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1화 – 하굣길
“어제 영길이가 죽도록 맞았다며?”
“응. 오늘 학교에도 못 나왔어. 병원에 입원했나 봐.”
“도대체 무서워서 다닐 수가 있나. 그래도 영길이라면 운동도 많이 했고…………….”
“상대가 여러 명인데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나 무서워. 학교에서 그냥 밤새우고 내일까지 있으면 안 될까?”
“또 그럴 수도 없잖아? 집에 가긴 가야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이제부터 우리 같이 뭉쳐서 집에 가기로 하자. 전부 말이야. 그러면 낫겠지, 뭐.”
“그럴까? 하지만 가는 방향이 다르잖아?”
“일단 그 골목만 빠져나간 다음에 흩어져서 가면 되잖아.”
하교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이 조금씩 술렁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굣길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골목 어귀를 지나서 빠져나오는 길에 나이 많은 불량배들이 웅성거리 며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사실인 것으로 밝혀졌고 두려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학교 전체에 퍼졌다.
누구는 시계를 빼앗기고 책가방이 모조리 찢겼으며, 어떤 아 이는 지갑을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흠씬 맞았다는 등. 게다가 며 칠 전에 유승이라는 아이가 집에 가다가 실종되는 일까지 생겼 다.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어른들은 가출했다고 생각하는 모 양이었으나 아이들의 의견은 달랐다. 어떤 아이는 유승이 불량 배들에게 끌려가서 새우잡이 배에 팔렸다고도 했고, 깡패들에게 맞아 죽었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좌우간 유승이 증발된 사 건은 학교 아이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 때문에 하굣길은 더욱 더 무서운 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주변 경찰서나 방범대에서는 신경을 쓰지 않 았다. 유승의 담임 선생님이 몇 번이나 경찰서를 찾아가 조사를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목격자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걸리는 것 이니 당분간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아이들은 선생 님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그 장소를 피해 다 니라고 할 뿐 아이들을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선생님들 몇몇이 근처를 돌아보기도 했으나 그놈들은 그런 때면 감쪽같이 숨었다가 선생님들이 가고 나면 귀신같이 나타나곤 했다.
궁리 끝에 아이들은 떼를 지어서 공포의 하굣길을 지나가려고 했고, 같이 가겠다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불량배들에게 만날 당하고만 있던 것이 억울하고 원통하게 생각됐던지 이번에 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불량배들을 혼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까 지 은근히 가지게 되었다.
어찌 되었거나 중학생 또래의 아이들에게 학교는 지겨운 곳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말로 그들이 학교를 지겹다고 생각을 하 건 그렇지 않건 간에 수업이 끝나 종례를 마치고 담임 선생님에 게 인사를 할 때만큼 아이들이 활기찰 때는 없다. 까까머리에 가 까운 스포츠머리를 올망졸망 맞대고 와르르 교문으로 몰려 나가 는 아이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흥겹고 귀여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학교는 그렇지 않았다.
이삼십 명쯤 되는 아이들이 교문 근처에서 수군거리면서 대책 을 의논하고 있었다. 정원이 한 아이를 다그쳤다.
“그 말 틀림없어? 유승이가 그놈들에게 어떻게 되었단 말이 야?”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분명 유승이와 같이 집에 가다가 그 골목 어귀에서 헤어졌거든. 그 뒤로 유승이가 집에 오지 않았대. 틀림없어.”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유승이가 없어진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잖아!”
“무, 무서워서 그랬어. 선생님한테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해? 그리고 유승이 부모님한테도 할 수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 이야? 너희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거지? 정말이지?”
“응. 그래.”
운동을 가장 잘하고 태권도도 배웠던 영길마저 불량배들에 게 대들다가 얻어맞고 병원에 입원까지 할 지경이었지만, 아직 도 그 불량배들이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어른 들은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며 말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면서 또 한 번 몸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왜 우리가 맞아야 하지? 선생님이나 어른은 항상 말한 다. 싸우지 말고 남과 다투지 말라고. 그렇지만 남이 나를 때리 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칼이나 유리병 같은 흉 기까지 들고 협박하는데………………
지금 모인 아이들 중 그 불량배들에게 한두 번 당해 보지 않은 아이들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 아저씨를 믿고 의지하 라고 어렸을 때부터 배워 왔다. 그 경찰 아저씨들은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도대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우리도 남자야. 우리가 해결해야 해.”
싸움 잘하던 영길마저 병원에 입원해 있는 지금, 대장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이 손바닥을 탁 치면서 엄숙하게 말했다. 어른들이 보면 꼬마들의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웃거나 놀라거나 꾸짖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그들은 비분강개해 있었다.
“모두 가자. 같이 가서 우리 손으로 그 자식들을 혼내주는 거 야. 아무도 믿을 수 없어. 그놈들이 우릴 때리고 못살게 군 만큼 보복을 하는 거야.”
“좋아.”
“좋아.”
아이들 몇 명이 찬동하자 정원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렸다. “두고 보자. 오늘 일에 대해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나 어떤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기다. 당했던 만큼 우리가 갚아 주는 거야. 이만큼 모여서 가면 대여섯 명쯤은 덩치가 크다 해도 별수 없을 거야.”
“좋아!”
“신난다!”
그렇지만 아직도 겁먹은 듯한 몇 명의 아이들이 주춤주춤 떨 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칼이나 유리병을 휘두르면 어떡해? 그놈들은 그런 걸 들고 다니던데……………. 그것에 찔리면 피도 나고 영길이처럼 입원하게 될지도……………”
“이 바보야. 너도 남자냐!”
정원의 눈빛은 기세등등하게 변해 있었다. 정원은 맥 빠지는 소리를 하는 아이의 가슴을 떠밀어서 휘청거리게 만들고는 싸늘 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가. 필요 없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다만 나는……”
“그렇게 겁을 먹고 무서워해서야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그 럼 하교 때마다 맞고 당할까? 계속 그래? 계속 이렇게 학교 다닐 거야? 나는 못해. 그렇게는 못해. 죽더라도 나는 그렇게 못해!”
“맞아, 나도 그래.”
“나도”
“나도”
“나도”
아이들의 결연한 목소리가 사방에 나지막하게 메아리쳤다. 그 래, 뭉치면 산다고 했다. 어른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끼리라 도 해야지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은 뭉치기로 했다. 머리 좋 은 연식이 작전 계획을 짰다.
“이렇게 한꺼번에 몰려가면 그놈들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우 선 몇 명이 가서 놈들이 나오게 해야 돼. 그리고 나머지는 숨어 있다가 신호가 떨어지면 한꺼번에 덤비는 거야.”
“응. 그런데 ・・・・・・”
또 다른 아이가 주춤거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주먹으로 때린다고 그놈들에게 먹힐까? 고등학생 이상은 돼 보이는 큰 놈들이던데………….”
정원이 다시 화난다는 듯 끼어들었다.
“야, 인마! 그러면 옆에 있는 돌로라도 쳐야지. 몽둥이로 때리 기라도 하고. 그놈들은 우리를 만날 그렇게 패잖아.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하는 거지?”
“음, 맞아맞아.”
어느덧 아이들은 교문 밖을 떠나서 연식의 지시에 따라 다섯 명씩 흩어져 길을 나섰다. 정원이 선두에 서기로 했고 연식도 옆 에 같이 있기로 했다. 아이들은 눈을 깜박거리면서 자신이 손바 닥처럼 알고 있는 그 으슥한 뒷골목공사중인데다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담벼락 높은 집들만이 서 있는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미리 세운 계획대로, 놈들이 만약 나 타나지 않으면 정원과 연식은 몇 번이나 앞을 지나다니며 그놈 들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고, 아이들도 그때까지는 절 대 집에 가지 않고 남아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학원 갈 시간에 늦는다거나 집에 늦게 들어가면 혼나는 것 따위는 이제 아이들 관심 밖이었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당했던 것을 되갚 아준다는 야릇한 쾌감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따라 오래 걸리지도 않았 다. 연식이 정원과 문제의 골목길 근처로 슬슬 걸음을 옮기고 있 는데, 저 앞쪽 전봇대 근처에서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껌을 짝짝 씹고 있는 여드름투성이의 키 큰 녀석이 튀어나와 앞을 막 았다.
“야!”
“뭐야?”
정원이 자못 무섭게 그놈을 째려보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무 서워했을 테고 주눅이 들어 도망치려고 했겠지만, 지금은 믿는 바가 있어서 그런지 꿀리지 않고 당당했다.
“어! 하하, 어쭈? 요 쪼그만 것이.”
녀석이 웃으면서 정원의 귀를 잡으려고 하자 정원은 손을 탁 뿌리쳤다.
“어쭈? 요 쪼그만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했군.”
그 녀석은 방비할 틈도 주지 않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연식 의 배를 소리를 지르며 세게 걷어찼다. 연식이 윽 소리를 내면서 넘어지자 정원은 불안함을 느끼고 재빨리 몸을 돌려서 뒤를 보 았다. 아니나 다를까, 정원의 뒤쪽에도 앞의 이놈과 비슷한 키에 살이 뒤룩뒤룩한 놈 하나가 겁을 주려는지 깨진 유리병 하나를 예쁘다는 듯 어루만지면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 자모자를 눌러쓴 놈 뒤에서도 두 명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야! 너희 개기지 말고 순순히 말할 때 다 풀어. 센터 까, 알았어?”
정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연식은 얼마나 호되게 걷어차 였는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은 혼자가 아니었다.
“야, 다들 나와!”
정원이 소리치자 놈들은 무슨 소리인지 처음엔 영문을 모르 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원의 외침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사방에 서 아이들이 와하며 골목길로 몰려들었다. 이 순간을 기다린 것 일까? 다른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들은 책가방을 내던지고 주먹을 불끈 쥔 채 골목길 양쪽에서 덤벼들었다. 어떤 아이는 벌 써부터 돌멩이를 집어 던졌고 작대기를 들고 어설프게 휘두르는 아이도 있었다.
“앗! 아니, 이런・・・・・・ 이런 개애새끼들!”
불량배들이 욕을 하며 겁을 주려는 듯 들고 있던 병을 깨고, 품에서 칼도 꺼내 들었다. 맨 먼저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던 아이 들은 번쩍이는 칼날과 깨진 유리병이 보이자 놀라 멈추고 말았 지만, 뒤쪽에 있던 아이들이 계속 밀려들자 어느새 좁은 골목길 안은 아이들로 꽉 차게 되었다.
“이 개새끼들이 죽으려고 환장했어?”
불량배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병이며 칼을 아무렇게나 휘둘러댔다. 앞장서 달려오던 아이 중 하나가 놈들이 휘두른 흉기에 찔렸는지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다른 한 명은 주 먹으로 얼굴을 얻어맞고 뒤에서 달려오던 몇 명과 함께 나자빠 졌다.
기선을 제압당한 아이들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불량배들이 낄낄 웃 으면서 정원의 목덜미를 확 끌어당겼다.
“쥐방울만 한 새끼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어? 너희 죽어 볼 래? 어디서 이 새끼들이……………..”
놈들은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들고 있는 흉기를 위협하듯 허공에 그어 보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퍼졌고 하나둘 뒤로 주춤거리면서 물러섰다.
그들의 눈앞에는 연식이 쓰러져 있고 정원은 녀석들에게 덜미 를 잡혀 붙들려 있었다. 구해야 했다. 조금 아까 한 약속. 그리고 항상 당해 왔다는 그 생각・・・・・・ . 그렇지만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 는 칼날과 흉기 들은 그보다도 몇십 배 무서웠다. 뒤에 서 있던 아이들이 몇 명씩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어디가! 난 괜찮아! 죽어도 좋으니까 다 덤벼! 덤비란 말이야!”
“이 새끼가 어디서 입을 놀려?”
불량배 중 한 명이 무서워하지 않고 소리를 지르는 정원의 얼굴을 옆에 있던 콘크리트 담벼락에 콱 하고 찧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 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두어 아이들이 마구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지만, 깨진 유리병과 번쩍거리는 칼을 들고 돌을 피하면서, 잡히면 죽여 버리겠다는 험악한 표정을 지 으며 다가오는 불량배들을 보고는 얼굴이 파랗게 되어 뒷걸음질 을 했다. 쓰러졌던 연식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눈을 떴다. 그리 고 한눈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패배, 완전한 패 배였다. 이렇게 센 놈들이었나? 도대체 경찰 아저씨들은 무얼 하 고 있단 말인가. 선생님들은 무엇을 이야기했고, 부모님들은 무 엇을 말했단 말인가. 부모님들은 깡패들을 만나면 저항하지 말 고 주라고 했다. 물론 용돈도 아깝고 시계도 아깝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갖고 있던 것을 아무런 이유 없이 힘에 눌려 빼앗긴다는 사실이 너무도 서러웠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서 자신들의 힘으 로 막으려고 한 것인데…………… 또 졌다.
연식이 한참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정원의 입에서 도대체 사 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크악!”
벽에 얼굴을 박고 있던 정원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불량 배에게 달려들었다. 불량배는 처음에 빙글빙글 웃으며 ‘어쭈, 이 놈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정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놈의 허리띠 부분을 잡더니 믿기지 않는 힘으로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으악!”
놈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유리병으로 정 원의 등덜미를 찔렀다. 연식은 그 광경을 보고 눈을 가리고 싶었 으나 으악 하는 비명만 질렀을 뿐 눈을 감지는 못했다. 아니, 오 히려 눈은 크게 떠졌다. 놀라울 뿐이었다. 정원의 등에 내리꽂힌 유리병은 살 속으로 파고들기커녕 깨지면서 불량배의 손을 피 투성이로 만들었을 뿐 정원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던 것이다.
정원은 자신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놈을 넋을 잃고 쳐다보는 다른 한 놈에게 던졌다.
“으악!”
두 명이 와장창 나뒹굴자 저쪽에 떨어져 있던 다른 두 명이 소 리를 지르면서 정원에게 달려들었다. 정원은 천천히 고개를 돌 려서 둘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때 연식의 눈에 비친 정원의 얼굴은 정원만의 얼굴이 아니었다.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지 만 얼굴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고, 눈매와 입술 모양은 분명히 정 원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릴 만큼 야릇하게 변해 있었다.
“얏!”
달려들던 불량배 중 하나가 소리를 지르고 칼을 휘둘렀다. 놈 은 잔인하게도 정원의 가슴 한복판을 칼로 찌르려 했다. 그러나 정원이 발도 떼지 않았는데 불량배의 몸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 처럼 덜컥 정지해 버렸다.
“너희・・・・・・ 너희 기억하고 있지?”
정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주변 을 가득 채웠다. 불량배는 손목만 잡혔을 뿐인데도 처절하게 비 명을 질러 댔다. 하지만 커다란 비명 소리보다도 정원의 낮게 중 얼거리는 소리가 연식의 귀에는 더 똑똑하게 들렸다.
“너희 ・・・・・・ 나에게 어떻게 했지?”
정원이 중얼거리자 녀석의 손목이 불쾌한 소리를 내면서 바 깥쪽으로 확 휘었고, 불량배는 눈을 까뒤집고 입에서 거품을 쏟 으면서 쓰러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다른 뚱뚱한 불량배 하나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떨어뜨리고 오들오들 떨며 도 망가지도 못한 채 벽에 붙어 있었다. 정원의 눈길이 그놈에게 향 했다. 그놈을 쏘아보는 정원의 눈은 검은자위가 보이지 않고 흰 자위만이 번쩍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원의 그 모습에 연식은 무서워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정원은 뚱보 앞으로 걸어가더니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너도・・・・・・ 너도 이랬지? 봐…………… 잘 봐.”
뚱보는 정원보다 덩치가 서너 배는 크고 힘도 셀 것 같았는데 정원이 머리카락을 붙잡자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비명을 지 를 뿐, 아무 힘도 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정원은 머리카락을 잡은 채로 있는 힘을 다해서 전봇대에 불량배의 머리를 찧었다.
빡 하는 소리가 들리며 붉은 피가 솟아오르더니 불량배는 뒤로 우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연식은 소리 높여 울었다.
“그만! 그만해! 제발 그만!”
그러나 정원은 연식이 울면서 만류하는 것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채 넘어져서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 는 뚱보를 버려두고, 몸을 돌려서 아까 집어 던졌던 두 명의 불 량배 쪽으로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놈은 벌써 몸을 일 으킨 채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넋이 나간 듯 마치 발이 땅에 붙들린 것처럼 멍청히 서 있을 뿐 이었다.
“너희………… 너희도 이리 와. 그래.”
정원이 소름이 끼치는 목소리로 말하자 놈들은 몸을 후들후들 떨고 비명을 지르면서 마치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다가섰다. 연 식은 계속 울음을 터뜨리면서 그만하라고 울부짖다가 마침내 정 원의 바지 자락을 붙잡았다.
“정원아 제발 그만해! 응?”
연식은 그 순간 섬뜩해졌다. 정원의 몸이 얼음덩어리처럼 차 가웠다. 도저히 계속 손을 대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냉동실 에서 나온 사람처럼…………. 연식은 다리를 잡은 손을 떼고는 무서 워서 부들부들 떨었다.
주변을 새까맣게 에워싸고 있던 아이들은 모두 사라져 하나 도 남지 않았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엉망진창이 되어 쓰러진 두 명의 불량배와 정원과 연식, 그리고 지금 정원에게 끌려오고 있 는 다른 두 명의 불량배뿐이었다. 정원은 조용히 양 손바닥을 내 밀었다. 그러자 그놈들은 신음 소리를 내고 눈물과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빨려들 듯 고개를 숙인 채 정원의 손바닥에 머리를 갖다 댔다.
“너희………… 너희가 나를 죽였어. 응? 그러니 너희도 죽어. 알 았지? 응?”
연식의 눈에 마지막 비친 것은 그 모습뿐이었다. 더 이상 정신 을 차리고 볼 수가 없었다. 정원의 얼굴이 누구를 닮았는지 확실 히 알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사라졌던 유승의 모습이었다. 그리 고・・・・・・ 눈앞이 희뿌옇게 아른거리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연식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어둑어둑했지만 해가 완전 히 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주변에는 아까 같이 왔던 친구들이 몇 명 다시 돌아와 연식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주고 있었고, 저만치 앞에는 정원이 하 얗게 질린 얼굴로 앉아 있었다. 연식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량 배들이 모두 죽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렇지만 핏자국만 흩어져 있을 뿐, 불량배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아까 달아났던 친구들이 돌아와서 정원을 둘러싸고 입방아를 찧는 중이었다.
“와! 정원아, 너 대단하더라. 네가 어떻게 그놈들을 이겼니? 와! 네가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야. 진짜 캡이다. 캡! 앞으로 정원이랑 다니면 무서울 게 없겠다.”
“정말 그러게 말이야.”
연식은 하얗게 질린 정원의 얼굴을 힐끗 보면서 옆에 있는 한 아이에게 살짝 물었다.
“불량배들은 어떻게 됐어? 죽은 건 아니지?”
“”글쎄, 모르겠어. 우리가 왔을 때 정원이도 쓰러져 있고 너도 쓰러져 있었어. 그놈들은 도망갔는지 보이지 않고…… “
“정원이가 쓰러져 있었어?”
“아, 그냥 힘이 빠져서 누워 있었던 거래. 정원이가 전부 두들 겨 패서 쫓아 버렸다. 넌 봤지? 정원이가 기절하거나 다친 것은 아니니까 염려할 필요 없어. 야! 그나저나 정원이 대단하지? 얘 기좀 해줘. 와! 나는 정원이 그렇게 힘센 줄은 몰랐는데, 진짜 캡이다. 캡!”
연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왠지 불안했다. 핼쑥해진 정원의 얼굴에서는 유승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정 원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그렇지만 아직도 살기가 번뜩이는 눈 으로 연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식은 정원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시선을 피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처량한 눈빛으로 정원을 쳐다보았다. 이제 정원은 학교 전체의 영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연식의 마음속에는 정원이 가엾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이 아무 말도 없이 연식의 얼굴을 한참이 나 쳐다보다가 손가락 하나를 펴서 입술에 갔다 댔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신호였을까? 연식이 다른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하 게 살짝 고개를 끄덕하자 그제야 정원의 얼굴이 평안해졌다. 아 이들은 깔깔거리고 신이 났는지 떠들어 대면서 정원을 일으켜 세웠다.
각자 흩어져 집으로 향하면서 모든 아이들은 뿌듯했는지 왁자 지껄 떠들었다. 다행히 크게 다친 아이도 없었고 별로 염려할 만 한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해방되었다는 기분 때문일 것이다. 이번 일은 학교 아이들한테는 큰 경사였다. 남의 힘을 빌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해냈다고 믿었으니까. 진정 자기들 스스로 했는 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연식은 정원을 관찰했다. 평상시의 모습과 별로 달 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전보다 말수가 줄어들었고 얼굴이 핼쑥 해져서 시간이 날 때면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는 일이 잦았다. 언뜻 보기에는 수업 시간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책에서 얼굴을 떼지 않고 있었지만, 실제로 정원이 공부에 몰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연식은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일까? 왜 저렇게 말수가 없어지고 멍한 표정이 되었을까?
아이들은 틈만 나면 정원의 무용담에 시간 가는 줄을 몰랐지 만, 막상 당사자인 정원은 묵묵하게 누가 그런 말을 묻고 이야 기를 걸어 와도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담담하게 있을 뿐이었 다. 그런 모습이 멋있게 보였는지 아이들은 정원을 귀찮게 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오히려 정원은 더욱더 혼자서 그렇게 멍하 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연식은 불안했다. 언뜻 보았을 뿐이지만, 정원의 얼굴이 유승 의 얼굴과 겹쳐졌던 모습이 연식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 마다 꿈속에서 유승의 얼굴을 한 정원이 멱살을 잡고 “너 봤지? 너 누구한테 이야기할 거지?” 하며 다그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어느 날 하굣길에 연식은 한복 자락을 휘날리는 조그마한 아 이가 교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요즘 같 은 세상에 어린애가 한복을, 그것도 손까지 완전히 덮을 만큼 소 맷자락이 내려오고 땅에 끌릴 정도로 커다란 탓에 펄렁거리는 한복을 보고, 신종 오렌지족이 아닐까 싶어 피식 웃고 지나쳤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 벌써 사흘째, 여전히 교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찔 리고 기분도 묘했다. 곰곰 생각해 보니 기분이 편치 못한 이유가 있었다. 교문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던 아이는 연식이 교문을 나 설 때면 연식을 빤히 쳐다보고 사라질 때까지 시선으로 자기의 뒤를 좇았다. 가뜩이나 마음이 불안하고 무섭던 차에 이상한 차 림을 한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식은 참지 못하고 여느 때처럼 교문 앞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아이 앞으로 용기를 내어 뚜 벅뚜벅 걸어갔다. 아이는 조금도 꺼리는 빛이 없이 여전히 맑은 눈망울로 연식의 그런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연식은 위압적 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도 키가 크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 아 이도 큰 편은 아니어서 연식이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머리가 꽤 길어 보여 혹시 초등학생이 아닐까 싶었 는데 가까이서 보니 자기와 비슷한 또래였다. 연식이 앞에서 인 상을 쓰는데도 여전히 위로 찢어진 눈으로 말똥말똥 쳐다볼 뿐 이었다. 얼굴도 하얗고 계집애처럼 곱상하게 생긴 사내 녀석이 었는데 눈이 가늘고 위로 찢어졌지만 눈썹은 아래로 처져 있었 다. 까만 눈망울이 눈을 꽉 채우고 있어서 같은 또래인데도 귀엽 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연식은 인상을 스르르 풀면서 멋쩍은 듯이 말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니?”
“뭘 좀 알아내려고.”
“응? 알아내? 알아내다니 뭘 알아낸단 말이야?”
“이상한 게 느껴져서.”
“이상한거? 뭐가 이상한데?”
“느껴지는걸.”
연식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녀석의 눈이 자신 을 빤히 쳐다보자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뜨끔해졌다.
“뭘 알아낸다는 거야, 도대체?”
“중요한 일……. 누가 굉장히 위험해. 그런 것이 느껴지는데?”
“그럼 내가 위험하단 말이야?”
“일단은 아니야. 위험에 처한 아이를 나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어.”
“그런데 어떻게 알아?”
“느낌으로”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근데 넌 왜 이렇게 입고 다니니?”
연식은 화제를 돌리려고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한복 자락을 보 고 말했다. 아무리 한복이라지만 이 녀석의 차림새는 퍽 괴이했 다. 이상하게도 그런 괴이한 차림새가 무척 잘 어울렸다. 녀석은 눈도 깜박거리지도 않고 연식을 쳐다보며 말했다.
“편하니까.”
“이름이 뭐니?”
“준후라고 해. 너는?”
“나? 나는 연식이야.”
“응, 그렇구나. 몇 학년이니?”
“삼학년.”
“그래? 그럼 나랑 동갑이다.”
“응, 그래? 가만있어 봐. 나랑 동갑인데 어느 학교 다니니? 왜 그렇게 머리가 길어?”
“난 학교 안 다녀.”
“뭐? 학교를 안 다닌다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알 것 없어. 지금 중요한 건……”
준후는 침울한 인상이 되었다. 연식은 자기와 같은 나이인 이 이상한 녀석에게 감히 함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손을 뻗칠 수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준후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연식에게 말했다.
“네 얼굴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어. 남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아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을 너는 알고 있을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이지?”
“너 혹시……”
“혹시고 뭐고, 뭐야?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나도 모르겠다.”
연식은 얼버무리려 했으나 준후는 여전히 까만 눈으로 쳐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너 혹시………… 죽은 친구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니?”
“으윽!”
연식은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준후는 뒷짐을 진 채 조용히 연식의 앞으로 다가섰다.
“너, 너 도대체…….”
“나에게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 도와주려고 온 거니까 더 이상 묻지는 말고.”
“아………… 아니야! 그런 적 없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준후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다시 연식의 얼굴을 보고 조 용히 말했다.
“아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어. 며칠 됐지. 그래서 근처 로 달려와 봤는데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어. 불러도 오지 않 고……..”
“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네가 누굴 불렀단 말이야?”
“죽은 아이.”
“뭐………… 뭐라고?”
연식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버렸다. 도대체 이 아이는 지금 제 정신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연식이 놀라는 것과는 반대로 준후라는 아이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었다.
“오려고 하지 않아. 누군가의 몸으로 들어간 것 같아. 무척 고 통을 당하고 있는데…………. 하지만 그러면 안 돼. 그래서는 죽은 아이나 그 애에게 몸을 빌려 준 아이 둘 모두에게 좋지 않아. 그 래서 왔어. 며칠씩이나 기다렸는데……………..”
준후가 잠시 말을 끊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부르고 있다는 걸 죽은 아이는 알아. 그래서 나를 피해 다니고 있어. 아직까지 만나질 못했지. 꼭꼭 숨어 버려서 찾을 수가 없어. 그러다가 우연히 너를 보니………….”
준후는 다시 연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후의 시선은 마치 만화책에 나오는 레이저 광선같이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훑고 있는 것 같았다. 연식은 태연한 척하려고 했으나 이미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주 변에는 아이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네 얼굴에는 두려움이 있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본 두 려움. 솔직히 말하면 너도 좀 위험하긴 해. 알겠어?” “뭐? 뭐가 위험하단 말이야?”
“모르긴 몰라도 넌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봤어. 네 주변에도 그 러한 영들이 떠돌고 있어. 수호령도 있지만……………. 음! 아냐, 여하 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가져. 의지가 굳으면 누구도 너를 어쩌지 못해, 그리고……………..”
“좌우간 난 몰라! 그런 허황된 소리 듣고 싶지도 않다고! 도대체 요즘 세상에 무슨…….”
“죽은 친구의 모습을 보지 않았어?”
“못 봤어!”
“누군가의 얼굴이 둘로 변하거나 겹치거나 하는 것은 못 봤어?”
“아냐, 몰라! 못봤어!”
“이야기로 들은 적은?”
“아냐, 듣지도 못했어!”
준후는 뭔가 다시 말을 하려다가 연식의 얼굴을 빼꼼히 쳐다보았다.
“네가 보았던 친구가 누구지? 그것만 내게 알려 줘. 그러면 돼. 가르쳐 줘.”
“안돼! 알려 줄 수 없어! 가르쳐 줄 수 없…………….”
준후는 연식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연식은 속으로 아 차 싶었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끝까지 발뺌을 했으면 됐을 터 인데 엉겁결에 준후의 여태까지의 말이 옳다는 것, 자기가 그 친 구를 알고 그러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해 버 린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약삭빠른 녀석.’
연식은 속으로 화가 났으나 그래도 왠지 이렇게 태평하게 웃고 있는 이 아이에게는 악의가 생기지 않았다.
“사실 네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있어. 잘 아는 누나에게 부탁하면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 누나도 별 로 좋아하지 않고. 그러니 말해 줘. 도대체 누구지?”
“너 ・・・・・・ 너 정말로 그럴 수 있는 거야? 목사님은 그런 말씀 안 하시던데 무당이나 하는 짓 아니야? 불경스럽게………….”
준후는 또 한 번 가볍게 웃었다.
“목사님이라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야. 물론 나도 그렇고, 누구도 세상일을 다 알 수는 없는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내가 너를 도와주어야만 해. 시간이 없어. 어서 말해 줘. 누구지?”
연식은 그만 얼이 빠져 버렸다. 자신과 똑같은 나이의 어린아 이가 어떻게 이렇게 이상하고도 묘한 인상을 풍길 수 있을까? 그 렇지만 연식은 이 아이가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신 기하고 더욱더 호기심이 생길 뿐이었다.
“걔는 그러니까… 내 친군데, 정원이라고 해.”
준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죽은 친구는 유승이라고 하지?”
“어떻게 그걸…….”
준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연식은 궁금했으나 준후의 얼굴이 그늘진 것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유승이가 가엾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이대로 둘 수는 없어. 같이 정원이 찾으러 갈까? 정원이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 줄수있어?”
준후는 연식의 손을 잡아끌더니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 했다. 연식은 자신도 모르게 준후가 잡아끄는 대로 뒤를 졸졸 따 라가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정원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설명을 한참 들으며 계속 걸음을 옮기다 보니 준후도 정원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준후에게는 승희처럼 그 사람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는다거나 정확히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까지 알아낼 능력이 없었으나, 그 래도 그 사람의 상태가 어떻다거나 대략적으로 어느 근방에 있 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준후는 지금 뭔가 꼬이고 있다고 느꼈다. 정원은 헤매는 중이 었다. 무엇을 찾아서 헤매는 것인지………….
“흐흠!”
준후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는 연식을 돌아보았다.
“연식아, 너는 이제 그만 가.”
“가라고? 어딜?”
“이제 넌 집에 돌아가야지.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정원이는 내 친구란 말이야. 나도 같이 갈 거야.”
“넌 도움이 안 돼.”
“뭐라고?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왜 내가 도움이 안 된다는거야?”
“하하, 이런…….”
준후는 답답하다는 듯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굉장히 놀라거나 무서워하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몰라. 위험할 지도 모르고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나중에 연락을 해 주면 되잖아.”
“싫어! 나도 보고 싶단 말이야.”
“이런 고집불통 같으니라고. 좋아. 그럼 맘대로 해. 놀라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 안 한다.”
준후는 협박하듯이 인상을 써서 얼굴을 찡그리고는 그대로 걸 음을 옮겼다. 그러면 연식이 따라오지 못하리라고 여겼는데 연 식은 준후의 말에 겁을 집어먹으면서도 슬그머니 뒤를 따라왔 다. 준후는 할 수 없다는 듯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곳저곳 골목길을 헤매고 다니던 준후는 정원이 있는 대략적 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지만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알기 어려 웠다. 골목길이 첩첩이 들어서 있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준후는 뒤에서 졸졸 따라오고 있는 연식을 힐끗 쳐다보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너 여기서 본 것 다른 사람에게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
“응…… 응? 근데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튼 약속해. 맹세하라고. 알았지?”
“음. 그래.”
“누구에게 말하거나 그러면 절대 안돼, 알았지?”
준후는 다시 한번 다짐을 받고는 소맷자락에서 부적을 꺼냈 다. 준후가 허공에 손을 휘두르자 퍽 하더니 불이 일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둥실둥실 한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준후는 “됐다” 하면서 부적을 따라 계속 발걸음을 옮겼고, 연식은 넋이 나간 듯 이 멍하니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골목길 사이 를 누비는 준후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정원아!”
골목길 어귀를 돌면서 준후가 날카롭게 소리치는 바람에 연식 은 몸을 흠칫하고는 걸음을 빨리 옮겨서 골목길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골목길 안쪽에서는 믿지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난번 자기들과 다투었던 불량배 네 명이 맥이 풀리고 정신을 잃은 듯 무더기로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었고, 앞쪽에서 정원은 유승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원아! 아니, 유승아! 그래선 안 돼!”
준후가 소리치자 정원, 아니 유승이 고개를 휙 돌렸다. 눈매가 너무도 싸늘해서 연식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번에도 언뜻 보 았지만 맨 정신으로 그런 모습을 다시 보게 되자 다리가 풀려 버 렸다.
“왜 안 되지?”
완전히 유승의 얼굴로 변한 정원의 모습은 싸늘한 분노로 가 득 차 있었다. 준후는 입술을 깨물고는 정원의 몸을 빌리고 있는 유승에게 조용히 다가가면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래서는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왜 이런 방법은 안 된다는 말이지?” “폭력을 당했다고 똑같은 방법을 쓰면 너도 똑같아지는거야.”
유승이 깔깔깔 웃었다. 웃음소리가 너무나 소름이 끼쳐서 연 식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너도 옛날에 선생님이 하던 이야기, 교 과서에 있는 이야기만 하는구나. 흔해 빠지고 닳고 닳아 지겨운 “소리 ・・・・・・ “
“교과서에 많이 나왔다고, 사방에서 매일 듣는 말이라고 해서 옳은 것이 옳지 않은 것이 되지는 않아.”
준후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유승은 허탈한 듯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걸 이제야 알았어. 모든 걸 똑바로 배웠어. 당하면 당한 만큼 갚아 줘야 하고, 그래야만 되는 거야. 모든 일이 그래. 모든 것이다…………….”
유승의 몸 주위에 퍼져 있던 기운이 짙어지자 준후는 흠칫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너 그게 무슨 소리지? 너 지금…………”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몰랐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들이 많아. 아니,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하여튼 지금 나와 같이 있어. 아주 많아. 방해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걸.” 정원, 아니 정원의 몸을 빌린 유승은 다시 한번 기분 나쁘게 미소 지으며 쓰러져 있는 불량배들을 향해 한 손을 뻗었다. 그러 자 한 명이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를 내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 봐, 저놈들은 힘이 있다고 나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어. 그대로 되돌려 주는 거야. 얼마나 신나?”
유승이 손바닥을 휙 뒤집자 떠올랐던 불량배는 허공을 날아서 담벼락에 쿵 하고 부딪혔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준후가 소 리쳤다.
“그만해!”
유승이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만? 왜 그만해? 재미있는데 …………. 얼마나 재미있어?”
“저들을 다 죽일 작정이야?”
“천만에. 죽이긴 왜 죽여? 더 갖고 놀아야지. 오래오래, 오래 괴롭히다가 서서히 피를 말리면서 괴롭힐 거야. 내가 괴로웠던 것만큼 계속……………. 하하하.”
유승이 또 손목을 돌리자 쓰러져 있던 또 다른 불량배 한 놈이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손목을 계 속 비틀고 있었고, 우둑둑 하는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 려왔다. 준후는 씨근거리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외쳤다.
“너 너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지? 어떻게 그런 힘을 얻은 거지? 응?”
“하하하.”
유승이 고개를 준후에게 돌렸다. 정원의 몸을 빌린 유승의 얼 굴이 일그러지더니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로 번갈아가면서 바뀌 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그래, 난 혼자가 아니야. 여럿이 같이 있단 말야. 나처럼 억울 한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모두 기뻐하고 있어. 우릴 방해하려고 하니? 너는 우릴 무서워하지도 않고, 뭔가 놀랄 만한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아. 그렇지만 안 돼. 우린 수가 많거든.”
준후는 입술을 깨물며 당황했다. 이미 유승은 혼자가 아니었 다. 유승과 비슷한 일을 당해 원한을 가지고 있던 수많은 부유령 과 지박령들이 정원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였건 한번 영에게 몸을 빌려 주었던 정원의 몸은 저항력이 약해져서 다른 영들이 쉽게 들어갈 수 있게 된 상태였고, 사람의 몸을 찾아 헤매던 수많은 영들이 정원의 몸속으로 몰려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나와 그 몸은 정원이의 몸이야. 너희가 들어가 있으면 안 돼.”
“잠시 빌리는 거야. 그 정도는 상관없잖아?”
“몸을 빌려서 무엇하려고?”
“뭘 하냐고? 하하하. 몰라서 물어?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그 리고 여기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됐는데…………? 우 린 착하게 살려고 애썼어. 어른들이 하는 말씀이나 교과서에 나 오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고……………. 그런데 어떻게 됐지? 지 금 우리는 무슨 꼴이 되어 있지?”
“유승아, 정말로 저 불량배들이 너를 죽였니?”
“그들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유승과 준후의 대화를 들었는지, 쓰러져 있던 불량배 하나가 아직 조금 기운이 남아 있었던 듯 뒤척거리면서 겨우 말했다.
“아니야. 우리가 죽인 것이 아니야. 왜 그런지 우리도 알 수 없 어. 다만…………….”
유승이 싸늘하게 쏘아보자 그 불량배는 뭔가에 얻어맞은 듯 퍽 소리를 내며 뒤통수를 벽에 부딪히더니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정말 쟤들이 그런 것이 맞아? 아니라고 하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니야! 저들이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죽지 않았을 거야. 나는…………….”
“네가 왜 죽게 되었지?”
“나는………… 나는……”
유승의 얼굴은 준후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뭔가 떠올리는 표 정으로 변했고, 유승의 영이 기억을 되살리자 그것이 준후의 마 음속에도 전달되어 왔다.
유승은 쫓기고 있었다. 뒤에는 불량배들이 깔깔거리고 소리를 지르며 쫓아왔고, 유승은 이미 많이 얻어맞아서 빨리 뛸 수 없 는 상태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도망쳐야만 했다. 힘겹게 도망치 던 유승의 등 뒤로 유리병이며 돌멩이 따위가 날아들었고, 그런 것에 맞을 때마다 유승은 몸이 시큰거리며 다리가 풀리는 것 같 았다. 사냥당하는 짐승・・・・・・ 무슨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단지 한순간의 기분풀이를 위해 비참하게 두들겨 맞는 신세…………. 사 력을 다해 뛰어 보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잡혀 버릴 것이 분명했 다. 그때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지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공 사를 위해 뚜껑을 열어 놓았던 하수도의 맨홀을 미처 피하지 못 한 것이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고약하고 끈적끈적한 기분 나 쁜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허우적거리면서 가라앉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려 달라고 소리치면서 위를 쳐다보았을 때, 유승의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그나마 한 점 빛이 들어오고 있던 맨홀 뚜껑이 서서히 닫히는 광경이었다. 유승은 하수구의 썩은 진흙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런 뒤 지금은………….
준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도…………… 이래도 저들이 나를 죽인 게 아니야? 그들은 나 를 구해 주지 않았어. 그러기는커녕 뚜껑을 닫아 버렸고……………. 그리고 ・・・・・・ “
준후의 몸이 덜덜덜 떨렸다. 그리고 쓰러져서 신음 소리를 내 고 있는 불량배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불량배는 방 금 알 수 없는 힘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필사 적으로 이야기했다.
“우린 몰라! 몰라! 그때 그 녀석이 갑자기 눈앞에서 없어져 버 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놓친 줄 알았단 말이야. 정말……… 정 말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누구를 죽인다는 생각은…………. 그건 무 서워서………….”
“거짓말! 나를 죽였어! 나를 죽게 만든 건 바로 너희고, 맨홀 뚜껑을 닫아 버린 것도 너희야!”
“맨홀 뚜껑? 아니, 그건・・・・・・ 우린 그냥 거기 ………… 네가 없어 졌고 한 명이 자칫 거기에 빠질 뻔했기 때문에 그냥…………. 네가 설마 빠졌을 줄이야…………. 그런 줄은 전혀 몰랐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소리도 들리지………….”
“내가 그리로 빠졌어. 아직도 나는 그 안에서 썩어 가고 있어. 바로 너희 때문에 ……………”
유승은 다시 한번 불량배들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더 이상 참 을 수 없다는 듯이 으악 하는 소리를 질렀다. 사방에서 마구 회 오리바람이 일어나면서 검은 안개의 기운이 불량배들에게 덮쳤 다. 기절한 불량배들은 그나마 아무 말 없었지만 방금 정신을 차 렸던 불량배는 처절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만해!”
준후는 보다 못해서 품에서 부적 두 장을 꺼내어 검은 기운을 향해 던졌고, 부적은 불이 붙으며 새처럼 검은 안개 사이로 파고 들었다. 잠시 후 부적의 힘에 의해 검은 안개는 흐트러지듯이 사 라졌다. 유승은 준후를 노려보았다. 준후가 달래듯 그러나 단호 하게 유승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맞아, 저들은 잘못했어. 그렇지만 모르고 그랬다는 소 리도 맞는 것 같아. 저놈들은 그럴 담력도 없는 놈들이야. 더구나…….”
준후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방법을 써서는 안 돼. 지금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그건 너 자신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야. 너 자신이 지금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너는 왜 몰라?”
“죄를 저지른다고? 이게 무슨 죄야? 이건 보복이야. 정당한 복수라고!”
“복수라고? 이건 복수가 아니야.”
“아니야, 복수야!”
유승은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정원의 원래 목소리나 유승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였고, 그 목소리는 몸 안에 맺혀 있는 수 많은 영들의 목소리가 합쳐진 듯 합창처럼 사방을 메웠다.
“저들…………… 저들은 저렇게 죄를 지었어. 많은 죄를 지었어. 그 런데도 왜 멀쩡히 살아 있지? 나는 죽었는데……………. 억울해! 죄 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다고, 반드시 벌을 받게 마련이라고 했었 지. 그런데 저들에게 누가 벌을 내렸어? 저들이 무슨 벌을 받았 지? 오히려 저들은 히히거리며 장난을 치듯이 사람들을 농락하 고 있어. 세상에 누가 저들에게 벌을 내리지? 내가 안 내리면 누 가 내린단 말이야! 나라도 저들을 벌주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또…….”
“그건 안 돼!”
어느덧 유승의 목소리는 이제 한없이 많은 영들이 웅성거리는 합창 소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왜 안 돼? 왜 안 되느냔 말야! 이 세상에서 무얼 믿을 수 있 어? 아무것도 믿지 못해! 경찰도 도덕도 가르침도 믿을 수 없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고?”
“그래,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모든 건, 모든 건 헛것일 뿐이 야. 모두 미워! 밉고 지치고 뒤틀리고 더 이상 더 이상 도대체”
유승, 아니 이제 더 이상 유승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원한과 슬 픔을 간직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아다녔는지도 모르 는 지친 수많은 영의 얼굴들은 정원의 얼굴을 빌려 슬픈 표정으 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눈물은 이제 단순히 정원이나 유승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믿지 못하게 된 세상의 눈물이었고 세상의 슬픔이었다.
준후는 한숨을 내쉬면서, 떨면서 흐느껴 울고 있는 정원의 어 깨 위로 손을 얹었다.
“아무리 그래도 믿음을 버려서는 안 돼. 무슨 일이 있더라 도………….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순리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만은 저버려서는 안 돼. 모두가 그런 믿음을 저 버릴 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야. 지금 이 세상은 혼란 스러워. 나도 알아. 그렇지만 저들이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 서 네가 벌을 내리면, 네가 그렇게 벌을 내림으로써 범한 잘못은 또 누가 벌을 내리게 되지?”
“나는 잘못한 것이・・・・・・ 나는………… 우리는……………”
“저들도 그렇게 변명할지 몰라.”
“그렇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너희가 저들을 해친다면 그것도 죄는 죄야. 좋아. 마음대로 해 봐! 네가 저들을 벌고 혼내고 나면 또 누군 가가 너를 벌주고 혼내겠지? 저들이 죽고 난 다음에는 가만히 있 을 것 같아? 너는 그 생각을 해 보았어? 너와 똑같이 될 텐데. 지 금 저들은 몸에 얽매어 있고 너는 몸이 없어서 오히려 힘을 크게 발휘할 수 있는지도 몰라. 저들을 해치고 나면 저들도 너와 똑같 은 상태가 돼. 그다음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죽은 후에까지 다투고 싸우고…….. 영원히 그렇게 지내고 싶어?”
“아니 ・・・・・・ 그건…….”
준후는 고개를 저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준후의 얼굴에는 슬 픈 빛이 가득했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 아.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나도 나와 같이 있는 분들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버린다 면 어떻게 되겠어? 그렇게 되면 세상은 더욱더 혼란스럽게 되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면 그건………….”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왜 나만 계속 참으란 말이야? 이렇게 당하고도…………….’
“모든 것을 순리대로 기다리는 거야. 그리고 더 이상 떠돌아다 니면서 슬퍼하지 말고 안식을 찾아. 저들이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냐. 모르겠어? 아직도…………… 아직도 평온을 얻지 못하는 네가 가여워.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이제는…… 이제는 편해 져야 할 것 아냐?”
준후의 말에 유승, 아니 수많은 영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러가고 있었다.
“유승이 너도・・・・・・ 그리고 같이 있는 다른 분들도 모두 다……………모두 다 편히 쉬어요. 편안히 ·……아주 편안히 ………..”
준후가 나직하게 속삭이듯 말하며 입으로 주문을 읊자 정원의 몸 안에 들어 있던 영혼들은 슬픈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조용 히 하늘로 올라 어디론가 흩어져 갔다. 하나씩 둘씩………….
한 명씩 한 명씩 그 영을 마음으로 쓰다듬어서 올려 보내는 준 후의 마음속에 그들이 평상시에 겪었던 슬픔과 아픈 일들이 파 노라마처럼 밀려들었다. 준후는 슬픔 때문에 가슴이 짓눌리고 숨이 탁탁 막히고 온몸이 한없이 저려왔다.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도대체 사람이 사람에게 얼마나 악해질 수 있기에 이런 일들을 당한 사람이 계속 생겨나야 한단 말인가? 남녀노소, 하물 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까지…….
가지각색의 모든 종류의 원한을 가졌던 영들은 이제 준후의 힘에 의해 고요히 하늘로 승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슬픔만은 그대로 세상에 퍼져 있을 것이고, 이 세상은 점점 슬픔 과 아픔과 시기심과 다툼으로 가득 차다가 그대로 그 속에 빠져 서 없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준후는 계속 영들을 올려 보내면서 착잡한 상념에 잠겼다.
‘이런 세상이 과연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버티면 얼마나 더 버 틸 수 있을까?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은 핵무기나 천재지변이나 외계인이 쳐들어와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악함과 죄악이 뭉쳐져서 오게 되는 것이 아닐 까?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고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고 사 람을 원망하게 되고 사람끼리 미워하고 죽이게 되고, 그러고 난 다음…………….’
어느덧 정원의 몸속에 있는 영들은 다 빠져나가고 마지막 남 아 있던 유승의 영마저도 창백한 얼굴에 슬픈 표정을 지으며 정 원의 몸에서 고요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준후는 정원의 몸 바로 위쪽 허공에서 승천하지 않고 잠시 머물러 있는 영을 보았다. 유 숭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준후는 알 수 있었다. 준후는 고개 를 끄덕여 보였다.
“부모님이나 친구들한테는 내가 이야기해 줄게. 슬퍼하시겠지 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러니 더 이상 슬퍼 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편하게 쉬어. 편안하게………….”
준후가 말을 마치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자 유승의 영도 창백한 모습을 한 채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허공으로 사라져 갔다. 정원은 몸 안에서 영이 전부 빠져나가자 그 자리에 풀썩 쓰러 졌다. 뒤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연식은 이상한 소리들이 웅 웅 울리는 것을 들었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다. 주변은 슬픔으로 가득 찬 듯 우울한 느낌이 들었고 왠지 모르게 자기 자신도 그 분위기에 빠져 이유 없는 서러움이 밀려왔다. 연식은 자신도 잘 모르는 말을 떠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죽어서도 천당이 있고…………… 죄를 지으면 다 갚음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도 나쁜 짓을 하지 못할 텐데…………. 하다 못해 누가 옆에서 계속 보고 있다고만 생각한다면………… 누구라 도…….”
쓰러져 있던 불량배들이 신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가득 메운 슬픔에 자기도 모르게 젖어든 듯 주룩주룩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연식이도 울었고 준후도 눈물을 흘리며 쓰 러진 정원을 다독거려 정신을 차리게 해 주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소리가 들리고,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계속 드나들며, 아이들이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이 골목길이, 이토록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도 높은 담장으로 가로막힌 골목길 옆의 집 들에서는 누구 한 사람 바깥을 내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싸늘한 외등과 묵묵히 떠오른 달빛, 그리고 반짝이는 별들과 가끔 씩 스쳐 지나가는 별똥별만이 그러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