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3권 9화 – 홍수 6 : 짧고도 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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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3권 9화 – 홍수 6 : 짧고도 긴 밤


짧고도 긴 밤

결국 바이올렛과 약속한 4월 21일 밤이 다가왔다. 주기 선생 의 말처럼 그 아이들은 낮 동안에는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 다. 그 아이들은 바이올렛이 오늘 밤에 오는 것을 모르고 있을 테니 오늘 밤에 나타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러나 준후나 현암은 은근히 오늘 밤에는 나타나 주었으면 바랐다. 그래야 바이 올렛이 오기 전에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바이 올렛이 이야기를 해 준다고 해도 현암은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다. 박 신부와 윌리엄스 신부는 오늘도 아이들이 나타나 지 않을 것 같다는 승희와 준후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 러나 현암은 오늘 아이들이 반드시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 말 했다. 결국 모두는 하룻밤을 지낸 피곤함을 뒤로 한 채 떠오르는 밤하늘의 별들 아래서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그러한 적막을 깨고 먼저 나타난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주기 선생이었다. 준후 는 골목 입구에 세운 승희의 차 속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기 때 문에 주기 선생이 택시에서 내려 걸어오는 것을 가장 먼저 발견 할 수 있었다. 주기 선생의 해쓱한 얼굴은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준후는 그가 무리해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에구, 아직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나왔어요?”

“이건 원래가 내 일이다. 그러니 당연히 나와야지.”

주기 선생은 주변을 둘러보고 준후에게 물었다.

“현암이도 와 있니?”

“네. 신부님도 와 계시고요, 윌리엄스 신부님이라고 영국 분도 계세요. 연희 누나도 있고요.”

“거창하군.”

“그러니 아저씨, 아니 상준이 형은 도로 병원으로 가세요. 문제없을 거예요.”

“아니. 그래도 있겠다. 이건 원래 내 일이야. 나는 프로다. 돈 을 받고 일을 맡은 이상 내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바이올렛이라 는 여자도 만나 보고 싶고 말이다. 누가 뭐래도 내 의뢰자니까 말이야.”

“바이올렛이요? 하긴…….”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기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여자, 글씨가 아주 예쁘더구나.”

“네?”

“아, 아니다. 아니야. 좌우간 너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

준후는 주기 선생이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당혹해 하는 것이 이상해서 주기 선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주기 선생 의 얼굴이 붉어진 듯했다. 주기 선생은 헛기침을 한두 번 하고는 준후에게 뭔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가져라.”

“네? 뭔데요?”

“펴 보면 안다.”

준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주기 선생이 내민 봉투를 풀어 보았다. 거기에는 종이가 한 뭉치 들어 있었는데 고서로 보이는 낡은 종이를 컬러 복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종이 뭉치의 제일 겉장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씌어 있었다.

‘십이지번술 요결(十二支幡術要訣)’

“엥? 이거 …….”

주기 선생은 여전히 억지로 만든 듯한 딱딱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 밑천이다. 물론 전부 있는 것은 아니다. 제황사신번 에 대한 건 없어. 그러나 일단 받아 둬라.”

“아니, 그런데 왜 이걸……………”

“난 너에게 신세를 졌다. 그러니 어떻게든 갚아야지. 너 같은 꼬마에게 신세를 지고도 그냥 있으면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만이 아니라 현암 형이나 모두가…………….”

“하하하. 현암이한테 이걸 또 줘? 제길, 지금도 나보다 센데 지금보다 더 세지라구? 천하무적이 되게 해 주란 말이냐? 당장 죽어도 그런 꼴은 못 본다. 그러니 네가 익히고 싶으면 익히고. 아니면 그냥 두든지 팔아버리든지 네 맘대로 하려무나.”

준후가 주기 선생의 속마음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주기 선 생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난 못된 놈이야. 세상에서 나 혼자만 잘난 줄 알았지. 그러나 널 보니 하하하, 넌 참 착한 아이다. 그러나 세상은 착한 것만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어. 물론 나같이 되라는 건 아니지만, 험한 세상을 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주는 거니 받아 두려무나.”

주기 선생은 그래도 준후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자 정색을 하고 말했다.

“생각해 봐라. 난 성질이 못돼 먹어서 제자를 가르치거나 할 형편이 아니야. 그러니 내가 죽으면 십이지신술은 대가 끊어질 것 아니냐? 내가 예전에 이 책을 훔쳐 나오는 바람에 십이지신술 의 맥이 끊어졌어. 나 이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지. 요즘 세상에 이런 것을 익힐 재주가 있는 사람도 보기 힘들고……………. 비인부전(傳)이라고 아무에게나 맡길 수도 없는 일이잖 니? 그래서 너에게 맡기는 거다. 그러니 받아다오. 응?”

주기 선생이 막상 은근하게 나오자 마음 약한 준후는 뭐라고 더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뭉치를 서류 봉 투에 넣어서 승희의 차로 돌아갔다. 그러자 까닥거리면서 라디 오를 듣고 있던 승희가 밖을 내다보고는 주기 선생에게 말했다. 

“병원에 가 있어요. 염려하지 말구요. 바이올렛인가 하는 여자 입에서 돈 물러 달라는 말은 안 나오게 할 테니까요.”

주기 선생은 승희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한쪽 담 귀 퉁이로 가더니 힐기보법을 사용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준후가 보니 주기 선생은 성질이 치밀어서 무리를 하는 듯했다.

옆구리에 그렇게 큰 상처를 가진 사람이 태연한 척하고 나돌아 다니고 보법까지 사용하다니…………. 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 들면서 차에서 나왔다. 그런데 주기 선생이 막 사라진 쪽에서 묘 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준후는 긴장한 채 승희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승희는 휴대 전화로 재빨리 다른 사람들에 게 연락을 하고는 앞자리에 두었던 백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 서는 차에서 내렸다. 하나는 세크메트의 눈이었고 또 하나는 자 그마하고 예쁜 인형이었는데 인형에는 ‘To Legna (레그나에게)’ 라고 쓰인 봉투가 하나 달려 있었다. 승희는 피식 웃으면서 왼손 에 세크메트의 눈을, 오른손에 인형을 들고는 준후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왔니?”

“네. 그런 것 같아요.”

준후가 긴장된 얼굴로 주변을 가리켜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주변에 희미한 안개가 끼고 있었다. 안개는 살아 있기라도 한 것

처럼 점점 짙어지더니 금세 주변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주술로 불러낸 안개예요. 코제트의 술수 기억하지요?” 

준후의 말에 승희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눈을 감고 어느쪽에서 사람들이 접근하는지를 살폈다.

“저쪽이다. 여섯 명인 걸 보니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승희는 나직이 말하고는 사람들이 다가온다는 쪽으로 몇 걸음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길 한가운데 준후가 준 야명부 한 장과 인형을 놓고 다시 준후가 몸을 숨긴 담 모퉁이로 되돌아왔다.

준후는 승희가 오자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길 한가운데에 놓인 야명부가 화르륵 타오르더니 주변이 조금 밝아 졌다.

“잘될까요?”

준후가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승희는 그냥 어깨만 까딱해 보 이는데 마침 이쪽으로 온 현암이 대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현 암과 박 신부, 윌리엄스 신부, 연희도 모두 와 있었다.

“아무리 주술력이 강하다고 해도 역시 아이들이야. 호기심이 많을 테고 더구나 저 인형은……………. 저 인형에서 새어 나오는 느 낌만으로도 충분히 집어 볼 마음이 생길 거야.”

“쉿!”

박 신부가 대화를 중단시키자 모두가 입을 다물고 긴장된 모 습으로 길 쪽을 바라보았다. 밤인데다가 안개가 점점 짙어져서 이제는 코앞도 알아보기가 어려웠지만 야명부의 빛이 있는 길 한가운데만은 환하게 눈에 들어왔다. 마침내 안개를 뚫고 조그 마한 그림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 고 긴장하는 기색도 없었다. 다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치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가운데가 레그나, 늑대 소년과 중국 아이도 있군요.”

이미 셋은 준후와 한 번 상대한 적이 있어서 조금 먼발치에서 도 그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셋은 가운데에 있었는데 그들의 왼쪽으로는 아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덩치가 큰 검은 머리의 아이 한 명이 있었고 그 옆에는 흑인 아이도 한 명 있었 다. 그리고 그들의 오른쪽에는 멀리서도 똑똑히 식별할 수 있는 새빨간 옷을 위 아래로 걸치고 옷만큼이나 붉은 머리를 길게 늘 어뜨린 여자아이 한 명이 있었다. 세 명의 실력은 겪어 본 적이 있었지만 나머지 세 명의 실력도 그에 뒤질 것 같지는 않았다. 레그나의 뒤쪽에서 열을 지어서 따라오고 있는 인형들의 수는 지난번보다도 훨씬 많은 것 같았다. 준후가 보기에 처음에 레그 나가 혼자 왔다가 주기 선생에게 밀려나자 다음번에는 두 명이 왔고, 그래도 주기 선생이 버티어 내자 지난번에는 세 명이 왔는 데 준후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번에는 여섯 명이 온 것 같았다.

‘저쪽이 여섯이면…………… 우리 중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네 명, 윌리엄스 신부님은 좀 약하고 박 신부님도 다치셨으니 한 명씩 만 상대한다 치고, 현암 형과 내가 두 명씩 맡으면 이기지는 못 하더라도 버티어 낼 수는 있겠지.’

준후가 속으로 이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레그나가 길에 놓여 있는 인형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승희는 재빨리 세크메 트의 눈을 오른손에 옮겨 쥐고는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앉아서 혼신의 힘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모두가 긴장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는데 레그나가 망설이다가 피식 웃는 소리를 내고는 천천 히 인형을 집어 들었다.

‘됐다!’

현암은 속으로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인형에는 편지가 달려 있었지만 미끼였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형 속에 들어 있는 세 크메트의 눈과 월향검이었다. 즉 일반적인 투시로는 그들의 마 음속을 읽어 낼 수가 없었으므로 세크메트의 눈을 이용하기로 했는데, 저들에게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게 하려면 이 방법밖 에는 없었던 것이다. 세크메트의 눈은 마음속을 그대로 전달하 므로 짧은 시간이라도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다 만 승희의 마음속도 똑같이 읽힐 우려가 있으므로 승희는 전력 을 기울여서 자신의 마음을 가려야만 했다. 그리고 아무리 저들 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세크메트의 눈을 그냥 넘겨 줄수는 없었으므로 현암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월향 검을 같이 넣어서 마음을 다 읽고 나면 일순간에 인형째 회수할 계획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준후의 부적들도 여러 장 들어 있어 서 월향검의 영기는 밖으로 느껴지지 않게 했지만 세크메트의 눈의 영기는 느낄 수 있게 해 놓았으므로 그들도 위험하다는 느 낌은 갖지 않을 것이었다. 레그나가 손에 인형을 쥐자마자 승희 의 마음속으로 레그나의 생각이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건지. 이래 봐야 우리 일곱에게는 이기지 못할 텐데… 뭐가 들었을까?

레그나는 궁금한 생각으로 편지를 열었지만 한 글자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우리 말, 그것도 고어체로 ‘자네들 은 모두 바보 멍청이들이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물러가지 않으 면・・・・・・ 식의 욕설(?)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레그나는 중국 아 이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연희가 아주 작은 소리로 박 신부에게 중얼거렸다.

“에스페란토어예요. 블랙서클 사람들처럼 에스페란토어를 쓰는군요.”

‘이봐, 룽페이. 너 이거 읽을 줄 알아?’

‘몰라. 그건 중국어도 아냐. 한국말 같은데?’

그러자 레그나는 덩치 큰 검은 머리의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바알’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아무도 모를걸? 앙그라는 알지도 모르지만.’

이번에는 레그나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승희에게 느껴졌다.

‘앙그라가 알면 뭐해. 지금 여기 없는데…………. 그런데 이 인형에서 묘한 것이 느껴지는데.’

그러자 중국 아이가 레그나에게 말했다.

‘뭔가 수상쩍어 태워 버리자.’

‘왜 그래? 위험한 느낌은 없는데?’

‘우물쭈물할 때가 아냐. 우린 그 늙은이만 없애면 그만 아냐? 그리고 그 이상한 놈들도 다 해치워야 해. 주누(준후를 그렇게 발음했다)하고 그 이상한 깃발 휘두르는 놈하고 말이야.’ 

‘앙그라의 지시를 받았어? 앙그라는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 잖아? 주누라는 애까지 없애면 시끄러워질지도 모르는데?’ ‘벌써 시끄러워졌을걸? 모르긴 몰라도 지금 저놈들 패거리가 전부 몰려와 있을 거야. 횬암이나 팍 신부도 모두.’

‘그래 봐야 우린 여섯이야. 깃발 휘두르는 놈이 안 다쳤다고 해도 저쪽에서 싸울 수 있는 놈은 넷뿐이야.’

붉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말했다.

‘헤남(붉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현암을 그렇게 발음했다)이라 는 녀석은 나에게 맡겨 줘. 그 녀석은 이상한 칼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러자 흑인 아이가 말했다.

‘레드 나말라스라면 문제없을 거야. 나 구구루가 보장하지.’

그러자 늑대 가죽을 쓴 아이가 말했다.

‘그 녀석은 대단하다던데?’

‘문제없어. 그나저나 그 인형 이상하다. 뭔가 있는 거 아냐?’

물론 승희도 계속 읽어 내고는 있었지만 연희도 그들의 대화 를 멀리서 알아듣고 박 신부에게 계속 그 아이들의 이름을 가르 쳐 주고 있었다. 덩치 큰 아이의 이름은 바알, 붉은 머리의 여자 아이는 레드 나말라스 흑인 아이는 구구루 중국 아이의 이름은 룽페이였는데 늑대 소년의 이름 하나만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 머지 한 명, 이곳에 오지 않은 아이의 이름은 앙그라인 것 같았 다. 승희에게 레그나의 마음이 느껴졌다.

앙그라가 중국에서 하는 일은 잘되어야 할 텐데. 황 교수를 해치우는 건 최 교수만큼 어렵지 않겠지? 내가 갈걸 잘못했어.

황 교수를 해치운다고? 그럼 최 교수 말고 이들이 노리는 사 람이 또 있었다는 말인가?’

승희가 깜짝 놀라는 바람에 정신이 흐트러졌고 그러자 승희의 마음이 조금 레그나에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레그나가 놀라는 것이 승희에게 느껴졌다.

넌 뭐야? 이게 뭐 하는 거야?

승희가 약속한 대로 재빨리 현암의 옷깃을 당기자 현암은 마 음속으로 월향을 불렀다.

‘월향!’

현암과 마음이 통해 있던 월향은 현암이 부르자 그동안 참고 있었던 듯한 귀곡성과 함께 세크메트의 눈을 단 채로 인형을 뚫 고 나와 하늘로 솟아올랐다. 인형에서 뭔가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레그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옆에 있던 늑대 소년이 늑 대 울음소리를 내면서 월향을 잡으려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월향은 재빨리 늑대 소년의 손을 피해 위로 솟아 올라갔 다. 거의 동시에 중국 아이가 부적을 허공에 흩뿌리자 부적들은 삽시간에 불줄기로 변해서 월향검을 따라 허공으로 날아 올라갔 다. 월향검이 방향을 바꾸자 불줄기들은 흡사 대공포가 비행기 를 쏘는 듯 아슬아슬하게 월향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을 보 고 레드 나말라스가 소리쳤다.

“Das Schwert(칼)!”

나말라스가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소매를 쳐들자 놀랍게도 그 소매 속에서도 붉은빛을 띤 번뜩이는 물체가 월향을 향해 쏘아 져 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뾰족 하게 솟은 뿔들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게 칼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빙그르 회전하며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는 기세는 보통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현암은 더 기다리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월향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 람들도 현암의 뒤를 따라 우르르 달려 나갔다. 모두들 아이들이 뜻밖의 일을 만나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을 보고는 놀란 상 태였다. 현암 쪽으로 날아들던 월향검은 현암이 달려 나오는 것 을 느꼈는지 귀곡성을 지르면서 방향을 바꾸었고 레드 나말라스의 무기는 아슬아슬하게 월향검을 비껴 지나갔다. 평소 월향 검의 움직임은 지금보다 유연하고 빠른 편이었지만 작은 크기 에 세크메트의 눈까지 매어져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둔해질 수밖에 없었다. 현암이 날아드는 월향을 받아들자 레드의 무기 가 현암을 향해 덮쳐 들어왔다. 당황한 현암 대신 준후가 뒤에서 뇌전 한 방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그 무기도 역시 영성이 있는 지, 아니면 레드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인지 후의 뇌전을 슬 쩍 피해서 레드 쪽으로 돌아갔다. 현암은 월향을 받자마자 월향 에서 세크메트의 눈을 풀어 그것을 연희가 받을 수 있도록 뒤로 던졌다. 그사이 준후와 박 신부, 윌리엄스 신부가 달려와서 현암 의 앞에 버티고 섰다. 준후는 원래 싸움이 최 교수의 집 정도에 서 벌어질 것으로 생각하고 집 안에 결계를 쳐 놓았었는데 예상 외로 길에서 싸우게 되자 소동을 일으키게 될까 봐 염려가 되었 다. 그러나 소동이 일어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들도 레드 나말라스가 무기를 받아 들자 주욱 열을 지어 섰다. 중앙에는 레 그나가 있었는데 어느 틈에 좀비 인형들을 불렀는지 레그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인형이 한데 뭉쳐서 레그나를 받쳐 안고 있 었다. 그 아이들은 여섯 명이 앞에 나타났어도 동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재미를 느끼는 것 같아 보였다. 레그나가 뭐 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연희가 알아듣고 일행에게 말해 주었다. 

“모두 한데 모여서 차라리 재미있게 되었다고 하네요.”

박신부가 그 말을 듣고는 음 하고 신음하더니 연희에게 말했다.

“연희 양. 왜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해치려 하느냐고 물어봐주겠나?”

연희가 박 신부의 말을 전하자 레그나가 깔깔 웃으면서 대답했다.

분위기로 볼 때 레그나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이었다.

“앙그라의 명령이래요.”

“앙그라가 누구지?”

연희가 레그나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연희의 말을 듣고 모두 슬슬 웃었다. 아마도 장난을 치려는 듯했다. 그러나 룽페이라던 중국 아이 하나만은 준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난번 싸우다가 상처를 입어서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앙그라는 그들의 대장이래요. 그리고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다는군요.”

긴장된 표정으로 청홍검을 쌌던 천을 뒤로 던지면서 현암이 물었다.

“뭐지요?”

“공연히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대요. 그냥 여기서 비켜나면 해치지 않겠다는군요.”

“흥! 어린애 같은 소리!”

현암은 코웃음을 치고 레그나를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레그나나 모두 어린애들이 아닌가? 현암은 어린아이 보고 어린애라고 하는 것이 과연 비난인지 의심스러워서 웃은 것이었는데 레그나는 현암이 웃는 것을 비웃음이라 여겼는지 쌀 쌀맞게 웃어 보이더니 양옆으로 눈짓을 하면서 소리를 쳤다. 연 희는 그 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모두 죽여 버려!”

레그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일 먼저 늑대 소년과 덩치 큰 아 이가 달려 나왔다. 달려오는 도중에 늑대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 에 늑대처럼 바뀌어 갔고 그 모습을 본 연희는 두려움에 자신 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바알이라는 덩치 큰 아 이는 달려오면서 끙 하는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양손에 파르스 름한 기운이 둥글게 맺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뒤에서는 레드가 ‘Zauber-schwert(마검)’라고 소리치면서 아까의 무기를 내던 졌고 그제야 연희는 그 무기가 마검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 다. 어른 몸 두 배만큼 커진 좀비 인형들도 레그나를 내려놓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태세를 취했다. 마지막으로 구구루가 두 손 바닥을 맞붙인 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중국 아이도 곤선승 과 방울을 꺼냈다. 현암과 준후, 박 신부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 고 있었다. 준후가 벽조선을 꺼내 들고 수인을 맺으며 주문을 외 우자 허공에 뿌옇게 리매의 형체가 나타났다. 뒤를 이어 현암이 레드의 무기에 맞서서 월향검을 내쏜 다음 칼집에서 번쩍이는 청홍검을 빼 들었다. 박 신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지팡이를 꼭 쥐고 몸에서 환한 오라를 내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승희도 구구루처럼 그 자리에 앉아 힘을 전달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연희는 뒤로 물러섰다. 윌리엄스 신부는 박 신부처럼 손에 오라를 끌어내고 있었으나 뭔가를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아마 흡혈귀의 힘을 쓰지 않고도 저 아이들을 막아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리매의 기운이 허공에 엉겨서 형체를 드러내는 사이에 뛰어가 던 늑대 소년이 몸을 굴려서 현암에게로 날아들었다. 허공에서 는 현암 쪽으로 날아들던 레드의 마검이 월향검과 격돌하여 안 개 속에서 불꽃을 번쩍이고 있었다. 청홍검을 들고 있는 현암에 게 자신만만하게 덤비는 것으로 보아 늑대 소년은 칼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명검인 청홍검 으로 그으면 단번에 두 토막이 날 것 같아서 현암은 청홍검을 거 두고 오른손에 태극기의 ‘발’ 자결을 운용하여 바위처럼 달려드는 늑대 소년의 몸을 후려갈겼다. 그러나 늑대 소년의 육 탄 공격은 예상보다 강했다. 늑대 소년의 몸이 튕기듯 뒤로 밀려 나자 현암의 몸도 반작용으로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때 바알은 박 신부에게 달려들고 있었는데 박 신부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기도하는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바알은 우습게 보이는지 단번에 끝낼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오라 막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 꽃이 튀었을 뿐 박 신부의 오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놀란 바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뒤에서 룽페이가 곤선승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준후가 재 빨리 벽조선을 부쳤다. 검은 기운이 날아가 곤선승과 부딪치면 서 곤선승의 성난 뱀 같던 기세도 사그라졌다. 룽페이는 놀란 얼 굴로 곤선승을 감아 들였다.

레드는 자신의 마검이 월향검에 의해 차단당하자 신속히 앞으 로 나서면서 손으로 가느다랗지만 강렬한 불꽃을 내쏘았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구구루가 기합 소리를 내자 땅에서 조그마한 돌 조각들이 튀어올라 퇴마사들을 향하여 날아들었다. 갑작스 런 공격에 놀란 현암이 간신히 레드의 불꽃을 피하기는 했지만 돌들을 다 피할 수는 없었다. 몇 개를 얻어맞고 비틀거릴 때 이 번엔 늑대 소년이 몸을 굴려 날아들었다. 미처 현암이 몸을 돌릴 새도 없이 준후의 리매가 늑대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튕겨 버렸 다. 그러자 레그나의 거대한 좀비 인형이 리매에게 다가들었다. 이렇게 정신없는 틈을 타서 레드가 현암에게 불꽃을 뿜어 보았 으나 준후의 멸겁화에 적중되었다. 힘껏 내쏜 불꽃들이 준후에 게 격파되자 레드는 몸을 휘청거렸다. 원래 준후의 실력이라면 레드의 불꽃쯤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뒤에서 현암과 박 신부를 보조해 주기에 바빠서 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싸움은 점점 극렬해졌다. 이번에는 리매에 의해 튕겨 나갔던 늑대 소년이 현암에게 날아들 태세였다. 정신 차릴 사이도 없이 리매와 마주 잡고 힘을 쓰고 있던 레그나의 좀비 인형들 중 일부 가 현암의 뒤쪽을 공격했다. 현암은 몸을 옆으로 돌려서 오른손 으로는 ‘폭)’ 자결을 운용하고, 왼손으로는 비록 공력은 집어 넣지 못했지만 파사신검 제삼 초식을 운용하여 커다란 원을 허 공에 그려 나가면서 좀비 인형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좀비 인형 들은 청홍검의 서슬 퍼런 검막(劍)에 휘감겨 토막토막 나면서 허공에 흩어졌고, 뒤이어 늑대 소년의 둥글게 뭉친 몸체가 현암 쪽으로 날아들었다. 현암도 이번에는 사정을 두지 않고 십성 공 력을 끌어 올려서 ‘폭’ 자결을 운용했다.

현암과 늑대 소년이 충돌하는 순간 콰쾅 하는 소리가 울리면 서 늑대 소년의 몸은 여지없이 뒤로 튕겨졌다. 늑대 소년은 ‘폭’ 자결의 충격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 둥글게 움츠렸던 몸을 펼 때 보니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늑대 소년의 길게 솟아오른 손톱 끝에도 헝겊과 피가 쥐여 있었다. 자신이 얻어맞 는 순간에 손톱을 뻗쳐서 현암의 오른쪽 어깨를 내쳤던 것이다. 늑대 소년은 고통이 심한 듯 뒤로 밀려 나가다가 구구루의 옆쪽 땅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현암도 어깨의 상처가 심상치 않은 듯 싶었다. 그렇지만 현암은 아무런 내색 없이 허공에 떠서 레드의 마검과 격렬하게 공중전을 벌이고 있는 월향검을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마검과 월향검이 서로 엉켜서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번쩍거렸 으나 안개 때문에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바알은 박 신부의 오라를 정신없이 두들겨 댔지만 박 신부는 놀라는 기색 없이 절 룩거리면서 레그나 쪽으로 걸어 나갔다. 바알이 눈까지 벌게져 서는 엄청난 기운으로 박 신부의 오라 막을 두드렸으나 박 신부 의 오라 막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할 수 없는 듯 바알은 박 신부 를 오라 막째 밀어 버리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반대로 자기가 뒤 로 주르륵 밀려나고 말았다. 바알의 체구가 장대했음에도 불구 하고 박 신부는 조금도 힘을 들이지 않는 듯 절룩거리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현암이 늑대 소년을 물리치고 월향검을 불러들이는 사이 이 번에는 레드와 룽페이가 불꽃과 곤선승으로 동시에 현암을 공격 했다. 그러나 준후가 현암의 뒤쪽에서 왼손으로는 멸겁화를 일 으키고 오른손으로는 벽조선을 허공에 던지며 뇌전을 내쏘았다. 레드의 불꽃은 멸겁화에 차단당했고 곤선승은 뇌전을 맞아 뒤로 밀려나면서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곤선승을 마주 잡고 있던 룽페이도 전기가 오르는지 크으윽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준후는 떨어져 내리는 벽조선을 받아 들 고 여유 있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아픔이 좀 가라앉는지 룽페이의 눈이 조금씩 열리다 마침 웃고 있던 준후의 얼굴과 마주쳤다. 룽페이는 안 그래도 아프고 분한데 준후의 웃는 얼굴을 보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것 같았다. 옆에 있던 레드도 약이 오르 는지 허공에 대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면서 기묘한 몸동작을 했다.

현암이 부르자 월향검은 돌아와 칼집에 꽂혔다. 그런데 검이 꽂히면서 가죽으로 만들어진 칼집에서 피시식 연기가 오르는 것 이 아닌가. 현암은 깜짝 놀랐다. 월향검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보니 레드의 마검이라는 무기에서 솟던 붉은 기운은 역시 불꽃 이었던 모양이다. 현암은 상대를 잃은 레드의 마검이 자신에게 덮쳐들 것으로 생각하고 양손으로 청홍검을 잡고 검기를 뿜어냈 다. 그런데 레드의 마검은 난데없이 방향을 틀어 준후 쪽으로 달 려들었다. 거기다가 룽페이의 곤선승과 부적들까지 불길을 뿜으 며 준후에게 날아 들어갔고 때는 지금이라는 듯 레드도 달려 나 오면서 양손에서 불꽃을 뿜어냈다. 준후는 한꺼번에 공격을 받 자 다급해졌다. 현암도 준후의 위기를 보고는 크게 기합을 지르 면서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청홍검을 파사신검 제칠 초식의 수 법으로 내던지고 난 뒤 공력을 집중한 오른팔로 곤선승을 받아 내었다.

날아간 청홍검은 마검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부딪혀 서로 엉켰는데 현암이 워낙 세차게 던졌기 때문에 얽힌 후에도 마검 을 밀어 건너편에 있던 전봇대에 푹 박혀 버렸다. 아무리 세차게 던졌다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전봇대를 조금도 부스러뜨리 지 않고 푹 박히다니, 청홍검은 과연 명검이라 할 만했다. 박힌 다음에 보니 마검은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원반 모양이었는데 가지에서 비죽비죽한 칼날이 솟아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청 홍검에 얽혀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마검이 제압되자 준후는 벽조선을 크게 휘두르면서 부적 을 꺼내 흩뿌렸고 벽조선의 검은 기운은 레드의 두 줄기 불꽃과 부딪혀 한꺼번에 퍽 소리를 내면서 사라져 갔다. 그러나 룽페이 의 부적들은 불타오르는 해골의 형상으로 바뀌어 가면서 벽조선 의 기운을 피해 둥글게 퍼져 나갔다가 준후를 향해 사방에서 달 려들었다. 그러자 준후의 부적들이 마치 요격 미사일처럼 룽페 이의 부적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준후와 룽페이의 부적들이 서 로 공중에서 부딪혀 하나씩 사라져 갔다. 양쪽의 부적의 수가 거 의 비슷한 것 같았지만 마지막엔 준후의 부적 두세 장만이 남았 고 그것들은 지체 없이 룽페이를 향해 날아 들어갔다. 현암은 오 른팔에 곤선승이 감기자 짜릿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기합을 지르면서 선승을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으 악 하는 비명과 함께 자그마한 룽페이의 몸이 여지없이 허공으 로 솟아올랐다. 그 순간 구구루가 앙칼진 고함을 내지르면서 양 손바닥으로 땅을 후려쳤다. 땅이 우르르 흔들렸다. 바알을 밀어 내면서 앞으로 나가던 박 신부와 현암은 중심을 잃고 넘어졌으나 준후는 재빨리 우보법을 써서 자신의 발을 땅에 붙였다. 땅이 흔들리자 레드와 바알도 비틀거렸지만 그들은 미리 대비하고 있 었던 듯 넘어지지 않았고 레그나와 부상을 입은 늑대 소년은 구 구루의 뒤쪽에 있었기 때문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박 신부가 넘어지자 바알은 재빨리 중심을 잡고 박 신부에게 로 몸을 날렸다. 레드는 휘청거리다가 그때까지도 계속 맞붙어 싸우고 있던 좀비 인형과 리매 쪽으로 불꽃을 뿜었다. 아마도 그 쪽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는데 휘청거리는 바람에 우연히 그쪽으 로 불길이 나간 것 같았다. 어쨌든 불길은 좀비 인형들의 등 부 분을 뚫고 지나가 리매에게까지 적중되었다. 불이 붙자 여러 개 의 인형으로 이루어진 좀비 인형들은 불붙은 부분을 떼어 내 버 리고 작아진 모습으로 뭉쳤으나 불길에 휩싸인 리매는 고통스러 운 듯 포효했다. 준후가 그것을 보고 당황하자 허공에 솟아 있던 룽페이가 중심을 잃고 넘어진 현암의 손에 있는 곤선승을 놓아 버렸다. 그리고 땅에 떨어지면서 재빨리 몸을 튕겨 준후에게로 날아들었다. 준후는 리매가 불길에 휩싸인 것을 구해 주려고 하 던 참에 룽페이가 육탄으로 날아들자 머뭇거렸다. 준후는 순간 적으로 사람에게 벽조선을 쓴다는 것에 갈등을 느꼈던 것이다. 준후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룽페이는 가차 없이 발차기로 준후를 걷어차버렸다. 현암이 놀라서 몸을 튕겨 일어나려는데 난데없 이 오른팔에 감긴 곤선승이 살아 있는 뱀처럼 현암의 온몸을 칭칭 감아버렸다.

힘을 써 보려고 했으나 원래 현암의 공력은 오른팔밖에는 돌 지 않기 때문에 곤선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현암이 허우적거 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까 쓰러졌던 늑대 소년이 이 가는 소리 를 내면서 벌떡 일어나 몸을 굴리며 덤벼들었다. 돌연 갑자기 바 알의 몸이 위로 솟구치더니 작은 빛의 구체가 우르르 솟아 올라 왔다. 박 신부가 오라 구체를 내쏘아 자신을 깔아뭉개려던 바알 을 밀어내 버린 것이다. 박 신부는 바알을 밀어내면서 넘어진 방 향 그대로 방향을 돌려 현암에게 달려드는 늑대 소년을 향해 오 라를 쏘았다. 늑대 소년이 오라 구체에 얻어맞고 옆으로 밀려난 덕분에 몸을 낮춘 현암은 덮쳐드는 늑대 소년을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늑대 소년은 현암 옆쪽에 있던 소화전 상자에 부딪혀 스 테인리스로 된 케이스를 우지끈 부숴 버리고는 그 자리에 멈추 어섰다. 박 신부가 서둘러 일어나려고 하자 구구루가 다시 땅 을 뒤흔들었다. 다리가 불편한 박 신부는 물론이고 현암도 데구 르르 굴렀다. 준후에게 달려오던 연희와 승희마저도 넘어져 버 렸다. 한가운데에서는 레드의 불꽃에 얻어맞아 타오르던 리매가 고통스러운 포효를 지르면서 서서히 사라져 갔고 상대가 없어지 자 레그나의 좀비 인형들은 우르르 흩어져서 박 신부를 향해 어 지럽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한쪽에서 룽페이는 한 방을 맞고 비 틀거리는 준후의 아랫배를 걷어찼고 준후는 헉 소리를 내면서 옆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룽페이가 방울을 쳐들려고 하는 순간에 누군가의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막아섰다. 룽페이가 놀 라서 위를 올려다보자 거기에는 타는 듯한 붉은 눈에 길쭉한 이 빨을 지닌, 파리한 얼굴의 사람이 서 있었다. 퇴마사들이 밀리자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몸 안에 잠자는 힘을 일깨워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였다. 윌리엄스 신부의 입에서 음울하게 변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옥의 저주를 받을 녀석들아.”

윌리엄스 신부는 길쭉한 손톱이 돋은 손으로 룽페이의 따귀 를 철썩 갈겼다. 따귀라고는 하지만 워낙 엄청난 힘이라 룽페이 는 입에서 선혈을 내뿜으며 한쪽 담벼락에 처박혀 버렸다. 윌리 엄스 신부가 사제복 자락을 휙 훑어 내자 한 줄기의 강한 바람이 몰아쳐 박 신부에게 달려들려고 하던 좀비 인형들을 우르르 흩 어 놓았다. 몸을 일으키던 연희는 그 와중에도 윌리엄스 신부의 검은 사제복이 흡혈귀의 분위기에도 잘 어울린다는 쓸데없는 생 각을 하면서 승희와 함께 쓰러져 있는 준후에게 가서 준후를 일 으켜 세웠다.

“준후야! 힘내!”

승희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럿이 한데 뒤엉켜 싸우는 판 이라 누구에게 힘을 보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승희는 현 암이 묶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급한 김에 준후에게 있는 힘을 다 넣어 주었다. 뒤에서 룽페이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레그나 가 소리를 질렀다. 한국어, 독어, 영어, 중국어, 에스페란토어 등 의 갖가지 나라 말들로 주문을 외우는 소리와 기합, 홧김에 지르 는 소리들과 주술의 굉음들이 서로 뒤섞여 아수라장이었지만 연 희는 그 말들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옥의 저주는 너나 받아라! 이 흡혈귀 놈아!”

룽페이가 담벼락에 처박히는 것을 보고는 넘어졌던 바알이 소 리를 지르면서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 쪽으로 덤벼들었 다. 둘은 레슬링을 하는 것처럼 서로 손을 마주 잡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까 박 신부에게 쩔쩔매서 힘이 없어 보이던 바알이 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윌리엄스 신부가 흡혈귀가 되 었을 때의 힘은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었는데도 서로 한 치도 물 러서지 않는 것을 보니 바알의 힘도 그에 못지않게 강한 것이 분 명했다. 윌리엄스 신부가 일으킨 질풍에 휘말렸던 좀비 인형들 은 레그나가 뒤에서 앙칼진 소리를 지르자 순식간에 분산되어서 일부는 박 신부에게, 일부는 현암에게, 일부는 승희가 준후를 일 으키는 쪽으로 날아들었다. 연희가 놀라서 보니 인형들은 저마 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희는 호신술로 몸을 굴 려 승희의 앞을 막아서면서 준후가 전에 심어 주었던 오른손의 부적 자국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부적 자국은 사악한 것들이 다 가오는 것을 인식한 듯 환하게 밝은 빛을 내뿜었고 빛을 쐰 좀비 인형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 채 연희와 승희 그리고 준후의 주변을 맴돌면서 기회를 노렸다.

박 신부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참이었는데 다시 좀비 인형 들이 덤벼들자 재빨리 허리춤에서 성수 뿌리개를 꺼내어 허공에 뿌렸다. 성수 방울들을 맞은 좀비 인형들은 허공에서 타들어가 면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을 본 레그나가 노성을 지르자 레 드가 박 신부 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늑대 소년은 아직 일어나지 못한 현암 쪽으로 몸을 돌려 달려들었다. 온몸이 곤선승으로 묶 인 현암이 위험해지자 월향검이 귀곡성을 내면서 현암의 왼팔에 서 튀어나왔다. 늑대 소년은 월향검의 소리를 들었는지 황급히 방향을 틀었고 월향검은 늑대 소년을 스치면서 허공으로 솟아올 랐다가 현암 쪽으로 쏘아지듯 날아들었다. 현암은 월향검이 곤 선승을 끊어 주기 위해 오는 것을 알고 몸을 돌렸으나 다른 힘이 자신의 몸을 당기는 바람에 데구르르 굴렀고 월향검은 안타까운 듯 가는 귀곡성을 울리면서 제비처럼 방향을 바꿔 날아올랐다. 나가떨어졌던 룽페이가 곤선승의 끝을 힘껏 당긴 것이다. 월향 검이 다시 날아드는데 이번에는 좀비 인형들이 와르르 현암에게 덮쳐들었다. 월향검은 현암을 보호하려고 좀비 인형 몇 개를 꿰 뚫어 버렸다. 월향검에 꿰뚫린 좀비 인형들은 허공에서 폭발하 듯 흩어져 갔다. 그렇지만 좀비 인형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현암 을 지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좀비 인형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현암의 온몸을 깨물기 시작하자 현암은 다급한 김에 아랫배에 힘을 주어서 사자후의 일갈성을 터뜨렸다.

“어헝!”

엄청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자 현암의 몸에 달라붙었던 좀비 인형들은 우르르 튕겨져 버렸고 얼결에 곤선승을 잡아당기 던룽페이도 밧줄을 놓쳐 버렸다. 현암의 사자후는 물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수세에 몰렸을 때 단번에 전세 를 역전하는 효과를 보여 주기도 했다. 현암이 곤선승의 자루를 움켜쥐자 현암의 온몸에 얽혔던 곤선숭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자루를 쥔 주인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현암이 곤선승을 쥐는 것을 본 룽페이는 다급한 기색으로 우보법의 방위를 밟았다. 현 암은 곤선승을 휘두르면서 월향검을 내쏘려던 순간, 그만 룽페 이의 우보법에 걸려 온몸이 굳고 말았다. 좀비 인형들의 대열이 사자후 소리에 밀려 흐트러진 덕에 조금 숨을 돌린 박 신부는 현 암의 행동이 덜컥 멈추자 놀라서 소리를 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레드의 불길이 박 신부에게 날아들었다.

‘레드 나말라스(Red Namalas), 거꾸로 하면 불도마뱀인 살 라만더 (Salamander)가 되는군! 과연 불을 이용한 술수에 능하 구나.’

박신부가 이런 생각을 하며 가느다란 불길을 피하는 사이 불 길은 벌써 사제복에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신부가 레드에게 다시 성수 뿌리개를 휘두르자 레드의 불길은 성수를 맞아 중간이 툭 끊어져 버렸다. 그 틈을 타서 박 신부는 재빨리 옷에 붙은 불을 껐고 레드는 박 신부가 피하자 아아악 하는 신경질적 인 소리를 지르면서 전봇대 쪽으로 달려갔다. 청홍검에 얽힌 마 검은 그렇게 복잡하게 끼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때까지 조금 씩 움직거리기만 할 뿐,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청홍 검에 깃든 검의 정기가 마검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았다. 레드는 그것을 보고 마검을 회수하여 던지고, 청홍검까지도 집 어들 작정으로 전봇대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바알과 계속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윌리엄스 신부는 그것을 보고 으르 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원래는 온화하고 익살맞은 윌리엄스 신 부였으나 흡혈귀의 모습으로 변하고 나니 그 소리까지도 음산하 고 음울하게 들렸다.

“캬아아!”

윌리엄스 신부가 울부짖듯 큰 소리를 지르자 온몸에서 붉은색 의 기운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고 그 기운을 이기지 못한 사제 복 자락이 여기저기 터져 나갔다. 갑작스런 기운에 윌리엄스 신 부와 마주 보고 겨루던 바알이 놀라 조금 주춤하는 사이, 윌리엄 스 신부는 무서운 괴력으로 바알의 커다란 몸뚱이를 번쩍 들어 서 레드가 달려가는 전봇대를 향하여 집어 던졌다. 바알은 비명 을 지르면서 레드 쪽으로 날아갔고 레드는 얼른 고개를 숙여 날아오는 바알을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레드를 피한 바알은 그대로 전봇대에 부딪혔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전봇대가 땅바닥으 로 곤두박질쳤다. 그 바람에 청홍검은 바닥에 떨어졌고 레드의 마검도 다시 하늘로 솟아 올라갔다.

박신부가 얼른 달려가서 청홍검을 집어 드는데 쓰러져 있던 바알이 다리를 움켜잡았다. 대비를 하지 못하고 있던 박 신부는 앞으로 넘어져 버렸고 레드는 때는 지금이라는 듯 불길을 내쏘 려고 했다. 그러나 레드가 손을 치켜드는 순간 레드의 앞에 붉은 색의 깃발이 꽂히면서 화르륵 불길을 뿜어 댔다. 레드는 주춤하 면서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룽페이의 우보법에 묶여 있는 현암을 늑대 소년이 공격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준후가 벽조선의 기운을 늑대 소년에게 쏘아 보냈다. 늑대 소년이 재빨 리 몸을 돌려서 그 기운을 피하는데 굳은 듯 서 있던 현암의 눈 에 사정없이 고꾸라지는 박 신부의 모습이 들어왔다. 현암의 눈 에서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다. 현암은 비록 몸은 굳었지만 공력 의 운용은 가능했다. 물론 하반신의 혈도까지 공력이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현암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은 그런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현암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공 력을 모조리 모아서 하반신 쪽으로 내리눌렀다.

“하아!”

그와 동시에 현암의 발을 땅에 붙잡아 매 두고 있던 룽페이가 삼미터가량이나 솟구쳤다. 그러나 현암은 몸이 자유롭게 되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기혈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끓어 오르는 것 을 느꼈다. 막혀 있는 혈도로 전신 공력을 밀어 보낸 부작용 때 문인 것 같았다. 현암은 비틀거리면서도 안간힘을 다해서 아래 쪽으로 쏠려 있는 공력을 모조리 오른팔에 모았다. 그러자 오른 손에 쥐어져 있던 곤선승이 창처럼 곧게 뻗어 나가 방향을 돌리 려던 늑대 소년의 한쪽 다리를 푹 뚫고 지나갔다. 곧이어 늑대 소년의 처참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현암은 최후의 기력을 다해 왼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월향검이 알았다는 듯 허공으 로 솟구쳐 올라갔다. 마침 넘어진 박 신부를 향해 레드의 마검이 내리꽂히던 중이었다. 귀검과 마검이 허공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충돌하는 순간 커다란 불꽃이 하늘을 수놓으면서 주변을 환하게 물들였다. 위로 솟구쳐 올라갔던 룽페이의 몸이 땅바닥 에 쿵 하고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구구루가 땅을 뒤흔들었고 기 혈이 들끓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현암은 취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나 본인 외에는 아무도 현암이 내상 을 입은 것을 알지 못했다. 준후는 멸겁화의 술수로 연희와 승희 를 괴롭히는 좀비 인형들을 태워 버리고 있었고 윌리엄스 신부 는 레드에게 바람을 내쏘고 있었으며 박 신부는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바알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박 신부는 처음에는 오라의 구체를 아래쪽으로 내쏘았으나 바알이 너무 끈 질기게 달라붙자 불편한 다리가 뽑혀 나갈 것 같은 느낌마저 들 었다. 할 수 없이 베케트의 십자가가 달린 지팡이 끝을 손에 쥐 고 필사적인 힘으로 오라를 부풀렸다. 바알은 오라 막에 밀려서 박 신부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넘어진 바알을 향해 박 신부는 오라의 구체를 소나기처럼 내쏘았고 바알은 양팔로 얼굴을 가리 면서 고스란히 박 신부의 공격을 받았다.

또다시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때까지 좀비 인형만을 부리고 있 던 레그나가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레그나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으며 등 뒤로는 검은 기류 같은 것이 맴돌았다. 허공 에서 세 개의 물체가 휙 하고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나는 힘을 잃어버린 듯한 월향검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두 동강 나버 린 마검이었다. 월향검은 온전한 채로 땅바닥에 떨어졌지만 마 검은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섬광을 내뿜으며 폭발해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는 레드가 발작하듯 얼굴을 감싸 쥐면서 길게 고함 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 소리에 놀란 현암이 몽롱해진 눈으로 옆을 돌아보자 땅에 떨어져 있는 월향검이 눈에 들어왔다.

“월…… 월향.”

현암은 기어들어 가는 듯한 소리로 월향을 부르다가 그 자리에 털썩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현암의 갑작스런 쓰러짐에 모두 가 놀라 당황하고 있을 때 준후가 소리를 지르면서 현암에게로 다가갔다. 윌리엄스 신부가 레드를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 레드 는 발작하는 듯한 소리를 지르면서 어깨에 걸치고 있던 자신의 붉은 웃옷을 벗어서 윌리엄스 신부 쪽으로 내던졌고 그와 동시 에 구구루가 땅을 흔들었다. 그러자 옷에 불이 확 타오르면서 커 다란 불덩어리로 변해 윌리엄스 신부를 덮쳤다. 흡혈귀로 변한 윌리엄스 신부는 놀라서 뒷걸음질을 하다가 구구루가 땅을 흔드 는 바람에 넘어져 버렸다. 흡혈귀라고 해도 불에 타면 별수 없었 으니 윌리엄스 신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때 난데 없이 두 줄기의 기운이 날아들면서 그 불덩어리를 옆으로 밀어 냈다.

“같잖은 것들이 왜 이리 날치고 다니는거냐!”

말소리가 들리는 쪽에서는 주기 선생이 특유의 힐기보법을 운 용하면서 제황사신번을 휘두르고 있었다. 부상이 심했기 때문인 지 그가 날린 깃발들의 기운은 예전 같지 않았다. 윌리엄스 신부 는 일어나려다 끄응 소리와 함께 맥없이 땅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흡혈귀의 힘을 쓰려면 피가 필요한데, 윌리엄스 신부는 자기 것 말고는 달리 피를 얻을 길이 없으므로 자신의 피를 쓰다 가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이었다. 현암과 윌리엄스 신부, 늑대 소년과 룽페이가 쓰러지면서 레그나와 구구루, 바알, 레드 그리고 박 신부, 준후와 주기 선생이 남았다. 그러나 주기 선생은 부상을 심하게 입은 몸이었기 때문에 결국 2대 1의 싸움인 셈이었다.


준후는 현암이 걱정되었지만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레그나 때 문에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여태껏 레그나는 좀비 인형을 조종 하는 것 말고는 직접 나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위력을 잘 알 수 없었는데 현암을 향해 내뿜는 기운을 보니 보통이 아닌 것 같았 다. 바알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엉망진창이 된 몸을 툭툭 털며 일 어섰고 레드는 자신의 마검이 월향검에 의해 박살 난 것에 분개 해 한쪽에서 이를 갈고 있었다. 구구루는 여전히 저만치 뒤쪽에 앉아 있었다. 정신없이 한차례 겨루기는 했지만 이제는 양쪽 다 능력들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감히 먼저 나서 지 못하고 팽팽하게 긴장 상태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상태를 깨뜨린 것은 레그나와 구구루였다. 구구루가 기합 소리를 내자 땅이 흔들리면서 돌멩이들이 치솟아 우박처럼 날아들었고 레그 나의 몸에서도 먹구름 같은 기운이 몰아쳐 나왔다. 이에 준하는 벽조선을 휘둘러서 기운들과 돌멩이들을 한꺼번에 쳐냈고 박신 부는 오라 막을 한층 크게 부풀렸다. 주기 선생도 물러서지 않고 힐기보법을 운용해 앞으로 달려 나가면서 등에 지고 있던 열여 섯 개의 깃발 중에 쓰지 않고 남겨 두었던 열네 개의 깃발을 일제히 뿌렸다.

“이놈들아! 이거나 받아라!”

네 개의 제황사신번 깃발과 열 개의 십이지번 깃발이 한꺼번 에 허공에 퍼져 나가면서 레그나와 레드, 바알과 구구루를 향해 날아들었다. 정말 화려한 술수였다. 동시에 모든 깃발을 다 쏜 것을 보니 부상 때문에 버티기 힘든 주기 선생이 술수를 모두 펴 서 싸움을 끝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앞으로 달려 나가며 술수 를 쓰는 바람에 주기 선생은 구구루의 돌멩이들과 레그나의 검 은 기운을 피할 수 없었다. 주기 선생이 어깨에 돌멩이를 맞아 힐기보법의 운용이 흐트러진 틈을 타고 레그나의 검은 기운이 아랫배 부분을 파고들어 갔고 곧이어 우박 같은 돌멩이들이 강 타했다. 아이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바알은 주먹을 쥐고 기운 을 일으켜서 십이지번의 기운을 허공에서 꺼뜨려 버렸지만 나머 지 제황사신번 중 현무의 기운에 정통으로 맞고는 순식간에 뒤 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히더니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레드는 불 길을 내쏘아 가장 강하게 다가오던 주작번의 기운을 맞히고 몸 을 날렸지만 뱀의 기운인 사번에 몸을 스쳤다. 그러나 구 구루와 레그나는 각각 돌멩이와 그때까지 남아 있던 좀비 인형 들을 이용하여 주기 선생의 공격을 막아냈다. 특히 레그나는 주 기 선생의 공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준후에게 달려들면서 과거 코제트가 사용했던 증오의 안개와 비슷한 검은 기운을 내쏘았는데 기운의 위력이 코제트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준후도 온 힘으 로 벽조선의 기운을 일으켜서 맞받아쳤지만 되려 뒤로 밀려나 몇 바퀴를 굴렀다. 물론 레그나의 기운이 강한 탓도 있지만 아까 룽페이에게 얻어맞고 무리하게 힘을 써서 탈진 상태에 있는데다 가 현암이 쓰러지자 준후에게 힘을 보내 주던 승희가 현암에게 달려가느라 힘을 보내 주기를 중단했기 때문에 강한 기운을 끌 어 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박 신부는 오라 막을 커 다랗게 일으키면서 쓰러지려고 하는 주기 선생을 부축하여 오라 막 속으로 끌어들였다. 주기 선생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런 데 주기 선생을 부축하는 박 신부의 손에 뭔가 축축한 것이 닿았 다. 무리하게 힘을 쓰는 바람에 옆구리 상처가 벌어졌는지 붉은 선혈이 붕대와 웃옷을 물들이면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저렇게 힘을 쓰다니…?

박 신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기 선생을 내려놓으며 넘어져 있는 현암과 월향검을 바라보았다. 마침 승희가 현암을 옮기려 는 참이었다. 현암은 무척 고통스러운 듯 조그만 움직임에도 몸 을 움찔거렸다. 연희는 본 모습으로 돌아와 맥없이 넘어져 있는 윌리엄스 신부를 끌어가고 있었다. 주변은 엉망진창이었다. 부 서진 인형 조각들과 핏자국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으며 그 위 를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잔해들이 날아다녔다. 게다가 한쪽에 선 기절한 룽페이와 피가 흐르는 다리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늑대 소년이 보기에도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박 신부는 그런 광경을 보다가 눈을 꾹 감고 아까 집어 든 청홍검을 그 자리에 꽂아 세웠다. 겉으로 보기에 박 신부의 행동은 침착하고 여유로 워 보였지만 사실은 대단히 화가 난 상태였다. 레드가 박 신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손을 뻗어 두 줄기의 불꽃을 날렸지만 불꽃 은박 신부의 오라 막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지듯 비껴 나가 버 렸다.

“음?”

레드는 놀라운지 신음 소리를 내면서 더욱 거세게 불길을 내 뿜었으나 박 신부는 움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몸을 일 으키면서 레드를 올려다보았다. 레드는 그러한 박 신부의 태도 에 질린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바알은 좀 타격을 입었는지 이를 악물면서 몸을 일으켰으나 박 신부의 오라에는 자신의 술 수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참이라 덤벼들 것 같지 않았 다. 그러나 레그나는 준후가 허무하게 뒤로 밀려나자 준후를 버 려둔 채 박 신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맞서서 박 신부 도 몸을 꼿꼿이 세우고 레그나 쪽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중앙 으로 나서자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두 사람은 검은 기운과 연녹색의 오라를 일으킨 채 세 발자국쯤 되 는 거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 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두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해서 상대의 힘을 밀어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레그나의 머리카락이 한두 가닥씩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갔고 박 신부의 뺨에도 삽 시간에 맺힌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 았지만 숨 막히는 긴장감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그런 와중에 바 알이 재빨리 몸을 날려 현암 쪽으로 달려들었다. 준후가 놀라서 벽조선을 휘저으려고 하는 사이 레드의 불꽃이 구구루의 진동과 함께 또다시 준후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구구루의 진동마저도 박 신부와 레그나가 힘을 발하고 있는 부분에는 미치지 못하고 사그라져 버렸다. 준후가 몸을 피하는 사이 바알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승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현암을 향해 덤벼 들었다. 그러나 승희는 두려운 내색 없이 표독스러울 정도로 날 카롭게 외쳤다.

“비켜! 돼지!”

바알은 귀찮다는 듯 손으로 냅다 승희를 후려쳤다. 승희는 그 래도 나가떨어지지 않고 바알의 손목을 움켜쥔 채 악착같이 달 라붙었다. 바알은 예상치 못했던 승희의 저항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때였다. 승희가 전신의 힘을 모아 바알에게 퍼부었다. 

“크아아악!”

바알은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힘이 몰려오자 감전된 것처럼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승희의 힘이 몸속에서 충돌을 일으키자 아무리 힘이 센 바알이라도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바알은 쓰러지면서도 마지막 힘을 모아서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승희를 거세게 내팽개쳤다. 승희는 뒤로 한참을 날아가서 땅에 떨어지고서도 몇 미터나 더 미끄러져 갔다. 승희를 떼어 내 고서도 아직 쓰러지지 않은 바알이 현암을 내리치려 하자 레드 의 불꽃을 피하던 준후가 급한 나머지 몸을 날려 바알의 옆구리 에 직접 부딪쳤다. 승희의 힘 때문에 기력을 거의 잃은 상태인데 다가 작은 체구였지만 온 힘을 쏟아 달려든 준후의 공격에 바알 은 몸을 휘청거렸다. 바알이 휘청거리자 윌리엄스 신부를 끌어 다 놓고 뛰어오던 연희가 몸을 날리면서 바알의 옆얼굴을 내리 쳤다. 그러나 준후와 연희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쓰러지 지 않았다. 그때 거의 무차별적으로 준후를 향해 뿜어지던 레드 의 불꽃 한 가닥이 바알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악!”

레드는 서둘러 불꽃을 옆으로 돌리려 했지만 공교롭게도 비틀 거리던 바알에게 적중되었다.

“크아아악!”

방어할 틈도 없이 불꽃을 뒤집어쓴 바알은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쳤으나 레드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바알의 몸 전체로 훨 휠 타올랐다. 박 신부는 레그나와의 겨루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 고 있던 참이라 뒤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지도 못했고 설혹 보았더라도 거기에 관여할 틈이 없었다. 불에 훨훨 타오르는 바알의 몸이 연희에게 덮치려는 찰나에 바알의 몸이 마술에 걸린 것처럼 위로 휙 하고 솟아올랐다. 넘어져 있던 준후와 연희가 놀 란 눈으로 그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사람의 형체가 서 있었다. 아니, 그 사람의 모습은 부풀어 오르듯 이 계속 커져 가고 있어서 덩치가 꽤 큰 편인 바알의 몸은 장난감 처럼 그 사람의 한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연 희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고는 반갑게 소리쳤다. “성난큰곰!”

비록 인디언의 의상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사람은 분명 성난큰곰이었다. 강신술을 빌려 몸을 크게 한 것 같았으나 얼굴 만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바이올렛이 같이 오기로 했다는 친구 는 성난큰곰이었던 것이다.

오랜만이군. 다들 괜찮은가? 내 친구 현암은 많이 다쳤는가?

성난큰곰 특유의 대화법인 마음으로 직접 이야기하는 소리가 연희에게 느껴져 왔다. 성난큰곰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눈앞의 싸움에 동요되는 것 같지 않았다. 준후는 성난큰곰이 나타나자 반가우면서도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바알이 불에 타들어 가는 모 습을 보고는 외쳤다.

“저, 저 아이가 불에 ………”

알았다.

성난큰곰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바알의 몸을 그 자리에 내려놓고는 엄청난 크기의 손바닥으로 툭툭 쳐서 불을 단박에 뜨렸다. 그러나 심하게 불에 덴 바알은 부르르 떨더니 몸을 축 늘어뜨렸다. 연희와 준후는 타는 냄새에 속이 역겨웠지만 성난 큰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옆에 쓰러진 현암을 살펴보고는 거 대한 몸을 움직여 레그나와 박 신부가 겨루고 있는 쪽으로 걸어 갔다. 그러자 묘한 일이 벌어졌다. 뒤쪽에 남아 있던 레드와 구 구루가 몸을 벌벌 떠는 것이었다. 현암이나 준후, 박 신부와도 거리낌 없이 맞서 싸우던 아이들이 얼굴색까지 변하면서 놀라는 것을 보고 준후와 연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더 군다나 그때까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박 신부와 팽팽하게 버 티고 있던 레그나까지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키가 삼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크게 불어난 거인이 다가오는 것을 본 다면 보통 사람들은 당연히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보 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거의 그런 경우에 보통 사람들 이 놀라는 것만큼이나 두려움에 휩싸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준 후는 지난번 현암이 성난큰곰과 겨루어서 아슬아슬하게 이겼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두려워하는 이유 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이들의 표정에서 성난큰곰을 본능적 으로 두려워한다는 정도만 읽을 수 있었다. 성난큰곰의 소리가 모두의 마음속에 울려왔다.

드디어 너희들을 찾았구나! 바보 같은 것들.

성난큰곰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레그나가 재빨리 몸을 굴렸 다. 그러자 레그나가 있던 자리에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치 정도나 되는 깊이로 땅이 파이면서 먼지가 솟았다. 레그나가 빠 져나가자 박 신부가 미처 힘을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땅에 힘을 쏟은 것이다. 레그나는 급박한 듯 레드와 구구루를 잡아 일으키 곤 그대로 몸을 뒤로 돌려 빠른 속도로 도망쳤다. 자기편이었던 아이들이 세 명이나 쓰러져 있는데도 그냥 도망치다니 엄청나게 의리 없는 놈들이라고 준후는 뒤에서 중얼거렸다. 그렇더라도 준후나 박 신부는 그들을 추격하여 잡을 만한 컨디션이 못될 뿐 아니라 다친 사람들이 걱정되어 자리에 그냥 있었다. 성난큰곰 이 아이들의 뒤를 쫓으려 달려가는 듯했으나 어느 사이에 그들 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 뒤였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그들의 주술 력으로 인해 짙게 끼었던 안개도 서서히 사라져서 새까만 밤하 늘에 점점이 빛나는 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성난큰곰 은 멈칫하다가 결국 돌아왔다.

도망쳐 버렸다. 안개가 끼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왔는데. 십 분 사이 에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다들 괜찮은가?

준후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십 분? 아니 그러면 맨 처음 안개가 낄 때부터 지금까지 시간 이 십 분밖에 안 흘렀단 말야?’

한 사나흘 밤 정도는 꼬박 지새우면서 싸운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고작 십 분 정도였다니. 그것도 맨 처음 안개가 끼고 레그 나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던 것까지 해서 십 분이라면 실제로 자 신들이 싸운 시간은 사오 분밖에 안 된 셈이었다. 준후가 막막해 서쩝 하고 입맛을 다시자 옆에서 연희가 그런 준후를 보고 고개 를 흔들었다.

“나도 무척 오래 지난 줄 알았는데, 정말 짧고도 긴 밤이군.” 준후가 고개를 끄덕이자 성난큰곰이 다시 둘에게 물었다. 

꼬마 친구와 아가씨. 많이 다치지 않았나?

준후는 얼굴이 붓고 아까 룽페이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쑤시 는 것 빼곤 별 탈 없었고 연희도 괜찮았다. 박 신부도 다친 데는 없었지만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한참이나 자신이 힘을 내쏟아 움푹 파인 땅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빈혈 증세로 쓰러진 것이라 걱정할 것은 없었고 문제가 되는 것은 현 암과 주기 선생 두 명이었다. 승희도 호되게 내던져졌지만 그다 지 심하지는 않은 듯, 이미 일어나서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박 신부와 준후가 승희를 부축하여 이쪽 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 사람은 가까 이 오자 간드러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호호. 저는 바이올렛이라고 합니다. 처음 인사하는 자리 치 고는 험악하군요. 많이 다치시지는 않았나요? 서두른다고 서둘 렀는데 조금 늦은 것 같네요.”

바이올렛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높은데다가 너무 간드러졌기 때문에 영어를 잘 모르는 준후조차도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 었다. 또 말이 엄청나게 빨라 도대체 멈출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녀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십대 후반은 넘을 것 같았는데도 어 울리지 않게 짙은 화장을 하고 온몸을 보석으로 휘감고 있었다. 더군다나 상당히 크고 뚱뚱한 몸에 번쩍거리는 실로 수놓은 옷 을 입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조잡하고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준후는 물론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지 않는 편이었고, 그 러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속이 메스꺼 워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연희도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크게 떴다. 오로지 박 신부 한 사람만 변함없이 담담하게 바이올 렛을 맞았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준후는 아까 주기 선생이 바이올렛의 글씨가 예쁘니 어쩌니 하던 것을 떠올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피식 웃었다. 주기 선생이 기절해 있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승 희는 바이올렛의 부축을 받아 여기까지 걸어왔으나 바이올렛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괜찮다고 말하면서 빠져나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올렛은 승희의 몸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 모두들 정말 감사합니다.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해 드려야겠지만 이 장소에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네요. 다친 사람들 도 많으니 병원으로 옮겨야 할 테고, 누군가 나타나면 시끄러워 질지도 모르니까요. 오우, 이분이 미스터 상준인가요? 저런저런 너무나 힘든 일을 하셨군요. 저렇게 다치다니, 가엾기도 해라. 이분은 미스터 현암? 성난큰곰이 미스터 현암 이야기를 수도 없 이 했어요. 너무너무 강하고도 마음이 올바른 분이라고요. 다치 신 모양이군요. 여기 쓰러져 계신 신부님은 누구? 이분에 대해서 는 듣지 못했는데요. 그리고………….”

눈 깜빡할 사이에 엄청난 양의 말이 쏟아져 나오자 승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는지 몸을 배배 꼬다시피 해서 간신히 바이 올렛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승희는 현암이 외부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것이 아니라 또 그놈의 혈도가 잘못되어서 쓰러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보조적으로 힘을 부어 주 어야 했다. 역시 짐작대로 현암은 벌겋게 상기된 채 숨을 몰아쉬 고 있었다.

“으이구 이 미련이야.”

승희는 현암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히자마자 현암이 쓰러 지지 않게 어깨에 손을 짚고 힘을 밀어 보내기 시작했다. 바이올 렛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준후는 호기심 때문에 머뭇거렸지만 바이올렛의 기관총 화법에 견디다 못해 귀를 막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준후는 슬슬 뒤로 물러나서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월향검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문득 아까 레드의 마검도 정말로 지독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월향검이 전력을 다해서 마검을 부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준후는 월향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으로 보아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후는 내친김에 청홍검 도 집어 들었다. 룽페이가 떨군 곤선승도 보였지만 그 끝 부분이 늑대 소년의 다리에 박혀 있어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피를 많이 흘린 채 기절해 있는 늑대 소년의 몸에서 뭔가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준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늑대 소년 쪽으로 다가섰다.

“최 교수와 주기 선생, 그리고 우리의 일을 어떻게 알았지요?” 

박신부는 바이올렛의 전혀 쓸데없는 말을 간신히 중단시키고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연희는 성난큰곰과 같이 윌리엄스 신부와주기 선생을 부축하여 옮기고 있었다.

오우, 저런 죄송죄송. 너무 제 이야기만 했네요. 용서해 주시겠지요?”

바이올렛은 뚱뚱한 몸을 흔들면서 호호호 웃다가 끔벅 윙크를 했다. 박 신부도 어지간한 사람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참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아멘. 이건 싸우는 것보다도 더 힘들군.’

그런 박 신부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이올렛은 그 특 유의 소름 돋는 ‘호호호’를 연발하면서 지껄였다.

“간단하지요. 저는 조금, 그러니까 그다지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되지만 약간의 재주가 있지요. 에…………… 그러니까, 저는 백마 녀협회의 회장이기도 해요.”

박 신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마녀라고요?”

“네… 그렇다고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마녀라 고 해도 중세 때 있었다는 이상하고 나쁜 일이나 반기독교적인 행위를 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백마녀협회는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계와 인간계의 잊힌 힘들을 유익하게 사용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어요. 하긴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골치 아픈 일에 말려들었 지만…………. 제가 이 일에 말려든 것은 어떤 조직과 연관이 있어 요. 물론 그 조직과 노선을 같이하는 것은 아니었지만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어떻게 미스터 상준의 일이나 미스터 준후의 일 을 알았느냐고 물으셨죠? 저는 수정구 응시를 한답니다. 그러니 까 투시력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나은 면도 있고 못한 면 도 있지요. 이름만 안다면 멀리 떨어진 상황을 볼 수가 있다는 점에서는 좀 낫고,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못하죠. 그러니까 어제, 오우, 아니지. 그저께 미스터 상준이 다친 것은 수정구 응시를 통해 알았지요.” 

“잠깐 잠깐만요.”

박신부가 횡설수설하는 바이올렛의 말을 중단시키고 물었다. 

“일단 말씀하신 바로 미세스 바이올렛은…….”

“오우, 저런 미스 바이올렛이라고 불러 주세요. 모르시고 하 신 실수이니 용서해 드리지요. 호호호.”

“아, 네. 일단 정리를 해 보면 미스 바이올렛은 백마녀협회의 회장이고, 무슨 조직의 일과 연관되어 이번 일에 말려들게 된 것 이며 수정구 응시를 통해서 우리를 알게 되었다는 건가요?” 

“오우, 맞아요.”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이름을 알아야 수정구 응시 가 가능한데 그건 어떻게……………..”

“간단해요. 여러분들의 이름과 국적은 성난큰곰이 알려 주었 어요. 그리고 미스터 상준에 대한 것은 우연히 알게 되었어요. 정말 우연한 일이었답니다. 나중에 이야기해 드릴게요. 오, 그나 저나 지금은 할 일이 있네요. 이 아이들을…………….”

“흠. 또 이 아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아셨나요? 그것도 수정 구 응시를 통해서였습니까?”

“오우, 물론 아니지요. 조직 때문에 알게 되었어요.”

“그 조직이란 어떤 겁니까?”

“아주아주 파워풀하고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직이지요. 그 조직은 최 교수의 연구가 진행되는 것을 두려워해요. 몹시몹시 두려워하고 있지요. 그래서 그 조직에서 이 아이들을 보낸 거예요.”

“이 아이들이 그 조직이라는 곳의 소속이란 말입니까?”

“오우, 그렇지는 않아요. 그 조직에서 의뢰를 한 거죠.”

“이 아이들은 블랙서클이라는 곳에서 사용하던 수법을 물려받 은 것으로 보이는데…………. 블랙서클에 대해서도 아시나요?” 

“물론 알지요. 성난큰곰과 저는 매우매우 친해요. 그래서 다 안답니다. 여러분들이 애써 주셔서 그 무시무시하고 호러블한 블랙서클이 사라지게 된 것도 다 들었지요. 정말 저로서도 믿어 지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호호호. 그런데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 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누가 지나가기라도 한다면 좋지 못할 거 예요.”

“그러나 최 교수를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오우, 이제 저 아이들은 절대로 여기 오지 않을 거예요. 성난 큰곰이 왔으니까요.”

“왜 그렇죠?”

“아, 너무 이야기가 많아요.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다친 사람 들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 다가…………….”

바이올렛이 말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에서 준후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뭐예요! 지, 지독한…”

마침 그때는 승희와 연희가 현암과 윌리엄스 신부, 주기 선생 을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차에 옮겨 태우고 있었고 성난큰곰은 불에 덴 바알을 살펴보고 있었다. 준후의 목소리를 듣고 박 신부 와 바이올렛, 성난큰곰은 준후 쪽을 돌아보았다. 준후가 상처를 돌보느라 그랬는지 준후 앞에 있는 늑대 소년의 가죽 옷이 젖혀 있었다. 그런데 안쪽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조금 거리 가 있어서 정확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숫자가 사에서 막 삼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준후야, 얼른 피해!”

박 신부는 소리를 지르면서 바이올렛을 옆으로 확 밀어 버리 고는 준후에게로 뛰어들었다. 폭탄이 분명했다. 준후도 놀란 나 머지 몸을 굴려서 박 신부가 달려오는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 왔 다. 그 순간 숫자가 일로 변했다. 박 신부가 준후의 몸 위로 덮으 면서 반사적으로 오라 막을 극도로 끌어 올렸고 성난큰곰도 한 쪽으로 몸을 날렸다. 사방이 숨 막힐 듯한 빛과 소리에 휩싸였 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암흑과 정적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현암은 허공에 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자신이 여기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이 하나도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렇게 허공에 떠 있는 현암의 눈앞에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 졌다. 우뚝 솟은 고층 건물들과 안테나들의 숲, 그리고 빽빽하게 땅 위를 수놓고 있는 도로들과 그 도로들을 따라 보기 좋게 나 있는 가로수들…………. 갑자기 가로수들이 서 있는 녹색의 구역이 도로를 뚫고 넓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천 배로 빠르게 돌아가 는 필름을 보는 듯했다. 현암은 뭔가 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몸도 움직여지지 않았고 눈도 감을 수 없었다. 현암이 보고 있는 사이 가로수의 물결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건 물들이 있는 곳까지 비집고 들어갔다. 고층 건물, 아파트, 탑 같 은 수많은 건물들이 갑자기 수백, 수천 년의 나이를 먹은 듯 급 속하게 썩어 들어갔다. 급기야는 건물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렸 다. 현암은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자신으로서도 뜻을 알 수 없 는 소리를, 그리고 몸을 허우적거리면서 움직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그 많던 건물들은 앙상한 뼈대와 폐허의 자취만을 남긴 채 하나둘씩 사 라졌고 그 위를 푸른 식물들이 덮어 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거 대한 녹색의 산 같은 것이 밀려왔다. 아니, 녹색이라기에는 너무 짙은 푸른색이어서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물결이나 해일 같았 다. 그 시퍼런 물결이 인정사정없이 덮치자 가장 큰 건물의 폐허 조차도 마치 장난감처럼 으깨졌다. 그 거대한 물결은 현암까지도 엎어 버릴 듯 으르렁거리면서 달려들었다. 현암은 비명을 지르면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물결이 현 암을 휩쓸려고 하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무것도 보이 지 않더니 난데없이 현암보다도 수십 배는 커 보이는 목탁 한 개 가 눈앞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졌다. 목탁이 부서지면서 나는 소리가 거대한 울림이 되어 현암에게 전해지는 순간, 현암은 몸 을 벌떡 일으켰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낯익은 목소리였다. 현암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색이 아니라 눈부시게 투명한 흰색의 풍경이었다. 병 원. 그래, 꿈이었구나. 현암은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한 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눈을 돌렸다. 승희가 미소를 지으며 앉 아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군. 괜찮아?”

“물, 물좀…….”

승희는 물 한 컵을 따라서 현암에게 주었다. 현암은 물을 단숨 에 들이켠 다음에야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승희는 현암의 안색

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는 걱정되는 듯 말했다.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얼굴색이 영 안좋네.”

“음, 홍수, 홍수가………. 그리고 커다란 목탁이………………”

“목탁은 뜬금없이 웬 목탁이야? 정신이 들었으니 다행이군.”

현암은 비로소 자신이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하다가 쓰러졌던 일이 생각났다.

“신부님과 준후는? 그리고 신동들은?”

“신부님과 준후는 별일 없어. 성난큰곰이 중상을 입었지만・・・・・・”

성난큰곰이 아니었다면 많이 죽거나 다쳤을 거야.”

“성난큰곰?”

“그래, 현암군이 의식을 잃은 다음 바이올렛과 함께 왔어.”

“그랬구나. 바이올렛과 같이 온 사람이 바로………….”

“그래. 내가 간단하게 이야기해 줄게.”

승희는 현암이 의식을 잃고 있어서 나중에 벌어진 일들을 하 나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성난큰곰과 바이올렛이 온 것, 아이들이 도망친 일 그리고 늑대 소년의 몸에 있던 폭탄이 터진 일들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폭탄이 폭발하려는 순간, 성난큰곰이 강신술을 써서 사람들이 있는 쪽을 막은 덕분에 박 신부, 준후, 바이올렛 등은 그다지 큰 부상을 입지 않았으나, 정작 성난큰곰은 폭탄에 너무 가까이 있던 탓에 강신술을 썼음에도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준후나 박 신부님은? 많이 다치셨니?”

“멀쩡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구…… 좀 다치시긴 했어. 그 러나 위중한 것은 아니니까 염려할 건 없어. 그 근처의 집들이 좀 피해를 입었어. 다행히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깨어진 정도고 다친 사람은 없어. 백호 씨가 어떻게 수습한 모양이야. 가 스 폭발이라고 애꿎은 가스 공사 측만 원망 듣게 생겼지. 후후 후.”

“월향검은? 그리고 최 교수님은?”

승희는 현암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염려 마. 월향검은 준후가 보관했고,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사하니까.”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됐지?”

“불행히도 신동 아이들은 무사하지 못했어. 늑대 소년은 즉사 했고, 바알은 워낙 상처가 심해서 옮기는 도중에 죽었어. 룽페이 라는 중국 아이만 숨이 붙어 있지.”

현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악독한 수법을 쓰고 거기다 가 사람을 죽이려고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비참 하게 죽은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현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 말을 꺼냈다.

“오늘 며칠이지? 그러니까…………… 내가 얼마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지?”

“꼬박 하루 지났어. 지금은 밤 아홉 시구, 현암 군이 쓰러졌던 건 어제 일이야. 정신이 든 것을 보니, 이제 나은 모양이네. 그렇지?”

현암은 한쪽 팔을 들어 움직여 보았다. 원래 현암의 몸에는 큰 상처가 있는 것이 아니었고 다만 공력을 잘못 운용하여 기혈이 들끓는 바람에 기절했던 것이다.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 력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현암은 완치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승희도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은 덕에 현암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거뜬하군. 이상한 일이야. 기혈이 그렇게 엉켰는데……………. 누가 도와주었니?”

“글쎄, 뭐 어떻게 할 수가 있어야지.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는 데 새벽부터 자연스럽게 상태가 좋아지더라구. 그래서 모두들 안심했지 뭐.”

이상했다. 자신은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기혈을 바로잡을 생 각을 못했을 텐데……. 만약 도운 사람이 없다면 필경 위험한 지경까지 갔을 것인데 어떻게 진정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 다. 어쨌든 멀쩡해진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니 이렇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현암이 몸을 일으키자 승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어나려구?”

“음. 다 나았는데 이러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래, 그럼. 마침 지금 최 교수님 댁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야 현암 군도 가자구.”

승희는 말을 마치고 현암에게 옷을 건네주고는 갈아입을 동 안 기다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나가는 승희의 뒷모습을 보며 현암은 마음 한끝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승희는 분명 자신이 깨어날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현암은 승희의 뒷모 습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승희야, 고맙다.”

“안하던 소리하지 말고 옷이나 얼른 입어!”

장난스럽게 톡 쏘면서 승희는 문을 쾅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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