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11화 – 홍수 24 : 또 하나의 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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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11화 – 홍수 24 : 또 하나의 녹비


또 하나의 녹비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는 판첸 라마의 인도를 받아 포탈라궁 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체력을 비축해 두라는 경고를 입증 하기라도 하듯이 길은 끝없이 멀기만 했다. 중간 중간 쉬는 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꼬불꼬불하고 때로는 일직선으로 죽 이어져 높이마저 들쭉날쭉한 계단을 끝없이 걷다 보니 환각 작 용이 일어나 발을 헛디딜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방들도 많았고 라마승들도 여기저기 돌아 다녔지만 몇 곳인가 라마들이 지키고 출입을 통제하는 지점들 을 지나고 난 다음부터는 굳게 닫혀 있는 문들과 끔찍하게 이어 져 있는 계단만 보일 뿐이었다. 인간이 만든 건물이 이렇게까지 깊을 수 있는 것인지 의심마저 들었다. 계단의 아래쪽은 깜깜한 데다가 매우 넓어서 판첸 라마가 들고 있는 횃불조차도 계단의 전모를 보여 주지 못했다. 계단을 어느 정도 내려가고 나면 또 많은 샛길과 다른 계단들이 연결되어 있어서 지하는 마치 미로 와 같았다. 연희도 제법 기억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지 만 연희가 아니라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이렇게 복 잡한 길을 지나가면서 그 길을 외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약 한 시간 정도 걸음을 옮기고 쉬고를 반복했다. 준비해 온 마른 식량과 물로 허기를 때울 뿐 내려가기만을 계속하자 연희는 눈앞에 헛것이 보이며 다리가 풀려 차라리 굴러서 내려가면 더 편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할 정도였다. 대여섯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어서 어느 작고 텅 빈 방에 들어 가 한 시간 정도 다리를 쉬고 잠을 자기까지 했다. 그때에도 판 첸 라마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연희를 돌보아 주었으며 별다른 말 은 하지 않았다.

연희는 악몽에 시달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이렇게 고통 스러운데 되짚어 올라갈 때는 어찌할 것인가! 그건 악몽이 아니 라 엄연한 현실이었지만 억지로 생각을 돌리려 애썼다. 결국 내 려가는 데에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나중엔 아무 생각도 나지 않 고 그저 발이 움직이는 대로 휴식 없이 내려가기만 했다. 그렇게 두 시간 이상이나 내려간 후에야 판첸 라마는 어느 좁게 나 있는 복도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안쪽이 녹색의 비석이 있는 곳입니다.”

연희는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윌 리엄스 신부도 비틀비틀하는 것이 주저앉을 것 같아 보였지만 판첸 라마는 어찌 된 사람인지 끄떡도 없었다.

판첸 라마의 인도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 연희와 윌리엄스 신 부는 피곤함도 잊고 숨을 들이마셨다. 방 안은 휘황한 금빛으로 빛났다. 판첸 라마가 든 횃불이 사방 벽에 가득 칠해진 금박에 반사되어 방 전체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벽에는 단순하지만 우아한 형태의 오래된 장식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가 순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최소한 도금은 된 듯했다. 중 앙에는 역시 금빛으로 빛나는 제단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녹색 의 옥으로 만들어진 새 모양의 조각물이 양쪽에 있었고, 그 중앙 에 녹색의 보석으로 만들어진 어른 손바닥보다 조금 큰 팔각형 의 비석이 서 있었다. 녹비였다. 저렇게 커다란 에메랄드가 존재 한다는 사실도 놀라웠거니와 그것이 이런 방에 모셔져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윌리엄스 신부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것이 에메랄드 태블릿?”

“그렇습니다.”

“이 방은 얼마나 오래된 방입니까?”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수천 년은 되었겠지요.”

윌리엄스 신부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멘’을 중얼거리는 사 이연희는 놀라움을 감추고 녹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녹비의 겉면은 일견 매끈하게 보였으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여덟 면 모두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글자들이 빽빽이 음각되어 있 었다. 그 글자체는……………. 연희는 잘 보이지 않아 한 걸음 더 녹비 쪽으로 다가서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제야 피곤에 지친 연희의 머리에 에메랄드 태블릿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했던 판첸 라마의 말이 떠올랐다. 연희는 손을 더 내밀었으나 손은 에메랄드 태블릿이 있는 자리를 쑥 통과 해 갈 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입체 영상이라면 모르 겠지만 그렇게 볼 수도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완벽해 보일뿐더 러, 판첸 라마가 들고 있는 횃불의 너울너울 움직임에 따라 그림 자가 변하고 있으니 입체 영상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전혀 만져 지지 않는다니! 연희가 놀라서 신음 소리를 내자 윌리엄스 신부 도 연희처럼 에메랄드 태블릿을 손으로 더듬어 – 잡히지는 않았 지만-보고 가벼운 탄성을 질렀다. 윌리엄스 신부가 판첸 라마 에게 물었다.

“저 태블릿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나 해독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판첸 라마의 말이 떨어지자 연희가 비로소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당연한 일입니다. 저것은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글자니까요.”

“연희 양은 저 글씨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잘 읽을 수는 없지만 무슨 글자인지는 압니다. 저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밖에 없을 겁니다.”

“그게 누구지요?”

“준후입니다. 저건 조선의 상고 문자인 신지 문자가 틀림없어요.”

윌리엄스 신부가 놀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조선의 문자라고요?”

연희도 눈을 크게 뜨면서 허리를 폈다. 이제는 피로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어째서 티베트 포탈라궁의 깊숙한 곳에 조선 의 옛 글자로 새겨진 태블릿이 있는지에 대해서만 사고가 맴돌 았다.

해독하실 수 있겠습니까. 연희씨?”

윌리엄스 신부의 말에 연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줄 알 았으면 진작에 준후에게 제대로 배워 놓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 지만 이제 와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희는 방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도안들과 금빛들에 눈길을 돌렸다.

“우선 방 안의 도안들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어요. 대부분 그 림으로 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요.”

윌리엄스 신부와 판첸 라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연희는 판첸 라마에게서 횃불을 받아 들고 천천히 금빛으로 번쩍이는 벽면을 관찰했다.


퇴마사 일행들이 서둘러서 사툼나의 안내를 받아 잘 보이지 않는 샛길로 마을을 떠난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마을에는 몇 대의 승용차와 트럭이 몰려들었다. 승용차에서는 양복 차림 의 사람들이, 그리고 트럭에서는 군인들이 내렸다. 그들은 섣불리 집을 수색한다거나 주민들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나 삽 시간에 사방을 포위하고 요소요소를 장악하여 누구 한 사람 마 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질서 정연한 수배를 본 백호는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러 사람이 마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묻고 있었는데, 백호가 집 밖으로 나 오자 몇 사람이 백호에게 다가왔다. 예상과는 달리 웨이나 도구 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누굽니까? 인도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난 한국 사람입니다. 백호라고 하죠.”

“백호?”

“보아하니 그들을 찾아온 것 같은데 이미 늦었소. 나도 찾으려 했지만 허탕이었으니.”

요원들 중 몇몇이 서로 눈빛으로 무언가 신호를 보냈고 그중 금발에 콧수염을 기른 덩치 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인터폴의 맥라렌이오. 당신이 한국의 백호라면………. 긴 이야기는 않겠소만, 당신이 중국에서 그들을 빼내어 가지 않 았소?”

“빼내어 가다니! 나도 그들에게 잡혀온 거나 다름없소. 그들 이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뛰어내리는 바람에 그들을 놓친 거 요. 여기까지 따라왔지만 결국 못 잡고 말았으니 어쩌겠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소리는 마시오. 다시 묻겠소. 당신이 그들을 도망시킨 것 아니오?”

“나도 그들을 추적하는 임무를 띤 사람이오. 공연히 누명 씌우 지 마시오. 내가 그들을 도망시켰다는 증거가 있소?”

“우린 도구르 경위의 증언을 받았소. 아시지요? 도구르 경위에 대해서는…………..”

백호는 도구르에 대해 이를 갈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잘 알지요. 그런데 도구르 경위가 뭐랍니까?”

“도구르 경위가 당신에게 억류되어 온 것은 중국에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소.”

“내가 아니오. 그들에게 억류되었던 것이지.”

“하지만 당신의 비호 없이 어떻게 비행기가 뜨고 낙하산으로 내리고 하겠소?”

“당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오? 그 정도 능력이 없다면 이렇게 난리가 나지도 않았을 거란 점, 아실 텐데요? 내가 무슨 힘으로 그들과 맞서겠소? 안 그렇소?”

백호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맥라렌에게 당당하게 맞섰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끌까 머리를 굴 렸다. 그런데 백호와 맥라렌의 대화는 예상치 못한 일로 중단되 고 말았다. 갑자기 어느 작은 집에서 꼬마 아이가 울면서 뛰어나 왔기 때문이었다. 아라였다.

“미워 미워! 나만 혼자 떼어 놓구! 다 밉단 말야!”

그 뒤를 이어 주기 선생이 절뚝거리면서 새로 얼굴에 상처 자 국까지 몇 개 낸 채 당황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예상외로 아라의 발악(?)이 심하다는 것을 느낀 떫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 었다. 주기 선생은 아라를 잡으러 나왔다가 밖에 요원들과 백호 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서 우뚝 그 자리에 섰다. 철없는 아 라가 다시 빽 소리를 질렀다.

“준후 오빠두 없구. 다 없잖아! 왜 난 같이 못가! 응?”

백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한국말로 떠드니 그들이 알아듣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준후의 이름을 부르다니. 그렇다고 여기서 알 은척하기도 어색한 일이었다. 주기 선생이 눈치를 챈 듯, 무리를 해서 달려와 아라를 잡아 울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번쩍 들어 어 깨에 걸머지고 순식간에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이런 일에 힐기 보법이 사용될 줄은 주기 선생으로서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저들은 누굽니까?”

맥라렌의 말에 백호는 딴청을 부렸다.

“나라고 여기 있는 사람을 다 알겠습니까?”

“난 주한 미군으로 복무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국말도 좀 알지요. 저희가 저 아이와 이야기를 좀 해 볼 수 있을까요?”

맥라렌의 말에 백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 사툼나의 안내를 받은 퇴마사들은 백호가 예약해 놓은 호텔에서 준비물들을 챙기고 있었다. 백호가 꼼꼼하게도 동굴 탐사용 장비까지 준비해 두어서, 그것은 최 교수가 짊어졌다. 그 외에도 현암은 위성 전화기와 목도 속에 넣어 둔 청홍검까지 챙 겼고, 준후 역시 백호가 준비해 준 주사와 한지로 부적들을 열심 히 그려서 소맷자락에 두둑이 챙겼다. 박 신부도 비상식량 같은 가벼운 짐들을 졌다. 박 신부는 자신이 가장 체격이 좋으니 짐을 많이 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최 교수와 현암이 우겨서 거의 짐 이 없었다.

최 교수는 탐사 장비 외에도 참고 문헌들과 자잘한 것들을 걸 머졌고, 승희도 최 교수와 짐을 나누어 메기로 했다. 두어 시간 이 지나자 백호에게 위성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그 전화는 백호가 직접 건 것이 아니라 같이 있던 요원이 건 것이었다.

“네? 아……………. 네. 저런…………….”

전화를 받는 박 신부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자 더불어 준비 를 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잠시 후 전화를 끊 은 박신부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역시 도구르가 제보를 한 것이 맞나 봐. 백호와 거기 남아 있 던 사람들의 발이 묶여 버렸다는군. 우리를 추적할 거라고 하는 데………….”

“할 수 없이 먼저 떠나야겠군요.”

“그래. 가능한 한 빨리 출발하라고 하는군. 파키스탄으로 서둘러 가려면 비행기를 타는 수밖에 없어. 그러면 필경 항로가 추적 될 텐데……………..”

“먼저 가서 마스터가 꾸미는 짓부터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현암이 말하자 승희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내뱉었다. “만날 막고 또 막고, 우린 도대체 뭐죠? 차라리 지금 가서 숨 어 버리는 게 어때요? 홍수야 나건 말건, 징글맞게 쫓아오는 놈 들도 한번 당해 봐야 따끔한………….”

박신부는 잠자코 있었지만 현암이 눈을 흘겼다.

“승희야!”

“알았어, 알았어. 그냥 해 본 소리야. 좌우간…………. 어이, 아저씨.”

승희는 얼버무리다가 난데없이 옆에 있는 요원에게 물었다. 요원은 뭐가 뭔지 잘 몰라 멍하니 있다가 출동 준비를 하는데 부적을 그리고 있는 준후를 보고 더 멍해졌다흠칫하며 승희 를 쳐다보았다.

“네?”

“총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총요?”

“네. 권총 같은 거요.”

“다른 건 모르겠지만 권총은 드리기가 좀…………….”

“나도 내 몸은 지켜야 할 거 아니에요!”

“승희야, 권총은 뭐에 쓰려는 거니? 그런 것 없이도 충분하다. 그건 안 돼.”

박신부가 충고하듯 말하자 승희는 할 수 없다는 듯 양손을 들 어 올려 보였지만 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장비를 점검하려고 여념이 없는 사이에 승희는 요원을 끌고 저 만치 가서 뭐라고 속닥거렸다.

한참 뒤 모두 출발할 때 승희가 짐에 무언가 두루뭉술한 꾸러 미를 하나 더 집어넣는 것을 보고 무어냐고 물어보았지만 승희 는 ‘여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말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현 암은 의심이 갔으나 총 모양을 띤 것도 아니라서 그냥 넘어가기 로 했다. 퇴마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사툼나는 간곡하게 승희를 받들어 모시면서 수없이 절을 했지만, 승희는 피식 웃기 만 하고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연희는 도안들을 관찰하면서 분주히 뭔가를 수첩에 적고는 깊 은 사색에 잠겼다. 윌리엄스 신부는 손에 잡히지 않는 에메랄드 태블릿을 바라보면서 다른 생각에 빠졌고, 판첸 라마는 윌리엄 스 신부를 도와 횃불을 들고 있었다. 한참 후 윌리엄스 신부가 연희 곁으로 와서 말했다.

“아무래도 일종의 영체 같습니다. 엑토플라즘이라고 하는…..”

“영체요?”

“네. 염체와는 조금 다른 것인데, 정신력으로 만들어진 물건입 니다. 일종의 혼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물질이기도 하죠. 그러니 형체가 있으면서도 없고, 보이지만 잡히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 밖에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습니다. 아멘.”

윌리엄스 신부는 긴 한숨을 내뱉다가, 아직도 뭔가를 쓰며 대 조해 보는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 씨는?”

“놀라운 거예요. 아주 놀라운…………”

“그렇습니까?”

이곳으로 초빙되어 온 사람은 윌리엄스 신부였지 연희가 아니 었다. 그렇다고 해도 윌리엄스 신부는 연희의 지금 모습이 조금 도 섭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것 같아 반 가울 따름이었다.

“자, 보세요. 다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설명을 해 드리지요. 판 첸 라마께서도………..”

“예.”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일종의 부조(浮彫)로 만들 어진 벽화라고 할 수 있어요. 모두 아홉 개의 큰 그림으로 이루 어져 있지요. 금박을 입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보존되었 지만 군데군데 낡은 부분이 많아 금세 알아보시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요. 자……”

연희는 먼저 한쪽 모퉁이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무엇을 그린 그림으로 보이시지요?”

“글쎄요. 사람들이 아주 많군요. 말도 보이고…………….”

“맞아요. 이건 전쟁의 그림입니다. 한쪽 군대는 말을 타고 있어요. 즉 기마병 위주의 군대지요. 그리고 다른 쪽 군대는 거의 보병이에요. 걷고 있고, 성곽 같은 것을 의지하고 있지요.” 

“아, 그게 성곽을 나타낸 것이군요.”

“네. 그리고 이 중앙부, 이쪽 말 탄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크게 새겨진 사람이 보이지요?”

“그래요. 뿔이 돋아 있군요.”

“맞아요. 이 사람이 말 탄 군사들의 대장입니다. 워낙 간략하 게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크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대장이 틀 림없어요.”

“그렇군요.”

“그러면 다음 그림을 보세요.”

연희는 다음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머리에 뿔이 돋은 커다란 남자가 높은 산을 오르는 모습이었다. 그 뒤에는 여러 명 의 작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산 위에는 구름이 걸려 있고 눈 덮인 산을 그린 듯한 표현도 보였다.

“이건 앞서의 그 대장이 틀림없어요. 그 사람이 산을 올라가고 있지요?” 

“그렇군요.”

연희는 그다음 그림을 가리켰다.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앞에 놓고 하늘로 두 팔을 벌린 채 연설을 하는 것 같았 으며 아래에 있는 작은 사람들은 모두 환호를 올리고 있었다. 하 늘에는 네 개의 사람 모양의 작은 형체가 구름 사이로 서 있었는 데 셋은 앞에 서 있었고 다소 큰 한 명은 그 뒤에 서 있었다. 

“이건 무어라고 생각되시나요?”

“글쎄요. 이건 앞서의 전쟁 영웅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하는 모습이고, 위에 떠 있는 것은 신 같은 존재들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요?”

“제 생각도 그래요. 그다음, 이것이 중요합니다. 보세요.”

다음 그림은 유달리 고풍스럽고 과감한 표현으로 그려져 있어 서 무언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앞서의 뿔이 돋은 대장이 서 있었고 그 밑으로 알 수 없는 선 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건 뭡니까? 이 많은 의미 없는 선들은? 혼란스러운데요?”

“여러 가지 의미가 될 수 있겠죠. 보신 그대로입니다. 고대인 들의 그림 양식은 비유적인 것도 있지만 놀랄 만큼 사실적인 것 도 있습니다. 이건 표현 그대로 혼란입니다.”

“혼란이라면?”

“이렇게 많은 선들, 소용돌이, 이게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이라면 무엇일까요? 홍수입니다.”

“홍수? 그렇다면 이게 대홍수를 표현해 놓은 그림이라는 말인가요?”

“더 보세요.”

이어서 연희가 가리킨 그림은 뿔난 대장의 슬퍼하는 모습이었 다. 대장이 땅을 파고 죽은 자들을 묻고 있는 것 같은 모습. 그리 고 그의 뒤로 이상한 복색을 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통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여태껏 내가 아는 어떤 영웅 이나 신화에도 이런 내용은 없었어요.”

“그럴 수 있지요. 그다음입니다.”

다음 그림은 분위기가 달랐다. 뿔이 난 대장은 둥근 반원 모양 의 가지를 들고 그 가닥을 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 가닥을 잡고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흠. 이건 뭡니까? 저 대장이 들고 있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요? 고대인의 표기법은 직설적일 때가 많 다고. 금박이라 색깔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이해가 어려우실지 도…………. 그러나 저는 알 것 같아요. 저건 무지개입니다.”

“무지개! 그렇군요. 홍수 뒤에 무지개! 이건…………….”

윌리엄스 신부의 얼굴이 흐려졌다. 홍수 뒤에 무지개를 징표로 삼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저 뿔이 난 사람의 형상이 야훼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대목에 이르자 판첸 라마가 말했다.

“여기 새겨진 부조들은 저희도 대강 그렇게 짐작했습니다. 그 래서 굳이 교황청 측에 보여 드리고 해석을 요청한 것입니다. 신 앙심은 누구의 것이든 소중한 것이니까요.”

윌리엄스 신부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연희는 그 런 윌리엄스 신부의 얼굴을 보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절대 신부님의 신앙에 저어되는 내용이 아 닙니다. 저 뿔이 난 사람은 야훼도 아니고 신도 아니에요. 다음 그림을 보세요.”

다음 그림은 뿔이 난 사람의 장례식 같아 보였다. 사람들이 많 이 모여 그 사람을 묻고 있는데 뿔이 난 머리가 옆에 놓여 있었다. “보세요. 이건 그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번 그림은 판독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구름 비슷한 것과 비 스듬히 그어진 선들, 수직으로 그어진 선들이 교차되고 있었고 그 밑에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무엇인가요?”

“알아보시기 어렵겠지요?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해할 수 있어요. 고대사를 조금 아는 한국 사람들만이 이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을 겁니다.”

“아까 조선의 옛 글자가 나왔다니 그런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 다. 도대체 무엇입니까?”

“저 구름은 아실 것이고, 비스듬히 그어진 선은 바람입니다. 또 수직으로 그어진 선은 비입니다. 즉 저것은 고대 조선의 삼사 인 운사, 풍백, 우사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저 밑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 그것은 무엇으로 보이시지요?”

“네모진 것이 무슨 비석 같군요.”

“다음 그림을 보세요. 그게 마지막입니다.”

그다음 그림은 윌리엄스 신부로서는 더더욱 이해하기가 어려 웠다. 커다란 네모가 있었고 작은 네모가 있었고 그 밑에는 기뻐 춤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위에는 여러 가지 다른 장식을 한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떠 있었다.

“이건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저로서는……………. 좀 설명을 해 주십시오.”

윌리엄스 신부의 말에 연희가 눈을 빛내며 천천히 말했다. 

“제 짐작이 틀림없다면 저건 녹비, 즉 에메랄드 태블릿을 말합 니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대홍수의 경위를 설 명하고 있습니다.”

“대홍수!”

윌리엄스 신부는 경악했다. 대홍수의 경위라니……………. 연희는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퇴마사들이나 최 교수가 옆에 있었다면 엄청나게 놀랄 만한 내용의 말이었다.

“저 뿔이 난 사람은 조선의 치우천왕입니다. 중국의 황제를 격 퇴한 영웅이자 티베트의 건설자 그리고 에메랄드 태블릿, 즉 녹 비의 형태를 빌려 치수법을 세계에 전파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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