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0화 – 와불이 일어나면 9 : 순리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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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1권 10화 – 와불이 일어나면 9 : 순리대로


순리대로

박 신부는 승희와 함께 비석의 내용을 탁본한 종이를 가지고 운주사를 향하여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다. 백호에게 전화를 걸 어서 와불을 세우는 것을 중지시키려고 할 생각이었으나 안타깝 게도 자리에 없었다. 이곳에서 운주사까지는 고개를 두 개만 넘 어가면 되니 대략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박신부 옆에서는 승희가 계속해서 카폰으로 백호를 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호는 이런 중요한 순간에 어디로 갔는지 행방 을 알 수가 없었고, 승희는 전화를 받은 요원에게 공연히 신경질

을 부려 댔다.

“승희야, 그러지 마라.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는 현암 군이 어 떻게 해 주겠지.”

“예, 어서 빨리 가요. 공사 현장까지 곧바로 올라가죠.”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커브 길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고 핸들을 꺾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도 승희는 계속 백 호를 바꿔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승희와 박 신부 두 사람의 이마에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하하하. 아무 문제 없군요. 안 그래요?”

임악 거사는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으면서 폭발물 처리 기사를 바라보았다. 폭발물 처리 기사는 노련한 사람인 듯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시험 삼아 커다란 석재 두 개를 도폭선*이 라고 하는 끈 모양의 화약으로 날카롭게 반으로 절단해 보였다. 혹시나 와불이 손상을 입을 것을 대비하여 다른 석재 두 개로 시 험을 한 것인데, 결과가 만족스러웠던지 씩 웃었다. 준후도 고개 를 끄덕였다.


* 주로 comp-C 계열의 폭약을 도화선 주위에 말아 끈과 같이 만든 폭약,


“이 정도라면 와불에 손상을 입지 않고 암반에서 떼어 낼 수 있겠군요.”

폭발물 처리 기사는 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가 와불 주위에 도폭선을 감기 위하여 동산 위쪽으로 올라가는데, 아 래쪽에서 낯익은 여자의 비명 소리가 작지만 또렷하게 들려왔다. “어, 이상하다. 월향 소리인데?”

준후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쪽으로 내려가려 하자 정 선생이 어깨를 잡고는 돌려세웠다.

“준후야, 왜 그러지? 지금 너는 여기 있어야만 해. 그렇지 않니?”

“이상한데요. 현암 형에게 무슨 일이 있나? 그러고 보니 현암 형과 무련 님 둘 다 보이지 않네요. 어떻게 된 거죠?”

정 선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네가 와불이 설 방향과 각도를 알려 줘야 하잖니. 어 떻게 와불을 세워야 진세가 가장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하게 되 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거야 정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아요? 잠깐 내려가 보고 올 게요. 어차피 지금은 화약을 장치하는 중이잖아요?”

정선생이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준후는 영문을 모르 겠다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고는 정 선생의 손을 어깨에서 떼어 내고 아래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갑자기 준후의 머 리에 뭔가가 탁하고 부딪히면서 준후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건 승현이었다. 정 선생은 쓰러진 준후를 쳐다보고 고개를 젓더니 정신을 잃어 늘어진 몸 을 안아들었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번 일은 너무도 중요하단다. 조금이라도 지체되어서는 안 돼.”

“하지만 왜 준후를 그런 식으로…………..”

“너희는 몰라도 된다. 어른들이 하시는 일이니 냉큼 물러나 있거라.”

정선생은 승현에게도 손을 뻗쳤다. 승현이 놀라서 뒤로 몇 걸 음 주춤거리며 물러서는데 뒤에서 단단한 사람의 몸이 느껴졌 다. 임악 거사였다.

“어! 이거………… 왜 이러는 거예요?”

“몇천 년에 걸친 숙원을 드디어 풀 때가 왔다. 하하하.”

임악 거사는 하늘을 보고 껄껄껄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헝겊 인형처럼 발버둥 치는 승현을 잡아 옆구리에 끼었다. 정 선생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준후를 임악 거사에게 넘겨주었고 임악 거 사는 준후의 몸도 반대쪽 옆구리에 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 선생이 말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사람들은 찬성하지 않을지도 모르네. 그러니 잠시 동안, 와불이 일어날 때까지만 적당한 곳에 눈에 띄지 않게 해주게나. 나는 이쪽 일을 계속 진행시키겠네.”

임악 거사가 고개를 끄덕하더니 산자락 뒤쪽의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고, 정 선생은 태연한 얼굴로 와불을 암반에서 떼어 내 기 위해 폭약을 장치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 발파작 업이라 모든 사람들은 운주사 경내에 내려가 쉬고 있었기에 그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검을 뽑아 들고 빈틈없는 자세로 서 있기는 했지만 무련은 현 암을 구태여 공격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현암도 마찬가지였다. 무련은 현암을 해치겠다기보다는 공사장으로 올라가서 와불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곳에 잡아 두려는 목적인 듯 했다. 현암은 속이 탔지만 그렇다고 무련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까지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현암도 빈틈없는 자 세로 서서 무련에게 말했다.

“무련 님께서는 처음부터 와불이 일어서면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단 말인가요?”

무련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아무도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지난번 은기 어르신을 만났을 때 와불 이야기를 잠깐 들은 바가 있었어요. 그 후에 여기에서 정 선생님과 임악 거사님을 만나게 된 것이고. 그래서……………”

“뭐라고요? 은기옹께서 와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고요? 그렇다면 왜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해 주지 않으셨지요?”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어르신께서 반 대편 산자락의 암굴 속에서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결심이 굳어 졌지요. 정 선생님도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계셨고요.” 

“정 선생도요?”

정선생이 맨 처음에는 임악 거사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가 일이 본궤도에 오르자 임악 거사를 수족처럼 부리는 것을 보고 현암은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처음에 임악 거사가 보였던 허풍 비슷한 것은 일종의 위장이 고 실제로는 정 선생이 몇 배나 단수가 높은 사람이었다는 말인 가?”

현암이 나직하게 말했다.

“정 선생이라는 분은 어떤 내력을 갖고 계십니까?”

무련이 말했다.

“저도 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 선생님이야말로 우도방의 대가이시지요. 한빈 거사님보다 배분*은 낮지만 도방에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려진 인물이십니다. 임악 거사님보다도 몇 배분이 높지요.”

“그런데 왜 처음부터 단순한 풍수가로서만 행세를 하고 본색 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정 선생이라는 분은 처음부터 일이 이 렇게 될 줄 알고 계셨단 말인가요?”

무련이 한숨 비슷하게 불어를 읊더니 현암에게 몇 마디 말을 더 해 주었다.

“지나가 버린 일이니 말씀을 드려도 상관이 없을 것 같군요. 정 선생님은 도방에 계시면서 자신의 풍수학적인 능력과 도가의 능력으로 이 와불이 있는 운주사 일대의 지세를 알아내신 겁니 다. 이미 예전부터 천불천탑의 진세를 복원하고 와불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염두에 두고 계셨지요. 그렇지만 천불천탑의 진세 가 완전히 복원되지 않고서는 와불이 일어서도 별 힘이 없는 것 으로 알고 계셨고, 또한 뭔지 알 수 없는 힘이 천불천탑의 진세 를 찍어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운 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했지요. 정 선생님은 천불천탑 주위를 자 주 보셨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알아내실 수 있었던 겁니다. 아 마도 은기 어르신께서 돌아가셨던 암굴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닌 가 생각이 됩니다만, 아무튼 암굴을 없애 버리신 것만 해도 현암시주께는 크게 감사를 드려야겠지요. 그리고…………….”

“또 뭡니까?”

“천불천탑의 기운을 찍어 누르고 있던 기운이 없어지자 정선 생님은 이때야말로 천불천탑의 진세를 복원할 시기라고 보고 일 부러 가장을 하신 것이지요. 여러분이 알면 반대할 테니까요.” 

“우리가 반대하다니요? 그러니까 정 선생은 일본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자 진세를 복구하려는 생각을 옛날부터 하고 계셨단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요. 정 선생님의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때 고문에 못 이겨 돌아가셨지요. 할아버님도 그러셨고요.”

무련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도력이 높고 수양이 된 사람이더라도 도를 쌓기 전에 받았던 상처까지 아문다는 보장은 없겠지요. 아무튼 저도 그분 의 말씀에 동감을 합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라에 어떤 입장이었던가요? 우리가 일본을 해하고 못살게 군 적이 있었던 가요?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했나요? 현암 시주께서도 이곳 운 주사에 서 있는 불상과 탑 들을 보셨을 테니 거기 서려 있는 한 을 느끼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운주사의 탑과 불상, 이것은 유명 한석공이나 명장의 기술로 세워진 것이 아니죠. 그 일념, 즉 한 과 원수를 갚고자 하는 일념으로, 지금 우리가 밝혀낸 비밀을 이전에 알아냈던 힘없는 민초들이 자신들의 심혈을 바쳐 몇백 년 에 걸쳐서 세워 온 것입니다. 이것을 모른 척하실 수 있습니까? 철기 어르신과 은기 어르신의 죽음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영원히 싸우고 경쟁하고 다투기보다 이렇게 하여 결말을 보는 것이 더 좋지……………”


*무예나 도술의 계열에서 위계를 따지는 말로 항렬(行)이나 촌수(寸)와 다소비슷한 개념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암이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아요! 틀렸소! 절대 그래서는 안 돼요! 우리에게 악 한 짓을 많이 했다고는 해도 그렇게 아무 구분도 없이 모두를 벌 하는 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라는 것을 왜 모르시오? 그러려면 왜 와불을 세우지요? 핵무기를 떨어뜨리고, 나치가 유대인에게 했 던 것처럼 일본인을 말살시켜 버리면 원한이 풀린단 말입니까?” 무련이 웃으며 말했다.

“아미타불, 현암 시주께서는 와불이 일어서면 정말로 일본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믿으시나요?”

현암은 씩씩거리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확신하고 있지는 않소.”

“저희도 그렇답니다. 그렇다면 한번 세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 잖습니까? 와불을 세운다고 해서 일본 전체가 망한다는 것은 저 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일본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억 눌러서 우리나라의 기세가 되살아난다면 그것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말이오. 진세를 모조리 조성하고 와불을 일으켜 세움으로써 정말로 일본이 망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세울 수 없는 것 아니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현암 시주님도 생각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서 그것은 절대 세워 서는 안 된단 말이오!”

현암은 거의 악을 쓰듯이 소리를 치다가 갑자기 ‘엇!’ 하면서 무련 뒤쪽을 쳐다보았다. 무련은 자기도 열이 올랐던 듯 뭐라고 반박을 하려다가 현암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현암이 바람처럼 몸을 굴려서 무련의 몸 아래를 빠져나 갔다. 어린아이처럼 잔꾀를 부린 셈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앗, 이런!”

무련이 당황해 몸을 날려 뛰어올랐으나 이미 현암은 육칠 미 터 이상 앞서서 동산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무련은 새빨개진 얼굴로 칼을 들고 뒤쫓았지만 현암만큼 빠르게 뛸 수는 없었다.


몇 명의 운주사 승려가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나와 보 았다가 칼을 들고 기세등등하게 쫓고 쫓기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어, 어 하며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현암이 뒤쪽의 공사 현장으로 올라서니 그곳에는 이미 인부들 이 낙석에 대비해 모습을 감추었는지 아무도 없었고, 화약 기사 와 정선생 둘이 와불 뒤에서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다. 옆쪽에 는 큼지막한 크레인도 한 대 있었다. 폭파가 되자마자 와불의 움 푹 들어간 면에 감긴 쇠줄로 와불을 세울 수 있도록 준비된 크레 인이었다. 작업은 화약으로 완전히 와불을 떼어 내는 것이 아니 라 한 곳만 충격을 가해 돌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암반에서 떨 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절대…………….”

현암이 소리를 치려고 하는데 뒤쪽에서 쫓아오던 무련이 “조심하세요!” 하는 말과 함께 칼을 휙 하고 휘둘렀다. 현암은 빙글 재주를 넘으면서 날카롭게 스쳐가는 청홍검을 피했지만, 검에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얼마나 서늘했던지 발을 땅에 내딛는 현암 의 등에 식은땀이 솟았다. 무련은 태연한 기세로 검을 휙휙 돌려 서 뒤로 돌리고 한 손으로 합장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말했다. 

“현암 시주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폭발물 처리 기사가 몸을 일으켜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 는지 내려다보려고 하는 것을 정 선생이 윽박질러 일을 계속하 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정 선생이 몸을 돌려 아래로 뛰어 내려왔다.

‘이런!’

현암은 정 선생이 뛰어 내려오는 모습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 랐다. 여태까지 문약한 시골 촌로처럼 보이던 정 선생의 몸 주위 에 엄청난 기운이 일고 있었다.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도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에는 무련, 앞에는 정 선생을 맞 아 움찔거리면서 주변을 살피다가 현암은 화약 기사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절대로 폭발물을 터뜨리면 안 돼요! 상부의 명령이오!”

현암은 일단 거짓말을 했다. 정 선생도 화난 표정을 지으면서 기사를 향해 소리를 쳤다.

“계속 진행하시오! 이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상부의 지시는 내가 받았소!”

“아니오, 폭발시켜서는 안 돼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조금 만. 백호 씨가 온 다음에 …………….”

“백호 씨의 명령은 내가 직접 들은 것이란 말이오. 어서 진행 시켜요!”

정선생이 눈짓을 보내자 무련은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하게 불어를 읊으면서 현암을 향해 청홍검을 찔러 갔다. 기세는 퍽 빨 랐지만 현암을 직접적으로 상하게 할 뜻은 없었던 듯, 청홍검은 몸에서 어느 정도 비껴 지나간 곳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현암은 그냥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보통 방법을 써서는 안 될 거야.’

현암은 찔러 오는 청홍검을 한쪽 옆으로 피하면서 오른손에 들고 있던 월향검을 청홍검의 검날에 탕 하고 부딪쳤다. 칼과 칼 이 부딪히는 순간, 현암은 태극기공 십팔자 구결 중에 ‘나’ 자결을 운용해 월향검과 청홍검의 검신을 통해서 자신의 기공 력을 무련 쪽으로 쏟아 냈다. 밀어내는 힘인 ‘나’ 자 결의 힘을 받 은 무련은 헉하는 소리를 내며 청홍검을 놓쳐 버렸고, 현암은 검 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왼손으로 잡으며 정 선생에게 몸 을 돌렸다.

“중단시키시오. 어서!”

정 선생은 현암이 들고 있는 청홍검을 보고 안색만 굳혔을 뿐 입을 열려 하지 않았고, 현암도 정 선생을 협박할 수도 해칠 수 도 없어서 소리만 치면서 언덕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현암이 뛰어오르자마자 정 선생이 뒤에서 몸을 날려 현암의 허리를 잡 고 엎어뜨려 버렸다. 천만뜻밖이었다. 조그마한 체구로 현암을 덮쳐누르고 있었지만, 무슨 힘을 어떻게 썼는지 몇천 근이나 되 는 것처럼 무거워서 밑에 깔린 현암이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마 치정 선생이 와불로 변한 것 같았다. 정 선생은 밑에 깔린 현암 에게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는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과거 우리가 조상 때부터 겪어 왔던 모든 한과 고통을 잊었단 말인가? 지금 때가 왔는데, 기회가 왔는데 도대체 왜?”

“이런 방법은 안 됩니다. 절대로, 절대로!”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하여 맨땅을 기공력이 도는 오른 손바닥 으로 내리쳤고, 반탄력에 밀려서 현암과 정 선생의 몸은 뒤로 붕 떴다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래에서 두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본 화약 기사는 주춤거리면서 아래쪽을 향해 외쳤다. 화약 기사에게는 둘이 무슨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보였는지 목소리 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도대체 왜들 그러십니까? 설치는 끝났고 발파만 하면 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지요?”

정선생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현암을 내버려 두고 위쪽을 향 하여 달음질쳤다. 현암도 정 선생의 뒤를 쫓았고 무련은 주저앉 아 눈물을 흘리며 “아미타불, 아미타불 · 읊조리기만 했다. 정 선생은 축지법이라도 쓰는지 무서운 속도로 비탈을 올라 가고 있어서 현암이 죽을힘을 다해 뛰었지만 따라잡을 수가 없 었다. 정 선생과 현암이 와불이 있는 위쪽으로 뛰어 올라가는 동 안 가속을 내어 언덕길에서 차 한 대가 미친 듯이 달려와 천불 천탑의 옆쪽에 끼익 소리를 내며 섰다. 다급한 표정의 박 신부와 승희 그리고 백호가 허둥대며 내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올라가고 있는 정 선생과 현암을 본 승희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박 신부는 한눈에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암의 손에 청홍검이 들려 있었고 무련은 흐느끼면서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 선생은…………….

박신부를 보고 무련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것일까요? 도대체 어떻게.

박신부가 빠른 소리로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 씨! 어서 발파를 중지하라고 하시오. 어서요!”

백호는 멈칫거렸지만 곧 판단이 선 듯 위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발파를 중지하시오. 발파를!”

백호가 소리를 치자 화약 기사가 그때서야 허둥지둥 뭔가 조 치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위로 먼저 올라온 정 선생이 다짜고 짜 화약 기사의 어깨를 잡고 아래쪽으로 휙 내던졌다. 화약 기사 는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비탈을 굴러 내려갔다. 정 선생이 발 파기를 움켜쥐는 것을 보고 현암은 멈춰 서서 급히 소리를 쳤다. 정선생과의 거리는 십여 미터 이상 되었다.

“미쳤어요? 지금 발파하면 당신도 같이 날아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암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 선생은 웃었다. 정선 생이 발파기로 손을 옮기는 것을 본 현암은 정신이 아찔했다. 

“설령 와불을 떼어 낸다 해도 혼자 힘으로 세울 수는 없을 겁 니다. 절대로…………. 크레인은…….”

정 선생은 발파기에 달려 있는 안전 열쇠를 풀었다. 뒤쪽에서 거대한 크레인이 그르릉 소리를 내면서 와불과 연결된 쇠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시간이 없었다. 현암이 위로 올라가려고 한다면 정 선생은 발 파 스위치를 눌러 버릴 것이고, 그러면 아무리 폭발력을 한 곳에 만 모으도록 선이 장치돼 있다고 해도 정 선생도 폭발에 휘말려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현암은 어쩔까 망설이면서 손 을 들었던 월향검을 치켜들었다. 정 선생이 스위치를 누르려는 데 뒤쪽에서 백호가 소리쳤다.

“그런 방법은 안 됩니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어서요. 어서! 발파기를 내려놓으시오!”

정선생이 백호를 보고 씁쓸히 웃으며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 을 열었다. 그 짧은 순간, 현암은 백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백 호는 정 선생에게 뭔가 말을 시켜서 현암으로 하여금 시간을 벌 게 해 주려는 것이다. 정 선생은 멀리 떨어져 있는 현암에 대해 서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았고, 현암이 지닌 월향검에 대해서 도 잘 몰랐다. 현암은 때를 놓치지 않고 월향검에 기공력을 집중 하여 정 선생의 앞쪽으로 날카롭게 월향검을 날렸다. 허공에 비 명 소리가 퍼지더니 월향이 현암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보통 때 보다 몇 배나 빠르게 정 선생의 앞쪽으로 날아들었다. 정 선생이 놀라서 발파 스위치를 눌렀으나 아슬아슬하게 월향검이 발파기 에 연결되어 있는 전선을 먼저 끊었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월 향검은 건너편 숲 속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나지막한 나무들이 몇 그루 쓰러졌고 월향은 굵은 나무에 박혔는지 되돌아오지 않 았다.

현암이 위쪽으로 달려가자 박 신부와 백호, 승희도 같이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에서 승희가 놀란 듯 날카로운 고 함을 질렀다.

“현암 군. 저.. 저 사람들은.”

제일 앞서 있는 현암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정 선생이 날듯이 현암에게 달려들면서 오른손을 펴더니 현암의 아랫배에 일격을 가했다. 현암은 헉하는 비명을 냈고, 그와 동시에 숨이 멈추는 듯 한 고통으로 눈앞이 깜깜해지면서 몸이 붕 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심하고 있는 현암에게 정 선생이 내가(家) 권법* 중 하나인 듯한, 장력으로 현암을 내리친 것이다. 현암이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승희가 걸음을 멈추고는 뒤쪽의 백호 를 향해 소리를 쳤다. 그사이 임악 거사의 마음을 읽은 것이다.

“저 뒤에 임악 거사라는 사람, 폭파가 안 되더라도 크레인으로 와불을 세우려고 해요.”


* 내공이나 내력을 응용하여 보다 큰 힘을 낼 수 있게 하는 권법을 말한다.


백호가 소리쳤다.

“와불을 세운다 해도 다시 눕히면 될 것 아니요?”

승희가 맞받아 고함을 쳤다.

“한 번이라도 세워지면 그동안 응축됐던 기운이 모조리 터져 나가게 돼요! 그 후에 와불을 눕혀 봐야 소용없어요. 아이고!” 백호가 마음을 단단히 먹고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는 사이 어 느새 박 신부가 정 선생 근처에 다가서고 있었다. 정 선생은 다 가오는 박 신부를 보고 위협하듯이 권법의 자세를 취했다. 그 뒤 에서 거대한 크레인은 계속 연기를 뿜으면서 쇠줄을 말아 올리 고 있었다. 와불이 있는 거대한 암반이 조금씩 들썩거리면서 우 르릉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물며 정 선생을 노려보았다. 정 선생은 뒤쪽에서 움찔거리고 있는 와불 과 박 신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교활한 웃음을 띠었다.

“나를 나쁜 놈이라 해도 할 말이 없소이다.”

“정 선생, 당신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소이다.”

“당신은 당신들은 왜 이해하지 못합니까? 그런 식의 시도는 너무도 무모하고…….”

“모든 일은 간단할수록 좋은 법이오.’

“그런 일을 하는 것이 과연 순리라고 여기시오?”

“천명과 천리가 올바로 흘러가는 것이더라도 한 번쯤은 이렇게 뒤집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소이까?”

“정 선생, 당신은 정신병자요!”

“어떤 식으로 불러도 상관없소이다. 아무튼 와불이 일어날 때 까지 이 근방에는 누구도 가까이 오지 못하오. 절대로!”

정 선생은 위협하듯 박 신부 앞으로 발자국을 뚜벅뚜벅 옮겼 다. 그다지 행사할 물리력이 없는 박 신부로서는 현암조차도 한 방에 날려 버린 정 선생의 장력을 버텨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기도력을 응축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을 취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쪽에서 탕 하는 총소리가 나면서 정 선생의 앞 뒤에서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백호가 위협사격을 한 것이다. 정 선생은 아래쪽의 백호를 힐끗 쳐다보면서 크게 너털웃음을 터뜨 렸다.

“관에 있는 사람이 나라를 흥하게 하는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 고 오히려 나를 죽이려 해?”

백호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고, 정 선생은 모든 것을 달관한 미소를 지으며 박 신부 쪽으로 다가들었다. 그때 뒤쪽에 서 무슨 기척이 나더니 정 선생의 어깨가 움찔했다.

“앗! 이・・・・・・ 이게 뭐야!”

정 선생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 등에 누런 부적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정 선생은 영문을 몰라서 뒤쪽을 쳐다보았다. 와불이 조 각되어 있는 암반이 조금씩 들어 올려지고 있었는데 그 뒤편에서 팔짝팔짝 뛰듯이 숲을 빠져나오는 아이의 낯익은 모습이 나타났다. 후였다. 올라오면서 묶여 있던 밧줄을 걷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수형도(手刀)의 수법으로 줄을 끊은 것 같았다.

“당장 그만둬요. 당장!”

준후는 재빨리 손으로 수인을 옮겨 짚으며 소리를 쳤다. 그러 자정 선생의 등에 붙어 있던 부적들에 불이 붙으면서 타올랐고, 정선생은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불을 끄려고 했다. 그때를 놓치 지 않고 박 신부는 기도력에 손에 쥔 베케트의 십자가의 힘까지 최대로 모아 오라의 구체를 내쏘았다. 큰 피해는 없으나 수십 대 의 주먹을 맞은 것 같은 타격을 입은 정 선생은 비틀거렸고, 박 신부는 소리를 지르며 큰 체구를 정 선생에게 날렸다. 정 선생 과 박 신부는 우당탕 쓰러졌다. 그러나 정 선생도 만만하지는 않 아서 크레인 쪽으로 가려던 박 신부도 일격을 맞았다. 박 신부는 쓰러져 있는 현암의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고,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달려드는 준후의 멱살을 잡더니 허공으로 던졌다. 임 악 거사였다. 아래의 급한 상황을 보고 크레인을 끌어 올리도록 조종해 둔 채 나온 모양이었다.

“요 꼬마 녀석이 꽁꽁 묶어 놨는데 어떻게 줄을 풀고…..” 

준후가 허공을 날아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임악 거사는 중얼 거리면서 다시 크레인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쓰러져 있던 정 선생은 등에 붙었던 불을 끈 다음 임악 거사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어서! 어서 들어 올려. 어서 세우라고!”

크레인이 시커먼 연기와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와불을 완전히 일으켜 세우기 일보 직전이었다. 벌써 지면에서 삼십 도 이상 암반째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현암이 큰 소리로 외쳤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수습할 수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신부님! 준후야! 힘을………….”

“현암 형, 어떻게 하려고요?”

“현암군, 자네 지금 월향검도 없……….”

말을 하려던 박 신부는 현암의 손에 들고 있던 청홍검을 힐끗 보았다.

“아, 그래, 그거라면…………….”

박신부와 준후는 현암에게로 힘을 모조리 모아 주었고, 아래 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승희도 현암에게로 힘을 보탰다. 현 암이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받은 힘을 한곳에 모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청홍검을 내던지자, 청홍검은 빛나는 검기를 담고 파사신검 제칠 초식의 방법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크레인과 와 불을 연결한 두꺼운 철제 밧줄을 향해 날아갔다. 임악 거사는 그 모습을 보고 껄껄껄 웃으면서 소리를 쳤다.

“그 따위 칼을 던져 봐야 강철 줄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엇!”

임악 거사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청홍검은 얽혀 있는 두꺼 운 강철 줄들을 실오라기처럼 두둑 가볍게 끊어 버리고 허공을 빙 돌아 저쪽 숲의 굵은 나무 한 그루마저 베고는 그 옆의 나무 에 박혔다. 강철 줄이 끊어지자 크레인은 위이웡 하고 헛바퀴 도 는 소리를 내면서 덜컹거렸고 일으켜 세워지던 와불도 다시 누 웠다.

“이, 이럴 수가…….”

정선생과 임악 거사가 허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부하들 을 인솔한 백호가 달려 올라왔다. 부하들을 시켜 얼이 빠져 있는 정선생과 임악 거사를 끌어내어 아래로 데리고 가게 한 다음, 백호는 정 선생에게 한 대씩 맞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현암과 박신부에게 다가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뻔했군요.”

저항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기만 한 셈이었지만 흙먼지를 뒤 집어쓴 채 세 사람은 백호를 보고 웃어 보였다.


현암과 박 신부, 준후가 기운을 차리고 몸을 수습하는 동안, 백호는 정 선생과 임악 거사를 묶어 놓도록 조치했다. 정 선생이 워낙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얼마 후 정 선생과 임악 거사가 허탈한 표정으로 묶여 있는 모 습을 보고 박 신부는 백호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박 신부는 두 사람의 묶인 끈을 풀고는 정 선생에게 물었다.

“정 선생, 왜 그토록 편견에 사로잡혀 있소이까? 그런 식으로 구분 없이 일본을 무차별 패망시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고 그릇된 짓인지 생각해 보시지 않았소?”

“그들도 마찬가지였소. 그들이 한 짓을 잊을 수가 없단 말이 오. 우리 아버님은 일제 강점기 때 옥고를 치르다가 돌아가셨고 할아버님도 그랬소. 나의 누이는 정신대로 끌려가서 소식조차 없고 형님도 학병으로 끌려 나가 전사했지. 그들의 만행을 어찌 잊을 수가 있단 말이오.”

“그들이 한 짓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언젠가 또 그럴 거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족속들이 오. 아아! 그들을, 그놈들을………….’

“그들이 그랬다고 해서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할 수는 없는 일 아니오?”

“그러면 또 당하자는 말이오? 또?”

“당하지 않도록 힘을 길러야지요.”

“아…………. 그놈들은 이미 우리나라를 또다시 좀먹고 있소. 놈들의 상품으로, 그리고 놈들의 썩어 빠진 문화로…………. 신부님 은 요즘 아이들이 무엇을 벗 삼아 지내고 있는지 아시오? 왜색 과 사무라이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일본 만화를 보고 일본 가수 와 배우를 찾고 일본을 최고로 알고 있소. 힘으로 약탈로 무력으 로 하다가 이제는 썩어 빠진 돈과 문화 나부랭이로 우리의 마음 과 정신마저 갉아먹고 있소. 그들을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내 가 영원히 구천지옥에 떨어지더라도 그들을 없애 버릴 수만 있다면 …………….”

“그들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정 선생의 생각은 편견입니 다. 스스로를 돌이켜 봐야지 그렇게 일방적인 의견만을 주장하 는 것은 편견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대화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기에 박 신부의 마음도 무거웠 다. 정 선생은 더 말을 길게 하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고 임악 거 사도 긴 한숨만을 내쉬었다.


월향검과 함께 청홍검을 되찾은 현암은 무련에게 청홍검을 돌 려주려 했다. 그러자 무련이 손을 내저으며 현암에게 말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 잘못이지요. 검은 현암 시주에게 드리겠습니다. 출가인이 속세의 잡념을 버리지 못해서 이번에도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래도…….”

“아미타불.”

무련은 대답을 하지도 않았고 또 현암이 내민 청홍검을 받아 들 생각도 없는지 말없이 합장을 하며 중얼거렸다. 무련의 얼굴 에 미소는 없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우울한 안색이 가시고 환하 게 빛나고 있었다. 고민을 하다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은 것 일까? 현암은 망설이다가 청홍검을 내밀었던 손을 서서히 아래 로 내렸다. 그러자 무련은 가볍게 미소를 띠며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는 모든 사정을 듣고 혼잣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저 밑의 구조물을 모조리 치워 버리자고 백호에게 제안했다. 승희 는 백호를 쳐다보면서 백호의 속마음을 짚어 냈다.

“백호 씨는 지금 저 구조물들을 일부분이라도 남겨 놓길 바라 죠? 후세를 대비하기 위해서……………..”

백호는 깜짝 놀란 듯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승희에게는 거짓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얼굴을 붉혔다. 승희는 눈을 반짝거리면서 백호에게 말했다.

“견물생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렇지요?” 

“아…… 예, 알겠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윗분께는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일행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결론을 맺었다. 그때 어디 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면서 낯익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빈 거사였다. 한빈 거사는 요원들이 쳐다보는 것도 개의치 않고 휘적휘적 유쾌한 듯한 걸음걸이로 정 선생과 임악 거사가 있는 곳으로 와서는 큰 소리로 말했다.

“허허허, 이런 바보 같은 녀석들이 있나?”

한빈 거사를 본 정 선생과 임악 거사는 무릎을 꿇고서 큰절을 올렸다. 한빈 거사는 그들을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예끼! 이 바보 같은 녀석들아. 어떻게 너희가 본 것만 믿고 이 런 짓을 하려고 했느냐?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다.”

현암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한빈 거사는 여전히 호탕하게 웃는 얼굴로 쓰윽 둘러보면서 말했다. 뒤에서 준후가 백호에게 귓속 말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지. 자네들은 우리만 보는 눈이 있고 일본인은 바보 멍청이만 있다고 생각했는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일본인이 왜 천불천탑과 와불을 그대로 놓아두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런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습니다만…………….”

한빈 거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껄껄껄 웃고는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일본인들이 그 천불천탑과 와불의 비밀을 알아내고 사리 굴까지 만들어 놓았다면 이렇게 자기들에게 위험한 존재인 와불을 그냥 놓아두었겠소? 이미 조치를 취해 놓은 것 같 더이다. 제가 이 근방뿐만이 아니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지맥들을 살펴보았지요.”

한빈 거사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도선국사님이 남기신 비문에 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소이다. 여기 정가 놈이 알아냈던 것과 비슷한 경로로 말이 지요.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시오. 그것은 벌써 천 년 전의 일이 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천 년 동안 지세와 풍수 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수 있겠소?”

“예? 아니……………”

“하하하. 천 년이나 지나면서 지세와 풍수가 변한 이후에 일본 인이 그러한 것을 알아내고 지맥을 다스려서 복구를 해 놓았소 이다. 지금 공연히 와불을 일으켜 세워 보아야 우리에게 좋을 것 이 하나도 없소. 잘못하면 지금 그럭저럭 균형을 잡아가고 있던 지세가 흔들려서 도리어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칠 뻔했다 이 말이오.”

정 선생은 우물쭈물하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나라는 행주형국이라 한쪽으로 기울어진…………….”

“배가 기울어져 있으면 기울어진 그대로 계속 있겠나. 이 멍청한 녀석아! 어찌 하늘의 섭리가 불안정한 것을 계속 놓아둘 것으로 생각했느냐? 이제 와서 와불을 일으켜 보아야 의미가 없어. 오히려 우리에게 위험했으면 위험했지.”

한빈 거사는 정 선생을 향하여 엄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너도 단순한 개인의 원한으로 그런 큰일을 저지를 생각은 하 지 마라. 하늘의 섭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옳은 길로 나아가는 법. 왜놈들을 쇠망하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의 국운은 자연 적으로 활짝 열리리라. 우리 같은 한두 명의 힘으로 어찌 하늘의 커다란 섭리를 알 수 있겠느냐. 허허허.”

한빈 거사는 현암과 박 신부 쪽을 보면서 말했다.

“여러분이 애써 주신 덕분에 일이 제대로 되었소이다. 가능 한 한 빨리 오려고 했으나 이것저것 확인할 것이 있어서 늦었소 이다. 아무튼 와불을 파서 세우려는 거창한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 저 밑에 만들어 놓은 저런 이상한 것들도 치워 버리고……………. 사리 굴이 부서진 지금으로서는 지세를 더 이상 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고, 천불천탑은 후대에 남길 전설이나 이 야깃거리면 충분합니다.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대하여 왈가왈부 한다거나 그로 인해 다른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리대 로 되면 그만이지요. 허허허.”

한빈 거사는 크게 말하고 이번에는 현암만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

“내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이곳의 일을 수습하는 대로 너를 찾으마. 보름 후에 갈 것이니 기다리고 있거라.”

“예?”

현암은 한빈 거사가 청할 일이 있다는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바 라보았다. 한빈 거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눈도 현암 을 향하지 않았지만, 계속 현암만 들을 수 있는 전술로 이야기 했다.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있어. 큰 기운들이 흐트러지고 여기저 기서 묻혔던 기운도 다시 일어나고 있구나. 혼세야, 혼세……………. 아무튼 너와 같이 있는 분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보름 후에 갈 것이니 잊지 말고 기다려라. 알겠지?”

한빈 거사는 현암에게 그런 말을 남기고는 껄껄껄 웃으면서 다른 사람이 인사를 하거나 만류할 틈도 없이 번개같이 걸음을 옮겨 사라져 버렸다. 뒤늦게야 백호와 승현이 눈을 크게 뜨고는 한빈 거사를 찾았지만 벌써 어디로 꺼져 버렸는지 자취조차 없 었다. 흐느끼는 정 선생과 임악 거사를 달래기라도 하듯 백호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아무튼 사리 굴을 부수어서 이곳의 지세가 바로잡힌 셈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도록 합시다. 저 밑의 구조물도 치워서 본 래의 운주사 모습으로 돌려놓지요.”

한빈 거사의 설명도 있고 해서 마음이 풀렸는지 이번에는 정 선생과 임악 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 선생이나 임악 거사,

무련 등이 약간의 ‘음모’를 꾸민 셈이었으나 그들에게 악의가 있 었던 것도 아니고 또 와불을 일으켜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도방 의 거두인 한빈 거사가 말을 하고 갔으니, 더 이상 그런 시도는 없을 것으로 보고 이번 일은 덮어 두기로 했다.


헤어질 때가 되었다. 사람들은 지맥을 다스리는 본디 임무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고, 준후 역시 예정대로 그 일에 동참하기로 했다. 현암은 준후에게 꼭 보름 내로 돌아오라고 넌지시 일렀다. 운주사를 떠나 내려가는 현암과 박 신부, 승희의 기분은 가벼 웠다. 내려가는 중에 박 신부가 담담히 말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와불을 세워도 일본에는 정말 아무 일이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좋지 않기 때문 에 한빈 거사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 하고 말이다.”

“예?”

“한빈 거사님도 우리와 뜻을 같이하셨기에 거짓말을 하신 것 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든단 말이야. 일본을 그런 식으로 징벌하 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 그 정도 되시는 분이 단정을 내리 지 않았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정 선생이나 임악 거사 같은 사 람들이 또다시 와불을 세우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느냔 말일 세. 그래서 그러신 것이고 와불을 일으켜 세운다면 정말……”

이번에는 승희가 투정을 부리듯이 박 신부에게 말했다.

“머리 아파요. 이젠 잊어버려요. 순리대로 되겠지요. 예?” 

승희의 말을 듣고 현암은 껄껄 웃었고, 박 신부도 멋쩍어하다 가 밝은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와불은 본래대로 누워 있는 것이 훨씬 좋을 것 같아 요. 보기에도 좋고,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생각을 할 수 있게도 해주고요. 그렇지 않은가요?”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도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누워 있던 와불의 거 대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와불이 있는 방향의 하늘을 지긋한 눈 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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