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2화 – 길을 건너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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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2화 – 길을 건너지 마라


‘사고다발지역. 주의!’

교차로도 급커브길도 아니었다. 그냥 곧게 뻗은 평범한 사차 선 도로에 불과했다. 구태여 다른 점을 찾아보라면 도로의 한 곳 에 그어진 횡단보도의 흰색 선이 마치 새로 칠한 것인 양, 선명 하다는 것뿐이었다. 신호등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특별 히 시야를 가리거나 할 만한 지형지물도 없었다. 그러나 횡단보 도의 양쪽 신호등 옆에는 큼직한 팻말이 매달려 있었다. 

‘사고 다발 지역. 주의!’

그런 팻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길은 넓었지만 교 통량이 그리 많은 도로도 아니었고, 이 도로로 접어들기 전에 커 브가 하나 있기 때문에 과속으로 지나가는 차들도 없었다. 그런 데도 그곳은 사고 다발 지역이었다. 박 신부는 건널목 앞에 서서 팻말을 쳐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을 건너기 위해 무심하게 서 있는 몇몇 사람들과 간헐적으로 지나가는 차들은 여느 변두리의 한가로운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런 곳에서 왜 사고가 자주 난다는 것일까?’

박 신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괜히 쓸데없는 일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로 했다. 신호가 바뀌어 녹색의 횡단 신 호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주위를 기웃거리면서 차도로 발을 옮 겨 놓았다. 박 신부도 사람들 틈에 끼어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 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때쯤 뒤에서 야릇한 기운 이 느껴졌다. 박 신부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서둘러 길을 건 넌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기운은 특이한 것은 아니었 다. 저쪽에서 웬 중년의 남자 하나가 길을 건너려고 바삐 뛰어오 고 있었다. 아직 신호는 빨간불로 바뀌기 전이었고, 횡단보도 양 쪽에는 차들도 없었다. 다만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트럭 한 대뿐. 박 신부는 걸음을 옮겨 갈 길을 가려고 했다. 백호가 긴히 할 말 이 있다고 하여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뒤에서 슬픈 기운, 이상한 기운이 자꾸만 느껴졌다.

 ‘뭘까? 아주 약한 기운인데………………’

박 신부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신호는 막 빨간색으로 바뀌 었고 중년 남자는 길을 거의 다 건넌 참이었다. 그리고 저만치서 달려오던 트럭은 신호등이 바뀌고 사람들이 길을 다 건넌 것을 보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

“어엇!”

박신부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길을 다 건너 서 두어 발자국만 더 오면 되는데, 갑자기 중년 남자가 길 위에 엎드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서 오던 길을 되돌아기어갔다.

“어어! 저거 저거!”

“저 사람 미친 거 아냐! 어어!”

끼이이익!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트럭 운전사가 급제동을 걸었다. 하지 만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오던 터라 트럭은 요란한 마찰음을 내 며 마치 빙판에서처럼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박 신부 는 자기도 모르게 길로 뛰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기어가던 중년의 남자는 횡단보도 한복판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들고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도 눈앞에 덮쳐오는 트럭에 대해서 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박 신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름 끼칠 듯한 마찰음과 쿵 하는 둔탁한 충격음. 땅에 반쯤 엎드려 있던 중년 남자의 몸을 깔아뭉갠 트럭은 십여 미터를 더 미끄러지고 나서야 겨우 멈추었다.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의 비 명과 아우성으로 거리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때 저쪽에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트럭 운전사가 온몸을 벌벌 떨면서 다가 왔다.

“보셨죠? 봤죠! 내 잘못이 아니에요! 이 사람이 뛰어들었어요!” 

트럭의 커다란 타이어 너머로 붉은 피가 서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을 가려 버리는 여자도 있었고, 급히 발을 놀려 골치 아파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멍하니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박 신부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아니라구요! 이 사람이! 아니 왜 하필이면 내 차에……………. 으흐흐…..”

운전사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멀쩡한 대낮, 어느 변두 리 길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운전사의 울부짖 음은 차도 위로 흘러내리는 핏물의 색깔과 끈끈하게 얽혀 들고 있었다. 그 동네 사람인 듯한 노인이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길을 건너지 말아야하는데 이 길을 건너서는 안되는데……………”

박신부는 백호와의 약속도 잊은 채 멍하니 그 사람의 이야기 를 들으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경찰들이 달려 나오는 파출소문으로 눈을 돌렸다.


밤이 되었다. 꽤 늦은 시간이어서 이제 길에는 차들도 거의 다 니지 않았다. 박 신부는 승희를 데리고 어두운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박 신부의 걸음걸이는 상당히 빨랐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는 승희는 뒤를 쫓느라 연신 헉헉댔지만 박 신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신부님! 잠시만요! 왜 이렇게 서두르시죠?”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다. 이러다가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오면 안 돼!”

“그렇게 급한 거예요? 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사실 박 신부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뿐이겠지만, 승희는 웬 만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같이 일하는 퇴마사들의 마음속을 들여 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남의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본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재미있는 것 같지만, 그야말로 당사자에게 는 삶의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승희도 자신의 그 러한 능력 때문에 몇 번 쓰라린 일을 당한 이후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자제했다.

박신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이렇듯 서두르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승희야, 급하단다. 난 오늘 그 건널목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 았다. 그다지 강하거나 사악한 힘은 아니었어. 그런데 …………….”

“사악한 것도, 강한 것도 아니라면 왜 그리 서두르시죠?” 

“그것이 더더욱 문제야. 아까 나는 그 건널목에서 멀쩡하던 중 년 남자가 갑자기 무언가에 씐 듯 오던 길을 되짚어 기어가서는 차에 치이는 것을 보았단다.”

“기어서요? 아니 왜 그랬을까요?”

“빙의된 거야. 틀림없어. 지박령*에게 빙의를…………….”

“지박령이요?”

“그래, 그래서 나도 영사를 해 보려 했지. 그러나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어. 분명 영에 의해 사고가 난 것이 틀림없어! 그런 데………….”

“가만가만요. 신부님. 제가 신부님 마음을 읽어도 되겠지요?”

“그러렴. 말로 하는 것보다 그게 빠르겠구나.”

승희는 한동안 정신을 모아 박 신부의 기억에 남아 있는 사고 의 광경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몸서리를 쳤다.

“불쌍하게도……………. 그런데 도대체 저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 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젓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너는 아직 영에 대한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알지는 못할 테니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보기에 그 건널목에 깃들어 있는 것은 분명 지박령이야. 지박령이 뭔지는 알지?”


*특정한 이유가 있거나 본인의 원한 또는 자신이 죽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등 의 이유로 승천하거나 환생하지 못해 일정한 장소에 붙어 있는 영. 이러한 지박 령은 시간의 경과를 느끼지 못하고 계속 규칙적으로 죽기 직전에 행했던 행동들 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요. 전번에 왜구들의 고분하고 또・・・・・・ 으,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요.”

“그들은 너무나 흉포했던, 드문 경우였고 이번은 그렇지 않아. 승희야, 그 건널목은 특별히 사고가 많이 날 위치가 아니야. 그 러나 이상하게도 사고가 잦지. 내가 아까 알아본 바로는 이번 겨 울동안에만 벌써 열일곱 번의 사고가 났단다.”

“예? 그러면 겨울을 사 개월로 잡는다 치고 일주일에 한번이 상이나 사고가 난 셈이군요?”

“그래. 그런데 이번 겨울 이전, 즉 오 년 전 건널목이 생긴 이 래로 이번 겨울 전까지는 단 두 번의 사고만이 있었다는 거야. 더 자세한 내용까지 알아보려고 했지만 경찰서장은 내가 그런 일들을 묻자 공연히 신경질을 내더구나. 그래서 더 이상은 못 물 어보았단다.”

“그렇게 사고가 많이 나는 것에 지박령이 관련될 수 있나요?” “물론이야. 지박령들 중 자신도 채 모르는 사이 급사를 당하 거나 특별한 일에 몰두하다가 죽게 된 영들은 무의식적으로 자 신이 죽을 때의 동작을 반복한다고 한단다. 그러니 이번 경우 는………….”

승희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박 신부의 설명대로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유난히 이유 없는 자살자가 많이 나오는 건물의 옥상, 이상하게 추락하는 차가 많은 벼랑, 연속적인 익사자가 나오는 저수지, 그리고 건널목, 아무 이유도 없이, 어디에선가는 누군가가 영문도 모르는 채 죽어 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알 수 없는 타의에 의해, 영에 의해

“음. 그러면 차에 치어 죽은 사람이 역시 그 동작을…………. 나쁜 영이네요!”

“그렇게만 평가할 수는 없어. 물론 악의를 가지고 그런 일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지박령들은 아무 생각도 없고 이유도 모르는 채 한자리에서 방황하는 거야. 그러다가 영 의 파장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흡수되듯이 빙의가 되는 것이 지.”

“그러면 빙의가 되어서 그 사람 역시 죽을 때의 동작을 반복하 게…….”

“그래. 악의가 있어서나 고의가 있어서가 아니야. 둘 다 피해 자인 셈이지.”

“세상에, 그렇다면 그다음에는 지박령이 둘이 되어 버릴 것 아 녜요.”

“그렇지는 않아. 일단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영이 알게 된 다면, 영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행동을 반복하는 것 을 멈추게 된단다. 그리고 승천할 길을 찾거나 어디론가 사라지 게 되지. 영이라고 해서 모두 사악한 것이 아니야.”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만약 아까의 사고가 빙의에 의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 죽은 남자는 길을 기어서 되돌아갔던 걸까요? 그러면 그 건널목의 영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그게 바로 문제야. 급히 영사를 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어. 아니, 약간 짐작되는 것이 있지만…………. 너무 나약한 기운이었지만, 반대로 그만큼 더 강렬한 힘을 가질 수도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통……..”

“가자. 가보면 너도 알 수 있을 게야.”

박신부는 간신히 숨을 돌린 승희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하필 이면 차가 정비소로 들어간 때라 걸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 부터 현암의 차를 빌려도 되는데 왜 그냥 걸어가는 것인지 궁금 했지만, 승희는 이유를 묻기가 불안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 지만 더 이상 궁금한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신부님, 그런데 왜 저만 오라고 하신 거죠? 준후나 현암 군도 있는데.”

“아……”

박신부는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이 맞다면, 아아…………….”

“왜 그러시는 거죠?”

“준후는 너무 어려. 그리고 현암 군은 아직도 성질이 너무 급해. 결코 그냥 넘어가려 하지 않을 거야.”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나도 아직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승희야, 마음을 굳게 먹어라.”

“위험한가요?”

“아니야. 그런 것은 아니야. 어서 가보자꾸나.”

둘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승희는 까닭 없이 마음이 불안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문제의 건널목에 도착했다. 박 신부는 걸음을 멈추더 니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부러 늦은 시간을 택해서 온 덕 분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간 에 길거리에서 영과 싸울 수는 없지 않은가?

박 신부는 기도성을 읊으면서 승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나 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박신부가 나직이 말했다.

“집중해야 한다. 내 능력으로는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으니 너만이 할 수 있을 거야. 자세히 살피렴.”

승희는 좌우를 둘러보면서 길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박 신부 가 잠시 주변을 보더니 건너편 공사장에서 가리개 하나를 들어 다가 건널목을 가로막아 차가 오지 못하게 했다. 승희는 중앙선 주변에 서서,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정신을 집중해 나갔다.

‘특별한 것은 느껴지지 않는데 있어 봐야 별 의식 없는 것들 뿐이고.’

건널목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애매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은 있었으나, 사람의 의식 같지는 않았다. 승희 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 신부가 입을 열었다.

“구체화된 생각을 읽으려고 하지 마라. 그냥 의식, 기분을 읽으렴.”

승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람의 영이 아니란 말인가? 승희는 정신을 모았다.

뭔가 있었다. 아, 땅에 바짝 붙은 낮은 곳을 헤매고 있다. 계속 움직이고…………. 그러나 멀리 가지는 않는다. 근처를 뱅뱅 돌고 있구나.

“이게 대체 뭐지?’

뭔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 자기에게 가까운 것이다. 아니, 물 건은 아니고 뭘까? 따뜻하고 안온한 것. 기억을 찾고 있는 것일 까? 아니, 그것도 아니고

‘몹시 놀라 있다. 당황해하고 있고. 그런데 왜 그럴까? 대체 뭐지?’

승희는 숨을 들이켜면서 머릿속으로 사고의 초점을 맞추어 갔다. 왜 이리 어려운지 알 수 없었다. 혼란된 의식,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낯선 곳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 그리고 공 포, 혼돈, 절망감.

‘보인다! 아 이건 여자의 얼굴…………..’

잠시 떠올랐던 여자의 얼굴은 금세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새 로운 공포감, 불안, 끝없는 당황, 슬픔, 절망,

‘이게 도대체 뭐지? 기억이 거의 없는 영. 모습도 잘 볼 수가 없군. 기억에서 단서를 잡아야 모습을 볼 것 아닌가? 대체 뭐기 에?’

승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눈을 떴다. 승희의 몸과 이 마가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승희는 박 신부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보이기는 하는데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 요. 전혀!”

“승희야, 포기하지 말고 더 해 보렴.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거 야. 너무 기억이나 말로 된 생각에 집착하지 말고 순수한 기분 그 자체를 읽어 봐.”

기분 그 자체라, 승희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박 신부는 침중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며 기도를 중얼거렸다.

승희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알아낼 수가 없 었다. 의식이나 마음 자체에 신경을 집중하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런 태도를 일순에 가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단서가 있어야지. 그냥 막연한 기분뿐인데.

승희는 눈을 감은 채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투시라는 것은 무 언가 막연한 것일지라도 단서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런데 지금 자신은 전혀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 채 뱅뱅 돌고만 있 었다. 단서가 없다면? 그렇다. 유추해야 했다.

‘작다. 그리고 약하다.’

그리고 또

‘슬퍼하고, 당황하고 헤매고 있다. 그리고…………….

승희는 몸을 흠칫 떨었다.

‘기어 다닌다…………….. 혹시?’

드디어 보였다! 승희가 눈을 와락 떴다.

“세상에!”

박 신부가 휘청거리는 승희의 어깨를 잡았다. 승희의 얼굴은 어느새 일그러져 있었고, 금세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신, 신부님, 이, 이건…….”

“승희야, 놀라지 말고 이야기하렴.”

“아아, 이럴 수가. 아기, 아기예요. 자기 이름도 모르는 갓난아기……”

승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안절부절못하는 사이에 박신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승희의 눈은 초점 없이 먼 곳을 향한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승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어눌한 말투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누가・・・・・・아니, 도대체 왜? 왜 이런 곳에 아기가 헤매고 있지요? 도대체 왜?”

“승희야, 자세히!”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닌가요?”

승희는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모은 상태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녜요. 느껴져요. 이제는 자세히 보여요. 추위! 너무 추워요. 몹시 추워하고 있어요! 하지만 날씨 때문만이 아니에요. 전엔 따 뜻한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아녜요! 멀어져 버렸어요. 아늑함, 기분 좋은 냄새, 따뜻함. 그 모든 것에서 멀어졌어요. 아아, 아무 도 없어요. 아무도, 왜? 알 수 없어요. 납득도 못하고 있어요. 그 리고 무서워해요. 아아…………….”

승희는 이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박 신부는 행여 무너져 버릴지도 모르는 승희를 굳게 잡고 계속 ‘아멘, 아 멘’중얼거리고 있었다.

“찾아야 해요! 그래요. 어딜 갔는지. 아아, 춥고, 아무도 없어 요. 불안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버둥거려요! 찾아 나서 고・・・・・・ . 그러나 없어요.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그렇지! 원래 있 던 곳에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그 따뜻함. 그래! 아아, 엄마, 엄마가…………….”

승희가 눈을 크게 뜨면서 횡단보도의 한곳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 잘 움직여지지도 않는 고사리 같은 손발을 놀리며 허우 적거리는 아기의 영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엄마가 올까? 자기가 있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 까? 그래, 저는 보여요. 이제 알겠어요. 그러나, 그러나 없어요. 원래 자리에 없어요. 그러면 아까 갔던 곳에 있는 게 아닐까? 다 시 가야 해요! 그리고 또, 또!”

승희의 목소리는 반쯤은 울음으로 변해 있었고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슬픔과 외로움. 승희의 근원적인 모성 본능이 자신도 모 르게 아이의 심정을 그대로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는 것이 분 명했다.

“승희, 승희야! 정신차려!”

“추워요! 추워! 언제, 언제면 돌아올까요? 얼마나 더 기다려 야 하는 걸까요? 잘 움직여지지 않아요.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몰 라요! 아아, 누가 와요! 엄마, 엄마가 아닐까!”

박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왜 그리 순간적 으로 빙의될 수 있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아기의 힘 자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어머니를 찾는 마음. 그 간절함에 누가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대로 놔둘 수만은 없었다.

“자, 자, 승희야, 이제 그만하렴. 충분하단다.”

 “한살도 채 안 된 아이인데.”

“자, 그만, 그만해. 이제는 되었다.”

박신부가 다독거려 주자 승희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승희는 목멘 소리로 박 신부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신부님?”

“어쩌긴 저 가엾은 영을 편히 쉬게 해 주어야지.”

“예. 하지만……..”

승희는 몇 번이나 차도와 박 신부를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지? 숭희야?”

“저 애에게 마지막으로라도 엄마를 보게 해 줄 수는 없을까요?”

“글쎄다.”

박신부는 당혹했다. 승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어느 틈에 아이의 어머니를 찾아낸단 말인가? 그사이에 저 철없고 가 엾은 아기는 물론 스스로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몇 명의 사람을 본의 아니게 해치게 될지도 몰랐다.

“안 돼. 나도 가엾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부님! 부탁이에요! 전 어떤 여자의 얼굴을 봤어요! 맞아요! 그건 저 아기의 엄마 얼굴이 분명해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승희야, 그러나 말이다. 만약…….”

박 신부는 자리에 선 채 고개를 저었다. 박 신부의 눈빛이 동정을 가득 담은 채 텅 빈 건널목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내던져진 어린 생명. 승희는 아기의 엄마를 찾아 주자고 했고, 그게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승희의 투시력으로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희는 어느새 눈을 감고 다시 정신을 모으고 있었다.

“아, 이름은 란…………. 아기 엄마의 이름은 성란이에요. 그리고……..”

박신부가 왠지 긴장된 표정으로 승희의 얼굴을 주시했다. 승 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미혼모였군요. 저런. 그리고…………….”

박신부가 승희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승희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예?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신부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승희야, 생각해 보렴.”

“뭘 말이에요? 생각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어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각해 보아야 한단다. 반드시.”

승희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박 신부 는 건널목을 쳐다보고는 승희에게 눈짓을 했다. 혹시나 아기의 영이 조금이라도 눈치를 챌까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승희는 박신부의 속삭이듯 울려 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승희야, 냉정해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 다. 저 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것이 분명해. 그 성란이라는 여자가 미혼모였다면 십중팔구 실수로 아기를 이런 곳에서 놓친 것은 아닐 거야. 아마도 아기를 어떻게 할 수 없어 ……”

“아녜요! 그럴 리가요!”

승희는 자기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박 신부는 슬픈 눈빛으로 건널목 쪽을 가리키며 승희에게 다시 눈짓을 했다. 승희는 어쩔 수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마 그 여자도 자신이 낳은 아기가 이렇게 되었을 줄은 모르 고 있을 거야. 누군가의 집이나 하다못해 고아원에서라도 자라 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그런데 우리가 불쑥 나타나서 아기가 죽었으니 영혼이라도 만나 보라고 한다면…………. 아니, 그런 말을 할수는 없지 않겠니?”

승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박 신부의 말이 맞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리고 저 아기에게도 문제가 된단다.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 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무리 아기라고 해도 엄연한 인격체 가 아니냐?”

“하지만 엄마가 아기를 버리다니…”

박 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박 신부도 답답하고 암울한 감정을 이기기 힘든 것 같았다.

“승희야, 그 여자는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거란다. 어떻게 그렇 게 아기를 쉽게 가졌는지는 모르지. 실수였거나 별 생각 없이 그 랬는지도 몰라. 아아, 얼마나 끔찍한 일이냐? 그러나 저 아기를 버리기까지 여자의 마음은 도대체 어떠했겠니? 얼마나 괴롭고 곤란했으면 아기를 버리게 되었을까? 승희야, 그 여자의 나이가 어느 정도 된 것 같니?”

“한 스무 살 정도밖에 ……………”

“그래, 무서운 일이야. 그런 어린 나이에 태연히 그런 일을 하 게 되다니.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죄는 이미 저질러졌어. 그리 고 벌도 이미 내려진 거야! 그 여자가 아기를 버리던 그 순간에 말이다. 이제 그 여자는 평생 이 일에 대해 가책을 받으며 살 거 야. 한시도 잊지 못하고 말야. 벌은 내려진 거야. 인간의 벌은 내 려졌고, 신의 벌은 영원히 내려질 거다. 거기에 우리까지 벌을 줄 수는 없지 않겠니?”

승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럴 것 같았다. 지나가는 어린아이 들만 보아도 자기가 버린 아기 생각이 날 것이고, 길가에 널린 기저귀 감만 보더라도 과거의 일이 떠오를 것이다. 절대로 도망 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그것이 신의 벌일 것이다. 그 여자 의 입장은 어떠할까? 젊은 나이에 아기를 낳고 또 아기를 버리고, 그 여자의 인생은 파멸, 아니 운 좋게 과거를 숨길 수 있더라 도 과거의 기억이 들추어질까 봐 평생 고통을 받을 것이 분명했 다. 그것이 인간의 벌이었다. 사랑이나 만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함부로 벌인 것에 대한 엄청난 징 벌. 남들이 금하기로 정해 놓은 것은, 그 일 자체는 아무리 하찮 은 것이라도 결코 세상은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대가는 치러지고야 만다. 영원히. 그리고 승희 자신은 별로 믿고 있지 않았지만, 만약 내세가 있다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면 그 벌은 낱낱이 들추어질 것이었다. 아니, 그렇게 먼 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그 여자에게는 지금도 하루하루가 지옥일 것이 분명했 다. 실수였는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한 번 때문에……………… 승희는 고개를 저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아, 불쌍해요.”

박 신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모두가 불쌍한 거야. 인간인 이상에는 말이다.” 

박신부는 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승희야, 연민을 가져서는 안 된단다.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동정심을 앞세워서는 안 되는 거야. 일 자체에 대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어쩌면 우리는 단지 마무리 만 할 뿐인지도 몰라. 그러나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지 않겠니? 결국 가장 중요하고 강한 것은 가장 단순하고 약한 곳에 있는 법이란다. 기도하고, 마음으로 염원하자꾸나. 우리가 할 일은 그것 뿐이다.”

“저는…………… 저는……………”

승희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힘이 있으면 그것으로 다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일 들을 다 막을 수 있을 줄⋯⋯⋯⋯⋯. 그런데, 그런데도……”

박신부는 눈을 감았다. 힘, 그리고 능력, 인간에게 과연 그런 일들이 중요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은 과 연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그들의 진정한 적은 과연 어디에 있 는 것일까? 박 신부의 고민이 걷잡을 수 없이 치닫기 시작했다. 아직도 어둠이 깊어서인지 차는 지나가지 않았다. 이제 아기 의 영이 승천할 시간이었다. 둘은 조용히 서서 자신들의 눈앞에 깔린 어둠을 영원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에서 오는지 모르는 어둠, 그 어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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