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20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3 : 노의 가면 (1권 끝)
노의 가면
현암은 준후가 방으로 올라가자 안 그래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터에 잘되었다 싶었는지 말없이 준후를 따 라 발걸음을 옮겼다. 승희가 등을 돌리는 현암에게 몇 마디 했으 나, 현암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렸 다. 승희는 말없이 미소를 머금고 서 있는 연희를 보고 불평 섞인 목소리로 구시렁거렸다.
“조금 장난친 것 갖고 왜들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내 참!”
승희는 더 말을 하려다가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연 희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우리끼리라도 밖으로 나가요. 준후는 신부님이 나 현암 씨가 알아서 하겠지, 뭐.”
“그래도 우리가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지 않니? 승희 네 도움이 필요한 일도 있을 것 같은데.”
“아이구, 답답해라. 기껏 외국에 와서 하루 맘 놓고 놀러 다니 지 못하다니…….”
한참을 투덜대던 승희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어코 연희의 손목을 잡아끌고 호텔 밖으로 나섰다. 문을 나서는 연희 와 승희의 뒤를 아라라는 여자아이가 한쪽 귀퉁이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녁때, 사이토 보좌관과 도운이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호텔로 찾아왔다. 다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을 무렵에서야 승희와 연희가 헉헉거리면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상기된 얼굴로 승희 가 밖에서 있었던 일을 수선스럽게 말하려다 사이토 보좌관과 도운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실내 분위기가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 먼저 사이토 보좌관이 사건의 내용을 간략하게 되풀이해서 설명했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자 현암이 사이토에게 물었다.
“사건의 대략적인 내용은 박 신부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습니 다. 지금 하신 말씀은 모두 지난번에 박 신부님이 해 주신 말씀 과 비슷한 것 같군요. 지금부터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시기 바 랍니다. 우리가 이곳까지 온 것은 스즈키 씨의 일에 저희가 조 금이나마 도움이 돼 드리려는 마음에서 온 것이니 만큼, 이제 더 이상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신부는 어떻게 처음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할까 다소 망설 이고 있었는데, 현암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 다. 사이토 보좌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현암은 빠른 목소리로 말 을 시작했다.
“그 각료라는 분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던 여인들이 누구누 구이고, 언제 어디서 실종되었는지는 아마도 일본 측에서도 상 당한 조사가 있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 조사 결과와 사건의 경 과, 그리고 그 일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보고서 같은 것이 있 다면 보고 싶군요. 아마도 준비해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현암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이토 보좌관 을 쳐다보았다. 사이토 보좌관은 슬며시 미소를 띠면서, 가지고 온 트렁크를 열고 꽤 두툼해 보이는 서류 뭉치를 꺼내어 현암과 박신부의 앞에 내놓았다.
“분명 그 질문이 있을 것이라 믿고 여기 준비해 왔습니다. 이 것들은 경찰의 공인 기록과 비공인 기록까지 모조리 수집해 놓 은 자료들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현암은 고개를 끄덕이며 봉투를 받아 박 신부에게 넘겨주었다. 봉투를 한번 죽훑어본 박 신부가 사이토 보좌관에게 물었다.
“스즈키 씨와 사망한 각료들과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사이토 보좌관이 다소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문서화된 게 없습니다. 그럴 만한 사안도 아니고요. 여러분들도 이 이야기를 이번 일이 해결되는 후에는 모두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어쨌든 자세한 말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도 자세히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만, 스즈키 씨는 돌아 가신 다섯 분의 각료들과 함께 육인방이라는 정치 서클을 결성 했습니다. 요시다. 이토, 나카무라, 데쓰오, 히로시 씨가 그분들 이었죠. 물론 그 정치 서클 자체는 일종의 친목 단체와 같은 성 격을 띠고 있었으나,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만든 것 이니만큼,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정치색은 있다고 보아야 되겠 지요. 실제로 이 육인방은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요직을 차지하 고, 여러 가지 정책과 정계 판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바로 그러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죠.”
“여섯 명이 모여서 만들었기 때문에 육인방이라는 이름이 붙 었습니까? 왜 하필이면 여섯 명이죠? 보통 일곱 명이 되어야 좋 은 숫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처음엔 일곱 명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다섯 분 과 스즈키 씨 이외에도 다카다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오래전에 사망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칠인방 에서 육인방으로 축소되었답니다. 실제 세간에도 그렇게 알려져 있고요.”
“오래전이라면 어느 정도나 됐습니까? 다카다 그분이 돌아가 신지가……………..”
“저도 확실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십 년도 더 됐지 않나 싶은 데요? 사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더 이상 아는 바가 없습니 다. 보다 상세한 것은 스즈키 씨와 직접 만나서 여쭤 보십시오.”
“그럼, 스즈키 씨 그분은 언제 만날 수 있죠?”
“스즈키 씨는 지금 교토에 가 계십니다. 교토에 있는 별장에서 두문불출하고 계시지요. 스즈키 씨가 있는 곳은 절대 비밀이지 만 여러분들은 내일 만나러 가게 될 터이니, 미리 말씀드려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스즈키 씨는 지금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 혀 있습니다.”
“극도의 공포라니요? 무슨 이상한 일을 겪기라도 했습니까?”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는 저로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참!”
현암이 다시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스즈키 씨가 그렇게까지 무서워할 필요가 있을까요? 일본 밀 교의 호법 중 한 분이신 도운 스님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서시 는 것을 보면 일본 밀교 측에서도 상당한 고승들을 파견하여 스 즈키 씨를 지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만.”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분은 몹시 불안해하십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말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한쪽에서 계속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리면서 아직도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던 준후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런데 명왕교가 뭐예요?”
“아, 그거! 그것에 대해서도 여기 보고서를 따로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읽어 보시지요.”
사이토는 아까 것보다는 조금 얇은 종이봉투를 가방에서 꺼내 현암 앞에 내려놓았다. 현암이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내용을 대 충 훑어보았다. 서류는 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제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이 하나 있는데요.”
준후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사이토에게 물었다.
“그분들이 돌아가신 곳에서 명왕교의 주술적인 여운을 발견했 다는 얘기를 신부님께 들었거든요. 그 여운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해 주시면 좋겠는데.”
사이토 보좌관이 도운의 귀에 대고 조그맣게 말하자 도운이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도운의 말을 들은 사이토 보좌관이 그 말 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연희가 준 후 옆으로 다가와서 나직이 일러 주었다.
“글쎄, 영적인 고통의 흔적이라는데? 그러니까 비명, 명왕교 라고 하는 말, 노의 가면을 쓴 웃음소리. 뭐 대충 이런 말 같아. 맨 마지막 말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노가면의 웃음소리요?”
사이토 보좌관은 연희가 자기보다 앞서서 능숙하게 도운의 말 을 통역하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크게 뜨더니만 곧이어 준후에 게 덧붙여 설명을 했다.
“노라는 것은 일본 전래 연극의 일종이란다. 가면극이라고 할 수 있지. 한문으로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사이토는 조그맣게 ‘능(能)’ 자를 써 보였다. 준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이토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노에는 반드시 가면을 쓰게 되어 있나요?”
“그렇지. 노에서 쓰는 가면을 멘(面)이라고 한단다. 대부분 흰색을 띤 특유의 가면이지.”
“그런데 노 얼굴을 한 가면이 명왕교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그건…….”
사이토는 한숨을 쉬고 나서 준후에게 말했다.
“명왕교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다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리게 되어 있단다. 명왕교에서 비교적 높은 서열에 있 는 사람들은 명왕의 가면을 쓰고, 낮은 신도 계급의 사람들은 바 로 이 노의 가면을 쓰고 의식에 참가하게 되어 있지. 그래서 노 의 가면이 나타났다는 말과 그 영상을 본…….”
“잠깐만요. 그 영상을 보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죠? 그러니 까 영적인 투시로 거기에 남아 있던 잔상 같은 것을 읽어 낸 것 까지는 들었지만, 모습까지도 영상처럼 볼 수 있었단 말인가 요?”
사이토가 준후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자 이 번에는 연희가 도운에게 직접 준후의 말을 옮겨 주었다. 도운이 연희 쪽을 향해 무어라고 열심히 설명했고, 연희는 도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준후에게 그 내용을 전해 주었다.
“일종의 영적인 잔상 같은 것이 보였었나봐. 그런데…..”
“그런데 뭐죠?”
“술법자가 노의 가면을 말하는 순간 쓰러져서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잔상을 읽어 내는 것만으 로 술법자의 의식을 잃게 만들 수 있다니…………. 도대체 그들은 무슨 수법을 어떻게 쓴 것일까?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본 도운이 뭐라고 다시 말을 했고, 연희 가 일행에게 도운의 말을 옮겨 주었다.
“그 영의 잔상을 읽었던 술법자는 일본 밀교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 있는 술법자가 단 지 잔상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격을 받아 거의 식물인간이 되었다 고 하니 밀교 쪽에서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 에요. 그래서 여러분의 힘을 빌리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하네요.”
“그렇군요.”
준후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말을 하려다가 입을 깨물듯이 오 므렸고, 그 모습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할 이야기가 다 끝났는지 사이토 보좌관과 도운이 내 일 아침에 찾아와서 교토에 있는 스즈키에게로 안내해 주겠다고 말하며 일어섰다. 박 신부가 서류의 내용을 검토해 보겠다고 말 하자 두 사람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도 일행은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앉아 있었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을 깬 건 박 신부였다.
“대단한 능력자들인 것 같군. 그건 그렇고 저 사람들이 갖고 온 서류나 우선 검토하도록 하지.”
박 신부의 제안에 현암은 명왕교에 대한 조사 내용이 적힌 서류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박 신부는 여인들의 실종 사건을
다룬 기록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승희야, 저 사람들이 말한 것 중에 거짓은 없니? 너 계속 투시하고 있던 것 같은데…………….”
승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적어도 그 사람들의 말에 거짓은 없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두 사람은 심부름꾼에 불과해서 자세한 내막은 알고 있 지 못해요. 사이토 씨가 우리에게 말해 준 스즈키 씨에 대한 내 력은 모두 다 스즈키 씨가 그렇게 말하라고 시킨 것뿐이에요. 사 이토 씨는 그 외의 일에 대해 그다지 많이 알지 못해요. 스즈키 씨의 보좌관으로 부임한 것도 고작 육 개월밖에 안 됐는걸요. 스 즈키라는 사람, 참으로 빈틈없는 사람 같아요. 자기가 수족처럼 부리는 보좌관이 아는 게 저 정도라니. 아마도 쓸데없는 말이 샐 까 봐 그랬겠죠?”
“그랬겠지. 아무튼 서류들을 찬찬히 검토해 보아야겠다.”
박 신부가 서류 봉투를 열었다. 승희가 잠자코 준후를 잡아당 기며 말했다.
“준후야, 우리는 그 노라는 것에 대해 같이 공부 좀 하러 갈까?”
“예? 노에 대해서요? 노는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이라잖아요.”
“응, 그래. 하지만 명왕교와 노는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아. 그러니 우리 나가서 노를 한번 구경하도록 하자. 이것도 조사는 조사 아니겠니? 어때?”
승희가 살짝 윙크를 하면서 준후의 손을 잡아끌자 박 신부와 현암이 얼굴을 돌렸지만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현암과 박 신부는 아무래도 승희가 이상하게 꾸민 듯 쾌활하게 보이려 한다는 느낌을 아까부터 계속 받았으나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 었다. 박 신부는 준후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여서 바람도 쏘 일 겸 나가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아예 연희 양하고 같이 셋이 나갔다 오렴. 우리는 그동안 여기서 이 서류들을 검토할 테니.”
박 신부의 허락이 떨어지자 승희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연희 와준후를 끌고 문밖으로 나갔다.
“아까 나갔다가 신주쿠 거리에 있는 한 극장에서 노를 상영한 다는 포스터를 봤어. 거기로 가는 거야. 어떠니?”
“글쎄요. 뭐, 저는…………….”
준후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거의 끌리다시피 하여 승희에게 잡혀 나갔고, 그 뒤를 연희가 따랐다.
박 신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사이토 보좌관이 가지 고 온 서류를 차례차례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이토의 말로는 육인방에 대한 별도의 서류가 들어 있지 않 았다고 했으나, 박 신부는 서류들을 읽어 나가면서 간접적으로 나마 육인방에 대한 내용들도 알 수 있었다. 경찰 측에선 실종사건을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여인들의 실종 관련 기록에 는 주변 인물들의 신원 및 경력 등이 조사되어 있었던 것이다. 칠인방의 일곱 사람이 모여 정치 서클을 만든 것은 벌써 삼십 여년 전인 1962년의 일이었다. 당시의 멤버를 보면 요시다가 마 흔하나로 가장 연장자였고, 그다음이 스즈키 삼십팔 세, 이토와 히로시가 삼십칠 세, 나카무라와 다카다가 삼십육 세, 그리고 데 쓰오가 삼십이 세로 제일 어렸다. 칠인방은 1970년대 초까지 일 본이 경제적으로 상승 곡선을 이루던 시기에 각각의 분야에서 나름대로 활약하여 상당한 고위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그들은 정계의 각 요직에 파고들어 나름 대로 막강한 기반과 권력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70년대 중반을 넘어 80년대에 이르러 칠인방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요시다를 필두로 한 다섯 명의 세력 과 동갑내기인 나카무라와 다카다를 중심으로 한 소수 세력으로 파벌이 나뉘었던 것이다. 외견상 그들 양 그룹은 서로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요시다를 중심으로 한 다수 세력이 소수 세력을 상당히 탄압하고 배타했다고 보고서에는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으로 다카다의 독직 사건이 발생하였 는데, 나카무라가 이 사건을 계기로 요시다의 다수파 계열에 끼 게 되었다.
독직 사건과 동료의 이탈로 궁지에 몰린 다카다는 나머지 여 섯 명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아 198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게 되었다. 다카다는 공직에서 물러난 지 한 달 만에 실종되었다 가. 그로부터 보름 후 호수에 투신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가 나타났고 경찰에서는 다카다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고 기록되어 있었다. 실제로 목격자가 말한 호수에서 다카다로 보이는 시신을 인양했다고도 씌어 있었다.
다카다의 사망으로 육인방이 된 이들 그룹은 이후 더욱 세력 을 확장하고 뿌리를 넓혀 최근까지 일본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여기까지가 이들 육인방에 대한 기 록의 요지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이다. 즉 육인방의 멤버 들보다는 이들 주변에 가깝게 지내던 여인들이 먼저 하나씩 사 고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의문스런 죽음은 1992년에서 최 근에 이르기까지 약간씩의 터울을 두고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가장 먼저 1992년 11월에 나카무라의 누이가 약물에 중독된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낸 나카무라에게는 그를 뒤에서 후원해 준 누이 한 사람이 유일한 피붙이였다. 그러 한 누이가 약물 중독에 의한 시체로 발견되자 나카무라는 크게 상심했으나, 그때는 아무도 이 일이 일련의 연속 사건의 서막이 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요시다의 부인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 나 이것 역시 실종된 지 한 달여 만에 교통사고로 추정되는 상처 를 입은 채 어느 공터에 유기된 시체로 발견되어서 잠시 매스컴 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결국 범인은 밝혀지 지 않았다. 그 시체가 발견된 때가 1993년 5월. 그다음에는 데쓰 오의 부인이 데쓰오와 심하게 다투고 가출을 한 후 실종되는 사 태가 벌어졌다. 원래 데쓰오는 공처가로 유명했고 부인에게서 심한 구박을 자주 받았던 관계로 매스컴에서는 데쓰오 부인의 실종 사건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데쓰오의 부인은 그 이후로 아직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때가 1993년 11월. 그때까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육인방의 실질적인 존 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육개월의 간격을 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육인방의 멤 버들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나카무라 요시다는 그 일로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현직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초 조와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도 그들 스스로 육인방의 존재를 바깥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했던 터라 공연히 육인방의 존재를 바깥에 드러낼 만한 행 동은 하지 않고 쉬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5월, 다시 육 개월이 지나자 사건은 어김없이 일어났다. 평소에 여자 문제가 다소 복잡했던 이토와 내연 관계 에 있던 여인이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고층 아파트에서 투 신자살한 그 여인은 오래전에 부인을 잃은 이토의 젊은 연인으 로, 이토는 그녀가 자살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고 말했다.
드디어 육인방은 비밀리에 경찰에 사건을 의뢰하기로 결정했 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단서를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아직 피해 를 입지 않은 스즈키와 히로시는 서둘러 정계에서 은퇴한 뒤 잠 적해 버렸고, 현직에는 데쓰오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히로시의 젊은 딸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 다. 젊은 나이에 부인을 잃고 딸 하나만을 바라보고 살던 히로시 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이때가 1994년 11월 며칠의 차이는 있 었지만 역시 이토 사건 이후 정확히 육 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사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히로시 딸의 실종 이후 약 한 달 정도의 간격을 두고 육인방의 각료들이 하나씩 의 문의 변사체로 발견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인은 모두 같았다. 요 시다는 1994년 12월에 자택에서, 이토는 1995년 1월에 어느 호 텔방에서, 나카무라는 2월 어느 날 늦은 시각 자택 화장실에서, 데쓰오는 3월에 정당 사무실의 서재에서, 히로시는 4월에 벳푸 의 온천 욕조 안에서 각각 사망했다.
경찰에서는 이들 육인방의 연속된 사망 사건을 외부에 공개하 지 않았다. 암살도 아니고 그렇다고 타살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도 전혀 없어서 언론에 가십거리나 루머 기사로 떠돌 것을 우 려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문이 잠긴 화장실이나 온천의 욕 조에서, 그것도 하나뿐인 문밖에서는 가족이나 측근들이 멀쩡히 있었던 상태에서 누군가가 침입해 그들을 살해한 것이라고는 도 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도 정확한 간격을 두고 일어난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 었다. 이토가 죽은 후로는 경찰 측도 나름대로 경호를 했으나 아 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마치 자연사처럼 사망해 버렸다. 내막 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혹시 다카다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다카다는 십 년 전에 죽은 사람 이었다.
박신부는 보고서에서 잠시 눈을 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육 인방이 왜 다카다를 무서워한다고 했을까? 그리고 원래의 패턴 대로라면 스즈키 주변의 여인이 먼저 실종되거나 살해당하고 난 다음 육인방의 사람들이 죽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왜 유독 스 즈키만이 무사하고 모두가 피해를 당했을까?
스즈키가 살인 사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이번 일은 저주나 주술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틀림없어.’
아직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박 신부는 파일을 뒤적여 스즈키의 신상명세를 꺼내 보았다. 스즈키의 첫 번째 부인은 오래전 에 사망했고, 두 번째 부인도 지금 있는 딸 하나만을 남기고 사 망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키에라는 스즈키의 외동딸은 이제 고작 아홉 살이었다. 오키에의 사진 한 장도 밑에 붙어 있었다. 귀여운 인상이었다.
‘이 꼬마도 위험한 것은 아닐까? 예쁘고 철없는 이 아이가…’
박신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은 이 세상 사람 이 아닌 친구의 어린 딸 미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현암은 명왕교에 대한 내용들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러나 이 서류들 대부분이 진위가 의심되는 기사들을 스크랩한 것이어 서 심드렁했다.
명왕교는 불교의 일파에 속하긴 하지만 밀교적인 말세 신앙을 기조로 하는 종교였다. 보통 불교에서는 석가나 미륵불을, 밀교 에서는 대일여래를 숭상하는 데 반해 명왕교는 대신적인 부처보 다는 실질적인 힘을 가진 명왕을 숭배한다. 그뿐 아니라 명왕교 에 입교하여 높은 경지에 이르면 명왕들의 현신이 될 수 있다고 하며, 한 번도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는 교주를 부동 명왕의 현신이라고 했다. 이외에도 팔대존 명왕들이 일종의 장 로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애염명왕의 현신도 있다는 내용을 보고는 현암은 코웃음을 쳤다.
‘명왕의 현신? 후후훗. 다른 명왕이라면 몰라도 애염명왕의 현 신도 아닌 화신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무슨……………..’
계속해서 현암은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명왕교는 힘과 주술을 숭배하고 또 실제로 그 힘을 여러 신도 앞에서 보여 주기 때문에 세력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 들은 종교 의식을 치를 때 교단의 고위직은 명왕의 가면을, 일반 신자들은 노의 흰 가면을 썼다. 이렇게 서로 얼굴을 직접 드러내 지 않는 것이 오히려 광적인 신앙을 유발시킨다고 보고서에는 씌어 있었다.
현암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음 구절로 눈을 돌렸다. 명왕교의 교리는 신흥 종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나 름의 독특한 면이 있었다. 즉 세상은 곧 죄악으로 물들어 정화가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데, 명왕교를 믿고 고대의 힘을 익히면 난 국을 헤치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아래에는 명왕교 와 기타 신흥 종교와의 차이점이 무엇보다도 명왕교가 일본적인 종교라는 것이며, 특히 신도들에게 노 가면을 쓰게 하는 것이 주 목할 만하다는 독특한 주장이 실려 있었다.
‘노의 가면…………… 흠. 그래서 명왕교가 이번 각료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고 믿게 된 거로구나. 노 가면의 웃음소리를 영적인 잔상으로 들었다고 했지. 그러면 ………….’
현암은 등골이 섬뜩해졌다. 노 가면의 웃음소리? 밀교의 꽤 높 은 경지에 있는 술법자가 잔상만을 보고는 의식 불명이 되어 버 렸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가면은 고위직 도 아니고 평신도가 쓰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만약 명왕교 가 정말로 각료들을 주술로 해쳤다고 한다면 그 정도의 힘을 지 닌 것이 고작해야 평신도에 불과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은 가? 그렇다면 도대체 고위직인 명왕들의 힘은…………….
현암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그들이 인명을 좌 지우지할 그런 큰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현암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나머지 서 류들을 대강 읽고는 박 신부를 바라보았다. 박 신부도 서류를 다 읽었는지 현암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둘은 말없 이 서류를 바꾸어 내용들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준후는 반쯤 졸고 있었다.
처음 극이 시작했을 때에는 옷들도 특이하고 무대 장치들이 화려하게 번쩍거려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장면장면에 몰두했다. 악기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연주되고 배우들이 매우 세련되고 상징적인 동작으로 움직이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 무엇보다도 절제된 듯하면서도 여운을 길게 끄는, 요상한 운율적 가사들을 들었을 때는 머리칼이 쭈뼛해지면서 마음마저 싸늘해졌다.
그런데 지금 보니 노의 가면이라는 것이 아무리 보아도 기분 좋게 보이지 않았다. 매우 세련되고 어떻게 보면 웃는 듯, 어떻 게 보면 우는 듯한 아주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조차도 이중 적이고 간사한 것 같아서 준후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면이라면 하회탈이나 탈춤을 출 때 쓰는 탈들이 최고지. 도 대체 저건…………. 에구, 소름 끼친다.’
더군다나 특별히 극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끌려온 터라 준후는 조금 보고 나자 곧 지루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꺼풀이 무거워져 밑으로 처지기만 했다.
“준후야?”
갑자기 옆자리에 있던 승희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준 후는 눈을 번쩍 떴다. 존다고 핀잔 들을까 봐 얼굴까지 발그레해 졌다. 준후는 승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무대를 계속 주시하 고 있는 연희와는 달리 승희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기 봐. 참 공교롭기도 하지?”
“예?”
준후는 승희가 턱으로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까 비행기와 호텔 로비에서 보았던 아라라는 여자아 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열심히 무대를 보고 있는 그 아이 주위에 뭔지 모를 이상한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이상하네.”
“왜, 준후야?”
“저 애, 아까와는 좀 분위기가 다른데요?”
승희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준후는 승희가 또 놀릴까 봐 얼른 아라에게서 눈을 돌리고는 승희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근데 누나, 더 봐야 해요? 헤헤헤.”
승희는 준후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 알고는 피식 웃다가 옆 에 앉아 열심히 무대를 보고 있는 연희 쪽을 눈짓해 보였다. 아 마승희도 나가고 싶었지만, 연희가 열심히 보고 있어서 나가지 도 못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둘이서 소곤거리며 킥킥거리자 문 득 연희가 안색을 풀고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조금 있으면 휴식 시간이니까 그때 나가도록 하자. 내가 뭘 재미있게 본다고 그러니? 조사차 온다고 해서 나도 억지로 보고 있었던 것뿐인데…………….”
얼마 후 세 사람은 지겹다는 둥, 자신과는 너무 수준이 안 맞 는다는 둥, 문화적 격차가 있어서 이해를 못하겠다는 둥의 변명 비슷한 말을 늘어놓으며 극장을 빠져나왔다. 그러면서도 세 사 람이 공통적으로 느낀 점은 회색 칠한 노 가면의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 자체가 이상하게도 섬뜩하다는 것이었다. 한편, 준후 는 말을 하는 사이에도 왜 아라가 호텔에서 보았던 중년의 남자 와 같이 오지 않고 혼자 재미없는 연극을 보러 온 것인지 의아하게 여기고 있었다.
서류 검토를 끝낸 현암과 박 신부는 나름대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현암은 누구보다도 다카다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칠인방이 두 파로 갈라진 것인지, 왜 다카다는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것인지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연속적으로 목숨을 잃은 그 들의 배경에 원한을 가지고 죽은 다카다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이 마음에 걸렸다. 정치를 하다 보면 입장이 달라 파가 갈리고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으로 뒤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에 자살한 사람이 배후에 있다는 것은 물론 경찰에서야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충 분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다카다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다카다의 악령이 무슨 일을 꾸민 것은 아닐까요?”
“나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것 하고 나머지 사람이 연속적으로 살해된 것하고는 너무 시간 차 이가 많이 나지 않나?”
박 신부도 다카다가 의심스럽다는 면에서는 현암과 같은 생각 이었다. 그러나 원한령이라는 것은 원한을 품은 사람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기간 동안에 강해지는 법이어서 아무리 영이라 해도 십여 년이나 지난 이후에서야 무슨 일을 벌인다는 것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왜 당사자가 아닌 주변의 여인들 부터 먼저 변을 당했는지, 그리고 왜 꼭 일정한 시차를 두고 그 런 짓을 벌인 것인지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박신부가 그런 이야기를 하자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래요. 단순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 간격이 일 정하다는 면에서 영적인 것보다는 사람이 꾸민 음모의 냄새가 강하게 나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음, 그러면 공포감을 주어서 상대방을 극도로 괴롭히기 위해 그런 일을 꾸민 것은 아닐까요?”
“글쎄, 대강 자료들을 훑어보기는 했지만 특별히 이러다 할 만 한 증거는 없어 보이네. 예를 들면 이토의 경우를 보세. 이토에 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어. 그런데 이토를 괴롭히려고 한 것이라 면 아들들을 놓아두고 굳이 내연의 관계에 있는 여자에게만 화 를 입힌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도 그렇군요. 만일 그렇다면 다카다의 영과는 다른, 무슨 집단과 관련된 음모가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흠, 일단은 명왕교가 수상해. 그렇지 않은가?”
그때 준후와 승희, 연희가 우당탕탕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준후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에구, 노인지 뭔지 허연 가면 쓰고 하는 거 보기는 봤는데, 조금 보다가 나왔어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또 어딘지 모르게 징그러운 느낌이 들어서요.”
현암이 그런 준후를 보고 씨익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징그럽다고? 하하하.”
“좌우간 난 별로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가깝고도 먼 나라라더 니 그 말을 실감하겠더라구요.”
준후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하자 다들 준후의 그런 모습이 귀 엽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준 후의 얼굴이 빨개지자 박 신부는 그런 모습을 미소를 머금고 바 라보다가 문득 준후도 사춘기에 접어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머리를 스쳤다.
일행이 모두 모이자 박 신부와 현암은 서류의 내용을 간략하 게 정리해서 설명해 주었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 보았지 만 특별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준후가 소혼술을 해 볼까 하 는 말도 했으나 박 신부에게 따끔하게 한마디를 듣고는 쑥 들어 가버렸고, 또 아직 구체적인 조사 범위가 정해지지도 않은 터에 승희에게 힘이 많이 드는 투시를 행하게 하는 것도 그다지 내키 지 않는 일이었다.
일행은 먼저 스즈키를 만나서 명왕교와 실종자들에 대한 정보 를 더 수집해 본 뒤에 다시 구체적인 일들을 논의하기로 했다.
회의를 마친 현암과 박 신부는 늦은 저녁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고, 승희와 연희는 옆방으로 건너갔다. 준후는 여기저기 돌 아다닌 탓에 고단했는지 벽조선을 꺼내 만지작거리면서 침대에 누웠다. 조금 전의 밝은 얼굴은 어느덧 사라지고 준후는 다시 우 울해졌다. 그리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는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다.
다음 날 일행은 아침 일찍 찾아온 사이토와 도운과 함께 교토 로 향했다. 그러나 스즈키에게는 박 신부 혼자만 가게 되었다.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사이토가 어디론가 전화 통화를 하고 오더 니 침통한 얼굴로 어젯밤 스즈키가 갑자기 심경에 변화를 일으 켜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승희는 뭔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쪽 사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얼굴이 달아오른 현암이 큰 소리로 말하자 사이토 보좌관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면서 스즈키 씨의 개인 사정으로 인한 것이니 이해를 바란다고 말했다. 준후는 혹시 승희가 뭔가 알아냈나 싶어 승희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승희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만 있을 뿐이었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어서 일단 박신 부는 사이토 보좌관과 함께 스즈키를 만나러 가기로 하고, 준후 와 연희는 최근에 원인 모를 사고로 사망한 히로시의 사망 현장 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사실 박 신부는 밀교의 술법자가 잔상만 을 읽어 낸 것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찜찜한 사건 현장에 어 린 준후를 보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준후는 상관없다고 말 했다
“일본 밀교의 고단자가 무슨 이유로 당했는지는 몰라도 저도 영적으로 충분히 자신을 보호할 만큼은 되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신부님, 저도 현장에 가서 뭔가 알아내고 싶어요. 소혼 을 한다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세요. 예? 신부님.”
박신부는 준후를 보내야 될 것인가 말 것인가 한참을 고민하 다가 결국은 준후의 뜻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준후는 일본말을 할 줄 모르고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연희에게 동 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이토 보좌관에게도 그 장소들을 둘러 볼 수 있도록 사전에 관계 기관에 협조를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는 사이 현암이 준후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준후야, 어디부터 가보려고 하니?”
“글쎄요. 가장 최근에 죽은 히로시의 사망 현장으로 가 보는 것이 아무래도 제일 확실하겠지요. 벳푸라고 했던가요?”
“응, 그래. 온천으로 유명하지.”
박신부가 일행에게 모아 정리하듯 말했다.
“그러면 준후와 연희 양은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참, 연희 양, 그곳에 도착하면 전화나 뭐 다른 수단으로라도 소재를 전해 주 겠어? 구체적인 장소라든가 현장을 둘러볼 수 있는가 등등을 확 인해서 알려 주었으면 좋겠군. 어때?”
“네, 그렇게 하죠.”
연희가 선선히 대답하면서 예의 그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건 기록을 조사해 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체는 모두 발견이 되었는데, 히로시의 딸만은 아직까지도 실종 상태더군요. 저는 그 부분을 한번 캐 보겠습니다. 만약 제 짐작이 맞는다면……………… 박신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던 현암이 잠시 말을 끊었다 가 눈을 빛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이번 일에 정말로 명왕교가 개입되어 있다면 히로시의 딸의 생사 여부를 조사하는 중에 명왕교의 인물들과도 마주치 게 될지 모릅니다. 좌우간 뭔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게다가 승희가 투시력으로 도와주기라도 한다면 그다지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 않군요. 안 그래, 숭희야?”
현암이 승희의 눈치를 슬쩍 보면서 말하자 승희는 별말 없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 군이 그렇게 하겠다면 나야 따를 수밖에 없지, 뭐. 그까짓 여자아이 하나 못 찾으려고. 근데 문제는….”
승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 아이가 살아 있지 않으면 내가 조금 어려워지기는 하지 만・・・・・・ . 그래도 일단 해 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박신부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는 사이토 보좌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현암 군과 승희 양은 일본말을 못하기 때문에 의사소 통에 문제가 있을 텐데요. 두 사람과 같이 보낼 만한 사람은 없 습니까?”
박신부의 제의에 사이토 보좌관은 당황하는 것 같았다.
“글쎄요. 이번 일은 대단히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이라 누구에 게 통역을 부탁할 만한 입장이 못 되는데…………….”
박 신부는 사이토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실제로 투시니 소혼이니 하는 것은 일반 사람들 이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아무리 통역을 잘한다 해도 정 확히 의사가 전달될지 의문이었다. 그때 사이토 보좌관이 옆에 있는 도움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운 스님께서 동행을 해 주신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사이토 보좌관의 입에서 도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원래부터 도운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승희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현암은 그런 승희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 사이토 보좌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도운 스님께서도 한국말을 할 줄 모르실 텐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두 분 중에서 영어를 하시는 분은 없습니 까? 도운 스님이 영어는 할 줄 아시는데요.”
“아, 그래요? 그렇다면 됐네요. 저도 어느 정도 영어는 알아들 을 수 있고, 여기 있는 승희는 영어를 상당히 잘한답니다.”
승희는 현암의 말에는 딴청을 피우며 도운 화상에게 놀리듯 영어로 말을 걸었다.
“어머나, 스님께서 영어도 하실 줄 아세요? 대단히 박식하신 분이네요.”
도운은 승희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나직하게 영어로 대답했다.
“천만에요.”
승희가 더 장난을 치려 하자 박 신부가 나섰다.
“자자, 아무튼 해야 할 일들은 명확해진 것 같으니까 우리 다 같이 최선을 다해 보도록 하자구.”
박 신부의 말에 현암이 고개를 끄덕였고 승희도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정 급하면 도운 스님 마음속을 읽어도 되니까 너무 염려 마 시고, 신부님은 스즈키 씨와 이야기나 잘 나누어 보세요. 아무래 도…….”
승희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박 신부는 그런 승희를 잠시 바라보았지만 왜 그러는지 더 이상 묻지는 않 았다. 승희는 세크메트의 눈 한쪽을 연희에게 주며 무슨 일이 있 으면 수시로 연락해서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기로 했고, 박 신부 와도 사이토 보좌관의 휴대 전화로 연락을 하기로 약속했다.
“됐군. 오늘은 각자 조사를 해 본 다음, 늦어도 저녁 일곱 시까 지는 숙소로 모이기로 하자고. 됐나?”
“그렇게 하지요.”
일행이 동의하자 박 신부는 사이토 보좌관과 함께 먼저 자리 를 떴다. 승희가 그때서야 픽 웃으면서 현암에게 말을 건넸다.
“사이토 씨가 아까 전화하고 나서 우리에게 스즈키 씨가 여러 사람 만나기 싫다고 했다고 말했잖아? 그때 내가 사이토 씨의 속 마음을 잠깐 읽어 보았는데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아무튼 뭔가 이상해.”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사이토 씨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스즈키 씨는 지금 정상이 아니야. 반미치광이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뭐, 벌써?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어제까지는 정 상이었잖아.”
“그랬었지. 그런데 불행하게도 어제하고는 다른 것 같아. 아 니, 분명히 달라. 그래서 우리를 다 데리고 가지 못한다고 했던 거야.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으니 사건의 내막은 알려 줘야 도리겠고, 그래서 우리 가운데 제일 연장자이고 성직자이기도 한 신부님 한 분만 모시고 간 거야. 어쩌면 우리가 여기까지 온게 헛 수고가 돼 버릴지 모르겠는걸? 만약 스즈키 씨가 실성이라도 해 버린 거라면 더 이상 일을 진행시킬 수 없잖아.”
“아니야. 그렇기는 해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가라고 하겠 어? 그렇다고 갈 우리도 아니고, 어떻게 되든 한번 맡은 일은 해 결을 해야지.”
현암이 단호하게 말하자 승희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준후와 연희, 그리고 승희와 현암, 도운 화상으로 꾸려진 팀도 각자 맡은 것을 조사하기 위해 목적지로 향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