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2화 – 홍수 15 : 강행 돌파
강행 돌파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는 백호가 느닷없이 호출을 받고 나가자 마음이 불안했지만, 백호와 약속한 대로 월터 보울에게 연락 사 항을 전달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윌리엄스 신부는 밖으로 나가 서-미행자가 있는 것 같았지만 무작위로 전화를 고르기 위 하여 버스를 타고 몇 구역을 간 다음에 여러 대의 전화 중 하나 를 잡고 월터 보울과 통화를 했다. 만약 영국 측에서도 정보부의 누군가가 퇴마사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면 월터 보울을 주 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으나, 아직 도청까지 할 것 같지 않다 는 백호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이상 전화 연락 이 가면 월터 보울의 사무실도 도청을 당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이번 한 번에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했다. 또한 기껏 논의한 연 락 방법이 도청자들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 그들이 알 수 없는 방법을 써야 했다. 게다가 어떤 의사 표현상의 약속이 미리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서 박 신부 등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써서도 안 되었다. 물론 도청이 예상되므로 전혀 해독될 수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하루 이내에 해독될 수 있는 문자는 아니어야 했 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연희는 머리를 짜내고 짜내다가 묘안을 생각해 냈다.
월터 보울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상상 외로 별다른 방 해를 받지 않고 끝났다. 윌리엄스 신부는 예상보다 조금 싱겁다 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것은 백호의 강력한 항의 가 주효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중국 정보기관이나 인터폴 에서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고 있다는 표시일 수도 있었다. 물론 어디선가 감시의 눈빛을 번득이고 있겠지만……………. 윌리엄스 신 부는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언짢아졌고 그 때문에 돌아오는 동 안 내내 우울한 얼굴이었다.
윌리엄스 신부가 돌아왔을 때 연희는 호텔 안의 라디오며 TV 등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틀어 놓고 주위를 두리번거 리고 있었다. 도청을 방해하기 위해 그런 모양이었다. 하긴 필담 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영 답답해 그런 방법을 짜낸 것 같 았다. 그것을 보고 윌리엄스 신부는 귓속말 같은 작은 소리로 연희에게 물었다.
“연희 양, 이제는 어떻게 할 계획이지요?”
“글쎄요. 신부님은요?”
“나는 티베트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원래 내게 부여된 사명도 있고 또 박 신부님이 그 일을 부탁하시기도 했으니까요. 연희 양은요?”
“글쎄요.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요.”
“그것은 나도 이해합니다. 아멘!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 우리 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어요. 차라리 두 사람을 믿기로 하 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도 연희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느새 커다란 눈에 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렇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걸요.”
윌리엄스 신부 역시 슬픈 얼굴로 성호를 그은 다음 더 이상 입 을 열지 않았다. 연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 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는 그런 연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 을 꺼냈다.
“그런데 연희 양, 아까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언제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습니까?”
“무슨 말씀이지요?”
“아까 백호 씨에게 마인드 컨트롤 같은 것을 하지 않았나요?”
“글쎄요. 저는 뭘 어떻게 하겠다고 특별히 생각해 본 적은 없 는데요.”
“백호 씨는 연희 양이 바라보자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글씨 를 써 내려가던데요. 무척 놀라워하는 것 같던데……..”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다만 백호 씨가 자신의 진심 을 얘기해 주기를 바랐어요. 화도 났구요. 물론 백호 씨를 못 믿 겠다거나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백호 씨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고요. 그저 신부님과 현암 씨와 승희와 준후가……………. 모두가 너무 불쌍해서 잠깐 이성을 잃었나 봐요.”
“그 심정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 말뜻은 그것이 아니라 연희 양이 보인 비범한 능력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연희 양, 오른손을 볼 수 있을까요?”
연희는 윌리엄스 신부의 요구대로 오른손을 펴서 보여 주었 다. 지금은 거기에서 솟아나던 금빛의 기운이 가시고 없어져서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영능력이 있는 윌리엄스 신부는 거기에서 어떤 힘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준후 군의 느낌이군요. 상당한 힘이 느껴지는데요?”
“예, 준후가 넣어 주었어요. 덕분에 아슬아슬한 위기를 여러 번 넘길 수 있었죠. 저 같은 사람이 무슨 힘이 있다고 악령들에 게 대적했겠어요? 그나마 제 몸이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것 덕분이지요.”
“그런데 아까 연희 양이 백호 씨를 쳐다볼 때에 오른손이 빛나 고 있었어요. 알고 계셨나요?”
“따스한 느낌이 왔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화도 나고 마음이 답 답하기도 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지요. ……………신부님, 그러면 준후의 힘 때문에 제가 아까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마인드 컨트 롤의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말씀인가요?”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럼요? 그런데 마인드 컨트롤이란 게 뭐죠? 최면술 같은 것 인가요?”
“다릅니다. 최면술은 그 사람의 잠재의식에 어떤 관념을 심 어 두어서 무의식중에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또는 자신도 모르고 있는 잠재의식 속의 사실을 말하거나 기억하도 록 하기도 하고요. 그러나 제가 본 것은 그보다 한 수 위의 능력 인 것 같습니다. 최면술에 걸려서 잠재의식이 발동되면 보통 그 사람 본래의 이성은 나타나지 않고 의식을 잃는 경우도 많고, 또 자신이 어떻게 최면에 걸렸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하지 요. 그러나 좀 전에 백호 씨는 의식을 잃지도 않았고, 연희 양이 행했던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다 기억했습니다. 그건 백호 씨가 연희 양의 어떤 힘에 자극을 받아서 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비슷한 것 아닐까요?”
“다릅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를 들어 보죠. 개가 있는데 그 개를 어디로 데려가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윌리엄스 신부는 말을 하면서 윙크를 했고, 그것을 본 연희는 살짝 웃었다.
“개는 예가 심한데요?”
“그 개는 그곳으로 가기 싫어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럴 때에 개 에게 목걸이를 걸어서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가는 것이 최면술이 라면, 마인드 컨트롤의 능력은 그 개가 그곳으로 스스로 가고 싶 게끔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지요. 물론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이 름도 적절한 것은 아니고 제가 임시로 붙인 이름입니다만…………….”
“원래 마인드 컨트롤은 그런 개념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
“마인드 컨트롤은 자기 계발이나 각성을 위한 요법을 말하지 요. 한때 큰 유행을 일으켰지 않습니까? 그러나 연희 양이 보인 능력은 그런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요. 자기가 아닌 남을 그렇 게 했으니까요.”
“흠!”
그 말을 듣고 연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윌리엄스 신부는 연 희의 그런 모습이 의아했던지 고개를 갸웃했는데 조금 있자 연 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떻게 된 것인지 정말 몰라요. 그리고 제게 그런 능력이 생긴 것이라고 해도 달갑지가 않군요.”
“왜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승희를 보면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어요. 힘이 생기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라고요. 제가 봤을 때 특히 승희는 자신이 지니 게 된 능력 때문에 불행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것 같아요. 뭐라 고 짚어 내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요. 자꾸 마음의 벽이 두터워 지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드네요. 신부님, 힘이 생기면 정말 좋은 것일까요?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나요?”
“연희 양의 이야기가 맞습니다. 아멘………….. 자신에게 합당하 고 걸맞은 것 이외의 힘은 오히려 짐이 되겠지요.”
“불안해요. 저는 항상 자신을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허허허. 연희 양 같은 어학의 천재가 어떻게 보통 사람입니 까?”
“그러나 그건 이런 종류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이잖아요.”
“글쎄요. 다를까요?”
“무슨 말씀이시지요?”
“어떤 종류의 것이든 힘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저 도 예전에 박 신부님과 이야기를 해 보아서 승희 양이 깊은 시름에 빠져 있다는 것은 대강 알고 있지요. 그렇게 따지면 저도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가장 반기독교적인, 피를 빨아 먹는 괴물이 내 몸 안에 있다니…………. 그러나 그 힘 때문에 저도 위기를 넘긴 적이 많이 있습니다. 미력하나마 연희 양이나 퇴마사분들께 도 움이 된 적도 있고요. 저도 맨 처음 흡혈귀들에게 잡혀서 그러한 힘을 얻게 되었을 때, 슬퍼하고 고민하며 힘을 떨쳐 내려고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나 자신의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지요.”
“아, 그러셨군요.”
“저도 나름대로 실망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 러나 박 신부님, 그리고 여러분들과 하느님 이외에는 누구에게 도 그 고민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지요. 저는 그런 짐을 안은 채로 강론도 하고 신도들 앞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 자신을 더욱 채찍질하기도 했어요. 그 런데 어느 날인가, 묘한 기분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주교님 과 함께 미사를 마치고 나서는 길에 주교님이 제게 좋은 말씀을 해 주시는 거예요. 태도가 아주 온화해지고 경건한 분위기가 넘 친다고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요. 흡혈귀로 변신하는 신부가 경건은 무슨 경건이냐고 마음속으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러 다가 저는 어떤 일로 인해 사악한 힘과 충돌한 적이 있었습니다. 악귀에 들린 사람에게 엑소시즘을 하던 중이었는데…………….”
연희는 어느새 시름도 잊고 윌리엄스 신부가 유머러스한 표정을 띠며 하는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영 힘이 달리지 뭡니까? 그래서 좀 위험한 지경에 빠졌는 데……………. 하하하. 아멘. 그 뱀파이어의 이블 파워를 사용하여 간 단하게 악령을 제압한 다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서 엑소시즘 을 수행하여 놈을 몰아냈습니다. 물론 빈혈 때문에 나중에 엑소 시즘할 때는 힘들었습니다만……………. 하하하. 그래도 웃으면서 기 절했답니다. 하하하.”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윌리엄스 신부를 따라 웃었다. 작달막 한데다가 어린아이같이 순진한 구석이 있는 윌리엄스 신부의 이 야기는 꾸밈이 없었고, 엄숙하게 엑소시즘을 하고는 맥이 빠져 서 웃으면서 기절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어딘지 가슴 뭉클한 웃 음이 입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수혈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힘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해 보았고, 퇴마사분들의 고충도 다시 생각해 보았지요. 박 신부님이나 현암 군, 준후의 능력은 제가 가진 이 블 파워에 기도력의 믿음을 더해도 반도 미치지 않는 커다란 것 이지요.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 분들은 제가 겪은 고민의 몇 배 나 되는 나름대로의 많은 고충이 있었을 테니 오죽하겠습니까? 제 고민과는 비할 수 없는 고통…………… 그들은 분명히 안고 있을 겁니다. 잘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공짜로 아무것이나 주시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하하하.”
연희도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모습을 보 고연희는 윌리엄스 신부가 코미디언이 되면 더 나았을지도 모 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의 이야기에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 었지만………………
“그러나 현암 군이나 박 신부님은 그런 고통이나 번민은 내색 하지 않으시면서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 는 다시 생각해 볼 계기를 갖게 된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윌리엄스 신부는 어깨를 으쓱하며 양팔을 들고는 하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그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제 통제 없이 일 어나는 현상도 아니고, 제가 남의 피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는 것 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그 힘이 제 안에 들어가게 된 후로 저는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성찰하고 채찍질하고 만사에 성의 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하다 보 니 그렇게 된 것이지요. 못생긴 남자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더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코 미디 프로에서 들은 말입니다만 그것도 완전히 사실무근인 것은 아니겠지요? 아멘. 저도 생각하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이 뜻대로 된 것이겠지요. 이 작고 작아서 키까 지 작은 미천한 신부가 뭘 어찌하겠습니까. 아멘. 하하하.”
연희는 또다시 웃었다. 윌리엄스 신부에게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위안시키는 힘이 있었다. 윌리엄스 신부의 이야기를 듣 는 사이에 자신의 그런 힘에 대한 고민은 물론이고 울적하고 터 질 것 같던 마음도 많이 가벼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연희는 그제야 냉정한 기분으로 현재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윌리엄스 신부님과 함께 티베트로 가야 할까? 박 신부님은 그렇게 해 달라고 당부하셨지만, 지금 이렇게 급한 상황에서 그리로 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일까? 여 기서 무슨 일인가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러다 보니 최 교수와 아라에 대한 일도 더불어 떠올랐다. 아 라…………. 이런 꼬마 아이를 두고 갈 정도라면, 물론 일이 위험해 서였기도 했지만, 최 교수도 야속한 면이 있다고 연희는 생각했 다.
연희는 고개를 돌려 소파에 누워서 잠들어 버린 아라를 쳐다 보았다. 지쳐서 퍽 피곤한 듯, 자고 있는 작은 얼굴을 보자 애처 로운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아라를 들어 침대에 눕혀 주려고 팔 을 뻗었다. 그러다 아라의 목덜미 부근에서 무엇인가가 간헐적 으로 빛나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뭐가 빛을 내는 걸까?’
가만히 아라의 옷깃과 머리칼을 헤쳐 보니 빛을 내고 있는 물체는 준후가 아라에게 선물한 목걸이였다.
‘이게 어째서?’
의아하게 여긴 연희는 빛을 발하고 있는 아라의 목걸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준후는 모든 정신을 다 쏟아 비몽사몽 상태에 있다가 갑자기 느낌이 오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준후의 몸이 흠칫하자 옆에 있던 승희는 긴장하면서 쳐다보았으나, 준후는 땀만 비오 듯 흘리며 안색이 창백해진 채 눈을 꼭 감고 입도 꼭 다물고 있 었다. 승희는 준후가 뭔가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어디가 잘못되 어서 저러는지 분간이 가지 않아서 손에 땀을 쥐면서 입술을 깨 물었다.
정신을 극도로 집중하자 준후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반대쪽 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보이는 것은 희미하고 커다 란 그림자였는데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그 그림자는 사람의 손 모 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주술의 매개체가 된 목걸이를 만지 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연희의 얼굴. 낯익은 얼굴이 보이자 준후는 너무도 반가워서 하마터면 정신이 흐트 러질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자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모 습들도 희미하게 나타났다. 저만치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모 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박 신부가 아닐까 싶었지만 박 신부보다는 체격이 작았다. 윌리엄스 신부처럼 보였다. 두 사람의 모습이 별일 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준후는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쪽의 생각을 담아 보내려고 애를 썼으나 연희의 커다란 눈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계속 준후-목걸이를 바라보는 것이었지 만ᅳ쪽을 보고 있었다.
연희 누나! 나예요! 들려요? 느껴지나요?
준후는 안간힘을 다하여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듯 외쳤으나 연희에게는 준후가 애타게 찾는 마음의 소리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내 힘이 달리는구나. 아이구! 연희 누나가 아니라 윌리엄스 신부님이 만졌으면, 그분도 능력이 있는 분이니 의사를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연희 누나는 아무런 힘이 없으니……..?
돌연 연희의 얼굴이 휙 멀어지면서 준후의 눈에 보이는 영상 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아라가 몸을 트는 바람에 목걸이가 흔들 렸던 모양이다.
‘가만히 좀 있어. 아이구!’
준후는 답답해서 화난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윽고 부적 의 기운들이 꺼져 가는 듯한 느낌이 왔고 준후도 기력이 빠져서 더 이상 힘을 쓰기 힘들었다. 할 수 없이 준후는 푸우 하고 긴 한 숨을 내쉬면서 눈을 떴다. 준후가 눈을 뜨는 것을 보고는 승희가 준후에게 물었다.
“준후야, 어떻게 된 거야? 괜찮아? 응?”
“보이긴 보였는데 아직은 제가 힘이 달리네요.”
“그래? 다들 무사하니, 응?”
“연희 누나하고 윌리엄스 신부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별일은 없는 것 같아 보였어요.”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니. 응?”
“글쎄요. 너무 염려 마세요. 보는 데 성공하고 나니 자신이 생 기네요. 몇 번 더 해 보면 이쪽의 소식도 알릴 수 있을 거고, 최소 한 그쪽 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승희는 그 말을 듣자 반가워서 다시 해 보라는 말을 하려다가 준후의 얼굴이 몹시 피곤해 보여 그 말을 꿀꺽 삼켰다.
“피곤해 보이네. 힘 많이 들었지?”
“괜찮아요.”
“아냐, 피곤해 보이는걸? 에구! 내가 이런 꼴만 되지 않았어”
“누나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흠…………… 일단 좀 쉬렴.”
“그럴까요?”
“그래, 염려 말고 쉬어. 잠을 자도 좋고…….”
승희는 몇 마디 말을 중얼대면서 마른 풀잎을 끌어모아 편히 쉬게 해 주려고 했으나, 어느새 준후는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승희는 마음도 아프고 지금 처한 상황이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준후를 끌어다가 눕혀 주 었다. 준후는 탈진했는지 쌔근쌔근 곤하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수선스러운 소리에 박 신부와 현암, 최 교수 는 숨을 죽였다. 처음에는 정비원이나 수리공 들이 무언가를 하 는 줄 알았으나, 최 교수가 가만히 들어 보니 사정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신부님! 현암 씨!”
최 교수가 조그만 소리로 두 사람을 다급하게 부르자 최 교수 와 가까이에 있던 현암이 먼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세요?”
“밖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요.”
“무슨 말씀이지요?”
“누군가가 정비원들을 모두 밖으로 나가라고 하고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일까요?”
현암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최 교수의 말을 듣고는 부쩍 의아 심이 들어 신경을 집중하여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현암의 귀에는 말소리 말고 다른 소리도 잡혔다. 저벅저벅 하는 무거운 발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쇳소리같이 좌락좌락 하는 소리…………. 그것은 일반 정비원들이 신는 구두나 운동화에서 나는 발소리가 아니었다. 군화에서 나는 소리였다.
현암은 긴장하여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 소리들 외에 철컥거리는 쇳소리도 분명히 들렸다. 그것도 사방에서…………. 총 을 장전하는 노리쇠 소리가 분명했다.
“신부님! 교수님! 급합니다. 군인들이 몰려온 것 같아요!”
“뭐라구?”
박 신부와 최 교수가 놀라는 사이 정비원들은 밖으로 빠져나 간 것 같았고, 예의 그 무거운 발소리가 격납고 내부에 가득 찼 다.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최 교수가 대경실색을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숨죽이듯 말했다.
“샅샅이 뒤지랍니다! 틀렸어요!”
현암은 숨을 죽이고 긴장한 채 계속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 이고 있었으나 머릿속은 다른 생각이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절체절명의 위기나 다름없었다. 무장한 수십 명의 군인 이라니! 그 숫자가 늘어나는지 군화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고, 여기저기를 마구 뒤지는 듯 물건들이 뒤집어지는 소리와 사람들 이 외치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이거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고 말았군. 어떻게 한다지? 아멘.”
박신부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도망쳐야 해요. 저들이 화물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우리는 끝장입니다.”
현암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화물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치면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틈 사이로 보인 광경은 상상 밖이었다. 현암의 눈에 보인 광경은 군인들 모습 대신 비행기의 화물칸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는 것이었다.
“앗! 비행기의 화물칸 문이 닫혀요! 어떻게 된 거죠?”
최 교수가 그 말을 듣고 놀란 듯이 말했다.
“비행기를 이륙시키려는 것이 아닐까요?”
박신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을 겁니다. 왜 하필 수색을 하는 중에 비행기를 이 륙시키려 하겠습니까? 내부가 번잡하여 숨을 곳이 많아질까 봐 여기저기를 막아 놓는 것일 겁니다.”
그러는 사이 화물칸의 문이 굳게 닫혔다.
“문이 닫혔습니다!”
현암은 말을 마치고 곧 화물 상자의 뚜껑을 열어 버렸다. 그리 고 비교적 맑은 공기를-화물칸도 그다지 공기가 맑은 것은 아 니었지만 화물 상자 안의 공기보다는 나았다 들이마시고는 몸 을 일으켜 세운 다음 월향검을 빼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화물 상자에서 나왔으나 너무 긴 시간 동안 웅크리고 있었던 탓에 오 금이 저려 한동안 몸을 잘 움직일 수 없었다. 특히 최 교수가 심 했다. 한편 월향검을 빼 든 현암을 보고 박 신부가 말했다.
“어쩌려는 건가?”
“비행기의 반대편을 부수고 나가는 겁니다. 비행기의 벽쯤, 월향으로 그으면 간단히 도려낼 수 있어요.”
박신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비행기의 주변이라고 감시하지 않으란 법은 없네. 벽이 도려내어지는 것이 발견된다면 그 앞에서 지키고 있다가 자네가 나가는 순간에 총을 쏠지도 모르네. 그러면 어쩌려고 그 러나!”
현암도 그 말을 듣고는 주춤했다. 박 신부의 말이 옳았다. 총 을 쏘아 대면 자신뿐 아니라 그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현 암은 답답했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끙 하는 신음 소리가 흘 러나왔다. 그러자 박 신부가 고개를 끄덕이며 현암에게 손짓을 했다.
“잠깐만! 내게 생각이 있네.”
백호는 헬기 안에서 두 명의 중국 공안 요원의 감시를 받으며 불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도구르는 박 신부와 현암을 잡았다 고 믿고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하기 위해 백호를 이곳에 억류시 켜 두고 나가 버렸다. 물론 그들도 한국의 외교관 패스를 가지고 있는 백호에게 수갑을 채운다거나 감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의 사태가 생기면 꼼짝 못하게 할 것임은 분명했다.
어느새 무한 공항 주변을 둘러 싼 병력들은 점점 늘어나 개미 떼처럼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큰일이군. 그들이 여기에 숨어 있다면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빠져나가기 힘들 텐데………….
백호는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의 처지가 답답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것을 본 공안 요원은 몸을 흠칫하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중국의 공안요원도 대단히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엄청난 능력에 혼나서 그런가? 그래서 나도 같은 사람 으로 보이는 걸까? 왜 이리 긴장하는 거지?’
백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키고 있는 두 명의 공안 요원은 무 장을 하고 있는데다 자신은 무기까지 압수당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공안 요원들을 어찌어찌 해서 때려눕힌다 하더 라도 헬기의 문은 밖에서 잠겨 나갈 방법도 없었다. 병력을 수송 하는 데 사용하는 중형 헬기여서 창문도 작고 문을 여는 것도 쉬 워 보이지 않았다.
백호가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숙이는데 발밑에 도구르가 버 리고 간 목도 청홍검이 들어 있는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비행기는 격납고 밖으로 빼라! 그리고 각 격납고들을 샅샅이 뒤져!”
도구르는 만면에 여유 있는 미소를 머금고 병력들을 지휘했다. 이미 밖에는 군인들과 공안 요원들이 공항을 한 겹 포위하고 있었고, 공항 내부의 수색은 공항 요원들의 도움으로 완료되었 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남은 것은 몇 곳의 격납고들뿐이었으니 더 이상 그들이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라고 도구르는 판 단했다. 격납고 안에는 비행기가 몇 대씩이나 있어서 수색하는 데 애로가 많이 따를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숨을 곳이 많은 구석으로 병력을 보내면 막강한 초능력을 가진 그들에게 인질로 잡힐 공산이 컸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 가장 확실한 것이라고, 특히 지금의 이런 자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자기가 짜낸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도 구르는 믿었다. 어차피 집중 사격을 견뎌 낼 수는 없을 테니 격 납고 내부를 치우고 무장 병력을 일렬횡대로 정렬하여 한 발자 국씩 훑고 지나가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가장 단순하지만 정 말로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비행기가 문제 되 기 때문에 밖으로 빼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물론 비행기 안에 퇴마사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밖으로 비행기를 한 대씩 빼면서 수십 명의 병력으로 비행기의 주위를 감시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에 중국군의 담당자 웨이가 달려와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저 비행기가 이상합니다! 벽이 조금씩 도려내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행기 벽을요?”
“가스절단기는 아닙니다만, 비행기 벽에 흠집이 나고 있습니다.”
“비행기의 어느 쪽입니까?”
“날개 밑의 측면입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 그리로 탈출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리로 병력을 집중시키시오.”
도구르는 즉각 그쪽으로 달려가서 능숙한 솜씨로 병력을 분산 시키고 사격 대형으로 갖춰 놓았다. 병력을 세 무리로 분산시킨 것은 폭발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웨이의 보고대로 비행기의 날개 밑 부분이 보일 듯 말듯 하게 조금씩 도려내어지고 있었다. 도구르가 회심의 미소를 지 으며 중얼거렸다.
“대단한 놈들이군. 비행기 벽을 도려내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 다니…………. 그러나 그런 정도의 수작이 내게 통할 것으로 믿었 나?”
“어쩌면 문으로 빠져나갈지도 모릅니다.”
“비행기의 비상구 부분에도 저격수를 배치했소. 열리기만 하 면 머리가 날아갈 거요. 조용히 사태를 지켜봅시다. 놈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으니 말이오.”
그런데 웨이가 딴소리를 했다. 도구르는 웨이의 말이 영 못마땅했다.
“그런데 그들을 꼭 사살해야 합니까? 생포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모르는 소리 마시오. 그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오. 위험인물 이란 말이오.”
“그러나 상부에선 가능하면 사살하지 말고 생포하라는 명령입 니다.”
“생포? 그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당신네 나라 공안 지하실에 가둬 두어도 흔적도 없이 도망치는 자들이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생포한다고?”
“상부의 명령입니다!”
“무슨 말이오? 이곳의 지휘권은 나에게 있소!”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알아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람이라구? 그들은 무서운 존재요. 전염병 세균과도 같소!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도구르는 위압적으로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웨이의 눈치가 이 상했다. 중국 정부에서는 저자들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생포하여 그 힘을 알아내고 싶겠지. 그러나 안 돼! 그들은 없어져야 될 존재야.’
만약의 경우에 웨이 휘하의 중국군들이 그들을 사살하지 않고 생포하려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직접 사살하기로 도구르는 마음을 먹었다.
비행기는 트레일러에 끌려서 나간 것이므로 잡힐 인질도 없었 다. 이렇게 된 바에야 비행기를 폭파해 버리는 것이 어떨까 하고 도구르는 생각했지만, 웨이를 비롯한 중국군들의 눈치가 수상해 서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총구들이 그곳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 지 비행기의 날개 밑 부분은 이제 서서히 사람 하나가 빠져나갈 만한 정도의 크기로 둥글게 도려내어졌다. 시간이 꽤 걸리자 사 격 자세를 취한 군인들은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며 긴장된 표 정으로 총구를 겨냥한 채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도구르도 입 술을 살짝 혀끝으로 핥으면서 오른손을 서서히 어깨 높이로 올 렸다. 손을 내리는 것이 일제 사격의 신호였다.
둥글게 도려내어진 비행기 동체의 알루미늄 판이 철컹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도구르는 손을 든 채 간발의 오차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너희는 완전히 포위…………”
그러나 도구르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밀어내 어 땅에 떨어진 알루미늄 판의 저편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대신 은빛 물체 하나가 강렬한 빛을 뿜으며 쏜살같이 사람들 쪽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반사적으로 도구르와 웨이는 몸을 움츠렸 고, 도구르의 손이 내려지자 군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발포를 시 작했다. 삽시간에 비행기의 날개 밑은 벌집이 되었으나, 은빛 물 체는 아랑곳없이 호선을 그리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질렀다.
꺄아악!
여자의 날카로운 귀곡성이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울리자 사 격을 하던 군인들은 어깨를 흠칫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사격을 중 지했다. 그 순간 월향은 무서운 속도로 중국 군인들의 바로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얼마나 빠른 속도였는지 월향이 지나간 다음, 겨냥을 하고 있던 중국 군인들의 자동 소총 앞부분이 와르르 떨 어져 나갔다. 월향이 품고 있는 검기에 의해 군인들은 미처 느끼 지도 못할 정도로 유연하게 자동 소총의 앞부분이 두부처럼 잘 려 나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긴 몇몇 군인의 총에서 총신의 강선(線)을 거치지 않은 총알들이 사방 으로 튀며 날았고, 가스관이 파괴된 총들은 연기를 뿜어댔다. 몇몇 총알들이 어지럽게 사방으로 핑핑 소리를 내며 튀어 날아 가자 총을 들고 있던 군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총을 버렸고, 그중 한 군인의 총이 폭발해 근처의 군인들을 크게 다치게 했다.
“뭐, 뭐냐! 저건!”
도구르가 소리를 지르는 사이 월향은 제비처럼 허공을 날아 옆쪽의 다른 군인들에게도 날아들었다. 그래도 명색이 군인이라 그들은 당황하면서도 날아드는 월향검을 향해 소총을 쏘아댔으 나 월향을 맞힐 수는 없었다. 날아가는 비행기조차 맞히기 어려 운데 하물며 손가락보다 조금 더 큰 월향검이 맞지 않는 것은 당 연한 일이었다.
또다시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 사이, 다른 대열의 군인들 총이 반 토막 나 버렸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황당한 경우를 당 한 군인들은 총을 내던졌으나 몇몇은 이를 갈면서 거의 마구잡 이로 총을 쏘아 대기도 했다. 비행기의 비상구를 경계하고 있던 다른 군인들조차 공포에 사로잡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월향을 향해 총을 쏘아 대자 사방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도구르는 군인들을 진정시키려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지만 그 목소리는 총소리에 묻혀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도 구르의 말을 통역하여 전달해 주어야 할 웨이가 저만치서 우왕 좌왕하는 군인들 틈에 파묻혀 있어서 도구르는 명령조차 제대로 내릴 수가 없었다.
“그만! 사격 중지! 저런 장난감을 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사 격 중지!”
군인들을 제지하던 도구르의 눈에 비행기의 앞부분이 살짝 흔 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몇 개의 파편 같은 것들이 튀어 나왔다. 총성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불꽃 같은 것도 비치지 않았지만 비행기의 앞부분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아차! 놈들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고 반대쪽으로 도망칠 작정이구나!’
도구르는 이를 갈면서 아직도 종횡무진으로 날아다니는 월향 검을 바라보았다. 그 정체 모를 장난감 같은 물건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제대로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저 괴물은 그사이 근방에 있던 이십여 명의 병사들의 총을 모두 두 토막 내 버렸 고, 이번에는 군인들의 허리띠니 모자를 베고 지나가는 등 완전 히 공포 상태를 만들고 있었다.
도구르는 웨이가 두 손을 머리에 올린 채 땅에 납작하게 엎드 려 있는 모습을 보고는 이를 갈았다. 외곽을 경비해야 할 병력들 마저 총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포위망이 풀리 고 만에 하나 차량이 탈취당할 경우 저들이 충분히 도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병신들아! 아! 저쪽으로 도망간단 말이다!”
도구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악을 써 댔으나 아무도 듣 지 않았다. 도리어 휙 하고 지나가는 서슬 퍼런 월향검에 옷깃만 을 찢겼을 뿐이었다. 그제야 도구르도 뜨끔해졌다. 보니 그 물체 는 거의 군인들을 가지고 놀 듯 몸에는 상처를 주지 않고 사방을 누비며 날아다녔고, 군인들은 몰이꾼이 모는 양 떼처럼 한편으로 쫓겨서 허둥지둥 도망치고 있었다.
‘도대체 저 물건은 뭐지? 최신 무기인가? 지능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군! 빌어먹을 물건이다.
도구르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군인들이 사방에서 우 왕좌왕 달려오거나 혹은 도망치는 중이어서 처음엔 자세히 관찰 할 경황이 없었으나, 분명 그 빌어먹을 물건은 군인들을 한쪽 방 향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놈들은 반대편 쪽으로 도주 할 공산이 컸다. 도구르의 눈이 점점 커졌다. 도구르는 앞을 가 로막기 위해 군인들이 몰려가는 반대편 방향으로 가로질러 비행 기 앞부분으로 향했다. 과연 뻥 뚫린 비행기 앞부분에서 한 남자 는 이미 뛰어내렸고 다른 자가 한 사람을 등에 업은 채 뛰어내리 는 참이었다. 도구르는 권총을 꺼내어 조준을 하였다. 그러나 저 쪽에서 그 빛나는 물체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얼른 총을 감추 었다. 도구르는 그들의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그 물체가 꺄아 악 하는 소리를 내면서 코앞을 위협하듯 휙 스쳐가자 소름이 돋 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군인들과 반대쪽이 아니라 군인들과 같은 방향으로 섞여서 뛰어갔고, 포 위망 저쪽에서 달려온 군인들은 그들이 군인들과 뒤섞여 달리자 차마 총을 쏘지도 못하고 앞을 막아서려고만 할 뿐이었다. 그 빛 나는 물체는 다시 허공을 제비처럼 날아 덩치 큰 남자를 등에 업 고 뛰던 남자의 손에 척 하고 멋지게 날아가 잡혔다. 그것을 보고 도구르가 악을 써댔다.
“쏴! 무조건 쏘란 말야! 놓치면 안 돼!”
군인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그들의 앞을 막아서 는데도 그 세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달리는 것이었 다. 등에 사람을 업고 달리던 남자는 그 와중에도 자기 옆을 달 려가던 군인 한 명을 오른손으로 잡아 장난감처럼 들어 앞을 가 렸다. 그 광경을 보고 도구르를 비롯한 모두가 놀라서 어안이 벙 벙해졌다. 도대체 자기보다도 큰 사람을 업고 달리면서 또 다른 남자를 한 손으로 장난감처럼 들어 앞을 가린다는 것은 인간으 로서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괴력이었다. 몇몇 군인들이 총을 들었 으나 차마 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웨이가 도구르의 옆으로 달려왔다.
“저건 뭡니까? 저자들이 지닌 무기는 뭡니까? 그리고 저놈은 어떻게 저런..”
“내 말하지 않았소! 무조건 발포 명령을 내려요!”
“우리 편 한 사람이 잡혀 있습니다!”
“상관없소! 쏘시오!”
“내 부하요!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워요!”
도구르는 웨이가 노골적으로 저항하자 권총을 꺼내려 했지만 웨이가 먼저 권총을 꺼내며 의미 있는 듯한 눈으로 도구르를 노려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망설이는 군인들 사이를 달려서 저만치에 차들을 세워 둔 공항의 주차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왜 그리 사살을 좋아하시오? 생포합시다!”
“이런 빌어먹을! 생포할 수 없을 거요!”
“몸으로 밀어붙입시다! 저래 봐야 독 안에 든 쥐요!”
웨이가 도구르에게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군인들에게 소리치자 이십여 명의 군인들이 웅성거리며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을 점거 한 채 달려오는 남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등에 업힌 남자의 몸이 연녹색의 빛으로 감싸이더니 푸른 발광체가 우르르 우박처 럼 군인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군인들은 피할 사이도 없이 구체 들을 얻어맞고는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그것은 본 웨 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건 뭐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쏴요, 쏴! 어서 쏴! 죽여야 햇!” 도구르는 웨이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 총을 뽑아 들었다.
그 빛나는 구체를 얻어맞지 않은 여섯 명의 군인들이 길목을 막고 서 있는데도 달려가던 남자는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몸을 부딪쳐 가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군인의 몸을 집 어 던졌다. 그러자 비명 소리와 동시에 퍼퍽 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지키고 있던 군인들 중 세 명이 집어 던진 군인과 부딪혀서 저만치로 밀려서 나가떨어졌고, 달려가던 남자가 휘두른 팔에 다른 두 명의 군인이 얻어맞고는 이삼 미터나 공중에 떠올 랐다가 처박혀 버렸다. 나머지 한 명은 등에 업힌 남자의 이상한 빛에 밀려서 저만치로 튕겨나가 버렸다.
자기 발로 달리는 두 사람의 주위는 업혀 있는 남자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이상한 빛에 둥글게 싸여 있었는데, 웨이는 그 빛이 그냥 빛이 아니라 무슨 보호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외계인? 초과학적인 비밀 무기 를 지닌 자들’
웨이는 머릿속이 윙윙거리는 것 같아서 순간적으로 아무런 판 단도 내릴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거의 주차장에 도달했고 외곽 의 병력이 그곳까지 도착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만큼 양쪽의 거리가 꽤 멀어 보였다. 도구르는 웨이가 넋이 나간 듯하자 인상 을 쓰면서 권총을 들어 도망치는 자들을 겨냥하고 연속으로 총 을 쏘아 탄창을 모두 비워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주차장 안으로 뛰어들어 차 한 대에 올라타려 했다.
“제길! 이젠 인질도 없다! 쏴! 명령을 내리라구!”
도구르는 웨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웨이 는 도구르의 눈에 살기가 어린 것을 보고는 정신이 확 들었다. 도구르가 인터폴의 요원이긴 하지만 프랑스 경찰의 일개 경위일 뿐인데 어째서 저들에게 이렇게 증오심을 품는 것인지 의아했다. 더구나 저들은 신기한 물건들을 지니고 막강한 힘을 소유하 기는 했지만 들은 것만큼 위험한 것 같지 않았다. 아까의 그 무 시무시한 은빛 무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부하들을 반 이 상 죽일 수 있을 것이었다. 총을 반으로 잘라 버릴 정도니 목을 베는 게 더 수월할 터이고, 그러는 편이 추격을 따돌리기도 쉬웠 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인질도 끝까지 잡 아가지 않고 도중에 내버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웨이에게도 그들을 잡아야 할 임무가 있었다. 이제 보 통의 방법으로 저들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정신을 차렸다. 웨이 는 권총을 주머니에 꽂고 명령을 내렸다. 가까이 있는 부하들에 게 아무 차나 빨리 잡아타고 그들의 뒤를 쫓으라고 하는 한편, 무전기를 꺼내어 같은 명령을 반복해서 내렸다.
도구르가 성난 목소리로 웨이에게 말했다.
“우리가 타고 온 헬기를 어서 부르시오! 직접 쫓아야겠소. 그 리고 중화기, 로켓포를 속히 준비해 주시오! 내 손으로 저들을 날려 버리겠소!”
“중, 중화기라고요?”
도구르는 무서운 인상을 지어 보였다.
“이번에 저들을 놓치면 당신도 각오해야 할 거요!”
마구잡이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현암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박 신부의 허허실실 작전은 요행히도 적중했다. 박신 부는 현암으로 하여금 월향검을 조종하여 비행기의 한쪽을 천천 히 잘라내어 시선을 끈 다음, 월향검으로 주변이 혼돈스러워지 면 반대쪽을 뚫고 나가자고 한 것이다. 단 비행기의 벽은 월향검 없이는 부수기가 힘이 드니, 박 신부가 공안청의 벽을 부순 수법 을 썼다.
현암이 보니 그 방법은 간단했다. 박 신부는 자신의 손으로 그 짓을 두 번 다시 하기 싫다면서 현암에게 부정한 문장을 비행기 의 벽에 그리게 하였는데, 거꾸로 선 십자 모양과 여섯 뿔의 별 과 동그라미를 조합한 모양이었다. 현암은 궁금한 생각이 들어 서 이것이 무슨 문장이냐고 물었지만 박 신부는 대답해 주지 않 았다.
부정한 문장을 벽에 그린 다음 박 신부가 기도성을 외우면서 일 초가량 정신을 집중하자 알 수 없는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더 니 그 벽은 글자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현암은 박 신부의 이상한 힘에 경외심을 느끼면서 다리가 불 편한 박 신부를 들쳐 업었다. 박 신부는 그러면 더 위험하다고 사양했지만 현암은 믿는 것이 있었다. 다행히 아까 답답한 화물 상자 안에 갇혀 있는 동안 조금 운기행공을 했더니 화씨 노인의 치료가 효력을 발휘했는지 예전보다는 공력 순환이 자유로워졌다. 그 덕분에 힘이 살아난 것이다. 박 신부가 오라의 구체로 엄호하고 현암이 월향검과 기공력으로 밀어붙인 덕분에 아슬아슬 한 순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박 신부 일행이 탄 차는 지프차와 비슷한 무개 차량이었다. 현 암이 운전하면서 힐끗 백미러를 보니 뒤에서는 차 세 대가 맹렬 한 속도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상황에 비하면 이 정도는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암은 운전석 옆자 리에 앉은 박 신부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신부님, 괜찮으세요?”
“괜찮네. 수고했네, 현암 군. 주께서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 신 모양일세. 아멘.”
현암이 씩 웃고 고개를 조금 더 돌려 보니 최 교수는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거의 넋이 나가 버린 얼굴로 숨을 헐 떡이고 있었다. 아까의 일들이 하나도 뇌리에 남아 있지 않고 그 •냥 정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현암은 뒤에서 따라오는 차들이 속 력을 내자 자신도 한층 더 세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러는 중에 박 신부가 눈을 감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으나, 현암은 미처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는 못했다.
아까부터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백호는 겉으로 내색하 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초조하여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총까지 쏘는 것으로 보아 이 공항에 박 신부와 현암, 최 교수가 숨어 있던 것이 분명했다. 설마설마 했지만 백호도 마음속으로는 최악 의 사태를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백호는 헬기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위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당히 다급한 이륙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일까?’
백호는 헬기에 나 있는 작은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백 호가 밖을 내다보자 눈을 떼지 않고 있던 공안 요원들이 무어라 하려 했지만, 백호가 위압적인 눈길로 보기만 하는 것뿐이라고 제스처를 보낸 뒤 계속 창밖을 주시하자, 공안 요원들도 특별히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헬기가 그렇게 높게 뜬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공항은 평평한 곳이라 약간의 높이에서도 주변의 광경이 확 눈에 들어왔다. 저 만치 공터 쪽에서 수많은 차량들이 어지럽게 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수많은 군인들이 바글거리면서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도……………. 일단의 군인들이 저렇게 허둥대며 달려가 는 것으로 보아 박 신부와 현암이 잡힌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백 호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는데 앞의 조종석의 무전기에서 도구 르가 외치는 소리가 뒤에 있는 백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서 헬기를 격납고 부근에 대라는 소리였다. 그에 덧붙여서 병력들 에게 그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차량으로 포위하라는 소리도 들렸다. 백호가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니 정말 한 대의 차량을 다 른 차량들이 에워싸고 이리저리 몰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 신 부와 현암이 도망쳐서 차를 빼앗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워낙 군인들의 수가 많아서 몰리는 모양이었다. 백호가 안타까워서 한숨을 내쉬는데 마음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호 씨, 들리시오?
백호는 깜짝 놀라서 몸을 튕기듯 일으켰다가 헬기의 벽에 부 착된 선반에 머리를 호되게 부딪혔다. 감시하고 있던 중국 공안 요원들이 의아한 듯 백호를 쳐다보았다. 백호는 머리가 아파 인 상을 찡그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자신에게 말을 건 사람은 없었다.
‘뭐지?’
백호 씨, 놀라지 마시오. 박 신부요.
백호는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박 신부님이라고 외치려다 가 자기 손으로 입을 헉 소리가 나게 틀어막았다. 옆의 공안 요 원은 그런 백호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면서 우습게도 멀미용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백호는 얼결에 봉투를 받아들고 몸을 뒤 로 돌렸다. 물론 입은 계속 틀어막은 채로………………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박 신부님의 목소리가…………… 내가 미쳤나?’
백호 씨,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상황이 급해서 말을 건 겁니다. 말을 하실 필요는 없고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세요. 단 제게 말한다고 집중하시면서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제겐 승희 같은 능력은 없어요.
마음으로 전달되는 대화라 어색했지만, 보통의 말로 하는 것 보다는 훨씬 빠르게 서로의 생각이 전달되는 것이 느껴졌다. 말 로 하려면 빨라도 십 초는 걸렸을 이야기였지만 일 초도 안 되는 사이에 박 신부의 생각이 휙 하고 전달되어 들어왔다. 그러나 백 호는 어떻게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에게까지 이런 식으로 대 화를 걸 수 있을까 싶어 놀랐다.
박신부님! 이, 이건…………… 지금 제게 하는 것이 텔레파시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합시다. 백호 씨가 부근에 있는 것을 우연히 느끼게 되어서 도움을 청하는 거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저도 억류당한 신세입니다. 도구르의 헬기 안에 있지요.
헬기? 아! 지금 저만치서 날고 있는 중형 헬기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에선 신부님이 타고 계신 차가 보입니다.
상황이 급하군요. 총을 마구 쏘지는 않지만,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사격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는 박 신부의 말에 백호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들을 생포하여 힘을 이용해 보려는 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도구르가 지금은 분명 우세를 점하고 있 지만 그에게도 허점이 생길지 몰랐다.
박 신부는 그런 백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백호에게 생각을 전달해 왔다.
헬기를 탈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안 되겠소?
아! 이 헬기는 도구르가 타고 온 것입니다. 지금 격납고의 가장자리 에 대려고 하는 중입니다! 무전기로 그 소리를 들었어요!
아하! 그렇군요. 고맙소!
박신부가 전해 오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백호는 속으로 무 척 놀란 상태이기는 했지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안정시키면 서 두 명의 공안 요원을 싸늘한 눈초리로 쳐다보다가 시선을 밑 으로 옮겼다. 바닥에는 청홍검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항이라고는 하지만, 비행기가 이착륙하 는 곳이라 실제 넓이는 상당했다. 차로 달려도 공항의 가장자리 에 다다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더군다나 사방을 에워싸 고 있던 군인들이 이제는 목표를 발견하고 개미 떼처럼 달려드 는 바람에 일직선으로 달릴 수가 없어서 더더욱 힘들었다. 그나 마 다행인 것은 아직까지 그들이 직접적인 집중 사격을 하지 않 았다는 점이었다. 가끔 위협사격을 하면서 그들을 몰아붙이려고 하는듯해서 당장 눈에 보이는 위험은 없었다.
그러나 현암은 죽을 맛이었다. 수십 대의 차량이 사냥감을 몰 듯이 그들을 휩쓸어 이리저리 먼지를 일으키며 피해 다니기에 급급했다. 벌써 차를 탄 지 사오 분이 지났는데도 공항 밖으로 빠져나가기는커녕 쫓겨 다니는 중이었고, 현암 일행을 쫓는 차 량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서 더 이상 도망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러는 중 눈을 감고 흔들리는 차의 문 위 손잡이를 꼭 잡고 앉아 있던 박 신부가 현암에게 느닷없이 말했다.
“격납고 쪽으로 가세. 그곳에 헬기가 내릴 걸세.”
현암은 앞을 막아선 차를 피해 핸들을 급히 돌리느라 박 신부의 말을 듣고서도 무슨 말인지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네? 격납고요?”
“그쪽에 내릴 헬기 안에 백호 씨가 있네.”
백호라는 말에 현암은 반가운 생각이 들었지만 한 가닥 의심도 같이 들었다.
“그래요? 그러면 우릴 구하러 온 겁니까?”
“지금처럼 해서는 잡히고 말겠네. 어서 가세!”
현암은 박 신부가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의아했지만 그런 것에 대해 일일이 물어볼 만한 시간은 없었다. 얼른 다른 차 한 대를 피해 돌면서 잠깐 격납고 방향을 향해 눈을 돌렸다. 과연 꽤 커다란 헬기 한 대가 그쪽에 내리려는 듯, 공중에서 맴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꽉 잡으세요!”
현암은 소리치듯 말하자마자 냅다 핸들을 돌리면서 액셀러레 이터를 있는대로 밟았다. 순간 차는 요동을 치면서 뒤집어질 듯 휘청하고 기울어지는 듯하더니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방향을 바 꾸었다. 앞을 막아서던 트럭 한 대가 다른 지프와 박치기를 하 고 방향이 뒤틀어지면서 멈추어 섰고, 현암의 차는 그대로 차들 의 포위망을 뚫고 일직선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몇몇 군인들 이 앞을 막아서려다가 워낙 무섭게 달려오는 차의 기세에 눌려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현암은 힘껏 클랙슨을 울렸 다. 행여 사람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도구르와 웨이는 헬기의 줄사다리를 잡고 막 위로 올라 가려고 하는 참에 난데없이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들려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한 대의 차가 마치 헬기와 충돌이라도 하 려는 듯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웨이 는 놀라서 줄사다리를 잡았던 손을 놓고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도구르는 그 모습을 보고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피하기는 커녕 도리어 차의 앞을 막아서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웨이가 소리쳤다.
“왜 안 피합니까?”
도구르는 총을 꺼내어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 자세로 달려드는 차를 겨누면서 웨이에게 들으라는 듯이 외쳤다.
“저자들은 사람을 죽이지 못하오! 절대 나를 치지 않을 것이오!”
같은 순간, 현암도 도구르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광경을 보았다. 현암은 앞을 막고 서 있는 저자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자신이 그토록 속력을 내어 몰아가는 차의 앞을 막아 서는 것을 보고는 무척 당황했다. 저 사람이 지금 제정신이란 말 인가!
“비켜!”
들리지도 않을 것이지만 현암은 안타까워서 소리를 버럭 질렀 다. 그러나 도구르는 듣지도 못했고, 들었다고 비켜날 사람도 아 니었다. 도구르는 권총을 겨냥하여 차의 운전석을 겨누었다. 곧 이어 두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러나 한 방은 백미러에 맞았고 한방은 차체 윗부분에 맞아 유리에 금이 갔을 뿐이었다. 최후의 순간이라고 느낄 때까지도 현암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 나 자신의 앞을 막고 선 저자는 마치 현암이 사람을 깔아뭉개고 지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태연하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불현듯 그냥 밀고 나가면 알아서 피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그런 생각은 금방 지워 버렸다. 차가 도 구르를 칠 것 같자 박 신부도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현암군!”
현암은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자 급히 핸들을 꺾었고 차는 굉음과 함께 방향을 돌리려다가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벌렁 뒤 집힌 채로 미끄러져 도구르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서는 격납고에 부딪혀 정지해 버렸다. 도구르는 권총을 집어넣고는 웨이에게 손짓을 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로켓포! 로켓포를 가져오시오!”
웨이가 도구르의 말을 되받아쳤다.
“당신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웨이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구르는 저 자들이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무의식중에 말했다. 자신 의 눈으로 본 바로도 그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 차는 얼마든 지 도구를 치어 버리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추격당 하는 상황에서 저런 무모한 급회전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았다. 도구르가 총을 쏘기는 했지만 운전하던 자가 총을 맞거나 해서 정지한 것도 아니었다. 웨이가 본 바로 저들은 ‘도구르를 해치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처럼 보였다. 그 러나 도구르는 저들을 죽이기 위하여, 차가 전복되어서 살아 있 을지 죽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그들을 확실하게 날려 버리 기 위해 로켓포를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웨이도 임무를 위해 총을 쏜 적도 있었고 사람이 죽는 광경도 여러 번 본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상황만은 이해가 되 지 않았다. 왜 도구르는 저들을 이토록 집요하게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왜 살려서 잡으려고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없 애려고 발광하는 것일까? 물론 웨이가 이런 문제들로 갈등하고 해답을 찾아내기에는 방금 벌어진 일들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웨이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도구르의 행동 이 무엇인가 숨겨진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 이었다. 글자 그대로 저들이 도구르가 말하는 것처럼 위험천만 한 악인들이라면 도구르를 치지 않기 위해 무모하게 방향을 틀 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반대로 도구르는 저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몸을 방패막이로 저들을 함정에 빠 뜨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상황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웨이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사이에도 도구르는 웨이를 보고 성질을 부리다가 옆에 있던 병 사의 기관단총을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웨이가 냅 다 소리를 질렀다.
“이봐! 군인이 총을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지?”
웨이가 질타하자 그 군인은 얼결에 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서 도구르를 밀쳐 냈고, 도구르는 비틀거리다가 웨이를 향해 눈 을 부릅떴다.
“무엇하자는 거요!”
웨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구르를 노려보았다. 저자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국제경찰 기구에서 파견 나와 범인을 체포하러 온 사람이 어떻게 저따위로 행동할 수 있단 말인가! 웨이는 그런 도구르가 개인적인 복수심에 가득 찬 영화 속의 악당 같아 보일 뿐이었다.
웨이는 속으로 번민했다. 자신은 명령받은 대로 협조만 해도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에 그냥 넘어가서 저들을 죽이 게 놓아둔다면 자신은 평생을 두고 후회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상부에서 당신이 저들을 체포하라는 데 협조하라는 명 령을 받았지, 살인을 방조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소.”
“살인? 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오!”
“지금 당신의 지휘는 이유 없는 학살을 조장하는 행위요. 저들 은 무력화되었소.’
“무력화되었다고? 몇 번이나 당했으면서도 당신은 아직도 모 르겠소? 지금 저 정도로 저들이 무력화되었을 것 같소?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 겪어 보고도 몰라서 하는 소리요?”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 오늘 이 자리에서 직접 겪어 보아서 잘 알 것 같소. 저들은 아무도 해치지 않았고 해치지 못하는 자들이 오. 당신도 그걸 직접 당신 입으로 시인하지 않았소?”
“뭐라구? 그럼 놓아주겠다는 말이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소? 다만 나는 상부의 명령대로 체포 에 협조할 뿐이오. 이유 없는 학살은 안 됩니다! 당신은 숨기는 것이 있소. 저들을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죠?”
“당신 미쳤군! 이 일은 중대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지도 모르 오! 쓸데없는 감상은 버리시오! 당신이 무슨 휴머니스트라도 된단 말이오?”
“휴머니스트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거듭 말하지만 상부의 명령에 복종할 뿐이오. 아시겠소?”
웨이는 말을 마치고는 주위를 둘러싼 병사들에게 싸늘한 눈짓 을 보냈다. 그러자 병사들은 도구를 둘러쌌고 그중 한 병사가 도구르의 총을 빼앗았다.
“뭐하는 짓이야! 감히 나를!”
도구르는 소리를 쳤지만 별수 없이 총을 빼앗기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웨이가 도구르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넘 어져 있는 차 쪽을 보고 손짓을 하자 병사들은 그 주위를 빽빽이 에워싸고 포위했다.
“아직 접근하지는 마라!”
명령을 내리고 웨이는 무전기를 달라고 해서 상부에 무전 연 락을 취했다. 사실 자신의 판단만으로 도구르를 억류한 것은 아 니었다. 방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그들을 죽이고 싶지 않은 마 음도 들었지만, 상부의 지시 내용을 놓쳐서도 안 되었다. 가급적 이면 그들을 생포하라는 은밀한 명령을 받아 놓고 있었던 것이 다. 지금 시끄럽게 불평만 해 대던 도구르를 멋지게 꼼짝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뒤가 켕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웨이는 상부에 지금의 상황을 보고하고 어떻 게 처리해야 하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정 사살해야 한다면 차가 뒤집어져서 구르는 순간, 박 신부는 오라 막을 펼쳐서 현 암과 최 교수를 감쌌다. 다행히 오라 막 덕분에 세 사람은 큰 충 격을 받지 않고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안전벨 트를 꼭 매 둔 덕분에 몸이 뒤집혀 거꾸로 매달린 상태였다.
세 사람은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암 은 차체가 뒤집혀진 충격으로 혹시나 차에 불이 붙지는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현암이 한숨을 내쉬고는 멋쩍 은 듯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칠 수는 없어서….”
“괜찮네. 현암군 잘했어!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사람을 치어 서는 안 되지.”
박신부는 별로 긴장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현암은 차 밖 의 정황에 귀를 기울이다가 말했다.
“헬기까지 갔어야 하는데 틀렸군요. 이젠 어떻게 하지요?”
“속단은 이르네. 백호 씨가 헬기 안에 있을 거야. 그건 그렇고 지금 밖으로 나가면 총을 쏘아 댈지도 모르는데…………..?”
박신부가 다소 우울한 어조로 말하자 현암은 입술을 깨물다 가아하는 탄성을 올렸다.
“신부님, 백호 씨와 의사소통이 되나요?”
“그렇네만…………….”
“그러면 헬기가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하십시오. 잘하면 그리로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인가요?”
“공력을 아껴 두었으니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도 힘을 빌려 주세요.”
헬기의 안에서 상황을 지켜본 백호는 속이 타들어 가고 있었 다. 백호도 도구르가 달려오는 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냥 콱 깔아뭉개라고 짧은 시 간이나마 수없이 기원했다. 그러나 역시 퇴마사는 퇴마사였다. 차가 뒤집혀서 처박히는 것을 보고서 백호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헬기는 계속 아래에서 지시하는 명령을 듣지 못해 위 의 상공에 떠 있는 참이었다. 조종사도 궁금했는지 주위를 조금 돌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헬기의 문은 줄사다리를 내 리려고 열어 놓은 상태여서 백호도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래에는 뒤집어진 차와 그 차를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병사 들의 모습이 보였다.
‘살아 있을까? 아니면 …………….’
백호가 걱정스러워하고 있는데 아까처럼 박 신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호 씨, 듣고 있나요?
아, 신부님! 무사하십니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소. 그러나 불안하여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군요.
다행입니다! 나오지 마세요. 병사들이 빽빽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헬기로 가려고 했는데 큰일이군요. 병사들은 무얼 하고 있지요? 주변을 에워싼 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백호는 마음속으로 생각을 전달하면서 좀 더 아래쪽을 자세히 보기 위하여 몸을 굽혀 내려다보았다. 무전기를 들고 떠들어 대 는 웨이의 모습과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듯한 도구르가 보 였다.
음? 중국인 지휘관은 무전으로 통화중입니다. 그런데 도구르가 이상 하군요.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백호가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착륙하려는 듯 헬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착륙할 모양인데요.
어디지요?
바로 부근입니다.
방향을 일러 주시겠소? 현암 군이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하는군요.
현암군이요?
어서요! 헬기가 가까운 곳에서 내린다면 가능성이 있대요. 정확한 방향을 알려 주시오. 나도 기운을 써야 하기 때문에…………….
말하는 사이에 헬기는 어느새 땅에 착륙했으나, 웨이는 아직 도 무전기에서 귀를 떼지 않고 있었다.
차가 넘어진 앞부분에서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구십도, 거리는 십 오 미터가량 됩니다. 지금 막 헬기가 땅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시려는 거죠?
몸을 피해 계십시오.
박 신부는 그 말만을 전달하고 나서 교신(?)을 끊었다. 백호는 도대체 현암과 박 신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하기만 했다.
웨이는 무전기를 내려놓으면서 씩 웃었다. 자신의 예상대로 상부에서는 저들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들은 군사적으 로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들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터폴 의 경위 도구르는 그것이 누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저토록 혈안 이 된 모양이라고 웨이는 짐작했다. 그들을 생포하기 일보 직전 이라고 보고하니 상부에서는 도구르를 억류한 일 따위는 문제 삼지 않는 것 같았다.
상부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웨이는 저들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저들이 반항하지 않기를 바랐다. 웨이는 확성기를 받아 들고 중국어로 외쳤다.
“영어나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대답하라! 너희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그러나 전복된 차 쪽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별반 움직 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웨이가 영어로 외쳤다.
“대답하라! 크게 다쳤나? 의사가 필요하다면 불러 주겠다! 그 러나 저항하지는 마라!”
웨이가 다시 소리치자 차 안쪽에서 누군가가 떨리는 듯한 목 소리를 쥐어짜듯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진 헬기 안 에 있던 백호도 헬기의 로터 소리가 잦아들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최 교수의 목소리였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다치기 싫다면……………. 지금 내가 대 신 말을 전해주는 것이지만……………. 그러니까……………”
방금 전에 보여 주었던 맹활약과는 달리 겁먹은 듯한 목소리 가 들려오자 웨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웃었다. 옆에서 도구 르는 애가 타는지 주먹을 거의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웨이는 보 라는 듯, 이런 자들이 당신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냐는 듯, 도구르를 슬쩍 보고는 소리쳤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인가?”
“아무도・・・・・・ 다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 그러니 되도록 멀리…………… 멀리 떨어져라!”
옆에 섰던 병사들조차도 말은 잘 못 알아들었겠지만 최 교수 의 겁먹은 듯한 소리를 듣고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웨이는 속으 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오늘은 희한한 일 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옆에 있던 도구르가 날카롭게 한마디 했다.
“속임수요! 우리를 방심시키려는 것이오.”
웨이는 도구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우리도 다치기는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투항하라! 절대 해 치지 않겠다. 폭발물을 가지고 있는가? 자폭할 셈인가?”
그러나 웨이는 저렇게 벌벌 떠는 목소리로 보아서 절대 자폭 같은 것을 할 리 없다고 믿었다.
“폭발물은 없・・・・・・ 없다. 그쪽이 다칠까 봐 그러는 것이다. 즉 각 주변에서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영어를 알아듣는 병사들 몇몇이 깔깔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리 기 시작했다. 웨이도 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서 크게 웃음소리 를 냈다.
“협박인가? 하하하. 이거 원!”
웨이가 채 웃음을 거두기도 전에 차에서 거의 흰빛에 가까운 빛이 뿜어져 나오면서 쾅하는 소리와 함께 차의 한쪽 부분이 터 져 나갔다. 그러면서 차는 마치 대포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넘 어진 그대로 주우욱 미끄러지면서 헬기 쪽으로 밀려가는 것이었다.
“아, 아니! 이건!”
웨이는 대경실색했다. 차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 중 몇 몇은 몸을 피했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병사들은 밀려오는 차에 볼링공처럼 얻어맞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차는 무서운 힘으 로 밀려서 서 있던 헬기 끝 부분과 살짝 부딪히더니 한 바퀴 빙 글 돌며 멈추어 섰다. 순간 헬기의 문이 활짝 열리고 문 사이로 백호의 얼굴이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헬기 안의 공안 요원들 이 백호의 등줄기를 총자루로 내리쳤다. 백호는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이미 헬기의 문은 활짝 열린 상태였고 차에서 퍽 소리가 나면서 월향검이 강한 빛을 뿜어내며 날아올 랐다.
꺄아악!
월향검의 귀곡성이 사방을 울리자 아까 혼이 나 본 경험이 있 는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질겁을 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뒤 를 이어 차의 문짝이 펑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고 소리와 동시 에 현암이 몸을 한 바퀴 굴리면서 뛰어나왔다.
현암은 혼신의 공력을 있는 대로 모아서 ‘발’자 결의 공 력을 써서 땅을 밀어내고 그 반동으로 차를 밀어 보려는 기상천 외한 생각을 한 것이었다. 삼 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은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지금의 현암은 달랐다. 도혜 스님에게서 받은 칠십 년 공력을 이제는 거의 다 쓸 만큼 단련되어 있었고, 거기에다가 박 신부가 밀어 보내 준 힘도 과거에 퇴마진을 처음 구성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처음에는 여러 번 땅을 쳐 내 야 차가 밀려갈 것 같았는데 의외로 단 한 번 혼신의 힘을 기울 인 ‘발’자결의 공력 운행만으로 더욱더 강한 힘으로 차를 밀어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반이 잔디밭이어서 비교적 미끄러지 기 쉬웠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차가 밀려나서 헬기라고 생각되 는 물체에 부딪히자마자 현암은 운전석 문을 밀어내면서 월향검 을 내쏘고 밖으로 몸을 굴려 뛰쳐나온 것이다.
이번에는 웨이도 급했다. 그들이 헬기를 타려고 하는 것 같았 는데 얼른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헬기를 탈취당하기라 도 하면 정말 일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총을 쏘아 서라도 놓치지는 말아야 했다.
“안되겠다! 쏴라!”
웨이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이 총을 겨누자 월향검이 허공에서 귀곡성을 울리면서 쏘아져 내려와 몇몇 군인들의 총을 향해 덤 벼들었다. 그러나 그 외의 군인들은 월향검을 향해 마구 사격을 해 대기 시작했다. 다만 뒤에 헬기가 있어서 그들은 총을 마구잡 이로 쏘지 못하고 가급적 헬기를 맞히지 않게 조준 사격을 하려고 했다. 현암은 차에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박 신부와 최교 수를 끌어내면서 힐끗 군인들이 총을 겨누는 모습을 보았다. 현 암은 단전에 힘을 끌어모아 남은 공력으로 사자후의 일갈성을 질렀다.
“어허헝!”
엄청난 울림이 사방을 꽉 채우듯이 메웠고 상상을 초월한 소 리에 군인들의 반가량은 자신도 모르게 총을 떨어뜨리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나머지 반도 순간적으로 몸을 주춤하면서 총을 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웨이와 도구르도 귀가 터져 나갈 것 같아 몸을 휘청하면서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사이 현암은 박 신부를 차 안에서 끌어 올렸다. 그런데 언뜻 보니 박 신부의 등 이 젖어 있었다. 검은 옷이어서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가만히 보니 피 같았다. 현암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부님! 다치셨나요?”
박신부는 현암이 낸 사자후의 여운 때문에 현암의 말이 잘 들 리지 않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현암은 다급하게 박 신부를 헬기 안에 밀어넣고 다시 한번 길게 사자후의 일갈성을 뿜어냈 다. 이번에는 공력을 거의 다 쓴 것 같은 허탈감이 느껴졌으나 위력만은 여전했다. 아까 총을 떨어뜨리지 않은 군인들까지도 이번의 사자후에는 귀를 틀어막았고 몇 명은 그 자리에 주저앉 기까지 했다. 그 틈을 타서 현암은 최 교수마저 헬기 안에 밀어넣고 자신도 황급히 헬기에 올라탔다.
현암이 헬기에 타는 순간, 백호를 감시하던 공안 요원 두 사람 은박 신부의 오라 막에 튕겨져서 반대편으로 굴러떨어지는 참 이었다. 헬기 안에는 막 얻어맞고 쓰러진 백호가 현암의 사자후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드는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신부님! 현암 씨!”
“백호 씨! 어서 조종사에게 이륙하라고!”
현암은 백호를 보고 알은척할 사이도 없이 거칠게 소리쳤다. 문을 다 닫기 전에 헬기의 틈 사이로 월향검이 미끄러지듯 날아 와 현암의 왼손 손목에 채워진 칼집 안으로 들어와 꽂히는 것을 확인하고 현암은 헬기의 문을 닫았다.
몸을 일으킨 백호가 조종석으로 갔다. 조종사는 권총을 뽑아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중이었다. 조종사는 헬멧을 쓰고 있었고 또 헬기 앞부분에 있어서 사자후에 별로 충격을 받지 않 았던 것이다. 박 신부는 오라로 헬기 안에 있던 두 명의 공안 요 원을 밀어낸 참이었고, 현암은 헬기의 문을 닫는 중이었다. 최 교수는 사자후의 소리에 질려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백호는 조종사가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려는 순간 발로 땅에 떨어져 있 던 청홍검이 든 목도를 멋지게 튕겨 손에 잡아 헬멧을 쓴 조종사 의 머리를 내려쳤고 조종사는 엉겁결에 권총을 발사했다. 조준 을 하지 않은 총알이었지만 기내의 벽에 다시 튕겨져 총알은 핑핑 소리를 내며 멋대로 날아다녔다. 총소리가 나는 순간 박 신부가 오라 구체를 조종사 쪽으로 쏘아 보내자 조종사는 창문까지 밀려가서 처박힌 다음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조종사가 없으니 어떡하지요?”
박 신부가 안타깝게 소리치자 백호는 잠시 뭔가 고민해 보더 니 스스로 조종석에 앉았다. 헬기의 문을 걸어 잠근 현암이 소리 쳤다.
“조종할 줄 아세요?”
“해 봅시다!”
백호가 조종간을 왈칵 당기자 헬기는 덜컹 소리를 내며 심하 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바깥에서는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헬기의 창문에 퍽퍽 흰 동그라미 모양의 금을 내며 총알이 박혔 고, 동시에 헬기가 덜컹거렸다.
“빌어먹을! 제발 떠라! 떠!”
백호가 소리를 지르면서 조종간을 왈칵 젖히자 헬기는 거친 조종에 반항하듯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위로 떠올랐다.
“떴다! 어서 갑시다!”
그러나 헬기는 잠시 기우뚱거리더니 서서히 내려앉았다. 아 래에서 쏘아대는 총알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때 박 신부의 눈에 헬기의 한쪽 구석에 있는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연막탄을 담은 상자였다. 박 신부는 얼른 상자를 집어 들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핀을 뽑아서 창문을 열고 연막탄을 밖으로 집어 던졌다. 현암과 이제 정신을 차린 최 교수도 연막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주 변이 갖가지 색의 연기 자욱해지자 총알에 맞는 빈도가 줄어 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백호가 다시 조종간을 힘껏 당기자 그제 야 헬기는 거침없이 하늘로 떠올랐다.
“됐다! 갑니다!”
백호가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헬기는 수평 비행으로 전 환되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래에서는 연막 때문에 군 인들이 우왕좌왕하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웨이는 넋이 나간 듯 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고 도구르는 화가 난 얼굴로 무전기를 한 병사의 손에서 빼앗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