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17화 – 프랑켄슈타인의 후예 5

랜덤 이미지

퇴마록 혼세편 1권 17화 – 프랑켄슈타인의 후예 5


프랑켄슈타인의 후예

박신부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승은 실험 예정이었던 말의 냉동체를 윤희로 바꾸었으리라. 냉동체를 만드는 일은 자동 장비들의 도움을 받아 혼자서 할 수 있었다고 해도 어떻게 혼자 윤희의 시체를 이곳까지 들여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준승이 아무리 냉동실의 책임자라고 해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윤희의 시체를 이곳까지 가지고 왔지? 어떻 게?”

“으흐흑.”

준승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 작했다. 순간 뭔가가 문득 박 신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박 신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냉동된 말의 시체를 꺼 내고, 또 외부에서 시체를 이 안으로 몰래 들여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그렇다면……….

박 신부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뱉은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준승에게 물었다.

“혹시………… 윤희가 죽기 전에 연구소로 데리고 왔던 것은 아닌가?” 

“으흐흐흑.”

박신부의 눈이 갑자기 빛나더니 노기에 찬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러면 …………… 자네는 윤희를 산 채로 냉동시켰단 말인가?”

준승이 고통에 일그러지고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을 쳐들었 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죽은 상태로 냉동시켜 봐야 아무런 효 과도 없고, 그래서 ………… 윤희는 제게 모든 것을 맡기고………”

박 신부는 그때의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늦은 시간, 윤희 가 방문을 핑계로 연구소 내에 들어온다. 그리고 둘은 냉동고에 틀어박혀서 보관중이던 말의 시체를 꺼내어 폐기한다. 그런 다 음 수술대에 윤희를 눕힌다. 마지막 작별 인사는 어땠을까? 잠시 후 날카로운 금속 장비들이 윤희의 혈액을 빼내고, 몸을 초저온 으로 얼려서 서서히 컨테이너로…………….

박 신부는 애틋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준승은 눈동자가 풀린 채 박 신부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그 사람 제정신이 아니네. 극도로 굳어졌던 정신적인 긴장이 풀려서 지금 착란 증세를 보이는 것 같아.”

저만치 떨어져 있던 장 박사가 박 신부 곁으로 걸음을 옮기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박 신부는 조금만 더 참으라는 듯 장박 사를 제지하고는 준승의 입에서 중얼거리듯 빠르게 새어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너무 시간이 없었어요. 너무……. 흐흑흑……. 주말 이 틀 동안 서둘러 실험을 진행시키는 것은 너무⋯⋯⋯⋯⋯. 그래서 그 만………….”

“그래서 어떻게 됐나?”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보존 상태 검사 도중 윤희가 죽어 버렸 는데………… 몸에서 서서히 비생명 상태의 화학 반응이………….”

“그게 무슨 말이야? 저온 상태인데도 생명 반응이 나타난다는 건가?”

“그건 확실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승화되어 분해되는 것 같은 그런 ・・・・・・.”

“음!”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준승의 눈은 번쩍번쩍 광기로 빛 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는지 짐작할 만 했다. 사랑하는 애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것과 같은 결과가 되 고 말았으니…………. 박 신부는 조금이나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윤희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그래서 흑마술법을 배웠나? 구슬과 그리고……………”

“인도, 인도에서였어요. 학술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다가…..”

“어떤 주술이지? 그걸 말해야 하네!”

“저도 잘은 몰라요. 다만 구슬을….”

“구슬? 아까 그 구슬 말인가?”

“한 쌍의 구슬 중 하나는 윤희의 몸에 넣고 다른 하나는 제가 지니고 있으면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그래서 지푸라기라 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그 구슬. 아까 느껴진 사악한 기운도 거기서 나온 것이 틀림없군.”

박 신부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보석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구슬에 사람의 영을 봉인한다는 주술의 이야기 를.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달랐다. 준승의 말을 그대로 믿자면 윤희는 이미 냉동시키는 과정에서 죽음을 당한 게 분명했다. 그 런데 어떻게 윤희의 영을 다시 불러서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 을까?

“그래, 그 구슬을 윤희의 몸에 넣자 어떤 일이 생겼지? 응?” “그걸 넣자 몸이 갑자기……………. 얼마나 놀랐는지……………. 구울의 구슬(orb of Ghoul)을 넣자마자.”

박신부의 눈이 빛났다.

“구울? 지금 구울의 구슬이라고 했나? 구울의 구슬이 맞나?”

“예, 그, 그렇게 들었………….”

박 신부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구울은 인도에서 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걸어 다니는 시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좀비와 비슷하지만 좀비가 지능이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는 데 에 반해서 구울은 포학하고 살아 있는 것들의 생살과 피를 즐겨 먹는다는 마물이었다. 정말 구울의 구슬이라면 윤희의 몸은 이 제 구울, 그것도 꽁꽁 얼어붙은 냉동 상태의 구울이 된 것이 분 명했다.

“동물들을 죽이고 경비원을 해친 자가 바로 윤희란 말인가? 자네는 그 광경을 본 것이지? 그렇지?”

“그・・・・・・ 저는…..”

“그래서 자네가 그랬군! 이제 알겠어.”

박 신부는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준승은 윤희를 살리고 싶 은 일념에 흑마술의 구슬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 고 죽은 윤희의 몸에 저주받은 구슬을 넣어 본의 아니게 윤희를 괴물 구울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동물들의 떼죽음이나 경비원 의 죽음도 모두 윤희의 짓임을 준승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람이 죽었는데…………”

“전 그럴 수 없었어요. 어쨌거나 윤희는 살아났는데……………..”

“그건 살아난 게 아니네! 오히려 자네는 윤희를 괴물 구울로 만들어 버린 거야!”

“괴물…………….”

준승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눈에서 빛나던 광 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괴물이라도 좋아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다만…….”

박 신부는 오죽했으면 저런 생각까지 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 팠다. 하지만 준승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이봐, 준승 군!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굴레 같은 것이 지. 죽으면 모든 게 끝이네. 저 안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진정 윤 희라고 생각하나? 저건 윤희가 아니야!”

“아니에요! 저건 윤희예요! 윤희가 맞다고요!”

“영혼이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네.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 쨌든 자네는 윤희의 몸에 사악한 악령의 기운을 집어넣었어. 저 얼음덩어리가 변한 여자가 정말 자네가 사랑하는 윤희란 말인가?”

“맞아요! 윤희가 틀림없어요! 저건 틀림없는………….”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괴물을 만들었지만 자네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네!”

어느새 박 신부와 준승의 옆으로 다가온 장 박사가 노기 섞인 음성으로 외쳤다. 박 신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다가 별안간 준승의 어깨를 잡고 외치듯 말했다.

“윤희의 몸이었고, 윤희와 똑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다고 해도 저건 윤희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걸 이해 못하겠나. 응?”

“아아…….”

준승은 눈물을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몸을 휘청거렸 다. 그러나 박 신부는 준승의 어깨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해해 주세요. 저도 저게 윤희가 아니란 건 알아요. 하지만…..”

준승은 신음하듯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저렇게라도 윤희를………… 윤희를 살리고 싶었어요. 저렇게라 도”

“말도 안 돼!”

박 신부는 노기 띤 준엄한 표정으로 준승을 향해 소리쳤다.

“그건 자네의 이기심이야. 윤희는 이미 죽었고 그걸 되돌릴 수 는 없어. 자네는 지금 자신의 이기심만으로 윤희를 두 번이나 죽 인거야!”

“아니에요! 전, 전……………”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누구나 한 번은 맞닥뜨릴 생의 종착역 이지 때문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편안하게 보내 주어야 하는 거야. 죽어 가는 사람이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거나 이승에 연연해하지 않도록 함께 있고 싶다는 자네의 욕심 때문에 죽은 윤희를 저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편하 게 쉬지도 못하게 할 건가?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사랑이라는 허울을 둘러쓴 자네의 이기심일 뿐이지.”

“으흐흑. 전…….”

감정이 격해진 준승은 그 자리에 쓰러져 흐느꼈다. 장 박사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측은하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박 신부도 가슴이 뭉클해져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사이에 다가온 홍 형사가 권총을 뽑아 들고 박 신부에게 말했다.

“끝장을 냅시다. 신부님. 이건 살인이 아니겠지요?”

박신부는 한숨을 내쉬며 머뭇거렸다. 그 말을 들은 준승이 눈 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어 홍 형사의 다리를 붙들고 애원했 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윤희는 두 번이나 죽었어요. 또 죽게 할 수는 없어요. 제발………….”

홍 형사는 매달리는 준승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냉동실 문 쪽 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키 카드를 꺼 내 조심스럽게 슬롯에 그었다. 그러나 문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런! 저 괴물이 문을 작동시키는 컴퓨터를 얼려서 부숴 버 린 것 같아요!”

홍 형사가 놀라서 키 카드를 슬롯에 여러 번 그었지만 문은 요 지부동이었다. 그때 갑자기 철문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열리 기 시작했다. 열린 문틈으로 하얀 냉기가 폭발하듯이 뿜어 나왔다. 홍 형사의 몸은 기세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고 삽시간에 허 연 서리로 뒤덮였다. 놀란 박 신부와 장 박사가 문을 밀어 닫으 려고 했으나 문은 꿈쩍도 없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계 속 조금씩 열렸다. 곁에 있던 형사 한 명과 다시 일어난 홍 형사 까지도 합세하여 문이 열리지 않도록 붙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갑자기 문 저편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안개같이 희뿌옇 고 차가운 바람이 회오리치며 나왔고, 그 바람에 홍 형사와 장 박사, 형사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섰다. 세 사람 의 몸은 온통 흰 서리로 덮였다.

“일단 피하시오!”

냉기를 이기지 못한 박 신부가 크게 소리를 치고는 뒤로 물러 섰다. 다른 한 명의 형사는 왼쪽으로 뛰어갔고 홍 형사와 장 박 사는 준승을 끌고 오른쪽으로 피했다. 박 신부도 세 사람을 몸으 로 감싸면서 오른쪽으로 피했다.

고장 난 문은 잡고 버티는 사람이 없자 와르릉 소리를 내면서 단번에 열려 버렸다. 안에서 찬 기운이 하얀 서리와 함께 폭발하 듯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건 얼음 괴 물로 변한윤희 혼자의 힘으로만 만들어 낸 냉기 같지 않았다. 끌려가던 준이 크게 외쳤다.

“헬륨통!”

박 신부는 아차 싶었다. 안에 갇히게 된 윤희, 아니 얼음의 구울이 마구 날뛰다가 방 안의 헬륨과 질소 용기들을 깨뜨린 모양 이었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냉기가 복도를 가득 메우면서 퍼져 나갔고, 도망치는 박 신부 일행의 몸에도 얼음이 매달려서 바삭 바삭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발도 바닥에 얼어붙어서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박 신부 일행은 서로 부축해 가며 정신없이 달 렸다. 그러나 공기가 너무 차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고, 삽 시간에 차가워진 공기 속의 수증기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엉겨 붙어 일행을 얼음덩어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 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김 형사!”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듣고 자지러질 듯 소리를 지르며 몸을 돌 려 뒤로 뛰어가려는 홍 형사를 장 박사가 와락 끌어당겼고, 네 명의 일행은 쓰러질 듯 구르며 복도 한구석에 있는 방의 문을 열 어젖혔다. 그들의 뒤로 구름처럼 거대한 냉기가 와르릉 얼음 부 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박 신부는 재빨 리 문을 닫았다. 그 문을 닫는 사이에도 문에 얼음이 붙어서 두 껍게 변해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문이 닫히자 장 박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웃옷을 털어 내게! 어서! 얼음이 더 엉기기 전에!”

방 안으로 피하긴 했지만 이곳도 최소한 영하 이십 도는 될 것 같았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네 사람의 몸에는 고드름과 얼음덩어리가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박 신부가 사제복 자 락을 거칠게 털어 냈고, 장 박사도 뻣뻣해진 가운을 벗어 던졌 다. 한껏 웅크리고 떨던 홍 형사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책상 주위에 있던 종이와 책을 되는 대로 땅에 떨어뜨리고는 라이터 불을 켜려고 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박 신부가 펄쩍 뛰 면서 홍형사를 말렸다.

“불을 피우면 스프링클러가 작동될 것이고, 그러면 우린 모두 끝장이네!”

박 신부는 이를 악물고 문밖을 노려보았다. 김 형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한 번 뒤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내가 나가면 바로 문을 닫아요!”

“안 돼! 가짜 신부! 나가면 죽어! 이건 자네 힘으로도 안 돼!” 

소리를 지르면서 박 신부를 부둥켜안다시피 만류한 것은 장 박사였다. 박 신부는 장 박사를 떼고 나가려 했으나 일행을 몸으 로 막아주려고 냉기를 과하게 쐰 탓인지 팔다리가 남의 것인 양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놓게!”

“안 돼! 자네가 나가서 잘못되면 우린 어쩌라는건가. 응?” 

박 신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건 냉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박사는 박신부가 이제 나가랴 싶어 안심하고 박 신부를 잡고있던 손을 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옷자락이 박 신부의 사 제복에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장 박사가 박 신부의 옷에 얼어붙어 버린 자신의 팔을 힘을 주어 떼어 내자 장 박사의 겉옷 자락이 우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나갔다.

홍 형사가 전화 수화기를 들고 뭐라 급하게 말하려다가 욕을 하면서 내동댕이쳤다. 전화선도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동파된 것 같았다. 박 신부는 고민에 빠져 들었다. 냉동 인간이 된 윤희 가 변한 구울이라는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도무지 묘책 이 떠오르지 않았다.

윤희의 몸 안은 피 대신 냉매가 흐르고 있었고 영하 백사십도 이하로 내려가 있는 상태라 손을 대는 것은 고사하고 가까이 접 근하기도 힘들었다. 홍 형사는 총을 쏘면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박신부가 보기에는 단단한 얼음덩어리로 된, 어차피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구울이 권총 몇 방에 쓰러질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윤희가 움직이는 것이 구울을 만든 흑마술 때문이라는 것은 알았으니 어쩌면 박 신부의 기도력으로 악의 힘을 몰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력을 모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 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가만…………. 아까 자네가 했던 말!”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박 신부가 외쳤다. 장 박사와 홍형 사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박 신부가 돌파구를 마련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고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아까 자네가 말했었지? 구울의 구슬은 한 쌍이었다고. 하나 는 윤희의 몸에 집어넣고 다른 하나를 자네가 가지고 있으면 윤 희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야. 그랬지. 응?”

준승은 거의 실성한 듯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박 신부 의 말에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홍 형사가 준승의 멱살을 잡 고 흔들어 대면서 소리를 쳤다.

“어서 대답해! 어서!”

“구, 구슬은 한쌍. 그러니까….”

“그런가 아닌가만 대답해!”

홍 형사가 준승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멱살을 흔들어 대는 사이에 다시 문이 와르릉 소리를 내며 떨렸다. 소름이 오싹 돋았 다. 재빨리 눈을 돌리자 문이 하얗게 변해 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은 꽉 잠겨 있는데,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장 박사가 중얼거리자 박 신부도 불안한 듯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어. 좌우간 구슬에 대해서…………….”

박 신부의 말은 문 쪽에서 쩡쩡거리며 들려오는 소리 때문에 끊어졌다.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문에 붙어 있던 얼음 조각들 이 조금씩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뒤를 이어 쾅 하고 문을 두 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얼어붙게 만들어 깨뜨리려는 것 같아!”

장 박사가 놀라서 외쳤다. 어떤 물건이든지 극저온으로 냉동되면 몹시 약해져서 깨지기 쉬운 상태가 된다. 구울로 변해 버린 윤희가 문을 부수려고 차가운 숨결을 토하면서 문을 두들기는 것이 분명했다.

“어서 말하게. 윤희를 잠재울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구슬에 달려 있는 게 분명해.”

위기일발의 다급한 상황에서도 박 신부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가만히 생 각해 보니 조금 전 냉동고 안에서 윤희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준승과 홍 형사의 몸싸움으로 준승이 그 구슬을 놓친 직후 와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 윤희는 지금보다 훨씬 얌 전했음이 틀림없다. 윤희가 저렇게 난폭해진 것은 준승이 구슬 을 놓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서 이야기하게 준승 군! 구슬을 자네가 가지고 있을 때 윤 희는 조용하지 않았던가?”

“구슬을 제가 가지고 있을 때는………..”

순간, 다시 한번 문이 쾅 소리와 함께 눈에 보일 정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놀란 홍 형사가 문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장박 사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박 신부는 다급해져 준승의 어 깨를 잡고 외쳤다.

“어서! 구슬로 윤희를 잠잠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 것 아닌가. 응?”

“구슬・・.구슬을 내가 손으로 쓰다듬고 있으면 윤희는 잠들고…….”

“좋아! 구슬은 어디 있지? 아까 줍지 않았나?”

준승이 겁먹은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였다. 구슬은 냉동실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박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일 단 윤희의 차가운 숨만 막을 수 있어도 구울의 악령을 떼어 버리 는 것쯤은 박 신부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성싶었다. 

“할 수 없네. 방법은 하나뿐이야. 장 박사, 홍 형사, 잘 듣게.”

“예?”

“무슨 생각이라도 있나?”

우지직 소리를 내면서 갈라져 가는 문을 초조하게 바라보면서 홍 형사와 장 박사가 긴장된 얼굴로 박 신부의 말에 귀를 기울 였다.

“내가 어떻게든 윤희를 막고 있겠네. 그사이에 자네와 홍형사 는 준승 군을 데리고 냉동실로 가서 구슬을 찾게. 어떻게든 윤희 를 잠잠하게 만들어 주게.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이것뿐이네.”

“그건 자네에게 너무 위험해! 저 냉기를 직접 쐬면 단일 초도 견디지 못할 걸세!”

“차라리 제가 총으로 어떻게……………..”

홍 형사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지만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총으로 간단히 끝날 것 같지가 않네. 총으로 해결될 문 제였다면 아까 김 형사도 그냥 당하진 않았을 거야. 여러 말 말 고 부탁하네.”

“하지만……………..”

장박사와 홍형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방법은 이것뿐이야. 이러다가 저 문이 부서지고 윤희가 들어 오고 나면 모두 이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얼어붙어 버릴 거야. 알겠지?”

말을 마친 박 신부는 기도력을 모았다. 박 신부의 몸에서 휘황 한빛이 번져 나오자 홍 형사의 입이 놀란 듯 딱 벌어졌다. 장박 사가 걱정스러운 듯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박 신부는 벌써 문 쪽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이봐! 가짜 신부!”

장 박사가 안타까운 듯 소리쳤으나 박 신부는 베케트의 십자 가를 손에 꼭 쥐고 기도력을 모아 오라의 힘으로 문을 힘껏 밀어 붙였다. 꽁꽁 얼어 약해져 있던 문은 오라의 힘을 받자 폭발하듯 산산조각이 났다. 박 신부는 문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문 밖으 로 몸을 날리면서 외쳤다.

“어서!”

박 신부의 모습을 보고 장 박사가 이를 악물면서 홍 형사를 잡아끌었다.

“어서 가세! 어서!”

홍 형사도 정신이 퍼뜩 드는지 팔을 잡고 끌어당겼으나 준승은 다리가 풀린 듯 휘청거렸다.

“이런, 야, 인마! 정신차려!”

문밖에서는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안개 같은 기류들이 몰려다 니는 것으로 보아 박 신부가 있는 힘을 다해서 냉기를 뿜어 대는 윤희를 밀어붙이며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장 박사가 당황해서 열 린 문과 준승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준승 을 끌고 냉동실까지 간다면…………….

“자네 여기서 잠시 준승 군을 지켜 주게! 내가 다녀오겠네!” 

장박사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문밖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당 황한 홍 형사는 어찌할 줄을 몰라 씩씩대다가 따귀를 세차게 후 려쳤지만 준승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 신부는 분명 냉동실로 가는 길 반대쪽으로 윤희를 밀어붙 였을 것이다. 장 박사는 박 신부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방향을 쳐다보지 않고 냉동실 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복도와 천장, 바닥 이 얼음으로 뒤덮여 마치 얼음 굴처럼 변해 버렸지만 놀랄 겨를 도 없었다. 장 박사는 자꾸 미끄러지려는 것을 조심스럽게 중심 을 잡아 가며 앞으로 내달았다. 자꾸 숨이 막혔다. 냉기도 냉기였지만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깔깔해져서 견딜 수가 없을 지 경이었다.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모조리 벽과 바닥으로 얼어 붙어서 극도로 건조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 만 더 있다가는 그대로 미라가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등 뒤쪽에서 계속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희뿌옇고 차가운 기 류 때문에 안경에 서리가 잔뜩 끼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장 박사는 냉동실 문 앞에 도착했다. 마음은 급했지만 앞이 보이지 않아서 급한 대로 안경을 쓴 채로 안경알을 손으로 문질렀다. 희미하게 주변 풍경이 드러났다. 두리번거리던 장 박 사의 눈에 누군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장 박사는 누구냐고 부르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걸음을 멈추었 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장 박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왜?”

장 박사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려다가 문득 그 사람을 보 고는 몸이 얼어붙는 듯 섬뜩해졌다. 앞에 뻣뻣이 서 있는 사람은 김 형사였다. 그러나 김 형사는 얼음 조각상처럼 얼음과 성에를 온통 뒤집어쓴 채 얼어 있었다. 공포와 놀라움으로 굳은 얼굴과 크게 벌린 입, 구겨진 인상으로 보아 윤희를 보고 총을 쏘려다가 차가운 숨결 한 방에 미처 방아쇠를 당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 어붙어 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김 형사임을 알아본 장 박사가 놀라서 비명을 지르자 김 형사 의 얼어붙은 얼굴 한쪽이 쩍쩍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더니 이내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여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장 박사였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는 질려 버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공포와 두 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한 장 박사는 미친 듯이 냉동실 안으로 뛰 어들다 미끄러져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냉동실 안에서는 계 속해서 쉭쉭 소리와 함께 가스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장 박사는 냉동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얼굴과 손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몸이 얼어붙고 있다!

장 박사는 놀라서 급하게 몸을 일으키려고 바닥을 짚었으나 손바닥이 그대로 바닥에 얼어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장 박사 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찌지직 하는 소리 와 함께 손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무심코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아악!”

손바닥 가죽이 바닥에 붙어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 장 박사 는 기절할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미끄러졌다. 순간, 그의 눈에 바닥의 얼음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검은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박 신부는 몸 여기저기의 감각이 사라져 버려 팔다리가 남의 것처럼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조금이라도 몸의 기도력을 늦춘다면 당장에 꽁꽁 얼어붙은 동태 꼴이 될 것이 분 명했다.

“다른 자의 몸을 지배하는 사악한 힘은 물러가라!”

박신부는 있는 힘을 다해 구울로 변한 윤희를 향해 조금씩 힘 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오라가 선명한 색깔로 박 신부의 몸을 온 통 감쌌다. 윤희는 오라에 닿지 않으려고 뒤로 물러서면서도 섬 뜩하게 차가운 입김을 박 신부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 댔다. 오라 막이 뿜어내는 힘은 박 신부의 연륜이 깊어가면서 점점 강해졌 고, 특히 베케트의 십자가를 얻은 후에는 힘이 배가되어서 어지 간한 물리력은 막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온도가 너무 낮아 평소 의 힘에 훨씬 못 미쳤다. 그나마 오라로 방어하지 않는다면 걸음 을 옮기려던 자세 그대로 꽁꽁 얼어붙어 버릴 것이다. 때문에 박 신부는 오라의 구체를 내쏘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조금이 라도 더 버티기 위해서 모든 힘을 자신을 보호하는 데에만 쏟고 있었다. 어둠에 근본을 두는 윤희는 오라에 본능적으로 접근하 려 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박 신부는 이렇게 버티는 동안 준 숭이 구슬로 윤희의 움직임을 정지시켜 주기만을 바랐다.

주변에서는 소화전의 작은 창이나 연구소 천장 쪽으로 이어진 스프링클러의 수도 파이프 따위들이 꽁꽁 언 채로 깨어져 나가 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박 신부의 사제복 자락도 땅에 쓸릴 때마다 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어 찢어지거나 부서져 나갔다. 젖어 있지 않은 옷자락인데도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되어 달라 붙으면서 얼어 버렸다.

박 신부의 얼굴과 검은 사제복을 입은 몸에도 서리가 하얗게 끼어서 눈사람을 방불케 했다. 그래도 박 신부는 이를 악물고 걸 음을 옮겼다.

“죽은 자를 모독하는 짓을 그만두고…….”

그때 한두 걸음 천천히 내딛던 박 신부의 발이 바닥에 얼어붙 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박 신부가 안간힘을 써서 땅에서 다리를 떼어내려고 애썼지만 감각이 없어진 다리는 원하는 대로 움직 여주지 않았다.

‘이런!’

박신부가 다가오는 것을 멈추자 계속 차가운 숨을 내뱉던 윤 희가 멈칫했다. 박 신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윤희는 푸른색 을 띠는 얼음으로 두껍게 덮이고 고드름까지 주렁주렁 달린 끔 찍한 몰골이 되어 더 이상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좋다. 일격을 안겨 주마!’

박신부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기도력을 줄여 오라의 막을 약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윤희는 기다렸다는 듯 우직우직 소리를 내며 박 신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홍형사는 준승을 간신히 바로 세워 놓고는 박 신부를 돕기 위해 총을 빼어 들었다.

“이런 염병할!”

총알의 장전 상태를 보기 위해서 공이치기를 뒤로 당겨 보았 으나 총이 얼어 당겨지지가 않았다. 홍 형사는 하는 수 없이 입 김을 총에 불면서 연신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갑자기 장 박사가 거의 구르다시피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박사님!”

장박사는 하얗게 성에로 온몸이 뒤덮인 채 손을 꼭 쥐고 있었 다. 손에는 끔찍하게도 붉은색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손에서 피 가 흘러내리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박사님! 그 손…….”

“난 괜찮……..”

장 박사는 마시면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변한다는 헬륨가스를 마셔서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힘들게 중얼거리면서 얼어 붙은 손을 홍 형사에게 내밀었다. 손에는 피 얼음이 뒤엉킨 검은 구슬이 놓여 있었다.

“아! 이것이!”

홍 형사가 반색을 하면서 구슬을 받아 쥐려는 순간 나뭇등걸 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장 박사가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준승 이 하얗게 질린 채 돌로 만든 재떨이를 들고 떨며 서 있었다.

“미안…… 난 못 “주, 준승군!”

놀란 장 박사가 소리쳤다. 준승은 눈을 꼭 감으면서 장 박사를 향해 떨리는 손으로 재떨이를 힘껏 내리쳤다.


박 신부는 신경을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앞으로 몸이 얼마 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무거워진 눈꺼풀도 감기기 시 작했다. 윤희는 머뭇거리면서도 점점 박 신부에게 다가서고 있 었다. 큰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윤희가 박 신부에게 접 근하도록 해야 했다. 윤희의 손끝이 박 신부의 몸에 거의 닿을 만 큼 가까이 다가온 순간, 박 신부의 입에서 일갈성이 터져 나왔다.

 “야아!”

박신부가 기합을 넣으면서 있는 힘을 다해 기도력을 발하자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거대한 파장의 선명한 광채를 띤 오라가 허 공에 둥글게 맺히더니 박 신부에게 다가든 윤희를 단번에 밀어 붙였다. 박 신부의 필생의 힘이 담긴 엄청난 오라를 맞은 윤희의 몸이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를 내며 오라에 엉킨 채 공중을 날아 벽에 부딪혔다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됐다!”

박 신부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면서 윤희에게 다가가려 했지 만 얼어붙은 발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윤희가 차가운 입김을 뿜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살 만했다. 어떻게든 발을 떼어 보려고 움직이는데 저쪽 방에서 달려 나오는 준승이 보였다.

“준승 군! 구슬은…….”

박신부는 준승을 소리쳐 부르다가 멈칫했다. 박 신부를 본 준 숭이 질겁을 하며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묵직한 소 리를 내며 떨어뜨린 것은 돌로 만든 재떨이였다.

“장 박사는? 홍 형사는? 혹시…”

준승과 함께 있어야 할 장 박사와 홍 형사가 방에서 나오지 않 자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윤희야…….”

준승은 얼빠진 사람처럼 중얼거리면서 쓰러져 있는 윤희에게 로 시선을 돌렸다. 박 신부가 잠시 시선을 놓은 사이, 윤희는 얼 음 부딪히는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준 숭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준승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박 신부의 일격으로 벽에 부딪히며 부서져 나간 윤희의 한쪽 팔이 었다.

“이런 신부! 네가…………… 네가 윤희를……………”

“준승군! 장 박사와 홍 형사는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윤희를……………. 그건 안 돼…………. 절대…………….”

준승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 같았다. 멍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돌 재떨이를 집어 들었다. 박 신부의 발은 아직도 바닥에 단단히 얼어붙어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준승은 박 신부가 움 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박 신부는 다가오는 준 승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네, 그렇게 마음이 약한가?”

“닥쳐! 네가………….”

준승이 울부짖으며 재떨이를 휘둘렀다. 제정신이 아닌 준이 휘두른 재떨이는 머리를 정통으로 맞히지 못하고 박 신부의 어 깨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 신부는 충격으로 몸을 움찔했 으나 주춤거리지 않고 몸을 폈다.

“어쩌려고 이러나?”

박신부는 조용히 말했다. 준승은 바닥에 떨어진 재떨이를 주 워 들더니 박 신부를 향해 그것을 휘두르려다가 박 신부의 서글 픈 눈길과 눈이 마주치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잘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게……….”

준승은 몸을 거의 일으킨 윤희와 박 신부, 그리고 꼭 쥐고 있 던 구슬과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 떨어져 있는 윤희의 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자네의 마음은 알 수는 있을 것 같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네. 자네는 어떤 것이 옳다고 믿나, 응?”

“흐흐흑.”

준승의 눈에서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은 허공에서 얼음덩어리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영원한 것은 마음이지 육체가 아니네.”

박 신부의 말에 준승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집어 들었던 재떨 이를 떨어뜨리고는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몸을 일으 켜 세우고 있는 윤희의 존재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 사이의 대화 가 일순 끊어졌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몇 겁의 시간이 흐른 것 처럼 길게 느껴졌다. 박 신부를 쳐다보고 있는 준승의 눈은 이제 공포와 집착에서 해방된 듯 더 이상 흐릿하게 질려 있지 않았다. 눈물에 젖어 성에로 뒤덮인 얼굴에서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죄송합니다. 신부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박 신부가 준승의 손 위에 놓인 구슬을 가리 키는 순간, 이제 완전히 몸을 일으킨 윤희가 우지직거리며 박 신 부와 준승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박 신부가 오라 막 을 펼치려 하자 준숭이 제지하고 천천히 윤희의 앞쪽으로 걸음 을 옮겼다.

“이봐, 준승 군! 자네…………….”

준승은 박 신부의 말을 뒤로 흘리고 윤희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박 신부는 준승을 뒤로 끌어내려고 했으나 얼어붙 은 발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우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 가오던 윤희는 준승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준승의 한쪽 어깨가 삽시간에 하얗게 변하면서 눈에 띌 정도로 뻣뻣해졌다.

“뭐 하는 건가, 준승군!”

준승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아주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만 입에서 흘러나왔다

“윤희야, 미안해…”

박 신부는 기도력을 모아 오라의 구체를 윤희 쪽으로 날리려 고 했으나 준이 가로막고 있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뭐라 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준의 결연한 태도를 보고는 조용 히 한숨만 쉴 뿐이었다.

윤희가 길게 숨을 내뱉자 이번에는 준승의 한쪽 다리가 뻣뻣 하게 굳어 버렸다. 그러나 준승은 멈추지 않고 절룩거리면서 계 속 윤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장 박사에게 빼앗은, 피 얼음이 엉켜 있는 검은 구슬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준승 군!”

“윤희야, 미안해. 그리고 신부님도… 모두 죄송…………….”

준승의 슬픈 목소리가 나직이 들리는 순간, 준승은 자신의 바 로 앞까지 다가온 윤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윤희를 껴안자마자 준승의 몸은 그대로 두꺼운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윤희는 준승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얼음덩어리로 변해 버린 준승은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준승은 마지막 기력을 다해 손바닥 위의 구슬을 바닥에 던졌다.

“준승군!”

박신부의 외침과 동시에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검은 구슬이 쨍 하는 소리를 내며 반으로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준승 을 뿌리치려고 꿈틀대던 윤희의 몸이 준승에게 안긴 채 그대로 정지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던 복도 에 박 신부의 애잔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바보 같은 사람…………….”

박 신부의 눈에서 굵은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이 제 눈물은 더 이상 얼지 않고 그대로 방울방울 사제복 자락을 적 시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쩌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는지도 몰라.”

머리와 손에 붕대를 잔뜩 감은 장 박사가 박 신부를 향해 중얼 거리듯 말했다.

뒤늦게 경찰들과 구조대가 달려오고 끔찍하게 얼어붙은 주검 들을 발견했으나 이에 대해 정작 현장을 목격하고 사정을 잘 알 고 있는 박 신부와 장 박사, 그리고 홍 형사까지도 머뭇거리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취급 부주의로 냉 매 가스통 폭발, 동사자 세 명으로 처리되었다.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는 동안 세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박 신부가 장 박사와 홍 형사에게 준승의 마 지막 모습을 얘기하자, 세 사람은 긴 한숨과 함께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장 박사가 침묵을 깨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자신이 만든 괴물을 처리하기 위해 그 의 모든 것을 버렸지. 이렇게 된 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라.” 박신부가 씁쓸한 표정을 떨치지 못하고 장 박사에게 말했다. 

“윤희를 힘으로 쓰러뜨렸을 때, 발이 얼어붙어 떨어지지는 않 았다 하더라도 윤희의 몸에 서린 악한 기운을 몰아낼 수 있었을 지도 몰라.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계속 마음에 걸리네. 만약 그 랬더라면 준승 군이 저런 식으로 목숨을 던지게 하지 않았을지 도 모르는데…………..”

박 신부의 말에 장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가짜 신부.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거야. 자네도 무의 식중에 일의 마무리를 준승 군이 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 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나?”

박신부가 한참 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장 박사도 따라 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가짜 신부. 준숭이 그 친구는 바보 멍청이였지만……… 그래도 끝마무리는 제대로 한 것 같아.”

“그래도 목숨을 버렸어.”

“그때 목숨을 버리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자살했을 거야.”

“추측일 뿐이지.”

“답답하군. 준승 군이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린 것은 그 친구 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훌륭한 거야. 자네는 사람의 육체보다는 영혼을 구원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었던가? 자네는 준승군 스스 로 깨달음과 속죄를 할 기회를 준 것뿐이야. 그러면 됐지, 뭘.” 

박 신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엉킨 머릿속이 어지러울 뿐이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는 준승 군에게서 숭고한 사랑의 한 면을 본 것도 같지만, 그래도 준승 군의 행동 은 옳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과연 윤희 양을 진정으로 사랑했 다고 볼 수 있을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박신부는 장 박사의 손과 머리에 감긴 붕대를 보면서 말했다.

“자네, 손과 머리는 괜찮나? 아프진 않은가?”

“아프니까 붕대를 감은 것 아닌가? 그것도 몰라?”

박신부가 머쓱해하는 사이 장 박사가 중얼거렸다.

“얼어붙은 시신들은 빨리 화장해야 하네. 급속히 얼었다가 녹 으면 형체가 흐트러지기 쉽거든. 난 거기에 가봐야겠네.”

“흠.”

박 신부의 머릿속에 준승이 윤희를 꼭 끌어안은 채 숨을 거두던 광경이 떠올랐다. 박 신부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장 박사가 여 전히 딱딱하게 말했다.

“내 권한인지는 모르겠네만, 그 둘은 죽은 자세 그대로 화장하 게 해야겠네. 행여 시신을 손상시키면 안 되니까 말이야.”

그 말을 남기고 홍 형사와 함께 총총 걸어 나가는 장 박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박 신부도 비로소 굳어 있던 얼 굴을 풀고 장 박사의 뒷모습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둘 다 편안해질 거야.”

얼음들은 모두 녹아 곳곳에 질퍽거리는 물구덩이를 만들고 있 었지만 박 신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사제복 자락을 끌면서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음이 후련해지기는 했어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아마도 이번 일은 박 신부에게 영원 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 같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