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6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9 : 이자나미의 사제

랜덤 이미지

퇴마록 혼세편 2권 6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9 : 이자나미의 사제


이자나미의 사제

‘일단 두 발로는 위협사격을 하자.’

권총이라면 군의관 시절에 취미 삼아 많이 쏘아 보았기 때문 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조준을 잘못해서 사람을 맞 히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박 신부는 조심스럽게 인기척이 들리 는 방을 확인하고 방문을 왈칵 발로 차면서 총을 겨누었다. 역시 예상대로 그곳에는 두 명의 경호원과 오키에, 그리고 얼굴에 복 면 같은 것을 씌워 놓은 두 사람이 있었다. 박 신부는 그들이 스 즈키와 사이토라고 짐작했다. 경호원이 주춤하면서 손을 품에 가져가는 순간 박 신부는 침착하게 총알 한 방씩을 두 경호원의 발바로 앞에 쏘았다. 소음기가 달려서 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두 경호원은 발 앞에 총알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아연해서 천천 히 두 손을 들었다. 박 신부는 고갯짓으로 경호원 한 명에게 무 기를 버리라고 했고 그자가 권총을 버리자 다른 자에게도 똑같은 신호를 보냈다.

그렇게 하면서도 박 신부는 사실 그들보다도 오키에 쪽을 유 심히 지켜보았는데 오키에는 놀란 듯 보이더니 갑자기 이상하게 도 표정이 밝아졌다. 두 사람이 무기를 버리자 박 신부는 두 사 람을 엎드리게 하고 구석에 얼굴을 돌리고 있게 했다.

“신부님! 누구세요? 와! 저를 구하러 와주셨군요!”

난데없이 오키에가 한국말로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박 신부 는 섬뜩했다. 오키에는 아까 아라라는 아이의 모습과 똑같이 변 했고 목소리마저도 바꾸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 있는 애가 정말 아라라고 한다면 묶여 있지 않을 턱이 없었다. 박 신부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술수를 부려도 소용없어, 오키에, 네가 아까 모습을 바꾼 것 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말투와 목소리까지도 똑같이 흉내 낸 다는 것까지도.”

“아니에요! 신부님!”

“그리고 또 있지. 아까 아라는 많이 울었다. 그런데 지금 네 얼 굴에는 부은 기색이 없어. 진짜 아라는 기절해 있는 내 모습만 보았을 뿐,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단 말야.”

그러면서 박 신부는 일단 경호원들이 떨어뜨린 권총을 줍기 위 해 서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오키에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냐! 난 아니란 말야! 으아앙! 난 일본말도 몰라요. 이 사람들이 방금 풀어 주고 억지로 나를 씻기고 그랬단 말예요. 으앙! 왜 날 안 믿어 주는 거야. 으아앙! 내가 아라야! 내가 아라란 말야!”

박신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레 바닥에 놓여 있는 권 총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오키에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눈물을 닦고 있는 팔에 긁히고 부은 자국이 선명하게 보였다. 분 명 무언가에 묶인 자국 같았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반가운 김에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을 구분하여 말을 했을까? 자꾸 마음속으로 그런 의문들이 떠오르면서 오키에가 가엾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정말 오키에라면 저항을 하거나 술수를 부리거나 흥정을 하 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러 팔에 긁힌 자국을 만들었을 리 는 없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저 아이가 아라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런 의심도 들었다.

‘오키에는 분명 나를 인질로 삼아 현암과 준후도 잡으려고 했 다. 그리고 아라의 모습으로 변장한 것은 그들을 속이기 위해서였 을 것이고. 그렇다면 미리 위장을 해 두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박 신부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점점 눈앞에 보이는 오키에의 모습이 측은하고 꾸밈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어린것이 난데없이 납치를 당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악몽 같은 모습을 코앞에서 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오키에, 아니 아라는 거의 숨이 막힐 듯이 흑흑거리며 흐느끼 다가 돌연 헉하면서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풀썩 쓰러져 버렸다. 박신부는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놀란 나머지 반사적으로 쓰러 지는 아라를 부축했다. 아라는 헉헉거리며 몸을 조금씩 떨고 있 었다. 경기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박 신부는 완 전히 마음을 놓았다.

‘내가 너무 의심을 했나 보다. 오키에였다면 지금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았겠지.’

박신부는 아라를 다독거려 준 다음 몸을 일으켜 구석에 머리 를 박고 있는 경호원들을 처리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박 신부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아라가 눈을 번쩍 떴다. 그 눈 에는 조금도 아픈 기색이 없었다.

“이・・・・・・ 이런!”

박신부는 너무도 놀라서 엉겁결에 품 안에 있는 오키에를 와 락 밀쳐 내 버렸다. 그러나 오키에는 밀려나면서도 잔인하게 박 신부의 어깨 상처를 손끝으로 콱 움켜잡았고 박 신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길게 비명을 질렀다. 오키에는 몸을 고양이처럼 재 빠르게 한 바퀴 굴려서 권총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오키에의 손톱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길게 늘어나 있었다. 손톱에는 박 신부 의 어깨 부분 옷자락과 붕대, 그리고 뜯긴 살점까지도 묻어 있어서 섬뜩했다.

박 신부는 오키에가 권총을 집어 드는 것을 보았지만 극심한 고통 때문에 어떻게 손을 쓸 수조차 없었다. 오키에는 금방까지 의 슬픈 얼굴은 어디로 갔는지 잔인한 미소를 띠면서 박 신부를 당장이라도 쏠 듯 총을 겨누다가, 씨익 웃으며 다가와 총을 거꾸 로 쥐고 다시 한번 박 신부의 상처를 후려갈겼다. 박 신부는 고 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젖히면서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그러 나오키에는 다리 상처까지 발로 한 번 더 걷어차고 나서야 권총 을 빼앗고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바보 같은 신부. 쓸데없는 자비심을 가지고 방심하면 이런 꼴 이 되는 거다. 들어오자마자 나부터 쏴 버렸어야 하는 건데. 너 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어. 너를 감시하는 것을 조금 소홀히 한 것 같군.”

박 신부는 고통이 심해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오키에는 계속 깔깔거리면서 그런 박 신부를 걷어찼다.

“너 정도를 상대하지 못해서 연기를 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제대로 변장을 했는가를 알아보려고 그런 것인데, 역시 잘되었 나보구나. 깔깔깔. 너도 별수 없어. 내가 바라는 대로 생각할 수 밖에 없지. 남자들은 다 그런 거니까. 나는 이자나미의 사도이며 계승자인 묘렌이다. 여성에 대해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자들 은 누구라도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호호호.”

박 신부는 고통 속에서도 치를 떨었다. 그렇다면 방금 오키에 를 아라라고 여기고 자꾸 가련하게 생각했던 것도 오키에의 술 수에 의한 것이었단 말인가?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왜 스즈키 나 사이토의 두건을 벗겨서 먼저 진위를 알아보지 않았는가 후 회가 되었다. 아니, 그것도 오키에의 술수 때문이었다면……………… 

“그나저나 마취가 된 줄 알고 있었는데 멀쩡하군그래. 불을 낸 다음 쳐들어올 줄도 알고, 용기도 있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가. 그러나 혼자서 마취를 풀고 줄을 끊고 오지는 못했을 텐데. 이유 가 있겠지? 호호호.”

그러더니 오키에는 두 명의 경호원에게 소리를 쳤다. 야마모 토를 데리고 오라는 말 같았다. 묘렌의 머리 회전은 무섭도록 빨 랐다. 그리고 잔인함이나 교활함도…………. 야마모토를 데려오라 고 한 후 오키에는 웃으면서 박 신부에게 말했다.

“내가 왜 이렇게 공들여서 연극을 하는지 궁금하겠지? 아직 그것도 생각해 보지 않았나? 바보 같군그래. 호호호. 내 지금부 터 자세히 얘기해 주지. 너희 중에 나에게 필요한 녀석이 한 명 있다. 그래서 그렇지. 호호호.”

박 신부는 고통에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으나 오키에의 말을 듣고는 눈에서 불이 날 것 같았다. 박 신부는 간신히 입을 열었 다.

“그, 그게 도대체 무슨…………….”

“나는 처음부터 너희가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찮은 일 이 생기기 전에 해치워 버리려고 했었지. 그래서 너희가 가는 근 처를 어슬렁거리면서 배회했었다. 그런데 너희 중 쓸 만한 녀석 이 하나가 있었단 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는…………….”

“그, 그건…”

“때마침 나와 아주 흡사한 모습을 지닌 한국 여자아이 하나도 그때 보았지. 꽤 잠재력도 있는 아이였어. 그래서 일이 더 잘 풀 릴 것 같다고 보고 너희를 해치우려던 생각을 바꿔 계획을 꾸미 게 됐지.”

박신부는 고개를 들려고 했으나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런 박신부를 보고 오키에, 아니 묘렌이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짚어 알고 있었거든. 너희 중에 남 의 마음을 읽는 재주를 가진 여자가 하나 있더군. 그러나 나도 비슷한 능력이 있지.”

박 신부는 아 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승희와 같은 투시력을 묘렌이 가지고 있다면, 만사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묘렌은 승리 감에 도취된 듯 계속 말했다.

“너희 중에 미련한 남자 놈 하나가 있지? 그놈의 마음속은 내 가 훤히 알고 있었지. 최근엔 고약한 재주를 부려 잘 알 수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내 손을 벗어나지는 못해. 그들은 지금 명왕교 교단을 발견하고 다 쳐부순 모양이다. 꽤 힘이 있기는 하더군. 저항도 했고. 여자아이를 거기서 없앴어야 했는데 그건 실패했 으니…………. 그 여자애가 있으면 귀찮아지거든. 좌우간 예정대로 된 것 같아. 하긴, 벗어날 수는 없었겠지만.”

묘렌은 흥얼거리듯 말하고 있었으나 박 신부는 한없이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속에서였을 뿐, 이제 몸은 정말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의식이 점점 사라져 가기 시작 했다.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들은 내가 너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눈에 불을 켜고 이리로 달려오겠지. 그러고는 호호호, 모두 죽는다. 빠져나 갈 방법은 없을 거야. 한 명만 남게 되지. 내가 필요로 하는 단 한 명만 그 애가 오키에를 없애 버린다. 물론 내가 아니야. 한국 계 집아이가 대신 죽어 주겠지. 그 뒤에 시체가 된 너를 발견할 것 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라 대신 나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는 거 야. 그리고 내가 바라는 일을 해 줄 것이다. 그 애는 그러고 나서 죽어야 해. 호호호. 너 같은 바보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겠지?” 

박 신부는 최후의 힘을 짜내어서 입을 열었다.

“도, 도대체 그 일은…… 무슨…….”

“궁금하냐? 호호호. 너희 중에 한 녀석은 지금은 아무도 모르 는 기술 한 가지를 가지고 있지. 조선의 옛 글자를 알고 있단 말 야. 난 오래전에 너희 나라 말로 된 이상한 책 한 권을 손에 넣었지. 그 책에는 미래가 씌어 있어. 절대적인 힘의 예고에 대해 서 말이야. 난 그 힘을 가지고 싶고, 내가 그 힘을 가질 수 있는 지 확인해 보고 싶어.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대강이나마 풀어 낼 수 있었던 내용은 그것뿐이었지. 그 책의 서문만 한문으로 되 어 있어서 해독할 수 있었거든. 너도 알고 있나? 해동감결이라는…”

박신부는 놀라서 잠시 동안 고통마저도 잊은 채 망연한 얼굴 이 되었다. 「해동감결이라면 자신이 준후를 해동밀교에서 구해 올 때 들었던 예언서가 아닌가! 그것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니, 더군다나 그것이 오키에의 손에 들어 있다니! 오키에가 노리는 것은 준후였다.

그때 두 사람의 경호원이 야마모토를 끌고 돌아왔다. 박 신부 는 간신히 눈을 돌려 야마모토의 얼굴을 보았으나 야마모토의 얼굴에서 다카다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겁을 먹은 듯 뭐라고 소리쳐 댔으나 오키에는 흥얼거리면서 야마모토 의 말은 듣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난 그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내 부하한테 주었고, 너희 일행은 그걸 애써서 얻었으니 시간만 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풀 어 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옆에 있을 테니 다 알아낼 수 있겠 지. 그 녀석을 위협해서는 결코 내가 바라는 일을 제대로 해 줄 것 같지 않거든. 그래서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수고로운 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알았니?”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오키에는 야마모토를 향하여 들고 있던 권총을 겨누고 쏘았다. 두 방을 쏘고 총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 리자 오키에는 권총을 휙 던졌다. 야마모토는 푹 쓰러져 버렸다. 박 신부는 치를 떨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저놈은 너에게 기대를 건 모양인데 내 말을 안 들으면 저렇게 되는 거야. 할 수 없지 않니? 여러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힘들어.” 

박 신부의 최후의 힘을 모으고 있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 다. 정신만 차리고 있다면,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 승희가 자신을 반드시 투시해 볼 것이다. 그때 자신이 들은 모든 것을 승희가 투시해 주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마라. 네 마음속을 그 여자애가 읽으 리라고는 기대하지 마라. 저런저런, 내가 방금 마음속을 읽는 정 도는 나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니? 내 앞에서 그렇게 노골 적으로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해. 미안해지잖아? 호호호. 지금 그 들은 몰라. 그 여자애는 아직 투시를 안 하고 있어. 그러니 시간 은 충분하지. 자, 이제 슬슬 막을 준비해야겠지?”

그러더니 오키에는 박 신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잘 자. 넌 지금 죽으면 안 돼. 그러면 너희 일행이 이리 안 올 지도 모르거든. 숨은 조금 더 쉬고 있어야겠지만, 아마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거야. 그럼, 안녕.”

박 신부는 머리에 둔탁한 통증을 느끼면서 아득한 낭떠러지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기분에 휩싸였다.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현암 일행은 지친 몸을 이끌고 호텔 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연희는 경찰에 전화를 걸어 명왕교 본부 인 배로 경찰들을 불러 모두 처리하게 하고는 자신들은 쏙 빠져 나가는 데 성공했다. 연희도 이제 이런 문제에 능수능란해진 것 같았다. 이제 명왕교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들의 에너지원 인 희생물로 잡힌 여인들도 풀려났으니 환영 따위를 마구잡이로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행의 마음은 그리 유쾌하지 못 했다.

지난번 승희가 후지코를 투시했을 때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 만, 지금 후지코는 일종의 쇼크 상태에 빠져 있으니 그다지 걱정 할 것 없다고 승희는 말했다. 도운도 병원에 입원시키고 일본 밀 교쪽에 연락을 취했으니 별일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현암과 승희는 돌아오는 길에 오랫동안 명왕교의 교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속을 투시하고 저격을 시키고 한 것은 교주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한 것이 분명했다. 현암의 마음속이 일일이 읽혔던 것도 그랬다.

승희가 말했다.

“이제 교주도 현암 군 마음은 읽지 못하겠지? 준후의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병원에 가야 했지만 현암은 낯선 병원에서 또 이상한 체질의 환자가 왔네 어쩌네 하 고 난리를 떠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치료를 거절했다. 자신의 상처는 그리 크지 않으니 좀 쉬면 곧 공력이 회복될 거라고 말했 지만, 승희의 눈에는 그런 현암이 왠지 모르게 슬프고 가련하게 만보였다.

‘만날 목숨이 달랑달랑하고 성한 몸일 때가 거의 없고…………… 그런데도 이렇게 지겨운 생활을 싫은 기색 한번 없이 용케도 참 고 버티는구나. 나도 저럴 수 있을까? 혼자였다면 현암 군처럼 저런 식으로 계속 버텨 나갈 수 있을까?’

현암이 입을 열었다.

“명왕교에는 팔대 명왕이 있다고 해. 그중 네 명은 이미 무력 화되었지. 귀자모신, 애염, 대위덕, 부동. 그들 중에서는 귀자모 신이 최강이었다고 하니 나머지 남은 네 명은 대위덕과 비슷한 수준일 거야. 그러면 큰 문제는 없지. 문제는 교주야.”

“지금쯤 교주는 자기의 교단이 쑥밭이 된 것을 알고 있을까?”

“훨씬 빨리 알았을걸?”

“어떻게? 그 여자는 더 이상 우리 마음속을 읽을 수 없잖아.”

“마음은 못 읽어도 부하들 마음속을 읽는 것은 간단하겠지. 아마 지금쯤 다 알고 무슨 대책을 세워 놨을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교주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분 명해. 아까 저격이 실패한 것도, 본부가 쑥밭이 된 것도 분명 알 고 있을 텐데 교주는 아무런 지원도 없었고 힘도 보태 주지 않았 어. 그렇다고 놀고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교주는 이미 명왕교의 교단은 포기하고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 같아.”

“그러면 우린 뭘 해야 하지?”

“일단은 좀 쉬자. 돌아가서 신부님과 의논을 해 보고 난 돌아 가면 확인할 일이 하나 있어.”

“뭔데?”

“글쎄, 설마 그럴 리야싶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 “

현암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눈을 감아 버렸다. 승희는 그런 현암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내버려 두었다. 앞자리에 앉은 준후는 매우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차를 운전하고 있던 연희가 물었다.

“준후야, 너 왜 그래?”

“아라는 결국 못 찾았잖아요.”

“아라는 그곳에 있지 않고 교주가 직접 잡아 간 모양이지. 너무 염려하지 마.”

“네.”

대답이야 그렇게 했지만 준후는 속으로 무척 걱정이 되는지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풀죽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연희는 눈을 돌려 운전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겨우 한두 번 본 것 가지고 왜 저렇게까지 마음을 쓸까?’

어느덧 일행이 탄 차는 호텔에 도착했다. 코를 골고 있던 현암 은 차가 도착하자마자 눈을 번쩍 뜨더니 부리나케 호텔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현암이 의아한 듯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사람들이 모두 호텔 방에 올라왔을 때, 현 암은 전에 사이토에게서 받은 서류 뭉치를 사방에 꺼내어 놓고 는 그중 사진 한 장을 들고서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현암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승희가 이상해서 현암에게 물었다.

“현암군, 대체 왜…”

“이 사진 봐.”

현암은 입술을 깨문 채 승희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나이 든 남자와 꼬마 아이가 찍힌 사진이었다.

“어? 이건!”

승희도 덩달아 놀라자 연희와 준후도 매달리다시피 해서 그 사진을 쳐다보았다. 준후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이건 아라잖아요!”

승희가 보기에도 그 아이는 분명 아라로 보였다. 그러나 연희 는 중얼거리듯이 사진 아래에 적힌 글귀를 읽어 주었다.

“아라. 내가 보기에도 아라 같아. 그러나 사진 밑에는 이렇게 씌어 있어. 스즈키의 가족 상황. 요시모토 스즈키, 65세. 요시모 토 오키에, 9세.”

자세히 보니 호텔 로비에서 보았던 아라의 모습과는 약간 다 른 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보는 사람으로서는 거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희한하게 닮아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네. 그러면, 그때 로비에서 보았던 애가 혹시 스즈키 씨의 딸 오키에가 아니었을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한국에서부터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왔으니까.”

연희가 중얼거리자, 승희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내가 슬쩍 그 애의 마음을 읽어 보았는데 스즈키의 딸은 아니었어. 모 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딸이던걸. 그리고 일본 에는 아버지를 따라온 것뿐이고………….”

연희가 다시 말했다.

“준후와 난 최 교수도 만나보았어. 그 아이는 아라가 분명해.”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현암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귀자모신이 명왕교 교주의 이름이 누구라고 말했었지요? 연희씨?”

연희가 헉하고 짧은 신음 소리를 냈다. 승희와 준후도 순간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버렸다. 준후가 곧 소리를 질렀다.

“아니에요! 그럼, 아라가 명왕교의 교주란 말이에요?”

“아라가 아니야, 오키에지. 아, 세상에.”

승희도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이게 뭐야! 우리를 이곳에 오게 한 사람은 스즈키잖아! 그런데 그 딸이 ・・・・・・ 말도 안 돼! 이런 꼬마가 어떻게 그런 흉악 한 짓을………….”

“오키에는 묘렌 교주의 환생이라고 귀자모신이 말했어. 정말 환생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빙의 상태일 가능성이 많아. 빙의 상태에서 악령이 몸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지.”

“그럼, 아라는?”

“모르겠어. 나도 잘 모르겠어!”

현암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듯 물었다.

“신부님은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어? 맙소사! 신부님은………….. “

연희가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스즈키 씨를 만나러 가셨잖아요.”

승희의 얼굴은 아예 파랗게 질려 버렸다. 승희가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가 휘청하더니 눈을 떴다.

“신부님이…………….”

현암은 딱딱하고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현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해 승희야.”

승희는 처음에는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점점 목소리를 높여 갔다.

“의식이 없으셔. 아냐, 아냐, 주무시고 계신 걸 거야. 그렇지? 신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리가 없어.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 데, 그렇지 않아. 응?”

승희가 마지막에는 거의 대들듯이 현암의 멱살까지 잡으면서 소리를 쳤다. 그러나 현암은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돌아가신 것은・・・・・・ 아니겠지?”

승희는 현암이 묻는 말에 흐흑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금 몹시 중태…………. 의식이 거의 없으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흐흐흑.”

현암이 급하게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씨, 아까 서로 연락하기로 한 사이토 씨의 휴대 전화 번호가 있지요?”

연희는 곧 현암의 말을 알아듣고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승 희는 계속 울고 있었고 준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 현암은 침대 옆으로 가서 뭔가 길쭉한 물건을 하나 들고 왔다.

“울지 마. 승희야,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희망이 있어. 마음 단 단히 먹고, 자, 준비하자.”

현암이 천으로 둘둘 말았던 것을 허공에 와락 떨치자 눈부신 광채가 뻗어 나면서 저르릉 하고 사방이 울렸다. 무련에게서 받 은 청홍검이었다. 현암은 눈을 가늘게 떠 청홍검의 검신을 훑어 보고는 승희에게 말했다.

“승희야, 울지 마.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그럴 틈이 없어.” 

“신부님이 어떻게…………….”

현암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부르르 떨었으나 표정은 변하지 않 은 채 청홍검을 보고 있었다. 현암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신부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 

준후는 애써 침착을 찾으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고 승희도 두어 번 더 어깨를 들먹거리더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승희의 눈 빛이 무섭게 빛났다. 그때 연희가 일행을 향해 쉿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해 달라는 손짓을 보냈다. 계속 신호만 가고 받지 않던 휴대 전화를 누군가가 받았기 때문이었다. 연희가 다급하게 외 쳤다.

“사이토 씨? 신부, 신부님은요?”

“신부는 내가 손 한 번만 놀리면 세상에서 사라진다.”

“너, 너는 오키에! 그렇지?”

준후가 앙칼진소리를 질렀다.

“신부님을 건드리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호호호. 구하고 싶다면 와 봐라.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말이야.”

현암이 수화기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사자후의 공력을 섞어서 무시무시한 크기로 고함을 질렀다.

“곧 간다! 만일 신부님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죽을 줄 알앗!” 

현암이 마지막으로 소리를 치는 순간, 휴대 전화의 상태가 이 상해졌는지 고의로 그런 것인지 통화가 끊어져 버렸다. 현암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수화기를 잡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 자 수화기는 와작 하고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현암은 한숨 을 내쉬고는 청홍검을 그대로 등에 둘러메고 바닥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현암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스즈키 별장의 약도가 있어. 가자.”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넷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 이 복도로 나갔다. 호텔 밖을 나서니 현암이 메고 있는 눈부신 장검을 보고 기겁을 해서 물러서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네 사람 은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넷은 방금 타고 왔던 차 에 올라타고는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오키에, 아니 묘렌이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스즈키의 별장을 향하여.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