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외전 3 : 인간 장준후의 불완전한 계획 [징벌자와 구원자 탄생 2시간 후] : 1화 – 분노
분노
“내 말 들어, 무조건. 그러지 않으면 모두 죽는 거야.”
준후의 입에서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 새어 나왔다. 그의 앞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퇴마사들의 편 에 섰던 사람들이었고,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도 있었다. 아직 싸 움이 끝나지 않았으나 지금은 모두 손을 놓고 충격에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거의 영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 중 상당수는 준후가 안고 온 두 아기를 보고 사태의 실상을 짐작했다. 결국 퇴 마사들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 았고, 수는 적지만 퇴마사들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감격하며 환호 했다.
그러나 준후의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준후는 끝없는 분 노에 마음이 전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징벌자와 구원자, 두 쌍둥이 아기를 구해 낸 직후까지만 해도 준 후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헤어졌던 현암과 승희, 그리고 박 신부에 이르기까지 그래도 퇴마사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도중에 만난 해밀턴이 달려가 준 것도 희망적이었다. 무엇 보다도 세상을 구원했다는 기쁨이 준후의 희망을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군중에게 돌아와 싸움을 중단시키고 아기들을 맡긴 이 후 급히 달려간 곳에서 준후는 참담한 현실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준후는 모든 힘을 다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고, 먼저 박 신부를 찾았다. 현암과 승희가 간 곳보다는 이편이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실 준후는 아직 연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서도 다 벗어나 지 못한 상태였다. 백호도 그렇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래도 그들에 대한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든 봉합돼 가는 중이었고, 준후에게는 솔직히 그들보다도 박 신부와 현암, 승희가 훨씬 중요 했다. 절친한 동료나 선후배를 잃는 것보다 친부모나 형제를 잃는 게 더 힘든 것과 같은 이유였다. 심지어 퇴마사들은 준후에게 혈 육 그 이상이었다. 스승이자 친구이며 동료이자 전우였으니 어쩌 면 당연한 것이었다.
마침내 박 신부를 찾았을 때, 준후는 온몸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박 신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엄청난 숫자의 기이한 시체, 그것도 일그러진 괴 물의 모습을 한 시체들의 잔해가 쌓여 있었다. 잔해의 대부분은 새카맣게 타 버려서 더더욱 끔찍했다. 그 수많은 괴물의 시체 더 미는 둥근 원 형태로 수백 구나 쌓여 있어 더 기이한 느낌을 주었 지만, 준후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먼저 도착한 해 밀턴이 침울한 표정으로 박 신부를 내려다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 었기 때문이다.
“…………신부님은요?”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꺼냈으나 목소리는 떨리고 벌써부터 울음이 섞여 나왔다. 그러나 해밀턴은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준후는 울음을 터뜨리며 박 신부에게 달려갔다. 준후가 가까이 다가가자 박 신부의 모습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곧 허물어졌다. 마 치 준후가 온 것을 보고 안심한 듯했다. 자세히 살펴보자 박 신부 의 온몸은 재로 변해 있었다.
그 순간 성경에서 롯(아브라함의 조카)의 아내들이 소금 기둥 으로 변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그것은 천벌을 받아 일어난 일이지 만, 박 신부의 경우에는 달랐다. 박 신부는 모든 힘을 남김없이 써 서 앉은 자세 그대로 타 버렸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흩어진 박 신부의 재는 바람에 날려 곧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해밀턴 은 혼자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했더라도 이렇게 막지는 못했을 텐데……”
그 말은 맞았다. 해밀턴이 아무리 강한 능력을 지녔고, 불사의 존재라고 해도 몸은 하나였다. 수백의 괴물 무리를 혼자서 막아 낼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해냈다. 유언도 남기지 못했 지만, 세상의 구원, 그리고 준후의 뒤를 지켜 주고자 몸이 재가 될 정도로 노력한 것이다.
그럼에도 준후는 그것이 하나도 위안되지 않았다. 준후는 오열 했다. 준후에게 박 신부는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러나 이 제 박 신부는 세상에 없었다. 장사를 지낼 시신조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준후의 분노가 시작됐다.
‘왜? 어째서 신부님 같은 분이 이렇게…!’
울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아직 현암과 승희의 안위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준후는 곧 해밀턴과 함께 현암과 승희를 찾아 나섰다. 후는 이전에 현암이 아녜스 수녀 일당을 막으려 나섰던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수색을 시작하자 머지않아 결 과를 보게 됐다.
현암과 승희가 있던 곳에서는 어떤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다 만 여러 종류의 화기나 폭약까지 사용한 듯 주변은 황폐해져 있었 다. 불과 냉기 주술 등의 흔적도 여러 개 보였다. 아마 아녜스 수 녀의 짓이었을 것이다. 여러 곳에 혈혼도 보였다.
그러나 시체는 없었다.
그래서 준후도 희망을 가졌다. 박 신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았다. 일단 아녜스 수녀 일당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그들은 후퇴한 것이 분명했다. 현암의 엄청난 공력과 승희의 초능력으로 그들을 막아 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시체가 없다는 점은 이상했다. 준후는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현암과 승희가 의도적으로 살 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었다. 현암과 승희가 사람을 해치는 길을 택했다면, 분명 시체가 많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암과 승희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반대로 현암과 승희가 패배했 다면, 아녜스 수녀는 왜 더 추적하지 않고 후퇴한 걸까? 두 경우 다 이해되지 않았다.
‘아녜스 수녀에게 잡혀가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좋아. 그 정도 는 두렵지 않아!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구해 낼 수…….. 그런 준후의 마음이 무색하게 해밀턴이 뭔가를 발견했다.
“준후야, 이건 혹시…….”
해밀턴이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렵게 말했다. 그 옆에는 상당 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준후가 놀라 달려가 보니 상상 도 못 한 것이 발견됐다.
손목까지만 남은 남자의 손과 그 손을 꽉 잡고 있는 여자의 작 은 손이었다. 비록 손밖에는 남지 않았지만, 준후는 그 손의 주인 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를 수 없었다.
바로 현암의 오른손과 승희의 왼손이었다. 항상 굳건했으며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을 것만 같던 듬직한 손. 그리고 그 손으로 감 싸 쥔 덕분에 남은 승희의 손…………….. 해밀턴도 그것이 그 둘의 손이 라고 확신했다. 이런 처절한 싸움판에서 손을 꼭 잡고 함께 최후 를 맞이했다는 것은…….
준후는 차마 두 사람의 손을 건드리지도 못한 채 그 앞에 쓰러 져서 울음을 터뜨렸다. 목이 메어서 짐승과 같은 소리가 터져 나 왔다. 해밀턴은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는 둘이 함께했다고, 그렇게 나마 준후를 위로해 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워낙 비통해하는 준 후 앞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현암과 승희는 아마도 강력한 폭발물에 당한 것 같았다. 그 옆 에 뚫려 있는 작은 분화구처럼 생긴 구멍은 상당한 구경의 포탄이 나 폭발물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아직도 화약 냄새가 주변에 남 아 있는 걸 보아 주술이나 공력 등은 아닌 게 분명했다.
현암의 공력이 아무리 막강하고 승희에게 초능력이 있다고 해 도 결국 끝이 있었다. 현암은 거의 전신에 공력이 유통되는 상태 라서, 설령 총 정도는 맞더라도 경상으로 버텨 낼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러나 그것도 잘해야 몇 번뿐, 수없이 쏟아지는 현대 화기 앞 에서 공력도 고갈될 수밖에 없다.
특히 현암은 승희를 보호하기 위해 더더욱 큰 공력도 썼을 것이 다. 그러다가 결국은 반칙이다 싶게 쏟아지는 포탄의 공격을 받아 몸 전체가 비산됐을 것이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공력이 남았던 현암의 오른손과 그 손을 맞잡고 있었던 승희의 왼손만이 남은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여기 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해밀턴이 탄식했다. 해밀턴이 여기 있었다면 그의 불사적인 특 성 때문에 화기나 폭발물은 작동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해밀턴은 큰 집단 하나를 설득하는 큰일을 해냈다. 퇴마사들이 모두 의심받 고 있었기에 그때는 해밀턴이 나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준후의 분노는 더욱더 커져 갔다. 박 신부만 아니라 현암과 승 희까지 이렇게 희생됐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단순한 상실의 분노가 아니라 세상의 질서가 이런 식으로밖에 유지될 수 없는가 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여기까지는 준후도 어떻게든 분노를 억누르려 했다. 준후는 항 상 선을 추구해 올곧은 행동을 하며, 퇴마사들이 알려 주고 보여 준 대로 행동하려 애썼다. 헌신과 희생의 가치도 알았다. 박 신부 와 현암, 승희가 희생됐지만, 그것은 그들 스스로가 자원한 일이 었다. 굳이 다른 자들에게 분노를 돌리고, 모든 인간에게로 분노 를 돌릴 일은 아니라고 준후는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그러나 전혀 다른 곳에서 준후의 분노가 폭발했다. 바로 준호와 아라 때문이었다.
준호와 아라는 가장 위협적이고 막강한 존재였던 아기들의 영 혼을 달래는 큰 역할을 했다. 심지어 자신들을 인질로 삼게해 가장 큰 추적자 무리를 설득했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터졌다. 용화교의 무색 화상이 자신의 목숨 을 걸고 한 약속을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깨 버린 것이다. 그 결과 더 이상 참지 못한 한국 도인들과 다른 무리가 큰 싸움을 벌이게 됐다.
준후가 억지로 슬픔을 억누르면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준호와 아라가 한국 도인들에게 구조된 상태였다. 그러나 큰 피해 가 있었다.
아기들의 영혼은 인간들이 약속을 어긴 사실에 분노했다. 다행 히 준호와 아라를 죽이지는 않았지만, 아기들은 그 대신 대가를 요구했다. 이때 무리를 이루었던 아기들의 영혼은 바이올렛이 산 통 때문에 조종 능력을 상실한 상태라 명령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기들의 영혼은 서로 의견이 갈려 다시 무리로 행동하 기는 힘들어 보였다. 자신들의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분노한 영혼들이 많았고, 그들은 인간들이 뭐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아기들의 영혼은 결국 준호와 아라에게 눈 하나씩을 내놓으라 고 요구했다. 이때 준호가 나섰다.
“둘에게 하나씩 가져갈 것 뭐 있어? 내 두 눈을 다 가져가!”
아라는 몹시 놀라며 말렸다. 눈 하나씩이면 그래도 볼 수 있지 만, 눈을 두 쪽 다 잃으면 암흑에 빠지게 되니까. 하지만 준호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 정도는 돼야 너희도 만족할 거잖아! 내가 대신 대가를 치르겠어! 그리고 사과하겠어! 사부도 다른 분들도 모두 목숨 걸고 나 섰는데, 이까짓 두 눈이 뭔 소용이야?”
준호가 나선 이유는 진심으로 대가를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배신으로 인해 아기들의 영혼이 다시 나서는 것 이 두렵기도 했다.
준호의 도박은 성공했다. 준호는 자신의 희생으로 아기들의 영 혼이 인간을 다시 적대시하는 것을 막았으며, 아라를 구하는 일도 성공했다. 준호의 두 눈은 신비한 능력으로 피를 흘리지는 않았으 나 안구 자체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것처럼 극심한 고통은 없었지만 충격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준호는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참아 냈다. 사건 이 일단락된 후 의학 지식이 있는 자들이 살펴보니, 준호는 안구 만이 아니라 시신경 체계까지 모조리 없어져서 다시 시력을 되찾 을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그야말로 큰 희생이었다. 그리고 그 덕 분에 아기들의 영혼은 다시 나서지 않게 됐다. 설령 의견 충돌이 있어서 비교적 소수의 무리만 다시 행동하게 됐다고 해도 이들을 막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많은 아기의 영혼은 성불해 버리 기도 했다.
준호의 희생은 영웅적이었지만, 이런 내막을 전혀 몰랐던 준후 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실 자체만으로는 박 신부와 현암, 승희의 죽음만큼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준후는 이 일 때문에 억지로 눌러 참던 마음이 터진 것이다.
아직 어린 준호와 아라까지도 희생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배신 감이 몰아쳤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일이야말로 모두를 죽게 한 원 인이라 생각한 것이다. 준후는 원래부터 천재 소리를 들을 만큼 영특했기에 몇 가지 정황과 이야기만 듣고도 모든 일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때 아기들의 영혼과 상대할 능력자 무리 중에는 퇴마사들과 크고 작은 연을 맺은 한국 도인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준호와 아라에게 거의 완전히 납득했다. 따라서 무색이 나서지만 않았다 면 아녜스 수녀 일당을 제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도인들과 용화교, 그리고 칼키파, 거기에 수아가 아녜스 수녀를 막을 수 있었다면 현암과 승희가 희생되는 일은 없었다. 나아가서는 현암과 승희도 박 신부를 도왔을 테니 박 신부가 혼 자 버티다가 희생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 른 능력자들도 박 신부와 현암, 승희에게 힘을 보태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퇴마사들의 편을 들어 다른 무리와 싸운 것만 보아도 확실했다. 이들도 결코 약한 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의 조력만 있었더라도 퇴 마사들의 능력으로 최소한 죽음만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한 행동이었다고는 하나, 무색의 행동 으로 능력자 무리는 나뉘어져 서로 싸우느라 시간을 소비했고, 그 결과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 그것도 아이들의 희생을 전제로 한 독선과 배신으로 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준후는 폭발했고, 더 이상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