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2화 – 와불이 일어나면 1 : 길었던 휴식
길었던 휴식
겨울답지 않게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나서,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자들을 뿌리치느라 신분을 감추고 어렵사리 한국으로 돌아온 퇴마사 일행은 특별한 일 없 이 오래간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몇몇 끈질긴 기자들은 지칠 줄 모르 고 단서를 쫓고 있었다. 뉴욕의 경찰 당국에서는 ‘알 수 없는 일’ 로 치부하여 단속을 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블랙서클과의 마지막 대결을 치른 폐허는 어쩔 수 없었다. 수백 명의 인원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선 채로 의식을 잃어 몇 시간이 날아가 버렸다. 아 무도 그사이의 일은 기억하지 못했고 설명하지도 못했다. 전쟁 터를 방불케 할 만큼 엉망이 되어 있는데도 화약이나 총기를 사 용한 흔적이 이반 교수가 총을 쐈던 곳을 빼고는 전혀 없는 점, 퇴마사들이 중상을 입었는데도 안에 있던 다른 자들은 흔적 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 등. 다만, 세상은 평온했다. 어떤 무시무 시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거나 해프닝이라 면 몰라도, 무슨 일이 정말 일어났고 누군가 그것을 막았다면 그 럴 수 있는 사람은 퇴마사들밖에 없었다. 보도진이 벌 떼같이 달 라붙지 않았다면 되레 이상했을 것이다.
보도진을 따돌릴 수 있었던 것은 승희의 투시력 덕분이었다. 보도진은 별별 핑계를 다 대고 변장까지 해 병원 출입 금지 구역 으로 들어오려 했으나 아무리 변장한들 승희에게 마음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에야 별수가 없었다. 좌우간 백호와 연희가 귀 국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퇴마사 일행은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 고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그들은 이제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백호는 또 무슨 일인가를 추진하고 있어서 주기 선생 상준이 나현정, 사천왕 같은 주술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퇴마사들의 여력을 아끼려는 배려인지 그들에게는 일을 의뢰하지 않았다. 이 기회에 현암은 한 달 이상 여유를 갖고 그 동안 새로 깨달은 여러 가지 무공(탄(彈)’ 자결 등)을 완숙하게 익히고자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고, 박 신부는 차제에 그들이 활 동할 밑거름인 과수원을 매각 처분하기 위해서 세속의 잡일에 시달리고 있었다. 승희는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연희는 그 후에도 계속 중요한 통역 의뢰가 많아 바쁘게 지냈다. 물론 남들이 보면 바쁘게 지내는 것 같지만 이들에게는 나름대로 한가한 시간이었다.
시간이 남아돌자 몸이 근질근질해지는 것은 준후였다. 이제 열다섯 살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키는 별로 크지 않아서 여전 히 어려 보였다. 그래도 나이는 먹어 가는지 부쩍 호기심이 왕성 해지고 가만히 앉아서 수련하는 것을 지겹게 생각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일 때문이었기는 했어도 외국까지 나가 돌아다니다가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자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허나 자신이 심심하다고 각자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귀찮게 굴 성격은 아니었다.
준후는 요즈음 백호에게 자주 놀러 갔다. 정식 학교 교육을 받 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이 아는 것을 잘 알지는 못했지 만주술에 대한 지식만큼은 놀랍도록 풍부했다. 어려서 이해하 지 못하는 주술들을 해동밀교의 다섯 호법은 준후에게 반강제로 달달 외워 두게 했는데, 세월이 흘러 사고가 깊어져 가면서 그때 외운 것들이 진가를 발휘했다. 시간을 때울 겸, 흰 한복 자락을 휘날리면서 대법원이나 검찰청 건물의 깊숙한 곳을 태평한 얼굴 로 휘적휘적 누비는 준후의 모습은 이제 그곳 사람들에게는 일 상이 되었다. 결국 준호는 백호가 은밀히 명령을 받은 소위 ‘중요한 프로젝트’에 고문 역할로 참가하기에 이르렀다.
부동산 매각 일로 골머리를 앓던 박 신부가 준후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춥지 않은 어느 겨울 저녁때의 일이었다.
“준후 네가 비밀 프로젝트의 정식 고문이라고? 어떻게 된 일 이냐?”
준후는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그게 높은 직위인지 낮은 직 위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으나 지루하고 답답하게 시간을 보내던 차에 뭔가 소일거리가 생긴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헤헤………. 그래요. 원래 비밀이라는데 신부님은 아셔도 되죠, 뭐.”
박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뭘 하는 건데?”
“중요한 일이에요. 이미 오래전에 했어야 하는 일인데……………..”
“오래전에 했어야 할 일? 그게 무슨 일인데 그러지?”
“맞혀 보세요. 이건 일제 강점기 때와 관계있는 일이에요. 힌 트를 너무 많이 드렸나?”
박신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감이 잡혔다.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는 일이겠구나? 그렇지?”
“헤헤헤…… 맞아요.”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빛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기력을 쇠약하게 한다고 명산 곳 곳에 깊이 쇠말뚝을 박아서 지혈(地)을 끊어 놓았던 일이 있지 요.”
“그걸 복구하려고 하는가 보구나.”
“예, 그런데 그런 일은 비단 일제 강점기뿐만이 아니에요. 벌 써 까마득한 오래전부터 첩자들에 의해 그런 짓들이 자행되었다 고 해요.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 주관으로 한 것이 가장 대표적 이고 규모도 컸지만, 그 밖에도 우리나라의 지혈이 상처 입은 일 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하더군요.”
“음, 그래・・・・・・”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때 자행된 짓이 아직까지도 바로잡히지 않고 있 다는 말이냐?”
“해방이 되고 나서 그 지방의 마을 사람들이 제거하기도 하고 관청에서 제거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거예요. 말뚝을 어디다 박았는지 전부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더 군요. 문서도 일부밖에 남아 있지 않고요.”
박 신부는 준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난번 보았던 철기과 스기노방의 모습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이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둘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좌우간 그러한 목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물론 박 신부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없겠니? 하긴 너 혼자 갈 것도 아니고. 네가 정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만…………….”
박 신부의 말투에는 섭섭함과 걱정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물 론 별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지만 항상 행동을 같이하다가 따로 준후를 내보낸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준후 도 사실 모두가 같이 갔으면 하고 바랐으나 백호가 반대했다. 이 런 일을 관에서 주도한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다지 좋을 일이 없 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박 신부나 현암, 승희의 경우는 풍 수지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가 봐야 시간 낭비만 할 것이라 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세 번째 이유도 있었는데, 그건 백호도 자세하게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서울에도 누가 남아 있어야 한다고 백호 아저씨가 그러더군 요. 그 밖에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누가………… 남아 있어야 한다고?”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서울에 왜 누가 남아 있어야 한다 는 것일까? 서울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말일까? 그러나 준후도 더 이상은 모르는 것 같았다. 박 신부는 미간을 찡그리며 안경을 추켜올리고 생각에 잠겼다가 얼굴을 폈다. 쇠말뚝 위치를 알아내서 파내는 일에 많은 사람을 떠들썩하게 동원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백호의 주장에 수긍이 갔다. 준후도 심심해하던 참인데 잘되었다 싶기도 했고.
“그래, 그러면 잘 다녀오려무나. 기간은 어느 정도 걸리지?”
“1차로 한 달 정도 잡고 있는 것 같아요. 남부 지방부터 시작 해서 위로 올라가면서 지기(氣)를 가다듬는다고 하더군요.” “그렇구나. 같이 가는 사람은?”
“몇 명이 있는데, 모두 약간씩 주술력이 있는 사람들이래요.
아는 사람도 두어 사람 있고요.”
“아는사람? 그게 누군데?”
“승현 사미하고 무련 스님이요…”
“승현 사미는 알겠다마는 무련 스님은 누구지?”
“전에 만났던 분이에요. 속명이 현정…………. 청홍검을 쓰던 누나요.”
박 신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냘파 보이지만 당차던 여자 가출가를 했다니. 게다가 그 여자는 도지 무당의 후계자가 아니 었던가?
박 신부가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준후의 얼굴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띠었다가 곧 어두워졌다. 현정이 안쓰럽다는 생각 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째서 현정 검사)가 출가해서 비구니로…………….”
박신부는 머리를 깨끗이 깎은 현정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초치검 사건부터 거의 일 년은 지났으니 그동안에 무슨 심경의 변화나 아니면 그런 변화를 줄 만한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 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당황스러운 소식임은 분명했다. 준후의 표정을 보니 뭔가 더 알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별로 이야기하 고 싶은 기색이 아니었기 때문에 박 신부도 캐묻지는 않았다. 다 만 한숨 소리를 냈을 뿐이다.
‘무언가 사연이 있겠지. 굳이 지금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침묵이 흐르자 준후가 은근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아마도 지금까지 정부 측에서는 쇠말뚝을 박은 목적이 단순 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를 꺾으려는 일종의 ‘쇼’로 여기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나 봐요. 아니,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랬겠죠. 풍수지리라는 것이 소위 서양적인 사고로 볼 때는 비과학적이고 전혀 근거 없는 것일 테니까요. 엉터리 풍수가들이 혹세무민했 던 일도 많지만, 엄연히 나름의 근거와 합리성이 있는데 말이에 요. 이번에 풍수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을 조직해 지맥(地脈)을 다 스리는 일이 ‘비밀’ 프로젝트가 된 것도 정부에서 그런 사람들을 기용했다는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 지만 실제로는 그런 명령을 내린 높으신 분들이 자기네 조상 묘 는 좋은 데 쓰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할걸요?”
화가 났는지 말하는 중에도 준후의 얼굴은 다소 일그러져 있었다. 박 신부가 뭐라 할 말이 없어 쓴웃음을 짓자, 준후는 눈치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더니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까도 말했듯, 이번 일은 백호 아저씨가 강력히 추진해서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단순히 문서로 찾을 수 있는 일제 강점 기 때 총독부에서 박은 말뚝들만 뽑는 것이 아니고, 직접 산세 (山勢)와 지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우리나라의 중요 한지맥을 살펴보고 다스리는 것이 주목적이지요. 모르긴 해도, 그전부터 숱하게 상처를 입어 왔을 거예요. 너무 늦게 시작했어요…….”
박 신부는 가톨릭에 몸을 담고 있는 신부의 입장이었지만, 자 신의 믿음과 다르다고 해서 그런 것들을 터무니없다거나 가치 없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 관심을 가지 면서 ‘인간’과 ‘신’에 대해 오래전부터 품었던 여러 가지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을 얻어,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 오던 차였다. 박신 부는 교단에서 파문당한 몸이지만, 스스로를 신지학파나 종교 다원주의자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는 있었던 것이다. 풍수학, 지맥, 지기라…………….
“어디부터 시작할 예정이지?”
박신부가 물었다.
“동쪽요. 일단 설악산, 오대산, 소백산, 주왕산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가요. 그러니까 전라남도의 월출산, 무등산, 지리산을 거쳐서 내장산, 모악산, 덕유산, 대둔산, 계룡산・・・・・ .이런 식으로 충청도를 거쳐 위로 올라오는 것이 이번 1차 코스예요.”
“그렇구나.”
박 신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맺기 위해서 준후가 참 여하는 ‘비밀 프로젝트’라는 것이 좋은 일이고 중요한 일이니 잘 치르고 오라는 격려와 함께 수시로 연락을 취하라고 일렀다. 그 리고 여러 명과 동행할 테니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덧붙이고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밤을 마무리 지었다.
사방이 캄캄해진 어두운 산길을 현암은 걸어서 내려가고 있었 다. 공력을 끌어 올리지 않더라도 현암의 눈은 보통 사람의 눈보 다 훨씬 어둠 속을 잘 볼 수 있었고 달빛이나 희미한 별빛만 있 어도 거칠 것 없이 산길을 갈 수 있었다. 현암은 한 달간 속세와 연락을 끊고 수련에만 몰두하는 중이었다. 등산객도 잘 오지 않 을 정도로 험하고, 주변 경치도 별것 없으며 교통편도 드문 산을 찾다가 마침내 ‘잘 알려진 명산 부근의 작은 산이면 사람들이 적 게 올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무등산 줄기의 작은 산 하나를 택했 다. 텐트 하나와 간단한 취사도구 몇 개, 침낭 하나와 수련 도구 를 제외하고는 갈아입을 옷도 세면도구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낸 현암의 모습은 후줄근한 차림에 봉두난발을한 그야말로 거지꼴에 가까웠다. 그래도 세속의 습관이 남아 면 도만은 꼬박꼬박 한 터라 얼굴은 봐줄만 했지만…………….
지금 현암은 예정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수련을 중단해서 조금 언짢았다. 깊은 곳에 들어간다고 했는데도 등산객이며 놀 러 나온 사람들이 자꾸 지나가서 집중을 방해했다. 남이야 놀건 말건 무시하면 되지만 문제는 자신이 수련하는 것을 보면 난리 가 날 것이라는 점이다. 기를 응축시키고 내뿜는 것은 명상만으 로는 안 되고, 실제로 연습을 해야 익숙해진다. 사람들이 있는 데서 검기를 내쏘거나 기공력을 내쏠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아, 왜 사람은 이리도 많은 거야. 조용한 곳이 이리 없나.
잡념을 가지지 않고 수련을 하다가 잠시라도 세속에 내려오면 일껏 집중한 정신이 흩어질 우려가 있고 그 상태를 다시 바로잡 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현암은 시간이 아쉬웠지만 할 수 없었다. 절대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을 곳을 수소문해 처박히 고 싶었다.
현암은 가능하면 재빨리 일을 보고 다시 입산하기 위해 느지 막한 시간을 택해 산 아래쪽의 작은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로 다 가갈수록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내심 혀를 찼으나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어서 현암은 발걸음을 그대로 옮겼다.
‘이런 산속에서 웬 소란이람. 무슨 일이 있나? 아니면 젊은 애들이라도 놀러 온 건가.’
침침한 백열등이 외롭게 비치는 좁은 길 사이를 지나 쌀가게 에 들른 현암은 바깥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카세트를 크게 틀어 놓고 노는 모양이었다. 현암은 여기서도 조용하게 지내기는 글렀나 보다 싶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저것 장을 보기 위해 잡화상에 들어가는데 주인이 혀를 끌끌 차며 혼잣말을 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저러다 큰 코 다치지. 그렇게 말려도 듣지 않고 굳이 그곳에 서 장난을 치려 하다니.”
호기심에 찬 현암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현암은 호기심을 억누르고 가게 주인에게 필요한 물건을 싸 달라고 한 뒤 지나가듯 물었다. 주인의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지 는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할 정도라면 이 마을에도 뭔가 있는 것 이 아닐까 하는 까닭이었다.
노인네들이야 이런저런 이상한 일들을 잘 믿는다고는 하지만 나이도 많이 들지 않은 아저씨가 그런 말을 한다면 진짜로 이상 한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수련하러 온 마당에 괜히 남의 일에 끼 어드는 건 아닌지 망설이기도 했으나 혹시 자신의 힘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 일이라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방금 무슨 말씀입니까? 큰 코 다치다뇨?”
현암은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이 마을엔 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한 군데 있답니다. 그런데 저 젊은이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담력 시험인지 뭔지를 하려나 봐요. 그 근처에서 갔다가 헛것인지 뭔지를 보고 놀라 기절하거나 폐인이 된 사람까지 있는데…………..”
“그래요? 어떤 덴데요?”
가게 주인은 물건을 싸 주다 말고 현암의 남루한 행색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았다. 현암은 무뚝뚝한 원래의 표정을 짓고 있었 다. 가게 주인은 현암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는지 고개 를 갸웃거리면서 뜸을 들이더니 간단히 한마디 일러 주었다.
“일제 때의 신사(神社)지요. 절대 가까이 가선 안 되는 곳이에 요. 가 봐야 볼 것도 없고. 밑져야 본전이 아니라 잘돼야 본전인 데 뭐하러 가겠수?”
이번에는 현암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제 강점기의 신사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그러나 가게 주인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 은 눈치가 아닌 것 같아서 현암은 자리를 뜨려다가 잠시 생각해 보고는 한 되짜리 막걸리를 같이 집어 들고 가게를 나섰다. 원래 술을 거의 마시지 않지만 혹시 쓸 데가 있을지도 몰랐다.
잘 그려지지 않는 유화에 매달려 작업복을 얼룩얼룩하게 만들 고 있던 승희에게 예기치 않은 전화가 걸려 온 것은 늦은 밤중이 었다. 승희는 아버지 현웅 화백이 돌아가시고 나서 전에 살던 집 을 집이라 해 봐야 터밖에 남지 않았지만ᅳ매각하고 아버지 가 쓰던 화실에서 숙식을 겸하며 지내는 중이었다. 블랙서클과 의 대결 이후 그동안 팽개쳐 두었던 그림에 오랜만에 몰두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현암의 기억 속에서 월향검에 봉인된 영의 희 미한 모습을 읽어 낸 후로, 승희는 그 영의 그림을 그려서 현암 에게 선물해 주려 했지만 시간도 많지 않고 그림도 잘 그려지지 않아 애꿎은 화폭만 벌써 예닐곱 장 찢어 버린 상태였다.
영의 모습을 겨우겨우 떠올리고 있는 판에 울린 전화벨에 승 희는 몹시 짜증이 났다. 붓을 휙 던져 버리고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낯익지만 뜻밖인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백호 씨?”
“승희 씨, 안녕하셨습니까?”
“예,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어쩐 일로?”
승희는 화난 것처럼 보이는 눈썹을 습관처럼 살짝 치켜 올리 면서 물었다. 원래는 반갑게 대해야 할 사람이었지만 이런 시각 에 예고 없이 전화한 것을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승희는 구태여 대답을 기다릴 필요 없이 백호의 마음속을 읽었다.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감사합니다.”
백호는 자신이 말도 하기 전에 승희가 거절의 말을 하자 조금 움 찔했으나 승희의 특기를 기억하고는 내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사실 저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예, 알아요. 그러나 앞으로도 그런 부탁은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요.”
“알았습니다. 승희 씨와 연락이 취해지지 않는 걸로 해 두지 요. 그렇지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백호 씨 심정 잘 압니다. 제가 잠시 사라지면 되는 거죠?”
백호는 승희에게 청탁을 하려던 참이었다. 승희의 독심술과 투시력으로 ‘높은 분’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또 다른 ‘높은 분’의 심중을 알아내 달라는 부탁이었다. 백호는 이런 일이 체질에 맞 지 않아 꺼림칙했고 승희 역시 그런 백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 다. 승희는 자신의 그런 능력이 슬슬 귀찮게 여겨졌다. 현암이나 신부님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지만 그 이외의 경우에는 마땅치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백호가 무척 곤 란한 모양이니 잠시 몸을 감추는 편이 속 편할 듯했다. 정말 중 요한 일이라면 못해 줄 것도 없었지만 사적이고 음성적인 일에 까지 자신의 능력을 쓰고 싶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나서 승희는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가 그냥 보통 사람이었다면……………. 예전에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는 그런 특이한 능력 한가지쯤 가지고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봤지 만 막상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럽 고 어떨 땐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승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런 빌어먹을…………. 죄지은 것도 아닌데 도망까지 가야 하 다니. 성질나면 그 높은 양반 스캔들이나 읽어서 폭로해 버릴까 보다!”
승희는 중얼거리면서 그리다 만 그림을 바라보았다. 현암의 듬직한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신부님이야 수시로 연락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고…………. 지금 마땅히 갈 곳도 없 는 처지에서 생각나는 사람은 현암뿐이었다. 수련을 방해한다고 뭐라 할지도 모르지만.
“맘 편하게 쉬는 건 끝인가 보군. 제길…………… 현암 군이나 보러 가자.”
승희는 눈을 감고 현암이 있는 곳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후후훗. 멀리도가 있네. 무등산인가 보네.”
위치를 확인한 승희는 현암을 깜짝 놀라게 하리라는 생각에 절로 신바람이 났다.
승희는 현암이 있는 곳 근처에 가서 다시 찾아볼 요량으로 더 이상 투시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문을 나섰다.
박 신부는 준후가 하품을 하며 잠자리에 들어간 지 한참 후에 야 몸을 묻고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긴 휴식………….
박 신부는 최근 복잡한 일상사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이 되면 으레 너무나 빨리 지나갔던 지난 몇 달간을 조 심스레 돌이켜 보곤 했다. 비단 몇 달뿐이 아니라 어떨 때에는 몇 년 전의 일까지 돌이켜 생각해 보는 경우도 있었다. 블랙서클 의 마스터와 최후의 싸움을 치르고 병원에서 휴식할 때도 그랬 지만, 이렇게 시간 여유가 생길 때면 이런저런 회상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박신부가 고민하는 것은 항상 비슷했다. 자신을 포함한 퇴마 사들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가. 최선을 다하면서 처음에 지녔 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반성이고 성찰 이었다.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벌였던 블랙서클과의 싸움 때는 그러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전과는 달리 사악한 영들만이 아니라 사람들과도 싸웠다. 그들 중 많은 수는 악인이라 부를 수 없는 견해와 입장이 다른 것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요즘 종종 들곤 했다.
‘어떻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박 신부는 파문을 감수하면서 이러한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작은 여자아이 미라. 때 하나 묻지 않고 죄도 없던 아이…………. 신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러나 박 신부에게 이러한 길을 택하도록 만들었던 그때 그 사건 을 자신은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흠칫흠칫 들었다. ‘우리는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해친 적은 없 다. 우리가 위험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어찌 보면 극히 위험하고 강한 힘을 손에 쥔 대가라고 할까?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대세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나는 지금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것은 하나의 변명이 고명분일 뿐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했는가.’
박 신부의 마음은 코제트가 떠올라 괴로웠다. 친구 딸 미라의 사건이 있고 난 후, 여러 차례 그랬지만 특히 코제트 사건은 박 신부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코제트는 회개를 했다고 박 신 부는 믿었다. 그러면서도 코제트의 영혼이 구원 받지 못했을 것 이라는 사실이 박 신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성난큰곰’은 영혼의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면 다른 블랙서클의 사람들도 어쩌면 성난큰곰처럼 영혼을 구원 받진 않았을까? 박 신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나간 다음에 하는 변명일 뿐. 당시 나는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들려오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아니, 현암이 자신과 싸우다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히루바바 나 마스터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승희가 자신의 힘 때문에 산산조각으로 부스러져 버린 이름 모를 흡혈귀를 떠올릴 때, 그 들을 다독거리고 힘을 북돋워 준 사람은 박 신부였다. 그러나 자 신을 다독여 줄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야훼시여’
박 신부는 자신도 모르게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교단의 파문까지 무릅쓰면서 생각했던 자신의 소신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세상의 고통 을 줄이는 것.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 그러나 점점 헤쳐 나가면 나갈수록 길은 걷기 힘들었다. 악령보다 악한 것이 살아 있는 사 람들이었고, 자신들은 누가 뭐래도 그 사람들을 가련히 여기고 구원해야 했다. 그러나…………….
‘지난번과 같은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 낮은 곳, 한 사람 한 사람부터 보살펴야 한다.’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지난번 같은 대규모 투쟁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복잡한 문제 때문에 개개인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지난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상처를 입혔던가. 절대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주술을 쓰지 않기로 했던 준후마저도 몇 번인가 맹세를 어길 뻔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세상을 통째로 구원한다는 생각 자체가 잘 못된 것………….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자. 작은 일이 큰일이다.’
성경의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너희가 너희 주변의 가장 못한 자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내게 해 준 것이다.
가장 작은 일부터. 주변부터. 이런 마음이 들자 박 신부는 열 심히 올리고 있던 기도를 끝맺고 고개를 들었다. 한참 기도를 올 리고 난 박 신부의 눈가는 축축이 젖어 있었다. 갑자기 자신과 같은, 아니 자신 이상의 마음고생을 했던 현암과 준후, 승희가 보고 싶어졌다.
“허허. 나이깨나 먹어서도 원.”
박 신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는 준후의 방 쪽으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자고 있는지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빙긋 웃음을 짓고는 별생각 없이 수화기를 들었다. 승희 생각이 나서였다. 지난번 사건 때 너무 충격적인 일을 당 해서인지 승희의 안색이 전보다 많이 창백해지고 나이가 든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치고 지나갔다. 친구의 딸이라 서 그런지 가족 없는 자신의 입장에서는 친딸 같다는 기분이 드 는 것도 박 신부가 승희에게 전화를 건 이유 중 하나였다. 그래 도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번호를 누른 박 신부는 늦은 시간 인데도 승희가 전화를 받지 않자 쑥스럽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렇군요……..”
현암은 노인네의 비위를 맞추느라 맞장구를 치면서도 속으로 는 긴장했다. 잠이 오지 않는지 무료하게 밤 시간을 보내고 있던 노인네에게 막걸리를 대접해 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쩍 의문의 신사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는데 실로 뜻밖의 대 답이 돌아왔다.
“그렁께 ・・・・・・ 그 신사라는 것이 흉물스러운 것이제. 왜놈들이 자기네에 복속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맞기는 헌디, 여기 저 산속에 있는 거기만은 뭔가가 있기는 있는 거 같더구먼. 왜, 우리도 버얼써 해방된 다음에 그 죽일 놈의 집을 때려 부술라고 했 지라. 그런디 이상도 한 것이 대낮이건 밤이건 간에 그 집에 들어가기만 하문 이상한 기운이 휘 하니 느껴지고, 거기다가 그 놈의 집을 부수든 어쩌든 귀퉁이에다라도 손만 대면……”
“어떻게 되죠?”
“난데없는 괴이한 소리가 들리면서 희한한 빛이 난단 말여……”
“괴상한 일이군요.”
현암은 자신도 정말 괴상하게 여긴다는 듯이 대답했지만 속으 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이라는 것은 어떤 물건 속에라 도 깃들 수 있으며, 건물 전체에 깃들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 나 대낮에 많은 사람이 기겁을 하게 할 정도로 심각하다니.
“그 뒤로도 여러 번 그놈의 집을 허물어 보려고도 하고, 또 불 도 질러 보려고 했지만 통 안 된단 말씨. 왼통 젖은 짚검불마냥 불이 붙어야지. 거기다가 그러고 난 담에는 꼭 동티가 생기는 거 라.”
“동티가 생기다뇨?”
“하늘이 컴컴해지도록 거무튀튀한 안개가 끼고, 꼭 몇몇씩 이 상한 병에 걸려서 고생하고 죽어 버리고 그랴. 그러니.”
현암은 조그맣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 있는 것이 틀림없 었다. 악령, 아니면 원한령? 지박령?
“그래서 지금은 어쩌고 있지요?”
“어쩌긴,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제.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통 믿으려 들지를 않아. 전에는 정말 그놈의 것 땜시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구! 그랴서……………”
노인이 말을 이으려는데 지나가는 중년의 장정 하나가 피식 웃으며 흘리듯 하는 말이 현암의 귀에 들렸다.
“봉수 할배가 또 허풍 떠누먼. 히히.”
‘허풍?’
현암은 눈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자세한 내용은 허풍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 다. 현암은 신사가 있는 곳의 대략적인 방향만 물어보고는 허리 를 폈다. 대략적인 방향만 알면 거기서 풍겨 나오는 귀기鬼) 로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짐작에서였다. 현암이 느낄 만한 귀기 조차 없다면 시골영감님의 허풍으로 치면 될 것이고.
수련차 산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런 일이 정말로 있다면 그냥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일어서는 현암의 팔에 살짝 힘이 들어 가자 왼쪽 팔목에 꽂혀 있는 월향검이 조그맣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