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2권 8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11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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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2권 8화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11 :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현암은 청홍검을 휘두르면서 별장의 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 러나 명왕교의 남은 신도들이 담장 위로 고개만 내밀고는 돌 같 은 것을 던지기도 하고 더러는 총을 쏘아 대기도 하는 바람에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근처에 있는 굵직한 나뭇등걸 뒤로 몸 을 숨겼다.

시커먼 밤중에 총성이 울릴 때마다 사방이 조금씩 번쩍이며 빛났고 그 빛에 반사되어 번득득하게 빛나는 명왕교도들의 흉 기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준후도 헉헉거리며 달려와 현암이 몸을 숨긴 나무등걸 뒤로 숨었다. 이건 조금 스케일만 작았다 뿐이지 영락없이 고대의 공성전 그대로였다. 스즈키의 별장은 담장도 높고 철조망까지 쳐져 있어서 꽤 많은 숫자의 명왕교도들 이 안에 모여 싸움을 하자 하나의 요새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준후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예요. 미친 짓이잖아요.”

현암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교주를 받든다고 해도 교주 의 명 하나로 이런 식으로 저항을 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 다. 이것도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현암은 얼마 전 독가스 살포로 문제가 되었던 모 사이비 종교의 본거지에 경찰 이 습격을 하자 독가스를 뿌리고 전원이 옥쇄를 시도했다는 기 사를 떠올렸다. 현암은 어떻게든 저들을 다치게 하지 않고 들어 갈 수는 없을까 속으로 궁리했다. 방금 군다리명왕의 두 팔을 잘 라낸 일로 현암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준후는 현암의 뒤에 바짝 붙어서 간간이 날아오는 총알을 피 하다가 재빨리 옆으로 나아가 뇌전의 기운을 내쏘았다. 준후가 쏜 뇌전이 명왕교도 한 명을 정통으로 명중시키자 그자는 처참 한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뒤로 굴러떨어져 보이지 않게 되었 다. 준후는 예전과 달리 사람을 맞히고서도 침착했다. 현암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준후야, 너……….”

“그런 것 따지지 않기로 했어요. 신부님이 위험하다구요!”

“준후야, 아무리 그래도…………….”

현암은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준후는 재빨리 몸을 돌리면서 또 뇌전을 내쏘았다. 저쪽에서 또 한 명의 명왕교도가 비명을 지 르며 쓰러졌다. 보다 못한 현암이 준후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준후야, 너 왜 그래! 아무리 다급해도 너는 절대로 사람에게 주술을 쓴 적이 없었잖아. 그런데 왜……………..”

준후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면서 울먹이는 표정이 되었다. 준후의 입에서 중얼대는 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진작부터 우리가 전력을 다했으면 승희 누나도, 신부님도 이 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준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현암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물론 준후가 지금 사람을 죽이는 술수를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 나 사람에게는 절대 주술을 쓰지 않던 준후가 마음이 바뀌었다 는 사실은 앞으로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 했다. 현암은 암담한 느낌이 들었다.

“왜 우리는 항상 당하고 참고만 있어야 하죠? 우리가 저들보 다 힘이 약한가요? 악한 자들은 항상 우리를 이용하고 죽이려 드 는데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힘조차도 써서는 안 되는 건가 요? 네?”

“준후야, 그건…….”

“이제야 깨달은 것 같아요. 힘을 쓰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무리 참을성을 가지고 대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요. 이기지 못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소 용이 있겠어요? 신부님은 붙잡히셔서 고생하고 계시고, 승희 누나는 총에 맞아 쓰러지고…………….”

“준후야, 힘으로 이기는 것은 영원히 이기는 게 아니야!”

“영원히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 지지 않는 것이 더 급 해요.”

“그러나 지금 너는 지지 않으려고 술수를 쓰는 것이 아니잖아!”

“아니에요!”

준후는 누구에게 들으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면 서 이번에는 벽조선의 광풍을 일으켜 땅바닥을 후려쳤다. 그러 자 미친 듯한 바람이 바닥에 되튕기면서 낙엽이며 잔돌 부스러 기를 잔뜩 싣고 벽 쪽으로 몰아쳐 갔고, 난데없는 자갈 벼락을 맞은 명왕교도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자 준후는 다시 고함을 치면서 마구 벽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 준후 의 눈에서 무언가가 번쩍이는 것을 보고는 현암도 마음이 숙연 해졌다.

결국 준후의 선한 심성이 흔들리는 것인가?’

그러나 현암은 더 이상 준후를 탓하거나 원망하고 싶지 않았 다. 어떻게 준후를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그 의문은 예전부터 현암의 마음속에서도 앙금처럼 가시지 않는 문제이기도 했 다. 성격이 급한 현암은 불의를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곤 했다. 그러다 보니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그런 문제로 번 민했다. 그렇게 고뇌하면서까지 피해를 주지 않도록 결정을 한 다고 해도 항상 백 퍼센트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음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구제받기를 거부하고 사라지는 악령이나 악인도 많았다. 또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 른 방향으로 일이 끝나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 은 깊은 번뇌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현암은 지금 준후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았다. 동생 현아를 앗아 간 물귀신을 잡기 위해 복수심에 불타고 있던 때의 자신, 그러나 도혜 스님 덕분에 그 일의 진상을 알게 되었 고 결국 살심을 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준후는 어떨까? 지금 상대하는 오키에, 아니 묘렌 같은 자에게 자기와 같은 사연을 기 대할 수 있을까?

“준후야!”

현암은 소리치면서 앞서 가고 있는 준후의 뒤를 따라 달려갔 다. 아니, 더욱 속도를 내어 준후를 앞질렀다. 준후는 더욱더 힘 을 내어 거센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현암은 그 앞을 가로질러 청홍검으로 벽을 그었다. 벽은 아무 저항 없이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고, 현암은 세로로 두 번 더 검을 그었다. 그런 다음 청홍검을 왼손에 옮겨 쥐고 오른손에 ‘발’ 자결의 공력을 모아 벽을 후 려쳤다. 와르릉 흙먼지를 날리면서 담벼락은 무너져 버렸다. 담 이 무너지자 준후가 일으킨 바람에 휩쓸려 돌 부스러기와 모래 먼지는 더욱 거세게 안쪽으로 밀려갔고, 몸을 담장 밑으로 움츠 렸던 명왕교도들은 바람을 정통으로 맞게 되자 더욱 바싹 바닥 에 엎드렸다. 더러 고개를 들었다가 바람에 밀려서 데굴데굴 굴 러가는 자들도 있었다.

현암은 먼지에 눈을 찌푸리면서 담장 안으로 손쉽게 뛰어들었 다. 현암이 준후에게 이제는 그만해도 된다고 소리쳤지만, 준후 는 상기된 얼굴로 담벼락 안으로 뛰어들더니 별장 건물의 현관 을 향해 벽조선을 밀어붙였다. 그러자 날카로운 굉음을 내며 별 장 일층의 유리창이 깨어져 사방으로 날렸고, 현관의 나무문 도 박살이 나 버렸다. 물론 현암도 나름대로 통쾌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준후의 손이 너무 매워진 것 같아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준후는 한 술 더 떠서 막 몸을 일으키려는 명왕교도들에 게도 벽조선을 부쳐 데굴데굴 굴러가게 만들었다. 현암이 준후 의 어깨를 잡았다.

“준후야, 됐어! 저들은 이제 힘을 쓰지 못해!”

그러나 준후는 계속 상기된 얼굴로 벽조선을 들고 사방을 둘 러보았다. 준후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현암의 귀에 들려왔다.

“나는 키가 자라지 않으면 크지 않는 거라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나 봐요.”

현암은 눈썹을 찡그리면서 준후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준후는 현암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준후의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흐느끼고 있었다.

“이젠 알겠어요. 나도 커야 하고・・・・・・ . 그건 막을 수 없어요. 그리고 다 큰 후에는 저세상으로…..”

“준후야!”

“괜찮아요. 형 마음 다 알아요. 그러나 이젠 할 수 없나 봐요. 귀염둥이 어린아이로 있기에는 더 이상은……………. 전 이제 착하게 살려고 저 혼자만 돌보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저도 제 몫 은 해야죠.”

현암은 준후의 말투에서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풍기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준후의 명. 준후는 단명의 운세인데 다 그나마 술수를 쓰느라 많이 단축되고 있다는 말을 들은 바 있 었다. 준후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현암은 준후 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준후의 말대로라면 그 나이가 되면서까지 키도 크지 않고 앳된 모습으로 있었던 것은 원래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준후는 그러한 고민 을 이때까지 해 오면서 순수한 아이의 모습을 원하고 있었던 것 은 아닐까? 그러다가 지금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음을 바꾸고 있 고? 준후는 이제부터 몸이 자라고 어른이 될 것인가? 아무리 준후라고 하지만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는 것일까? 현암은 입을 꼭 다물고 준후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들려주었다. “준후야, 장차 너도 알게 될 거야. 힘을 써서 이긴다는 게, 그 리고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실은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지금보다도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질지도 모른다. 그것을 이기려 면 힘을 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워야만 한단다. 그래, 너 스스로 깨달아야 할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그리고 스스로 깨닫기를 바란다.’

현암은 눈물이 아른거렸다. 그때 앞에 있는 준후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형, 어서 가요.”

평소보다 조금 굵은 듯한, 조금은 성숙해진 어조가 섞여 있는 준후의 목소리를 듣자 현암은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준후가 먼저 별장의 안으로 들어가자 현암은 할 수 없다는 생 각을 하며 그 뒤를 따라 별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자신 의 생각대로 준후가 크기 시작한다면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 다. 아니, 오히려 준후가 이제껏 크지 않고 자신이 처음 보았을 때의 체구와 마음을 유지해 왔던 것이 비정상적인 일인지도 몰 랐다. 현암은 준후를 믿었다. 곧 스스로 깨달을 것이고, 스스로 깨달은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별장 안으로 들어서니 마루 저쪽에 계단이 보였다. 하나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었고 하나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현암과 준후는 아무 말 없이 그 계단 앞까지 갔다. 위층과 아래 층에서 모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러자 준후가 말했다.

“형은 아래층을 찾아보세요. 저는 위층으로 가볼게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니?”

“시간이 없어요. 대신 형도 나도 세크메트의 눈으로 연락하도록 해요. 먼저 신부님을 발견한 사람이 연락하면 되잖아요.”

그 말을 듣고 현암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주머니에서 세 크메트의 눈을 꺼내어 준후에게 보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라.”

준후도 세크메트의 눈을 보여 주고는 날쌔게 위층 계단을 올 라갔다. 현암은 세크메트의 눈을 왼손에 옮겨 쥐고 오른손에는 청홍검을 든 채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승희를 차에 싣고 미친 듯이 언덕길을 내려간 연희는 길가에 병원의 간판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았다. 이미 승희는 얼굴이 하 얗게 질린 채 헛소리를 하고 있었고, 상처를 동여맨 준후의 옷 자락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연희는 서둘러 병원 문 앞에 바짝 차를 세우고는 승희를 응급실로 옮겼다. 웬 총상을 입었느냐는 의사의 말에 강도의 짓이라고 둘러댔다. 의사는 다급히 간호사들에게 응급 수술 준비를 지시하고는 천만다행으로 총탄이 급소 는 피해 갔으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연희를 안심시 켰다.

연희는 의사가 경찰을 부르려고 수화기를 들자 다급히 제지하 며 한국 대사관에 연락을 취해 달라고 말하려다 의사로부터 수 화기를 뺏다시피 해서 자신이 직접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 다. 일본으로 오기 전에 백호가 알려 준 비밀 코드를 대자 전화 는 백호의 사무실로 연결되었고, 연희는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백호의 낯익은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숨 을 가다듬은 연희는 다시 다급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승희는 총상을 입었고 신부님은 매우 위험해요. 현암 씨와 준후가 신부님을 구하러 그들의 본거 지로 들어갔는데 저도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지원이 필요하십니까? 여기서 출발하더라도 세 시간이면 도 착할 수 있습니다. 정 급하다면 일본 경찰에라도………….”

“일단 저부터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니 뒷일을 부탁드릴 게요.”

연희는 백호에게 병원과 별장의 위치를 설명해 준 다음 전화 를 끊었다. 연희는 수술실로 들어가는 승희의 손을 한번 꼭 잡 아주고는 병원을 나섰다.

위층으로 올라간 준후는 자신을 보고 달려드는 명왕교도 몇 명을 마치 검불을 떨어뜨리듯 벽조선의 검은 기운으로 날려 버 리면서 날듯이 복도를 달려갔다. 현암이 아래쪽 지하실을 조심 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게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전해졌다. 준후 는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박 신부가 위독한 지경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니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더 욱 급해지고 흥분되었던 것이다.

준후는 복도에 주욱 늘어선 방문들을 일일이 하나씩 열어 보 는 대신 마음속으로 염원하면서 벽조선에 신력을 끌어들였다. 

‘내 며칠의 수명을 또 쓰는군. 그러나 할 수 없지.’

준후가 와락 소리를 지르면서 벽조선을 떨치자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가면서 닫혀 있던 방문들을 주욱 훑었다. 검은 기운을 맞은 방문들은 흡사 폭발되는 것처럼 산산이 바스 러지기도 하고 문짝째 떨어져 나가기도 하면서 모조리 부서져 버렸다.

준후는 거의 폐허가 되어 버린 복도 좌우를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몇몇 방에는 명왕교도들이 큰 충격을 받은 듯, 신음 소 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지만 준후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일단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나자 냉정해졌는지도 몰랐다. 그중 한 방의 구석에 꽁꽁 묶인 채 두건을 뒤집어쓴 두 사람이 있었다. 준후가 달려가 두건을 벗겨 보니 한 명은 전에 잠시 보았던 사이토였고 한 명은 노인이었다. 그 두 사람은 마취된 상태인지 준후가 두건 을 벗기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숨소리만 가늘게 내고 있었다. 준후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그들을 내버려 두고 다시 복도 로 나섰다. 그런데 그때 손에 쥐고 있던 세크메트의 눈으로부터 현암의 생각이 전달되어 왔다.

준후야, 신부님을 찾았다!

후는 느낌이 오자마자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 다. 그런데 준후의 뒷전에서 무언가 음산한 영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준후는 달려가다 말고 재빨리 몸을 휙 돌려서 수인을 맺 었다. 저쪽에 중년의 남자 하나가 초췌한 모습을 한 채 서 있었다. 

아이야, 주사 병을………….

준후는 그 영이 난데없이 이상한 말을 전해 오자 눈을 찡그렸 다. 그러나 그 남자 영은 계속 중얼거렸다.

묘렌에게…………. 그래야 묘렌은………….

그러나 영은 말을 채 맺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준후는 영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갸웃하 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현암은 천천히 청홍검을 들어 올린 채 손을 뻗어 월향검을 다 시 왼손으로 받아들었다. 현암의 뒤에는 날카롭게 잘려 나간 지하실의 문이 넘어져 있었고 두 명의 명왕교도가 그 옆에 쓰러져 있었다. 문을 부수자마자 달려드는 명왕교도를 향해 월향이 날 아가 총을 깨끗하게 반으로 잘라 버렸고, 연달아 현암이 청홍검 의 칼집으로 한방씩 먹여 보기 좋게 둘을 녹다운시켰던 것이다. 현암의 눈에 팔목을 묶인 채 공중에 매달려 있는 사람의 모습 이 보였다. 피로 얼룩진 검은 사제복을 입고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박 신부였다.

“신부님!”

현암이 소리치면서 박 신부에게 성큼 달려가려는 순간, 박신 부의 뒤편에서 누군가가 휙 하고 달려 나왔다. 현암은 그 모습을 보고 긴장해서 다시 재빠르게 청홍검을 겨누었다.

“오키에!”

그러나 박 신부의 뒤에서 달려 나온 아이는 훌쩍훌쩍 울면서 가련한 눈으로 현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저씨, 아저씨는 누구세요? 무서워요.”

‘아니! 그럼 저 아인 오키에가 아니라 아라?’

현암은 순간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눈앞 에 있는 아이는 분명 아라였다. 오키에와 아라는 애당초 거의 구 별하기 어려울 만큼 닮은데다가 아이가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자 현암은 마음이 풀어졌다.

‘이 아이가 오키에라면 설마 우리말까지 하지는…………….’

그러나 현암은 신중하게 다시 한번 말을 건넸다.

“너 누구지? 오키에, 아니 명왕교의 교주인 묘렌이 아니냐?” 

“오키에가 누구예요? 무서워요. 무서워 죽겠단 말야. 어엉엉 엉.”

오키에, 아니 아라, 아니 오키에는 현암이 칼끝을 치우지 않자 더욱더 큰 소리로 울었다. 현암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좀 더 자세히 그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땋고 있었는데 한쪽이 무참하게 잘리고 없었다.

‘아라가 맞구나.’

현암은 한숨을 내쉬면서 청홍검을 아래로 내렸다. 그런 다음 다가가서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고는 말했다.

“이젠 울지 마라. 무서웠지?”

“으응, 흑흑흑.”

아라는 몹시도 무서웠는지 현암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계속 어 깨를 들썩거렸다. 좌우간 현암은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아라를 안은 채 박 신부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박 신부의 가슴에 손 을 얹어 보았다. 박 신부는 마취가 된 것인지 기절해 있는 것인 지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현암은 청홍검을 한 번 저어 박 신부의 팔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냈다. 그러고는 쓰러지려는 박 신부의 몸을 오른쪽 어깨로 받았다. 아라와 박신부를 둘 다 안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현암은 아라에게 조용 히 말했다.

“아라야, 잠시만 내려와주겠니?”

그러나 아라는 계속 흐느끼면서 더욱더 현암의 품으로 파고들 었다. 현암이 아라와 박 신부를 양쪽 팔로 감싸안을 수가 없어서 청홍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둘 모두를 추스르려고 애쓰고 있 는데, 갑자기 박 신부의 등쪽 사제복이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놀 란 현암이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박 신부의 사제복을 뚫고 날 카로운 바늘 같은 것이 갑자기 솟아오르더니 사방에 선혈이 튀 었다.

“으아악! 신 신부님!”

현암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이번에는 현암의 가슴이 뜨끔해 지면서 갑자기 온몸의 맥이 풀렸다. 천장과 벽이 빙빙 돌았다. 현암은 박 신부와 아라를 안은 채 그대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원체 부상을 심하게 입었던 현암은 가슴의 통증이 너무나도 심 해서 자기도 모르게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런 현암의 눈앞에 서 누군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은 아직 선혈이 떨어지고 있는 기다란 바늘을 손에 든 채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아라, 아니 오키에, 아니 그보다는 오키에의 몸을 점령하고 있는 이자나미의 사제이자 명왕교의 교주인 묘렌이었다.

“너..너는 오키에….”

“너도 역시 똑같은 바보로군. 깔깔깔.”

현암은 쓰러진 채 자신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단 박신 부쪽으로 더듬거리며 손을 뻗었다. 박 신부의 목덜미가 잡혔다. 박 신부의 맥박은 이미 정지해 있었다. 현암은 컥컥거리며 숨이 끊어질 듯한 소리와 비명을 동시에 질렀다.

“이, 이런・・・・・・ 이럴 수가……………. 안 돼, 안됏!”

“호호호. 이제 신부는 죽었다. 이번엔 네 차례지.”

오키에가 다시 손에 든 기다란 바늘을 치켜 올리는 순간, 갑자 기 귀곡성과 함께 월향검이 스스로 쏘아져 나갔고, 월향검이 번 뜩하자 바늘이 두 동강 나 버렸다. 오키에는 의외의 사태에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고 월향검은 오키에를 죽여 버릴 듯이 무 서운 기세로 방 저편으로 날다가 다시 방향을 돌리며 아름다운 호선을 그었다. 그 순간 부서진 문을 박차고 준후가 지하실로 뛰 어들었다.

“신부님! 현암 형!”

준후는 들어서자마자 뇌전 한 방을 오키에에게 날렸고 오키에 는 마치 고양이처럼 몸을 빙글 돌리면서 뇌전을 피하려 했다. 그 때 월향검이 오키에의 정수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바 닥에 쓰러져 있던 현암이 길게 소리를 쳤다. 현암의 입에서는 말 과 함께 피거품이 울컥 튀어나왔다.

“월향! 안돼!”

월향검은 현암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아니면 놀랐기 때문 인지 꺄아악 소리를 내면서 조금 방향을 틀어 오키에의 움츠린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키에의 잘린 머리카락이 월향검 이 일으킨 바람에 흩날렸다. 다시 준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 들자 오키에는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지하실의 한쪽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그 벽은 한 바퀴 빙글 돌았고, 오키에는 벽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월향검은 찢어지는 소리로 길게 울면 서 날아와 현암의 옆에 떨어졌다. 월향검이 이토록 비통하게 우 는 소리를 준후는 처음 들었다. 아마도 그것은………….

준후는 현암과 박 신부가 둘 다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정신 이 나가 버린 듯 비틀거렸다.


연희는 서둘러 차를 몰고 별장의 오르막길을 미친 듯이 올라 갔다. 밖은 소나기가 오려는지 가끔씩 번쩍하면서 뇌성이 울려 왔다. 연희는 혼자서 다시 별장으로 가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은 가야만 했다.

아까 환영의 진이 펼쳐진 곳까지 차를 타고 올라간 연희는 주 변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명왕교도들이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다. 차들은 이곳저곳에 버려진 것처럼 널려 있었고 개중엔 뒤집힌 차도 있었다. 연희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고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갔다. 곧 별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별장은 마치 전 쟁터를 방불케 했다. 무너진 담장과 부서진 문들, 모조리 깨어진 유리창들. 연희가 입구에 다다랐을 때까지도 그곳에 쓰러져 뒹 굴고 있는 명왕교도들은 꼼짝도 못한 채 계속 신음 소리만 내고 있었다.

‘현암 씨와 준후는 무사할까? 이런 난리를 치르다니…………. ‘

연희는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부서진 현관문을 통해 별 장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형! 현암 형! 신부님!”

준후는 주저앉은 채 미친 듯이 울부짖고 있었다. 이미 현암은 의식을 잃었고 박 신부는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현암의 숨소리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현암 형! 일어나! 형이라도 정신을 차리란 말야!”

준후는 미친 듯이 현암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흔들었으나 현암 의 입에서는 피거품이 흘러나오면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왜, 왜 바보같이! 죽였어야 하는데! 오키에를 죽였어야 하는데!”

준후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젖히고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마 지막 순간까지 현암이 오키에를 죽이려 하지 않았던 것을 준후는 알고 있었다. 오키에는 신부님의 원수였다. 그리고 현암 자신도 그토록 처참하게 당했으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오키에를 죽이지 않고 월향검을 도로 불러들였다.

“왜 그랬어! 바보같이!”

“준, 준…….”

현암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준후를 불렀다. 준후가 현암의 얼굴에 귀를 갖다 댔다.

“오키에는 죄가 없・・・・・・ . 그건 묘렌・・・・・・ 네가…………….”

준후는 현암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암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오키에는 그냥 여자아이일 뿐 실제 로 사악한 술수를 부린 것은 오키에에게 빙의된 묘렌이라는 것 을. 그래서 현암은 오키에를 쓰러뜨리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준후는 그런 생각마저도 떨쳐 버렸다.

“아냐, 아냐. 누구라도 상관없어. 내가 내가…………….”

준후의 눈에는 불길 같은 것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준후는 찢 어지는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손에 든 벽조선을 거칠게 휘저었 고 그러자 오키에가 달아났던 지하실의 비밀 벽이 벽조선의 검 은 기운에 부딪혀서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현암은 준후에게 무 어라고 말을 하려는 것 같았으나 끝내 하지 못하고 축 늘어져 버 렸다. 월향검이 슬픈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는 현암 주변을 맴돌 았다.


박 신부의 귀에는 모든 소리들이 들려왔다. 현암이 쓰러지며 내지르는 소리, 그리고 준후가 악을 쓰면서 울부짖는 소리, 월향 의 귀곡성까지도.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신의 몸은 붕 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마치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런, 내가 지금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번엔 박 신부의 귀에서 윙윙거리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모든 소리 를 삼켜 버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 사이사이로 처량하게 사방을 울리는 월향검의 귀곡성이 간신히 들려왔다. 그리고 무 언가가 터지는 듯한 굉음도 들려왔다.

갑자기 웅웅거리는 소리가 사그라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희미하게 의식 속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박 신부의 의식은 피 안과도 같은 무의식 너머로 떨어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막 사라 져 가는 의식 속에서 모든 소리들이 잦아들고, 눈앞에 펼쳐진 암 흑이 어느새 일렁거리며 신비로운 색채로 변했다.

좁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긴 터널 속 으로 박 신부는 쏜살같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고통은 느껴지 지 않았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게 쪼개진 기억들이 갑자 기 하나로 모이듯 또렷해져서 한순간에 별무리처럼 무수하게 일어났고,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과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이 일순간에 폭발하듯 떠올랐다. 그러나 조금도 혼란스럽지 않았 다. 오히려 명료했고 차분했고 고요했다. 그러자 곧이어 주변도 환하게 밝아왔다.

‘그래. 모든 것이 이렇게 이렇게……..?’

박 신부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의문들, 그리고 세상에 서 자신이 걸어야 할 길, 아무도 믿어 주지 않는 영과 인간의 관 계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되풀이되던 그 많은 숙제들이 한꺼번 에 모였다가 터져 나가는 듯했다.

‘이렇게, 이렇게 모든 것이 ………….’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아물아물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수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지금 자신을 향해 팔을 벌리고 있는 절대자의 모습. 자신은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의 분노도 의문도 슬픔도 없었다.

지난날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와르르 스치고 지나갔 다. 일부러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모든 일들이 망각으로 빠져들지 않고 한꺼번에 폭발된 것처럼, 그러나 온화하게 물결 쳐 오고 있었다. 어릴 때의 일들, 학창 시절, 젊었을 때 단 한 번 있었던 이제는 잊은 지 오래된 그녀와의 추억. 그리고 미라, 현 암, 준후, 승희, 연희.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들. 퇴마사들의 노력으로 안식을 찾은 얼굴들과 애썼지만 결국은 구원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들.

그대 원하던 바를 이루었는가?

조용하나 세상 만물을 채우고도 넘칠 것 같은 준엄한 목소리 가 들려왔다. 박 신부는 허공에 둥둥 뜬 채 어디에서 들려오는지 모르는, 아니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울림으로 번져 나오고 있는 그 소리에 희열이 가득 찬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저절 로 고개가 숙여졌다. 까닭 없이 기분이 유쾌했다. 즐겁다고나 할 까? 모든 짐을 다 벗어 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박 신부는 허공에 서서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고개를 들었 다. 눈앞에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휘황한 빛으로 둘러싸인 어떤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빛 앞에서 박 신부는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음이 맑아졌다. 지금까지 겪은 적이 없는, 그 어 느 때보다도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에 머리를 숙였다. 목소리가 다시 은은하게 울려왔다.

원하던 바를 다 이루었느냐?

평온하고 아늑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원하던 바는…… 그랬 다. 지금의 자신은 이제까지와 비교할 수 없는 안도감에 젖어 있 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바라던 바가 무엇이었던가. 박 신부는 조 용히 답했다.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뜻 말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준후는 비밀 벽 아래에 장치되어 있던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준후의 눈에서는 까닭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 리고 있었다. 어느덧 준후는 어둡고 조금 큰 방에 도착했다. “나와라!”

준후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준후의 눈에서는 또다시 한 줄기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왓!”

준후는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저쪽 모퉁이에서 조 그마한 그림자 하나가 두리번거리니 조심스럽게 어둠 속에서 걸 어 나오기 시작했다.

“준후, 준후 오빠.”

준후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며 고 개를 들었다. 그 방의 어둠 속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아라, 아니 면 오키에.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준후의 얼굴을 보더니 와 앙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야. 무서웠어! 으아앙.”

준후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니, 도저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 었다. 머리가 산산이 조각나서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라일 까, 아니면 오키에일까? 지금 이 아이는 정말 천진난만한 아라 같아 보였다. 그러나 오키에는 술수에 능한 여자였다. 준후는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현암의 마음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키에가 어떻게 해서 현암을 해쳤는지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조용히 햇!”

준후는 커다랗게 고함을 쳤다. 아라, 아니 오키에는 막 준후에 게 응석을 부리려는 듯 다가오다가 준후의 목소리에 질린 듯 울 음마저도 멈춘 채 새하얀 얼굴로 준후를 바라보았다.

“오빠, 왜 그런 무서운 얼굴을………….”

준후는 그런 오키에, 아니 아라의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미어 졌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던 아이였다. 장난꾸러기에 응석 받이였지만 왠지 정이 갔다.

‘만약 정말 아라라면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이 들자 준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려서 들 고 있던 벽조선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라의 잘 린 한쪽 머리카락이 준후의 눈에 들어왔다. 아라는 준후의 태도 가 조금 변한 것 같자 다시 울음을 터뜨리면서 다가오려고 했다. 준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거기 ! 다가오면 죽여 버린다!”

아라는 그만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덜컥 멈추어 섰다. 아 라의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그러져 가는 것이 준후의 눈 에 똑똑히 비쳐졌다. 피를 흥건히 흘리고 쓰러진 박 신부의 모습, 그리고 피를 계속 토해 내던 현암의 얼굴이 아라의 얼굴에 겹쳐서 떠올랐다. 준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억지로 눈을 매 섭게 뜨고 아라를 노려보았다.


연희가 지하실로 들어서니 쓰러져 있는 현암과 박 신부가 보 였다. 연희는 둘에게로 다가갔다. 현암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 만 다행히도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고, 박 신부도 맥박이 약하게 뛰고 있었다. 연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도움을 청할 사람도, 또 그럴 장소도 못 되었다. 연희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준후는?’

연희는 마침 옆에 떨어져 있던 세크메트의 눈을 집어 들었고 준후의 상황이 단숨에 연희의 마음속에 비추어졌다. 연희는 급 하게 몸을 일으켜 비밀 벽 너머로 달려 들어갔다.

잠시 후 박 신부가 갑자기 푸 하고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박 신부의 눈은 황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 신부가 눈을 뜨자 현암의 옆에 있던 월향검이 놀란 듯 나직한 소리를 냈다. 박신 부는 그런 월향검을 보고 중얼거렸다.

“나를, 나를 아래로…………….”

박 신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월향검은 허공으로 튀듯이 날아올랐다.

“나, 나를 죽여? 오, 오빠.”

“울지 맛! 너는 렌, 오키에의 몸을 뒤집어쓴 악마야! 더 이상, 더 이상 울지 맛!”

아라, 아니 오키에는 몸을 떨면서 동시에 입술도 덜덜 떨었다. 그러더니 그 얼굴에는 차차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오빠. 오빠는 아라가 미운 거지? 오빠도 날 미워하는 거지. 그렇지?”

“너는 아라가 아니야! 네 머리카락은 어찌 된 거지?”

“그 여자아이가……………. 무서운 그 아이가 잘라 버렸어.”

그 말을 하면서 아라는 무서운 기억이 떠오르는지 새파랗게 질린 채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준후는 잠시 당황했다. 저 아이가 한 말이 정말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 다. 오키에, 아니 묘렌은 악마였다. 그런 준비 정도는 충분히 해 두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 되는 것일까? 준후는 다시 한번 무섭게 몸을 떨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은 아라일 수도 있고 오키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준후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자 아라는 설움에 복받친 듯 커다란 울음을 터뜨렸다.

“오빠! 그렇게 무섭게 하지 마. 제발! 나는 아라란 말야. 으아 앙.”

“울지 마앗!”

준후는 폭발하듯 큰 소리를 질렀다. 준후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그렇게…………. 흐흐흑..”

“더 이상은 더 이상은 속지 않아! 더 이상은 절대로!”

“오빠는 그럼..

“나는 나는 말이야.”

준후가 다시 눈물을 주르륵 쏟으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로 자신 의 앞에서 애처롭게 떨면서 울고 있는 아라, 아니 오키에를 바라 보면서 서서히 손에 쥐고 있던 벽조선을 쳐들었다.

“나는 날 길러 준 사람을, 비록 악인이었지만 아버지라고 부르 던 사람을 주술로 죽게 만들었어. 그리고 다시는 사람에게 주술 을 써서 공격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 그런데…….”

아라, 아니 오키에, 아니 아라는 흑흑 흐느끼며 눈물에 젖은 눈으로 준후를 올려다보았다. 준후에게는 지금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는 저 눈빛이 여태껏 보아 왔던 그 어떤 징그러운 괴물이 나 악령보다도 더 무서워 보였다. 그러나 준후는 피를 흥건하게 흘리고 쓰러져 있던 박 신부와 현암, 그리고 총을 맞고 쓰러지던 승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네가 아라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나 자신을 이젠 알아. 나도 얼마 살지 못할 거야. 잘해야 십 년? 아니 칠팔년도 안 남 았어. 나는 내가 크지 않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그게 아냐. 아니었어. 나도 가고 모두가 가고 하하하, 내가 몇 살인데? 그래. 너보다는 그래도 내가 크지? 너는 몇 살인데?”

준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주 맑은 목소리로 웃음까지 띠면서 아라를 향한 것인지 자신을 향한 것 인지 모르게 중얼거리듯이 말을 이어 갔다. 공포에 질린 그러면 서도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 내고 있는 아라의 눈을 준후는 더 이 상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우리가 왜 이래야 하지? 하하하. 나도 놀고 싶고 학교도 다녀 보고 싶고 친구도 사귀어 보고 싶었는데, 너도, 너도 그랬지? 네 가아라건 오키에건 간에 말야. 우리가 왜 이래야 하지? 왜 우리 가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거지? 이제 모르겠어. 더 이상 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오, 오빠.”

“난 이제 더 이상 준후 오빠가 아니야. 준후 오빠는 죽었어. 이 젠 세상에 없어.”

준후는 벽조선을 와락 펴 들었다. 순간 뭉클하는 검은 기운이 부채에 엉기면서 주변에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 했다. 준후는 머릿속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무거운 소리가 준 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넌 이제 가야 해………”

준후가 고통스러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서서히 기합을 넣자 준후가 펼쳐 든 벽조선에서 검은 기운이 일어났고, 커다란 칼라도 같고 화살과도 같은 기운이 아라를 향해서 날아갔다. 그 순간.

“안 돼! 준후야!”

누군가가 아라와 준후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연희였다.

“아앗!”

놀란 준후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연희는 아라의 앞을 막고 있었다. 준후는 있는 힘을 다해 발휘된 주술의 기운을 마지막 순 간에 누그렸으나 그 기운은 연희의 몸에 적중했다.

“아아악!”

연희의 기다란 비명 소리가 사방에 메아리쳤고, 연희는 곧 퍽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준후는 갑자기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표정이 되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연, 연…….”

준후는 온몸이 마비된 듯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제대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벽조선이 준후의 손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털 썩 하고 떨어졌다. 준후는 두 손을 조금씩 떨기 시작하더니 마치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연희 누…….”

“주, 준후야, 안 돼. 네가 사, 사람을…………. 그리고 저 아인 오키에가 아니라 정말 아라…………….”

연희는 몸을 꿈틀거리며 안간힘을 썼지만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때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듯한 연희의 부릅뜬 눈, 뭔가 더 준후에게 말하려고 하는 듯한 연 희의 눈이 준후에게 보였다. 연희가 가지고 있는 심연의 눈이었 다. 연희는 그 ‘심연의 눈’으로 아라와 오키에를 정확하게 구분 해 내고 준후가 아라를 죽이려는 것을 몸을 던져 막은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 커다랗고 맑은 눈은 스르르 감겨 버리고 말았다. 준후는 아래턱과 온몸을 덜덜 떨면서 잠시 비틀하는 듯싶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준후의 눈은 이미 초점이 없었고,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는 침이 흘러내려 눈물과 뒤엉켰다.

“내가…………… 연희 누나를…………….”

준후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쓰러져 있는 연희의 모습과 연희의 긴 머리카락, 그리고 울고 있는 아라. 그 때 건너편에서 또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거의 넋이 나가 버린 준후의 뒤편으로 기척도 없이 서서히 다가 오고 있었다. 오키였다. 그녀는 바로 그곳에 준후의 뒤편 어 둠에 몸을 숨긴 채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오키에는 씨익 하고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준후의 뒤편에서 오키에가 불쑥 나타 나자 아라는 앉은 채로 뒤로 조금씩 기어가면서 떨리는 목소리 로 말했다.

“오, 오빠.”

그러나 준후는 대답이 없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귀는 열려 있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 오빠아. 준후 오빠.”

“후훗. 이젠 네 역할도 끝났어.”

오키에는 가만히 다가가서 준후를 바라보고는 따귀를 한 대 철썩 올려붙였다. 준후는 앉은 자세에서 휘청하더니 그대로 돌 처럼 굳어져 옆으로 쓰러졌다.

“이 바보가 깨어나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는걸?”

아라는 겁에 질린 채 계속 뒤로 기어서 도망치려 했으나 그때 까지 불과 일이 미터도 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 아냐. 오빠는………………”

“꼬마야, 이제 네 역할도 끝이야. 의외의 변수가 있었지만 오 히려 잘된 것 같군. 이제 이 꼬마는 앞으로 분명 나를 너로 알 테 니까. 하지만 여기에 있는 이 계집애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지. 그렇지? 물론 너도 그렇고.”

오키에는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병을 치켜들었다. 뭔가 시큼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그것은 강한 황산이었지 만 나이도 어린데다가 얼이 빠진 아라는 애당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예쁜 아이인데, 미안하군.”

오키에, 아니 묘렌이 황산병을 아라에게 던지려고 할 찰나였다. 꺄아악 하는 비명 소리가 울리면서 뭔가가 빠른 속도로 그녀 를 향해 다가왔다. 오키에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들고 있던 병을 떨어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라는 뭐가 뭔지 분간 할 수조차 없었지만 갑자기 시커먼 것이 날아오자 기겁을 하고 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오키에도 아라와 똑같이 양손으로 얼 굴을 감싸고 비명을 질렀다.

날아 들어온 시커먼 것은 땅바닥에 그대로 털썩 굴러 떨어졌 다. 사제복 자락을 월향검에 꿴 박 신부였다. 월향검이 박 신부 의 몸을 끌고 비밀 벽 아래의 계단을 통과하여 날아온 것이었다. 박 신부의 손에는 작은 앰플 병이 꼭 쥐어져 있었다. 둘은 박 신 부를 보자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아라는 참혹한 박 신부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오키에는 분명 죽었다고 생각한 박 신부가 다시 살아난 데 대해 놀라서 똑같이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월향 검은 솟구치면서 둘을 위협하듯 날카로운 빛을 내며 허공을 맴 돌았다. 박 신부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둘이 다 있었구나. 정말 비슷해.”

박신부는 매우 힘겨운 듯 손을 움직여서 들고 있던 앰플 병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박 신부가 던진 앰플 병이 아라의 앞에 떨어 졌다.

아라가 박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자 박신부가 조용히 말했다.

“자, 주워 보렴. 어서.”

아라는 좀 망설이다가 얼른 그 앰플 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오키에의 얼굴은 마치 무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질려 있었 다. 박 신부는 다시 힘들게 얼굴에 웃음을 띠며 아라에게 말했다. 

“잘했다. 그럼 이번엔 그걸 저 애에게 주렴.”

아라가 머뭇거리다가 그 앰플 병을 오키에에게 던져 주자 오 키에는 반사적으로 그 앰플 병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앰플 병 이 저절로 퍽 하고 터지면서 오키에의 손에서 노란 불길이 화르 륵 일어났다.

“으아아악!”

오키에는 비명을 지르며 손에 묻은 것을 털어 내려고 했지만 노란 불길은 점점 더 크게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박 신부는 힘 겹게 다가가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오키에를 꼭 껴안았다. 오키에 는 박 신부의 품 안에서 발작하듯 날뛰며 소리를 질러 댔지만, 어느덧 박 신부의 몸 전체에서 푸른 성령의 불꽃이 일어나 박신 부와 오키에를 둘 다 감싸고는 눈부시게 환한 빛을 냈다. 그 빛 가운데에서 박 신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함의 기운은 이제 산 자의 몸을 떠나라.”

갑자기 휘오오오 하는 회오리바람이 일면서 사방에 미친 듯한 바람이 몰아쳤고, 아라는 비명을 지르며 쇠기둥을 붙잡았다. 방 안에 매달려 있던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그 회오리바람에 마구 부서졌다. 그러나 박 신부의 몸을 감싸고 있는 푸른빛은 더욱더 빛을 발했다. 그러다 문득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푸른빛이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환해지는 것이었다. 아라는 소리를 지 르면서 얼떨결에 잡고 있던 쇠기둥에서 손을 떼어 양손으로 얼 굴을 가렸다.

푸른빛은 점점 커지면서 또 한 번의 굉음과 섬광을 발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어디선가 여자의 비명 소리가 마치 무 한히 여운을 끌 것처럼 들려오더니 저 깊은 땅속으로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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