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7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10 :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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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2권 7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10 : 돌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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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시작이로군. 녀석들이 무슨 덫을 파 놓았을지 모르니까 주위를 잘 살펴 주렴, 승희야.”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현암이 차에서 내리면서 한 말이었다. 기 세 좋게 별장의 부근까지 오기는 했지만 외길로 변하면서부터 통나무와 빈 상자들로 꽉 막혀 있어 차가 지나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가야 했는데, 주위도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저들도 퇴마사들이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모두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음을 읽히는 것을 막기 위해 준후는 연희와 현암에게 새로 부적을 만들어 주었다. 그 바람에 승희도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세크메트의 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 아까처럼 총질을 해 댈지도 모르니 눈에 띄게 불을 켤 수도 없었 다. 이래저래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저항이 없었다. 선두에 서서 가던 현암이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우리를 별장 안까지 들어오게 하려는 속셈인가?” 

준후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무슨 뜻이에요? 현암 형?”

“나 같으면 말이다. 이럴 때 화약이나 하다못해 기름통이라도 사방에 늘어놓고 그냥 우리가 오자마자 쾅 하고 날려 버렸을 것 같아. 그런데도 교주는 그런 방법은 쓰지 않는군. 게임을 하자는 걸까, 아니면 다른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일까?”

현암의 말을 듣자 모두들 등골이 쭈뼛했지만 그 말이 맞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현암의 말대로 하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확실 하며 빠른 방법일지도 몰랐다. 정말 왜 그러지 않은 것일까? 아 무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무 기척도 없으니 더 찜찜하군. 내가 먼저 돌아보고 올게.” 

현암이 앞으로 정찰을 나가려고 했으나 승희가 잡았다.

“같이 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죽긴 왜 죽어. 난 불사신이니 염려 마라. 최소한 신부님을 구 하기 전까지는 말야.”

현암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엄숙했지만 날이 어두워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승희는 계속 매달렸다.

“떨어져 있으면 더 난처해질지도 몰라. 한데 모여서 가자구.” 

승희가 고집을 부리자 현암은 일행과 같이 움직이기로 했 다. 준후도 언제든지 주술을 쓸 수 있도록 눈을 크게 뜨고 주문 을 외우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벽조선을 들고 있었다. 현암도 월향검과 청홍검을 양손에 쥐었다. 현암은 공력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예기치 않게 저들이 공격해 온다면 승희나 연희까지 지켜 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신부가 있었다 면 기도력으로 웬만한 것들을 물리치며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저만치 불빛이 보였고 불빛 주위로 안 개가 서서히 몰려들고 있었다. 준후가 중얼거렸다.

“주술력이 느껴져요.”

승희도 준후의 말을 바로 받아 일행에게 안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놈들이 있어. 앞에 네 명. 생각보다는 수가 적은데, 어, 그게 아니네?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 우리가 오는 것을 알고서 모여드는 것 같아.”

현암은 알았다는 듯 고개만 끄덕하고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 다. 주위의 안개가 점점 짙어져 긴장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 다가 급기야는 안개 때문에 사방이 보이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 르렀다. 현암과 준후가 덜컥 멈춰 섰다.

“어?”

승희는 계속 주변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에만 신경을 쓰다가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함께 걸음을 멈추었다. 연희와 승희가 의아해하자 준후가 말했다.

“아까 배에서 본 것과 똑같은 진법이에요. 그런데 훨씬 더 강해요.” 

승희가 짜증난다는 듯 중얼댔다.

“아까와 똑같은 진법이라면 우리는 또 못 들어간다는 소리야?” 

현암이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승희가 모처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까지 했는데 같이 못 간대서야 말이 되나? 자, 내가 앞장설게.”

“어? 현암 형!”

“현암군! 아까는 그 때문에 하마터면 …………….”

그러나 현암은 준후와 승희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뒤를 돌아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준후야, 너 여기서 저 진을 부술 수 있겠니?”

“아뇨. 안으로 더 들어가야………….”

“이 진은 자신이 생각하는 약점을 찌르는 진법인 것 같아. 준후, 너는 들어가서는 안 돼.”

“네? 왜요?”

“넌 누군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잖니? 하하하.”

현암은 멋쩍은 듯이 웃다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승희나 연희 씨는 들어갈 수 없을 거고. 따로 생각해 둔게 있어. 그러니 염려 마라.”

그 말만 남겨 두고 현암은 휙 하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진 안 으로 뛰어 들어갔다. 준후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했으나 승희가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라. 비록 미련퉁이지만 꿍꿍이가 있겠지. 믿어보자구.”

승희가 준후를 잡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현암의 말을 듣고 승 희도 눈치를 챈 것이다. 사실 아까부터 준후가 아라의 걱정을 이 상할 정도로 많이 하는 것이 염려스러웠다. 승희는 차마 겉으로 는 말하지 못했지만, 준후의 그런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 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뛰어든 현암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은 채 걸음 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서 자신의 앞 에 무언가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을 느끼고는 걸음을 멈춘 다음 눈을 떴다. 앞에는 장막처럼 짙은 안개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앞을 막고 선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나이 어린 소녀였다. 

“가짜 환영! 나타났군.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야.”

환영은 몸부림치면서 애원하듯 소리를 쳤으나 현암은 무시해 버렸다. 이번에는 무언가가 현암의 왼쪽 어깨를 잡았다. 천천히 돌아보니 그곳에는 소복을 입은 여인이 눈이 시릴 정도로 싸늘 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고, 현암의 앞에는 현아의 모습을 한 망 령들이 삽시간에 수십, 수백 명으로 나뉘어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현암의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가 물에 젖은 머리카락 에 흠뻑 젖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현암의 양쪽 옆으로는 원통한 듯한 귀곡성을 내면서 수십 개의 월향이 날아다니고 있 었다. 현암은 눈을 꼭 감았다가 서서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주먹 쥔 현암의 오른손에서는 조금씩 선혈이 흘러내렸다. 현 암은 월향검을 날째로 꼭 쥐고 이곳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월향 이 진의 기운 때문에 또 충격을 입지 않도록 자신의 피를 먹이 고, 자신도 통증을 느낌으로써 정신을 잃고 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여기에, 바로 내 옆에 있다. 눈 으로 나를 홀리려 하지 마라, 이 더러운 허깨비들아!”

현암은 중얼거리다가 일갈성을 지르고는 월향검을 회전시키 듯이 던졌다. 월향검은 현암의 목소리에 답하듯 길게 귀곡성을 내면서 검기를 머금고 허공을 돌아 환영들의 한가운데로 쏘아져 나갔다. 환영들이 허공에서 마구 베어지고 허물어지면서 고함을 질렀다. 현암은 다시 한번 길게 소리를 지른 다음 청홍검을 자신 의 앞에 푹 꽂고는 청홍검 손잡이에 양 손바닥을 붙인 채 몸을 움츠렸다. 부동심결의 환한 빛이 어둠을 대낮처럼 물들이면서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부동심결!”

위에서 환한 빛이 퍼져 나오자 눈을 감고 있던 준후가 소리쳤 다. 빛이 사그라지는 동시에 준후는 주문을 외우며 크게 기합을 지른 다음 왼손을 떨쳐 냈다. 그러자 한두 마리도 아닌 자그마치 다섯 마리의 리매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면서 포효하기 시작 했다.

“어서들 가라! 어서 현암 형을!”

준후는 소리치고는 리매들의 뒤를 따라 달렸다. 승희와 연희 도 달리기 시작했다. 승희는 달리면서도 정신을 집중하여 현암 에게로 힘을 퍼부어 주고 있었다. 현암은 부동심결을 발하면서 도승희에게서 전혀 힘을 빌려 가지 않았지만, 승희는 그런 행동 이 더 야속했다.

‘이제 나는 도움이 안 되나 보지? 나 없어도 된다고 자랑이라 도 하는거냐? 어디 두고 봐라. 나 없어도 되나.’

승희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있는 힘껏 힘을 밀어 보냈다. 자신이 여기서 쭈그렁 할머니가 되는 한이 있어도 있는 대로 힘 을 보내주고 싶었다. 왠지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여 왔다.

언덕 위의 별장에서 네 대의 승용차가 미친 듯 아래로 내려오 고 있었다. 안개가 걷히자 명왕교도들이 현암 일행을 저지하기 위해 달려오는 것이었다. 부동심결의 광채가 가시자 주변의 안 개도 덧없이 사라져 갔다. 현암은 부동심결을 발한 후라 잠시 정 신을 잃고 앞에 박은 청홍검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월향검은 그 런 현암의 머리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두 대의 차가 현암을 그대로 깔아뭉개려는 듯 덮쳐들었다. 그 러나 준후가 보낸 리매들이 우르르 달려와 현암의 앞을 막고는 차에 달라붙었다. 두 대의 차에 각각 두 마리씩 네 마리의 리매 들이 차를 밀어내자 차는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뒷바 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공회전을 할 뿐이었다. 잠시 후 차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모두 일본도 비슷한 무 기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리매를 향해 총을 쏘았 다. 리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리매 하나가 괴성을 지르 면서 덤벼들자 그자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뒤에 오던 차는 앞의 상황을 보고 조금 먼 거리에 멈추어 섰 다. 문이 열리고 네 명의 사람들이 내렸다. 앞차에 탔던 명왕교 도들은 흰 노의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뒤의 네 명은 붉은 명왕 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제야 헐떡거리며 올라온 준후가 현암 의 앞을 막아서면서 벽조선을 꺼내 들었다. 승희는 가부좌를 틀 고 앉아 현암의 등에다 양손을 짚었고, 연희도 준후의 옆에 버티 고 섰다.

앞차의 명왕교도들은 리매에 밀려 땅바닥에 동댕이쳐지거나 뒤로 도망을 쳤지만, 저만치에 있는 네 명의 명왕들은 조금도 당 황하는 기색 없이 서서히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명왕교에 남아 있는 사대 명왕들이에요. 현암 형이 정신이 들 때까지는 조심…….”

준후가 말하는데 주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날개 치는 듯한 소리.

“아앗!”

연희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틀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메 뚜기며 풀무치 같은 벌레들이 마구 날아와 일행을 공격했다. 현 암은 그것도 모른 채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지만, 승희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기겁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준후와 연희는 손을 휘 저으며 벌레들을 떨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 참에 허공으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 내리면서 먼저 키가 큰 연희를 할퀴려 들었다. 새 떼였다. 그리고 별장 쪽에는 개들 이 짖으며 달려오고 있었고 숲에서는 바스락거리면서 이름 모를 들짐승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승희와 연희는 계속 비명을 질러 대면서 벌써 반쯤 까맣게 몸을 덮은 벌레들을 떼어 내려 난리를 쳤다. 새들이 쪼아 대는 것보다는 달라붙은 벌레들이 더 징그러 워 견딜 수가 없었다. 월향검이 귀곡성을 지르면서 새 떼들을 어 지럽게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새들은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덮쳐 들어왔다.

“동물들을 부리는 술수예요! 에에잇!”

준후가 기합 소리와 함께 벽조선을 펼치면서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준후의 몸에서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을 휩쓸기 시작 했다. 승희와 연희는 바람에 밀리지 않으려고 서로 부둥켜안았 고, 앉아 있는 현암의 옷자락과 머리카락도 휘날렸다.

바람에 밀려 벌레 떼들은 저만치로 와르르 날아갔다. 몸에 붙은 벌레들과 월향검을 맞고 땅바닥에 떨어졌던 새들의 시체들도 회오리바람에 밀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새 떼들도 그 기세에 놀랐는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준후가 빙글빙글 돌던 몸을 멈추어 세웠다. 몹시 힘이 드는지 잠시 몸을 휘청했지만, 곧 벽조선을 옆에 끼고는 양손으로 수인 을 맺더니 원을 그렸다. 준후의 앞에서부터 느닷없이 불길이 일 어나더니 삽시간에 일행의 주위로 둥글게 번져 가면서 맹렬하게 타올랐다. 예전에 준후가 말한 적이 있던 화염진의 술수였다. 준 후의 키를 넘어 한참 위까지 솟아오른 불길의 기세에 눌려 새 떼 들도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숲으로 날아갔고, 달려오던 개들도 저만치서 짖어 댈 뿐 덤벼들지 않았다. 숲 속에서 들리던 바스락 거리는 소리도 멀어져 갔다.

승희는 벌레가 다 날아갔는데도 계속 히스테릭한 소리를 지르 면서 몸을 문질렀다. 리매술에, 회오리바람에, 화염진까지 일으 킨 후 탈진했는지 비틀하면서 넘어지려고 했다. 재빨리 연 희가 준후의 등을 받쳐 주었다.

“준후야, 괜찮니?”

“네, 그보다 현암 형을…………….”

승희는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단 준후에게 힘을 밀어 보냈다. 네 명의 명왕들은 계속해서 이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준후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희 누나! 어서 현암 형을…………… 저 네 명은 저 혼자는 도저 히안돼요.”

승희는 준후가 외치는 소리에 몸을 돌려 네 명의 명왕을 쳐다 보았다. 그러고는 곧 현암의 등 뒤에 양손을 붙이고 힘을 넣어 주기 시작했다. 연희는 현암 앞에 꽂혀 있는 청홍검을 뽑아 들었 다. 준후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몇 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나 서 발을 붙이고 똑바로 버티고 섰다. 일행과 일행을 둘러싸고 있 는 화염진으로부터 십 미터가량 떨어진 곳에서 네 명의 명왕이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준후의 기운이 약해지자 다섯 마리의 리매들 중 두 마리가 희 미해지더니 곧 사라져 버렸다. 나머지 세 마리의 리매들 중에서 는 두 마리가 희미해지기는 했어도 그런 대로 형체를 갖추고 있 었다. 준후는 주문을 외워 리매들에게 손을 뻗어 명왕들을 가리 켜 보였다. 그러자 리매들은 다시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명 왕들한테로 달려갔다.

그들은 재빨리 마주 서더니 한 명이 다른 사람의 어깨 위로 껑 충 뛰어 올라탔다. 그러고는 달려오는 리매 하나를 향하여 마주 달려가며 네 개의 팔을 후다닥 휘두르자 덩치 큰 리매가 뒤로 흠 첫 물러섰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이 주문을 외우자 또다시 벌레며 새 떼, 개들이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리매에게 덤벼들었다. 그 리고 나머지 한 명의 명왕은 천천히 등에서 무엇인가를 빼 들고 다른 리매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은 리매를 전혀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준후는 지 금 더 이상의 술수를 부릴 만한 기운이 없었다. 승희에게 힘을 얻는다고 해도 준후의 힘은 현암처럼 공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주문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정신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즉 주 문을 시전할 때 승희의 힘을 이끌어 내면 많은 도움이 되지만, 탈진했을 때는 승희가 회복시켜 주거나 도와주는 것이 쉽지 않 았다. 심하게 주술을 썼을 때는 자주 정신을 잃었고 졸도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상황이었다. 연희가 그런 준후를 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오른손을 펴서 준후의 등에 대었다. 준후 가 흠칫하면서 연희를 쳐다보았다.

“네가 준 힘이잖아. 도로 가져가렴.”

연희는 준후가 예전에 자신의 몸에 심어 준 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준후가 삼천 장의 부적을 그릴 수 있는 공 력이 담긴 힘. 준후의 삼 년의 명이 들어 있는 힘을 연희는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준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버틸 만해요. 연희 누나도 자신의 몸은 지켜야죠.” 

두 마리의 리매가 자꾸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의 리매는 기가 죽은 듯, 한 명의 명왕을 노려본 채로 움직 이지 않고 있었다. 그 명왕이 등에서 꺼낸 것은 묘하게 생긴 선 장(禪)이었는데, 그 끝에는 보통 일본 밀교에서 쓰이는 선장처럼 쇠고리가 달린 것이 아니라 방울이 달려 있었고 그것을 흔들자 맑은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그자가 소리를 쳤다.

“나는 명왕교의 항삼세명왕이다. 너희들이 무엇을 믿고 여기 로 난입하려 드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들 각오하라!”

연희는 대꾸를 해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러나 항삼세명왕은 손에 든 선장을 부르르 떨었다. 선장에서 맑은 소 리가 울려 퍼지더니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준후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자도 뭔가를 불러내는 술법을 아는군요.”

검은 그림자들은 휙휙 소리를 내면서 몇 마리는 리매에게로 덤벼들고 두어 마리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항삼세명왕이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덴구들하고 먼저 놀아 보거라.”

준후는 연희를 끌고 화염진의 안쪽으로 물러서서 현암과 승희 를 막아섰다. 아마도 진 안에 있으면 그 덴구라는 괴물들도 쉽게 들어오지 못할 거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덴구들은 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대신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빠르기 로 진 바깥쪽을 휙휙 스치듯 지나갔다. 덴구들이 지나갈 때마다 화염진의 불길은 조금씩 꺼져 갔다. 준후가 이를 악물고 다시 수 인을 짚으면서 화염진의 불길을 세우려고 했지만, 덴구들은 어 지럽게 돌아다니면서 화염진의 불길을 꺼뜨렸다.

그때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리면서 두 명왕의 협공을 받은 리 매가 서서히 사그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벌레 떼와 새들의 습격 을 받던 리매는 그래도 한 발자국씩 그 명왕을 향해 나아가고 있 었고, 항삼세명왕의 앞에 있던 가장 큰 리매는 세 마리의 덴구들 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둘이 한 몸이 된 명왕은 리매를 쓰 러뜨리고 나자 이제 동물을 조종하는 명왕에게로 다가갔다. 항 삼세명왕은 화염진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준후가 기력만 있었다면 어떻게든 했겠지만 지금 준후는 정신을 잃고 있는 현 암과 승희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연달아 큰 술수들을 써서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연희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덴구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청홍검 을 휘둘렀지만 번번이 빗나갔다. 항삼세명왕이 미소를 지으면서 막 화염진을 향해 무슨 술수를 부릴 듯한 표정으로 선장을 내밀 려는 순간, 갑자기 꺄아악 하는 귀곡성과 함께 월향이 검기를 번 뜩이며 날아왔다. 놀란 항삼세명왕은 얼른 고개를 숙였고 월향 검은 허공을 날아 덴구 한 마리를 그대로 뚫고는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월향에게 관통당한 덴구는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더니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것을 보고 항삼세명왕은 분노한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선장을 허공에 마구 휘둘러 댔다.

이제 싸움은 걷잡을 수 없는 혼전으로 변해 갔다. 영과 영이 싸우는 난리판이 된 틈에서도, 승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현암에게 힘을 주었다. 또다시 리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벌레 와 새 떼들에 뜯기고 있던 리매가 막 새와 벌레를 조종하던 명왕 의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둘이 한 몸이 된 명왕의 공격을 받고 는 사라져 갔다. 월향검이 다시 그들 쪽으로 날아들자 동물을 부 리던 명왕은 등에서 그물을 꺼내 월향을 노리고는 휙 하고 그것 을 흩뿌렸다. 월향은 아슬아슬하게 그물을 피했다. 이인 일조가 된 명왕이 월향검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치면서 묘한 자세를 취 하자 월향은 갑자기 뒤에서 뭔가가 잡아끄는 것처럼 현저히 속 도가 떨어져 버렸다.

월향의 애처로운 소리가 허공을 울리자 준후는 더 이상 못 참 겠다는 듯, 수인을 풀어 버렸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화염진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져 버렸고 그 틈에 두 마리의 덴구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연희는 얼핏 청홍검을 휘둘렀는 데 요행히도 덴구 한 놈이 청홍검에 맞은 것 같았다. 원래 형체 도 없는 그림자 같은 놈들이지만 청홍검이 워낙 명검이고 정순 한 기운을 지니고 있어서 일격을 당한 덴구는 데굴데굴 구르다 가 길게 소리를 지르고는 사라져 버렸다.

세 마리의 덴구에게 포위되어 있던 리매도 사방이 울릴 정도 로 큰 소리를 지르면서 헛손질만 하다가 한 마리의 덴구를 손에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리매는 무서운 힘으로 그 덴구를 휘둘 러서 마주 오던 또 한 마리의 덴구를 후려갈겨 버렸다. 캑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덴구는 사라져 버렸고, 또 한 마리의 덴 구는 멈칫대다가 마침 날아들던 월향검에 꿰뚫려서 캭 소리를 지르면서 사라졌다. 그러나 저쪽에서 내던진 그물이 마지막 남 은 리매를 포박했다. 월향은 안간힘을 쓰면서 리매를 구하려고 날아가려 했으나 저쪽에서는 이인 일조의 명왕이 주술력으로 월 향검을 계속 끌어당기고 있는 듯, 월향검의 속도는 현저히 줄어 든 상태였다. 항삼세명왕은 월향검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아마 도월향검이 둘도 없는 명검이라 빼앗으려는 욕심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를 이용하여 준후는 덮쳐 오는 마지막 남 은 덴구의 면상에 인드라의 뇌전을 적중시켰고 그 덴구는 파란 불꽃에 휩싸여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라져 갔다.

그물을 뒤집어쓴 리매의 몸이 찌부러져 갔다. 아까 귀자모신 의 수틀이 리매를 흡수했듯 그물에도 무슨 항마의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준후가 리매를 보고 안타까워서 막 수인을 맺으려는 순간, 월향검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끌려가 땅에 푹 박혀 버렸다. 그러자 항삼세명왕은 날듯이 월향검 쪽으로 달려 가서 선장으로 월향검을 꽉 찍어 눌렀고, 준후가 주춤하는 사이 에 마지막 남은 리매도 어헝 하는 소리를 지르더니 서서히 사라 졌다.

준후는 월향검이 잡힌 것에 놀라서 그쪽을 향해 뇌전 한 방을 날렸다. 그러나 명왕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하자 뇌전은 공중에서 폭발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명왕은 휘청하면서 뒤로 서너 발 자국 물러섰지만 준후는 멀쩡했다. 그 틈에 다른 명왕의 그물이 월향검에게 씌었고 그물에 걸린 월향은 애처로운 비명 소리를 내면서 그물째로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반짝이던 기운이 거의 빛을 잃고 있었다. 월향검도 엄밀하게 말하면 정파의 물건이라 고는 할 수 없는 귀검이었기 때문에 항마의 기운을 지닌 그물 안 에 들어가자 힘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준후와 연희는 안타까 워서 발을 굴렀지 손쓸 방법이 없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난투극은 끝나고 일순 사방은 고 요 속에 잠겼다. 이제는 사람들만 남았다. 네 명의 명왕들이 다 시 천천히 준후와 연희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중에 그물을 들고 있던 명왕이 연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칼도 기막힌 명검입니다! 저것은 나 에게 주시오, 항삼세명왕.”

“그러면 나는요?”

이인 일조의 명왕이 이구동성으로 내는 소리였다. 일단 몸이 합쳐지자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금강야차명왕은 네 팔로 칼을 쓰기는 그렇지 않겠소?”

“군다리명왕은 천라지망이라는 무기가 있는데 저 칼까지 바 라는 것은 그렇지 않소?”

그들은 이미 준후와 연희는 안중에도 없는 듯 우스갯소리까지 하면서 떠들어 댔다. 하도 그 꼴이 눈 사나워서 연희가 소리를 쳤다.

“너희들이 이 칼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으냐! 헛소리 그만하시지!” 

연희가 유창한 일본어로 대들듯 말하자 항삼세명왕이 씩 웃 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시는구먼. 우리는 당신들을 죽여도 좋다는 교주의 명을 받았다. 저 꼬마를 믿는 모양인데,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저 꼬마 혼자서는 우리 넷을 당해 내지 못해. 뒤에 있는 저자는 공력이 탈진한 모양이니 빨라도 삼십 분 내에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고.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지.”

항삼세명왕이 능글능글하게 말하는 중에 군다리명왕의 천라 지망 속에 갇혀 있던 월향검이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냈다. 그것 을 보고 항삼세명왕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아주 좋은 귀검을 선물 받았으니 지금이라도 순순히 돌아간다면 목숨만은……………..”

항삼세명왕은 말을 하다가 말고 흠칫 놀랐다. 놀란 건 준후 와 연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현암이 벌떡 몸을 일으켜서 활 활 타는 듯한 눈으로 항삼세명왕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서 승희도 피로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항삼세명왕 이 현암이 깨어나는 데 삼십 분을 생각한 것은 현암을 과소평가 한 것이었다. 승희가 현암을 회복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 지 못한 모양이다. 연희와 준후도 현암이 이렇게 빨리 회복될 수 는 없을 텐데 싶었다. 예전 경험으로는 이보다 두 배는 걸릴 터 였다.

“누가 월향을 건드렸지?”

명왕들은 현암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현암의 눈이 월향검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곧 눈치를 챘다. 항삼세명왕이 비웃듯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현암이 연희 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희는 청홍검을 현암에게 넘겨주었다. 현 암은 청홍검을 받자마자 뚜벅뚜벅 명왕들을 향해 걸어갔다. 승 희가 볼멘 듯 중얼거렸다.

“저 바보는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월향검이 위험하다고 눈 을 뜬 거야. 우리가 위험할 때는 꼼짝도 안 하면서 월향이 잡혔 을 때는 눈이 자동적으로 떠지나, 원. 준후야, 너도 힘내라! 내가 팍팍 밀어 줄게!”


* 본래 아무것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이며 포위망을 뜻하기도 하나 여기서는 같은 이름을 지닌 일종의 법기(器)로서의 그물을 말한다.


현암이 다가들자 항삼세명왕은 냉소를 지으면서 예의 그 선장 을 바람개비처럼 휘둘렀다. 바람 한 점 새어 들어갈 수 없는 무 서운 수법이었다. 그러나 현암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청홍검 을 높이 쳐들었다. 청홍검에 공력이 주입되자 우웅 소리와 함께 검기가 검신에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암의 공력이 채 회복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월향과는 달리 스스로 내는 힘이 없어 서인지 청홍검에 맺힌 검기의 길이는 두 자 정도밖에 되지 않았 다. 그것만으로도 명왕들은 대경실색하면서 뒤로 한 걸음씩 물 러섰다.

현암은 재빠르게 달려들면서 풍차처럼 돌아가고 있는 항삼세 명왕의 선장 사이로 청홍검을 찔러 넣었다. 순간 챙 하는 소리와 함께 현암의 어깨가 움질했고, 항삼세명왕도 헉하는 비명을 질 렀다. 회전하고 있던 선장이 청홍검에 걸려서 멈추었다. 현암이 공력을 끌어 올려서 무서운 힘으로 돌아가던 선장을 멈추게 하 자, 항삼세명왕은 얼굴이 파랗게 되어 선장을 비틀어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회복이 덜 되었다지만 칠십 년 이상 의 공력을 지닌 현암은 오른팔만으로도 보통 사람의 열 배 정도 의 힘을 간단히 낼 수 있었고, 그런 힘을 항삼세명왕이 막아 내 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지금 현암은 무슨 초식에 의거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키는 대로 검을 휘두른 것이니, 현암이 검을 쥐는 것을 보고 무슨 검법의 초식을 쓸 것이라 예상했던 항삼세 명왕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진 셈이 되었다.

현암이 항삼세명왕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청홍검의 날을 옆으로 돌려 선장의 자루 쪽으로 갖다 댔 다. 사삭 하는 소리와 함께 대번에 선장은 무처럼 베여 두 토막나버렸고, 항삼세명왕은 둘로 잘라진 선장을 들고는 한참이나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 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군다리 명왕과 금강야차명왕도 안색이 굳어지면서 싸울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금강야차명왕이 힘을 주어 묘한 자세를 취하자 현암 의 손에 들린 청홍검이 휘청하면서 현암을 금강야차명왕 쪽으로 끌고 가려고 했다. 현암은 힘을 주어 청홍검을 잡아당겼으나, 이 인 일조인 금강야차명왕도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그때 항삼 세명왕이 소리를 지르면서 부러진 선장을 들고는 현암에게 덮쳐 들었고, 군다리명왕도 월향검이 걸려 있는 째로 천라지망을 등 에 메고는 계도를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가 채 두어 발자국도 떼기 전에 검은 바람 한 줄기가 덮쳤다. 군다리명왕은 비명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준후가 보낸 벽조선의 기운이 었다.

항삼세명왕이 부러진 선장 자루로 다시 현암을 공격해 왔다. 현암은 순간 혼신의 공력을 다해 청홍검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금강야차명왕이 허공을 날아 항삼세명왕과 정통으로 부딪혀 우 당탕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들의 술수는 귀자모신보다는 약 했지만 부동명왕이나 대위덕명왕보다는 훨씬 높은 경지였다. 대위덕명왕이나 부동명왕은 외문기공을 주로 연마했고, 이들은 주술적인 면을 주로 수련한 것 같았는데, 현암을 얕잡아 본 나머지 당한 것이었다.


* 승려들이 항마의 목적이나 의식 때 사용하는 날이 없는 칼.


항삼세명왕은 힘으로는 현암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서 군다리명왕의 천라지망을 빼앗듯이 잡아챘 다. 그런 다음 잇단 동작으로 수인을 맺고 월향검을 가리키며 소 리를 질렀다.

“이봐! 더 가까이 오면 이 칼을 부숴 버리겠다!”

연희가 소리를 질러서 무슨 말인지 현암에게 말해 주자 현암 도 맞받아 외쳤다.

“할 수 있다면 해 봐라! 네깟 놈이 그 칼에 흠집 하나 낼 수 있 을 것 같으냐?”

“파사의 기운으로 그 정도는 가능하다. 봐라! 지금도 이 칼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잡혀 있지 않느냐!”

항삼세명왕이 소리치면서 수인 맺은 손을 월향검 가까이 가져 갔다. 그러자 우우웅 하고 월향검이 떨리는 소리가 났다. 현암은 일순 안색이 변했다. 그사이 금강야차명왕과 군다리명왕은 항삼 세명왕의 뒤로 허둥지둥 숨었다. 현암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 말 했다.

“그러면 어쩌라는 말이냐?”

항삼세명왕은 말 대신 손가락으로 청홍검을 가리켰다. 그러자 현암은 휙 하고 청홍검을 저만치에 내던졌다. 준후와 연희, 승희는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현암은 담담히 말했다.

“내가 책임지겠어. 통역이나 해 주세요, 연희 씨.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이젠 됐느냐?”

연희가 외치자 항삼세명왕은 손짓을 해 보이며 말했다.

“꼼짝 말고 거기에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항삼세명왕이 말을 더듬거렸다. 현암은 항삼세명의 말대로 무 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먼발치 에서 땀을 쥐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승희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군다리명왕이 품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그러고는 뭔 가를 꺼내 들었다.

‘총!’

승희는 고함을 지르면서 현암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현암도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군다리명왕은 총을 꺼내어 현암 을 향해 쏘았지만 빗나갔다. 놀란 준후가 뇌전 한 방을 급하게 날렸으나 금강야차명왕이 뇌전의 기운을 도중에서 막아 냈다. 군다리명왕은 이번엔 준후에게 총부리를 돌렸다. 준후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군다리명왕에게 뇌전을 날리려고 했지만, 연희가 준후에게 뛰어들면서 준후를 넘어뜨리는 바람에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저만치 청홍검이 몸을 굴리고 있던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팔만 뻗으면 닿는 지척의 거리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다리명왕의 총부리가 청홍검을 집어 들려는 현암을 겨냥했다. 그 순 간, 막 달려온 승희가 양팔을 크게 벌리고는 현암의 앞을 막고 서서 외쳤다.

“쏘지 마! 쏘면 안 돼! 현암군! 어서!”

그러나 총부리에서는 작은 불꽃과 함께 연속되는 두 발의 총 성이 울려 퍼졌다. 현암이 무의식중에 파사신검의 검초를 발휘 하여 청홍검을 집어 던졌다. 동시에 승희의 몸이 움찔했다. 청홍 검은 파사신검의 수법대로 방아쇠를 다시 당기려 하고 있던 군 다리명왕의 팔을 향하여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었다.

“으아악!”

군다리명왕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동시 에 현암의 바로 앞에서 승희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현암이 재 빨리 팔을 뻗어서 뒤로 넘어지려는 승희를 받쳐 주면서 얼굴을 보았다. 총알이 한 발은 승희의 어깨에, 또 한 발은 배를 관통한 모양이었다. 승희의 웃옷은 금세 피범벅이 되었다. 현암이 얼굴 을 일그러뜨리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승, 승희야……. 너……………”

승희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조금 고개를 돌리면서 피식 웃었다.

“이 바보, 미련이야.”

갑자기 무언가가 번쩍거렸다. 현암의 코앞에서 항삼제명왕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비겁하게도 그 틈을 이용해 현암 을 치려다가 준후가 쏘는 뇌전에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준후 는 울음 섞인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나쁜 놈! 이 나쁜 놈들아! 덤벼! 덤볏!”

준후는 울먹울먹 소리치면서 다시 한번 뇌전을 날렸고, 쓰러 진항삼세명왕은 온몸에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한동안 자지러지 는 비명을 질러 대다가 축 늘어져 버렸다.

군다리명왕도 권총을 쥔 채 땅에 굴러 떨어진 자신의 두 팔을 보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금강야차명왕은 더 이상 싸울 생 각을 잃은 듯, 팔이 떨어져 나간 군다리명왕을 번쩍 둘러메고는 별장 쪽으로 달음질쳤다.

준후와 연희가 달려와서 현암의 주위를 둘러쌌을 때, 현암은 승희를 안은 채 흑흑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준후가 파래진 얼굴로 더듬거리듯 말했다.

“현암 형. 승, 승희 누나가 죽……..”

그런데 현암이 승희를 꼭 끌어안고 있는 틈 사이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놔줘. 답답…………. 윽! 이 미련……………. 난 아직 안죽었…….” 

연희가 현암을 달래어 간신히 승희와 떼어 놓았다. 준후도 승 희의 목소리를 듣고는 눈물을 그렁거리면서도 헤 하고 웃어 보였다. 승희는 고통스러운 듯 캑캑거리면서도 여전히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정말로 죽이려고 그러냐? 엉? 아이고고.”

현암은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승희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연희는 무심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승희야, 죽지 마. 응? 죽으면 안 돼.”

현암이 눈물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애타게 이야기하는 것을 준후나 연희는 처음 들었다. 승희는 파리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술 을 굳게 다물더니 다시 냉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승희는 그런 현 암의 얼굴을 보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듯, 눈을 감고 차분하게 말했다.

“신부님을 꼭 구해. 그러면 안 죽는다고 약속할게.”

현암은 입술을 꼭 깨문 채 승희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준후도 훌쩍거리면서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희는 눈물을 훔치고는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승희는 현암 씨가 월향검만을 생각한다고 불평하곤 했지. 승 희는 현암 씨를 깊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아. 그런데 현암 씨는 늘 무뚝뚝하게 승희를 대했지. 현암 씨는 과연 승희에게 정 말로 마음에 없어서 그랬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연희는 고개를 젓고는 조심스럽게 승희를 안아 일으켰다. 준후가 자신의 흰 옷자락을 찢어 냈고 현암과 연희가 승희의 상처를 대강이나마 동여매고 지혈을 시켰다. 승희는 곧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현암이 말했다.

“연희 씨가 승희를 데려가 주세요. 뒷일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연희는 그러면 통역은 누가 하나 하고 망설였으나 별수가 없 었다. 그 대신 연희는 자신의 것과 승희의 세크메트의 눈을 둘 다 꺼내어 현암과 준후에게 하나씩 주었다.

“필요할 거예요.”

“우리 걱정은 말고 어서 가요.”

준후도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현암은 별장 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는 아까 도망친 신도 들과 안에 있던 자들이 네 명의 명왕들이 자신들을 이기지 못한 것을 알고 몰려나오고 있었다. 다들 최후의 결전을 치르기라도 하듯 살기등등했다.

“돌아보지 말고 계속 달리세요. 그리고 경찰에 연락하세요. 만 약 우리가 실패한다 해도 이들은 꼭 잡아야만 합니다.” 

“실패 안 할 거예요. 전 믿어요.”

연희는 눈을 깜박하고 살짝 윙크를 해 보이고는 급히 승희를 들쳐 업고 오던 길을 달려 내려갔다.

현암은 군다리명왕이 떨구고 간 천라지망을 풀어 월향검을 꺼냈고, 나무에 박혀 있던 청홍검도 다시 빼내 들었다.

준후는 쓰러져 있는 항삼세명왕을 보고는 이를 악다물었다. 항삼세명왕은 온몸이 시커멓게 그을린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 다. 당분간 일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준후는 잘려 나간 군 다리명왕의 두 팔, 아직도 권총을 꼭 쥐고 있는 그 두 팔을 보고 치를 떨었다. 그러다가 그 옆에 묘한 모양을 한 구슬 목걸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준후는 눈을 빛내면서 그것을 재빨리 주워 들고 현암의 뒤를 따라 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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