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15화 – 홍수 12 : 전 세계의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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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15화 – 홍수 12 : 전 세계의 적


전 세계의 적

승희와 준후는 비행기를 타는 동안 계속 바이올렛의 끔찍한 잔소리를 들어야 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이상하게도 바이올렛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마치 죽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처음에는 몹시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비행기에서 내릴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바이올렛은 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절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법 석을 떨고 의사를 부르고 해서 결국 호텔이 아니라 병원으로 직 행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진찰해 본 결과, 몸에는 이상이 없고 단순히 기절한 것뿐이니 곧 깨어날 것이라고 했다. 준후는 그런 바이올렛이 불 쌍하게 느껴졌지만, 승희는 웬 할망구가 별 법석을 다 부린다고 투덜거리면서 병원에 준후를 남겨 두고 혼자서 짐을 챙겨 가지 고 호텔로 갔다.

승희는 방에 짐을 옮기고 나자 장시간 여행에 피곤이 엄습해 왔지만 일단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리기 위해 백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신호음만 갈 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세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쯤에서야 백호가 전화를 받았다.

“아, 백호 씨? 저 승희예요. 지금 막 도착했는데 그 할망구가……”

승희가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백호가 승희의 말을 가로챘다. 

“승희 씨? 가만! 내 이야기부터 좀 들어 주세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네? 어……. 왜요?”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긴급 사태예요! 더 이상 어떤 형태의 지원도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네에?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지요?”

“설명해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절대적인 위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꼭 내 말을 명심하십시오!”

“아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게 말을 해 보란 말이에요! 사람 이 답답하잖아요!”

“좌우간 아무도 믿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도요! 여러분의 생 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금 이 시각부터 여러분은 전 세계 모든 첩보망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이제부터 여권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이나 신상명세 등은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승희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도통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승희의 기분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백호는 낮고 빠르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재차 반복합니다. 절대 아무도 믿지 마세 요! 빨리 몸을 숨기세요! 곧 여러분은 국제 첩보망에 쫓기는 신 세가 될 겁니다. 제가 직접 그리로 가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절대 노출되지 않도록………….”

“도대체 무슨 말이에요?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왜 이렇게 된거죠?”

“제가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아! 시간이 없어요.”

승희는 이토록 당황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백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제야 승희의 몸도 서서히 떨려 왔다. 승희는 마 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떨리는 목소리로 백호에게 물었다. 

“그러면 어디서 만나죠?”

“저는 일단 현암 씨와 신부님을 데리러 중국부터 먼저 가겠습 니다. 사회주의 국가라 노출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고 나서 인도로 가겠습니다. 그때까지만 제발 숨어 계세요. 그리고 매일같이 저를 투시하세요. 가능하겠죠, 승희 씨?”

“될, 될 거예요.”

“좋아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직접 저를 만나는 것 말고 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백호는 빠르지만 작은 목소리로 강조하듯 말을 마치고는 서둘 러 전화를 끊었다. 누가 들을까 봐 대단히 조심하는 것 같았고, 평소 백호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승희는 앞으로 어떻게해야 할지 막막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백호 씨의 마음을 읽어 볼까?’

승희는 잘 아는 사람에게 자신의 능력을 동의 없이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세계 첩보망의 블랙리스 트에 올라 있다니,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백호의 말인 이상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직접 백호를 만날 때 외에는 누구도 믿지 말라니! 그렇다면 우리 정부도 자신들을 적으로 규정했단 말인가? 승희는 한동안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 리다가 결심이 섰는지 그 자리에 앉아 정신을 집중했다. 백호의 마음속을 읽어서 조금 더 명확한 것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연희는 아파트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서 황 교수가 입 원해 있는 병원의 이름을 알아내었다. 간신히 찾은 병원의 응급 실 한쪽 구석에는 최 교수와 아라가 있었다. 둘은 피곤에 지친 데다가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린 탓인지 풀이 죽어 있었는데 연희가 나타나자 몹시 반가워했고, 아라는 연희에게 안겨서 흐 느끼기까지 했다. 연희는 아라의 등을 다독거려 주면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 최 교수에게 물었다.

“황 교수님은요?”

연희의 말에 최 교수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돌아가셨나요?”

“아직은 아니지만 위험하답니다. 묶여 있는 상태에서 마약 주사를 너무 많이 맞았다고 해요.”

연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경찰은 다녀갔나요?”

“공안 경찰이 왔다 갔지요. 화재가 나고 마약까지 연루된 사 건이라 조사가 매우 엄했습니다. 도착한 지 몇 시간밖에 안 되어 벌어진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별일은 없었습니다.”

“일단 호텔로 돌아가도록 해요. 황 교수님 문제도 문제지만, 최 교수님도 좀 쉬셔야겠어요.”

“하지만…………….”

“아라도 너무 지쳐 있잖아요?”

최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입원실에 있는 황 교수를 한번 보고 가려고 했으나 그 방은 외부인이 들어가지 못하게 잠 겨 있었고 황 교수의 친지나 제자가 그 앞에서 진을 치고 있어 할 수 없이 걸음을 돌렸다.


호텔의 방문을 열었을 때, 누군가가 뛸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연희를 보고 소리를 쳤다.

“오우! 연희 양, 큰일입네다!”

윌리엄스 신부였다.

“예? 무슨 일이라도…………….”

연희는 하던 말을 끊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느 사이에 호텔 방이 엉망진창으로 뒤집혀 있었다. 짐이라고 해야 변변한 것도 없는데 온 방이 엉망이었다. 하물며 자신들과 전혀 관계없는 호 텔의 비품들조차도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오우! 나도 모릅네다. 내가 와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네다. 그러나 이게 문제가 아닙네다.”

연희는 윌리엄스 신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갑자기 등골이 서 늘해졌다. 윌리엄스 신부는 박 신부와 함께 나가지 않았던가?

“박 신부님은?”

“팍 신부님은 잡혀가 버렸습네다! 억류되어 버렸어요!” 

연희의 귀에는 더 이상 윌리엄스 신부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 다.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빈혈이 일어나 몸을 비틀했으나, 소파 의 가장자리를 붙잡고 가까스로 버텼다.

“도대체 이유가 뭐죠?”

“전혀 설명을 해 주지 않고 그냥 잡아가 버렸습네다.”

연희는 왈칵 팔을 뻗어서 앞에 놓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방을 이 정도로 뒤졌다면 분명 도청 장치도 해 놓았 을 터였다. 연희는 침착해지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박 신부님만을 잡아갔나요?”

“그렇습네다. 내가 항의했지만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했습네다.”

“여권이나 서류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닙네다. 우리는 티베트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기 위해 간 것이었는데 이곳 공안 요원들한테 눈 깜짝할 사이에 잡혀 버렸 습네다.”

“그렇다면 박 신부님이 이곳 공안 요원들에게 잡혀갔단 말인가요?”

“틀림없습네다.”

연희는 왜 박 신부가 잡혀갔는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호텔 방을 샅샅이 뒤지고, 티베트행 교통편을 알아보기 위해 관 공서를 찾아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가 닿자마자 연행해 갔다면 이는 필경 정보기관의 소행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도대체 말이 되지 않았다. 백호는 이번 일을 위해 도움을 주겠다 고 분명히 약속했고, 또 박 신부에게는 이곳의 관리들과 만나 보 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박 신부가 그 길목에서 손 한번 쓸 틈 없이 그대로 잡혀 버렸다면……………. 연희는 일이 이렇게 된 이 상 현암도 위험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현암 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지금은 서둘 러 백호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백호라면 뭔가 알고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이곳의 전화를 사용할 수는 없으니 밖으로 나가야 했 는데, 그사이 현암이 아무 생각 없이 돌아오다가 붙잡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제가 연락을 취하고 올게요. 그리고 신부님・・・・・・・ 아니, 신부

님은 서양 분이라 눈에 띄니 안 되겠네요. 최 교수님, 수고스럽 더라도 호텔 문 근처에 가 계시지요.”

“네? 왜 그러죠?”

“신부님이 잡혀간 이상, 현암 씨도 위험할지 몰라요. 혹시 현 암 씨를 보게 되면 다른 곳으로 피해 있으라고 전해 주세요.”

“어디로 피해 있으라고 전합니까?”

“아무 데나요. 아니지. 음, 그래요.’

연희는 최 교수의 귀에 대고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화씨 약재상에서 만나자고 하면 현암 씨도 알 거예요. 꼭 그 렇게 전해 주세요.”

최 교수는 경황이 없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연희는 전화를 걸 기 위해 서둘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최 교수도 훌쩍거리는 아라 를 데리고 호텔 입구로 가기 위해 방문을 나섰다. 아라의 작은 손에는 아직도 준후가 주었던 목걸이가 꼭 쥐어져 있었다.


현암은 택시를 타려 했지만 통 지나가는 택시가 없어서 터벅 터벅 걸어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화중명 노인의 시술은 허무하 리만치 짧게 느껴졌다. 몸에 수십 개의 침을 박고 한 시간 정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으라고 하더니, 한 시간가량 지나서 몇 몇 동작을 따라서 하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가 지나자 화 노인은 현암에게 약방문을 한 장 써 주면서 하루에 한 번씩 석 달 동안 귀찮더라도 꼭 달여 먹을 것과 몇 가지 주의 사 항을 당부하는 것으로 시술을 끝냈다. 시술을 마친 현암의 몸에 는 별다른 징후가 나타나지 않았다.

밤거리를 걸으면서 현암은 두어 가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 번째는 난데없이 나타나서 위기를 넘기게 한 그 바퀴벌레 떼 에 관한 것이었다. 그 바퀴벌레들은 아라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것 이 확실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들이 아라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도 아닐 테고, 아라가 천부적인 초능력자나 주술사도 아니니 남은 것은 전에 준후가 일본에서 군다리명왕을 이기고 나서 주 웠던 그 목걸이뿐이었다. 더구나 그때 아라의 손에 쥐여 있던 목 걸이가 밝은 빛을 내는 것을 현암은 분명히 보았다. 그렇다면 혹 시 목걸이에 뭔가 신통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그 군다리명왕은 새와 벌레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힘이 있었지? 그래, 그렇다면 그 힘이 아라의 그 목걸이 에 숨겨져 있었다는 말인데…………….’

그것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만일 그게 아니고 어린 아 라가 실제로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현암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별로 탐탁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현암은 생각을 바꾸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번은 조금 더 복잡한 것이었다.

‘마스터는 우리가 이리로 찾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미리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아라가 있다는 것은 몰랐어. 그래서 실패했지. 그렇다면 마스터에게 투 시 능력은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

만일 마스터에게 투시력이 없다고 한다면 풀어야 할 의문이 또 한 가지 있었다. 마스터가 어떻게 현암 등이 중국으로 올 것 을 미리 알았을까 하는 것과 아울러 어째서 황 교수를 묶어 놓고 며칠씩이나 기다리는 수고를 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신동들의 우두머리는 마스터가 빙의된 앙그라였으니 그 신동 들은 마스터가 보낸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마스터는 신동들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는 말인가? 늑대 소년 피에 트리의 몸에 폭탄을 설치한 것도 마스터 같은데……………. 그러나 신 동들이 패배하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무슨 이유로 신동들을 보내 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에 말려들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아이들 이라지만 모두가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는데. 혹시…………..’

현암은 마스터가 예전에 블랙서클의 승정들을 하나씩 죽음으 로 몰아간 것과 같은 의도에서 신동들을 싸우게 만든 것은 아닐 까 하는 추측을 해 보았다. 마스터는 승정들의 힘을 하나씩 흡수 하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둘씩 퇴마사들과 싸우게 조종했고, 마지막에는 그 힘들을 모두 한 몸에 업어서 엄청난 능력자로 변했다. 원래의 능력은 더 가공할 만했지만 분명 과거에 그런 수법을 쓴 것은 틀림없다.

‘아무튼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 다! 더구나 지금은 살아 있는 자도 아니고 단지 혼일 뿐이니 사 정 볼 것 없이 해치워 버려야겠다!’

또 하나 의아한 것이 있었다. 황 교수 방에서 보았던 빈 통조 림 깡통의 개수였다. 마스터가 사흘을 잠복하는데 빈 통조림은 겨우 여섯 개였다. 앙그라가 어린아이임을 감안하더라도 너무나 적은 양이었다. 더군다나 황 교수의 방 안에 있는 책 더미가 헤 집어져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스터는 거기 잠복하면서 무 엇인가를 찾아내려 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을 텐데………….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마스터가 어떻게 우리가 올 것을 정확하게 알았는지에 대한 것이 전혀…………’

현암은 답이 꽉 막히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택시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머리만 아프군. 그나저나 최 교수님과 아라는 괜찮은지 모르겠네? 그런 상황에서 마스터를 잡겠다고 빠져나와 버렸으 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차는 한 대도 안 보이고. 이 거원, 영혼들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방법이 없을까?’

그때였다. 현암의 머릿속에 문득 서광이 비쳤다. 뭔가 다른 각도로 사고를 돌리니 처음의 그 모든 문제들이 눈사태 나듯 와르 르 해결되는 한 가지의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렇다면 모든 것의 아귀가 맞는다. 그러나……………. 아니, 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말도 안 돼! 그렇지만…………. 아 냐! 그렇지 않고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현암의 머리가 마구 뒤엉키는 순간 택시 한 대가 저만치에 보 였다. 현암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타면서도 그 생각을 끊지 않으 려고 애썼다. 운전사와 피차 잘 통하지 않는 영어로 호텔의 이름 을 대는 중에도 현암은 내내 그 믿어지지 않는 추리의 내용에 스 스로 놀라고 있었다.


연희는 수화기를 내던지듯 그 자리에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 았다.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호와 약속되어 있 던 그 전화번호는 백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라도 이십사 시간 받기로 한 것이었는데, 벌써 이십 분씩이나 시도해 보았지만 통 화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어쩐다지?’

연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집에 전화를 걸어 볼까도 했지만 공 연히 걱정할까 싶어 그만두었다. 다시 한번 백호에게 전화를 하 기 위해 공중전화 박스를 들락거리다가 승희 생각이 났다.

‘가만, 우리만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승희와 준후도 곤란해 졌을 텐데…………….’

연희는 승희와 하나씩 나눠 가졌던 세크메트의 눈을 떠올렸 다. 그것을 손에 들고 있지 않으면 소통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세크메트의 눈 을 꺼냈다. 승희는 상당히 오랫동안 연희가 세크메트의 눈을 손 에 들기를 기다린 듯 즉각적으로 반응이 왔다. 그런데 승희는 상 당히 흥분해 있는 듯했고 동시에 심한 분노의 감정까지 전달되 어 왔다.

언니, 큰일 났어!

뭔데?

모두 위험해! 특히 신부님과 현암 군이・・・・・・・ 우리도 시간이 별로 없어. 어서 피해야 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응?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내가 주욱 떠올릴 테니까 봐!

승희가 떠올리는 내용들이 세크메트의 눈을 통해 연희의 마음 속에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인지 연희는 승희와의 마음속의 대화를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 연희 는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다리가 후들후 들 떨렸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꽉 물고서 공중전화 박 스를 붙잡고 억지로 서 있었다.

택시를 타고 막 호텔 앞에 도착한 현암은 분위기가 이상한 것 을 느꼈다. 꽤 늦은 밤에 서너 명의 남자들이 호텔 문 앞의 구석 에서 마치 누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성거리고 있었다. 뭐 별일 이야 있을까 하고 택시에서 내리는데 서성거리던 남자들이 옷 깃을 세우면서 현암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불안한 느낌이 들어서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호텔의 현관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달려 나왔다. 최 교수였다. 그러나 달려 나오던 최 교수의 앞을 한 남자가 막아서면서 몸으 로 부딪쳐 최 교수를 쓰러뜨렸다. 현암은 순간,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무언의 위기감도 느꼈다.

현암이 쓰러진 최 교수한테 달려가려는데 이번에는 두어 명의 남자가 동시에 현암의 앞을 막아서면서 중국말로 뭐라고 말을 했다. 현암은 그것에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힘을 주면서 앞으로 나갔다. 현암이 두 남자 사이를 뚫고 그대로 달려 나가자 상당히 체구가 큰 두 남자가 볼링공에 핀이 튕겨져 나가듯 그대로 쓰러 져 버렸다. 현암이 도망칠 것에 대비해 현암의 뒤를 포위하고 있 던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현암이 호텔 정문을 향해 돌진하자 당황한 듯 그제야 방향을 돌려 뛰어오고 있었다. 최교 수를 몸으로 밀어 쓰러뜨린 남자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품속에 재빨리 손을 넣었으나 벌써 계단까지 뛰어 올라간 현암이 틈 을 주지 않고 그 남자의 덜미를 잡아 장난감을 집어 던지듯 날려 버렸다. 화 노인의 시술이 효력을 발휘하는지 이젠 다리에도 공 력이 작용하는 것 같았다. 예전 같았으면 오른팔로만 공력을 쓸 수 있어서 무거운 물체를 들 때 허리와 다리에 하중을 많이 느꼈 는데 지금은 별 부담이 없었다.

현암이 최 교수를 재빨리 일으켜 세우자 최 교수가 몸을 덜덜 떨면서 현암에게 한마디 말만 되풀이했다.

“화씨 약재상, 화씨 약재상!”

아마 그리로 몸을 피해 있으라는 말 같았다. 그러나 현암은 그 말을 무시해 버렸다. 다들 위험한 판국에 자신만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현암은 최 교수를 데리고 재빨리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 고 했으나, 호텔의 안쪽에서는 덩치 큰 다른 두 사람이 걸어 나 오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아라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 사람 뒤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서툰 한국말로 소리쳤다. 

“그 자리에 서시오! 우린 경찰이오.”

그 남자는 신분증을 꺼내어 현암에게 펼쳐 보였다. 현암은 경 찰에게 반항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 라 고개를 갸웃하면서 큰 소리로 물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요?”

“본부까지 갑시다. 자세한 이야기는 거기서 하기로 하고.”

어느새 십여 명이 넘는 남자들이 현암의 주위를 에워쌌다. 최 교수는 몸을 벌벌 떨면서 현암의 옷깃을 양손으로 꽉 붙들고 있 었다. 현암은 도대체 중국 경찰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 지만 그들이 원한다면 같이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서서히 손 을 아래로 내렸다. 몇몇 사람이 웃옷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폼 이 아무래도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것 같았고, 또 현암 말고 다 른 일행도 있었기에 모험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경찰의 요구에 응하려는데 저쪽에서 윌리엄스 신부가 창백해진 채 뛰어 나오는 것이었다.

“오우! 팍 신부님만이 아니라 미스터 현암까지도 ……………..”

윌리엄스 신부는 경찰들의 리더인 듯한, 아까 신분증을 현암 에게 보인 남자에게 따지려고 하였지만 그마저도 두어 명의 요 원들에 의해 앞이 가로막혔다.

현암은 윌리엄스 신부의 말에서 박 신부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느낌을 받자 눈에서 불이 확 튀는 것 같았다.

“신부님이 어떻게 되셨나요?”

“신부님도 경찰에 잡혀서………………”

윌리엄스 신부가 허겁지겁 이야기를 하려는 도중에 길 건너편에서 째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암 씨, 도망쳐요! 어서!”

그 소리와 동시에 현암의 주변을 에워싸던 남자들이 우르르 현암에게 덮쳐들었다. 현암도 연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나 총알이 날아올까 봐 일단 최 교수를 저만치로 밀어내 버리고, 아랫배에 힘을 주면서 공력을 끌어 올 렸다. 그때 현암에게 달려든 두 명의 남자가 각각 팔을 잡아서 뒤로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덩치 큰 남자들이 한 사람씩 매달려 서 용을 쓰는데도 현암의 왼팔만 조금 흔들렸을 뿐, 오른팔은 꼼 짝도 하지 않았다. 현암의 팔을 잡았던 남자들이 오히려 제 힘을 가누지 못하고 몸을 휘청했다. 현암은 코웃음을 치고는 기합 소 리와 함께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오른팔을 그대로 휘둘렀다. 그 러자 현암의 오른팔에 매달려 있던 남자의 몸이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에워싸고 있던 다른 남자들을 와르르 쓰러뜨려 버렸다. 주변을 둘러싼 남자들의 반 정도가 우르르 쓰러지자, 현암은 재빨리 튀어 올라 이번에는 아라를 붙잡고 있는 남자에게로 몸 을 날렸다. 그러면서 오른팔에 ‘발’ 자결로 공력을 모아 남자를 향해 뻗었다. 아라를 붙들고 있던 남자는 현암이 악귀같이 무서 운 기세로 달려들자 기겁을 하면서 오른손으로 현암의 손을 막 으려고 했다. 그러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남자의 몸은 현암 의 공격을 막으려는 자세 그대로 뒤로 날아가 호텔 계단 옆의 소 나무에 처박혔다. 현암은 땅을 딛고 서면서 달려오고 있는 연희 에게 아라를 살짝 밀었다. 아라도 현암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쪼 르르 연희 쪽으로 뛰어갔고, 최 교수와 윌리엄스 신부도 그쪽으로 달려갔다.

막 착지하여 균형을 잡으려는 현암에게 누군가의 발이 휙 하 고 날아들었다. 방금 현암에게 신분증을 보였던 사람이었다. 현 암은 연속되는 발차기를 두 번까지는 피했지만 세 번째의 발차 기를 어깨에 맞고 뒤로 주춤하면서 물러섰다. 그 틈을 타고 아까 넘어지지 않았던 남자들 중 두 명이 육탄 공세로 달려들었다. 현 암은 태극기공의 ‘금’ 자결로 두 사람을 달려드는 자세 그대 로 한꺼번에 낚아채고는 ‘나’ 자결로 집어 던져 버렸다. 그 러나 그사이 리더의 공중 발차기 공격이 현암의 아래턱을 강타 했다. 얼굴은 공력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라 상대의 발차기 에 맞자 정신이 멍멍했고 현암은 그 충격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 섰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달아나던 윌리엄스 신부와 최 교수가 경찰들에 의해 붙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연희가 외치 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모두 도망쳐요! 모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요!” 

윌리엄스 신부를 낚아챈 남자는 경찰들 중에서도 상당히 덩치 가 큰 편이었다. 그는 체구가 작은 윌리엄스 신부를 조롱이라도 하듯 어린애처럼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남 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작달막한 윌리엄스 신부의 몸이 천근 처럼 무겁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윌리엄스 신부가 고개를 번쩍 들자 타는 듯한 붉은 눈과 잿빛처럼 창백한 얼굴, 그리고 붉은 입술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이빨이 바로 앞에서 보이는 것이었다.

“으아악!”

그 남자는 비명을 울리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으나 채 몸을 빼기도 전에 이미 허공에 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흡혈귀 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가 괴력을 발휘하여 그 사람을 집어 던져 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번엔 한쪽 팔을 내젓자 돌연 한 줄 기 광풍이 일어나더니 최 교수를 붙잡고 있던 두 사람을 뒤로 날 려 버렸다. 뒤이어 윌리엄스 신부가 흉폭한 괴성을 한 번 지르자 남자들은 모두 비명을 지르면서 윌리엄스 신부에게서 멀찍이 물 러서 버렸다.

그런데 이제는 최 교수가 윌리엄스 신부의 그런 모습을 보고 는 더 공포에 질려서 주저앉는 것이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비록 흡혈귀로 변했지만 정신은 말짱한지라 최 교수를 일으켜 세우려 고 다가갔다. 그러나 최 교수는 윌리엄스 신부가 다가오자 비명 을 지르면서 방향도 살피지 않고 경찰들 쪽으로 뛰어갔다. 그 모 습을 보고 연희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도리가 없었다. 더욱이 연 희가 서 있는 길의 양측에서 두 대의 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 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현암은 최 교수가 완전히 공포에 빠져서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그러나 곧 결단을 내린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더 이상 길게 끌 수가 없겠다!’

현암이 한눈을 파는 사이, 다시 리더가 발차기로 몸을 날려 돌 진해 왔다. 그자는 현암의 양팔에 괴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주 먹을 쓰지 않고 긴 다리를 이용해서 공격을 하고 있었다. 사실 사람이 다칠까 봐 지금까지 공력을 쓰는 것을 자제해 왔는데 일 이 이렇게 된 이상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다. 현암은 날아오는 상대의 발차기 공격을 피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손에 ‘투()’ 자결로 공력을 모았다. 리더의 발차기가 현암의 가슴을 강타함과 동시에 현암도 상대의 몸통을 향해 손을 쭉 내뻗었다. 그자는 예기치 않은 현암의 공격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 서 십자 막기로 막으려 했지만 현암은 주먹을 펴면서 손바닥으 로 상대의 교차하고 있는 팔 가운데를 짚었다. 그러자 ‘투’ 자결 답게 타격력이 방어하고 있는 상대의 팔을 그대로 통과해서 명 치에서 작렬해 버렸고, 그는 으아악 비명 소리를 지르면서 저만 치 나가떨어지더니 곧 납작하게 뻗어 버렸다.

리더가 나가떨어지자 나머지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총 을 빼 들었다. 그중 몇몇은 현암을, 그리고 몇몇은 윌리엄스 신 부를 겨누었다. 최 교수는 경찰들이 총을 빼 들자 그때서야 정신 을 차리고 다시 뒤로 돌아 달아났다. 현암은 경찰들이 총을 드는 것을 보자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올랐고, 지체하지 않고 공력을 극 도로 끌어모아서 사자후의 수법으로 크게 고함을 질렀다.

“어허헝!”

엄청난 음파가 주위를 가득 메우자 호텔 정면의 현관 유리들 이 펑 소리를 내면서 박살났고, 경찰들도 충격을 받았는지 우르 르 총을 떨어뜨리면서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운 고함을 질러 댔 다. 최 교수도 달려가다 말고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져 주 르륵 밀려 나갔고, 연희와 아라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 다. 그와 동시에 윌리엄스 신부가 흡혈귀의 힘을 끌어 올려서 휘 청거리는 경찰들을 향해 돌풍을 내쏘자 경찰들은 유리 조각과 범벅이 되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현암과 윌리엄스 신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희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양쪽에서 달려오던 두 대의 차들은 연희를 위 협하듯 에워싸고는 찢어질 듯한 브레이크 마찰음 소리를 내면서 정지했다. 거의 동시에 차에서 내린 경찰들이 다가오자 연희는 한 경찰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갈기고, 멋진 발차기로 다른 차 에서 내린 경찰마저도 걷어차 넘어뜨려 버렸다.

현암은 주저앉아 있는 최 교수를 낚아채 윌리엄스 신부에게 던지듯 넘겨주고는 차 쪽으로 달렸다. 그러자 차 두 대가 갑자기 방향을 돌리더니 현암을 향하여 그대로 돌진해 갔다. 현암이 몸 을 날려 공력을 모은 손으로 가로등을 ‘폭’ 자 결의 수법으로 내 리치자 가로등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한 대는 급 브레이크를 밟고 차체가 빙그르르 돌다가 벽에 처박혀 버렸고, 또 한 대는 충돌 직전에 간신히 멈춰 섰다. 현암은 몸을 날려 차 위를 등으로 타고 넘으면서 살짝 공력을 넣어 운전석 유리창을 쳐 꿰뚫었다. 공력을 그다지 많이 쓴 것이 아니었는데도 운전사 는 맞기도 전에 기절해 버렸다. 현암은 기절한 운전사를 끌어낸 다음 차에 올랐고, 연희는 아라를 들다시피 해서 앞자리에 탔다. 뒤이어 윌리엄스 신부가 최 교수를 차 안에 던지듯이 집어넣고 뒷자리에 탔는데, 최 교수는 그때까지도 윌리엄스 신부의 무서 운 얼굴을 보고는 공포에 떨면서 반대편 차문을 열고 도망치려 고 했다.

현암은 차를 뒤로 뺐다가 다시 전진 기어로 전환시킨 다음 액 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는 끼익 소리를 내더니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뿜어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연희는 손 을 뻗어 사이렌을 급히 떼어 내 밖으로 던지고 차 안의 실내등 도 꺼 버렸다. 현암의 사자후와 윌리엄스 신부의 돌풍을 모두 맞 은 경찰들은 그때까지도 일어나지 못했다. 차 뒷자리에서는 피 를 소모해 버린 윌리엄스 신부가 원래의 얼굴로 돌아오면서 힘 이 빠져 버렸는지 기절했고, 아라도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최교 수는 패닉 상태에 빠져 후들후들 떨고만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연희 씨?”

연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우린 추적… 추적당하고 있어요!”

“추적당하다뇨? 그게 무슨 말이죠?”

“승희가 백호 씨의 마음속을 투시했어요. 백호 씨에게 전화를 했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무조건 피해 있으라고 했다는군요. 그 래서 투시했대요. 그런데…………….”

“뭐죠? 도대체 무슨 이유로 신부님이 잡혀가고, 경찰이 우리 를 체포하려는 겁니까?”

“세계 각국의 정보망에 여러분들의 존재가 알려졌다나 봐요. 한국에서 비밀리에 키우는 일종의 비밀 무기라고요.”

현암은 눈썹을 곤두세웠다.

“비밀 무기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그래 서 각국 정보기관에서 여러분들을 없애려고 하는 거래요…………….”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게 무슨 큰 죄라도 된다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우리를 해치려고 하 는 거죠?”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면 승희는 세계의 어떤 비밀도 모두 캐낼 수 있어요. 마음만 먹는다면요. 이름 하나만 가지고도 미국 대통령이나 나토 사령관의 마음을 읽어서 군사 기밀을 모조리 읽어 낼 수도 있지요. 그리고 준후나 현암 씨는 아무 무기도 가 지지 않고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해치울 수가 있을 거구요.”

“우리가 사람을 해친다고요? 미쳤군요!”

“저도 알아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을 극도의 위험인물로 보고 생포하지 못 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졌대요.”

“아니!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암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달리던 차가 갑자기 흔 들렸고 현암의 얼굴엔 분노가 서렸다. 연희는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계속 말했다.

“그렇지만 현실이에요. 기억나세요? 우리를 죽이려고 할 때에 마스터가 했던 말, 우리는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했죠. 곰곰 생 각해보니 그 말은 이걸 의미한 거였어요.”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마스터가 어떻게 했기에 사람들이 그 렇게 믿게 만든 거죠? 어떻게 동시에 세계 각국의 블랙리스트에 우리의 이름이 올라갈 수 있는 거죠?”

“그건 몰라요. 백호 씨도 그 점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하나 봐 요. 중요한 건 그들이 여러분들을 암살자나 스파이 요원으로 믿 는다는 점이에요. 핵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들이라고……………… “

언뜻 보니 현암의 표정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몸 이 떨리고 있는 것을 연희는 느낄 수 있었다. 현암의 입에서는 중얼거림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요. 힘・・・・・・ . 세상에 대한 책임・・・・・・ . 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는군요. 우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하하하.”

현암의 허탈한 듯한, 너무도 공허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연희는 아무런 위로의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대신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몸만 바르르 떨 뿐이었다. 왜 이들만 당해 야 하는가? 힘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려 했던 자들이 더 많이 있는 데…………. 이들은 오히려 그들로부터 세상을 구해 낸 은인들인지 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퇴마사들을 진정한 동료 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퇴마사들은 비공식적이나마 영국 여왕 에게 훈장과 작위까지 받았고, 미국에서도 경찰의 지원하에 블 랙서클을 소탕했다. 일본에서도, 독일에서도, 또 루마니아에서 도…………. 이들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아무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더니 막상 그 실체를 알고 나서부터는 핵무기보다도 ‘위험한 존재들’로 구분해 사냥당하는 신세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연 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억울해요! 정말 너무해요! 너무……”

분노를 넘어선 절규였다. 그러나 현암은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평정을 되찾아 가는 것 같았다. 현암의 목소리는 나직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명단에 오른 게 누구누구지요? 나 박신부님, 준후, 승희·….연희 씨는 힘이 없으니 오르지 않았겠군요.”

“우리 넷뿐인가요? 대답해 주세요.”

연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랬군요. 언젠가 올 일이 온 것인지도 모르지요. 예전에 신 부님과 농담 비슷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우리가 가진 힘 이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우리는 아마 제명에 죽지 못할 거라 고………….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사실이 되었군요. 연희 씨나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겠지요. 허허허.” 연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현암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현암 씨, 우리 정부도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니에요. 백호 씨 혼자 애쓰는 모양이지만 잘되지 않았나 봐요. 그리고 백호 씨는 지금 중국으로 오고 있대요.”

“그럴 겁니다. 우리를 편들기에는 힘이 너무 부쳤겠지요. 그나 저나 백호 그 사람 오면 위험해질 텐데………….”

“각오한 모양이에요. 승희 말로는 어떻게든 우리를 탈출시키 려고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혼자 오는 모양이래요.”

“허허허.”

“현암 씨, 웃지 말아요! 억울하지도 않나요?”

“어차피 변한 것은 없어요. 우린 항상 그늘 속에 있어야 할 존재지요. 큰일을 돌본답시고 바깥으로 노출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몰라요.”

“어쩜 죽을지도…….”

“우린 항상 죽음과 같이 살아왔어요. 특별히 별다른 것도 없습니다. 운명이 그렇다고 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겠죠.”

어떻게 이런 판국에도 이따위 소리를 하고 있단 말인가? 연희는 화가 치밀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예요?”

현암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래요. 아직 포기해서는 안 되겠죠? 아직도 악한 자들이 많 이 남아 있고 고통당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현암은 말을 멈추고는 차를 급정거시키더니 그 자리에서 방향 을 휙 돌렸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연희에게 말했다. “신부님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지금 어디 계시죠?” “티베트행 준비를 하러 담당 부서에 가셨다가 그 자리에서 잡 혀가셨대요. 그것밖에 몰라요.”

“신부님을 구해야 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운전석 쪽 문에는 운전용 지도 한 권이 꽂혀 있었다. 현암은 운전을 하면서 지도책을 연희에게 넘겨주었다.

“신부님께서 붙잡혔다는 곳이 어딘지, 지도 좀 봐주시겠어요?” 

마침 가로등이 훤히 켜진 구간을 지나가고 있어서 연희는 연 속적으로 지나가는 불빛에 비친 현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현 암의 부릅뜬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희는 그 모 습을 보고는 마음이 너무도 아파서 자신도 모르게 지도책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같은 시각, 인도에서는 승희와 준후가 불안한 표정으로 조금 전 에 깨어난 바이올렛이 모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중이었다. 승희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는 너무 머리가 혼란스럽고 눈앞 이 캄캄했다. 그래서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준후를 찾았다. 병원 에 도착해 보니 바이올렛은 깨어 있었고 승희는 바이올렛과 준 후에게 사실을 다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알고 있다면서,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밖으로 나가더니 차까지 한 대 빌려 왔다. 승희는 마치 제 일처럼 신경 써주는 바이올렛이 무척 고마웠다.

바이올렛은 승희와 준후를 시 외곽의 외딴 빈집의 창고에다 내려 주고는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차를 몰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황량한 집에 단둘만 남은 승희와 준후는 처량한 몰골로 침침한 창고에 들어가 지푸라기 더미 위에 주저앉았다. 한참 만 에 준후가 말을 꺼냈다.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랬던거군요. 「해동감결」이・・・・・・”

『해동감결이 왜?”

“네 명의 큰 손님이 세상에서 잊힌다는 구절이 있었어요. 이제야 이해가 될 것 같네요.”

“뭐? 그런 것이 있었니?”

“좀 꺼림칙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큰물이 집을 쌓 는다 했으니 그건 커다란 물이 집 위로 넘치는 것, 즉 홍수를 말 한 거겠죠? 그리고 녹비를 보고 북으로 서로 달린다는 건……………. 아마 에메랄드 태블릿을 말한 걸 거예요. 북쪽은 어디를 가리키 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요. 장진래출 사대객망(眞四 忘), 장차 드러날 진실을 감추고 네 명의 큰 손님은 잊히리라. 잊힌다고…………….”

“아아!”

승희는 머리가 아픈 듯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뱉었고 준 후는 입을 다물었다. 승희는 한참이나 번민하다가 준후에게 말 했다.

“잊힌다? 그렇다면 꼭 죽는다는 뜻은 아닐지도 몰라. 그렇지 않니?”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명확한 건 알 수 없어요.”

승희는 준후가 좀 희망적인 대답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현암 같은 말투로 이야기하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다가 갑자 기 깔깔거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왜 그래요. 누나?”

“너무 우스워서. 하하하. 그 바보들, 우리를 정말로 알았다 면……. 하하하. 지금 우리를 찾으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겠 지? 하하하. 세계 평화를 지킨다고 하면서 인상들을 잔뜩 쓰고 말야. 그걸 생각하니 우스워서………….. 하하하.”

승희는 배를 잡고 웃어 대다가 급기야는 고개를 짚 속에 푹 파 묻더니 이번에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준후는 승희가 펑펑 우는 것을 보고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승희의 어깨를 도닥거리지도 못하고 툭툭 손끝으로만 건드리고 있었다. 승희는 목 놓아 울다 가 눈물과 짚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승희의 눈 빛이 번쩍거렸다.

“그래, 그렇다면 소원대로 그렇게 해 주자. 어때? 지금부터 미 국 대통령의 마음을 모조리 읽어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알 려 주는 거야. 미국 대통령 이름이 뭐였지? 가만, 소련은 망했지. 그렇다면 …………….”

“누나!”

“아냐! 그래. CIA 책임자가 누구지? 하하하. 우리나라 안기부 장은 누구지? 마구마구 읽어 내서 수백 장 복사해서는 남산 타 워 꼭대기에서 뿌리는 거야! 하하하. 모조리 다 까발려서 사방에 뿌리자! 준후야, 누가 오면 넌 불로 한 방 갈겨 버려! 아냐, 아냐. 매일매일 미국 대통령 침실에 지박령이라도 두어 놈 들여보내는 거야! 영국도, 중국도, 독일도……. 일본 수상한테는 특별히 서 비스로 다섯 마리다. 하하핫.”

“승희 누나!”

“현암 군은 뭘 시키지? 그래! 어떤 놈이 방해하러 오면 한 주먹에 박살을 내버리는 거야! 월향도 있잖아? 머리를 날려 버려! 신부님은…………. 그래, 교단이 파문시켰지. 교황청에 가서 오라를 펑 터뜨리는 거야. 교황청 건물을 무너뜨려 버리고…………. 그러면 준후, 너는 불이라도 질러 줘. 나는 가서 물 뿌려야지. 숟가락으 로…………. 하하하.”

“승희 누나, 정신차려요!”

준후가 듣다 못해 눈물을 흘리면서 빽 소리를 지르자 승희는 그제야 멈칫하면서 멍한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그래, 그래. 말도 안 되지. 그래…………. 그런 건 말도 안 돼, 그렇 지? 우린 죽어도 그런 짓은 못할 거야, 안 그래? 그런데 누가 알아 주지? 그걸 누가 알아준단 말야? 세상에 누가 누가 말야…………….” 

준후도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승희는 멍한 자세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퀴퀴하 고텅 빈 창고 안에서는 준후의 간헐적인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게 마련 이다. 지금 현암이 겪은 일이 바로 그러했다. 처음에 현암은 거 의자포자기 상태였다. 다만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일단 박신 부를 구해 낼 생각밖에는 없었다. 현암의 생각으로는 박 신부가 잡힌 이상에는 그렇게 쉽게 죽이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박 신부가 지니고 있는 힘의 정체를 알 아내려고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박 신부는 엄청난 고통을 겪을 것이었다. 현암은 최소한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만약 퇴마사들 의 운명이 모두 죽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옥에 갇혀서 취조를 받으며 별종처럼 취급되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여기 에는 책임감 같은 것도 있었다. 퇴마사들의 능력의 실체가 정말 로 밝혀진다면? 대답은 뻔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퇴마사의 존재는 잊히는 편이 좋다고 박 신부와 현암은 논의한 바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그 들의 정체를 밝히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 다니…………. 세계 각 나라의 정보기관에서 자신들을 공동의 적으 로 규정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퇴마사들의 특이한 능력을 무 기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현암은 이번만은 있는 힘을 다 발휘하여 다른 사람이 몇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박 신 부를 구할 생각이었다.

박신부가 잡혀 있다는 관공서 근처에 다다랐을 때 연희의 눈 에 먼발치에서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상을 쓰고서 그 사람을 유심히 쳐다보던 연희가 큰 소리로 외 쳤다.

“저・・・・・・ 저 사람! 신부님이에요!”

“어!”

현암은 있는 대로 급브레이크를 밟고서 인정사정없이 차를 멈춰 세웠다. 차에 탄 사람들 모두 머리를 찧을 정도로 몸을 휘청 했지만 현암은 벌써 차에서 내려 달려가고 있었다.

“신부님!”

박 신부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절룩거리며 걸어가 다가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박 신부는 전혀 놀란 표정이 아니었고 오히려 희미한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마중 나와주었구먼. 다리가 좀 쑤시던 참인데 잘되었네.” 현암은 잡혀가서 고초를 겪을 거라 걱정했던 박 신부가 멀쩡 하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어리둥절했다. 뒤이어 달려온 연희가 화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신부님! 어떻게………….”

“사고 좀 쳤지. 성직자라는 자가 사고나 치고 다니다니. 윌리 엄스 신부님께 고해성사라도 해야겠네. 아멘…….”

그러고 보니 박 신부의 사제복에는 먼지와 흙가루 같은 것들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웃고 있었지만 조금 피곤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 없으셨나요?”

“난 괜찮네. 그나저나 조금 있으면 날 잡으러 사람들이 올 텐 데. 내 다리로는 빨리 뛸 수가 없잖은가? 그렇다고 전화 걸 동전 한 푼이 없으니……. 허허허. 여기서 만나다니 참으로 다행이네.” 

“잡으러 온다고요?”

“다짜고짜 잡아다가 깊은 곳에 가두어 두더구먼. 나야 누가 보아도 힘없는 노인 아닌가? 다리도 불편하고……………. 그래서 누가 지키지도 않더군. 그래서 힘 좀 썼네.”

“힘을요? 감방 벽이라도 부수셨나요?”

“깊숙하긴 깊숙한 곳이더군. 벽을 다섯 개나 부숴야 했네.’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몰려나왔을 텐데요?”

“다 방법이 있네. 그러나 방법은 옳지 못했어. 속죄해야겠네.” 

박 신부는 씁쓸히 웃어 보일 뿐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그 러나 연희나 현암은 박 신부의 오라력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어 떻게 감방 벽을, 그것도 다섯 겹이나 되는 것을 소리도 내지 않 고 부술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차에 타고 난 다음에도 연희가 끈질기게 물어보자 박 신부는 할 수 없다는 듯 말해 주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그때까지도 기절 해 있었고 최 교수도 어느 사이 곯아떨어져서 꽤 덩치가 큰 박 신부가 밀고 들어오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 아라도 마찬가지였 다. 다들 극도로 피곤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분께서 내게 힘을 주셨네. 그런데 이런 데에나 써먹다 니…………, 나원참…… 아멘.”

박 신부는 근래에 와서 ‘그분’ 이야기를 가끔 했는데 그것은 일본에서 박 신부가 한 번 죽었다(?) 깨어난 이후부터였다. 연희 는 내심 그분이 예수님이 아닐까 생각했고 승희는 천사장 미카엘이 아닐까 했지만, 박 신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현암이 나 준후도 묻지 않았다.

“그래. 사실 내가 빠져나오려고 옳지 못한 짓을 했지.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어. ‘악한 것과 부정한 것 들은 질그릇처럼 부서지 리라’라고. 그래서 …………….”

“그래서요?”

박신부는 쑥스러운 듯 웃었다.

“아무리 감방 벽이라도 사악한 것은 아니잖은가? 그래서 나는 돌조각을 들어 내 손으로 벽에 부정한 기호를 그렸네. 성직자로 서 할 짓이 아니었지만…………….”

연희의 눈이 커졌다.

“아니, 그러면 부정한 기호를 그린 다음에는 감방의 벽을 질그 릇처럼 부술 수 있으셨다는 거예요?”

박 신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아마도 자기 손으로 부정한 기호를 다섯 개나 그린 것에 대해 참회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정한 기호가 있는 벽이라면 소리도 내지 않 고 부술 수 있다니………. 박 신부에게 언제 그런 힘이 생겼단 말 인가? 연희는 박 신부가 기도를 끝내자 저간의 사정 이야기를 했 다. 연희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박 신부는 미동도 하지 않 았다. 마치 남의 일을 듣는 듯했다.

“별수 없는 일이지. 그나저나 티베트에 못 가게 되었으니 어쩐다 약속을 했는데 죄송할 뿐이군.”

“신부님! 어떻게 그렇게 남의 말 듣듯 하시나요?”

“허허허. 그렇게 된 것을 지금 와서 난들 어쩌겠는가? 안 그런 가. 현암 군?”

“음! 위험하기로 따진다면 마스터나 그 신동들을 상대하는 것 이 훨씬 더 위험하지. 사람들의 추적은 그리 큰 위험이 되지 않 아요. 외부로 드러나게 힘을 쓸 때부터 내 언젠가 이리될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

“그러나 신부님! 억울하지도 않으세요?”

“연희 양.”

박신부는 울고 있는 연희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울지 말아요. 자꾸 울면 미워지니까…………….”

“신부님! 네 분 모두가 전 세계의 적이 되어 버렸어요. 이런 법 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일이 어떻게 되었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우리는 우리의 할 바를 할 따름이네. 그 이상의 것은 없어.”

연희는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나 태연해 보이는 박 신부를 한 편으로는 이해할 것 같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동감할 수 없었 다. 박 신부나 현암은 무슨 신선이나 성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감정도 없단 말인가?

“그래… 연희 양. 자네가 윌리엄스 신부님과 함께 티베트로 가 주지 않겠는가? 그 에메랄드 태블릿은 이번 일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

“네? 제가요?”

연희는 의외라는 듯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번 소동에 본의 아니게 참여하기는 했지만 자네들까지 체 포하지는 않을 듯싶어. 위험한 것은 우리 넷뿐이라니까 말야. 그 리고 내 생각엔 티베트의 에메랄드 태블릿도 대단히 중요한 의 미가 있을 것 같으니…………….”

“싫어요! 신부님, 저를 떼어 놓으려는 거죠? 위험할까 봐 그러 시는 거죠? 네?”

박신부는 정곡을 찔린 듯 조금 찔끔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평온한 음색으로 말했다.

“그런 의미도 있어.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네.”

“무슨 말씀이시지요?”

“연희 양 거듭 말하지만 티베트에 있다는 에메랄드 태블릿은 어쩌면 우리의 이번 일에 정말 중요한 것인지도 몰라. 준후가 있 다면 잘 알 텐데…. 허허허. 나는 우연히 준후가 해동감을 번역하는 것을 일부 본 일이 있지.”

“네?”

“거기에 녹비의 이야기가 나오는 구절이 있더군. 홍수로 짐작되는 구절과 함께…………. 그런데 준후 그 녀석은 이야기도 않고, 나에게 에메랄드 태블릿의 내용만을 알려 달라고 하더군. 허허허. 귀여운 녀석…….”

박 신부는 더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으나 실제로는 이미 준후가 고민하고 있던 그 구절, 즉 네 명의 큰 손님이 세상에서 잊히리라는 내용의 구절을 전에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준후는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알까 봐 어물쩍 넘어가려 했다. 그러나 박 신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박 신부는 무 슨 사단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에 대 한 대비책을 마련할 생각은 하지 않고 태연하게 응해 왔었다. 

“음, 일단은 어디로 가서 쉬기로 하세. 나도 피곤하지만 여기 이분들은 완전히 녹초가 된 것 같군. 그런데 윌리엄스 신부님은 주무시는 것이 아니라 기절하신 것 같은데?”

이번에는 앞자리에서 현암이 쾌활한 말투로 대답했다.

“힘 쓸 일이 있었어요. 또 흡혈귀로 변하셨지요.”

“저런 저런. 아멘! 또 번민하시겠군. 허허허. 아예 이 기회에 나와 서로 고해를 주고받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그러고 보니 왜 진작 윌리엄스 신부님을 내 고해 신부님으로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역시 늙으면 머리가 돌이 된단 말이야. 허허허.”

“듣고 보니 그러네요. 두 분이 서로 고해 신부님이 되어 주시 면 좋겠군요.”

“그래, 좋은 방법이구먼. 역시 현암 군은 젊어서 그런지 나보 다 머리가 훨씬 잘 도는구먼. 허허허.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나?” 

“저도 몰라요. 기름이 다 될 때까지 어디론가가 보죠.” 

“그보다는 한적한 빈집 같은 곳을 찾아보게나.”

박 신부와 현암이 주고받는 말들을 들으면서 연희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야릇한 기분에 휩싸여 버렸다. 솔직한 감정으로 이제 그들은 거의 사람 같지 않았다. 성인군자 흉내를 내고 있다 고 표현하면 지나친 것일까? 좌우간 자신과는 다른 곳에 있는 사 람들같이 여겨져서 연희는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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