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1권 8화 – 와불이 일어나면 7
와불이 일어나면
발굴이라 해야 사나흘에 불과했지만, 큰 돌덩이 같은 것은 생 각보다 적었고 대부분 흙더미였기 때문에 굴은 거의 드러난 상 태였다. 안으로 재빨리 몸을 날린 현암은 고개를 숙이고 토굴 속 을 헤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저만치에 쓰러진 두 명의 인부가 보 였다. 발굴하는 동안 암굴 안은 버팀목으로 보강되고 전등까지 설치되어서 꽤 환했다. 현암이 인부들의 옆에 멈추어 서서 월향 검을 빼 들고 있는데 박 신부가 달려왔다.
“현암군, 조심하게. 곱지 않은 영기가 느껴지고 있어.”
“예, 압니다.”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들고 심호흡을 하며 서서히 공력을 모았 다. 지난번에 나타났던 영은 분명히 월향검의 검기에 맞아 소멸 되어 버렸을 터인데 더 있단 말인가? 이번에 그러한 종류의 영을 만나게 된다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박 신부의 도움을 빌려 영 들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 알아낼 작정이었다.
현암이 앞장서고 박 신부가 뒤를 따랐다. 둘은 쓰러져 있는 인 부를 힐끗 쳐다본 다음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옮겼다. 은기 옹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니만큼 안쪽의 움푹 들어간 자리에 있었 던, 사리들이 박혀 있던 방까지 발굴 작업이 끝난 모양이었다.
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현암은 안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영기에 흠칫 뒤로 물러섰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굴 쪽을 바라보고는 나직하게 신음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 다. 사리 굴 안에는 이상한 복색을 한 영들이 부글부글 끓고 있 었다. 하나하나가 예전에 현암이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퀭한 모 습을 한 해골 같은 영이었고, 적게 잡아도 열 이상이 될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몇 발자국을 물러선 현암은 뒤에 있는 박 신부에 게 조심하라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뒤쪽에서 박 신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니 박 신부가 없었다. 앞쪽의 영들은 우우 하는 소리를 내면서 현암을 향하여 달려들기 시작했다.
현암은 눈앞에 몰려오는 영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뒤 쪽을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님! 어디 계세요!”
현암이 박 신부를 부르는 와중에도 희뿌연 영들 중 하나가 웅 웅 소리를 내면서 현암에게 덤벼들었다. 현암은 생각할 것도 없 이 공력을 집중해 검기를 길게 뿜어 영을 순식간에 옆으로 한 번 베고 세로로 한 번 베어 네 토막을 만들어 버렸다. 이상한 울음 소리를 내며 그 영은 공중에 녹아들듯이 사라져 버렸고, 다른 영 들이 놀라 주춤하는 사이에 현암은 뒤로 몇 발자국 재빨리 물러 났다. 물러서면서 뒤를 보니 박 신부는 아까 쓰러졌던 두 명의 인부에게 입이 막히고 몸이 붙들린 채 그들을 뿌리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인부들의 눈이 풀려 있고 얼굴빛이 푸르죽죽
한 것으로 보아 영들의 일부가 인부의 몸에 빙의된 것이 틀림없 었다.
“망할 놈들!”
현암은 소리치면서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박 신부는 삽시간에 기습을 당해 뒤통수를 심하게 얻어맞은 듯 제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현암이 덤벼들면서 인부 하나를 손으로 붙잡 아서 와락 끌어내자, 겨우 숨을 돌린 박 신부는 다른 한 명을 벽 에다 밀어 쿵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그 인부가 엉겁결에 잡고 있던 손을 놓자 현암은 재빨리 박 신부를 밀며 뒤로 몇 발자국 을 후퇴했다. 밀려났던 두 명의 인부는 곡괭이와 삽을 들고는 현 암과 박 신부의 앞에 버티고 섰고, 뒤쪽에 몰려오던 많은 희뿌연 영들이 스르르르 두 인부의 몸에 들어갔다.
“이런! 저놈들이 힘을 합치는군. 신부님 괜찮으세요?”
박 신부는 한 손으로 뒤통수를 움켜진 채 끄덕거리며 괜찮다 는 시늉을 했다. 현암이 숨을 몰아쉬면서 위협하듯이 검기가 길 게 뻗어 나온 월향검을 앞으로 내밀자 인부들은 주춤거리며 뒤 로 물러섰다. 박 신부도 왼손으로 십자가를 꺼내 들었다. 박 신 부의 몸에서 오라가 퍼져 나왔으나 두 명이 나란히 있을 정도로 토굴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앞에 선 현암은 한두 발자국 내디디 며 박 신부를 힐끗 보고 말했다.
“신부님은 뒤쪽에 가 계세요. 이것들은 제가 상대하지요. 아무래도 놈들이 사람들의 몸속에 들어갔으니만큼…………….”
그때 갑자기 인부 한 명이 캭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들고 있던 삽을 내던졌다. 눈치 빠른 현암은 인부의 몸속에 들어 있던 영 하나가 삽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자유자재로 물건에 영을 감염시켜서 물리력을 쓰다니. 강한 기운은 아니지만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놈들은 아닌데, 신사를 지키고 있었다는 일본 승려들의 영일까?’
현암은 무심한 태도로 월향검을 허공에 그었다. 월향검의 귀 곡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현암을 향해 날아오던 삽은 반 토막 이 되더니 화르르 불이 붙어서 현암의 양쪽에 투툭 떨어져 내렸 고, 그 모습을 본 영에 빙의된 인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 암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당장 그 사람들의 몸에서 나와라! 감히 네 따위 놈들이 내 상 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영들의 숫자는 많았으나 현암이 지난번에 겨루었던 영에 비하 면 힘이 모자란 놈들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난번에 방심해서 크 게 당했기 때문에 현암은 긴장을 풀지 않고 인부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인부가 고함 소리를 내면서 앞쪽으로 튀어나 오는 것을 본 현암은 재빨리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던 월향검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는 인부의 등을 퍽 하고 쳐서 뒤쪽의 박 신부에게 넘겼다.
치는 순간에 현암은 공력을 ‘유자 결과 ‘투(透’자결 을 동시에 섞어서 손에 배분한 후 인부의 몸속을 훑듯이 기공력 을 몰아 짧은 순간에 공력을 ‘흡’ 자결로 바꾸었다. 인부의 온몸 을 훑고 지나가면서 ‘흡’ 자결로 영을 빨아들여 인부 몸속에서 떼어 내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수법을 한꺼번에 쓰는 것이 이번에 현암이 산에 들어가서 수련하고자 한 목표였다. 아 직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몸에 들어간 많은 영들 중 서너 놈은 현 암의 손에 붙어 버린 듯 쭉 빨려 나오는 느낌이 현암에게 전달되어 왔다.
뒤쪽에 서 있던 박 신부는 인부의 양쪽 어깨를 꼭 잡고 몸에 기도력을 발하면서 엑소시즘의 경문을 읊었다. 그러자 인부는 마치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몸을 후들후들 떨더 니 힘없이 쓰러졌다. 현암은 오른손에 붙들고 있는 영들을 끌어 다가 허공에 내팽개치고는 왼손을 들고 있는 월향검으로 놈들을 내리그었다. 한꺼번에 서넛이 얽혀서 몸부림치고 있던 영들은 월향검이 번쩍하자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 토굴 벽을 울리며 사 라져 갔다. 뒤에서 박 신부는 현암이 좀 지독하게 손을 쓰는 것 이 아닌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은기옹의 죽음도 이놈들 때문 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숨어서 사람을 해치고 일을 꾸미는 영들은 혼내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현암이 인부를 노려보자 놈들은 도망치려는 듯 인부의 몸에서 우르르 빠져나가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현암은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뻗 어 오른손에 공력을 집중하면서 다시 한번 ‘흡’ 자 결의 기공력 을 쏘았다. 그러자 빠져나가는 영들 중 한 놈이 몸부림치면서 진 공청소기에 먼지가 빨려들듯 현암의 손에 달라붙었다. 박 신부 는 모든 광경을 눈으로 볼 수는 없었지만 대강의 영기로 사태를 파악할수는 있었던지라, 현암이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현암군, 자네 굉장해졌네그려.”
“그건…….”
현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빈 거사님 덕분이지요.”
박 신부는 현암의 손에 잡혀서 발버둥 치고 있는 영에게 뭔가 를 알아내겠다고 생각했다.
“신부님 이놈이 뭘 알고 있나 알아볼까요? 신부님께서 하실 수 있겠지요?”
박신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신부는 눈을 감고 현암에게 잡 혀서 발버둥 치는 영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잠시 그러더니 눈을 크게 뜨고는 현암을 쳐다보았다. 현암은 박 신부가 왜 그러는지 를 알 수 없어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박 신부는 눈을 감고는 생 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알아낸 듯 소리를 쳤다.
“그렇군!”
박신부가 고개를 돌려 현암에게 말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 급히 준후에게로 가야 할 것 같아. 물어볼 것이 있네.”
“예? 무엇을 말이지요?”
“아니, 아니, 그보다 먼저 은기옹의 시신을 살펴야 되겠군. 분 명히 뭔가가 있을 거야. 그것을 보고 나서 준후에게 나머지 것을 물어보면 의문이 풀릴 것 같네.”
박 신부는 서둘러서 토굴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침착 하기만 한 박 신부가 급하게 서두르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일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현암은 뭐가 뭔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오른손에 잡고 있던 영을 혼내 줄 셈으로 공력을 몰아서 바깥으로 내팽개치면서 소리쳤다.
“또다시 사람들에게 장난을 치면 진짜 혼날 줄 알아라!” 현암이 보여 준 엄청난 위력에 영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토굴 안에서는 더 이상 영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인부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박 신부가 저렇게 급 하게 서두르는 것을 보면 현암도 바삐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현암이 걸음을 잽싸게 놀려 박 신부의 뒤를 따라 좁은 통로를 빠져나와 위로 올라오자 인부들 몇 명이 굴속으로 내려갔다. 기 절한 두 명의 인부를 데리러 가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현암은 이제 염려할 것 없다고 말해주고는 박 신부의 뒤를 따랐다.
박신부는 은기옹 시신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내면서 시 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한참을 살피던 박 신부의 입에서 이윽 고아하는 신음 소리가 나왔다.
현암이 물었다.
“신부님, 뭘 알아내셨나요?”
“현암 군. 이걸 보게나!”
박 신부는 쓰러져 있는 은기의 시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 다. 새끼손가락 끝이 으깨어져 검붉은 핏자국이 맺혀 있었다.
“아니! 이건 이 상처는………………”
“틀림없이 무언가를 써 놓으셨을 걸세.”
박신부가 이번에는 은기의 치렁치렁한 한복 자락 소매를 안쪽으로 뒤집어 펼쳤다. 그러자 소맷자락 안쪽에 드문드문 쓰인 글자가 나타났다. 현암은 자세히 보았다. 정확한 필체는 아니지 만, 몇 자 안 되는 글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수 있었다. 추를 들어 올려 배를 뒤집으려는 이곳을 부수고 와불을 일으 켜 세워라.’ 이게 무슨 뜻이지요?”
중간중간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있어서 현암은 떠듬떠듬 읽을 수밖에 없었다. 박 신부는 글자들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더 니 현암에게 물었다.
“배? 배가 뒤집힌다…………. 혹시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가?”
현암도 옛날의 일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지맥, 그리고 배…………..’
현암은 정 선생이 이야기해 주었던 운주사와 천불천탑 전설을 떠올렸다.
“맞아요. 우리나라의 지세는 행주형국으로 배와 같다고 했지 요. 동쪽으로 기울어진 배. 그래서 도선국사가 천불천탑을 만들 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추를 오히려 들어 올리는, 그리고 이곳을 부수라는 말은………… 혹시 그 추가 천불천탑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걸 들어 올린다는 말은…….”
“그래, 아까 암굴에서 영들이 한 말도 마찬가지였어.”
“영들이 무슨 소리를 했지요?”
박신부는 주변을 휙 훑어보더니 현암에게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그 영이 말하길 자기네들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는 거야. 그 영들은 기록에 있는 대로 신사를 관리했다는 일본 승려들이 분 명했고, 암굴은 대략 칠팔십 년 전에 만들어진 거였어.”
“칠팔십 년 전이요?”
“그래. 일제 강점기 초기지. 그리고 방에 있던 사리들은 모두 우리나라에 산재해 있던 탑과 부도에서 훔쳐 낸 것들이었어. 추를 위로 들어 올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네.”
“추를 위로 들어 올린다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요?”
“그것까지는 그 영도 모르고 있었어. 내 생각엔 아마도 자네 가 이전에 상대했던 영이 우두머리였던 것 같고 아까 나타난 영 들은 제자들이었던 것 같네. 이들은 과거 일본 밀교 승려들이었 지. 이곳을 지켜야만 일본의 기운이 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죽은 후에도 계속 이곳을 지키고 있었어.”
“음! 이번 일은 일본과 관련이 있고 또 굉장히 중요한 것이 숨 겨져 있는 것 같은데요. 이토록 많은 영이 죽어서까지 지킬 정도 라면요. 그런데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게 있어요. 추를 들어 올리 는 것은 무엇이고, 와불은 왜 세우라는 거죠?”
“글쎄, 감이 잡힐 듯 말 듯하긴 한데…………. 어서 운주사로 가 세. 준후를 만나 보아야 할 것 같네.”
“운주사로요? 아, 그렇군요!”
박신부는 머릿속이 채 정리가 안 됐는지 눈을 꼭 감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현암은 공사장 근처에서 차를 하나 빌렸다. 박 신 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승희도 데리고 가기로 하세. 승희의 힘도 필요할 거야.”
“예, 그러지요.”
두 사람이 탄 차는 광주로 방향을 돌렸다. 승희를 데리고 준후가 천불천탑을 살피고 있는 운주사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현암과 박 신부는 승희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도착해 방문을 두들겼으나 대답이 없었다.
“어딜 나간 모양인데요.”
현암이 멋쩍게 말하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그러면 나중에 연락하기로 하고 운주사로 가기로 하세. 승희 의 도움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연락을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러는 편이 낫겠군요.”
박신부와 현암은 운주사로 향했다.
광주에서 운주사까지는 그다지 먼 길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남평을 거쳐 능주에서 꺾어져서 용강을 통해 올라가는 길과 화 순과 능주를 거쳐서 가는 길 두 가지가 있는데 현암은 좀 더 가 까운 광주에서 남평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해 운주사로 향했다. 차를 몰면서 현암은 깊이 생각에 빠져 있는 박 신부에게 물었다.
“신부님, 알아내신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서둘러서 운주사로 가다니…………….”
“현암군, 우리 한번 정리해 보세나. 내 추측이 맞는지 들어 주게.”
“예, 그러지요.”
“은기옹이 적어 놓은 글자들은 이렇게 되어 있었지. ‘추를 들 어 올려 배를 뒤집으려는 이곳을 부수고 와불을 일으켜 세워라.’
‘이곳’이라는 것은 사리들이 보관되어 있던 신사 지하의 암굴이 분명하겠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했던 말도 맞는 것 같아. 우리나라의 지세가 행주형 국으로 배와 같다고 한다면 그 배는 풍수적으로 볼 때 동쪽에 무 거운 산이 많기 때문에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말. 그래서 도 선국사가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했지? 그러니까 자네의 말대 로 천불천탑은 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은기옹이 추라 하신 것도 천불천탑이 틀림없어. 더구나 신사 지하의 암굴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칠팔십 년 전에 만들어졌고, 또 추를 위로 들어 올린다는 말을 했다고 하지? 아마도 은기옹도 자네가 싸웠던 영에게서 그 러한 내용을 알아내셨던 것 같아. 그래서 그 내용을 혈서로 남기 셨고……………. 즉, 추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사리들의 기운으로 천 불천탑의 무게를 위로 들어 올리려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이 드네.”
“음, 그렇게 볼 수 있겠군요.”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탑이 세워지는 목적이 사리를 안장하고 불력의 기운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일종의 안테나 역할이 아닌가 현암은 생각 한 적이 있었다. 하늘과 바로 통하는 기운, 즉 아래쪽에 있는 기 운을 하늘로 쏘아 보내는 것이 탑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반대로 그렇게 많은 사리가 안장되어 있으면 기운은 그만큼 아래로 눌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황당한 이야기 같지만 탑이 무게를 준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로켓의 원 리와 비슷한지도 몰랐다. 탑을 안테나로 삼아서 기운을 위로 쏘 아 보낸다면 반작용으로 탑의 지반은 눌리게 될 테니까. 그렇다 고 한다면 사리들이 추를 들어 올리는 역할을 하지는 않고 오히 려 내리누르는 것은 아닐까?
현암이 웃음을 섞어 가면서 자기 추측을 박 신부에게 말하자 박신부는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비슷한 상상을 나도 했네. 그런데 그 사리들은 어디 있었지? 탑에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탑과 정반대의 구조물, 즉 탑은 땅 위의 빈 공간에 건축물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안장한 것이네. 그런데 이 사리들은 어땠 지? 땅을 파서 암굴을 만들고는 그곳에 안장하지 않았던가? 사 진 필름이 인화지에는 정반대의 색상으로 나오는 것처럼 암굴은 탑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더군 다나 그곳에 그토록 많은 사리를 안장해 기운을 아래로 쏘아 보 낸다면 오히려 추 역할을 하던 천불천탑의 기운을 들어 올릴 수 도 있을 것 같네.”
“그렇군요.”
“그래, 일본에서도 풍수지리를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 아마도 그자들이 그런 짓을 했겠지.”
“왜 그랬지요? 천불천탑을 없애면 그만일 것을.”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지. 그러나 천불천탑을 고의적으 로 없애기보다는 그렇게 해서 기운을 역으로 이용하는 게 좋다 고 생각했겠지. 그러면 우리나라의 기세는 계속 일본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고……..?
박신부가 말을 잇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모르겠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을까? 구조물 몇 개 만들었다고 해서 나라 전체의 기운을 마음대로 흥하고 쇠 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글쎄요. 하지만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풍수에 대한 믿음은 굉장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묏자리 쓰는 걸 허투루 여기는 사 람은 없을 겁니다. 야사에서도 조선 시대에 서울에 도읍을 정한 것도 무학대사가 어떤 이인(異人)의 가르침을 얻어서 한 것이라 전하지 않습니까.”
“음…”
무학대사가 서울 부근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을 적에 한 이 인이 소를 끌다가 ‘이……………. 이잇! 미련한 소, 미련하기가 꼭 무 학같구나’라고 하는 말을 듣고 그 사람에게 가르침을 얻어서 십 리를 더 가서 서울을 정했다는 이야기를 박 신부도 기억해 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서울에 왕십리라는 지명이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우리나라가 풍수적인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는 이야 기는 그 외에도 수없이 많다. 지금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어 있는 잠실도 관악산이 누에처럼 서울을 갉아먹으려는 형세이기 때문 에 시선을 뽕나무로 돌리게 하기 위해 그 일대에 뽕나무 밭을 조 성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러한 사례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현암이 한숨을 푹 쉬었다.
“글쎄요. 하긴, 아무리 그래도 국운이 그런 것 하나에 의해 좌 우된다는 말을 믿기 어렵기는 해요. 그러나 우리가 지금 겪고 있 는 여러 가지의 일들 또한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글쎄, 아무튼 풍수지리적인 설들이 사실이라면 일본에서는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나라의 기운을 빼앗아 갔다고 볼 수 있 고, 지금 그곳을 완전히 부수라는 은기옹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보네. 그런데 와불을 일으켜 세우라는 것은 무슨 말이지?”
“준후를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 우리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해서 준후와 이야기하세.”
“예.”
현암은 차의 액셀러레이터를 더욱더 힘 있게 밟았고 차는 어 두운 밤길을 미끄러지듯이 운주사를 향해 달렸다.
그 시간, 승희는 서울행 우등 고속버스에 몸을 묻고 있었다. 밤차로 가서 연희를 만난 뒤 아침 차를 타고 내려오면, 내일 아 침까지 현암과 박 신부에게 자료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 비행기를 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출근 시간 때라 터미널 에서 공항까지 가는 길이 더 막힌다. 그래서 밤새 달리는 버스를 탔다. 올라올 것 없이 우편으로 부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연희가 말했으나, 우편물이 다음 날까지 제대로 도착해 주면 다행이지 만 만에 하나라도 늦게 도착하면 어쩌나 싶어 조금 피곤하더라 도 직접 올라가기로 했다.
연희가 이번에 발견했다는 자료는 승희가 이삼일 전에 이야기 하였던 신사에 관한 자료였다. 연희는 문서 보관소와 도서관들 을 이 잡듯 뒤지다 마침내 문제의 신사와 관련된 자료와 편지 몇 점을 찾아내 승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이 저녁 무렵이었다. 연희는 자신이 내용을 설명하기는 마땅치 않지만 지세와 지기 에 관계된 것 같다고 했다. 승희는 연희가 찾은 자료에서 큰 비 밀을 알아낼 열쇠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현암이나 박 신부에 게 알리지도 않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승희가 서울로 향한 시각에 백호를 비롯한 몇 명의 사람들이 운주사를 향하고 있었고, 비슷한 시각에 현암과 박 신부도 운주 사를 향해 차를 몰고 있었다.
운주사에 도착한 현암과 박 신부는 정 선생과 준후, 승현이 매 우 늦은 시간인데도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현암과 박 신부는 그동안 사리 굴에서 알아낸 것 들을 준후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준후도 자신들이 알아낸 사실 을 이야기해 주었다. 결국 모두는 운주사의 천불천탑이 국운과 나라 전체의 지세에 관계된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정 선생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 게 말을 꺼냈다.
“제가 아까 이러한 내용을 백호 씨에게 전달했습니다. 백호 씨 도 매우 관심을 보이며 이 내용을 곧바로 위에다 보고하겠답니 다.”
“위라니요?”
“그분이 누군지는 알 수가 없지요. 혹시 여러분들은 알고 계시나요?”
“글쎄요. 저도 모릅니다. 저희도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박 신부는 백호와 만나고 나서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에 대해 백호가 해결해 주었던 것들을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경찰서나 사법 조직은 물론 군대에까지 백호의 말은 곧바로 통용되어서 지난번 퇴마사들이 블랙서클과의 일을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 백호의 뒤에 막강한 힘이 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그들은 그게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묻지도 않았고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잠시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정 선생이 주저주저 이야기를 꺼냈다.
“가능하면 당장 이곳으로 내려오겠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무 렵이면 도착할 테니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놓는 것이 좋겠지요.”
“내려오다니요. 누가 말이죠?”
준후가 묻자 정 선생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백호 씨와 그분 말이야. 상세한 설명도 듣고 근방을 둘러보고 싶으시다는 거야.”
“그래요? 잘되었군요. 천불천탑의 일도 우리가 이번에 계획했 던 지혈을 다스리는 일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일이니 잘된 일인 지도 모르겠네요.”
승현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준후도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 였고, 정 선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좀 이상한 기분이 들 었지만 나라의 국운을 하게 만든다는 데야 반대할 것이 없었 다. 박 신부는 아직 불안한지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다음에는 어떻게 할 계획이지?”
박신부가 묻자 준후가 눈을 말똥거리면서 말했다.
“글쎄요. 잘될지는 해 봐야 알겠지만, 이곳의 천불천탑을 복구하고 싶어요.”
“천불천탑을 복구한다고? 도대체 어떻게 복구한단 말이지?
각 탑이나 불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사진이나 그림도 남아 있는 것이 없고 위치도 정확하지 않은데.”
“원래의 모양대로 복구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이 천불천탑 이 지니고 있는 원래의 진세를 복구하기 위한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거죠. 신부님과 현암 형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쪽의 사리탑 과 신사는 이쪽의 천불천탑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서 만들어졌 던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부서져서 없어진 지금 천불천탑의 진 세를 복구해 놓으면 좋잖아요? 즉 똑같지는 않더라도 불상이나 탑 비슷한 크기와 무게를 가진 구조물을 만들어서 진세만이라도 복구하자는 말이죠.”
현암이 눈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할 수 있겠니?”
준후는 머쓱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 선생과 승현의 눈 치를 살폈다. 그러자 정 선생이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제가 비록 능력은 없지만 이런 중요한 일에 끼게 된 것을 일 생일대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는 힘을 다하겠소이다.”
“저도요.”
승현도 힘주어 말하자 준후가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가 힘을 모으면 충분할 거예요. 꼭 원래의 진세 그대로 복구해야 된다는 법은 없지요. 어쩌면 옛날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훌륭한 진세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제가 알고 있는 밀 교수법과 승현 사미가 알고 있는 선불교 지식, 정 선생님의 풍 수지리 지식. 그리고 현암 형이 도가의 진법을 응용해 보아도 좋 을 것 같은데요.”
“내가 뭘 아는 게 있다고.”
“아니에요. 현암 형도 임악 거사님도, 신부님도 하실 일이 있 을지 몰라요. 중요한 일이잖아요. 더군다나 와불 바로 밑에는 칠 성석(石)*이 있어요. 이건 도가에서 중시하는 북두의 방위와 같아요. 현암 형의 도움도 필요해요.”
그러자 박 신부가 말했다.
“준후야, 그런데 이곳에 진세를 복구한다면 정말로 우리나라 의 국운이 돌아서게 될까?”
준후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힌 듯 눈만 껌벅거리다 가 대답했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알 수 없지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떤 믿음이나 희망을 주는 것만이라도 이 일은 필요하다고 봐요.”
박 신부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히 좋은 일이고 만사가 잘 풀리는 것 같은데 어째서 계속해서 꺼 림칙한 느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칠성 신앙은 본래 도교에서 주로 믿어지는 신앙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불교와 결합하여 많은 사찰에 칠성각이 있다. 운주사에서는 이 칠성석이 와불의 아래쪽 부근에 있는데 그 배치는 북두칠성의 일곱 별의 위치와 놀랄 만큼 닮아 있으며, 돌들의 크기와 광도 등도 같은 비례로 되어 있어 천문학적으로 볼 때에도 놀랄 만큼 과학적이라고 한다.
다음 날 해가 뜨기도 전에 백호는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여러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운주사로 내려왔다. 차들의 중앙에는 커다란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있었다. 백호는 마중을 나와 있던 일행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해 보 이고는, 일행이 뒤쪽의 차를 궁금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뒤쪽을 힐끗 보더니 일행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냥 살펴보고 싶으셔서 오신 겁니다. 얼굴을 드러낼 만한 입 장은 안 되시니 그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행은 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으나 백호는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백호의 위치와 깍듯한 말투로 보아서 적어도 장관급 이상인 고위 관리일 것 같았다. 그런 사람 이 이런 초자연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 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좋을 것이 없을 테니 이해는 간다.
일행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백호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여러분께서 조사하고 수고해 주신 것에 대해서 대단히 감사 하게 생각합니다. 운주사 일대에 그런 내력이 있었다는 것은 여 태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을 조사해 주신 것, 특히 프로젝트가 시작되자마자 이런 큰일을 알아내시게 되 어 저 또한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의 천불천탑을 복구하고 싶다고 하셨다는데 사실입니까?”
“예, 그렇소이다.”
정선생이 먼저 대답했다. 임악 거사는 정 선생을 끌고 다니는 듯한 이전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상하게도 정 선생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분고분해져서 입도 잘 열지 않는 유순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해서 짧은 시간 에 태도가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현암이나 준후, 박 신부로서는 임악 거사보다는 정 선생의 정체가 더 궁금해졌다. 정선생은 처음 봤을 때의 모습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내력을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정선생이 헛기침을 몇 번 한 뒤 백호에게 말했다.
“준후 덕분에 모든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지요. 우리가 다른 곳의 끊어진 지맥을 복구하는 것보다도 이곳에 천불천탑의 진세 를 복원하는 것이 더욱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정 선생에게 물었다.
“그러나 운주사 일대는 문화재로 지정이 된 곳이고 천불천탑도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곳을 들쑤시 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좋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대공사 를 하려면 출입을 통제하고 나름대로의 명목을 붙여야 할 터인 데……………. 상당히 번잡한 일이 되겠군요.”
“그러나 해야 합니다.”
백호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정 선생님 의견에 여러분 모두 동의하십니까?”
“예.”
준후와 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동조하는 빛 이었고 박 신부 혼자만 담담한 얼굴이었다. 정 선생이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풍수적인 내용대로라면 이 천불천탑을 복원하기만 하면 그동 안 일본으로 흘러들어 갔던 우리나라의 기세를 단번에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일본에게 빼앗겨 왔던 국운이 나 지세를 되찾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니까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부근에 다른 것들을 세우는 것에 불과하니 문화재를 손상시킬 일도 없을 테고요.”
정선생은 말을 마치고는 뜸을 들였다가 백호에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 비밀에 부쳐 주셔야 합니다. 일본으로 흐른 기운을 우리나라에서 되찾아 가려고 하 는 것이 알려진다면 일본 쪽에서도 조치를 취하려고 할 겁니다. 일본에도 이곳에 얽힌 내막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까요.”
백호도 나직이 웃었다.
“여러분과 같이 있다 보면 믿어지지 않은 일을 많이 보게 됩 니다. 저도 처음에는 설마 그런 일이 있겠나 했지만 차차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그건 그렇고……. 이번 일은 너무도 중대한지라…………….”
백호는 말을 끊었다가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요.”
일행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호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검은 차 쪽으로 다가갔다. 차의 창문이 약간 열렸고 백호는 차 안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백호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일행에게 돌아오자 차는 방향을 돌려 다른 차의 호위를 받으며 운주사를 빠져나갔다.
백호는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일행에게 말했다.
“가능한 한 모든 지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염려 말고 소신껏 일에 착수하십시오. 저도 여러분과 함께 이곳에 남을 테니까요.”
백호는 말하면서 웃어 보였다. 다들 좋아서 싱글벙글 웃는 얼 굴이었다.
박 신부는 무련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무련의 얼굴이 아까 부터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박 신부는 처음에 느꼈던 꺼 림칙한 기분이 더욱더 강해졌다. 마음속에는 풀 수 없는 의문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사리가 보관되어 있던 암굴에 대한 이야기 는 아직 백호에게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고, 다만 진세를 누르 고 있던 것 가운데 하나를 현암과 함께 제거했다고만 말했다. 의 문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였다. 그 의문은 천불천탑에 대한 과 거 일본인들의 태도였는데, 박 신부는 거기에서 모순을 찾는 중 이었다. 처음에는 사고가 정리되지 않았지만 차차 앞뒤의 상황 을 맞추어 나가자 가닥이 잡혔다. 이야기대로라면 천불천탑은 우리나라의 지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일본인 은 비밀리에 천불천탑의 기운을 역으로 이용하는 사리 굴을 만 들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천불천탑은 많이 훼손되어 서 지금은 겨우 불상 팔십여 개와 탑 십여 개밖에 남아 있지 않 았다. 이것이 바로 박 신부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었다. 일본인들 이 천불천탑의 진세를 역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면 천불천탑 또한 잘 관리해 진세가 지금처럼 흐트러지지 않게 만들어 놓았을 것 이다. 또 만약 그게 아니라면 천불천탑을 모조리 부수거나 철거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천불천탑을 부수지도 고 치지도 않고 방치해 둔 채 조금씩 기운이 흐트러지게 한 것일까? 그냥 무관심해서?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이유는 불분명했고, 합당하지 않은 구석이 있었다. 박 신부는 그런 생각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천불천탑 쪽으로 올라가 근처의 진세를 살피면서 복구할 지점을 찾는 것을 씁쓸 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저만치에서 무련이 착잡한 표 정으로 혼자서 운주사로 돌아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련은 무 엇인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박 신부는 호기심에 무련의 뒤를 따 라 운주사의 경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승희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연희와 만나 되돌아갈 광주행 표 를 끊고 자료 사본을 넘겨받았다. 연희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은 이 자료들의 내용이 뭔지 잘 알 수 없지만 중요한 내용이 있을 것 같으니 잘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승희도 고개를 끄덕이 면서 봉투를 받아들었다. 연희가 밤을 새워서 일본어와 한문이 뒤섞인 난해한 원문들을 우리말로 옮겨 봉투에 같이 넣어 두었 다고 말하자, 승희는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긴 뭐, 나도 내려가서 같이 도와야 하는데……………. 이번에 야 외국에 나가는 것도 아니니 내가 도울 일이 있나? 이렇게라도 도움을 줘야지. 안 그래?”
연희는 큰 눈으로 시원하게 윙크를 찡긋 하고는 인사를 했다. 승희는 차 시간에 쫓겨서 연희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 고 광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차를 타고 와서 인지 몹시 피곤했다. 승희는 차를 타자마자 두어 시간 정도 잠을 청한 뒤 일어나 피곤이 덜 풀린 눈을 비비면서 봉투 속의 종이 뭉치들을 꺼냈다.
차 안에서 글을 읽으면 멀미가 나는 승희다. 옆자리에는 아주 머니가 아기를 안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승희는 입을 헤벌리고 자는 아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심심해졌다. 자고 일어 나니 멀미가 날 것 같지도 않고 궁금하기도 해서 승희는 무심코 서류를 꺼냈다.
일본어로 적힌 원본을 복사한 것과 연희가 번역한 것 두 가지 중 원본을 복사한 사본은 접어서 봉투 안에 넣고 연희가 번역해 준 자료를 읽었다.
처음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처음에 꺼낸 서류는 총독부 관할 화순군의 주재로 운주사가 자리 잡은 천불산 자락의 나지막한 동산에 신사를 세웠다는 기록과 공사 계약서 따위였다. 그 내용 을 대충 보고 난 승희는 다음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 서류는 신 사를 관리하고 있던 승려들 중 한 명이 총독부에 보낸 보고서 비 슷한 편지였다. 승희가 광주의 문서 창고에 처박혀서 찾아낸 문 서와 흡사했다. 자신이 찾은 문서는 진언종 승려들에게 신사 관 리를 맡긴 임명장 비슷한 것이었는데 이 서류는 신사의 관리 실 태를 편지 형식의 보고서로 올린 것이었다.
조선의 지세는 동쪽이 무겁고 서쪽이 가벼운 행주형국의 지세 라고 신라 때 풍수가인 도선국사가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 지 세를 바로잡기 위하여 천불천탑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 은 우리 황국으로 조선의 운세가 흘러들어 올 것을 염려한 나머 지 도선국사가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실제의 연대 조사에 의하 면 천불천탑은 고려 초부터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천불천탑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바 없 으나 지세로 볼 때 대단한 진세의 형국이므로 이것을 제대로 억 누르지 않는다면 황국에 좋지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승희는 흥미가 더해 갔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을 테지만 이번에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이야기들 과 이 문서에 쓰인 내용이 마치 신기할 정도로 부합하자 점점 호 기심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그때도 이런 내용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군.’
전체의 진세는 천연의 산봉우리들을 탑과 같이 이용하 여 하단부에 약간 인공적인 덧붙임을 가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 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며, 풍수설에 따르면 운주사 부근은 강 화도 부근과 함께 조선의 지형에 대단히 중요한 곳이라고 합니 다. 강화도가 세상의 정기가 모여드는 중앙이라고 한다면 운주사는 중국에서부터 흘러서 태평양 쪽으로 흘러드는 기세를 바로잡아 주는 조종타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진세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에 타원형으로 된 이 지세에 두 개의 정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의 정점 에 탑과 반대의 부조물을 만들어 지세를 자연적으로 억누르게 한 다면 천불천탑의 진세는 쓸모없어질 것이며, 조선의 지세는 더욱 황국 쪽으로 기울어져서 황국의 국세는 한층 커질 것으로…….
한참을 읽다가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리 굴에 대한 현암 과 박 신부의 예측은 거의 정확했다. 아직 승희는 은기옹의 시신 이 발굴된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지만 승희는 장황하게 씌 어 있는 서류의 내용을 훑어보다가 눈에 확 들어오는 단어 하나 를 발견했다. ‘와불’이라는 단어였다.
・・・・・・ 또 하나의 중심에는 와불이 있습니다. 이 와불은 풍수에 의하면 곤륜산에서 시작되는 대륙의 정기를 모조리 받아들여서 흘러넘치는 정기를 조선의 땅으로 그대로 부여하는 역할을 해주 는 것이며, 또한 와불이 일어나면 칠성석의 수레를 타고 날아오 른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천불천탑을 만들었을 당시의 사람들도 그런 실정을 알고 있었던 듯 우리가 신사를 건립한 곳 지하에 와 불의 내력을 기록해 놓은 비석이 하나 있었는데, 그 비석의 내용은 전설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비석은 땅속 깊숙이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승희는 거기까지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 보고서가 사실이 라면 천불천탑의 유래를 소상히 기록한 비석이 와불과 다른 또 하나의 진세의 정점에 서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본인들 은 그것을 발견해 눈에 띄지 않도록 땅속 깊이 묻어 놓았다고 했 다. 그 묻어 놓은 곳은 어디였을까? 혹시 사리 굴…………….
틀림없어. 그 안을 더 조사해 보았어야 하는데.’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을 찾아내면 골치 아프게 추리할 것도 없이 모든 사실이 분명해질 것이다. 서둘러 신사의 발굴 현장으로 돌아가서 모두 철수하기 전에 비석을 찾 아야 한다. 승희는 조급했지만 차가 달리고 있는데 조급해해 봤 자 소용없다는 쪽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광주에 도착하는 대로 신사를 찾아가 신부님과 현암에게 알려 주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잠시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료를 접어서 봉투 안에 넣고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차 속 에서 자잘한 글씨를 봐서인지 멀미가 날 것 같았다.
준후와 현암 등이 인부들을 지휘해 진세를 살피고, 준비해 온 석재로 탑이나 불상에 해당되는 구조물들을 이곳저곳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동원된 많은 인부가 일행이 지적해 주는 장소에 다 얼기설기 구조물을 쌓고 있었다. 준후와 승현, 정 선생, 임악 거사 그리고 현암까지도 의견을 나누어 가면서 쌓은 돌들이 너 무 높다거나 혹은 낮다거나, 어느 쪽으로 이동을 시켜야 한다는 등등의 지시를 내리느라 경황이 없었다.
특히 준후는 커다란 종이에 진세를 기록해 나가면서 계속 살 피고 있었다.
박 신부와 무련은 운주사에 내려와 있었다. 박 신부는 운주사 의 대웅전 바깥에서 예불을 드리는 무련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 련이 여전히 착잡한 얼굴로 대웅전에서 걸어 나오다가 박 신부 를 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까?”
무련은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평정을 찾고는 고개를 끄덕였 다. 둘은 복구공사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는 운주사 부근의 현 장에서 벗어나 천불산의 맞은편 귀퉁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마디 일상적인 말을 나누다가 박 신부는 무련의 얼굴을 살 펴보았다. 무련의 얼굴에는 틀림없이 초조한 빛이 서려 있었다. 박신부는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신지요?”
무련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것을 보면 걱정스러운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박 신부가 다시 한번 물었다.
“무언가 다른 것을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 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련은 박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뭐라고 말을 하려다 얼 굴을 돌렸다. 박 신부가 미소를 지으면서 무련의 얼굴을 쳐다보 자, 무련은 한참 지나서야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을 꺼 냈다.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무슨 말씀이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이 당해 왔어요. 너무 많이요. 아마도 이 일은 옳을 거예요.”
“예? 무슨 말이지요?”
“와불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바로잡히겠지요. 그렇게 믿어 요”
무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박 신부에게 합장을 하고는 안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 무련의 뒷모습을 보는 박 신부의 가슴에 석연치 않은 느낌이 밀려왔으나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런 도중에 이곳저곳을 찾아 헤맨 듯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젊은 승려 하나가 저만치에 서 있는 박 신부의 모습을 발견하고 먼발 치에서 손을 흔들었다. 경내 부근에서 큰 소리를 치면 안 되기 때문에 저렇게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리라. 승려는 급한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전화?”
박신부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임시로 가설된 전화의 수화기를 드니 짜증을 내는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엇, 승희니?”
“신부님, 거기는 왜 또 가신 거예요. 이거 원 답답해서……………”
신사 발굴 현장엔 전화도 없고.”
“승희야, 왜 그러니?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니?”
“서울에 갔다 왔단 말이에요. 연희 언니가 찾아낸 자료가 있는데 무척 중요한 것 같아요.”
“중요한 자료? 어떤 내용인데?”
“전에 우리가 발굴하고 있었던 신사 밑의 암굴 말이에요. 그밑에 뭔가가 있을 것 같아요.”
“암굴 밑에 뭔가가 있다고?”
“예. 천불천탑의 비밀이 적힌 비석이요.”
“비석? 그런 것이 암굴 밑에 숨겨져 있었단 말이냐?”
“전화로 길게는 말씀드릴 수 없고요. 제가 인부들에게 암굴 밑을 파헤치라고 했는데 인부들은 제 말을 듣지를 않아요. 신부님 이 오셔서 비석을 찾아봐 주세요.”
박신부는 생각에 잠겼다.
‘천불천탑의 비밀이 적혀 있는 비석이라.’
이곳에 남아 있어 보아야 자신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이고 그럴 바에야 승희와 함께 그곳에서 비석을 찾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알았다. 내가 곧 가마.”
“빨리 오셔야 해요.”
승희는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듯이 서두르라는 말 한마디 를 남기고는 찰칵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 신부는 천불천탑의 복구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사 밑에 있다는 비석을 찾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가면서 생각을 해 보니 정 선생이나 임악 거사에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괜히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다. 지금 무련 의 태도를 보아서는 숨기는 것도 있었고……………. 그들은 꿍꿍이를 품고 있는 듯했다.
박 신부는 공사 현장에 도착해 현암을 불러서 나직하게 승희 에게 연락이 왔었다는 내용을 알려 주었다.
“현암군, 이곳의 일을 돕고 있게나. 그곳의 일은 내가 알아서 찾아보도록 할 테니.”
“예, 신부님. 그러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정 선생과 임악 거사 의 눈치가 수상합니다. 준후가 하자는 대로 진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진세를 보강하고 있어요. 뭐라고 말하면 풍수학이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도방의 지식이라고 이야기를 하 긴 하지만, 진세를 이상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수상해요.”
“자네가 눈을 떼지 말고 있게. 아무래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낸 것 외에 더 큰 비밀이 있는 것 같아. 우리가 이렇게 대번에 알 아낼 수 있는 정도의 비밀이었다면 벌써 누가 천불천탑을 복구 했거나 와불을 세웠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와불에 옛날에 한 번 세우려다 만 흔적이 있다고 했지?”
“예, 아직도 남아 있지요. 누가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 지만요. 와불은 주변의 모든 진세가 완료된 다음 마지막으로 세 우는 것이 좋답니다. 진세를 갖춘 후에 최후의 작업으로 와불을 일으키게 될 겁니다.”
“음. 그래.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을 테니 나도 비석을 찾는 데 최대한 노력을 하겠네. 아무래도 뭔가 석연치 않아.” “예,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현암도 눈빛을 빛냈지만 맥 풀린 목소리로 박 신부에게 말했 다.
“그러나 좋은 일이라고 하는데 일을 늦추게 하거나 기다리라 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네가 여기에 남아 주의를 기울여 주게. 그동안 나는 암굴로 가서 비석을 찾아내겠네. 그 비석엔 뭔가 있을 법도 한 데. 아무튼 자주 연락하도록 하세.”
“예.”
현암은 씨익 웃으면서 세크메트의 눈 한쪽을 박 신부에게로 건네주었다. 박 신부는 또 ‘직업의식’이 발동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가지고 가라는건가?”
“승희에게 전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구태여 신부님이 직접 이용하시지 않더라도요. 나머지 한쪽은 준후한테서 받아 놓았으 니 승희와 제가 연락을 취하도록 하죠.”
박 신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을 꺼내어 세크메 트의 눈을 싸 마치 보기 흉한 것이라도 되는 것인 양 주머니 안 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현암에게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고는 몸 을 돌려서 내려갔다. 현암은 박 신부의 뒷모습을 보다가 천불산 의 야트막한 구릉 위에 있는 와불을 무심한 눈길로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