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6화 – 와불이 일어나면 5 : 운주사
운주사
방 안이 조용해지자 승희가 간략하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현암도 한빈 거사에게 귀띔을 받은 것과 자 신이 겪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 박 신부에게 조용히 할 이야기가 있는 듯했고, 박 신부도 그간 알아내고 생각했던 바를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병실에서 그런 대 화를 나누기에는 적당치 않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았다. 박 신부는 승희에게 퇴원 수속을 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현암에게 걸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았다. 현암이 웃으면서 말했다.
“걸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예전보다도 몸이 더 좋아진 것 같습니다. 한번 거사님이 추궁과(過) 수법으로 저에게 활공(*을 행해 주셨어요. 그분은 정말………….”
현암은 감정이 복받치는지 평소답지 않게 울음을 꿀꺽 삼켰 다. 저쪽에선 현암이 구해 주었던 여학생이 흐느끼고 있었다. 자 신은 병원을 뜰 수가 없는데 현암이 떠난다니 기약 없는 이별이 아닌가 싶어 그렇다는 것을 승희는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흥 하고 코웃음을 쳤을 뿐 다른 사람에게 여학생의 속마음을 말해 주지는 않았다. 현암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더니 여학생 쪽으로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 공력을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돌려서 그 사람의 공력을 바로잡거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이젠 괜찮은가요? 어디 다친 데는 없고요?”
“예, 다친 데는 없어요. 뭐라고 고맙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여학생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물만 펑펑 흘렸다. 원래 말주변이 별로 없는 현암으로서는 그 여학생에게 할 말도 없고 해서 화제도 바꿀 겸 이번에는 승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승희야, 네가 날 구해 주었다며? 한빈 거사님께 들었다. 고마워.”
“헤헤, 뭘……. 그저 내가 그랬던 건……………”
승희가 얼굴을 붉히면서 쑥스러운 듯 조금씩 몸을 꼬고 있는데 현암이 눈을 바라보더니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승희야, 도로 줄래?”
“주다니 뭘?”
“월향 말이야.”
승희는 쀼루퉁해졌다. 그러고 보니 월향이 주머니에서 꼼지 락거리면서 현암에게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승희는 월향을 꺼내 거칠게 현암의 손에 탁 놓고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고개 를 돌렸다.
‘자나깨나 칼 생각뿐이군.’
현암은 어안이 벙벙한 듯 승희를 쳐다보다가 월향을 조심스럽 게 쓰다듬었다. 현암의 무표정하던 눈에 그윽한 눈빛이 어리는 것을 보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속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박 신부는 안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헛기침 을 하면서 아무 말 없이 사람들을 바깥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이 미무련과 승현은 바깥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었고, 준후도 밖으 로 나가는 중이었다. 토라진 승희가 먼저 바깥으로 나가 퇴원 수 속을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박 신부와 현암이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뒤쪽에 있던 여학생이 현 암을 불렀다.
“현암 씨라고 하셨나요? 저는…………… 저는…………….”
뒤를 돌아본 현암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하고 손가 락 하나를 입술에 갖다 댔다. 여학생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껏 보고 들은 것을 남한테 이야기하지 말라는 현암의 뜻을 이해라도 한 듯이.
병원에서 나온 일행은 차에 탔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 원과 임악 거사, 정 선생은 지루한 듯이 앉아 있다가 일행과 한 명의 청년이 늘어 차에 타는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일행 을 따라 차에 다시 탄 임악 거사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현암의 위 아래를 살펴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현암 씨요?”
“예, 그렇습니다만…………..”
“아, 이쪽은 임악 거사라고 하지. 도방에 몸담고 계신 분이시 라니 자네와도 인연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네.”
박신부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웃음 띤 얼굴로 이 야기를 하자 현암도 목례를 했다. 그러자 갑자기 임악 거사의 몸 이 무언가에 밀쳐진 것처럼 의자에 푹 하고 깊이 파묻혔다. 임악 거사의 얼굴에 놀란 빛이 스쳤고, 현암은 아무 말 없이 미안하다 는 듯 임악 거사에게 고개를 꾸벅하고는 말없이 박 신부의 오른 쪽 자리에 앉았다. 무련은 무슨 상황인지 눈치챈 듯 가만히 염주 알을 굴리면서 아미타불 하는 소리를 냈고, 임악 거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악 거사는 현암이 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간파 하고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공력을 구성 이상 펼쳐서 반탄력을 만들어 냈는데, 자신이 암암리에 밀어냈던 힘이 튕겨져 나와 그 만 의자에 파묻혀 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위에 설 사람이 별로 없다고 믿고 있었던 임악 거사로서는 훨씬 젊고 체구도 큰 편이 아닌 청년이 이렇게까지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현암의 내공은 도혜 선사가 필생을 걸고 수련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에 맞설 상대가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실 현암도 임악 거사의 공력과 자신의 공력을 정확히 비교 할 수 없어서 과하게 힘을 썼는데 임악 거사의 공력으로 보아 오 성의 힘만 썼어도 밀려났을 터였다. 만약 혈도가 모두 뚫려서 정 상적으로 유통되었다면 임악 거사는 아마 차를 뚫고 바깥으로 튕 겨 나갔으리라. 그러나 임악 거사는 지금 현암이 보여 준 그만큼 의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기가 질리고 말았다. 오히려 그런 광경 을 본 정 선생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현암은 자리에 앉은 뒤 정 선생에게도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 사를 했다. 임악 거사의 큰 덩치에 가려서 미처 보이지 않아 인 사를 못했던 것이다.
“아, 아까는 딴 데 한눈을 파느라 인사를 잊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오 아니오. 젊은 양반이 참 대단하시구먼. 그런데 혹시…….”
“예?”
현암은 정 선생의 눈빛에서 뭔가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 선생의 비굴하게 보였던 인상은 어디론 가사라지고 이제까지와는 달리 엄숙한 표정이었다.
“당신의 공력은 태극기공의 술수가 아니오?”
“예, 맞습니다. 그것을 어찌 ………….”
“그렇다면 당신은 한빈 거사님의 문하가 아니시오?”
“예? 글쎄요. 문하라고까지야 할 순 없지만 한빈 거사님께 큰 은혜를 입은 바가 있습니다. 방금 병원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예? 뭐라고요? 병원에서라니요? 한빈 거사님이 이곳에 오셨단 말인가요?”
현암은 물론 박 신부와 준후는 정 선생이 한빈 거사를 알고 있 을 것으로 짐작하지 못했고, 정 선생은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 게 몰리는 것이 부담스러웠던지 기어들어 가는 태도로 변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풍수사나 무술가, 그리고 도 방의 사람치고 한빈 거사님을 모르는 분은 없지요. 그분은 성미 가 괴팍하셔서 제자를 거두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한빈 거사님의 문하 되는 분을 직접 뵙게 되다니. 게다가 직접 이곳까지 오셨었다니…………. 아이고! 뵈었어야 하는데!”
정 선생이 희한하게 태도를 바꾸면서 끝도 없는 한탄만 늘어 놓자 이번에는 박 신부가 분위기를 바꿀 양으로 정 선생에게 물 었다.
“한빈 거사님께서 한마디 말씀을 당부하고 사라지셨지요. 운주사로 가 보라고 하시던데, 정 선생님은 풍수지리에 정통하 신 분이니 운주사가 어떤 곳인지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으신가 요?”
“아하, 운주사! 거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이번엔 승현 사미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주사라고 하면 천불천탑이 있는 곳 아닌가요?”
“아, 그렇군! 천불천탑!”
박 신부와 현암도 언젠가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 다. 천불천탑이 있는 운주사 천불천탑은 고려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아는 사 람은 하나도 없었고, 사실 퇴마사들도 그곳에 들러 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준후만이 천불천탑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자세히는 아니지만 들은 풍문이 있었다.
“천불천탑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 바가 있으면 저희에게 가르 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정 선생이 말을 꺼내려는데 퇴원 수속을 마친 승희가 그제야 두리번거리며 차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 신부는 차 밖으로 반쯤 몸을 내밀고 손짓을 해서 승희를 불렀다. 승희가 들 어서자 박 신부가 사람들에게 소개시켰다. 승희는 기분이 그다 지 좋지는 않은 듯 조금 예의 없는 태도로 사람들에게 까딱까딱 고개만 끄덕여 보이고는 승현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자꾸 맥이 끊기기는 했지만 어쨌든 일행이 다 모였기에 박신부는 정 선생에게 운주사와 천불천탑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 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정 선생은 처음에는 난해한 말로 뭐라 고 말을 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 자 말을 바꾸어 운주사와 천불천탑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 몇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운주사에 있는 천불천탑은 도선국사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도선국사라면 신라 효공왕 때의 분으로 높은 도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신 대선사지요. 당나라에서 풍수지리설을 배워 처음으로 신라에 전파했고 후에까지 풍수지리의 시조 역할을 하 신 분입니다. 도선국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지형은 행주형 국(行舟形局)으로 동쪽의 큰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배 모양을 하 고 있지요. 그러니까 태백산맥이 있는 동해안의 관동 지방이나 영남 지방은 지대가 높아서 몹시 무겁지만 호서 지방이나 호남 지방은 평야가 많아서 가볍기 때문에 지세가 동쪽으로 기울어져 서 국운이 바다 쪽, 그러니까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 나라가 편안 치 못하다고 하셨답니다. 다시 말해 한쪽으로 쏠린 무거운 짐 때 문에 배가 균형을 바로잡지 못하고 삐딱하게 기울어 있는 형국 이라는 것이죠. 이런 산세를 관찰한 도선국사는 서쪽 지방에 높 은 탑을 많이 세워서 그 탑을 배의 돛대로 삼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배에 짐을 싣는 격으로 부처를 많이 만들어 눌러 놓으면 배 가 균형을 잃지 않을 것이고, 또 천불이 사공이 되어서 대양을 향해 저어 가면 풍파를 만나더라도 평안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 이라 여기셨습니다. 그게 천불천탑이 만들어진 이유라고 전해 지지요. 놀라운 것은, 일설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도력으로 천상 의 석공들을 불러 그날 닭이 울기 전까지 흙을 뭉치고 돌을 깎아 서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불탑을 만들어 놓고 닭이 울면 천상 으로 가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선국사는 혹시나 시간이 부족해서 일을 다 마치지 못할까 봐 절의 서쪽에 있는 일 개봉이라는 봉우리에 도력으로 해를 잡아매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도선국사를 따라왔던 시동 한 명이 돌을 날라주다가 그 만 짜증이 나서 일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빨리 일이 끝나게 하 기 위해 꼬꼬꼬꼬꼬댁 하고 닭 울음소리를 냈다지요. 이에 석공 들은 누워 있던 부처를 세우다 말고 일손을 멈추고 하늘로 올라 가버렸답니다. 그래서 천불 중에서 가장 큰 불상인 와불이 일어 나지 못했고, 탑과 부처가 각각 천 개에서 하나씩 모자랐다고 전 해지지요.”
“천상의 석공이라……………”
“또 다른 전설도 있습니다. 도선국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중국에서는 벌써 이곳의 천기를 짚어 보고, 신라에 사자를 보내 신동인 도선국사를 중국으로 데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선 국사는 중국의 일행 선사로부터 풍수지리를 배웠고, 음양의 술 수와 여러 도술도 배웠다고 하지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어서 고국으로 귀국하는데 일행 선사는 중국보다 신라의 기운이 너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은 좋지 않으니 신라의 지혈 몇 개를 끊어 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차마 스승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신라 에 돌아온 후 지혈을 몇 군데 끊어 놓았는데 그러자 능주 지방에 있는 피재에서 땅이 피를 토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땅이 피를 토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도선 국사는 중국에 보복을 결심했답니다. 천태산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방아 머리에 쇠로 만든 말을 붙인 철마 방아를 만 들어 한 번씩 방아를 찧으니 국가의 큰 인물이 매일 한 명씩 죽 었다고 하지요. 일행 선사는 중국 황제의 명을 받고 급히 사자를 보내어 그 일만 중지해 준다면 어떤 청이라도 들어주겠다고 약 속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도선국사는 이곳 운주사가 땅 기운이 약한 곳이어서 이곳을 무겁게 누르지 않으면 일본의 침략을 받 을 우려가 있으니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워 일본의 기운이 승하 지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 있는 석 공들이 이곳으로 와서 천불천탑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지요. 그 런데 그 중심에 있는 가장 커다란 와불만은 일어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건 왜죠?”
“와불이 일어나면 방향이 중국의 곤륜산을 향하게 되어 중국 의 정기를 흡수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전설일 뿐입니다. 이외에도 와불에 얽힌 전설은 엄청나게 많지요. 이 와불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했던 흔적이 와불 밑 부분에 남아 있는데 일 으켜 세운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요. 높이가 십삼 미터 가까이 되니까요. 그런데 만들 당시 와불을 정말 일으켜 세우려 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후세 사람들이 세워 보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렇게 거대한 와불을 세운다는 것은 지금 보아도 난공사일 것인데 당시로서는……………..”
“와불, 와불이라…….”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임악 거사는 내내 관심 없다는 듯 얼 굴을 돌리고 있었으나 정 선생은 눈을 계속해서 반짝였다. 다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듯하자 박 신부가 자신이 보았던 환영 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 환영은 틀림없이 은기옹의 모습 일 것이며, 은기옹이 뭔가 부탁하기 위해서 나타났을 것이라고. 현암은 은기옹의 환영이 나타났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깜짝 놀 라면서 자신이 신사 밑에서 철기옹과 똑같은 모습의 시체 한 구 를 봤다는 이야기를 했다. 현암의 이야기를 듣고 박 신부와 준 후, 무련은 거의 동시에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무련이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철기 어르신과 닮으셨다면 틀림없이 은기 어르신일 거예요. 그럼 은기옹이 그 이상한 신사 아래 있는 암굴에서 돌아가셨단 말씀인가요?”
“예, 틀림없습니다. 그곳엔 이상한 옥색 구슬 같은 것도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회색 영도 있었죠. 그 영처럼 지독한 녀석 은 처음 보았어요.”
“음…..”
박 신부가 나직한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현암 과 준후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 처음부터 정리를 해 보세. 일단, 우리가 알고 있던 철기옹 의 형님이시자 같은 박수무당이었던 은기옹은 과거 스기노방에 게 패배를 안겨 주었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 곳곳의 지혈이 끊기 게 되었다고 여기시고는 평생을 지혈 복구에 바치셨다고 했네. 분명한 것은 최근까지도 은기옹께서 생존해 계셨다는 점일세. 그런데 그런 능력이 있으신 은기옹이 다른 연락 수단도 아니고 까다로운 환영술을 사용해 우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이런 이 유에서가 아닌가 싶네. 현암 군이 말한 신사 아래의 토굴에서 위 기에 빠지자 당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알려 주기 위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그 주술을 쓰고 돌아가신 것이지. 그러면 모든 것이 말이 되네. 내가 환영을 본 것은 어젯밤이었고 현암 자네뿐만 아 니라 아까 그 여학생이 은기옹의 시체를 발견한 것 또한 어젯밤 이라고 했으니까. 준후야, 분명히 그런 환영 주술을 죽은 사람이 쓸 수는 없겠지?”
준후가 흥분되는 듯 고개를 심하게 끄덕거렸다.
“예,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분명해. 은기옹은 신사의 지하에서 수상한 것을 발 견하고 그곳으로 들어가셨고, 큰 위기에 처하신 거야. 현암 자네 가 맞서서 싸웠다던 영의 습격을 받으셨겠지. 영의 손길이 닿자 반탄력과 깊은 내공이 있는 자네조차도 한기 때문에 정신을 잃지 않았었는가?”
“예. 맞습니다.”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신부님 말씀대로라면 모두 이치에 들어맞는군.’
현암은 그 여학생이 어떻게 하룻밤을 넘길 수 있었는가 되짚 어 보았다. 자신과 맞서 싸운 영은 자기도 당할 수 없을 만큼 지 독한 술수를 지니고 있었는데 아무런 힘도 없는 여학생이 단지 토굴의 방에 숨었다고 해서 영이 쫓아오지 못할 리가 없었다. 토 굴의 방에는 여학생을 도울 만한 응원군도 없었고, 있다고 하면 오직 은기옹의 시체가 있었을 뿐인데……………. 은기옹이 필경 돌아 가시기 직전 어떤 술수를 부려서 영이 방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 게 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여학생이 무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은 여학생에게만 집중을 하다가 정신을 잃 고 쓰러진 자신을 미처 공격하지 못했던 것이리라. 참으로 아슬 아슬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은기옹께서 그곳에서 알아내신 것이 무엇일까요? 환영술까지 써서 우리에게 알리려고 했던 것은….”
박신부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보기는 했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 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단 말이야. 알 수 있는 단어 몇 개 뿐이었어. 왜놈들. 그리고 말뚝 박는 시늉. 그리고 무얼까? ‘아 리’ 같기도 하고 ‘잉아’, ‘와우’ 그리고 ‘우우아’ 같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한 것을 무릅쓰고 입을 벌리며 흉내를 냈으나 입 모양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아이고! 그것 가지고 어떻게 알아내요?”
준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박 신부도 멋쩍은 듯이 얼굴을 붉혔지만 별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저 쪽에 앉아 있는 승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을 꺼냈다.
“신부님, ‘아리’라고 하신 것 같다고요?”
“그렇네.”
승현이 이번엔 현암에게 물었다.
“현암 시주님, 주님께서는 암굴에서 옥색 구슬을 보셨다고 했죠?”
“음, 그래.”
“그렇다면 혹시 사리가 아니었을까요?”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리라고? 득도한 고승의 몸에서 나오는…………….”
“예, 맞아요. 사리는 고승의 불력이 깃든 상징이지요. 원래 불 가에서 세우는 탑이 사리를 안장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그 런데 그런 사리가 그곳에 그토록 많이 있었다고 하면, 그리고 도 력이 높은 은기옹이시라면 그 광경을 보고 분명 뭔가 알아내셨을 거예요.”
현암은 생각에 잠겼다. 그럴 법했다. 굴 안에서 자신이 느낀 기운은 매우 강력했고, 구슬들은 영을 죽이고 나자 이상하게 새 빨갛게 변하더니 폭발해 버렸다. 그러나 영이 사리의 힘을 모아 자신을 공격했다면 자신이 열 명 있어도 당해 내지 못했을 거라 는 기분도 들었다. 사리 하나하나가 고승들의 불력의 결정체인 데 그토록 많은 사리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면 신사 밑의 암굴이 야말로 무슨 내력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현암이 추측하는 동안 승현 사미가 눈을 깜박거리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저도 다른 것은 몰라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우우아’ 이런 식 으로 입을 움직이셨다고 했죠?”
박신부가 기대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승현이 여전히 눈을 깜박이면서 귀엽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건 운주사가 아닐까요?”
“운주사? 그렇군. 운주사라고 발음하면 입 모양이 비슷하게 되는군.”
“맞아요. 아까 한빈 거사님도 운주사로 가보라고 말씀을 하셨잖아요. 한빈 거사님께서는 뭔가 많은 것을 알고 계신 것이 분명 해요. 그런데 ………..”
준후가 말을 끊었다.
“한빈 거사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자세하게 알려 주시지 않은 거죠?”
현암이 준후를 타이르듯이 말했다.
“한빈 거사님께는 보다 큰 일이 있어.”
“보다 큰 일이라고요?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요?”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도력이 높은 분이시란다. 내 생각으론 그분 정도 되면 보다 큰 일을 하고 계실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분의 의 도를 섣불리 짐작하려 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거야. 알겠니?”
박신부도 현암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현암군의 말이 맞다. 이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야. 한빈 거사님도 그렇고 은기옹께서도 우리에게 부탁을 하지 않았니? 은기께서 평생을 지혈 복구에 힘을 쓰신 분이라는 것을 생 각하면 이번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가 지혈을 다스리고 쇠말 뚝을 찾는 것보다 못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무련은 합장을 하면서 동감의 뜻을 표했고, 정 선생과 임악 거사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으나 눈을 빛내면서 골똘히 궁리하는 눈치였다.
“자, 그렇게 되면 만나자마자 헤어져야 할지도 모르겠군. 한꺼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 래야 할 때도 있지. 현암 군과 나는 신사 밑의 암굴을 조사하러 가는 것이 어떨까? 한빈 거사님의 당부도 있었으니까 현암 군이 빠지면 안 될 테고, 나도 운주사의 경내에서 조사를 하기에는 조 금 뭣하니까.”
준후 생각에도 가톨릭에 몸을 담고 있는 박 신부가 절에 들어 가면 여러모로 불편할 것 같았다. 퇴마사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만큼 속이 좁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사정을 모르는 운주사의 스님은 어떻게 여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운주사에 서 알아낼 수 있는 것보다 신사의 암굴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훨씬 많을 것 같았다.
“예, 그러면 저는 뭘 하지요?”
박신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준후에게 말했다.
“너는 이분들과 함께 원래 계획했던 일을 하도록 해라. 운주사 쪽 조사는 네가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원래 도선국사도 밀교 쪽의 술법에 능하신 분이었다고 했고, 또 풍수지리를 보거나 천 불천탑 자체를 조사하는 일은 네가…….”
박신부는 말을 하다가 슬쩍 정 선생과 임악 거사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두 분들을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 두 분께서 더 잘하시겠지만…………….”
무련이 동감이라는 듯 합장을 했고 정 선생과 임악 거사는 아 무 말 없이 담담히 앉아 있었다. 박 신부가 제안한 대로 일행은 역할 분담을 했고,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승희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지 않도록 품 안에서 세크메트 의 눈 하나를 꺼내 살짝 준후에게 건네주었다.
“준후야 이것 가지고 가..”
“예? 아, 예. 그런데 승희 누나는 같이 안가요?”
“당연하지. 내가 절에 가서 뭘 하냐? 나는 신부님과 같이 갈거야.”
말을 하면서도 승희의 눈은 현암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박신부는 백호에게 그간의 사정을 말하고서 자주 연락을 바 란다는 통화를 한 후 현암과 승희와 함께 차에서 내렸고, 준후와 다른 사람들을 태운 차는 운주사로 향했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 터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병원 근처에서 묵을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던 승희는 꺼 림칙한 것을 느끼고 병실 위쪽을 쳐다보았다. 십이층의 한쪽에 창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승희는 그 여학생이 내려다보고있을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자, 빨리빨리 갑시다! 푹 쉬고, 내일부터 그 괴상망측한 것을 찾아 나서야지요.”
승희가 앞장서서 서둘러 걸음을 떼자 현암과 박 신부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승희의 뒤를 따라 거리의 인파 속으로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