니었고.”

안 기자가 아무렇게나 떠들어 대며 담뱃불을 붙이고는 슬쩍 눈 을 돌리는데 눈가에 빛나는 것이 살짝 보인다. 김 기자도 고개를 숙인다.

“정말 안됐어요. 그런 사람들도 죽을 수 있다니. 난 그분 천하무적일 줄 알았는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것도 우리나라도 아니고 먼 외국에서…………….”

손 기자가 나직이 중얼거리다 안 기자의 말에 말꼬리를 내렸다.

바보 같은 놈. 그냥 자기 몸이나 챙기며 살 것이지. 왜…………

안 기자가 그의 큰 손을 불끈 쥐며 목소리를 떤다. 손 기자도 숙 연해지고 말 많은 김 기자도 아예 입을 다문다. 그러나 김 기자는 아무래도 현암과 그 일행이 모조리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는 않는다. 모두가 사망자로 처리된 것을 확인까지 했으니 의심의 여 지는 없다. 그래도 어쩐지 그들이라면 죽음도 초월한 채 어느 날 갑자기 휙 나타날 것도 같다.


“제기랄! 이런 날은 조심들 좀 하면 안 되나?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법의학자 장 박사는 그 특유의 짜증 섞인 목소리를 높인다. 원 래대로면 즐거운 휴일이어야 하지만 크리스마스에도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많다. 그렇게 죽은 사람 중부 검을 요하는 사체가 줄줄이 밀려들어 온다. 말은 거칠지만 마음은 따뜻한 장 박사조차 죽은 자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잊을 정도로 짜증 나는 상황이다. 들어온 사체 중 유달리 훼손이 심한 시신을 보고 장 박사도 얼굴을 찌푸린다. 꼭 보기 흉해서만이 아니다. 애 써 떠올리지 않으려던 친구 생각이 나서다.

“가짜 신부, 그래도 편안하지? 자네가 말하던 천국이라는데 가 있는 것. 맞지?”

멍하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장 박사가 안경을 벗는다. 바늘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만큼 깐깐한 표정은 여전하지만 어느새 눈가가 축축해져 있다. 그것도 잠시, 장 박사는 다시 묵묵하고 고집 스럽게 자신의 일로 눈을 돌린다. 그러면서 그는 친구였던 ‘가짜 신부’를 대신하는 마음으로 죽은 사람들에게 편히 쉬라는 몇 마디 를 속으로 건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게 아직 살아 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니까.


이미 그들은 죽은 것으로 처리됐지만, 그럼에도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더 구나 그들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좀 있다. 인도에서는 작은 기적이 벌어졌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의식이 없 던 채 백치처럼 멍하니 살아왔던 한 여자가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 작했다. 거의 식물처럼 숨만 쉬고 있기에 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데, 말문이 터지자 능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랫동안 대화하 지 못한 것을 메우려는 듯,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라 기뻐하며 기 적이라고 신의 축복이라고 외친다. 그 여자의 이름은 로파무드다. 그러면서 조금 전 깨어나기 직전 꿈에서 운명처럼 본 몇 사람의 얼굴을 떠올린다. 과거의 운명과 인연으로부터 각인된 흐릿한 기 억. 눈을 뜨면서 잊힌 기억이지만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는 반드시 만나게 될 얼굴들이니까.


중국에서는 황달지 교수가 아이를 위해 ‘산타클로스 복장을 사 오라’는 부인의 닦달을 받고 있다. 자신이 주장하는 ‘용봉 문화설 즉 아메리카에도 동이족의 발길이 닿았단 주장은 결코 전 아메리 카 원주민이 그랬다는 것이 아니다. 일부가 그랬다는 주장인데도 몇몇 사람들이 싸잡아 제멋대로 비난하는 것에 화가 난 참이다. 허나 부인조차 관심이 없으니 서글프다. 서둘러 옷을 걸치고 나갈 채비를 하면서도 황 교수는 부인도 모르게 거실 한쪽에 놓인 팩스 로 간단한 메시지 한 통을 보내고 있다. 그냥 단순한 축전이고 별 내용은 없지만 황 교수에게는 의미가 깊다. 수신지는 한국이다.


같은 중국 화씨 약재상 건물에서도 가장 깊은 골방에서 화중 명 노인은 안경을 쓰고 뭔가를 열심히 번역하고 있다. 책상 위에 는 아주 낡아,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고서 몇 권이 펼쳐 져 있고 일견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영어 사전과 다른 의학 서 적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화 노인은 몹시 고민해 가며 한 줄을 서 툰 영어로 적고 또 뭔가를 뒤적거리고 또 적고, 경우에 따라서는 인체 모습을 그리고 혈도 표시를 하는 등 대단히 힘들게 작업하고 있다. 화 노인만큼이나 나이를 먹은 그의 부인은 식사라도 하면서 하라고 왔다가 화 노인이 번역하고 있는 책의 겉장을 힐끗 보고는 볼멘소리를 한다.

“어휴 저 책은 절대 아무에게도 보여 주면 안 된다고 펄펄 뛰더니만, 무슨 바람이 부셨수?”

그 말을 화 노인은 딱딱하게 받아넘긴다.

“지금도 아무도 보면 안 돼!”

“그럼 왜 번역하는 거유?”

화 노인은 조심스레 혈도 한 부위에 점을 찍으며 담담히 말한다.

“봐도 되는…………… 아니 봐야만 하는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군데요?”

“몰라도 돼!”

화 노인은 딱 잘라 말하고는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의 부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방에서 나간다. 화 노인이 뒤적이고 있는 고서의 겉표지에는 현대 중국인도 알아보기 힘든 옛 필체로 ‘천정개혈대법’이라고 적혀 있다.


미국의 한 인디언 보호 지역에서는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거구 의 인디언 주술사 성난큰곰이 몇몇 부족의 원로들과 함께 둘러앉 아 있다. 새해를 맞이하는 인디언 특유의 제례를 막 치른 참이다. 성난큰곰은 부족을 위해 몇 가지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그중 하 나가 호칭 문제다. 콜럼버스가 엄청난 착각으로 그들을 ‘인디언’, 즉 ‘인도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대신 ‘네이티브 어메리칸이 라는 표현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살리려 애쓰고 있다. 다행히 미국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점점 동조해 줘서. 언젠가는 동족이 이 기이한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제례를 마치고 친교를 나누는 의미에서 기다란 담뱃대를 돌려 가며 연기를 마신 성난큰곰은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간 다. 고색창연한 천막들 사이에 위치한 현대식 건물인 마을 회관으로 향한다. 부족은 전통 생활 습관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지만 문 명의 이기를 거부할 만큼 고집스럽지는 않다. 문명의 이로움은 잘 알지만, 지나친 편리함은 전통의 지혜를 잃게 하기에 조화를 이루 며 천천히 받아들이도록 조심할 뿐이다. 그리고 네이티브 어메리 칸 성난큰곰은 그곳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친구들 에게 축전을 보낸다. 물론 크리스마스 축하가 아니라 그들 나름의 달력에 의거한, 다가오는 새해를 잘 맞이할 것과 새로운 지혜의 길을 찾아 나가기를 바란다는 의미의 축전이다. 방금 수백, 수천 1년 전부터 내려오던 의식을 끝냈고, 또 그러한 의미의 내용을 보 낸 것이지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현대 문명의 기술도 잘 사용하 면 몹시 편리하다. 그런 생각이 든 성난큰곰은 ‘모든 것을 조화롭 게 하는 지혜가 항상 함께하기를’이라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물론 모든 사람이 크리스마스를 즐겁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에서는 마녀 협회 회원이기도 한 바이올렛이 영국 심령 연구 협회의 회원인 월터 보울의 전화를 받고 짜증을 내고 있다. 

“이것 보세요. 미스터 보울, 옛 친구를 잊지 않고 축하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하필 ‘메리 크리스마스’라뇨 제가 어디 소속인지 잊으셨나요? 저는 그래도 마녀라고요. 크리스마스 같은 건 악마나 물어 가라지.”

딱 부러진 영국식 악센트로 히스테리를 부리던 바이올렛은 조 금 미안했는지 다시 덧붙여 말한다.

“아, 물론 고맙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다만 다음부터는 함 부로 일상적인 관용구를 의미 없이 남발하지 마시고, 상대의 입장 도 조금은 생각해 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그러면 더 고맙지 않을 까요? 아, 아뇨. 사과하실 것까진 없고요. 어쨌든 감사하고, 미스터 보울도 잘 지내시기를 바라요. 그리고・・・・・・”

바이올렛은 조금 주저하면서 말한다.

“그・・・・・・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제 낡아 빠진 팩시밀리가 완전 히 고장 나서요! 그리고………… 전화를 직접 거는 건 아무래도 좀 그 렇고 편지나 카드는 늦을 것 같고 해서・・・・・・ 아, 그래요. 한국으로 요. 다 아시잖아요. 제 대신 크리스마스카드라도 한 장 보내 주시 면・・・・・・・ 네? 마녀 협회원이 무슨 크리스마스카드냐구요? 미스터 보울.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잖아요. 바보 같은 크리스마스 놀이 일지라도 제가 싫어하는 거지. 그들이 싫어할 건 아니잖아요. 특 히 그, 그ᆞᆞᆞᆞᆞᆞ 준・・・・・・ 아, 혹시라도 모르니 이름은 말 안 할게요. 그 애는 아이이니・・・・・・ 아. 그러니 크리스마스 축하라고 써도 된 다고요! 이건 경우가 다른 거잖아요. 제가 변덕스럽다고요? 그게 아니죠. 우리 한번 논리적으로 따져 볼까요? 이건 분명 경우가 다른….”

바이올렛의 통화는 꼬리를 물고 뱅뱅 돈다. 아마도 쉽게 끊어지 지는 않을 것 같다.

스웨덴의 한 유서 깊은 총기 회사에서는 저녁 시간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크리스마스에 회사행은 흔치 않은 일이지만, 오랜 연륜을 지닌 회사라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대를 이어 업을 이어 온 사람들도 흔하고 삼 대에 걸쳐 같은 일을 한 사람들도 있 어서 직원 모두가 마치 가족 같다. 무기를 만든다고 하지만 오히 려 큰돈이 되는 군용 무기 분야는 이미 가졌던 기득권조차 버리며 전격 폐업했다. 회사 규모를 축소하고 사냥이나 스포츠용 총기만 만드는 작은 회사가 됐고, 그에 찬성하는 직원들만 남았기에 더 가족처럼 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회사는 특이하다. 군용 분 야를 포기하면서도 연구 개발비 비중이 굉장하며, 아주 특출난 괴 짜들이 연구소에 포진하고 있다. 그들을 일컬어 농담 삼아 ‘사장 의 사람들’이라고 하는데, 보통 회사에서는 절대 일할 수 없을 것 같은 기이한 사람들이 많다. 물론 연구 개발 내용은 그야말로 비 밀 중의 비밀이며 SF급이라는 소문까지 떠돈다. 그러나 그들도 크 리스마스 파티는 함께 한다. 모두가 가족 같기에.

작달막한 키에 퉁퉁한 배, 둥근 금속제 안경을 코에 걸친 초로 의 공장장이 은발 카이젤 콧수염에 묻은 와인 방울을 털며 와인 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우리의 친애하는 흡혈귀 사장님을 위해 건배!”

물론 자리에 따라서는 ‘흡혈귀’라는 별명이 심각하게 받아들 여질 수도 있지만, 평소 유머 감각이 뛰어난 공장장의 말에 모두 가 웃음을 터뜨린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회사의 사장은 그야말 로 흡혈귀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흡혈귀를 닮은 외모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투도 딱딱하고 지나칠 정도로 근엄하 며, 대학 강의도 나가는데 그 과목도 ‘흡혈귀학’이다. 사장은 그렇 게 사교성 적은 사람이지만 이 유머러스한 공장장이 중간에서 이 렇게 완충을 해 주기에 가족 같은 회사 분위기를 망가뜨리지 않는 것이리라. 모두 웃으며 따라서 건배를 하는데, 정작 주인공인 ‘흡 혈귀’ 사장은 어느새 사라졌는지 자리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공장장이 다시 조크를 던진다.

“아. 거 조금만 더 참으랬는데, 피가 모자라 못 견디셨나 봅니다!”

“박쥐로 변해서 날아갔나보네요!”

“돌아오면 보드카를 병째 마시게 합시다!”

누군가가 응수하자 파티장은 다시 웃음바다가 된다.

정작 당사자인 ‘흡혈귀’ 사장, 이반 교수는 문 너머로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좋은 직원들이고,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이 절로 느껴진다. 물론 파티를 아주 빠져나갈 생각은 아니다. 다만 할 일이 있다. 이반 교수는 무 서워 보이지만 무섭지 않은 사람이며, 쓸쓸해 보이지만 쏠쏠하지 않은 사람이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그래서 자신보다 더욱 쓸쓸 하고 외로울 친구들을 잊지 않는다. 잊지 않으려 애쓴다.

불 꺼진 사무실 문을 열고, 전등 스위치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어 둠 속에서 팩스기 앞으로 다가간다. 이반 교수는 어둠을 미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요한 어둠을 편안히 느낀다. 이미 어느새 도착 해 있는 팩스 한 장이 그를 반긴다. 영국에서 온 윌리엄스 신부의 팩스고 어젯밤에 온 것이다. 성공회는 온건 칼뱅파 신교에 속하지 만 미사 및 성사 집전을 중시하는 예전적(的) 교회다. 당연히 윌리엄스 신부도 성사 집행에 바쁠 것이다. 그래서 전날 자신에 게 메시지를 보내면서 오늘, 크리스마스 당일에 벗들에게 안부라 도 전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 ‘말재주가 없어서……………라 는 서툰 핑계를 덧붙여서 ‘흡혈귀’라는 별명을 지닌 이반 교수의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돈다. 외모가 차갑다고 행 복의 따스함을 모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반 교수는 곧이어 책 상 모퉁이에 서서 몸을 기울인다. 처음에는 메모지와 만년필을 집 었다가 곧 생각을 바꾸어 도로 내려놓는다. 사무실 등도 켜고, 평 소에 잘 쓰지 않는 안경을 책상 서랍에서 꺼내어 콧등에 얹어 놓 으며 정식으로 책상에 자세를 잡아 앉는다. 그리고 깔끔한 편지지 와 고풍스러운 커다란 깃털 펜과 잉크를 꺼내 또박또박, 고전적이 고 멋들어진 캘리그래피 서체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간략하게 적을 생각이었으나 이런저런 상념이 떠올라 점점 편지 는 길어져 간다. 시간이 길어지지만 최대한 성의를 다하고 싶어진 다. 점점, 최소한 그들에게 메시지라도 보내고 난 후가 아니면, 이 런 행복을 만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변명일지라도, 생색일지라 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최소한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하기를…


“검사님, 전화입니다.”

“없다 그러세요.”

“검사님 친한 선배분이신데요…………..”

사무장의 말을 듣고 백호는 아주 잠깐,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말없이 수화기를 받아 든다. 통화는 일방적이다. 네, 네, 알았어요. 예. 올해는 선이라도 봐야지. 참한 아가씨가 있다는데. 아뇨 됐어 요. 너도 빨리 결혼해야지. 직위가 그 정도 됐는데 왜…………. 저, 바 쁜 일이 있어서 죄송해요.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달칵.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백호는 입에 문 빈 담배를 빙글 돌려 본다. 오래 물고 있어서인지 입술에 닿는 필터의 느낌이 눅눅하 다. 자신을 위해서 그러시는 마음은 알겠지만 영 받아들일 수 없 는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눅눅하다. 담배를 휴지통에 던져 넣고 새로 담배를 꺼내 무는데 사무장이 말한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 조사 결과가…………”

백호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사무장의 업무 진행을 막는다.

“오늘 크리스마스잖습니까.”

“아, 예. 그래도 이 조사 결과는 보시는 편이…………….”

“내일 새벽에 볼게요. 다들 메리 크리스마스”

사무장이 더 토 달기 전에 백호는 맨담배를 빙글 돌리며 자리에 서 일어선다. 휴지통에 던져진 담배 무더기가 힐끗 보인다. 피우 지는 않지만, 백호는 어지간한 애연가들만큼이나 담배를 소모한 다. 불도 붙여 보지 않고 버려진 새 담배들, 꽁초가 아님에도 꽁초 가 돼 버린 담배. 운명과 마음의 올가미에 엮여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담배에서 느껴져 몹시 싫어졌다. 백호는 더 이상 입도 열지 않고 문을 밀쳐 다짜고짜로 검사실을 나섰다. 크리스마스임에도 검사실에 남아 밀린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신경 쓰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미안하고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 런 식으로 나가 버리면 윗사람이라고 제멋대로라고 뒷담화깨나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감수한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이미 바깥은 어둑어둑해졌다. 운전하며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 시. IMF로 인해 경기가 바닥이어서인지, 크리스마스인데도 백호 에게는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축 처진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마 음이 그래서일까. 꽃이라도 준비해 볼까 싶어 꽃집 앞에 차를 잠 시 세우려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먹을 게 나을지도……’

그게 실용적인 생각일 것이다. 박 신부, 현암, 준후……………. 다른 건 몰라도 꽃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허나 사실은 깊은 곳 에 숨어 있는 마음 한 조각을 들키지 않으려는 데서 나온 꼼수인 지도 모른다. 꽃을 반기는 건 여성일 경우가 많으니까. 그들 중 홍 일점인 승희에게 뭔가 선물을 보내고픈, 꼭꼭 숨은 속마음을 들키 기 싫어서인 걸까……………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자’

입에 물고 있는 담배가 은근히 껄끄럽다. 백호는 차를 사고서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차내의 라이터를 눌렀다. 사실 얼마 전부터 백호는 담배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었다. 홍수 사건이 끝난 뒤처리 과정. 그들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병원으로 옮긴 직후 백호는 처음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습관은 무섭다. 불을 붙이지 않은 채 담배를 물고 다니는 습관 때문에 아직도 흡 연 자체는 익숙하지 않다. 남의 눈에는 거의 트레이드마크로 박혔 을 습관을 바꾸어 심적인 변화가 있음을 들키는 것도 싫었다. 하 지만 차 안에서라면야…………….

차의 라이터가 딸깍 소리를 내며 밀려 나왔다. 백호는 천천히 라이터를 집어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란 참 신 기하다. 생전 처음 빨아들일 때는 거의 마약에 준할 정도로 충격 적이지만 그 이후로는 그렇지 않다. 몇 년 만에 다시 피워도 눈앞 이 살짝 핑 돌며 나른해질 뿐 운전을 못 할 상태가 되진 않는다. 약간 빙글빙글 도는 듯한 그 허무감이 마음으로 번져 간다. 느낌 이 싫지 않다. 이러다가는 다시 골초가 돼 버릴지도..

살짝 열린 차창 밖은 온통 짙은 코발트빛이다. 창 너머로 비릿 한바다 냄새가 맏아진다. 거의 도착한 것 같다. 인적 드문 조그마 한 포구에서도 한참 떨어진 질척한 해변, 그중에서도 방치돼 버려 진지 오래된 낡은 폐선이 백호의 목적지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생활하기 위해서 그 들이 택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차를 세우고 준비해 온 크리 스마스 파티용 음식이 담긴 꾸러미를 든 채 차 문을 잠그고 있으 려니 저만치에서 또 다른 헤드라이트 불빛이 다가온다. 잠시 자리 에 서서 누군가 하고 쳐다봤더니 그 차는 백호를 알아본 듯 부근 에서 잠시 멈춘다. 차창이 내려오고 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운전하던 사람이 백호를 향해 손을 흔든다.

‘연희 씨네’

백호도 살짝 웃으며 마주 웃어 준다. 연희는 백호의 차 바로 옆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린다. 어둠 속에서도 훤칠한 키와 긴 머리 가 눈에 확 들어온다.

“안녕하셨어요.”

“덕분에요. 안녕하셨어요.”

“네.”

“같이 가시죠.”

“네, 네.”

연희는 차에서 나름대로 준비한 선물 같은 것을 한 꾸러미 꺼낸 다. 백호가 들어 주겠다고 하자 연희는 고개를 숙여 보이며 고맙 다고 한다. 그 미소도 신선하다. 그렇지만 백호는 연희를 오래 쳐 다보지 않는다.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연희는 우정 외의 감정적 접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인상이다. 리와의 관계 에 대해 알고 있어서일까? 또는 그와의 사랑이 연희를 꽉 짜여진, 일종의 완성된 존재로 만들어서일까. 백호는 연희의 짐까지 양손 에 들고 연희보다 몇 발짝 앞서 폐선 쪽으로 걸어갔다.

저녁 시간의 해변은 모래와 흙이 반반 섞여 걷기에 몹시 불편한 길이다. 발이 푹푹 빠지는 데다 거리도 꽤 된다. 네온사인 하나 없 이 달빛에만 의존하며 폐선 쪽으로 걷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비틀거리고, 혹은 발이 빠져 허우적대며, 그러면서도 서로 웃고 손을 내밀어 주며 걸어간다. 그러다가 연희가 먼저 반색하며 말을 건다.

“꽤 오래간만에 보게 되는 거네요. 참 반가울 것 같아요.”

연희가 말하자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죠”

“그런데 안색이 어두우시네요?”

백호는 아니라고 하려다가 순간 마음을 바꿔 진실을 말했다. 

“그렇게 표가 나나요? 뭐…… 그냥… 그들에게 죄진 것도 같 고, 신세진 것도 같고…………. 다들 처지가 너무 딱하다 싶어서요.” 

“어머, 그런 생각으로 오신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데요.”

“네?”

‘저 사람들 백호 씨 생각처럼 침침하게 있지 않을 거라고요. 분명해요.”

“지금 저 사람들 상황 안 좋잖습니까? 생존조차 숨겨야 하는 처지인데.”

“그래도 그렇지 않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내기할까요?”

“글쎄요. 연희 씨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잘 압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아뇨 백호 씨도 그렇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저 사람들 그렇게 특출난 사람이라 생각하면 안 될 지도요. 물론 신기한 힘을 가 지고 있지만, 더 이상 그런 힘에 억눌릴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아무 리 힘들어도 의기소침하고 꺾일 사람들 아니에요. 오히려 그러니 까 더욱더 강하게, 아무리 힘들어도 밝게 살려고 노력하겠죠.” 

“글쎄요. 연희 씨는 사실 언어 능력도 있으시고…………… 나름대로 특별하니까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좀……” 

“그러니까 내기하자니까요.”

그러면서 연희가 지은 묘한 미소에 백호는 눈이 부셨다. 마음속 의 음울함도 저절로 씻겨 나가는 미소였다.

“허허, 정말 못 당하겠군요. 연희 씨 안에는 천사가 사는 것 같아요”

“그런 거 없어요. 그렇다면 백호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백호는 피식 웃었다.

“저도 그런 거 없습니다. 있다면 내 속에는 악마 같은 거나 들어있겠죠.”

“그럴 리가요.”

재미없는 농담에 연희가 웃어 주었고, 백호도 이번에는 구김 없 이 웃었다.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정말 저번에는 아찔했어요. 저 사람들 정말로 죽을 뻔 한 셈인데, 트라우마라도 갖고 있지 않을지.”

“글쎄요. 잘은 몰라도 안 그럴걸요. 저 같은 사람도 죽음 같은 것. 별로 무섭지 않아요. 물론 죽으면 서연희라는 사람은 없어지겠지만 그래도 내 영혼은 어딘가 존재할 거고요. 그렇게 생각하 면・・・・・・ 뭐 꼭 죽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짓눌리고 싶지도 않거든요. 사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살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 까요? 별것 아닌 저도 이렇게 변했는데, 그걸 가르쳐 준 사람들이 그럴 리 없어요.”

“그럴까요?”

“네. 장담한다니까요. 그리고……”

연희는 그녀의 그 큰 눈에 처연한 빛을 띠며 어두운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죽어서 더 빛을 낸 사람들도 많잖아요. 죽음은 무서운 게 아니라……………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슬픔,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 래야 삶이 충실해질 것 같아요. 그게 며칠이건 몇 년이건, 영원이 던 간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백호는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슬며시 긍정해 버렸다. 서연희라 는 사람은 이미 보통 사람들과는 한 단계 높은 다른 존재가 돼 버 린 것 같다. 자신이 속단한 애정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삶과 죽음 에 대한 나름의 가치관을 꽉 짜 놓은 것 같다. 그녀에게서 풍겨 나 오는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도 그 때문이었을까? 백호는 연희의 생 각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을 믿고 받아들여 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백호의 속마 음을 눈치라도 챘는지, 연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웃자고요.” 

“예. 하하.”

몇 마디 말하는 사이에 백호와 연희는 폐선 앞에 다다랐다. 폐 선은 글자 그대로 방치된 상태. 백호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폐선이 갑자기 철거되지 않도록 행정적 절차에 구멍을 낸 것, 그리고 그나마 최소한의 연락망을 유지하기 위해 폐선까지 보이 지 않게 팩스용 전화선 케이블을 한 가닥 걸어 준 것뿐이다. 숨 막 힐 듯한 도피.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이것보다 조용한 휴가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저들에게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에서 속삭이는 듯한 파도 소리만 들려왔 다. 폐선의 녹슨 계단을 올라 선실 쪽 낡은 출입문 앞에 서자 안에 서부터 은은한 소리가 울려 나왔다. 파도 소리와 어울려 녹슨 철 문 너머로 울려오는 소리. 그건 분명히 웃음소리였다. 박 신부의 나직하면서도 온화한 웃음소리도 있고, 준후인지 승희인지 구별 하기 어려운 다소 높은 톤의 깔깔거리는 소리도 들리고 아주 가 끔씩 현암의 호탕한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은 백호는 문을 노크하기에 앞서 연희에게 슬며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졌네요.”

“당연하죠. 자신 있었다고요.”

“우리가 뭘 걸었죠?”

“이긴 걸로 충분해요. 그리고 백호 씨도 좀 웃으라고요.”

“네?”

“억지로 웃는 것 같아서요. 오늘 크리스마스잖아요? 기분 좀….”

“아직도요? 전 그래도 열심히………….”

“생각 좀 그만하세요. 적어도 오늘만큼은.”

연희가 웃으며 말하자 조금 생각하던 백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냥. 그냥 이렇게 비우면 되는 건데, 알고 보니 이렇게 쉬운 건데.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래 보죠.”

이번에는 백호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연희도 고개를 끄덕 인다. 백호는 폐선의 낡은 철문을 다소 힘차게 두드리며 말했다. “백홉니다.”

그러자 곧 문 건너편 안쪽에서 준후의 발소리가 타박타박 들리 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오셨어요? 와, 연희 누나도!”

그러면서 조금도 스스럼없이 철문은 활짝 열린다. 자물쇠를 푸 는 기조차 없다. 전 세계의 수사 기관이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문하나 잠가 놓지 않는 사람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준후는 두 사람을 맞아들이며 재잘재잘 떠든다.

“앗, 맛있는 거 사 오셨나 보네? 그리고 오늘 참 팩스가 많이 왔어요. 그 이야기하던 중인데요…………….”

준후의 말을 들으며 백호와 연희는 어느새 안에 들어선 상태다. 잠시 후 녹슨 철문은 닫혔다. 폐선 안에서 울려 나오는 대화와 웃 음소리에는 이제 백호와 연회의 것도 섞여 있을 것이다. 코발트색 으로 파도치는 짙고 은은한 파도 소리에 즐거움을 가득 담은 작 게 스며 나온 다정한 말소리들이 스며들 듯 녹아간다. 어두웠던 하늘에서도 어느새 많은 별이 촘촘하게 피어오른다. 아름다운 크 리스마스 날 밤이다.

퇴마록 외전 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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