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12화 – 홍수 9 : 황달지 교수의 노트
황달지 교수의 노트
중국에 도착한 박 신부와 현암 일행이 해야 할 일은 황달지 교 수를 찾는 것과 백호에게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 호텔에 여장 을 풀자마자 현암과 연희, 그리고 최 교수와 아라는 황달지 교수 를 방문하러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보다 는 인도로 가는 비행기가 늦게 도착할 것이었으므로, 박 신부는 일단 백호에게만 연락을 해서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렸다. 백호 의 말로는 티베트 편은 그쪽의 담당 관리와 따로 이야기해야 하 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는 그쪽의 담당자를 직접 만나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 부는 티베트로 가기 위한 수속을 서둘러 밟아야 했으므로 황교수를 만나러 갈 수 없었다.
“흠, 이걸 어쩐다? 황 교수를 꼭 만나고 싶었는데……… 그러면 현암 군.”
“네.”
“잘 부탁하네. 나하고 윌리엄스 신부님은 담당자를 먼저 만나 야 할 것 같으니 자네는 최 교수님 잘 모시고 가주게.”
“염려 마십시오.”
그러는 중에 최 교수가 황 교수에게 전화를 했으나 아무도 받 지 않았다. 최 교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두세 번 더 해 보았지 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집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전화번호를 받아 적은 지 꽤 오래 된 것이어서…………..”
“그렇다면 학교에 알아볼 수는 없을까요?”
최 교수가 시계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시간은 밤 열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은 이미 한밤중인데요? 학교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만 약 전화번호가 바뀐 것이라면 주소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많고 요. 아예 내일 만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박신부는 조금 생각해 보더니 최 교수에게 대답했다.
“글쎄요. 일이 다급하니까 헛걸음질하는 셈이 되더라도 한번 가 봐 주시는 게 어떨까 싶군요. 밤에 불쑥 찾아가는 것이 결례이기는 하겠지만……………”
현암 일행은 밖에 나와 연희의 능숙한 중국어 솜씨에 힘입어 택시를 잡았다. 황 교수가 사는 곳은 북경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외곽 지역의 한 아파트였는데, 택시를 타면 한 삼십 분가량 걸리 는 거리라고 택시 운전사는 말해 주었다.
황 교수가 별일 없다는 이야기를 바이올렛에게서 듣기도 하고 승희의 투시로 확인까지 했지만, 현암은 이상하게 마음이 긴장 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과연 앙그라는 마스터의 영혼과 무슨 관 계가 있을까? 또 앙그라는 어째서 황 교수를 아직까지 해치지 않 았을까?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에메랄드 태블릿과 홍수 에 대한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얽힌 것이며, 무슨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점은 너무도 많았다. 그런 현 암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 교수는 택시 안에서도 계속해 서 자신의 노트를 정리했고, 아라는 연희에게 푹 기댄 채 꾸벅꾸 벅 졸았다.
한참을 지나서 차는 조금 허름해 보이는, 그러나 사람은 무척 많이 사는 곳인 듯 여기저기 쓰레기 더미와 낙서, 그리고 자전거 가 빽빽이 세워진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시간이 꽤 늦어서인 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317동 1423호일세.”
조금 퀴퀴한 냄새가 나는 승강기를 타고 일행은 위로 올라갔다. 아라는 아무래도 졸린 것을 참기 어려운 듯, 꾸벅꾸벅 졸다 시피 하면서 일행을 따라왔다. 십사층에 승강기가 멎자 최 교수 가 앞장서서 1423호를 찾았다. 그러나 초인종을 아무리 눌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복도를 면한 창문을 들여다보 아도 집 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는 듯했다.
“흠! 이거 부재중인 모양이구먼.”
그러나 현암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상한데요?”
“뭐 말인가?”
“아까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미스 바이올렛이 투시를 했었어 요. 황 교수님이 자리에 누워 있다고요. 그리고 승희도 황 교수 님은 몸이 안 좋고 악몽을 꾸고 있다고 했죠. 그런데 몸이 아프 다고 잠자리에 일찌감치 드신 분이 이처럼 늦은 시간에 어딜 나 간단 말이죠?”
최 교수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볼 사이도 없이 현암은 조 심스럽게 아파트 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최 교수와 연희, 아라 를 한쪽으로 물러서게 한 다음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신경을 집중 했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암의 청력이 면 사람이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소리도 느낄 수 있었지만 안에 서는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문이 잠겨 있지 않았던 듯 스르르 열렸다. 최 교수가 그것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짓고 무어라 말하려 하자 현암은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 는 시늉을 해 보였다. 반사적으로 오른손이 왼손에 차고 있던 월 향검으로 갔지만 월향검은 레드의 마검과 일전을 치른 다음이라 힘이 거의 빠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현암은 월향검을 빼 드는 것 을 그만두고 문을 열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현암은 안에 인기척이 나지 않나 다시 한번 주 의 깊게 살피면서 걸음을 옮겼다. 집은 열다섯 평가량 되어 보이 는 좁은 아파트였는데, 현관문은 마루와 연결되어 있었고 마루 에는 방문이 세 개나 있었다. 깜깜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상하게 먼지가 많이 낀 것 같았다.
‘분명 뭔가가 있어! 황 교수가 아무리 아팠다고 해도 집 안에 이토록 먼지가 쌓일 정도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현암은 집을 잘못 찾았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바 이올렛의 수정구 응시가 틀렸을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신동들도 바이올렛의 투시 내용으로 모두의 주 소를 알았다고 하지 않은가! 현암은 망설이다가 마침내 결심을 한듯, 가운데 쪽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러나 그 문은 화장실 문이었다. 현암이 문을 닫으려는데, 옆방에서 뭔가 미미 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현암은 재빨리 몸을 돌려서 소리가 난 쪽 의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그러고 나서 혹시 안에서 기습이 있을까 싶어 벽에 몸을 붙이고 섰다가 안으로 뛰어들었다. 방 안의 광경을 본 현암은 놀란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뒤에는 현암의 뒤를 따라 들어온 연희와 최 교수가 있었다. 최 교수는 그다지 키가 크지 않아 현암의 등 너머로 안의 광경을 볼 수 없었지만, 연희는 방 안의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방 안에는 통조림 깡통들과 기타 잡동사니 쓰레기들이 그득 널브러져 있었 으며, 노트들과 책들이 산더미처럼 겹겹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 었다. 그리고 방 한 귀퉁이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는 누군가 이불 을 덮어쓴 사람이 누워 있었다.
“연희 씨, 불을 켜요.”
현암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말하자 연희가 서둘러 스위치를 더듬어서 불을 켰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제야 현암의 뒤를 따라온 최 교수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을 보고 신음 소리를 냈다.
“황, 황교수!”
황 교수의 얼굴은 누렇게 떠서 죽은 사람 같아 보였고, 아주 약하게 숨을 쉬고 있기는 했지만 불이 켜졌는데도 아무런 반응 도 보이지 않았다. 최 교수가 놀라서 다가서려고 하는데 현암이 제지했다.
“잠깐만요!”
현암은 미심쩍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인사불성인 채였다. 그런데 방금 안에서 들린 인기 척은 무엇이란 말인가? 현암은 몸이 긴장으로 뻣뻣해져 오는 것 을 느끼면서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에는 몸을 숨 길 곳이 아무 데도 없었고 창문도 달려 있지 않았다. 황 교수의 침대는 낮아서 누가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갈 수도 없어 보였다. 황 교수가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척인 걸까?’
현암은 의아해하면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서면서 황 교수를 덮은 이불을 들춰 보았다. 놀랍게도 황교 수의 온몸은 가느다란 철사 같은 것으로 꽁꽁 동여매여 있었다.
“어, 이런!”
그때, 현암이 놀라는 틈을 타고 갑자기 침대 아랫부분에서 자 그마한 형체가 이불을 젖히면서 튀어나와 현암의 가슴을 강타했 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공격을 받은 현암은 허공 에 떠올랐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혔다. 현암의 몸이 채 방바닥 으로 떨어져 내리기도 전에 자그마한 형체는 양손을 뻗었고, 뭔 가가 휙 하고 최 교수와 연희에게 날아들었다. 최 교수가 헉하고 숨을 내쉬면서 허리를 굽히는 것이 연희에게 보였고, 연희는 소 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그만 눈앞이 아찔해져 그 자리에 털썩 넘 어지고 말았다.
현암이 정통으로 받은 타격은 주먹이나 무기로 친 것이 아니 라 놀랍게도 한 장의 묘한 부적 같은 그림이 가슴에 붙어 일어난 것이었다. 그림이 가슴에 붙은 순간, 현암은 큰 충격을 받고 나
가떨어졌고 그다음에도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신은 잃지 않아서 연희와 최 교수가 줄이 달린 둥근 공에 얻어 맞고 쓰러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황 교수의 침대 안에 숨어 있던 형체는 놀랍게도 대여섯 살밖 에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작은 꼬마였다. 아무리 현암이 경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황 교수의 발치에 그렇게 체구가 작은 아이 가 웅크리고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에 고 스란히 기습을 당해 버린 것이었다. 아이는 헐렁해 보이는 검은 옷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는데,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익숙한 동작으로 가느다란 철사를 꺼내어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신음 하는 연희와 최 교수의 손발을 재빨리 묶었다. 그러고는 방 한쪽 구석에서 테이프를 주워 와 연희와 최 교수의 입에 붙였다. 마치 콧노래라도 부르는 듯한 가벼운 동작이어서 현암은 기가 막혔 다. 그러나 무슨 주술이 씬 것인지 아무리 용을 써도 가슴에 붙 은 그림 때문에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입마저 움직여 지지 않았다. 눈조차 깜박할 수가 없어서 쓰리고 아파왔다.
그 아이는 유유히 연희와 최 교수를 다 묶고는 현암의 앞에 딱 버티고 섰다. 이윽고 조금도 입을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어디서 많이 들은듯한 어조의 유창한 한국말이 울려 퍼졌다.
“오래간만이군. 미스터 현암! 나를 기억하나?”
현암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가 사용하는 복화술, 그리고 목소리와 어조………….
‘마스터’
아라는 졸린 나머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귀찮아서 밖 에서 졸음을 쫓으려고 깡충거리며 뛰고 있었다. 밤공기가 서늘 해서인지 졸음은 어느덧 가시고 머리가 개운해졌다. 아까 현암 이 경계하는 빛을 띠면서 안으로 들어섰기 때문에 최 교수는 아 라에게 이곳에 그냥 있으라고 했던 것이다. 아라는 평소 남의 집 에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 했고, 또 이번 여행에 불 만이 많았던 탓에 밖에서 그냥 어정거리고 있었다.
‘학교도 안 가고 외국 여행 간다고 좋아했는데 이게 뭐야? 놀 러도 안 다니구, 잠도 안 자구…………. 빨리 나오지. 아라 졸린데 씨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간 현암과 연희, 최 교수는 도통 나올 생각 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라가 입을 죽 내밀고 투덜거리는 중에 자신의 아래쪽에서 뭔가 희미한 빛이 비춰지는 게 느껴졌다. 놀 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더 두리번 거리다가 아라는 그 빛이 자신의 옷 속에서 나오는 것을 알았다. 그 빛은 전에 준후가 아라에게 주었던 목걸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라는 이상해서 얼른 목걸이를 꺼내 보았다.
“어? 이게 왜 빛이 나지? 손가락도 안 모았는데?”
전에 주기 선생은 아라의 집에 들어가서 목걸이를 보았을 때, 이상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그 목걸이에 다 한 가지 술수를 더 심어 놓았던 것이다. 전에 준후에게 말해 주었던 조요경이란 말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자신에 게 위해가 될 수 있는 요기나 주술력이 근처에 나타나면 그 목걸 이가 자동으로 빛을 발하고 동시에 주기 선생이 가지고 있는 조 요경에도 그 빛이 비춰지게 해 놓았던 것인데, 어린 아라는 그것 까지는 몰랐다. 아라는 단순히 목걸이가 제 스스로 빛을 발하자 아빠와 현암, 연희가 집 안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것까지도 잊 은 채 신기한 듯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하하. 기억하는군요. 이렇게 모습이 달라졌는데도 용하게 기억하는군요.”
“당신은 이미 죽었어!”
현암이 외치자 마스터는 웃었다.
“오. 물론 죽기야 죽었지요. 악마의 손에.”
현암은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치떴다.
‘악마에게 죽었다고?’
그러나 현암은 그 이야기보다 당장 마스터가 어떻게 다시 나타난 것인지 궁금했다.
“네 영혼은 블랙서클로 흡수되지 않은 건가?”
“아. 아니죠. 블랙서클은 무슨 소용돌이 같은 것이 아니었어요. 일종의 통로죠. 그들의 영혼은 계약이 맺어져서 넘어간 것이 지. 블랙서클이 무조건 영혼을 흡수하는 건 아니죠. 그리고 나는 계약에 종속되지 않고.”
“악마가 너를 죽였다면서? 네 영혼은 어떻게 그대로….”
“뭐랄까. 내 영혼은 버려졌어요. 아스타로트는 나를 별로 필요 로 하지도, 뭐 증오하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앞에서 치워 버렸 지만 영혼은 방치했지요. 원래라면 저승으로 가야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어요. 물론 당신들은 그 이유를 짐작할 테죠? 당신 들이 있으니까. 당신들이 아직 세상에 있으니까.”
마스터는 차분하게 말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이 아이의 몸은 내가 빌려서 쓰고 있고, 이 아이의 몸을 빌릴 때 나는 앙그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죠. 앙그라 마이뉴.” 현암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짐작이 갔다.
‘마스터. 역시 그랬구나! 마스터야말로 앙그라의 진면목이었 구나. 마스터의 가공한 주술력이라면 죽었다고 해도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겠지…?’
“아무튼 이렇게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롭군요. 하하하. 저눈큰 아가씨도 같이 왔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요? 그때는 당신들을 죽 이지 않고 내 업적에 대한 관객으로 쓰려고 했지요. 허나 당신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어요. 감정적으로 대할 생각은 없지만, 수치스럽다구요.”
사실 현암이나 연희 등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마스터 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예전의 차분함과는 달리, 이글이 글 불타는 듯한 눈빛으로 현암을 노려보며 웃었다.
“그러니 전과는 달리, 그냥 죽어 줘야겠어요.”
현암도 지지 않고 똑같이 눈을 부릅떴지만 마스터는 슬쩍 눈 을 돌리며 깔깔거렸다.
“사이좋게 저승으로 가게 되었으니 외로워 말고요. 조금 있으 면 꼬마나 덩치 큰 신부와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들은 내 계획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해요. 조금도요! 전 세계가 당신 들의 적이거든요. 하하하.”
현암은 앙그라, 아니 마스터의 말을 듣고 놀랐지만 몸을 움직 일 수는 없었다. 마스터는 현암의 모습이 우스운지 다시 한번 깔 깔 웃다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는 현암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 고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말투가 험악했고 감정을 그대로 드 러냈다.
“네놈들! 네놈들 때문에 수십 년 고되게 얻었던 힘이 없어졌 다. 모두…………. 네놈들을 모조리 없애야 해. 아스타로트가 나를 죽였지만, 계약이 무효화된 것은 아냐. 조건은 그대로다. 모두 죽이면 내 힘이 돌아온다. 이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한다. 신부도, 꼬맹이도, 라가라쟈를 봉인한 그 여자도…………. 절대 벗어나지 못해! 전 세계가 너희들의 적이 될 거야. 전 세계의 경찰과 각 나 라의 정부에서 너희를 표적으로 삼을 거다. 그나마 네놈은 험한 꼴 당하지도 않고 여기서 죽을 테니 다행인 줄 알아라. 하하하.”
현암은 마스터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았다. 전 세계가 자신들의 적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현암은 마 음속으로 월향을 불렀으나 허사였다. 월향도 마찬가지로 부적 한 장에 역시 꼼짝도 못하는구나 하는 공허한 느낌뿐이었다. 마스터는 웃는 얼굴로 돌아가더니 한쪽 구석에 쌓여 있던 빈 통조림 깡통을 헤치기 시작했다. 우르르 흩어지는 통조림 깡통 을 보고 현암의 머리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통조림 깡통의 숫자는 모두 여섯 개였다. 현암의 생각에 마스터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잠복하여 함정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바이 올렛의 말에 의하면 최소한 사흘 전부터는 이곳에서 황 교수를 묶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통조림 깡통의 개수는 최소 한 아홉 개가 되어야 맞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마스터가 잡동사니의 틈바구니에서 석유통 하나를 꺼 내자 현암의 사고는 중단되었다. 마스터는 사방에 가솔린을 뿌 리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정신이 멀쩡한 채로 몸이 타들어 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도 기 분 나쁘지는 않을 거야. 미스터 현암. 나중에 기분이 어땠는지 내게 꼭 가르쳐 주게. 어떤지 알고 싶으니까 말이야.”
“으악! 이게 뭐야!”
아라는 놀라서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목걸이에서 빛이 나는 것이 하도 신기해서 손가락을 모으고 주기 선생이 가 르쳐 주었던 대로 힘을 주어 보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아주 조그 맣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라는 그게 무 슨 소린가 싶어 사방을 돌아보았으나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조그맣게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려왔 다. 그러다가 아라는 문득 발밑을 보고 그 바스락거리는 것의 정 체를 알고는 깜짝 놀랐다.
“으악! 싫어! 싫어어!”
그것은 수백 마리나 되는 바퀴벌레였다. 어느 구석에서 나타 났는지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들이 아라를 향해 열심히 기어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놈이 있었는가 하면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의 큰 놈까지, 갈색의 작은 물결을 이루듯 아라를 향해 달려오고 있 었다. 아라는 소리를 지르고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목걸이를 손에 쥔 채 아파트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안에서는 가솔린을 다 뿌린 마스터가 불을 붙이려던 참이었 다.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거칠게 문을 여는 소리 와 함께 누가 들어오는 듯하자, 마스터는 재빨리 안색이 변하면서 소매를 떨쳐 내더니 줄이 달린 두 개의 쇠 추를 양손에 하나 씩 거머쥐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문으로 나서려는 순간, 문이 왈칵하고 열렸다. 마스터는 당연히 어른이 올 것으로 짐작하고 하나는 보통 어른들의 얼굴쯤, 하나는 가슴의 높이로 추를 내 던졌는데 아래쪽의 추가 아라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정도로 빗나가 버리면서 방문을 뻥 뚫어 버렸다. 바퀴 벌레 떼에 놀라서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 들어온 아라는 눈앞에 현암이 꼼짝 못하고 앉아 있고 연희와 아빠인 최 교수가 꽁꽁 묶 인 채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한번 놀라서 그 자리에 굳 어 버린 듯, 우뚝 멈춰 섰다. 마스터는 두 개의 추가 모두 빗나가 자 아라를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며 추를 거두어들이려는 듯 휙 하고 손을 떨쳤지만 방문을 뚫고 나간 추는 문에 걸렸는지 돌 아오지 않았다. 아라는 그 모습에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추가 돌아오지 않자 급한 김에 앞으로 달려 나가면 서 아라를 힘껏 떠밀었다. 아라는 비틀했다가 화가 치민 듯, 앞 뒤 가리지 않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어 마스터를 발로 차버 렸다. 마스터가 빙의되어 있는 앙그라는 대여섯 살밖에 안 된 아 이라 아라보다도 더 체구가 작았다. 때문에 아라가 화가 나서 찬 발에 맞자 그만 뒤로 벌렁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현암은 속으로 애가 타서 얼른 자신의 가슴에 붙은 부적을 떼어 달라고 소리치 고 있었지만 아라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었다. 아라는 마스터를 밀쳐내고서는 최 교수에게 달려가 철사를 풀려고 애써 봤지만 허사였다. 그사이 몸을 일으킨 마스터가 달려들더니 뒤에서 아 라의 머리칼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아라가 큰 소리로 비명을 질 렀다.
“으악! 도와줘! 아저씨!”
아라는 꼼짝도 하지 않는 현암을 바라보며 작은 손을 바둥거 렸으나 현암은 속으로만 발을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방 안 으로 수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 바퀴벌레 떼가 마구 기어 들어오 기 시작했다. 마스터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아라의 머리칼 을 다시 세게 잡아당겼다. 그런 마스터의 다른 쪽 손에서는 자그 마한 단검이 번쩍하고 형광등 불빛에 반사되어 빛을 발했다.
“으아아악! 도와줘!”
아라가 공포에 질려서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라의 손에 쥐여 있던 목걸이가 빛을 발하는 것이 현암의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놀랍게도 기어 들어오던 수백 마리의 바퀴벌레들이 파드닥거리 면서 아라와 마스터에게 날아들었다. 바퀴벌레가 그것도 수백 마리가 일제히 날개를 파드득거리며 날아드는 것은 참으로 역겹 고 징그러운 광경이었고 마스터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기겁을 했 다. 아라는 공포에 질려 있는데다가 또다시 바퀴벌레 떼가 날아 들자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면서 머리가 뽑히는 것도 상관 않 고 마스터를 뿌리치며 바퀴벌레를 피해 몸을 날렸다. 마스터의 손에는 수십 가닥의 머리카락만이 남았고, 마스터가 들었던 단검이 공허하게 허공을 가른 다음 순간, 마스터의 몸에 바퀴벌레 들이 새카맣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마스터였지만 이토록 끔찍한 비명을 지 를 줄도 알았다. 한 마리만 보아도 기분 나쁜 바퀴벌레가 수백 마리나, 그것도 날개를 펴고 달려드는 모습은 보는 사람의 입장 인 현암도 속이 이상해지는 판이었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으랴. 순간 아라는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중심을 잡지 못하고, 또 뽑힌 머리카락 부분이 아픈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면서 데굴데굴 굴렀다. 그때 현암의 가슴에 붙어 있던 부적이 아라의 발에 밀려 팔랑거리면서 옆으로 떨어졌다.
현암은 몸에 찌르르하고 마비가 풀리는 느낌이 들자 당장 떨 쳐 일어나려고 하다가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마비 가 완전히 풀리려면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할 듯싶었다. 바퀴벌레 들과 씨름하던 마스터는 현암의 부적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를 갈면서 소매를 떨쳐 내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면서 바퀴 벌레들을 몸에 잔뜩 붙인 채 문밖으로 뛰어나갔고 주술을 일으 켰는지 마스터의 손가락에서 작은 불똥이 튀어 곧 불이 붙었다. 현암은 불이 붙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리가 휘 청했다.
“아라야, 나가! 어서!”
아라는 울다가 현암의 목소리를 듣고, 또 방 안에 불이 붙는 것을 보고는 구르다시피 밖으로 뛰어나갔다. 현암은 급한 김에 최 교수를 오른손에 얼마 안 되는 공력이나마 모아서 후려쳤다. 그사이 가솔린에 붙은 불은 무서운 속도로 번지면서 현암의 옷 에까지 달려들었다. 순간, 월향이 힘을 찾은 듯 휙 하고 현암의 왼손에서 빠져나와 연희의 손목을 묶고 있는 철사에 날을 걸고 찢어지는 귀곡성을 울리면서 방 밖으로 나갔다.
연희의 몸에도 불이 번지고 있었지만 몸을 파닥거려서 가능한 한 불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애쓰는 참이었다.
현암은 몸에 불이 붙는 것도 상관 않고 손을 더듬거려서 침대 에 묶인 황 교수에게 손을 뻗었으나 불길이 다가와 철사를 풀 시 간이 없었다. 현암은 왼손으로 침대를 잡고 이번에는 오른손에 가능한 만큼의 공력을 넣어서 땅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 반작용 으로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이 조금 파이면서 침대는 움찔했고 현 암의 왼손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를 잡았던 손을 놓쳐 버 렸다. 그사이 아라가 어떻게 해서 최 교수의 손을 풀어 주었는지 최 교수는 자신의 발을 직접 풀고 있었고, 이제 아라는 연희의 손을 풀어주는 중이었다.
“안 되겠소! 불이 번져요!”
현암은 그제야 몸이 움직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은 불바다가 되어 버렸지만 현암은 황 교수가 그대로 타들어 가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현암이 몸을 재빨리 한 바퀴 굴려 몸 에 붙었던 불을 대충 끄고 오른손을 뻗자 월향검이 귀곡성을 지 르면서 날아와 잡혔다.
현암은 월향이 손에 들어오자 소리를 지르면서 불바다가 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황 교수의 몸은 불로 뒤덮여 가고 있었 다. 현암이 월향검으로 침대의 아랫부분을 획 그어 버리자 월향 검의 검기에 철사들이 잘려 나갔고 동시에 침대도 퍼석 하면서 주저앉았다. 그런 다음 현암은 월향을 허공에 던져 버리고는 오 른손에 힘을 주어 황 교수의 멱살을 낚아챈 그대로 밖으로 내던 지고 자신도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불은 방 밖으로도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현암의 몸에도 불이 붙었지만 공력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큰 화상은 입지 않았다. 마 루에서는 최 교수와 아라가 발의 철사를 다 풀지 못한 연희를 질 질 끌면서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고, 현암도 황 교수를 끌면서 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는 동안 월향은 스스로 날아서는 현암 이 밖으로 나가는 도중에 칼집으로 돌아왔다.
막 아파트의 문 밖으로 나오자 복도로 불길이 확 밀려 나왔다. 연희는 발에 묶였던 철사를 풀어내는 중이었고, 최 교수와 아라 는 현암의 몸에 붙은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현암이 소리쳤다.
“나보다 황 교수님이 급해요! 어서요!”
현암이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는 동안 아파트 저 아래에서 누군가가 자전거를 타려다가 버리고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먼 거리였지만 가로등 불빛 덕분에 현암은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앙그라, 아니 마스터였다.
“놓치지 않겠다!”
현암이 소리치면서 계단으로 가려는데 불이 난 것을 보고 사 람들이 올라오는 것인지 엘리베이터가 섰다. 현암은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을 헤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무작정 뛰어들었고 그 뒤를 따라온 연희도 간신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는 중에 연희가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쫓아가려구요?”
“녀석의 마음은 마스터지만, 몸은 겨우 여섯 살짜리 어린애예 요. 쫓아가면 잡을 수 있어요!”
다행히 중간에 한 번도 서지 않고 엘리베이터는 일층에 닿았 고, 아래에는 불 때문인지 여러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서 있 었다. 그 사람들을 헤치고 현암이 앞서 달렸고 연희도 그 뒤를 따랐다.
현암이 아파트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마스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 어느 방향으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럴 경우에는 일종의 감으로 방향을 잡아 뛰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는 것을 현암은 오랜 퇴마행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가던 현암은 두 갈래 길에서 멈추어 서야 했다. 길거 리의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몸에 그은 자국이 그득한 젊은이 가 달려가는 모습이 이상하다는 듯 자꾸 쳐다보는 바람에 감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짐작이 잘 가지 않아 두리번거리는데 뒤에서 연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오른쪽으로 갔대요!”
현암의 뒤를 따라오던 연희는 그새 지나가던 사람에게 꼬마 하나가 뛰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어보았던 것이었다. 현암은 연희가 일러 주는 대로 오른쪽 길로 달려갔다.
아라와 둘이 남은 최 교수는 불 때문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둘 러싸여 말을 지어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최 교수는 사람들에 게 구급차를 불러 달라는 말만 계속해 댔고, 사람들은 최 교수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이것저것 묻지 않고 불을 끄느라 법석을 떨었다.
최 교수는 젊은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숨이 끊어질락 말락 하는 황 교수를 아래층으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불이 난 곳에서 는 화상을 입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가장 두려운 것은 질식이 다. 다행히 황 교수는 연기에 오래 노출되지 않아서인지 질식하 지 않았고 몸에 붙은 불도 옷만을 태운 정도였다. 또 화상도 그렇게까지 심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울음을 그친 아라는 힘없 이 그을음과 눈물이 범벅이 된 꾀죄죄한 얼굴로 최 교수의 뒤를 따라갔다. 최 교수와 두 청년이 황 교수를 아파트 입구에 내려놓 고 구급차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라는 사람들 틈새로 들어 와서 황 교수를 뻔히 바라보고 있었다.
황 교수의 앞섶은 최 교수가 화상 여부를 조사하느라고 풀어 헤쳐 놓았었는데, 아라는 그것이 안쓰럽게 보여서 옷깃을 여며 주려고 했다. 그런데 겉옷이 거의 타버려서인지 아라가 힘을 주 자옷이 맥없이 터지면서 뭔가가 땅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최 교수가 그 소리를 듣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땅에 떨어진 것은 검은색 수첩이었다. 최 교수는 그 수첩을 주워서 황 교수에 게 도로 넣어 주려다가 황 교수의 옷이 엉망인 것을 보고는 일단 자신의 주머니에 그 수첩을 집어넣었다.
연희는 최 교수와 아라가 걱정되었다. 자신이 공연히 현암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또 지금이라도 최 교수에게로 돌아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계속 현암의 뒤를 따라 뛰어 갔다. 지금 마스터를 쫓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 현암을 혼자 내버려 두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이 되기도 했다.
‘최 교수님이 잘 처리했을 거야. 나중에 그 동네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쉽게 병원을 찾을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 달리다 보니 현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희 가 당황한 나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뭔가 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재빨리 달려가 보니 나무 상자가 길에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는 누가 밀고 지나간 듯, 길이 쭉 나 있었다.
‘현암 씨다! 마스터를 발견한 모양이구나!’
조금 가자 이번에는 바닥에 사과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 다. 한 아주머니가 나쁜 꼬마라고 욕을 해대며 사과를 줍고 있 었다. 연희는 볼 것도 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마스터가 현암에게 발견되자 현암의 추격을 방해하려고 사과상자를 내팽개친 모양 이었고, 현암은 보나마나 물불 가리지 않고 그것을 뚫고 따라갔 을 것이다. 그런데 가다 보니 막다른 길이 나타났고 한쪽 구석에 서 작은 덧문이 조금 흔들거리고 있었다. 연희는 덧문을 열고 안 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말 린 약초들로 뒤덮인 창고 같았다. 여기도 여러 개의 상자가 흩어 져 있었다. 그때 위층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구석에 놓인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려는데 연희의 오른손에 있는 준후가 심어 준 부적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이런! 마스터가 악한 주술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어!’
연희는 서둘러서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긴장된 연희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