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화 – 홍수 14 : 수메르의 유적
수메르의 유적
백호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마중 나온 대사관 직원에게 호통 을 치다시피 해서 호텔로 향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뿌리치고 중 국으로 그들을 돕기 위해 온 것은 공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 서는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백호는 올 수밖에 없었 다. 자기의 행동이 윗사람에게 보고되어 알려지게 되면 목이 달 아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이 아직 어느 정도의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 에 있을 때 조금이라도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었다.
수라장이 된 호텔에서 만나 본 중국 관리는 냉랭한 목소리로 백호를 힐난했다.
“더 말할 것 없소. 그들이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것은 이미 완 전히 입증되었소. 그들은 우리 정예 요원들을 인형처럼 가지고 놀았고, 수감실을 글자 그대로 붕괴시키고 빠져나갔소. 더 이상 귀국의 입장을 들어 줄 상황이 아니오. 그러한 위험인물들은 인 권 문제 차원에서 거론될 성질의 것이 아니오.”
백호는 암담했다. 그러나 안타까워하는 백호와는 상관없이 중 국 관리는 백호의 속을 긁듯이 말했다.
“오히려 당신이 우리에게 협조를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중차대한 문제요. 그러니 ……………..”
‘협조 협조하라고?’
백호는 뻔뻔스러운 관리의 말에 화가 치민 나머지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가만있자……. 지금 나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방법이 없 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같 이 행동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지금 내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어 본다고 해야 실제로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도 없는 일이고…….’
백호는 냉정해지려 애썼다. 일이 벌어지지 않았기를 기대하면 서 급히 이곳에 왔는데 일은 진작 벌어져 있었고 그들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백호는 퇴마사들이 잡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혹 잡혔다면 이 나라의 관리와 담판이라도 지어서 어떻 게든 본국으로 빼돌릴 요량으로 중국에 온 터였다. 그런데 도망 쳤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짜내어 어떻게든 그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했다.
‘일단 정부의 명령을 받고 온 것처럼 하고, 다른 방법을 취해서라도 본국의 재가를 어떻게든 얻어 내자. 비록 단독으로 온 것 이지만 그들을 남의 나라 손아귀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그런 행 동을 취했다고 핑계를 대면 될 것도 같다. 그래……………. 그러면 내 직책도 당분간 유지될 것이니 조금이라도 힘을 쓸 수 있겠지.’ 직책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다만 백호는 직책을 유지하는 쪽이 퇴마사들을 위해서 작은 일이라도 더 해 줄 수 있을 것이라 고 판단했다. 본국에서도 남의 나라가 그들을 생포하여 그들이 가진 힘의 비밀을 캐낼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는 것을 원치 않 을 것이니, 그들을 송환하거나 아니면 사망을 확인한다는 조건 을 붙이면 될 것 같았다.
‘냉정하자. 냉정해야 한다. 그래,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긴 해 도 그들의 잠재적인 능력까지는 알고 있지 못할 거야. 그래도 정 안 되면 마지막 순간에 도피시킬 방법을 궁리해 내야겠지.’
중국에는 현암과 박 신부, 인도에는 준후와 승희가 있었다. 일 단 현암과 박 신부 쪽이 더 믿음직하니 승희와 어린 준후를 구하 러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승 희는 투시력이 있고 준후는 여러 가지 재주들이 많으니 그쪽이 더 안전할지도 몰랐다. 더구나 박 신부는 다리까지 불편하고, 현 암은 싸움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정말로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결국 백호는 결심했다.
‘할 수 없다. 우선 인도로 가 보고 거기서 만약 승희 씨와 준후 의 자취를 찾을 수 없으면 중국으로 돌아오도록 하자. 어떻게든 그사이에만 버티어 주면 무슨 방법이든 있기는 있을 텐데………… 백호는 중국 관리에게 싸늘한 눈길을 한 번 쏘아붙인 다음 한 국에 전화를 걸기 위해 인공위성과 직접 연결되는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중국에서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서둘러 달려온 것 으로 하자. 그러면 바로 목이 잘리지는 않을 테니…………. 비굴해 보이더라도 할 수 없다. 무슨 짓을 하건 간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전화 다이얼을 누르는 동안에도 두 가지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분노와 자신의 무력감과 그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 때 문에 금방이라도 쓰러지고 싶은 기분을 애써 추스르면서 백호는 망연히 하늘을 보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디에 있소? 어쨌거나 제발 무사하시기를………..?’
밤이 다 지나 새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꽤 달려왔는지 북경 시내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어느 이름 모를 변두리에서 일행 은 낡은 창고를 발견했다. 다행히 창고는 비어 있었다. 자리를 잡고 편하게 다리를 뻗고 앉으니 그래도 좀 살 것 같았다.
윌리엄스 신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축하여 안으로 데리고 갔다. 아라는 깨어나서 훌쩍거리다가 금방 다 시 잠에 빠졌고, 연희도 깊은 잠에 들었다. 최 교수는 이제야 조 금 정신이 드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현암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색하지 않고 연희에게 세크메트 의 눈으로 승희와 연락을 취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 다. 현암은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 에게 걱정을 끼칠까 봐 마음속에만 담고 있다가 조용할 때에 박 신부에게만 말할 작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잠잠해지기를 기다 리면서, 현암과 박 신부는 아무 말 없이 마주 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박 신부는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 가지 않았지만, 옆에서 보는 최 교수에게는 마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뭐라고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최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운 일을 너무 많이 겪은 터였고 또 궁 금한 것도 많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그냥 혼자 부스럭 거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최 교수의 뒷주머니에서 뭔가 가 눌리는 감촉이 왔다. 손을 넣어 꺼내 보니 그것은 아까 무심 코 집어넣었던 황 교수의 수첩이었다. 최 교수는 긁적거리면서 수첩을 펴 보았다. 그 순간 최 교수의 눈이 커지고 안색이 변했 다. 최 교수는 조금 더 밝은 곳으로 옮겨 가서 수첩의 내용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한참 만에 최 교수의 입에서 놀라움에 가득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럴 수가! 현암군, 이걸 좀 보게!”
“네?”
“이건 황 교수의 노트네. 내가 우연히 집어넣게 된 건데 황 교 수가 자신이 연구한 핵심 내용을 모아 놓은 노트일세! 평소에 발 상이 떠오를 때 사용하기 위해 이렇게 작은 노트에 메모해 놓았던 것 같은데, 그 앙그라라는 꼬마가 찾던 것도 이것이 틀림없네!”
박 신부가 최 교수 옆으로 다가앉았다. 최 교수는 떨리는 손 으로 초서체의 한문으로 쓰인 글자들을 중얼거리며 읽어 내려갔 다. 그러더니 잠시 후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황 교수는 내 홍수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상고 시대에서부터 시작하여 근동의 역사까지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 수첩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습니까?”
박신부가 안경 너머로 눈을 빛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최 교수에게 물었다.
“황 교수는 치수 기술의 전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최 교수는 정신이 없는 듯 말을 이으려다가 박 신부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하자 다시 헛기침을 하면서 자세히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치수 기술, 그러니까 오행치 수법을 배워 간 사람은 후에 하나라의 임금이 된 우이고, 우는 치수를 마무리하고 왕이 된 이후에 신하였던 백익과 함께 중국 은 물론이고 주변 각국의 지리와 산물의 특성들을 조사하러 다 녔다고 합니다. 혹자는 지금까지 내려오는 책인 ‘산해경(山海 經)이 그때의 조사 내용을 기록한 책이라고 합니다만 그건 아닙 니다. 여하튼 우가 왕이 된 이후에 천하를 주유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한 대로 전 세계에 걸쳐서 거대한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나라들 역시 홍수의 두려움 에 떨고 있거나, 혹은 피해가 다 복구되지 못한 상태에 처해 있 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럴 때 과연 우나 그 신하가 그곳을 그 냥 지나치기만 했겠는가 하는 의문을 황 교수는 제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니 백익이 천하를 주유하면서 주변의 나라나 부 족에게도 치수 기술을 가르쳤다는 말인가요?”
“그거야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그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것으로 황 교수는 보았던 모양 입니다. 그리고…………. 아! 다음 장을 보십시오. 마침내 개가를 올 렸습니다! 그 내용이 여기에 적혀 있어요!”
“개가? 어떤 것이지요?”
“유적, 유적입니다. 수밀이국(須爾國)의 유적⋯⋯⋯⋯…”
이번에는 현암이 눈을 크게 떴다. 수밀이? 몇 번 들어 본 이름이 아니었던가?
“수밀이라고요?”
“그렇네, 수밀이! 『한단고기나 기타 고대 역사서에는 단군 연 방 십이국 중의 하나로 수밀이라 표기되어 있지. 이건 어쩌면 수 메르일지도 모르지.”
“수메르는 중동 국가인데 그 나라와 연방이라는 건 심하지 않 습니까? 거리가 너무 먼데.”
“이보게, 고대의 연방은 식민지 같은 것이 아냐. 그냥 사신이 한 번 다녀가서 서로를 인정해도 그렇게 기술될 수 있는 걸세. 중국 사서에서도 수많은 주변 국가들이 방문하여 그들에게 품계 를 내렸다는 기록이 얼마든지 있지. 가령 왜국의 경우도 여왕 비 미호, 히미코)가 중국 위나라에게 인장을 받았는데, 당시 관점으로는 왜국과 위가 소통을 하고 위에서 책봉을 했으니 연 방이 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물론 실제적으로는 효력이 없지 만, 양국 모두 자국 내에서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일이었 단 말일세. 그렇다고 왜국이 위국의 속국이 되었단 말인가? 고 대인들의 정치 감각을 그렇게 무시하면 안 되네. 최소한 책 구절 만 읽고 현실감 없이 멍청한 상상을 하는 현대의 바보들보다는 백 배 똑똑했을 걸세. 단군의 십이 연방을 마음대로 해석해 십이 국을 지배했다고 떠드는 건 멍청한 국수주의자들의 이야기고, 실제로는 사신이나 귀족 한두 명이 오가며 긍정적인 대화만 나누었어도 성사될 수 있는 일일세. 단군국은 단군국대로, 수메르 는 수메르대로, 오히려 멀리 떨어져 있어 간섭받지 않고 세를 과 시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는가. 고대사 관 련 사서에는 이런 구절이 수도 없어. 중국 역사서도 틈만 나면 서역 국가들이 중국에 복속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칭기즈 칸 이 나타나기 전까지 서역 국가가 중국에 복속된 적은 한 번도 없 었고 도리어 그들은 중국이 복속했다고 떠들었네. 고선지가 한 번 실크로드를 개척했지만 서로의 이해가 맞는 무역로만 살아 있었지, 주변 국가들은 그 후에도 독립국들이었으나 사서에는 그렇지 않은 뉘앙스로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네.”
박 신부도 흥미를 느끼는지 최 교수에게 물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어쨌든지 수밀이인지 수메르인지의 유적 을 황 교수가 찾아냈다는 말입니까?”
“아직 그곳으로 가 보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확실합니다. 오오!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현암이 물었다.
“그 위치도 나와 있나요?”
“있어. 파키스탄일세. 대량의 점토판이 발견된, 수메르의 유적 이 발견된 곳에서 약간 동쪽으로 위치해 있는 나라지. 수메르의 홍수 신화를 생각해서 편의상 황 교수가 붙인 이름일지도 모르 겠고. 아아! 유적이라니……………. 노트에 보면 거의 흠 하나 없이 완벽하게 보존된 지하 도시가 있다는 걸세. 발견자의 말에 따르면 동굴 벽을 깎아 만든 주택 십여 채의 흔적과 광장까지 있다는군. 아…………. 가만! 이걸 보게나. 황 교수는 이것이 홍수를 근간으로 하여 문명이 전파된 흔적이라 생각하고 있어. 또 이 구절을 보 게. 거기에는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녹색의 비석이………. 그런데 해독되지 않는 그 문자는, 황 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단군조선의 신지 문자나 녹도문이 아닐까 한다는 걸세! 그래, 그러니까 이건 동쪽에서부터 발달된 치수 기술을 기본으로 하여 문명이 이동한 흔적, 그 결정적인 증거란 말일세!”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고대 문명이 중국을 거쳐서 서(西) 로 이동하여 수메르나 메소포타미아에까지 미쳤다는 증거란 말 입니까?”
“그야 당연하지! 신지 문자. 단군조선의 문자로 되어 있는 비 (碑)가 지금의 파키스탄 지방에 존재하다니…………. 조금 전까지는 그냥 이름만 연방국일 거라 말했네만, 물증이 나온다면 이건 대 사건일세! 어딘가가 복속되거나 문화 지배를 받았다는 건 철없 는 비약이겠지만, 적어도 문화적 교류와 교통의 증거를 찾은 셈이니까!”
“우리 고대 민족이 그렇게 강성했다는 것입니까?”
“이보게, 무조건 그렇게 비약하는 건 안 돼 있는 대로 봐야지. 적어도 우리 고대 민족이 주체성과 독립된 문화를 지닌 하나의 집단이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지, 무턱대고 확대하는 건 반대파들이 구실을 삼기 딱 좋은 섣부른 생각이야.”
“그렇군요. 주의하겠습니다.”
“로마 때의 갈리아나 게르만을 생각해 보게. 간단히 말하면 갈리아인은 프랑스인의 선조이고, 게르만인은 독일의 선조였는 데, 로마의 기술에 의하면 그들은 그냥 야만족이었어. 카이사르 가 갈리아는 정벌했지만 게르만은 굳이 정벌하러 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그것은 로마인의 시각에서만이 야. 그들은 로마인이 모르는 바지를 만들어 입을 줄 알았고, 자 체적인 문화나 풍습도 지니고 있었어. 프랑스의 만화 중에 아스 테릭스라는 게 있네. 갈리아인이 그들을 정복하려는 카이사르 의 로마인과 맞서는 내용인데, 꽤 유명하고 아무도 그걸 문제 삼 지 않지.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것을 만들면, 당장에 ‘국수주의자’라고 온갖 험한 욕을 먹고 심한 꼴을 당해야 하네. 하다못해 철부지 애들에게까지 ‘그런 욕은 해도 된다’며 부추겨 광풍을 만들어 내지. 누가 이렇게 하는 건가? 프랑스나 독일인 이 로마 문명에 덧쓰이지 않는 도나우 강 유역의 문명 흔적을 찾 으러 애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서양 학자들은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난하지 않아. 헌데 우리나라로 오면 사정 이 달라져. 중국 역사에 매몰된 역사 속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뒤 져 주체성을 찾으려 들면, 누군가가 나타나 오만 트집을 걸고 함정에 빠뜨려 매도하기 일쑤지. 허황된 수작을 펴고 있다. 증거 도 없는데 거짓말을 지어냈다. 가치 없는 말이다. 후대의 위작이 다…………. 심지어는 책 이름을 언급만 해도 욕설을 해 대는 저질 문화를 의도적으로 퍼뜨리기도 하지. 이상하지 않나?”
“흠……
“이 녹비가 중동에서 발견된다고 중동이 우리 지배하에 있었 다고 믿는 건 바보 같은 생각이야. 신라 때 유물을 보면 천축(인 도)이나 아랍에서 온 유리 제품이 적지 않게 발견되네. 그게 나 왔다고 신라가 아랍이나 천축의 식민지였나? 그렇지는 않잖은 가. 마찬가지일세. 그보다는 우리 선조가 문화도 없는 야만인이 아니라, 어엿하게 다른 민족에게 무엇을 전달할 만큼은 되었다 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네.”
자제하라고 말했지만 그런 최 교수도 약간은 흥분한 것 같았다. 한편 현암은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룽페이가 마지막 숨 을 거두면서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룽페이는 모든 것이 땅 속의 지하 도시에 있다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이 유 적의 이야기가 왠지 룽페이가 말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듯했 다. 그동안 마스터가 무엇 때문에 최 교수와 황 교수를 죽이려 했을까에 대한 의문은 계속 현암의 마음속에 두고두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남아 있었다.
현암은 두어 번 심호흡을 하면서 깊이 고심해 보다가 박 신부에게 말했다.
“혹시 이 지하 도시가 룽페이가 죽으면서 말했던 그 지하 도시는 아닐까요?”
“흠! 어째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저는 오래전부터 마스터가 왜 전혀 관계도 없는 황 교수님과 최 교수님을 해치려고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나 이 지하 도시가 만약 룽페이가 말한 대로 마스터의 본거지거나 그 비슷한 종류의 장소라고 한다면, 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 도 마스터가 교수님들을 해칠지 모르지요. 더구나….”
현암이 박신부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맞네! 나도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어. 방금 최 교수님 이야기 를 들으니 황달지 교수는 거기 서 있는 녹색의 비석에 대해 언급 했어. 녹색의 비석………. 뭔가 짚이는 것이 없는가?”
“네? 아! 에메랄드 태블릿?”
“추측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면 그건 어쩌면 에메랄드 태블릿 의 원형이거나, 아니라고 해도 에메랄드 태블릿처럼 무엇인가 고대의 신비를 담아 놓은 것일 가능성이 많아. 만약 마스터 같은 자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그 힘을 끌어내어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그곳을 비밀로 지키려고 하지 않겠는가?”
현암과 박 신부는 둘의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얼굴 을 하고 있는 최 교수를 놓아둔 채 마주 보았다. 둘은 비로소 동일한 결론에 다다른 것 같았다. 지하 도시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그곳이야말로 마스터가 재기를 노리는 근거지이자 신동들을 키워 내고 훈련시킨곳일지도…………….
연희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겨우 눈을 떴다. 꼭 악몽 때문에 눈 을 떴다기보다는 갈라진 벽의 틈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에 닿 았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연희는 잠시 멍한 상태에 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만치 한구석에서는 윌리엄스 신부가 잠들어 있었고 아라는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자고 있었다. 그런데 ・・・・・・
“앗?”
연희는 놀라면서 몸을 일으켰다. 현암과 박 신부가 보이지 않 았다. 그리고 최 교수도……………
벌떡 일어나서 창고의 밖을 내다보았지만 넓디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을 뿐, 세 사람의 자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연희는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다시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런데 아까 미처 보지 못했던 종잇조각 한 장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집어 들었다. 연희가 몸을 움직 이자 옆에 있는 아라가 눈을 비비면서 몸을 일으켰다. 연희는 종잇조각을 들여다보았다. 박 신부의 필체였다.
연희 양, 미안하네. 말도 없이 떠나게 되어서……………. 속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와 같이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연희 양과 윌리엄스 신부님에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 이니 이해해 주게. 연희 양은 윌리엄스 신부님과 함께 티베트로 가 주게. 그래서 나 대신 판첸 라마를 만나서 에메랄드 태블릿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주게. 티베트의 에메랄드 태블릿도 이번 일 과중요한 관련이 있을 거야. 우리는 수밀이의 유적지로 가네. 그 곳은 마스터의 근거지일 가능성이 높고 이번 일을 푸는 데 큰 열 쇠가 될 장소인 것 같아 그러는 것이니 재차 이해를 바라네. 거듭 부탁하네만 티베트의 일을 꼭 처리해 주게. 연락은 이쪽에서 어 떻게든 취하겠네. 윌리엄스 신부님의 사제관으로 우리의 소식을 전할 테니 신부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주게. 그리고 미안하지만 자동차는 우리가 쓰겠네.
그 밑에는 조그맣게 최 교수의 전언도 씌어 있었다.
아라를 잘 부탁합니다.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저는 학자로서 그 렇게 중요한 유적에 가 보는 일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라를 한 국에 있는 저의 친척들에게 맡겨 주시기 바랍니다.
“너무해!”
연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티베트에서의 일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번과 같은 경우는 위험에서 자신들을 빼놓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언니, 아빠 어디갔어? 이이잉!”
아라가 아빠가 없어진 것을 알고 울먹거렸다. 연희는 아라를 다독거리면서 다시 한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해!”
박 신부와 현암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최 교수와 함께 차를 탄 채 달리고 있었다. 현암과 박 신부는 최 교수도 떼어 두고 가려 고 했으나, 최 교수는 막무가내로 같이 가겠다고 했다. 자신이 아니면 그 지하 유적은 찾아 가기 어려울 것이라고 반협박까지 해 가면서…………. 아닌 게 아니라 황달지 교수의 노트에 적힌 기 호들은 박 신부나 현암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숫자가 좌표를 의미하는 것인지 연대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 고 간략하게 표시된 약자들의 의미도 비전문가로서는 알 수 없 어서, 둘은 별수 없이 최 교수와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윌리엄스 신부나 연희보다도 최 교수와 아라가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더 컸지만, 이번 일을 해결하자면 최 교수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물론 위험하다는 핑계를 대고 놔두고 오기는 했어도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티베트에서 에메랄드 태블릿에 대해 알아내는 것 역시 중요한 단서가 될 것 같아 겸사겸사 그렇게 한 것이었다.
현암은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박 신부는 앞좌석에 앉아 무엇 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뒷좌석의 최 교수는 황 교수의 노트를 훑어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현암은 파키스탄으로 가기 위해 서 쪽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자동차로 가려면 몇 날 며칠이 걸릴지 모르는 먼 길이었다.
한참 말없이 가다가 현암이 문득 한마디 했다.
“승희와 준후는 괜찮을까요?”
박신부는 묵묵히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말했다.
“아직은 별일 없는 것 같네.”
“걱정이 되는데요?”
“걱정 말게. 둘 다 무사하니 말일세.”
현암은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박 신부가 너무도 태연하고 확 신에 찬 어조로 이야기하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박 신부는 확실 히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그사이 무슨 능력이 생겼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위험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는 승희와 준 후의 일을 저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박 신부는 현암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도책을 꺼내어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자동차로 가려면 닷새는 걸리겠군. 너무 오래 걸리는데………”
박신부의 말에 최 교수가 창밖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지금 여기는 무한(武漢) 부근입니다. 여기서 똑바로 서쪽으로 가면 파키스탄이 나올 겁니다.”
박신부가 최 교수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자동차로 닷새 거리라면 너무 멉니다.”
“흠!
최 교수는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한 시내로 들어갑시다. 거기 박물관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는사람요?”
“네, 어쩌면 그 사람을 통해 가짜 여권을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짜 여권을요?”
현암이 되묻자 최 교수는 씩 웃어 보였다.
“고고학 연구를 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지요. 불법 입국이나 출국도 불사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찾는 사람 들이 있는데, 이 사람도 그중 한 사람이지요.”
현암이 그 말을 듣고 박 신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모험을 하는 셈치고 그 사람을 찾아가 보는 것이 어 떨까요? 자동차로 국경을 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닐 텐데요. 더 구나 여기는 사회주의 국가 아닙니까?”
“흠, 그렇긴 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니 ……………. 비행기를 탈 수만 있다면 좋겠지. 그러나 우리를 수배하기 위해 사방에 인원이 쫙 깔렸을 텐데, 그걸 어떻게 하지?”
현암은 잠시 궁리하다 슬쩍 웃어 보였다. 좋은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제게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백호는 갖가지 이유를 붙여서 결국 ‘그분’에게 자신의 행동을 납득시키기에 이르렀다. 물론 퇴마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중 국인들을 돕겠다는 뜻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위험한 능 력’이 중국을 비롯해서 다른 나라에 의해 밝혀지는 것을 원치 않 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확인한다는 입장으로 행동의 자유를 보장받았을 뿐이었다. 섬뜩하고 기분 나쁜 임무를 자원한 꼴이 었지만 이 방법 이외의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으니 할 수 없 는 일이었다. 백호는 비상시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경비행기 한 대 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받았고 그 비행기를 즉시 북 경으로 오게 했다.
비행기가 도착하기도 전에 백호는 중국 관리들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나 퇴마사들이 잡힌 것은 아닐까 하고 속이 뜨끔했지만 전화로 들려오는 소식은 그렇게까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인 신부 한 명과 통역사로 보이는 여자 한 명, 그리고 여 자아이 한 명, 이렇게 세 명이 무한으로 가는 국도 변의 오두막 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속히 와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습니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세 명의 남자들은 자신들이 자는 사이에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또 인터폴에서 도구르 경위가 도착했는 데, 그분도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이쪽으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백호는 일단 현암과 박 신부가 잡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국인 신부는 분명 윌리엄스 신부일 것 이고 여자와 아이는 연희와 아라일 것이다. 윌리엄스 신부도 숨 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외부로 노출되지는 않은 상태이고, 연희와 아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지 않은 민간인이니 쉽게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암과 박 신부는 그들이 동행하면 위험해질까 봐 떼어 놓고 간 모양이었다. 그저 한 가지 묘한 게 있었다.
‘최 교수는? 최 교수는 왜 따라간 거지? 차라리 능력이 있다면 윌리엄스 신부가 더 있을 것이고, 언어 문제라면 연희 양이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이번 일은 홍수의 기원에 얽 힌 일이라는 것을 백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최 교수를 동행시킬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보 다는 최 교수가 자진해서 따라갔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어린 딸 아라까지 버려두고 길을 나섰을 것이라 짐작했다. 만약 현암 이나 박 신부였다면, 최 교수가 아무리 필요하다고 할지라도 최 교수에게 딸을 놓아두고 위험한 곳에 같이 가자고 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 교수가 자원하여 같이 가기를 원했다면 그들 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백호 는 결론을 내렸다. 백호는 혹시나 싶어 자신의 추리를 검토해 보 았으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연희 씨나 윌리엄스 신부님도 뭔가를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만약 중국 측에서 그 사실을 알아내면 곤란하니, 어서 가보아야겠다.’
백호는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방문을 막 나서 려는데,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뜩하고 지나갔다.
“가만! 인터폴의 도구르 경위? 도구르, 도구르라……………. 어디선 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방문을 나서면서 백호는 어디서 그 이름을 들어 보았을까 하 고 곰곰이 기억을 더듬다가 마침내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맞아! 바이올렛에게 맨 처음 투시를 부탁했다고 하는 사람이 도구르였어. 그런데 그 사람이 인터폴의 요원이라니! 우연의 일 치일까, 아니면……..
백호는 입술을 깨물면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뭔가 큰 것이 있는데 그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언저리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백호는 좀 더 깊이 숙고하고 추리 해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번 일이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근본적인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희는 지푸라기 더미 속에서 일어나 길게 기지개를 켰다. 언 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눈을 떠 보니 옆에는 준후가 양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싼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좀 잤니, 준후야?”
“네, 괜찮아요. 누나는요?”
준후가 아무래도 밤을 새운 것 같아서 승희는 좀 멋쩍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잘 잤어. 이제 정신이 드는 것 같아.”
“다행이네요.”
승희의 말을 듣고 준후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승희가 잠에서 깨어난 멍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고개를 몇 번 세차게 흔들자 승희의 머리카락에 붙어 있던 지푸라기들이 떨어져 옆으로 흩어 졌다.
“피곤이 풀렸으니 어쩌면 투시가 될지도 몰라. 현암군이 어디있나 알아볼까?”
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승희가 아무리 집중을 해도 아무것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런 젠장! 아직도 안 돼!”
승희는 신경질을 벌컥 내다가 준후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 었다. 준후는 그런 승희의 얼굴을 보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 모두 무사해요. 저는 사람들의 일을 자세히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은 없어서 정확한 상황은 모르지만, 다들 무사한 것은 확실해요.”
“그래? 정말이니?”
준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승희는 석연치 않았다.
“너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투시를 못하지 않니? 그 런데 어떻게 현암군이나 다른 사람들이 무사한지 알지?”
“누나 말대로 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죠. 그래서 어젯 밤에 월향을 투시해 봤어요. 그랬더니 그 주변에 신부님이나 현 암 형, 연희 누나나 윌리엄스 신부님의 기운이 느껴졌지요. 그러 나 최 교수님이나 아라는 잘 모르겠어요. 영적인 기운이 없는 사람들이 라서……………..”
준후의 말을 듣고 승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조 금 더 지나 생각해 보니 이상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원래 준후는 투시를 행하는 능력이 없었다. 다소 무리를 해 가면서 무슨 수를 써서 알아낸 모양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승희는 자신 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울화통이 치밀었다. 무능 력한 자신을 저주하고 싶었으나, 준후의 얼굴을 보고는 목구멍 끝까지 솟아오른 말들을 꿀꺽 삼켰다.
“바이올렛 할머니는 아직 안 왔어요. 승희 누나, 얼굴이 안되 어 보이는데 조금 더 쉬는 것이 어때요?”
준후의 말에 승희는 충분히 쉬었으니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문 득 얼굴을 만져 보았다. 피곤한 탓으로 초췌해 보이는 것도 있겠 지만, 화장이 지워져 평소의 모습보다 더 늙어 보이는 자신의 얼 굴을 준후가 본 것 같아서 가슴이 철렁했다.
“아, 응. 그래 조금 더 쉬어야겠구나.”
승희는 어물거리며 대답하고는 얼른 뒤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눈물이 솟아오를 것 같아 자신의 핸드백을 뒤졌다. 자신이 가지 고왔던 화장품들은 모두 그 안에 들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세 크메트의 눈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 연희와 마지막 교신을 하고서는 분명 핸드백 안에다 잘 넣어 두었다. 그런데 다 른 것은 다 있는데 어째서 그것만 없어졌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런 개 같은……………..”
속으로 마구 욕을 퍼붓던 승희는 핸드백을 철컥 닫고는 냅다 발치에다가 내던져 버렸다.
‘세크메트의 눈만 잃어버리지 않았어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쩌다가 그것을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소매치기를 당 한 것일까? 곰곰이 돌이켜 보았지만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승희 는 정신을 집중하여 다시 투시를 해 보았으나 이번에도 되지 않 자 할 수 없이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넌 사람은 투시하지 못해도 월향에 대해서는 희미하 게나마 투시할 수 있다고 했지?”
“네.”
“그러면 그건 어떠니? 세크메트의 눈은?”
“글쎄요. 그것도 영적인 힘이 들어 있는 물건이니 어쩌면…………….”
“그러면 한번 해 봐. 준후야, 그것만 찾을 수 있다면 현암 군과 도 연락할 수 있을 거야.”
“해 보죠.”
준후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눈을 감았다. 시간이 지나자 준 후는 땀을 흘리면서 눈을 뜨더니 이번에는 부적 몇 장을 꺼내어 사방에 뿌렸다. 부적들은 정확하게 준후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땅에 떨어지자마자 확 하고 타올랐다. 준후는 더욱 정신을 집중하는 듯 이마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더니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어휴! 안 돼요. 그건 아무래도…………….”
“흠, 그럼 야단이네? 어떻게든 연락이 돼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한참 고민해 보았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네요. 월향검은영혼이지만 너무 봉인이 잘돼 있어 투시가 안 되 고・・・・・・ 뭐 그럴듯한 신물이라도 하나 주고 왔다면 가능…………….”
준후는 탄식하듯이 말을 이어 가다가 말을 끊었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요경! 그래, 조요경!”
“조요경? 그게 뭐지?”
“아라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 그것이라면 어쩌면…………….”
후는 가슴이 뛰었다. 일본에서 얻은 목걸이를 아라에게 주 었을 때, 준후는 그 안에 영적인 힘이 있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 만 그 힘을 이끌어 낼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주기 선생은 그 목걸이에 깃들어 있는 힘을 알아내고 목걸이를 통해 아라의 집. 그러니까 최 교수의 상황을 살폈다고 말했고, 그걸 조요경으 로 알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준후는 그 술수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했지만 일단 목걸이는 주기 선생의 술수가 걸린 것이니 그쪽의 상황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잠시만 조용히 해 주세요. 어쩌면 될지도 몰라요.”
“된다고? 어떻게?”
“잠시만요.’
마음이 급하기는 준후도 마찬가지였다. 준후는 서둘러서 부적을 뿌리고는 정신을 한군데로 모았다.
중국 공안청에 도착하자 백호는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를 면회 하기에 앞서서 사태의 전말을 적은 보고서 사본을 요구했다. 자 신도 법정 경험이 있는 만큼, 사건에 대한 전말을 미리 알아 두 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중국 측의 보고서는 백호의 예측대로였다. 백호는 퇴마사들의 초인적인 능력을 익히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어떨 까? 그들이 귀검인 월향검이나 음공(功)인 사자후, 그리고 윌 리엄스 신부가 흡혈귀로 변하는 것 등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보고서는 작성자 자신도 차마 믿지 못하는 상황을 나름대로 합 리적으로 써 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자세히 보면 아무 도 믿어 주지 않을 기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증거 자료가 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백호가 내심 기대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것 이었다.
서류 검토를 마친 백호는 공안청의 깊숙하고 구석진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중국의 관리들 이외에 연희와 윌리엄스 신 부, 그리고 아라와 함께 또 한 명의 키가 큰 사람이 서 있었다.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삼십 대 중반의 남자로 큰 키에 깡마른 몸매,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질문 공세를 펴고 있었고 연희는 모른다 는 답변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연희는 몹시 힘이 드는 듯, 이마 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연희는 백호가 들어서자 일순 반가운 표정을 보였으나, 곧 쌀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실례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나온 특무 검사 백호입니다.” 백호가 말을 꺼내자 그 남자는 취조를 중단하고 허리를 펴며 손을 내밀었다.
“인터폴의 도구르 경위요.”
“예, 반갑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신병을 인수하기 위해 왔 습니다. 혹시 물어보실 말이 있으면 간략하게 끝내 주셨으면 합 니다.”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소.”
상대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백호도 간단하게 상대의 말을 중간 에서 잘라버렸다.
“시간이 없습니다. 본국으로 송환하기 위해 지금 비행기가 대 기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저런! 그렇다면 유감이군요. 비행사에게 기다리라는 전화라 도 걸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 또한 본국에서 부여받은 임무를 수행해야 하니까요.’
“이번 같은 일이 발생했을 경우, 각국은 인터폴에 협조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 것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물론 이번 일의 중대성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은 이번 일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연관이 없다고요? 하하하. 오늘 새벽까지 그들과 같이 있었 고, 방조하여 그들을 도망치도록 도와준 사람이 누구지요? 그들 은 중국의 공안 요원 십여 명을 장난감처럼 짓밟고 탈출했소. 그 리고 그때 이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주는 것을 본 사람은 수없이 많소. 그런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요?”
백호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는 당장 위험에 처해 있는 것도 아 니었고 좀 고생은 하더라도 증인으로서의 심문이나 조사를 받으 면 그뿐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내버려 두고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허허허 그런가요? 좋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들과 친분이 있 었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그 사람들을 도망치도록 도왔다는 겁니까?”
“공안 요원들을 대질시켜 드릴까요?”
“저도 보고서를 읽어 보았습니다. 여기 계신 이 신부님이 갑자 기 괴물로 변신했다면서요? 그래서 바람을 일으켜서 공안 요원들을 쓰러뜨렸다고요?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눈치를 챈 듯, 윌리엄스 신부가 끼어들었다.
“저는 지금 교황청의 명을 받고 특사로 티베트로 가려던 참입니다. 그런 저를 괴물로 몰다니, 좀 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다시 백호가 나섰다.
“저는 또 다른 보고서도 읽어 보았습니다. 윌리엄스 신부님과 같이 있던 박 신부를 구금할 때에도 이 윌리엄스 신부님이 괴물 로 변하여 저항했습니까? 두 사람은 모두 순순히 구금에 응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러나 그 사람은 공안청의 벽을 소리 없이 부수고 탈출했습 니다.”
“박 신부의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분은 윌리엄스 신부님이시니까요.”
도구르는 난처한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공안청에서 작 성한 보고서를 그대로 외부에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백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공안 요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 여자분은 소리를 질렀다고 했고……………. 아! 이 여자 분도 경찰 두어 명을 때려눕혔다고 되어 있던가요? 그런데 이 여자분이 진술한 것을 보면 그들은 전부 사복 차림이었고, 갑자기 이분이 타고 가던 차를 세우기에 호신술을 쓴 것이라고 되어 있 더군요. 이분들에게 먼저 신분증 제시를 했습니까?”
백호의 추궁에 공안 요원은 당황하여 잘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로는 먼저 알렸습니다. 상황이 상당히 급해서……”
“체포나 연행, 아니 임의 동행을 요구할 때에는 신분을 명확하 게 밝히는 것이 기본 아닙니까? 더구나 이분들은 외국인 신분입 니다. 이 땅에서 불쑥 사람들이 떼거리로 나타나 자신의 일행 들을 잡아가려고 한다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납치 행위입니다. 그런데 저항 한 것이 과연 구금해 둘 정도로 잘못일까요? 그것 이외에 이들이 범죄 행위를 한 사실이 있습니까? 살인? 절도? 스파이 행위?”
“그러나………….””
“이현암과 박윤규 신부 두 사람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그건 위에서 논의가 끝난 일로 알고 있으니까요. 그 러나 여기 있는 세 사람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한 사람은 영국인 신부님, 한 사람은 외교관 패스까지 지닌 우리나라의 유 능한 통역요원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아홉 살 밖에 안 된 여자아이입니다. 이 여자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그들 이 도망하는 데 협조했지요? 계속 울어서 공안 요원들의 신경이 라도 흩뜨려 놓았나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이현암과 박윤규 신부, 그 두 사람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나 라에서도 양보할 만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과는 관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인권까지 침해하는 일은 외교 차원에서 그냥 넘 어갈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본국의 입장을 전달하겠습 니다. 즉시 신병을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도구르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도구르나 중국 측의 관리, 또 백호도 이번 일의 내막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만한 위치에 있 지는 못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그 ‘네 명을 추적하여 체포 또 는 사살하라는 것뿐이었으니까. 백호는 보다 강경하게 한참 동 안 이야기하여 결국은 자신의 서명과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보 증 아래 세 사람의 신병을 인도받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구르 의 쏘는 듯한 눈빛이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는 것 같아서 백호는 마음이 켕겼다.
공안청을 나오면서 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윌리엄스 신부도 침통한 표정이었고 아라도 멍하니 말이 없었다. 백호도 그들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억지로 쥐어짜듯이 연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죠? 죄송합니다.”
연희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백호는 머쓱해져서 입을 다물 었다. 열심히 핸들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태산 같았지만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자신이 공안에 들어갔 다 나오는 사이에 차 안에 도청 장치를 해 두었을 수도 있다. 백 미러를 보니 뒤에서 미행하는 차들이 아예 줄을 지어서 따라오 고 있었다. 백호는 쓴웃음을 지은 채 말없이 차를 몰았다. 앞자 리에 앉은 연희는 고개를 반쯤 돌린 채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고, 윌리엄스 신부는 뒷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라는 허공을 바라보다가 간혹 준후가 준 목걸이를 꼭 쥐고 조몰락거렸다. 그 러나 목걸이에서 희미한 빛이 간헐적으로 뿜어 나오는 것은 전 혀 느끼지 못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무한의 허름한 공항의 한 귀퉁이에서는 이 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파키스탄행 화물 항공기의 정비를 서두르던 정비요원 리청은 다른 정비 요원 대여섯 명과 함께 낡 은 항공기를 손보는 중이었다. 또 다른 두세 명의 요원들은 비 행기에 짐을 싣고 있었다. 비행기에 싣는 화물은 흔들림을 방지 하기 위해 알루미늄으로 된 커다란 용기에 싣는 것이 보통이었 고, 지금은 짐의 포장이 거의 끝나서 그 용기들을 비행기의 화물 칸 안에 차곡차곡 싣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물론 그들은 일에 열 중하고 있어 공항의 가장자리에 쳐져 있는 철망의 한구석이 동 그란 모양으로 오려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리청의 귀에 이 상한 소리가 들렸다. 리청은 일을 하다 말고 허리를 펴며 자기가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았다. 동료인 사이홍이 리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그래?”
“자네, 무슨 소리 못 들었나? 여자가 울고 있는 소리…..”
“어? 자네도 들었나?”
둘은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은 승객 이 들어올 수 없는 정비소였고, 이 정비소에는 여성 직원이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 에도 흐느끼는 듯한 여자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장소는 정비소 맨 안쪽의 상자들이 수백 개 쌓여 있는 곳이었 다. 그곳에는 고양이도 드나들기 힘들 정도의 아주 작은 창문이 하나 나 있는 것 외에 다른 문은 없었다.
리청은 의문에 찬 표정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또다시 그쪽 에서 흐느낌과 숨죽인 외침 같은 것이 뒤섞인 기괴한 소리가 울 려왔다.
“들어 봐. 저거 여자목소리가 맞지?”
“음, 그래. 그런데 여기에 여자는 없잖아. 우리가 있는 곳을 지 나가지 않고는 드나들 곳도 없는데……….”
이제는 리청과 사이홍만이 아니라 다른 정비원들도 하던 작업 을 중지하고 그 나무 궤짝 더미 쪽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아까 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리청이 옆을 보니 사이홍은 다리를 벌벌 떨고 있었다.
“이런 대낮에 귀, 귀신이 아닐까?”
“귀신이라니! 말도 안 돼!”
“그렇지만 저게 뭐야? 누가 저런 소리를 내는 거지?”
정비요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웅성거리며 한곳으 로 모여들었다. 그때 갑자기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궤짝 더 미 뒤쪽에서 났다. 리청은 그 소리가 분명 여자가 지르는 비명이 라고 단정했다.
“누가 있나 봐! 가보자!”
리청이 앞장서자 다른 정비 요원들도 리청의 뒤를 따라 정비 소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정비소의 구석에서 여자의 울 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에 호기심이 가기도 했지만, 아무리 벌 건 대낮이라도 그런 소리를 듣고는 태연히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비 요원들이 나무 궤짝 더미 뒤로 돌아 가서 살피는 사이에 반대편에서는 검은 그림자 셋이 정비중인 비행기의 화물칸에 몰래 숨어 들어갔다.
정비요원들이 웅성거리며 여기저기를 살피는 동안 나무 궤짝 더미의 뒤쪽에서 조그마한 은빛의 물체 하나가 휙 하고 비행기 의 화물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제 괜찮을까?”
간신히 좁은 컨테이너 속으로 기어 들어간 박 신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역시 급히 들어가느라 반쯤 몸이 끼어 버린 현암 이 소곤거리듯 말했다.
염려 마세요. 불편하시더라도 비행기가 이륙만 하면 나갈 수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세요.”
정비중인 비행기를 훔쳐 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 에 현암이 한 가지 꾀를 냈다. 월향검을 작은 창문을 통해 으슥 한 정비소 구석으로 보내 놓고 울게 하여 정비원들을 유인한다 음, 그때를 기다려 비행기에 올라탄 것이다. 물론 파키스탄행 항 공편을 알아내기 위하여 공항 안으로 들어간 최 교수가 비행기 의 번호를 익히는 동안, 공항 주변의 철망은 월향검이 도려냈다. 다행히 공항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비행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
정비 요원들은 아무리 나무 궤짝 뒤를 뒤져 보아도 아무런 사 람의 자취도 찾을 수 없자 이것이 정말 귀신의 소행이 아닌가 하고 웅성거리다가 작업반장의 호통에 다들 와르르 밖으로 몰려나 왔다.
리청과 사이홍은 그 소리가 사람이 내는 소리네, 떠도는 귀신 이 울부짖는 소리네 하면서 입씨름을 벌이는 중이었다. 컨테이 너 안에서는 현암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일이 꼭 뜻대 로만 된 것은 아니었다. 방금 나타난 작업반장은 이 비행기가 예정된 이륙 시간이 변경되어 여섯 시간이나 늦게 떠나도록 되었 으니 서두를 필요 없다고 정비원들에게 말하고 있었고, 겁이 나 서 숨죽여 헐떡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최 교수는 작업 반장이 외치는 소리를 희미하게 알아듣고는 이 말을 과연 현암 과 박 신부에게 지금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 하고 고민했다.
아까 한차례의 난투극이 벌어졌던 호텔로 돌아올 때까지도 연 희는 내내 입을 열지 않았고, 선잠에서 깨어난 아라도 윌리엄스 신부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호텔 방에 돌아와 보니 중국 공안청의 관리들이 내부를 한바탕 뒤집어 놓았지만 물건들을 압 수하지는 않았던 듯, 모든 물건들이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백호는 연희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쓸데없이 헛기침을 몇 번 하면서 이곳저곳을 배회 했다. 그러나 그런 어색한 순간에도 백호는 중국 공안청과 도구 르가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았을 것이 분명한 도청 장치를 찾아 보고 있었다. 서너 군데에 꺼림칙한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면밀하게 관찰한 결과로는 TV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점검을 마친 백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연희는 얼굴을 양손으 로 감싼 채 소파에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었고, 아라는 그 옆에 바싹 붙어서 슬픈 눈으로 연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고……………. 백호는 그 런 답답한 분위기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연 희에게 자신이 정말로 품고 있는 생각을 밝혀 오해를 풀고 싶었 을 뿐 아니라 자신을 곱지 않은 눈매로 바라보는 것도 피하고 싶 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물 론 연희나 윌리엄스 신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공공 비밀 에 속하는 일은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자신의 입 밖으로 나가 는 순간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그것이 백호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신조였다. 설령 지금 자신의 행동이 반역이나 이적 행위 라는 누명을 뒤집어쓰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은 퇴마사 일행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 도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차가운 시선을 받 더라도 할 수 없었다. 도청 장치가 되어 있는 이곳에서는 특히 그랬다.
백호가 연희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연희 씨, 짐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비행기를 대기시켜 두었습 니다.”
연희가 고개를 들어 눈물 젖은 눈으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슬퍼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담담해 보이기도 했다. 백호는 연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이유 없이 눈앞이 핑 도는 듯한 어지 러운 느낌을 받고는 서둘러 연희에게서 눈을 돌렸다.
“여, 연희 씨. 일단은 한국으로 돌아가십시다. 아라도 있고 하니…… “
“왜 가라고 하는 거죠? 저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요.”
“무슨 할 일이?”
“신부님이 제게 당부하신 일이 있습니다. 저는 윌리엄스 신부님과 함께 티베트로 가야 해요.”
백호가 황급히 연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일은 조금 뒤로 미뤄 둡시다.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요.”
연희를 설득하던 백호는 또 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듯한 어지러움 비슷한 느낌에 휩싸였다. 이 상한 일이었다. 백호는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그것마 저 안 되었다. 그러면서 자꾸만 말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 로 어떻게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이유를 알 수도 없었고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드는 그런 기분이었다. 오로지 백호의 시 야에는 연희의 커다랗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듯한, 깊고 깊어서 끝을 알 수 없는 연못처럼 넘실거리는 듯한, 그런 눈동자만이 가 득하게 다가올 뿐이었다. 단지 직업적인 단련을 통해 체득된 본 능 때문에, 백호는 입을 여는 대신 펜을 꺼내 작은 테이블 위에 어질러져 있던 신문지에다가 무언가를 급하게 쓰기 시작했다.
연희가 백호의 눈을 쳐다보는 동안 백호도 연희의 눈에서 시 선을 떼지 않고 신문지 위에 글자를 휘갈겨 썼다. 윌리엄스 신부 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연희 의 전신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눈을 돌린 윌리엄스 신부는 아라의 시선을 따라가게 되었고 곧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라는 신기한 듯이 반쯤 입을 벌리고 연희의 오른손을 바라 보고 있었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중에 꼭 쥐고 있던 연희의 오른손에서는 불이 켜진 작은 전구를 쥐고 있는 듯, 금색의 환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그것을 보고는 고개 를 끄덕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을 돌려 백호가 신문 지에 써 놓은 글자를 읽었다.
‘기회를 보아 신부님 일행을 구할 생각입니다.’
조금 있다가 백호가 움찔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눈 부근이 몹 시 이상한 듯, 몇 번이고 눈 가장자리를 문질렀고 연희도 어지러 움을 느끼는 듯 눈을 꼭 감고는 비틀거렸다. 백호가 고개를 흔들 면서 정신을 차리는 동안, 윌리엄스 신부가 신문지를 집어 들고 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접었다. 정신을 차린 백호가 믿어지지 않 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뭔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윌리엄스 신부 가 손가락을 세워 급하게 입술에 갖다 댔다. 잠시 후 연희도 정신이 드는 듯했다.
“내, 내가 어떻게 된 거죠?”
연희는 말을 더듬거리면서 오른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예전 에 준후가 그려 넣어 주었던 부적의 문양에서 막 금색의 빛이 사 그라져 가는 중이었다. 그것을 보고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렸다.
“마인드 컨트롤….. 유사하군요. 연희 양의 눈, 거기에 준후 군의 힘이 ……………..”
윌리엄스 신부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접었던 신문지를 펼쳐서 연희에게 보여 주었다. 연희는 그 신문지에 씌어 있는 내용을 보 고 생각에 잠기더니 백호에게 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자 백호 는 손을 들어 말하려는 연희를 제지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그게 좋을 겁니다!”
말을 하면서도 백호의 손은 펜을 잡고 신문지 위를 달리고 있 었다. 연희도 백호의 의도를 눈치챘다. 신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씌어 있었다.
‘방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연희 씨도 영능력자입니까?’’
연희는 다소 화가 난 표정으로 재빨리 백호에게서 펜을 빼앗 아들고는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꼭 가야만 하나요? 비행기 편은 어떻게 되지요?”
그러면서도 신문지에다가는 다른 내용의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면 나도 희생시킬 생각인가요? 그것이 정부의 입장’
“항공편은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특별기가 대기해 있으니까요.”
능숙하게 받아넘기면서 백호가 재빨리 말을 줄여서 썼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좌우간 이미 말해 버렸으니 밝히겠음. 신부님 일행을 구하고자 함..’
연희가 펜을 받아 써 내려갔다.
‘어떻게? 일행이 발견되면 넘겨줄 생각인가요?’
‘절대 아님. 책임을 지겠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문장 끝에 백호는 느낌표를 꽉 찍었다. 이번에는 백호가 연희 를 쳐다보았다. 백호의 눈은 결의에 차 있었고 매우 맑아 보였다.
‘정부에서 신부님 일행을 넘기기로 했다는 말은?’
‘정부의 입장이고 내 입장은 아님.’
‘명령에 불복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이미 불복했음. 옳지 않은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됨. 군법에도 그런 조항이 있음.’
연희는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좀 천천히 몇 글자를 썼다.
‘그러면 백호 씨를 믿을게요. 하지만 나도 더 이상 아는 것은 없어요.’
백호는 원래 연희에게도 자신의 거취를 밝힐 의향이 있던데다
이왕 무엇에 홀려서인지 모르지만 말을 꺼낸 이상 더 숨기고 싶 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당분간 이곳 요원 및 인터폴의 도구르와 함께 행동할 것임. 그러다가 만에 하나 신부님들이 잡히면 탈출시킬 계획임..
‘그러면 저도 같이 가요.’
‘그럴 수는 없음. 사정이……………..’
연희는 한참 고심하는 것 같았다. 그사이 백호가 몇 줄을 썼다.
‘그런데 아까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연희가 글씨를 보고 나서 고개를 들자 백호가 악의 없이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희는 의식적으로 무슨 행동을 한 것이 아니 었다. 다만 그때의 심정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한없이 원망스럽 던 차에 백호가 나타나자 이유 없이 미웠던 것이다. 그에게 진의 를 묻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그러다가 비몽사 몽 백호의 얼굴을 쳐다본 것뿐이었다.
연희는 준후의 부적이 무슨 조화를 부렸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부님은 저희에게 티베트에 가 줄 것을 당부했어요.’
백호도 연희의 오해가 풀린 것 같자 여유를 가지고 필담을 진행시키려는 듯, 말이 축약형에서 평이한 문체로 돌아왔다.
‘그래요? 무엇을 알아냈나요?’
‘모르겠어요. 다만 중요한 결단을 내린 것 같았어요. 최 교수님이 남긴 쪽지를 보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것을 짚어낸 것 같더군요. 안 그러고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 최 교수를 데리고 움직일 리가 없었을 텐데요. 그런데 티베트는 왜?’
‘에메랄드 태블릿.’
‘에메랄드 태블릿 녹색의 비석 말인가요?’
‘네. 그러나 지금 도저히 거기에 갈 기분이 아니에요. 백호 씨,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신부님과 현암 씨를 꼭 구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일 공안청에서 그들을 먼저 발견하면 어떻게 탈출시킬 거죠?’
‘비행기가 있습니다.’
‘비행기까지는 어떻게 가고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들과 연락이 되십니까?’
‘영국에 있는 윌리엄스 신부님의 사제관을 통해 연락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렇군요. 시간은요?
‘그건 정한 바 없어요.’
백호는 뭔가 생각해 보더니 신문지에 몇 자를 적었다.
‘윌리엄스 신부님의 사제관도 안전한 곳은 못 될 겁니다. 영국이라고 가만히 있으라는 법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한 번 이상 그쪽과 교신을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사실을 그쪽에 전달해야 합니다. 누구 영국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을까 요? 단, 박 신부님이나 현암 씨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백호는 연희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하자 빠른 속도로 적어 나갔다.
‘인터폴이 개입되었다면 윌리엄스 신부님도 주목받고 있을 것 이 확실함. 발신지 추적을 할 것임. 그러나 현암 씨나 박 신부님 은 정식 요원은 아니기 때문에 목소리 기록까지는 하지 않았음 은 물론, 자료 제출도 불가할 것으로 보임. 따라서 영국 측은 그 들의 목소리까지는 파악하지 못할 것이나, 국제 전화가 걸린 경 우에는 전부 조회를 해 볼 것임. 그러므로 한 번 소식을 전했을 때에 반드시 연락처를 옮겨야 함. 그 이상일 때는 다른 사람에게 연락받은 것처럼 목소리를 변조해야 함. 그래야 발신지 추적을 막을 수 있음.’
그러자 지금까지 둘의 필담을 지켜보고 있던 윌리엄스 신부가 펜을 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한 사람의 이름을 신문지 위 에 적었다.
‘Mr. Walter Bowl (월터 보울)’
월터 보울이라면 영국의 심령학회 회원으로 지난번에 박 신부, 현암, 윌리엄스 신부 등과 함께 영국에서 있었던 유령 소동 에 뛰어들었던 사람이었다. 그 이름을 보고 연희는 고개를 끄덕 였으나 백호는 윌리엄스 신부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있습니까?’
윌리엄스 신부가 시적인 문장으로 답했다.
‘그는 권력보다 영혼의 결백을 더 믿는 사람이며, 법보다 우정 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때서야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희와 일종의 작전 계획 (?)을 짜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아라는 먼발치에서 아빠 생각으 로 눈물만 훌쩍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뒤로 넘어가서 빛을 조금씩 뿜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아직도 안 되니?”
승희가 답답한 듯 묻자 준후는 한숨을 내쉬면서 지친 목소리 로 중얼거렸다.
“뭔가 잡히기는 하는데…………. 아라가 목걸이에 관심을 별로 안 기울이고 있나 봐요. 관심을 기울여서 주의 깊게만 본다면 내 뜻을 전달할 수도 있을 텐데…….”
준후가 아쉬워하고 있는 참에 오두막의 문이 열리면서 바이올렛이 들어섰다.
“간밤에 잘들 주무셨나요? 불편했지요? 제가 좋은 소식을 갖고 왔어요. 내일모레 바바지 님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예의 소란스러운 바이올렛의 수다에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눈 살을 찌푸리다가 바바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눈을 크게 떴다.
“바바지 님을요? 어디에 계시는지 찾아냈나요?”
“내일모레가 일 년에 두 번, 바바지 님이 수도자들에게 가르침 을 주러 내려오시는 날이래요. 그때 그곳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랍니다. 호호호.”
“그곳이 어디죠?”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아쉬람이라는 곳이지요. 안식처라는 뜻이에요. 작은 오두막 또는 수도자가 기거하는 청빈한 거처를 그렇게 불러요. 사원이라고도 하지만 원래는………….”
“내 말은 바바지 님이 내려오신다는 장소가 어디냐고요?”
승희가 신경질적으로 질문을 하자 바이올렛은 약간 기가 꺾인 듯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히말라야 기슭이지요. 내일 출발하기로 해요. 그럼…”
바이올렛은 안고 온 종이봉투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뭐 가 저렇게 바쁜지…………. 준후가 바이올렛이 갖고 온 봉투 안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 들려는데 승희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준후야, 잠깐!”
“어? 왜요? 나 배고픈데……………….”
승희는 준후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없이 봉지를 열어서 음료 수병 하나를 들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포장해서 가져 온 빵의 포장을 뜯고 냄새를 맡아 보고는 목에 걸고 있던 은 십 자가목걸이를 빵 안에 밀어 넣었다. 준후는 그런 승희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승희는 한참 만에 은 십자가를 꺼내어 유심히 살펴본 다음 그제야 준후에게 빵을 내밀었다.
“왜 그래요. 누나? 이상한 느낌이 드나요?”
“저 할망구, 믿을 수 없어. 준후야, 조심해야 해.”
“무슨 말이에요?”
“저 할망구는 우리에게 뭔가를 바라고 있어. 준후야, 방심하면 안돼.”
“무슨 말이에요? 바이올렛 할머니가 우릴 이렇게 헌신적으로 도와주고 있는데………….”
“아냐! 저 할망구는 분명 뭔가를 원하고 있어. 난 느낄 수 있다구. 투시력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어. 뻔해. 수다르나, 그것 때문이야.”
“무슨 말이지요?”
“우리가 이 지경이 된 와중에도 저 할망구는 우리에게 은근슬 쩍 수다르사나 이야기를 꺼냈어.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 서 우리를 피신시켜 주었으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순서일 거야. 그런데 저 할망구는 우린 여기 처박아 두고 밖으로 나다니면서 시타 교수를 만나 수다르사나 어쩌고 하 는 것만 찾아다녔고, 그걸 우리에게 알려 주었어. 뭔가가 이상 해. 그렇지 않니?”
“음!”
준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승희는 강조하듯 말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더 이상해. 저 할망구는 수다르사나인가를 얻으려 하고 있어.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것인지 는 잘 모르겠단 말야.”
“그건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그러나 나는 누나하고 바이 올렛 할머니가 이야기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혹시 누나가 먼저 가겠다고 한 것 아니었나요?”
승희는 준후가 자기 속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말하자 그것을 감추려는 듯 역정을 벌컥 냈다.
“그게 더 속상해! 속이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술책이었어. 그 런데도 나는 넘어갈 수밖에 없었단 말야!”
“왜요? 안 넘어가면 그만이잖아요. 지금이라도 도로 한국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고 한다면………….”
“넌 몰라! 좌우간 가야만 해! 속임수라도 좋고 뭐라도 상관없어! 가야 한단 말야!”
승희가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 이상 준후가 그 수다르사나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힘이 깃들어 있다는 내용도, 또 승희 자 신이 월향 때문에 수다르사나를 억지로라도 얻으려 한다는 것도 알리 없었다. 승희는 차마 준후에게 그 이야기만은 말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한테도 터놓고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던 사실 아닌 가?
“왜요? 그게 그토록 중요한 건가요?”
“중요해. 아직까지 확실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번 일 모두와 큰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승희는 억지로 말을 지어내려니 힘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말 도 더듬거리게 되었고, 그런 것을 본 준후는 쓴웃음을 짓고 더 묻지 않았다. 짐작가는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신과 가까운 사 람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을 억지로 캐묻기가 싫었던 것이다. 승희는 속으로 서글픈 생각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뭔가가 있는 듯한 바이올렛의 속임수에 넘 어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거기다가 자신만이 아니고 준후 까지 끌어들이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준후야.”
“네?”
“너 나랑 같이 갈 거니?”
“그래야죠.”
“내가 공연히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데?”
“누나가 하는 일인데…………. 누나가 옳다고 믿는 바대로 하세요.”
“으응, 그래. 고마워.”
“에이, 뭘요.”
“준후야.”
“네?”
“가능한 한 내 옆에서 멀리 가지 마라. 그리고 바이올렛에게 내색도 절대 하지 말고……………. 항상 주의하고 있어야 한다.”
“네.”
승희는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모아 보았으나 여전 히 먹장을 친 것같이 투시는 전혀 되지 않았고, 다급할 때면 들 려오던 애염명왕의 목소리마저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래서야 바 바지를 만나더라도 사기꾼 취급을 당하는 것이 아닌지…………… 승 희는 답답한 기분에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만 쾅쾅 주먹으로 두들겨 댔다.
연희, 윌리엄스 신부와 밀담을 나누다가 갑자기 도구르의 호 출을 받고 달려온 백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명목상 으로는 자신의 수색 작업에 협조해 달라는 것이었지만, 막상 달 려가 보니 도구르는 백호를 본 체도 않고 자신의 일에만 몰두하 고 있었다. 프랑스의 현역 경찰이자 인터폴의 임무를 띠고 파견 되어 온 도구르는 과연 일 처리에 능숙했다.
북경 근교에서 연희 일행을 발견한 다음 중국 공안청의 요원 들을 윽박질러 대규모 인력을 동원시키고 그 일대를 샅샅이 뒤 지던 그는 특히 공항 주변에 철저히 경계를 취하도록 일렀다. 그 러나 일반적으로 행해져야 할 공항의 검문이나 신분 확인 등의 업무에는 인원을 파견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특수한 사람들이고, 무엇보다도 바보는 아니란 말이다! 절대 상식적인 방법으로 공항에 들어가 지는 않는다.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위조해서 탈출하지는 않을 거다. 도리어 강공법을 쓸 확률이 높다.”
도구르는 공항의 경비를 늘리자는 의견을 일축하고, 뜻밖에도 북경으로부터 차로 스물네 시간 이내의 위치한 공항들의 외곽 경 비에 대량의 인력을 투입했다. 도구르의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무한의 공항 부근에서 먼저 현암에게 탈취당한 차가 발견되 고, 공항의 외곽 철망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는 말을 들은 도구 르는 일각의 지체도 없이 그쪽으로 대규모의 동원을 지시했고, 도구르에게 한풀죽은 중국의 공안청 요원들은 불만스러운 얼굴 이었지만 그의 말대로 많은 인원을 그쪽으로 파견하는 한편, 모 든 항공기의 이륙을 막았다. 그다음 도구르는 보란 듯이 백호에 게 동행을 요구했고, 백호는 할 수 없이 도구르와 같이 헬기를 타고 무한 공항까지 가기에 이르렀다.
백호는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매우 긴장하 고 있었다. 자신이 애써 만든 연락망이 어쩌면 필요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 또 자신이 퇴마사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궁리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반대로 도구르는 여 유만만했다.
“아까 풀어 드렸던 그분들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한참 침묵을 지키던 도구르가 백호에게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오! 저런・・・・・・ 그것만이 아닌 것 같던데요?”
“무슨 말씀이지요?”
“종일 앞뒤가 맞지 않는 대화만 하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뭔가 쓰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어요. 필담으로 아주 중요한 이야기 를 하신 모양이지요?”
백호는 뜨끔했지만 내색 않고 소리를 쳤다.
“도청 장치를 했단 말입니까?”
“화낼 것 없어요. 중국 공안청에서 설치한 것이니까요. 거긴 외교관이나 대사관이 아닌, 일개 호텔 아닙니까? 자기 나라 호텔 에 자기 나라 정부에서 도청 장치를 설치한 것에 대해서야 제가 드릴 말씀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백호가 뭐라고 응수를 하기도 전에 도구르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아니, 안다기보다는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백호 씨가 육성한 분들.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 애착이 가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심정 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가능하다면 그들을 달아나게 해 주고 싶겠지요? 그래서 한국으로 모이게 해서…………. 허허허.”
도구르의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시지요. 그런 짓은 안 될 겁니다. 절대! 그 들은 도망칠 수 없어요. 알겠소? 그리고 당신도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이고!”
도구르의 말을 듣고 화가 뻗친 백호가 몸을 움직이려 하자 뒤 에서 뻗어 온 몇 개의 단단한 손이 백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들은 백호의 총과 아까 호텔에서 들고 나온 기다란 천에 싼 물 건을 헬기의 뒷좌석으로 옮겼다. 그 안에는 지난번 현암이 챙기 지 못하고 놓고 간 청홍검을 감춘 목도가 들어 있었다. 뒷좌석의 요원들이 그 목도를 도구르에게 전해 주었고 도구르는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 들었다.
“오호! 이런……………. 나는 기관총이나 대전차 로켓이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백호 씨는 검도를 할 줄 아시오? 취미 활동을 위해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닐 테고……..”
도구르는 의외라는 듯 목도를 집어 들더니 여기저기를 살폈다.
“나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거운데, 여기 뭘 감추셨나?”
그러나 도구르는 목도 안에 감추어 둔 청홍검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것은 준후가 부적의 힘으로 붙여 놓은 것이라, 아예 부수거나 불에 태우거나 부적을 붙인 부분에 손가락으로 특정한 문장을 그리기 전에는 뽑히지 않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구르 는 목도를 부숴 보려 했으나, 좁은 헬기 안이라 그냥 발치에 던 져두고는 백호에게 또 말을 걸었다.
“당신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소. 말하지 않았소, 나는 당 신을 동정한다고? 섣부른 짓은 하지 마시란 거요. 당신은 당신 입으로 그들을 잡는 데 협조하겠다고 했으니, 내가 그들을 잡는 것을 잘 보아두면 되는 거요. 그리고 그들의 시신을 확인해 주 면 그걸로 당신의 임무는 끝이오. 그래서 동행하도록 한 것이니 그리 아시오.”
백호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도구르는 백호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치밀하고 음흉한 자였다. 도청 장치로 펜으로 쓰 는 소리를 잡아낼 정도로 지독하고 정교한 일면이 있는가 하면, 그것 하나로 자신의 속셈을 속에 들어가 본 것처럼 짚어 낼 정도 로 음흉했고, 무한 부근의 공항 철조망에 구멍이 났다는 말만으 로 전 병력을 그리로 돌릴 정도로 과감한 행동력도 갖추고 있는 무시하지 못할 자였다.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를 빼내는 일 라운드에서 이긴 것으로 방심했던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백호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일단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헬기는 무한 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좁고 답답한 비행기의 화물 상자 안에서 여섯 시 간이나 버틴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 직 이륙 시각까지는 많이 남아 있었다. 현암과 박 신부, 그리고 최 교수가 숨어 들어간 화물 상자는 비행기 안에 실렸지만 화물 칸의 문은 닫히지 않은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더 군다나 화물 상자는 통풍도 되지 않았고, 좁디좁은 공간에 세 명 이나 몸을 접듯이 끼어들어 간 다음에는 거의 찜통 같아서 숨 쉬 는 것마저도 답답했다. 특히 최 교수의 숨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질식해 버리는 건 아닐까요? 헉헉…………….”
숨죽인 말소리로 최 교수가 중얼거리자 현암이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바람구멍은 있는 것 같아요.”
“이거 너무 더 덥고…………”
“조금만 더 참으세요.”
더 이상 밖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 같자 박 신부도 한마디 거들었다.
“여기보다는 인도나 파키스탄의 날씨가 더 덥겠죠? 아마 그곳의 바깥 기온은 여기 이 화물 상자 정도 될 겁니다. 승희나 준후는 더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좀 참읍시다.”
승희와 준후 이야기가 나오자 현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준후하고 승희에게 별일은 없을까요? 지금 유적을 찾으러 가 는 것보다는 승희와 준후에게 합류하러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군요.”
현암이 말하자 박 신부도 씁쓸하게 말했다.
“글쎄. 하지만 준후하고 승희는 현재 아무 일 없이 잘 있네. 바 이올렛이 잘 피신시킨 모양일세. 나도 승희만은 못하지만 그 정 도 알아낼 재주는 있다네. 그리고 여기에 마스터의 흉계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많으니, 유적에 관한 것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급 하지 않겠는가?”
최 교수도 답답해서 견디기가 어려운지 농담 섞인 어조로 한마디 했다.
“파키스탄으로 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네요. 이 몸이 새라면 훨훨 날아갈 텐데……. 허허허.”
그 말에 현암은 채 말도 꺼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전부터 생각은 해 오고 있었지만 워낙 정신없 는 일이 많아서 한 번도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던 것들이 최 교 수와 박 신부의 말로 인해 봇물이 쏟아지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마스터의 흉계가 있을 것이니 이걸 먼저 알아내어 ……………..’
‘이 몸이 새라면 훨훨 날아갈 텐데……’
‘준후하고 승희는 현재 아무 일 없이 잘 있네. 바이올렛이 잘 피신시킨 모양일세..’
이것들 외에 앙그라의 몸에 쐰 마스터와 화중명 노인의 약재 상에서 대결했던 일, 그리고 황달지 교수의 방에서 기습을 당했 던 일들까지 폭발하듯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뒤죽박죽으로 두서없이 얽혔던 일들이 하나로 합쳐져 정리되기 시작했다.
이번 일에는 이상하게 꺼림칙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을 꿰뚫어 줄 만한 단서를 현암은 잡지 못했다. 아니,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어느 사이엔가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언제 그런 생각을 했더라? 지금 현암의 머릿속에 떠오르 는 생각이 맞다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된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 한 가지뿐이라면…..
“큰일이다!”
별안간 현암이 소리를 지르자 박 신부와 최 교수가 몸을 움찔 했다. 아무리 바깥에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소 리를 지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박 신부와 최 교수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나, 현암 군?”
현암은 박 신부의 말에 응답할 겨를이 없었다. 현암의 머릿속에서 방금에서야 정리가 된 결과라는 것은…………
“승희, 승희와 준후가 위험해요!”
“응? 글쎄, 승희와 준후가 위험에 처했을 거라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하지만 별일 없이 어딘가에 잘 숨어서….”
“아니오! 경찰이나 정보기관 때문에 위험한 게 아닙니다. 바 이올렛! 바이올렛이야말로 위험한 존재예요!”
“뭐라구?”
덩달아 박 신부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경황이 없어서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 소 알았습니다! 이제야 확신할 수 있게 되었어요.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바로 마스터입니다!”
너무도 의외인 현암의 말에 박 신부조차도 경악을 금치 못해 얼굴빛이 변해 버렸다. 현암은 황급히 세크메트의 눈을 꺼내 들 고는 승희와 통신을 취하려고 수선을 떨었다. 그러나 연락이 되 지 않았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현암의 이마에도 구슬땀이 맺혀 갔다. 박 신부는 어둠 속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현암에게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마스터는 신동들 의 우두머리인 앙그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현암은 세크메트의 눈을 손에 쥐고 여러 차례 흔들다가 소리치듯 말했다.
“물론 그랬죠. 그러나 마스터는 영혼입니다. 공간의 제약 같은 것은 마스터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한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있다면 또 다른 사람의 몸에도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사람?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제가 의심을 하기 시작한 것은 황 교수 아파트에서 본 빈 통 조림 깡통, 그 개수 때문이었습니다. 앙그라가 황 교수를 잡고 있던 시간은 약 사흘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깡통은 겨우 여섯 개 밖에 되지 않았어요. 아무리 앙그라가 작은 아이라지만 통조 림 두 개로 하루를 지내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식욕이 없을 수도 있고, 다른 것을 먹었을 수도 있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금방 그런 의심은 지워 버렸 죠. 대신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즉 사흘 동안 계속 있었 던 것이 아니라 어디로 나갔다가 돌아온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 지요. 그러던 중 앙그라와 싸우게 되어서 잠시 그 추측은 까맣게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우연히 만난 화 노인에게 시술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내가 영혼이었다면 훨훨 날아 금방 호텔까지 갈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했죠. 바로 그 순간, 마스터는 영혼이니 그 시간 동안 어딘가를 훨훨 날아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다면 그때 비행기 안에서 바이올렛이 기절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앙그라와 싸우고 있을 무렵, 바이올렛은 준후와 승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있었어요. 그런데 승희의 말 로는 그때 바이올렛은 이유 없이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았다지 요?”
“그랬네. 그, 그렇지만……………”
“아, 물론 그땐 저도 몰랐습니다. 믿을 수도 없었고요. 그러나 저는 처음부터 한 가지 껄끄럽게 생각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마 스터가 투시력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 말입니다. 마스터가 승 희처럼 투시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일들을 잘 알고 있을 것 이고, 따라서 우리가 가는 앞길에 함정을 깔아 놓을 것이 분명했 기 때문에 관심을 가졌지요. 그런데 황 교수의 방에서 앙그라에 게 기습을 당했을 때 처음으로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생기게 되었 고 그때부터 의심을 하게 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저는 처음 황 교수의 방에서 의외의 기습을 당하고 나서 마 스터가 미리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구나 했지요. 조금 더 신경 써서 경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구요. 그런데 당시 마스터는 아 라가 우리와 같이 온 것을 몰랐어요. 그건 틀림없습니다. 아라가 바퀴벌레떼와 함께 뛰어 들어오자 당황해서 우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했던 거구요. 그것만 놓고 본다면 마스터는 투시력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마스터는 우리가 신동들을 물리치고 중국으로 황 교수를 찾아오리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지 요. 그 신동들은 죽거나 다친 상태였고, 만약 그들 중 도망친 아 이들이 패배했다는 결과를 마스터에게 보고했다고 해도 시간적 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군! 황 교수는 사흘 전부터 자리에 누워 있었다고 했지? 그것은 앙그라가 황 교수를 마약에 중독시켜서 눕혀 놓은 것일 테니 그 점은 알겠네. 그러나 바이올렛이 어떻게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투시력 건을 생각해 보세요. 마스터가 아라를 투시하지 못한 것은 투시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정황을 소 상하게 알고 있었어요. 신동들의 보고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말 이지요. 기억나세요? 레그나가 신동들과 대화를 할 때에, 앙그라 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했지요? 그 애들은 앙그라 가 황 교수를 무사히 처치했는지의 여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 렇다면 투시력이 없는 마스터가 어떻게 우리의 근황과 일정 등 을 소상하게 알 수 있었을까요? 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우리의 옆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겁니다. 그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앙그라는 황 교수를 사흘 전부터 붙잡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올 시각에 맞춰 황 교수의 몸 밑에 숨어 들어가 있었지요. 우리가 도착할 시간을 대강이나마 알지 못했으면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또 제가 겨루어 본 바에 의하면 마스터의 영능력은 예전에 비하면 보잘것없었어요. 만약 저와 연희 씨만 가지 않고 모두 갔다면 아무리 함정을 파 놓았어도 실 패했을 겁니다. 마스터가 그냥 모험을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마스터는 별다른 예감 능력이 없는 저와 연희 씨만 황 교수에게 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고, 그건 신동들도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스터에게는 투시력이 없으니, 내부의 누군가가 알려준 것이겠지요. 그럴 사람은 바이올렛뿐입니다.”
“마스터가 투시력이 있는데 아라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 은 아닐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투시력이 있다면 황 교수의 몸 밑에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투시를 했겠지요. 아라가 문밖까지 같이 따라왔던 사실을 모르 지도 않았을거구요.”
“흠! 그러나 바이올렛은 성난큰곰과 같이 오지 않았는가? 그 리고 바이올렛에게서 이상한 낌새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발견 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물론 지금에 와서야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신부님은 바 이올렛을 의심하고서 투시해 보거나 영사를 행해 보신 적이 있 습니까?”
“없네.”
“그렇다면 승희나 준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바이올렛은 성난큰곰과 같이 왔지요. 그것도 싸움이 한창 고비로 접어드는 중에 왔고요. 그러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의 심하려는 마음조차 들지 않은 것이지요. 정말 음흉하기가 이를 데 없는 술수입니다. 더군다나 바이올렛은 특이한 목소리로 마 치 연기하는 성우처럼 소리를 내곤 했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그 렇게 보았으니 으레 그런 줄 알고 있었지요. 지금 돌이켜 보면 바이올렛이 짙은 화장을 한 것도 얼굴에 나타날 수 있는 기운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해가 가질 않아.”
“저도 믿어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는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생각해 보세요. 앙그라는 우 리가 중국에서 황 교수를 찾을 줄 알고 황 교수를 죽이지 않고 마약에 중독시킨 채 침대에 묶어 놓았어요. 그건 바이올렛을 믿 게 만들기 위한 마스터의 술수였습니다. 바이올렛은 사흘 전부 터 투시해 본 결과 황 교수가 살아 있다고 말했지요. 마스터는 우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당연 히 승희도 투시해 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승 희는 정황보다는 단순히 심리 상태만을 읽어 낼 뿐입니다. 마약 에 취해 잠든 황 교수의 마음속은 승희에게는 악몽으로밖에 보 이지 않았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바이올렛의 수정구 응시가 정말인 것으로 믿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바이올렛이 최 교수를 구하 려고 했다는 것이나, 정체불명의 조직이 있어서 그 조직에서 여 러 사람을 노린다는 것들을 모두 믿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바이 올렛은 성난큰곰과 같이 왔지요. 성난큰곰은 믿을 만한 사람이 었으니까 우리는 더더욱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성난큰곰과 바이올렛이 만난 것은 불과 하루 전이었습니 다. 바이올렛이 한국에 블랙서클의 후예인 신동들이 나타났다고 성난큰곰에게 말하면서 우리가 위험하다고 했을 테니 성난큰곰 은 당연히 달려왔겠지요.”
“그래? 그런데…..”
“기억나십니까? 바이올렛이 했던 말을요? 성난큰곰과 자기는 아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했지요. 바이올렛은 성난큰곰을 불과 하루 전에 만났을 뿐이었어요. 또 있습니다. 바이올렛이 정말 수 정구 응시를 하여 사람을 찾아내는 재주가 있었다면, 미국에서 성난큰곰을 찾는 데 이틀씩이나 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투시 를 행하고 나서 미국으로 가는 게 순서가 아니겠어요? 시타 교수 나 최 교수의 집 주소까지도 응시해 내는 재주가 있다면 성난큰 곰의 행적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테고요.”
“그렇다면 바이올렛이 했던 말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인가?”
“제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했을 텐데? 더군다나 성난큰곰이 함께 있지 않았는가? 또 룽페이의 임종 시에도 바이올렛이 갔다면서?”
“아아, 그 말씀을 들으니 이제야 명쾌하게 이해가 됩니다. 맞 아요! 신동들의 몸에 장치되어 있던 폭탄, 그게 무엇 때문에 있 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 그건 성난큰곰을 노린 것이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스터가 우리를 상대하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게 아니 었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들이 질 경우를 대비해서 말이야.”
“만약 신부님 말씀대로라면 마스터는 왜 신동들이 진 순간부 터 함정을 준비하지 않고 사흘 전부터 함정을 파고 기다렸을까 요? 그걸 뒤집어서 마스터가 뭔가를 얻기 위해 일을 꾸몄다고 가 정하면 말이 됩니다. 즉 신동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신동들은 처음에는 절대 주기 선생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의아하기는 했네. 그 신동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면 주기 선생 혼자로는 절대 이겨 내지 못했을 거야. 그러나 나는 그 아 이들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가 우리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서 폭탄으로 모두 없애려 했다고 추측했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비로소 전모가 드러나는 것 같아요. 바이올렛이 마스터라고 가정한다면 성난큰곰은 우리가 바이올렛을 믿게 만들도록 하는 소도구에 불과했던 거 죠. 신동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렇다면 신동들이 가지고 있던 폭 탄의 목적도 필경 그런 유에 불과한 겁니다. 더구나 그건 여섯 명의 신동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질 것을 처음부터 알 고 있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아요. 신동들이 이긴다면 구태여 함 정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럼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했을까?”
“그건 이런 뜻이지요. 우리가 말려들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기를 바랐던 겁니다. 만약 바이올렛이 우리에게 직접 의뢰를 했 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사를 상세히 해 보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 기 선생이 말려들어 벌어진 일이므로 우리는 별 의심을 하지 않 고 남의 말을 다 믿으면서 일에 끼어들게 된 거죠. 신동들이 지 니고 있던 폭탄이 누구를 노린 것인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많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만, 그건 우리를 노린 것도 아니었습니 다. 신동들 자신과 성난큰곰을 노린 거였지요. 즉 우리가 그 싸 움에서 죽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바이올렛을 믿게 하는 소도구였던 셈이지요.”
“……”
“그 생각은 전부터 하고 있던 것이었어요. 레그나의 이야기를 듣고부터 말입니다.”
“신부님께서 레그나와 마지막으로 겨루실 때에 그 아이가 엄 청난 힘을 감추고 있다고 하셨지요? 그런 힘을 감추고 있다면 폭 탄을 쓸 것도 없이 감추고 있는 힘을 써 버리면 그만입니다. 성 난큰곰이 나타나서 두려워서 도망친 것 같다는 이야기도 나왔지 만, 전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과연 그런 주술을 쓸 정도로 단련 하고 수련을 한 아이들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것을 말입니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 습니다. 준후도 그러니까요. 그러나 준후는 절대 사람에게는 주 술을 쓰지 않고 더군다나 사람을 해치지도 못합니다. 반면, 그 애들은 어떤가요? 사람 목숨을 장난하듯 죽일 수도 있게 수련된 아이들이에요. 물론 룽페이 같은 아이들은 순진한 구석이 있습 니다. 문제는 레그나예요. 레그나가 폭탄을 피에트리에게 주었 으니 그 애가 폭탄을 터뜨린 것은 확실합니다. 자기와 같이 있던 아이들을 제물로 삼을 만큼 냉정한 마음의 아이가 과연 두려움 이라는 감정을 가질까요? 제가 보기에는 두려움보다는 미움이라 는 감정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레그나는 충분히 혼자서도 싸 울 만한데도 꽁무니를 빼고 달아났지요. 그건 마스터의 명령 때 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그 폭탄은 어쨌든 터졌을 겁니다. 신 동들이 이기면 우리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터뜨렸을 거고, 아니 면 성난큰곰을 없애기 위해서도 그랬을 겁니다. 아마도 마스터는 성난큰곰이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나설 것이라는 점도 간파 했던 것 같습니다. 폭탄에 그토록 알아보기 쉽도록 환한 색으로 글자판을 만든 것도 수상했어요. 모두가 같이 죽으라고 만든 것 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정말 모두 죽일 작정이었다면 귀신도 모 르는 사이에 터지게 했을 겁니다. 신동들이 나타난 것은 다 계획 적이었던 것이죠. 저는 룽페이의 유언을 들으면서 룽페이가 세 상을 지키기 위한 사명감으로 주술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 요. 그렇다면 그 신동들 중에는 마스터의 진정한 수족이 몇 없었 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레그나 정도겠지요. 그러니 나머지는 마 스터에게는 소모품에 불과했을거구요.”
박 신부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했다. 현암의 말은 앞뒤 정황이 모두 맞았다. 물론 비약도 있었고 가정도 있었지만 이처럼 논리 정연하게 상황을 설명할 만한 다른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박 신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섬뜩한 기분에 잠시 진 저리를 쳐야 했다.
“그러나 현암 군…….”
“예.”
“그렇다면 마스터는 우리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애썼단 말인가?”
“모두는 아닙니다. 마스터는 저나 연희 씨를 잔인하게 해치우 려고 했습니다. 그걸 보아서는 지금 동행중인 승희나 준후를 노 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애들은 무사…………… 아니, 그렇다면 마스터는 그 애 들을 어딘가에 이용하려고 모든 일을 꾸몄다는 소리인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승희와 준후가 더 걱정이 되는 겁니다.”
현암의 답은 짧고 명료했다. 박 신부가 한동안 생각에 몰두하 자 현암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신부님?”
“뭔가?”
“마스터는 악마가 자신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박 신부는 사실대로 말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모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을 흐렸다.
“그랬던가・・・・・・ 몰랐네.”
“그렇습니까.”
박신부는 화제를 돌리려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건 지금으로선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자네 말이 맞다 면 지금 상태를 보아서는 마스터는 우리를 일부러 분산시킨 셈 이 되는데………. 따지고 보면 황 교수는 연관이 있지만 시타 교수 는 원래 연관이 없던 사람 아닌가? 단지 바이올렛의 말 때문에 시타 교수가 있다는 인도에도 사람을 보내게 되었다는 말인데. 마스터는 인도에 승희와 준후가 갈 것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얘긴가?”
“승희와 준후 둘 다는 아닐 겁니다. 둘 중의 한 명이겠지요. 마 스터의 뿌리가 원래 인도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승희는 애염명 왕의 화신이고 준후는 밀교의 술수에 능통하니 둘 중 누구를 노 리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제 생각으로는 승희 쪽이 더 가능성이 많은 듯싶습니다.”
“나도 그렇다고 보네. 그럼 승희를 이용하여 마스터는 무엇을 하려는 거지? 승희가 아니면 손댈 수 없는 유물이나, 승희를 통 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고대의 힘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 것일 까?”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는 죽은 지금까지도 힘 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계약은 그대로이니 우리 모두를 희생시켜 악마 아스타로트에게서 자신의 힘을 돌려받겠 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해치는 것을 미루 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힘이라면,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봐 도 되겠지요.”
박신부는 한참이나 신음 소리를 내다가 입을 열었다.
“바이올렛이 마스터 본인이 아니라, 하수인이라고 가정해도 말이 되지 않나?”
“글쎄요. 그런 가정도 해 보았습니다만, 바이올렛은 하수인이 될 수가 없다고 봅니다. 마스터가 힘에 욕심을 낸다면, 그것을 절대 남의 손에 맡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을 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요. 저는 심리학에 조예가 있지는 않습니다만, 죽어서까지 잊지 못하는 힘에 대한 욕구를 다른 사람을 부려서 얻을 수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군요.”
“그러나 마스터가 뭔가 얻기 위해 사실을 감춘다면 그게 바이 올렛 본인이 아니라 하수인이어도 지장은 없을 것 같은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마스터라는 작자가 힘을 얻기 위해 꾸 민 일을 다른 사람 손에 맡긴다고는 상상할 수 없어요. 더구나 마스터는 영혼 자체이고, 제가 상대해 보니 그 능력은 예전에 살 아 있을 때보다 한참 떨어졌습니다. 그런 처지라면 수하로 거느 린 자가 자기보다 셀 경우 그 힘을 대신 가져가 버리는 경우도 계산했을 텐데, 절대 남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겠지요. 제 짐 작일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앙그라가 활동하고 있는 동안에 바 이올렛이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이 둘이 동일인, 아니 동일 영혼 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또 황 교 수의 집에서 앙그라가 내내 잠복해 있었던 것도요. 그건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유체이탈을 하는 동안 앙그라의 몸을 안전하게 숨기기 위한 방법도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마스터가 노리는 것은 인도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 는군. 음…………. 현암 군, 시타 교수 이외에 황 교수나 판첸 라마 는 꾸며낸 이야기일까?”
“그건 아닙니다. 황 교수를 미끼로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었다고 봐요. 처음에는 자신의 힘이 노출되지 않게 하기 위해 황 교수나 최 교수님을 없애려고 하다가 다른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없애 버릴 수 있고, 자신은 또 다른 힘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마스터는 분명 뭔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최 교수님을 지키고 그들이 감 추려고 하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신경을 써 왔지. 마스터가 뭔가 찾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도 이번 일에 이상한 점들을 많이 봐 오면서도 그것이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 에 계속 고민만을 거듭했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시선을 달리해 보니 비로소 마스터의 흉계가 보입니다. 그것은 준후나 승희가 지금까지 무사한 것을 보면 압니다. 저와 연희 씨의 경우는 인정 사정 두지 않고 즉각 없애 버리려고 했어요. 그러나 바이올렛은 기절한 것 말고는 그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어 요. 그냥 없애 버리고 사라져도 여기에 있는 우리는 아무런 대응 책이 없는데도요.”
“음, 대강 수긍이 가네. 한 가지만 더 물어보세. 마스터는 어떻 게, 그리고 왜 각국의 정보기관에 우리의 존재를 알려서 우리를 이 꼴로 몰아넣은거지?”
“그건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절대로 해치우고야 말겠 다는 집착에선지 아니면 우리를 갈라놓고 고립시키려는 수작에 서 비롯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승희나 준후를 이용하는 데 그것이 도움이 되는 상황인지도 모르지요. 좌우간 마스터 는 무서운 놈입니다.”
현암의 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지? 우선 어떻게든 인도로 가서 승희와 준후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유적의 일도 중요하지만 말일 세.”
“저도 동감입니다.”
박신부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현암의 말을 듣고 보니 마스 터의 흉계가 보통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지금 마스터와 동행하 고 있는 승희와 준후가 무척 걱정되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박 신부가 현암에게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세크메트의 눈은 어떤가? 여전히 안 되나?”
“글쎄요. 이상하군요. 전혀 느낌이 오지 않아요.”
박 신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마스터가 뭔가를 원해 승희와 준후와 동행하는 것이라면 당 장은 별일 없겠지. 그러나 그 애들이 마스터가 원하는 물건을 찾 고 나면 더 힘든 일이 닥칠 걸세. 상대는 바이올렛, 아니 마스터 인데……………. 게다가 세크메트의 눈도 되질 않고……………. 가까이 있 었으면 말이라도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여긴 너무 멀군.”
“말을 전달하다니요?”
“내게는 다른 사람에게 내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네.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네만………”
“언제 그런 능력이 생기셨나요? 혹시 예전에 가사 상태에서 그분을 만나신 후에?”
현암은 과거 박 신부가 죽음의 일보 직전에서 ‘그분’이라 일컫 는 빛의 영상을 만난 이후 능력이 배가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박 신부가 공안청의 벽 다섯 개를 부수고 탈출한 힘도 그때 얻은 힘 같았는데 거기에다가 마음속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 까지 생겼다니, 도대체 그의 능력의 끝은 어디일까?
그러나 박 신부는 낮은 신음 소리만 계속 낼 뿐 현암이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현암 군, 우리 한시라도 빨리 인도로 가세. 승희와 준 후가 인도의 어느 곳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조금 더 가까운 거리 에만 들어간다면, 세크메트의 눈이 아니더라도 내가 승희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 테니 말일세.”
“그렇게 하지요. 그러면 여기서는 빠져나가 다른 비행기에 타 of…….”
현암이 행동에 옮기기 위해 몸을 펴려고 하는데 갑자기 최교 수가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사람들이 와요! 조용히 하세요!”
최 교수의 말과 동시에 세 사람이 숨을 죽이자 바깥에서 아까 보다도 더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현암은 추리를 마친 이후로 승희와 준후가 걱정이 되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수행을 하는 기분으로 참고 있었다.
‘제발 조금만 더 무사히 …………. 우리가 갈 때까지만이라도 무사해다오.’
박 신부도 입 밖으로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박 신부가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읊기 시작했지만 그 소리는 바깥에서 들려온 소란스러운 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