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신부는 가톨릭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박 신부를 사 제나 신부라고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박 신부 자신도 확신 할 수 없었다. 박 신부는 파문당한 것이 분명했지만 사제복을 벗 어 던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암이나 준후도 박 신부 가 사제복 차림이 아닌, 좀 심하게 말하면 반바지 같은 걸 입고 나돌아 다닌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제 복만 보고 그를 신부님이라고 불러 주었고, 박 신부 자신도 그런 호칭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파문당한 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박 신부는 어쩌면 자신만 의 신앙관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근래 젊은 신부들 은 다른 종교도 연구하고, ‘신은 모든 곳에 존재하신다’는 포괄 적이고 개방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도 많이 늘었다고 알고 있었다. 박 신부는 전혀 다른 믿음 체계를 가진 사람들과 한데 어울 려 지내다 보니 요즘 들어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었 다. 포용적인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정 통 교단의 시각에서 보면 이단시될수도 있었다.
일본에서의 일로 인해 박 신부는 꽤 긴 시간 동안 입원해 있 었다. 중상을 입은 왼쪽 다리는 결국 완치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다리를 절게 될 것이고, 당분간은 계속 휠체어 신세를 지며 물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현암은 경악하여 얼굴이 창 백해졌고 준후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승희는 그 자리에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있었지만 화실에서 밤새 울었는지 다음 날 병원 에 왔을 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박 신부는 담담 했다.
“나는 그분을 뵈었다. 더 이상 내가 바랄 것은 없어. 거동이 좀 불편해졌지만 마음은 더 편해졌단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 것 같고.’
늘 그렇듯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박 신부가 한 말이었 다. 원래 남에게 위압감을 줄 정도로 큰 체구에다가 나이에 비해 활동적이던 박 신부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사색에 잠기는 시 간이 많아졌다. 농담도 늘고 유머 감각도 풍부해진 듯 보였지만 대체로 말수가 적어진 편이었다.
다른 퇴마사들도 점차 평정을 되찾았다. 일본에서 얻은 「해동감결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도 큰 문제였고, 박 신부가 들은 그 계시의 내용을 판단하는 것도 비록 짧은 말이었지만 간단한 일은 아니어서 다들 마음이 분주해졌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몰 랐다. 현암은 수련을 한다고 휭 하니 사라졌고, 준후도 『해동감 결을 해석한다고 어딘가에 틀어박혀 버렸다.
혼자 남은 승희는 적적하기도 해서 연희나 박 신부를 자주 찾 았다. 가끔씩 날씨가 맑고 화창한 날이면 박 신부의 휠체어를 밀 고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박 신부가 밖에 나가고 싶어 한다기 보다는 무료해진 승희가 박 신부를 끌고 나가는 쪽이었다. 그날 도 그랬다. 날씨는 가을 하늘이 보배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화 창했고, 바람도 서늘한 것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좋은 날씨였다. 승희는 기분이 좋은지 깔깔거리면서 박 신부의 휠체어를 밀며 장난을 치기도 하고 여기저기 길거리를 마음대로 누비고 다녔 다. 승희는 아버지인 현웅 화백이 죽고 난 후 박 신부를 마치 아 버지처럼 따랐고, 박 신부도 승희를 친딸처럼 귀여워해 주었다. 승희가 장난을 치자 박 신부는 너무 심하게 장난치지 말라고 말 하면서도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장난도 치다 보니 어느덧 꽤 먼 곳까 지 오게 되었다. 무슨 재개발 지구 같은 곳인지 인적도 없고 건 물들도 낡아 폐허 직전이었지만 승희는 기분이 좋아 그런 것에 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커다란 소리가 박 신부와 승희의 귀에 들려왔다.
“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만이 영생을 얻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영원히 지옥 불에…………….”
그 소리를 듣고 승희는 피식 웃었지만 곧 오랜만의 오붓한 분 위기를 깬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샐쭉하게 올라간 눈매가 더 위로 치솟자 박 신부가 웃으며 말했 다.
“신경 쓸 것 없다.”
“신부님, 저런 소리 요즘 들어 너무 많이 들리는 것 같지 않나요?”
박신부는 승희의 말에 머쓱하게 웃고 말았다.
“저 말대로면 아이고, 신부님만 천국에 가고 현암군이나 준후 는 지옥 불에 떨어져 훨훨 타겠네. 뜨겁겠다. 후후후.”
“하하하.”
“저는 어떻게 될까요? 신은 야훼뿐이라고 하는데……………. 제 몸 속에 들어 있는 건 도대체 뭐죠?”
말을 끝맺는 승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박 신부가 승희를 타 이르듯이 말했다.
“너무 괘념하지 마라.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했단다. 신 실한 마음을 가진다면 다 신께로 통하는 것이란다.”
박 신부는 기도를 올릴 때에는 야훼라고 불렀지만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특히 다른 종교인들과 이야기 할 때는 야훼라는 말 대신 꼭 신이라는 호칭을 썼다. 승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믿는 바가 다르잖아요.”
박신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려무나. 원래 신은 하나이신데, 그를 일컬어 우리나라에서는 환인이라 했고 유대인들은 야훼라 불렀으며 힌 두교에서는 시바나 비슈누, 도교에서는 천존이나 상제라고 부르 면서 믿고 섬겼다고 말이야.”
“그렇지만 다들 다르잖아요. 교리도 다르고 격식이나 상상하 는 신의 모습도 다르고.”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지. 나라와 민족마다 언어나 풍습이 다 른 것처럼 종교 역시 그런 것이지. 신께서 인간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해도 인간이 신을 파악하는 것은 장님이 코 끼리 더듬기밖에 더 되겠니?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가 뱀 같다 고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 같다고도 하고.”
“그 이야기는 저도 알아요. 근데 방금 하신 말, 신부님의 생각이세요?”
“하하하. 그건 아니다. 옛날에 어떤 힌두교의 성자가 했던 말씀이란다.”
“그러면 지옥은요?”
“글쎄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이 곧 지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분명 지옥이 있다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나요? 또 불경에도 그런 내용이 있고.”
“모든 성자들은 비유로 가르침을 주셨다. 예수께서 이르시 지 않았더냐? 성경의 ‘내가 지금까지는 이 모든 것을 비유로 들 려주었지만 이제 아버지에 관하여 비유를 쓰지 않고 명백히 일 러줄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본다면 그때까지의 예수님 의 말씀은 모두 비유로 되어 있다고 보아야겠지. 그런 면에서 지 옥도 하나의 비유라는 생각이 든다. 왜 다른 모든 것은 비유로 해석하면서 그 장만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그다지 애를 쓰 는지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어. 이젠 대중들이 그걸로 겁을 먹을 리도 없는데…”
“죄인이 지옥에서 심판받는다는 것은 그렇다 해도 믿음을 가 진자가 영생을 얻는다는 말은요?”
박신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라자로를 살리실 때에 마르타에게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 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니? 예수님이 이미 죽은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 유다 로 돌아오셨을 때에도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고 하셨다. 믿음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것이란다. 살아서 믿음을 진정으로 얻은 자는 글자 그대로 몸은 단지 껍데기일 뿐이고 순환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생사의 갈림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단다.”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 아닌가요?”
“궁극으로 가면 한 가지로 통하는 법이겠지.”
“어? 그건 또 도교의 사상이 아닌가요?”
“하하하. 말꼬투리 잡지 마렴. 옳고 바른 것을 믿어야지. 예 수께서도 격식에만 얽매이는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셨단 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 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 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 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 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신부님의 입장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심한거 아닌가요?”
승희가 배시시 웃으면서 말하자 박 신부는 웃으며 받아넘겼다.
“그러니 교단에서 잘렸지. 하하하.”
대화에 열중하던 승희는 불현듯 주위의 분위기가 묘해진 것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보니 일단의 사람들이 승희와 박 신부를 노 려보고 있었다. 그들 손에는 말세가 가까워졌으니 예수를 믿으 라는 커다란 피켓과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고, 그들 중간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하나 보였다. 보아하니 그들은 무슨 종교 행진을 하는 것 같은데, 승희와 박 신부가 대열을 막고 있는 것도 모르고 둘만의 이야기에 취해 큰 소리로 떠들어 댄 모양이었다. 그 들을 본 승희가 머쓱해져서 박 신부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아이쿠, 우리가 실수한 것 같아요. 저 가운데 사람이 목사인 모양인데 우리가 고의적으로 그들을 가로막고 비웃었다고 생각 하는데요.”
“투시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에고고, 알겠어요. 버릇이 되어서 그만.”
“음, 길거리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으니 물러서도록 하자.”
박신부가 승희에게 눈짓을 하면서 물러서려는데, 두어 명의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자들은 뭐야?”
“저 앉은뱅이는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신부 나부랭이인 것 같은데?”
원래 일부 개신교의 종파 중에서 교황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 고 하기도 하고, 또 가톨릭의 일각에서 신교의 창시자인 루터를 그렇게 칭하기도 해서 서로 반목이 심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 지만, 그런 험담은 이단적인 말로 취급되어 피차 언급을 하지 않 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적그리스도를 평생의 적으로 여기는 박 신부로서는 그 말에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단 종파의 일종인 모양이구나. 박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격이 괄괄한 승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나 말하는거야?”
“어, 저 여자 당돌하네?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내가 당돌하든 말든 당신이 보태 준 것 있어? 그런 험담을 먼 저 하니까 그러는 거지.”
“승희야!”
박신부가 제지하려는 듯 조용히 말했지만 승희도 화가 난 듯했다.
“교회 나가서 피켓 들고 다닌다고 죄가 없어지는 줄 아나? 평 소에 착한 행동을 해야지!”
“뭐라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원 참 기가 막혀서 학생들 용돈 뜯어서 헌금 바치면 천당 갈것 같니?”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의 속을 들여다보고 한 말이었다. 남자 는 찔끔한 듯 머뭇거리더니 얼굴이 벌게지면서 화를 냈다.
“어라. 이 여자가 사람 잡네!”
“누가 사람 잡는다는 거야? 행실을 똑바로 가져!”
승희는 고소하다며 박 신부의 휠체어를 밀고 돌아서려 했으나 그 남자가 뒤에서 욕설을 하는 것을 듣고는 몸을 돌려 말했다.
“입 한번 곱구나. 영생을 얻으려면 네 입부터 좀 잘 다스려라. 내가 꿰매 주리?”
박 신부는 안절부절못했다. 원래 화를 잘 내고 성격이 괄괄 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시비를 걸 승희가 아니었다. 승희 자신 이 욕을 먹은 것이라면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불행한 처지에 빠진 박 신부-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만에게 욕을 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 신부가 옆에 있으니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느 나는 자만심도 조금은 있었다.
남자는 승희의 말을 듣자마자 다짜고짜로 피켓을 들어 승희를 내리치려고 했다. 다른 일행과 목사가 놀라서 그를 막으려고 했 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승희가 몸을 움찔하면서 그 남자의 손목 을 잡아 막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승희 는 아예 남자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러자 남자가 비명을 지 르더니 몸을 배배 틀면서 저만치 나가떨어져 버렸다. 승희는 남 자가 기절한 것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상황 은 아주 나쁘게 돌아갔다.
“악마다!”
“사탄의 힘이다!”
박 신부는 일이 크게 벌어졌구나 싶었다. 저들 눈에는 승희가 보여 준 힘이 사탄이 준 것이라고 비칠 수도 있었다. 승희도 당 황했는지 안색이 어두워져서 박 신부에게 바싹 다가섰다. 박 신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봉변을 당하게 될 판이었다. 이곳은 변두리 지역인데 다가 도움을 청할 만한 인적도 없는 곳이었다.
박신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힘을 조금만 쓰면 저들을 쫓아내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악령이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저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설마하니 별일이야 있으려구.’
박 신부는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박 신부와 승희를 빙 둘러싸고 곱지 않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모두 십여 명 남짓이나 되었지만 방금 한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는 감히 가까이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들 중 한 사람이 무리의 지도자인 듯 검은 옷을 입은 목사 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사님, 권능을 보여 주세요.”
“저들은 마귀에 들린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기도를 올리셔서 저들을 구원해 주세요.”
승희는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들을 보고 마귀에 들린 사람이라니. 승희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박 신부는 손을 꽉 잡아 제지했다. 조금 있다가 뒤로 물러서 있던 목사가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 다들 조용히 합시다. 이들은 가련한 어린 양들입니다. 마 귀에 들린 자들이 분명하니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모 두 기도합시다.”
목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들은 박 신부와 승희를 둘러싼 채 무릎을 꿇고 앉더니 중얼중얼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승희는 기가 막혀서 얼굴빛이 다 질릴 지경이었다. 박 신부가 말렸지만 승희는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이죠?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요! 분명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더 말을 하려다가 승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저들은 분명 박 신부와 자기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믿을 것이었다. 박 신부가 승희를 타이르듯 말했다.
“그만둬라, 승희야.”
“그렇지만 이게 뭐예요?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 가지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나눈 이 야기인데 그걸 가지고 대뜸 적그리스도라며 덤비질 않나. 도대 체 우릴 뭘로 취급하는 거죠? 이게 옳은 건가요?”
승희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치자 목사가 기도를 올리다 말고 말했다.
“당신들은 사악한 힘을 사용하고 있소. 회개하시오.”
“우린 회개할 것이 없어요! 마귀 들린 것도 아니고요!”
“주여, 자비를….!”
목사는 허공을 올려다보고 탄식하더니 엄숙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법이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해도 사악한 마음을 지니면 사악한 힘에 물이 들게 마련입니다.”
“원참!”
승희는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 들이 그러한 악령들을 전문적으로 잡고 다니는 퇴마사라는 사실 을 밝힐 수도 없고, 목사가 다시 말했다.
“내가 당신의 사악한 힘을 없애 주겠소. 자, 마음을 편히 가지 시오.”
“와! 목사님이 권능을 발휘하신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신도들은 목사가 말문을 떼자마자 마치 유명 연예인이 나타난 것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기도를 한다더 니 정말 기도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희는 목사의 권능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목사가 이끌고 있는 신도들의 꼴을 보건대 속임수 같은 걸 쓰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어디 마음대로 해 보시구려.”
승희가 코웃음을 치자 목사는 얼굴을 굳히더니 곧 나직하게 기도문 같은 것을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승희가 목사를 비웃는 것과는 정반대로 박 신부의 얼굴에는 놀라는 기색이 엿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승희는 의아했다.
목사는 눈을 꼭 감은 채 비지땀을 흘리면서 힘을 모으고 있었 다. 두 사람의 주위를 둘러싼 신도들은 그러한 목사의 모습을 기 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목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 다. 승희도 안색이 조금 굳어졌다. 이젠 제법 바람이 불어 쌀쌀 한 날씨인데도 승희의 이마에서는 한 방울 한 방울 땀이 맺혔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박 신부도 눈을 감고 조그맣게 입술만 들썩거리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쥔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목사가 비틀거렸다. 승희는 감 고 있던 눈을 뜨고는 주저하는 듯하더니 뭔가 결심했는지 빠르 게 말했다.
“아, 이런!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승희의 목소리는 정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말투가 아니라, 마치 삼류 연극배우가 대사를 더듬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떠 들어 댔다. 그들이 기대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승희의 말투 가 이상한 것 같은 데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목사님의 권능이 발동되었다고, 또다시 이적을 일으켰다고 난리들이었다. 그 러나 정작 당사자인 목사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입까지 벌린 채 계속 땀을 흘렸다. 잠시 후 박 신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목사 는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위엄을 가지려고 애를 썼지만 어 딘지 어눌해 보였다.
“이제 주, 주의 권능을 믿으시오. 그리고 스스로의 행동에 대 해 속죄를…………….”
목사의 말소리는 주변을 둘러싼 신도들의 함성에 휘말려 잘 들리지도 않았다. 승희는 얼굴빛이 해쓱해진 채 입술을 꼭 깨물 고 가만히 서 있었고, 박 신부는 목사를 바라보았다. 목사는 거 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박신부가 눈짓을 하자 승희는 아무 말 없이 박 신부의 휠체어 를 밀고 서서히 신도들 사이를 뚫고 나왔다. 신도들은 ‘아멘!’, ‘할렐루야!’ 등을 외치면서 목사에게 환호하느라 아무도 그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러나 목사는 망연한 눈빛으로 그들이 가는 방향을 계속 뒤좇았다.
한참을 가서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박 신부가 승희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들은 어느덧 철거 지역을 벗어나 번화한 곳까지 나와 있었다.
“어디 들어가서 좀 쉬지 않겠니?”
승희는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듯 박 신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입술을 꽉 깨문 채였다. 두 사람은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인데다 변두리여서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박 신부가 유쾌하게 말했다.
“뭐 마시겠니. 승희야?”
승희가 박 신부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지요. 신부님? 그 목사는………….”
“모든 게 다 잘되지 않았니?”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저는 들을 수 있었어요. 난데없이 들리던 어느 영의 괴이한 비명 소리를.”
“그만, 그만.”
“아니에요. 전 정말 화가 났단 말이에요. 왜 그런 무례한 광신 도들에게 제가 고개를 숙여야 했나요? 제가 뭘 어쨌기에? 그리 고 이상한 건 제가 아니라 목사였어요.”
“안다. 알아. 그러니 내가 그렇게 부탁한 것 아니겠니? 내 말 대로 따라주어서 정말 고맙다. 승희야.”
“신부님 말씀이니 안 들을 순 없지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만 들리게 말씀하실 수 있었나요? 세크메트의 눈도 쓰지 않고…….”
“글쎄, 나도 모르게 되더구나. 근데 정말 뭐 안 마실 거니?”
“일본에서 그 일이 있은 후부터요?”
박신부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고 목마르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승희는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박 신부가 웃기만 하니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승희는 그 목사가 이상한 힘으로 자신의 몸에 충격을 주려 한 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 무방비 상태로 있던 승희의 몸에 약간 의 통증이 왔었다. 신도들이 권능이니 이적이니 하는 것도 그리 허황된 일만은 아닌 듯싶었다. 그러나 현암이나 박 신부, 준후 같지는 않지만 승희의 몸에도 신력이 있었다. 오히려 순수한 영 력의 에너지는 다른 퇴마사들보다 세었다. 승희가 조금 힘을 주 자 그 목사의 힘은 승희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내친김에 승희는 목사에게 힘을 몰아서 아예 혼쭐을 내 주려고 작정했다. 그런데 그때 박 신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박 신부 가 예전의 코제트처럼 남의 마음속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이 또렷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었고 대강의 느낌만 전해 온 것이었지만 박 신부의 생각을 읽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박 신부는 공연히 충격을 주지 말고, 조금만 그렇게 버티고 있 으라고 했다. 그래서 승희는 가만히 목사의 힘을 버텨 낼 정도로 만 힘을 주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영적인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길게 꼬리를 끌고 들려왔다. 그 이후 목사가 보내는 힘은 사라져 버렸다. 그 바람에 목사는 승희의 힘에 밀려 약간 주춤거렸다.
문제는 그다음에 들려온 박 신부의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마치 지금에야 정신이 든 것처럼 말해 주지 않겠니, 승희야?
승희는 목사에게 사기꾼 같은 짓거리 하지 말라며 톡톡히 망 신을 줄 참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울려온 박 신부의 목소리 가 온화하면서도 어딘가 위엄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박 신부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나중에 물어보아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박 신부가 시치미를 떼는 것을 보자 승희는 은근슬쩍 화가 났고 박 신부가 얄밉기까지 했다. 승 희는 카운터로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가지고 와 앞에 내려 놓았다. 박 신부 앞에는 냉수만 한 잔 갖다 놓았다.
“어, 난 왜 안주지?”
“핏! 말 안 해 주시면 안 드릴 거예요.”
“허허허, 이런 그냥 넘어가자꾸나. 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사람을 망신스럽게 해 놓으시구선.”
박신부는 그제야 겸연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 목사도 정신을 차렸을 테니 그리 억울해할 일도 아니지.”
“네? 무슨 소리죠?”
“사실 그 목사는 악령에 빙의되어 있었단다.”
승희는 놀란 나머지 크게 퍼낸 아이스크림을 테이블 위에 떨어뜨려 버렸다.
“뭐라구요? 그럼 아까 들린 비명 소리는?”
“그 목사……….”
“아무리 그래도 성직자인데.”
“성직자도 인간이야. 아니, 오히려 성직자일수록 유혹이 더 크고 위험한지도 모르지.”
박 신부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나, 차는 안 줄거니?”
“아, 저런 뭘 드시겠어요?”
“코코아나 한 잔 마셨으면 좋겠구나. 날씨가 아까보다는 많이 차가워진 것 같아, 그렇지?”
승희는 어느새 아까의 일은 잊어버린 듯 가볍게 카운터로 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가 헉헉거리면서 문을 열고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목사였다. 뒤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없는 걸로 보아 혼자서 이곳까지 뛰어온 모양이었다. 승희는 조금 흠 칫했으나 아까의 감정은 잊기로 했던 터라 한번 쓱 웃어 보이고 는 코코아를 받아 테이블로 돌아왔다. 목사는 한참 헐떡거리며 승희와 박 신부를 바라보더니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승희는 또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박 신부에게 눈짓을 보냈다. 박 신부는 뒤를 돌아 목사를 보더니 그냥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목사가 박신부 곁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부님.”
박 신부는 살짝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사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목사는 어두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아까 일은 저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이서 어떻게 하신 것인지요?”
“저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분명 제 마음속에 누군가의, 아니 신부님의 목소리 가 울려왔습니다. 계시를 받을 때처럼.”
“그냥 미안하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힘에 의지하 지 말고 진정한 믿음으로 신도들을 이끄시라고요. 주제넘은 말 이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자(聖者)이십니 까? 저도 신부님의 뒤를 따라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싶습니다.” 박 신부는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준엄하게 말 했다.
“믿음의 길은 그리 쉽게 저버리는 게 아닙니다. 목사님을 믿는 신도들은 어쩌시려고요?”
“그들도 개종시키겠습니다. 그러니 …………….”
“신앙심이란 장사처럼 흥정하고 계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길을 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은..”
“제가 목사님께 무슨 옳은 길을 보여 드렸겠습니까? 그냥 눈 앞의 봉변을 모면하고자 했던 일이었으니 용서해 주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막무가내였다. 어떻게 그런 힘을 내는 것이냐 며 한참을 졸라 대자 박 신부는 기분이 상한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힘을 얻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모세가 출애굽할 때에 애굽의 술객들도 어느 정도의 술수는 부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 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단지 힘에 그칠 뿐이고 진실된 마음이 없 었기에 산산이 깨어져 버린 것 아니겠습니까?”
“권능을 보여 주지 않으면 신도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권능만 보고 따른다면 진정한 신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이적을 보이셔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 하시지 않았습니까?”
“목사님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싶으신 것입니까?”
목사는 깜짝 놀랐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말은 불경스러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거리낌이 없었다.
“목사님도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신부님은 제 힘을 거두어 갔습니다. 저는 포교를 하려고 했지 만 신도들을 믿고 따르게 할 권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했습니다. 몇십 일 동안 기도만 올렸습니다. 그리고 방언을 하 게 되었고, 마침내는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는 힘을 얻었습니 다. 저는 그때 신부님이 하신 것처럼 마음속에서 울려오는 소리 를 똑똑히 들었습니다. 너에게 힘이 생겼느니라 하는 말씀을 말 입니다.”
목사는 황홀경에 빠진 듯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 목사를 보고 옆에 있던 승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스케줄에 맞추어서 단체로 보내는 기도원에서 몇십 일 동안 기도를 올렸나요? 기도는 정성에 달린 것이지 오래 했다고 소원 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텐데요?”
승희는 목사가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 생각하는 순간을 잠시 투시했던 것이다. 정성스러운 기도는 아니었다. 한 사람이 방언 을 하고 소리를 치면 다른 사람들도 연달아 그렇게 한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교 행위라기보다는 집단최면과 흡사한 경 우가 더 많았다. 목사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기도원에서의 그의 기 도도 그리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불편함과 고통을 참으면서 어떻게든 예정했던 기간을 기도로 채워야 한다는 아집만이 목사의 마음속에 꽉 차 있었다. 이야기 듣기로 박 신부는 날짜로 보 아서는 겨우 구 일간 기도를 올리고 지금과 같은 큰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때의 박 신부는 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고 자신을 돌본다거나 하는 잡념이 끼어든 적이 없었 다. 석가모니도 칠 년간의 고행을 했다지만 실제로는 칠 일 정도 의 수련만으로 성불했다고 한다. 기간으로 따진다면 힌두교에서 는 아직도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고행을 오십 년, 육십 년 동안 해 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목사는 승희의 말을 듣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안색이 조금 변했다. 박 신부는 승희를 바라보았다. 박 신부의 시선을 받자 승희는 공연히 자신이 나선 것 같아 찔끔했다.
“목사님.”
박신부가 나직한 소리로 말했다.
“예.”
“목사님이 얻었던 힘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제 기도의 결과로 내려오신 성령의 힘이었겠지요.”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목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무, 무슨 말씀을…….”
“한 남자가 있었소.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구원해 보겠다는 망상을 가진. 그 사람은 산속에 틀어박혀서 도를 닦았지요. 아무 런 준비도 지식도 없이 무턱대고 말입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거지나 원시인처럼 생활했지만 아무것도 얻은 게 없었습니다. 그 래서 그 사람은……”
“그게 저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끝까지 들으십시오. 그래서 그 사람은 마침내 자신의 몸이 쇠 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이후에야 산꼭대기에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세상에 그런 힘은 없다고. 신도 없고 영혼도 없으며 모든 것이 속임수고 사기일 뿐이라고요. 그러고는 자신의 평생 을 버리게 한 그러한 힘들, 아니 그보다는 자신에게 그러한 힘의 존재를 믿고 따르게 한 세상 사람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한없 이 저주하고 원망하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니, 왜 제게 그런 말씀을…………….”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 목소리를 듣고, 당신에게 힘을 주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영혼이지요.”
목사는 펄쩍 뛰다시피 했다. 손님이 없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커피숍의 주인이 놀라서 눈을 번쩍 뜰 정도였다. 목사가 고개를 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어떻게 신성한 기도 의 중간에 그런 불측한 것이, 아니 어떻게 그런 불측한 영이 성 스러운 힘을 낼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나오지요? 예수를 비방한 자들이 예수를 일컬어 대 악마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는 것이라고. 그러나 당신의 경우는 마귀가 마귀를 쫓은 것이 아니라 영이 다른 영을 밀어낸 것뿐이지요. 성령의 힘이 아닌 평생 동안의 원망과 한과 조 소를 힘으로 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평생의 한을 당신을 이용해 서 풀려고 말입니다.”
박 신부의 차근차근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목사는 울 듯한 얼 굴로 계속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어요! 이제 보니 당신이야말로………………”
“성직은 신성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만큼 지켜 나가기 가 더 어렵고 시련과 유혹도 많은 것입니다. 성직자일수록 지옥 으로 가는 자가 많으며, 악마들도 성직자들을 더 노린다는 서양 의 옛말도 있습니다. 성직자 하나가 타락하면, 그를 믿는 수백 명의 사람들도 다 같이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아닙니다. 나는 악행을 행한 적이 없습니다! 유혹에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까?”
“아니, 성직을 맡은 이후에는……………. 사소한 일들은 모두 참회 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죄를 사하여 줄 권세가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 그 리스도와 죄를 지은 본인뿐입니다.”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자신의 믿음으로 간구하고 기도하면……………”
“인간의 힘으로 죄를 사하는 길은 그 죄를 지은 자의 뉘우침밖에는 없습니다.”
목사는 화를 벌컥 냈다.
“당신은 역시…………. 당신을 잠시나마 믿고 의지하려 했던 내 태도가 부끄럽소. 당신의 말은 모두가 억설이고 이단이오!”
박신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무엇이 이단입니까?”
“가르침을 부정하고 괴팍한 이론으로 교단을 흔드는 것이야말 로………….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이 가톨릭의 교리요?”
“나는 정식 신부가 아닙니다. 교단에서는 파문당했습니다.”
“그것 보시오. 당신의 교단에서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논리를 왜 나에게………… 아니, 그러고 보니 당신이 발휘한 힘이야말로 사 탄에게서 나온 것인가 보군!”
박신부는 답답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개신교 측에서는 가톨릭을 이단시할지도 모르지요. 가 톨릭도 개신교를 그렇게 보는 것 같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종 파는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가장 근원이 되는 신앙 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신성 에 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릅니다만, 실상 사람들이 문제시하 는 것은 신성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신성을 어떻게 받아들이 느냐에 대한 방법적인 문제가 아니던가요? 물론 저는 파문당한 가짜 신부니까 이렇게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아니 어쩌면 이해가 부족한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따진다면 가톨릭도 신을 믿고 선하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개신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박 신부는 갈증이 나는 듯 냉 수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근원적인 신앙의 방법의 차이를 정통성의 문제로 보고 너무 따진 나머지 서로를 악마와 같은 집단으로 몰 아붙이는 경향을 자주 보게 됩니다. 종교의 차이를 떠나 선행이 나 자비롭고 사랑에 입각한 행동까지도 자기네 종파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악한 목적에서 비롯된 기만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합 니다. 상대의 선은 기만이고, 자신의 악은 어쩔 수 없는 행동이 라고 생각해도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까? 오 히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왜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왜 보지 못합 니까? 당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 교리에 위배됩니다.”
“교리가 대체 뭡니까? 또 그것은 왜 있는 것입니까? 신을 섬 기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이 교리 아닙니까? 아 니, 신을 섬기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교리보다 우선이 아니겠습 니까? 예를 들어 봅시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아예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도 고결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 때에 어떤 판결을 받게 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선인일 지라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이렇게 썼지요. 예수 이전에 태어난 현인 들과 선인들은 지옥의 입구에서 심판받지 않고 고통도 없고 안 식도 없는 세월을 영원히 누리고 지낸다고요. 목사님과 같은 분 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해결책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 게 보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영접한 자는 그 순간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 은 죄를 지은 자가 죽고 난 이후에 지옥 불에 떨어져서 이글이글 타오를 것이라고 믿습니까? 정말 믿습니까?”
“말씀은 비유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얻은 자는 생 이 실은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이익이나 탐욕을 위 해 사는 것이 사실은 지옥도로 묘사되는 무서운 고통이라는 것 을 깨달은 자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자유로워집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산자 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렇다면 죽는 순간까지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영생은 아닐까요? 깨달음을 얻고 자 유로워지면 ………… 그때가 되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경지에 접어드는 것인지도 모르고, 좋은 환경에서 다시 태어나 고생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며, 엘리시움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사람이 믿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내 항상 평안해진다면 그것이 곧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이교 도들은 모두가…”
“예수께서 로마인 백인대장의 종을 치료해 주실 때에 말하셨 습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저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고 말 입니다. 그 로마인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진정으로 인정 하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였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 이 병을 고칠 능력이 정말로 있다는 것은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런 믿음이라도 믿음이 굳기만 하면 구원받 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억설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분명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것입니다.”
박 신부는 열성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을 먹지도 않고 수저로 휘젓기만 하던 승희는 두 사 람의 대화가 따분하기만 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계속 저를 신부라고 몰아붙 이시는데, 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드는 사람입니다. 그렇 다면 저는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이교도들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 까? 역시 이단입니까?”
“가톨릭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이 다릅니 다. 그 차이는 신부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믿음의 태도나 의식이나 경배의 방법 같은 것을 말씀하 시는 것이겠지요?”
“의식이나 경배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 므로 그런 것을 잘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의식이나 경배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 예수께서는 모든 세속 적인 교리들을 일소에 붙이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말씀 하신 것 이외에 어떤 격식이나 의례를 만드셨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습니 다.”
“경배를 드리고 의식을 진행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 지 않고서도 하느님과의 대화는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세상에 는 성령들이 있다고 가르침이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에 관해 자주 말씀하 셨고, 사람의 아들을 거역한 자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슬러 모독한 자만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성령이 란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이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나 양심이라 여깁니다. 애당초 야훼께서는 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을 만드 셨다고 했습니다. 신께서는 우리를 이웃과 다투지 말고 화목하 게 지내라고 가르치셨고, 낳고 자라고 번성하며 가득하라고 하 셨습니다. 악한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항상 참회하며 스스 로 느끼고 생각하여 바르게 살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을 영접한다는 것이 꼭 개신교나 가톨릭을 통해서만 온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의 해석을 단언하는 것은 이단입니다!”
박신부는 웃었다.
“이단이라는 소리는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이단은 무엇이겠습니까? 신께서는 인간을 존중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러 한신의 의지나 성령, 즉 자신의 양심보다도 자신들의 이론이나 스스로 판 굴레에 경도된 나머지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거나, 그 럴 여지가 있는 신앙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광신일 것입니다. 그 리고 또 하나, 섬기는 대상이 신이 아니라 신을 표방한 인간에게 로 향해질 때, 그 신앙은 더 이상 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인간 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벗어나는 존재가 분명 계 시다는 것을 마음에 두며, 인간으로서 올바른 일과 행동을 하면서 이웃을 내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교도들 도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들이 가진 신앙도 똑같이 신을 경배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달았다면, 그리고 종교가 다른 정치적인 목적들과 유리될 수만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이 단 문제로 피로 점철되었던 많은 종교 전쟁이나 학살 등은 없었 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간이 신에게 지은 가장 큰 죄악 중의 하나는 신을 경배해야 할 신앙을 인간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 들어서 신을 팔아먹은 행동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입 니다.”
“당신은 당신의 말을 스스로 증거하기 위해 성스러운 말씀들 을 멋대로 인용하고 곡해하였소!”
“성스러운 말씀이 왜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생각하고 사용하 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말씀 자체를 부정한 적은 없 습니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아, 내가 당신을 잘못 보았소. 당신은 악마요!”
박신부는 다시 말했다.
“악마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악령도 아니고 악신도 아닌 악마 말입니다.”
“아마 악마가 있다면 바로 당신일 것이오. 그리고 악마는 신의 적이오!”
“신과 악마가 서로 적대시한다는 바보 같은 생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은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악마는 원래 천상계 의 천사들이었지만 반역하여 하계로 떨어졌다고 하는데, 그 자 체가 모순입니다. 악마가 신에게 반역할 수 있다면 인간도 신에 게 반역할 수가 있는 겁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신은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시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제 생각은 이렇 습니다. 악마는 인간의 적일 뿐이지, 신의 적은 아닙니다. 신은 여전히 냉엄하게 만물을 굽어보시지만 특별히 인간의 편만을 들 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생물이 다 살게 해 주시는 것이지 요. 악마도 신이 만드신 불쌍한 피조물일지도 모릅니다. 파우스 트』에 나오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이런 말이 있지요. 자신 은 악을 행하려 하나, 언제나 결과적으로는 선을 행하고야 마는 존재라고요. 왜 신은 인간들만 평화롭게 살게 두지 않고 그런 악 한 존재들을 만드셨을까요? 선함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구태 여 악을 만드신 것일까요? 정말 신의 모든 의도가 인간 하나만 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십니까? 인간 세계만큼이나 큰 다른 악마 나 악령만의 세계가 있다면 또 어쩌나요? 신께서 그들은 사랑하 지 않으실까요? 어쩌면 신께서는 손가락만을 내미시는데 인간들 은 손까지 다 잡으려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만 으로도 인간은 신에게 계속 크나큰 죄를 짓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말씀을 교묘하게 변조하고 있소. 당신이야말로 크나큰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오. 당장 회개하시오!”
보다못해 승희가 끼어들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르면 무조건 회개하라는 건가요? 말문이 막히면 기도하라고 하고. 하하하.”
승희의 빈정거림에 목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자리에서 일 어났다. 박 신부는 그런 목사를 말리지 않았다. 다만 돌아서는 목사에게 마지막 한마디를 던졌다.
“『마태오복음 12장 43절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박 신부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횡하니 나가 버렸다. 그 런 목사의 뒷모습을 보던 승희는 다 녹아 버린 아이스크림을 수 저로 뱅뱅 저으면서 박 신부를 쳐다보았다. 박 신부의 얼굴은 어 두워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보다.”
승희가 씨익 웃으면서 바깥을 힐끗 보았다.
“그 사람, 진짜 목사도 아니었어요. 목사 행세를 하는 것뿐이 지요. 제가 심심해서 그만……………. 그렇다고 절 탓하지는 마세요.”
박신부는 한숨만 푸욱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박 신 부의 표정이 우울한 것을 보고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말했다.
“우리나라에 정식 신학교 졸업자가 일 년에 얼마나 많이 나오 는데요. 이제 기분 푸세요.”
“그 목사는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 최소한 사리사 욕을 위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어.”
“신부님도 다시 사람들에게 포교를 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나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 일이 따로 있단다.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할 일이……………… 큰일이야. 누가 사람들을 이끌어 나갈 수 있겠니?”
승희가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 박 신부는 혼잣말처럼 중 얼거리기 시작했다.
“과학이 판치는 시대도 이제 끝났어. 최근까지만 해도 사람들 은 미래에 대한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살아왔지만, 이제 점점 미 래는 희망이 아니라 불안으로만 바뀌어 가고 있지. 과학이나 기 술은 행성 개척 같은 꿈을 가져다주는 대신 환경 오염 같은 불안 을 주고, 이성의 발달은 그나마 체계를 유지하던 도덕과 윤리의 틀마저도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다 깨 버리려고 하고 있어. 파 괴, 자유와 진보와 실험이라는 허울 아래에서 행해지는 발전이 없는 파괴, 파괴하는 것이 유일한 재미가 된 세상이지. 더 이상 파 괴할 것이 남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생각하니?”
승희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박 신부는 조그맣 게 중얼거렸다.
“때가 다가오고 있어. 세상에 악의 힘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악은 결코 악으로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러한 악이야말로 더 무 서운 것이지. 인간 스스로가 통제하지 못하는 세상. 그러니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점점 자주 나타나게 되는지도 모르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라 여기고 무시하려고만 든다면 더더욱 그런 존재들은 쉽게 번성하고 힘을 뻗칠 수밖에. 저 목사의 경우 만 해도 그렇다. 악인이 아닌데도 암암리에 악을 행하게 될 수도 있는 거야. 강한 악의 힘일수록 선의 탈을 쓰게 마련이겠지. 주여…….”
승희도 박 신부의 암담해져 가는 기분에 젖어들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께서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하셨지. 자식이 부모와 맞서게 하고 형제와 자매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오셨다고. 그건 내 생각으로는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진 세상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 점점 심해지고 있지. 어 디까지가 한계일까? 혹시 예수가 말씀하신 그때가 이미 온 것은 아닐까?”
“그때란 언제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나타나 자신이 그리 스도라 우기고, 여러 곳에서 난리가 나고, 전쟁 소문이 나돌고, 한민족이 다른 민족을 치고, 기근과 지진이 뒤를 잇고…………. 그 러나 아무도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
승희는 머리가 쭈뼛해졌다. 박 신부가 말한 대로 지금의 세상 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박 신부 는 홀린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때 밤도둑같이 온다. 노아의 홍 수가 나기 직전에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했던 것처 럼. 소돔과 고모라가 불벼락에 탈 때에도 사람들은 축제를 하고 광란의 시간을 보냈던 것처럼. 지금이 설마 그때이랴 모두가 믿 을 때, 그때가 바로 위험한 때이지.”
“말세, 지금이 바로 말세인가요?”
“지금은 혼세지. 그러나 말세가 언제라도 올 수 있게 준비는 되어 있는 셈이야. 아무도 알지 못한다. 깨어 있는 자들 말고는. 깨어 있는 자가 아무리 증거를 대려고 애써도 아무도 믿지 않는 다. 말세는 그렇게 올 거야. 전쟁이나 질병, 천재지변 같은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그런 것이 올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 는……………. 막상 닥치게 되면 이것이 그것이었구나 하고 모두가 알 게끔 되는.”
승희는 몸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엄청난 말을 하고 난 박 신부는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고, 한참 후에 조용히 승희에 게 이렇게 말했다.
“아름답지 않니, 승희야? 아무리 그래도 이 세상은, 우리의 눈 에 보이는 이 세상은 말이다…………….”
“네, 구름도 한 점 없군요.”
승희의 눈에 보인 하늘은 티 없이 맑고 푸르기만 했다. 그러자 박신부가 말했다.
“승희야, 너는 정의가 항상 이긴다고 생각하니?”
승희는 뭐라고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글쎄요. 그건………”
“내 생각으로는 말이다. 정의는 지지 않을 게다. 정의는 결국은 신의 의지이니까.”
“그럴까요?”
“알고보면 악인은 세상에 하나도 없는 법이란다. 결국 정의의 궁극적인 판단은 신이 내리실 수밖에 없지.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자신과 신의 의지에 어떤 차이가 있었나는 돌아보 지 않고 자신은 정의라고 여겼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억울해하 니까 세상에서 정의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정의는 결코 지지 않을 게야. 신의 의지가 정의인 셈이니까. 모든 것은 결국은 신의 의지대로 될 것이다. 하늘은 맑단다. 그리고 항상 저곳에 그대로 있고, 구름이 끼더라도 그것은 아래에서 보는 우 리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야. 구름 너머에는 한결같이 푸르게 빛나는 하늘이 있지. 마치 그것처럼 ・・・・・・ 그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단다. 아니, 그리될 것임을 믿는 것이란다.”
둘은 말없이 한참 동안이나 하늘을 바라보았다. 문득 승희는 박신부의 얼굴이 햇살을 받으면서 점점 환하게 미소를 띠어 가 는 것을 보았다. 자신은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데……. 승희는 슬퍼졌다. 이유 없이 서글픈 생각이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울음이 배인 목소리로 승희가 박 신부에게 물었다.
“정의, 우리는 정의에 의해 행동하는 것일까요? 결국 우리가 옳은 것이고 반드시 이기게 될까요?”
박 신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푸른 하늘을, 언제까지나 그러고 있을 듯이 미소를 머금은 채 바 라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