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3화 – 홍수 16 : 서로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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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3화 – 홍수 16 : 서로의 길로…


서로의 길로…………….

윌리엄스 신부가 티베트로 가서 판첸 라마를 만나겠다고 할 때까지도 연희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위험에 빠 진 박 신부와 현암 일행의 안위도 듣지 못한 채 그곳으로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박 신부의 당부대로 나중 일은 어떻게 되건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하는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박 신부의 당부를 따라야 한 다는 생각에는 변함없었고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 이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박 신부와 현암 등 이 모두 잡혀 버린다면 굳이 자신이 티베트로 가는 것이 무슨 의 미가 있을까? 물론 이번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은 연희도 알 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라진다면 자신이 과연 그 일을 계속 해 나갈 수 있을까? 예전부터 연희는 승희가 퇴마사들을 따라다 니는 것이 꼭 무슨 책임이나 목적의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박 신부와 현암, 준후와 승희가 없는데 홍수 전설이 무슨 소용이고 마스터의 영 혼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일단 연희는 박 신부와 현암 등의 상황을 알아보고 난 다음에 티베트에 가도 가겠노라고 결심했 다. 서둘러 나갔기 때문에 긴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만일 백 호가 그들을 구출까지는 아니더라도 만나기라도 한다면, 그들에 게 월터 보울과 연락을 취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월터 보울에게 연락한 장소로 가 있으면 적어도 박 신부 와 현암이 무사한지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티베트에 가는 것은 그 이후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소파에 앉은 채 뻣뻣해 진 목을 조금 돌려 보았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면서 아라가 잔뜩 흐느끼며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아라야, 왜 우니? 더 자두지 않고…………….”

“언니이, 이잉. 아빠랑 오빠가 보고 싶어. 오빠랑 아빠가 죽는 꿈꿨어잉.”

연희는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라를 품에 안아 주었다. 아라는 훌쩍거리면서 연희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 아라야. 괜찮을 거야. 아빠도, 오빠도 다 괜찮을 거야.”

연희는 아라를 끌어안고 다독거렸다. 그때였다. 연희의 눈에 뒤로 젖혀진 아라의 목걸이가 희미하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연 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오른손으로 목걸이를 들어 보았다. 그 순간 이유 없이 무언가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승희와 준후는 잘 있는지……………. 그러고 보니 현암과 박 신부만이 아니라 그들도 연락이 두절되지 않았는가. 연희의 입에선 아라에게 말하는 것인 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들 잘 있을 거야. 신부님도 승희도 현암 씨도…………… 어서 연 락이라도 되었으면, 그러면 좋을 텐데……………”


같은 시간, 오두막 안에서 다시 한번 부적을 태우면서 정신을 집중하던 준후는 순간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라의 목걸 이가 빛난 것은 준후가 정신을 집중해서 연희 쪽의 상황을 살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연희의 말로 미루어 볼 때에 신부님과 현암까지도 쫓기는 신세가 된 모양이었다. 준후는 놀 라면서도 승희에게 그 사실을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주어야겠다 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약간 제정신이 아닌 승희가 더욱 괴로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희 누나, 제발 말 좀 하세요. 지금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서…………. 조금만이라도 말을…………….’

조요경의 술수로 그쪽의 상황을 비추어 보는 것으로는 그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어떻게 해야 그들과 연락이 닿는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연락 장소를 말해야 하는데, 연희 는 그런 말을 할 기미가 없었으니 준후 입장에서는 매우 답답한 노릇이었다.

“아라야, 그만 울음을 그쳐야지. 응? 걱정 안 하고 잘 기다릴 수 있지?”

아라는 연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속 훌쩍거렸다. 연희는 왠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이 들어 짜증이 났다.

“연락이라도 하지. 아마 세크메트의 눈이 있으니 신부님하고 승희 쪽은 연락이 될 텐데……………. 나만 답답하네. 아, 아라야. 아 냐, 아냐. 그냥 혼잣말이란다. 다 잘될 거야………….”

말을 맺으면서 연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월터 보울 씨가 전화로 잘 전해 주어야 할 텐데…….”

준후는 순간적으로 튕겨지듯 눈을 뜨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그 광경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승희도 덩달아 놀라 서 같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지? 준후야!”

“월터 보울, 연희 누나가 그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어요!”

“월터 보울? 영국 사람 말이니?”

“그 사람이 뭔가 전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그분에 게 연락을 하면…….”

“근데 월터 보울 씨에게는 어떻게 연락을 하지?”

“제가 옛날에 받아 놓은 명함이 있어요. 아마 지금도 있을 거 예요!”

준후는 급하게 소매를 뒤집었다. 부적과 기타 오만가지 잡동 사니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준후는 그 안을 뒤지다가 자그마 한명함 한 장을 찾아내었다.

“여기 있어요! 파란색 명함은 그분에게서 받은 것뿐이었어요. 승희 누나, 읽어 주세요. 맞죠?”

승희는 준후가 내미는 명함을 받아 들고 거기 쓰인 이름을 읽 어 보았다. 틀림없는 월터 보울이었다.

“월터 보울 씨가 뭔가 전화로 잘 전해 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신부님하고 현암 형도 지금 다른 사람들과 헤어진 상태인 것 같으니 연락 장소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한 게 틀림없어요.’

“가만! 준후야, 지금 신부님하고 현암군이 헤어졌다고 했니?”

“어? 아, 네…….”

“어떻게 된 거야? 너, 두 분은 별일 없는 것 같다고 했잖아?”

“나도 몰랐어요. 이제야 알게 된 거예요.”

승희는 금방이라도 신경질을 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준후는 조금 겁이 나서 얼른 말을 이었다.

“신부님이나 현암 형이라면 별일 없을 거예요. 우리도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두 분도 잘 있을 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우선 우리의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월터 보울 씨에게 전 화라도…………….”

“전화라…………. 그런데 밖으로 나가도 될까?”

“글쎄요. 그건 저도 모르지요.”

승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심하다 때마침 바이올렛이 들어 서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승희는 바이올렛을 꺼 림칙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바이올렛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준도 아까 승희가 바이올렛을 믿 지 말라고 당부했던 일도 있고 해서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렛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불타고 남은 부적 조각 같은 것을 보고는 눈 빛에 이채를 띠는 듯했으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걸 보세요.”

바이올렛은 말을 하면서 종잇조각 하나를 집어서 승희와 준후에게 보여 주었다. 승희는 그것을 보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 렸다. 몽타주였다. 글자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종이에 그려 져 있는 몽타주는 승희와 준후와 흡사했다.

“절대 나가시면 안 돼요. 벌써 여기까지 손이 뻗쳤더군요. 한 국에서 온 사람들을 수배하는 전단이에요. 도착한 지 채 이틀도 안되었는데 이렇다니……………..”

“어차피 예상했던 겁니다. 그보다는 미스 바이올렛?”

“예?”

“바바지라는 분이 어디 계시는지는 알아냈나요?”

“음, 대강은요. 그런데 정말 가시겠어요?”

승희는 어깨를 움찔했다. 뻔히 알면서도 이런 위험한 상황에 서 다른 일을 벌인다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 러나 바이올렛은 진짜 걱정스런 목소리로 승희가 갈지의 여부 를 묻고 있었다. 승희는 누군가가 자신을 진정으로 걱정해 준다 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해서 오히려 꼭 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가 야지. 가서 얻어야지. 그래서 그 멍청이를 조금이라도 기쁘게 해 줘야…………. 승희는 밀려오는 잡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듯 단호하 게 말했다.

“어서 출발합시다. 시간을 낭비하는 건 현명하지 못해요. 어서 바바지라는 분을 찾아가서 수다르사나인지 뭔지를 얻든지 뺏든지, 안 되면 훔치기라도 합시다!”


서투른 솜씨나마 헬기를 조종하며 그럭저럭 꽤 먼 곳까지 날 아가는 동안 백호나 박 신부, 현암은 할 말이 많을 텐데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을 꺼내기가 서먹서먹한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 만 실상 박 신부와 현암, 최 교수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그 리고 백호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해결책 백호는 공공연히 그들의 탈주를 방조한 셈이니까 과 더불어 어떻게 하면 이들 을 추적받지 않게 안전한 장소로 옮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궁리하는 한편, 식은땀을 흘려 가면서 서투른 조종을 하느라 대 화를 나눌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정말 안전한 장소가 있을 수 있을까? 이들이 도망쳤다는 것은 지금쯤 보고가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또 각국에서는 그들을 끝까지 추적하려고 새로운 요원들 을 파견할 것이다. 중국 정부만 하더라도 단지 두 명을 체포하기 위해 중대 규모의 군대까지 동원하지 않았던가.

‘중대가 실패했으니 다음번에는 대대 규모, 그다음에는 사단, 군단 병력이라도 동원하려 들겠지? 이번 한 번은 어떤 식으로든 벗어났지만 또 이런 일이 닥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건 그렇 고・・・・・・ . 어디 안전한 나라가 없을까? 남미?’

그것도 적절한 방법은 되지 못했다. 각국에서 이들의 존재와 힘을 알게 된 이상 공식적으로는 못 잡게 한다고 하더라도 뒤로는 스파이라도 파견해 이들을 잡으려 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없애려 들 것이었다.

‘단 한 가지 방법은 있다.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백호는 잠시 더 고민을 해 보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부님 그리고 현암 씨, 괜찮으세요?”

그 말에 현암은 기대어 누운 채 고개만 끄덕해 보였고 박 신부는 몸을 일으켜서 정중하게 대답했다.

“괜찮소. 그나저나 백호 씨가 고생이 많으시군요.”

백호는 박 신부의 악의 없는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일이 이렇 게 된 것은 자신을 비롯한 정부 측의 책임인데 오히려 자신에게 인사를 하다니…..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앞으로의 일이 더 걱정입니다.” 

“무슨 말씀이시지요?”

박신부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허리를 쭉 폈다. 그 순 간, 옆에 앉아 있던 현암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현암은 박 신부 가 기대어 있던 헬기의 벽에 핏자국이 얼룩져 있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박 신부를 부축할 때 손에 피가 묻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러나 워낙 경황이 없어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신부님!”

몸을 벌떡 일으킨 현암은 일어나 앉은 박 신부의 옷자락을 잡으며 한 손을 등에 대 보았다. 예상대로 축축한 감촉이 왔고 조금 더 자세히 보니 박 신부의 사제복 여기저기에 총알구멍이 나있었다.

“시, 신부님! 총에 맞으셨나요?”

현암의 말에 박 신부는 조금 멋쩍은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고 최 교수와 백호까지도 놀란 눈으로 박 신부 쪽을 돌아보았다. 현 암은 등을 살폈다. 놀랍게도 총알 자국은 여섯 개나 있었다.

“신부님, 이런 중상을 당하시고 어째서…………….”

“중상은 아니네. 목소리 높이지 말게나.”

“그렇지만 총알을 여섯 발씩이나.

“찰과상일 뿐이네. 염려할 것은 없대두.”

“이렇게 정통으로 맞았는데 어떻게 찰과상입니까? 어서 웃옷을 벗으세요! 어서!”

“아무튼 심한 것은 아니니 걱정 말게. 그러고 보니 총알을 빼 내는 것도 잊긴 했구먼. 여기서 지금 뽑아야 하나? 도구도 없지 않은가?”

“월향검으로 하면 됩니다. 아프시더라도 참으세요.”

“그렇게 심한 것은 아니니 흔들거리는 여기서는 하지 마세나 나중에 착륙해도 덧나진 않을 걸세.”

“지금 어떤 상처를 입으셨는데 그런 말씀을 태연히 하십니까? 안심시키려고 그러시는거죠? 어서 옷을 벗으세요. 어서요!”

현암은 눈물을 속으로 삭이면서 싫다는 박 신부의 옷을 강제 로 벗겼다. 그러자 놀라운 것이 보였다. 그 총알들은 분명 자동 소총의 총알이니 관통력이 상당한 것일 텐데 박 신부의 옷을 벗 기고 보니 정말 총알은 박 신부의 몸 깊숙한 곳에 박히지 않고 살갗에만 박혀 있는 것이었다. 피가 나기는 했지만 총알이 몸속 깊숙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생명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 것 같았 다. 현암이 조심스럽게 월향검 끝으로 총알을 하나하나 뽑아내 자박 신부는 아픈 듯 몸을 움찔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월향검과 영의 파장이 잘 맞지 않아 평소 박 신부는 월향검에 손도 대지 못했다. 지금도 월향검 끝이 박 신부에게 닿으면 거의 눈에 보이 지 않을 정도이지만 희미하게 불꽃이 일며 전기 같은 것이 통하 는 듯했다.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이 정도의 반작용은 없는 것이 나 다름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현암은 총알을 뽑아내면서 계속 생각에 잠겼다. 이 많은 총알 이 다 불량이었을 리도 없고 가까운 거리에서 사격했으니 위력 이 줄어들 이유도 없었다. 곰곰이 더 되짚어 보니 박 신부는 탈 출하면서 내내 오라 막으로 방어를 펼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라 막 덕분에 총알의 힘이 약해져서?”

“글쎄, 나는 잘 모르겠네. 조심해 주게. 공연히 더 찢어 놓지말고.”

박 신부는 태평하게 말했으나 현암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인사를 속으로 하면서 눈 물을 흘리고 있었다. ‘박신부가 없다면?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박 신부는 현암을 비롯한 퇴마사들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 였기 때문이다.

박신부의 몸에 박힌 총알을 빼내던 중 언뜻 든 생각이지만 박 신부나 월향검, 그리고 준후 등의 기운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준후는 불가와 도가의 술수를 쓰고 월향은 영이 서린 귀검이었 으며 박 신부는 가톨릭의 성직자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들은 한데 모여서 힘을 합했고, 의지만이 아니라 그 힘들 간의 상충되 는 점도 거의 사라져, 이제 한 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 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엮어가 는 힘은 무엇일까 현암은 아주 잠시 동안 답을 찾아보았다.

현암이 떨리는 손으로 총알을 빼내는 사이 최 교수가 헬기 안 을 뒤져서 구급상자를 찾아냈다. 최 교수에게 약상자를 받아 든 박 신부는 여전히 침착한 모습으로 살피더니 적절한 약을 발라 주도록 현암에게 주문했다. 그런 와중이라 백호는 하려던 말을 채끝내지 못했다. 최 교수가 탄식하듯이 말했다.

“차라리 한살이라도 나이가 덜 먹은 내가 맞는 게 낫지, 어떻 게 연로하신 신부님께서…………….”

말을 하다가 최 교수는 현암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말대로라면 제일 젊은 현암이 모든 총알을 다 맞아야 한다고 들 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암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 다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 신부님에게만 총알이 쏟아진 것일까? 사실 총알이 날아 오는 맨 앞에 서서 신부님이나 최 교수님을 가려 주려고 했던 것 은 내가 아니었던가? 어째서 나는 총알을 한 발도 맞지 않고 내 가 몸을 가려 드린 신부님께서?’

현암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신부님, 이 총알들을 언제 맞으신 겁니까?”

“음! 뭐 정신이 없어 잘은 모르겠네만 차에서 내려 헬기에 탈 때 그랬던 것 같네.”

“그때는 제가 앞에서 막아서고 있었으니 맞아도 제가 맞았어 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

“총알에 눈이 달렸겠는가? 그거야 내가 알 바가 아니지.” 

박 신부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현암은 눈매 속에 뭔가 자비로 운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무 엇인지 깨닫고는 속으로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추측이 맞 는다면 그건 충격이었다. 감동의 충격……………

분명 차에서 내려 헬기를 탔을 때 총 앞엔 세 사람 모두가 노 출되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맨 앞을 막아서고 있었으니 박 신부 혼자서 총알을 다 맞는다는 것은 이치상으로는 맞지가 않았다. 총알에 힘을 가해서 몸속으로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 정도 라면 총알을 모두 빗나가게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현 암이 맞을 총알을 박 신부 스스로가 맞은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이상했다. 총알을 빗나가게 하거나 궤적을 뒤틀리게 할 수 있다면 아예 빗나가게 할 것이지 왜 박 신부 자 신이 맞는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현암은 설레설레 고 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그 이유를 몰라 박 신부에게 대놓고 물 어보고 싶었으나 그대로 물어보면 박 신부가 대답을 할 리 없었 다. 현암은 은근히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총알이 맞고 맞지 않고도 운인가 봐요.”

“그러게 말이네. 나는 아마 운이 없는가 보지? 허허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뭔가?”

“이해가 되질 않아서요. 제가 앞을 막았는데 총알은 뒤에 가서 맞다니, 이 총알들 입장에서 보면 꽤 운이 없다 싶네요.”

“맞고 안 맞고는 쏘아질 때 정해져 있었지. 그러니 그것까지야 누가 어떻게 바꾸겠는…………….”

무심코 대답하다가 박 신부는 아차 싶어 말을 멈추었다. 그 와 동시에 현암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끄덕였다. 그 순간 현 암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맞고 안 맞고는 쏘아질 때 정해진 운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까지는 바꿀 수 없다는 말 도・・・・・・ . 그렇다면 완전히 납득은 되지 않지만 박 신부는 현암에 게 맞을 총알의 운을 조금 비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총알들을 박 신부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닐까? 심중을 잘 나 타내거나 말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박 신부가 지닌 능력으로 본 다면 그런 일도 불가능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 론은 하나였다. 박 신부는 현암을 위해 그랬던 것이다.

“신, 신부님!”

“그만두게. 모두가 운에 달린 일이지.”

박 신부는 미소를 지으면서 현암에게 그만 말하라는 듯한 눈 짓을 해 보였다. 현암은 연로한 박 신부가 자신을 위해 총알을 대신 맞아 준 것이라고 확신했다. 남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위해 총 알을 막아 준 것은 승희가 첫 번째였고, 박 신부가 두 번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현 암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다.

“신부님!”

“왜 그러나?”

“신부님! 절대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많이 다치셔도 안 되고 요. 절대로요. 알겠지요?”

감정이 복받쳐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막상 나온 말은 그야말로 스스로 듣기에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말 외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약속하세요. 네?”

박 신부는 미소를 짓더니 현암의 마음을 알았다는 듯 손을 뻗 어 현암의 한 손을 꼭 쥐어 주었다. 따뜻한 뭔가가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현암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무 도 알아주지 않고 끝없이 목숨을 걸고 힘든 싸움을 해 왔지만 그 래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외치고 싶었 다. 온갖 위험에 처하면서도 그것들을 넘길 수 있는 강인한 힘의 근원은 자신의 검기도, 준후의 부적술도, 박 신부의 오라도 아닌 여기, 박 신부의 마음에 있다고……………. 자신을 지키기보다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웠기 때문에 신부님은 몇 배 더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현암은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으려고 한 손은 박신 부의 손에 잡힌 채 다른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박 신부가 무사하다는 것은 안 백호는 조종에만 열심이었고 최 교수는 영 문을 알 수 없어서 멀뚱히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최 교수의 마음에도 뭔가 따 뜻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백호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록 합시다. 이 헬기도 추적당할테니 오래 탈 수는 없고……………. 제가 대기시켜 놓은 비행기가 있는 공항 부근까지만 가도록 하지요. 비행기를 타고 일단은 우 리나라로 돌아갑시다. 좀 더 안전한 곳을 마련해 드리도록 하겠 습……”

박신부가 백호의 말을 가로챘다. 백호로서는 박 신부의 갑작스런 행동이 얼른 이해되지 않았다.

“돌아간다고요? 아닙니다. 백호 씨, 그럴 수는 없어요.”

“예? 그러면?”

이번에는 박 신부 대신 현암이 입을 열었다.

“인도로 가야 합니다. 어쩌면 승희와 준후가 위험에 빠져 있을지 몰라요.”

“거긴 제가 가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더 이상 돌아다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백호 씨로는 도움이 안 돼요. 상대는 마스터입 니다. 우리가 직접 가야 합니다.”

“뭐라고요?”

백호는 소리를 지르고는 놀란 듯한 표정을 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마스터는 죽지 않았습니까? 지금 정보기관들의 추적도 따돌 리기 힘든데 마스터라니요?”

“물론 마스터는 죽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영혼이지요.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박 신부는 침착한 어조로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입을 열 었고 백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갔다.


중국으로 향하는 한 여객기의 구석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명의 여행자가 의자에 깊게 몸을 묻고 있었다. 한 사람은 보 통 체구였는데 아무래도 복부가 불편한 듯, 조금 기우뚱한 자세 로 움직이지 않은 채 이상하게 생긴 두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 리고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의자가 부서질 정도로 커다란 덩치를 하고 중절모를 얼굴에 얹고 있었는데 팔에 부목을 대고 또 몸이 뻣뻣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석고 붕대로 깁스를 온몸에 한 것 같 았다.

그 두 사람은 서로 부축하면서 비행기에 탄 이후 아무런 말도 없이 얼굴을 가리고 죽은 것처럼 앉아 있어서, 손님에게 항상 상 냥해야 하는 스튜어디스들마저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끔 힐끔 쳐다보곤 했다. 두 사람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가만히 앉 아 있어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자는지 무언가 생각에 잠겼는지 기절했 는지 하여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는 것도, 기절한 것도, 물론 죽은 것도 아니었 다. 그들은 깨어 있었고 오히려 극도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또 아무런 말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미스터 상준?

성난큰곰이 마음속으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자 주기 선생 상준도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틀림없소. 그들은 분명히 인도와 중국으로 떠났을 것이오. 나도 병상에서나마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그런데 공항의 출국 기록에는 그들이 떠났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데 그건 무엇 때문인가, 미스터 상준?

그러니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거요. 그들이 떠난 것만은 확실 합니다. 그것도 특별기가 아닌 보통 여객기로…………….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런 기록은 하나도 없고, 연락이 두절되었소. 더군다나 백호마저 연락 을 취할 수 없게 되었지 않소? 뭔가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흠!

성난큰곰은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다시 상준에게 마음을 전달했다.

그들은 나의 은인이다. 내 목숨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해 준 친구 들이다. 내 부상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당신은 어째서 가는 건가? 당신의 부상도 꽤 심한 편이고, 더구나 당신의 마음은 미스 터 현암과는 가까운 것 같지 않은데………….

난 현암 그 친구를 몹시 싫어하오.

왜?

내 전인(人) 때문에 가는 거요. 더 이상 묻지 마시오.

주기 선생 상준은 말을 딱 잘라 버리고 조용히 손을 움직여 품속에 넣어 둔 작은 거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조요경이 말을 잘 들으면 좋을 텐데……………’


호텔에 앉아 있던 연희는 나간 백호로부터 거의 하루가 다 지 나도록 연락이 없자 매우 답답했다. 그래서 몇 차례 호텔 방 안 을 왔다갔다 하다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외투를 걸쳐 입고 밖 으로 나가 미행을 따돌리듯 주변을 몇 바퀴 돌다가 공중전화를 걸었다. 백호가 대기시켜 둔 전용기에 설치된 전화로 백호에게 무슨 연락이 있었는지 물어볼 심산이었다. 연희가 전화를 걸자 담당자는 천만뜻밖에 백호를 곧바로 바꿔 주었다.

“백호 씨?”

“웬일입니까? 제가 연락하기로 했는데? 안 그래도 지금 막 연 락을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별일 없었나요?”

“조금 골치 아픈 일들이 있었지만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 다. 그런데 그 전화, 괜찮습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러나 긴 이야기는 할 수 없군요. 공항으로 빨리 와 주세요. 저희 비행기로 와 주시면 됩니다. 태극마크가 달린 조그마한 쌍 발기입니다.”

“지금요?”

“예, 당장요. 모두 데리고 오십시오. 저도 더 이상 여기에 머물 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 빨리 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백호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연 희는 백호가 성과가 있었다고 한 말만 자꾸 되씹고 있었다. 그렇 다면 박 신부나 현암과 연락을 하는 데 성공했다는 말인가? 연 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정신을 차렸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아직 도 수화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희는 수화기를 내려놓 지 않은 채 갑자기 뒤로 돌아서서 사방을 보았다. 웬 낯선 사람 둘이 그림자처럼 슬며시 모습을 감추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 행을 하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연희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면서 다시 아무 곳에나 전화를 걸었다가 곧 끊어 버렸다. 그냥 가면 전화번호가 혹시 전화기 내에 ‘재발신용으로 기록되어 있 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어쨌든 백호는 별일이 있었다고 했고 자기는 더 이상 여기 머물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렇다면 뭔가 말썽이 있었다는 의미이며, 가능한 한 빨리 비행기 로 오라는 말은 조짐이 심상치 않은 것이라고 연희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서 가보는 것이 옳았다. 연희로서는 박 신부나 현암 의 무사가 확인되기 전까지 중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일단 비행기까지 가보고 싶은 생각이 그런 마음을 앞질렀다.

성과가 있다는 말. 그 말이 아무래도 희망적으로 들렸기 때문이 었다. 연희는 서둘러서 걸음을 옮겼다.


“위대하신 수호자시여! 가르침을 내리소서!”

중국의 어느 호텔 방의 불 꺼진 한쪽 구석에서는 호텔 방의 분 위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프랑스 말로 무엇인가를 기도하는 소 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도문이나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 라 다만 가르침을 달라고 중얼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절실한 심정을 담고 있어서 듣는 사람이 왠지 소름 끼 칠 것만 같은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호텔 방의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나이트 스탠드 위에는 작은 신상 같은 것이 모셔져 있었고, 묘한 기도성의 주인공은 그 앞에 머리카락을 흩뜨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도구르였다.

“가르침을, 가르침을 내리소서! 응답을, 응답을 하소서!” 그 신상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는 자그마한 두상頭像) 이었는데 동양의 것인지 서양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무표정 한 얼굴의 나무 조각품이었다. 놀랍게도 도구르가 계속 중얼거 리며 기원을 하자 나무 조각상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진동음 같 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도구르는 더더욱 열심히 중얼거 렸고 나무 조각상에서 울려 나오는 웅웅거리는 진동음은 점점 높아지다가 이윽고 식별하기 힘든 사람의 음성 같은 것으로 바뀌어 갔다. 전혀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고 누구의 것인지, 심지 어 남자의 목소리와 흡사한지 여자의 목소리와 흡사한지조차 구 분할 수 없는 밋밋한 기계음 같은 울림이었다.

“그들을-놓쳤느냐?”

묘한 울림이 전달되어 오자 도구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울 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무능한 저에게 벌 을 내리소서.”

“네-잘못-만-은-아니다. 그들-은-보통-이-아-니 – 니.”

도구르는 예상외로 추궁을 받지 않자 감격한 듯 몇 번이고 고 개를 조아리면서 절을 했다.

“자비로우신 수호자님께 경배드릴 뿐입니다! 자비로우신 수 호자님! 자비로우신 수호자님! 자비로우신 수호자님!”

“그러-나-다-시-그들을-놓쳐서는 안된다. 결코!”

“그들은 백호라는 자의 도움을 받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 니다. 그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그들은-멀지않은곳-에-있다. 결-코-멀리 가게-해서는안되느니라. 신-성-한-땅-에-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호자님께서 주신 목숨, 수호자님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다만 위대한 혜안으로 그들이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도구르는 스스로의 감정에 도취된 듯,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각상은 한참 동안이나 조용하게 있다 가 아주 작게, 지금까지보다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속삭이는 듯 한 울림을 전해 왔다.

“날개 날개달린 – 새의 – 배-속-크지만-아주-크지는 않 은-동쪽에서 온 새-칼의 남자와-검은-옷의-노인-발-닿 지않는곳에 그곳에-큰-눈의여인을 따라.”

도구르는 조금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듯하다가 눈빛을 빛 냈다. 메시지는 우회적이었지만 분명히 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 다. 칼의 남자와 검은 옷의 노인이란 그가 추적하고 있는 자들 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큰 눈의 여인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 다. 그 여자를 따라가면 된다고 지금 수호자님께서 말씀하셨다. 날개 달린 새의 배 속, 동방에서 온 새, 그리고 발이 닿지 않는 곳……………. 그 내용도 확실했다. 한국에서 온 비행기의 내부를 말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발이 닿지 않는다는 의미는 떠 있다 거나 아니면 비행기 안은 착륙지나 어느 영공을 통과하고 있건 간에 그 비행기가 속해 있는 나라의 땅으로 간주되어 함부로 출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도구르는 수호자의 뜻을 알아낼 수 있었고, 이번만은 수호자의 뜻 에 거스르지 않고 그들을 완전히 처리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입 술을 깨물었다. 도구르는 수호자를 위하여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고 수호자의 의지가 신의 의지와 마찬가지라고 굳게 믿 고 있었다.

잠시 후 조각상에서 울려오던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고, 도구 르는 몸을 일으키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아빠! 으아앙!”

아라의 울음소리가 비행기 안을 채웠다. 최 교수는 조금은 멋 쩍은 표정이었지만, 한없이 반갑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달려드는 아라 때문에 거의 뒤로 넘어질 뻔하면서도 손을 뻗어 아라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아빠아, 미워어! 아라만 내버려 두구우! 씨이!”

“그래, 그래. 미안하다. 아라야, 고생 많이 했지?”

“몰라아! 이제 가면 안 돼? 으응?”

아라와 최 교수가 감동적인 부녀 상봉을 하는 사이, 나머지 사 람들은 그러한 모습을 미소를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는 백 호와의 통화로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는 감은 잡고 있었지만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박 신부와 현암, 최 교수를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가장 먼저 윌리엄스 신부가 반가운 기색 으로 박 신부의 손을 덥석 잡았고 이어서 현암에게 손을 내밀었 다. 현암은 윌리엄스 신부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했을 뿐 무표정 한 눈빛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연희는 아무 말도 못한 채 서 있 기만 했다. 백호가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라도 좀 나누세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시간이 없다니요?”

박신부나 현암에게 안부의 말을 꺼내지 못한 연희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백호에게 묻자 박 신부가 말했다.

“우리는 인도로 가야 해요. 연희 양.”

“인도요?”

“그래요. 승희와 준후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것 같아서…………….”

연희는 승희 등과 연락이 되었는지 물어보려다가 그 말은 뒤로 미루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런데 세 분 다 괜찮으세요?”

이번에는 현암이 예의 무뚝뚝한 말투로 대답했다.

“별일은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서 인도로 갈 건가요? 승희와 준후를 구하러?”

“네.”

“그런 다음에는 어쩔 생각이지요?”

“유적지에 갈 겁니다. 마스터의 음모가 있는 그…………….”

그러나 연희가 현암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 버렸다. 현암과 박 신부와 모든 사람들이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꽉 치밀 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요? 잘될 거라고 저는 믿어요. 그러면요? 그다음 엔 어딜 갈 거죠?”

대답 대신 돌아온 침묵을 연희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여 전했다. 자신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뭐랄 까? 성인군자의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에 빠졌고, 언제 어디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지 모르는 처지에서 그 위험보다는 자신들이 할 일밖에는 생각 지 않는……………. 연희는 지금만큼은 그런 그들의 마음이 싫었다. 

“그다음에는 어디로 가실 거냐구요? 어떻게 하실 거죠, 백호 씨? 대안이 있나요?”

백호도 목이 막히는 듯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번 일이 알려지면 면직될 공산이 큽니다.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만, 실질적으로 제가 여러분을 도울 수 있는 길 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지요. 하지만 나름대로의 대책은 마련하고……………”

백호가 말을 끝내기 전에 박 신부가 손을 내저으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 그럴 것 없어요. 백호 씨.”

“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그 정도 앞가림은 할 수 있어요. 무리하실 것 없소.”

“아닙니다. 이건…….”

“백호 씨가 힘을 동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어디선가 표가 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더욱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냥 계셔 주시오. 우리를 인도까지 데려다 주시면 이후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백호가 눈을 부릅뜨면서 소리치듯 말했으나 박 신부는 듣지 못한 것처럼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 쪽을 보고 말했다.

“두 분은 제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제 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티베트로 가 주세요. 가서 판첸 라마를 만 나고, 에메랄드 태블릿에 실린 내용을 알아봐 주시길 바랍니다.” 윌리엄스 신부는 진지하고 정중한 박 신부의 제의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연희도 마찬가지였 고…………. 박 신부는 온화한 어조로 연희를 보고 말했다.

“연희 양, 우린 항상 위험 속에 살고 있어요. 우리만이 아니라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지. 조금 지내는게 어려워진다고 언제까지나 아이들이 투정 부리듯 주저앉거나 해야 할 일을 팽개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연희 양.”

“그러나 이건 너무 억울하고 위험한……………”

“아니, 억울해할 것 없어요. 나는 연희 양을 올바르게 사고하 고 판단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연희 양이더라도 우리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의구심이 들지 않겠어요? 그 사람들을 이해해야 해요.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야. 우리 가 상대할 자들은 따로 있어요. 그건 연희 양도 잘 알고 있지 않 나요?”

박 신부가 연희를 타이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입을 굳게 다물고 서 있던 현암이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 씨, 지금 인도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정확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인도에서는 일반 적으로 그러한 능력에 대해 다른 나라들처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다지 커다란 반응을 보이지 는 않네요. 일단 수배는 된 것으로 압니다만, 제가 조사할 때까 지는 중국에서처럼 큰 반향이 없었어요.”

“그건 다행이군요.”

“그러나 조심하시긴 해야 합니다. 특히 도구르 같은 자는 매우 위험합니다. 저는 그자와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습니다만, 보통 내기가 아닙니다.”

현암은 자신이 전속력으로 모는 차 앞을 막아서며 총을 쏘던 도구르의 모습을 회상하다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백호 말대로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인도에 가시더라도 경찰들보다는 인터폴 친구들을 주의하시 기 바랍니다. 이번 일로 가장 소란스러운 곳은 미국과 유럽 등의 서방 국가들입니다. 가능하면 충돌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 고 이건 이후의 일에 대한 것인데……”

백호와 현암은 구석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박 신부는 울음을 터뜨리는 연희를 타이르느라 쩔쩔맸으며, 최교 수는 아라를 안고 말없이 아라의 작은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윌 리엄스 신부는 혼자 떨어져 서서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다가 나 지막이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멘……..”

도구르는 거칠게 전화 수화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분명 지금 공항에 놈들의 비행기가 있고 거기에 전부 모여 있 는 것이 틀림없는데 들어갈 수 없다니! 이 상황에 외교 면책권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거지?’

간신히 개인 정보망을 이용하여 연희를 감시했고, 연희가 어 디론가 전화를 하고 난 다음 남아 있는 아이와 영국인 신부를 데 리고 공항에 가서 한국 국적의 비행기를 탄 것까지 확인했다. 물 론 그 비행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그 안에 정말 그들 이 숨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정황을 보아서 나. 또 자신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수호자의 신탁 모두가 그 비 행기 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협조적이고 많은 관 심을 보이던 중국 정부에서도 면책 특권이 있는 다른 나라 국적 의 비행기 내부를, 그것도 백 퍼센트 확실한 것도 아닌데 들어가 서 뒤진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도구르는 몇 번 더 여기저 기 전화를 걸었지만 병력 동원이나 기타 여러 가지 면에서 협조 를 얻어 내지 못했다. 아마 무한 공항에서의 실패에도 원인이 있 을 것이었다. 도움 대신에 도구르는 그 비행기가 약 여섯 시간 후에 떠날 예정이라는 사실 정도를 알아냈을 뿐이었다. 여섯 시 간이면 시간이 모자랐다. 도구르는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자폭 할 각오를 하고 들어간다면?

그러나 조금 더 고민해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능력으 로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더구나 자신 은 그들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공 공연히 로켓이나 폭탄으로 비행기를 날려 버릴 수도 없었다. 공 항 내에 그런 폭발물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도구르는 중국 정부에서도 그들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들을 죽이기보다는 생포하여 힘의 비밀을 밝히려 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 때문에 공항에서도 결정 적인 찬스를 여러 번 놓칠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자신도 감시당 하고 있을지 몰랐다. 도청이나 미행이야 조심하면 된다고 하더 라도 폭발물을 구하거나 그것을 들고 공항에 가서 비행기를 부 수는 따위의 일은 위험은 고사하고 아예 실행 단계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엄청난 초능력을 지닌 놈들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순간 도구르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저쪽이 비정 상적인 능력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이쪽도 그런 사람을 찾으면 되지 않을까? 여기는 중국이었다. 도구르는 한 사람의 이름을 떠 올렸다. 물론 퇴마사라고 칭하는 그들 같은 비상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 사람과 자신이 잘 계획을 세운다 면 비행기 안에 들어가서 그들을 잡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여섯 시간 정도가 남았으나 잘하면………..

도구르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륙 시간까지는 다섯 시간가량 남았습니다. 여기는 면책 특 권이 보장되는 비행기 안이니 안심하고 휴식하시기 바랍니다.”

백호는 상냥하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를 대강 끝낸 박 신부와 현암 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숨 가쁘게 지낸 시간이 한 십 년은 되는 듯했다. 불과 며칠간이었지만 그동안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저는 그러면…”

윌리엄스 신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윌리엄스 신부는 논의 끝에 티베트로 가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연희는 계속 자신도 퇴마사들을 따라가겠다고 우겼지만 결국은 박 신부에게 설득당 하고 말았다.

“신의 가호가 언제가 함께하시기를…………. 아멘.”

“조심하세요. 모두들……………

연희와 윌리엄스 신부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고 백호도 비행기 앞쪽의 다른 방으로 가자 실내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신부님, 이제 좀 쉬세요.”

정적을 깨고 현암이 말했다.

“자네는?”

박신부의 말에 현암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미 쉬고 있습니다. 눈 좀 붙이시죠.”

박 신부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실 제로 부상까지 입은데다가 너무 많은 힘을 써서 말할 수 없이 피 곤했기 때문이었다. 최 교수와 아라는 긴장이 풀렸는지 서로 끌어안고 졸고 있었다. 체면 같은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각 자는 대강 앉아 있던 자리를 툭툭 털고 반쯤 구부정한 상태로 눈 을 감았다. 현암도 눈을 감았으나 창밖을 내다보는 자세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앉은 채로였다. 현암은 앉아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었다.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반대쪽의 영국에서도 하루가 다 지나갔다. 짧다면 짧다고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번 일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에게는 마치 수십 년이나 되는 듯한, 많은 일들이 지나간 길고도 긴 하 루였다. 세계 도처에서 그들의 자취를 좇아 헤매는 수많은 정보 원들과 말단 경찰관들로부터 시작하여 당사자인 퇴마사들도, 또 연희나 아라나 윌리엄스 신부 등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길고도 긴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그만큼 길어질지 모르는 다른 하루 가 시작되고 있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 중에서도 전날 난데없이 윌리엄스 신부로부 터 전화를 받았던 월터 보울도 하루를 가장 길게 보낸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다지 길게 통화하지는 못했지만 불쑥 이상한 메 시지를 듣고 행여 현암이나 박 신부가 전화를 하지 않을까 해서 이 작달막한 영국의 심령학자는 한시도 전화기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꼬박 이십여 시간을 전화기 옆에서 끄덕거리는 흔들의자 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중간중간에 전화벨이 울리기는 했지만, 자신이 기다리는 박 신부나 현암에게서 걸려 온 전화는 아니었 다. 꼬박 만 하루가 지나서야 월터 보울은 그 대신 승희의 전화 를 받을 수 있었다. 맨 처음에는 하마터면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 하고 끊을 뻔했지만, 용케도 월터 보울은 승희의 목소리라는 것 을 기억해 냈다.

“미스터보울? 뭔가 메시지를…………….?”

승희의 첫 마디는 몹시 다급한 것 같았고 감도 퍽 먼 것이, 언 뜻 들어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거는 전화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월터 보울은 처음에는 자기의 예상대로 박 신부나 현암의 목 소리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 아니라서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 까 조금은 망설였지만 바로 메시지를 전했다.

“전달합니다. 011-277・・・・・・ . 준후의 생일. 직접 통화하세요.” 

도청이 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도록 연희와 백호가 궁리하 여 정한 것이 이 방법이었다. 준후는 주민등록번호가 등재되어 있지 않아서 퇴마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준후의 생일 날짜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숫자를 정한 다음 백호는 그 번호로 휴대 전화 하나를 급히 신청해 연락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이 었다. 그렇게 하면 이론적으로 일만 개의 회선을 동시에 도청하 지 않는 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없게 되는 셈이었다.

월터 보울은 조금 냉정한 짓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윌리엄 스 신부가 일러 준 대로 메시지만 전달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일단 메시지를 전달했으니 그만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 아니면 정말 기다리던 사람인 박 신부나 현암에게 전화가 올 때 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그것을 종잡을 수 없어서 한동안 다시 고민하다가 결국 인상을 찌푸리면서 흔들의자에 다시 앉 았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북경 공항이 어두워진 지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아직 이륙할 시간이 되지 않은 대한민국 국적의 작은 비 행기는 활주로의 한 귀퉁이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었다. 비행 기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실내등이라 주변까지 밝혀 줄 만 큼 밝지는 않았고, 격납고에서도 꽤 떨어진 곳이라 그 주변에는 조명의 불빛이 닿지 않아 어둑어둑했다.

그 비행기 주위에서 몸을 숨기면서 뭔가를 하고 있는 한 남자 가 있었다. 그 사람은 공항 직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옷이 그 사람의 몸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만큼이나 깡말라서 마치 해골과 같았고 어울리지 않게 턱에는 백발의 꽤 긴 수염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사람은 뭔가를 비행기의 주변에 늘어놓고는 힘이 다 빠진 듯, 휘 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비행기를 떠나 격납고 쪽으로 가다가 방향 을 돌려서 격납고 한편 귀퉁이의 화물이 쌓인 곳으로 갔다. 화물 더미에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사람은 도구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웨이였다. 방금 비행기 주변에 뭔가를 놓고 돌아온 노인이 거추장스럽다는 듯 작업복을 훌훌 벗어 내팽개치는 것을 보면서 웨이가 도구르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 일이 가능할 것이라 믿소?”

“가능할 것이오. 모(毛) 선생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들과는 비견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저 비행기는 전용기는 아니지만 면책권이 보장되는 군용기요. 저것을 건드린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할 거요. 절대로!”

“나는 나는 잘 모르겠소. 당신은 왜 이렇게까지…………”

도구르는 웨이가 약한 소리를 하자 눈을 부릅뜨면서 작지만 강렬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암적인 존재들이오! 당신, 그렇게 당하고도 모른단 말이오? 저들을 잡지 못하면 당신도 끝장이오!”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소.”

웨이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포위망을 뚫고 백호라는 자가 비행기 안으로 그들을 데려 갈 줄은 꿈에도 몰랐소. 우리는 헬기를 수색하느라고 신경을 그 쪽으로만 썼는데…….”

백호는 헬기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았다. 헬기는 확실히 도망치 는 데에는 최적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그만큼 추적도 받기 쉬운 물건이었다. 백호는 겨우 십오분쯤 타고 간 다음에 헬기를 버렸고, 헬기를 추적하느라 온 신경을 쓰고 있던 중국 공안 청에서는 그들이 도보로 다시 북경 공항으로 잠입할 줄은 예상 도 하지 못했다.

백호가 그들의 탈주를 방조했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지만 현장 을 잡지 못했으니 증거도 없었다. 오히려 백호는 나중에 자신도 그들의 인질로 잡혔다가 간신히 달아났다고 중국 측에 먼저 알 려 왔고, 그런 말을 뒤엎을 수 있는 증거가 중국 측에는 없었다. 헬기를 빼앗긴 조종사도 그들의 이상한 능력에 얼이 빠져 확실 한증언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이상한 능력을 공포할 수 없는 중국 측은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라 는 백호의 논박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황으로 보면 누가 보아도 백호가 그들을 탈출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들어가게 되는 ‘이상한 힘들 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백호의 이야 기를 부정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그 ‘이상한 힘들 때문에 모 든 일이 벌어진 것이긴 했지만 그것을 표면적으로 밝혀 문제화 할 만한 자신은 중국 측에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결국 중국 측은 별 도움도 못 되는 항의만 몇 마디 늘어놓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 측의 비행기에 그들이 숨어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도구보다도 중국 측에서 더 잘 짐작하고 있었으나 외교상 타국의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비행기 기내에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웨이도 공항에 왔던 것이고 도구르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도구르가 비행기 주 위에 그렇게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웨이의 비호 덕분이었다. 웨이는 이번에도 실패하여 그들을 놓치면 자신의 목이 날아가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법적이기는 하지만 도구 르의 말대로 다시 한번 뭔가를 해 볼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도구르의 방법이란 것은…………….

“정말로 저렇게 해 두면 저 내부에서 벌어지는 소리가 밖에선 들리지 않게끔 차단되는 것입니까?”

웨이는 도구르에게서 눈을 돌려 묘한 도복으로 갈아입은 깡마 른 모 선생이라는 남자에게로 눈을 돌렸다. 웨이의 말을 들은 모 선생의 해골같이 바싹 마른 얼굴에서 눈빛이 빛나더니 입 주위 가 묘하게 일그러지면서 웃음이 떠올랐다.

“틀림없습니다! 저건 모산파의 비전인 절음진(切)이오. 저 안에서 폭탄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밖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 습니다. 소리만이 아니라 무전기도 작동하지 않게 되지요.” “만에 하나 총성이 밖에 들리기라도 한다면?”

도구르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모 선생을 믿소.”

모 선생은 히죽 웃어 보이면서 조금 전 웨이가 마시고 둔 빈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몸을 일으켜서 비행기 쪽으로 집어 던졌다. 병은 날아가서 비행기의 아랫부분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졌 으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병이 깨졌으면 작은 소리라도 들려 와야 정상일 것이지만…………….

“방법은 하나뿐이오. 이제 쳐들어가서 저들을 없애고, 비행기 는 자동으로 이륙시킨 다음 폭발시켜 버리는 거요. 물론 지금 터 뜨리면 일은 간단하지만 그건 외교상의 문제를 일으킬 테니 그 럴 수는 없고………….”

말을 하면서 도구르는 웨이를 노려보았다. 웨이를 만나지 않 았다면 도구르는 그냥 비행기를 폭파시켜 버릴 생각도 있었다. 곤란해지는 것은 중국 측이 자신이 아니니까……………. 그러나 웨 이를 떼어 놓고 비행기를 폭파하려 한다면 웨이와 그의 부하들 은 자신을 저지할 것이 분명했다. 도구르는 그들을 해치운 다음 공중에서 비행기를 폭파시키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비행기 사고로 죽은 것으로 처리될 거요. 중국 측에서 책임질 일은 없소.”

“그러나………….””

웨이는 아직도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저들을 생포할 수는 없겠군요.”

“생존자가 있어서는 안 되지!”

도구르가 단호하게 잘라 말하자 웨이는 더 말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면서 뒤쪽의 요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많은 수 의 요원을 데려오지 않고 소수 정예로 가장 무술에 능통하고 사 격 솜씨가 뛰어난 일급 요원들만 열 명을 골라서 데리고 온 것이 다. 현암에게 당했던 그들은 모두 속에 방탄조끼와 보호복을 입 고 있었다. 그리고 사자후에 대비해 귀에는 귀마개를 했고 복면 에 고글까지 착용한데다가 이상한 칼에 총이 부서질 것에 대비 하여 경기관총과 자동 권총류로 네 정 이상씩을 몸에 갖추었다. 도구르도 웨이가 내준 무장을 몸에 갖추었다. 웨이는 역시 믿어 지지 않는다는 듯 비행기 쪽을 바라보다가 모 선생에게 물었다. “이제 진의 설치는 끝난 것입니까?”

“끝났소. 내가 주문만 외우면 그만이오.”

“그런데 정말 무선 교신도 두절될까요?”

“됩니다. 긴 시간 동안은 안 됩니다만……………”

웨이는 허망한 기분이었다. 전파 방해도 쓰지 않고 무선 교 신을 완전히 두절시키다니! 이런 것을 군사적으로 응용한다 면…………. 한편 웨이는 다른 생각도 해 보았다. 무기 대신 이런 힘 을 전쟁에 사용한다면 분명 막강한 위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쪽만이 그런 힘을 지닐 경우이다. 양측이 그런 가공한 힘을 지닐 경우에 전쟁은 어떻게 될까? 그때 는 현재의 모든 무기들의 위력은 무력화되고 부수적인 것이 되 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의 전쟁은 핵무기가 날뛰는 지금보다도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생존자가 남게 되면 당신들이 곤란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럼, 갑시다!”

웨이의 상상은 도구르의 말 때문에 끊어졌다. 모 선생이 중얼 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것을 시작으로 요원이 먼저 산개하면서 비행기 쪽으로 다가기 시작했다.


“제길! 왜 연결이 안 되지?”

인도의 어느 허름한 길거리의 낡은 공중전화 앞에서는 승희가 신경질을 부리고 있었다. 기껏 준후가 온 힘을 기울여서 월터 보 울과 연락을 취해 전화번호를 알아냈는데, 그 전화는 황당하게 도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엔 휴대 전화라 연결이 잘 안 되나 싶어 성질 급한 승희답지 않게 한 시간 동안 통화 시 도를 했는데도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원래 는 조용조용 통화를 하고자 했는데 성질이 나다 보니 신경질을 부리면서 전화를 마구 두들겨 대어서 꽤 많은 사람들이 무슨 일 인가 하고 구경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대부분은 승희 가 전화통을 붙잡고 있어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으 나 그 사람들은 승희가 워낙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한눈으로 보 이는 판이라 뭐라고 말도 못하고 언제쯤 저 여자가 통화를 포기할 것인가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승희는 승희대로 더 조바심이 났고 배짱과 오기 비슷한 것이 치솟았다.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지하 술집에라도 틀어박혔나?”

승희는 화가 나서 수화기를 내던지며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갸 웃했다. 그렇게 중요한 전화를 그쪽에서 소홀히 할 리는 없었다. 이 정도의 계획이라면 백호가 짠 것이 분명하다고 승희는 여겼 다. 평상시 백호의 꼼꼼한 성격으로 볼 때 이렇게 장시간 연락처 를 비워 두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승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바이올렛 몰래 빠져나 온 터라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바바지를 만나기 위해서는 산길을 돌고 돌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느 사원을 가야 한 다는데, 길에 접어들게 되면 전화를 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인 도는 첨단 기술이 무시 못할 정도로 발달한 나라였지만 실제 보 통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형편없이 낮아서 외진 시골로 가면 전 화를 구경할 수 없는 곳도 많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연락을 취하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제길! 어떻게든 되겠지.”

홧김에 승희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수화기를 쾅 소리가 날 정 도로 내던지고 그런 자신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몇몇 사람들 을 째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은 혹시 마지막에 승희가 전화기를 내리치는 바람에 고장 났으면 어떡할까 하는 눈길로 승희와 전화기를 번갈아 보면서 수군거렸다. 그러나 승희는 그런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코웃음을 치면서 걸음을 옮겼다.

해가 진 지 꽤 되었는데도 더운 나라라서 그런지 공기가 후덥 지근했다.

“그래, 될 대로 되라. 바보 같은 현암군이나 신부님 정도 되면 별일은 없겠지. 나도 그럭저럭 버티는데……………. 제기랄! 더운데 어디 가서 샤워나 했음 좋겠다.”

승희는 기왕 연락도 안 된 것, 될 대로 되라는 배짱으로 일부 러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사방을 기웃거려 보았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될 대로 되라지. 그런데 왜 이리 더워? 소 설의 누군가는 더워서 살인까지 했다는데, 아무리 형편이 안 좋 아도 씻고 화장도 새로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방을 둘러보던 승희의 눈에 저만치 떨 어진 곳에 어느 모텔의 간판이 보였다. 지방의 소도시임에도 불구하고 큰 건물인 것으로 보아 관광객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진 곳 같았다.

“저기라면 사우나가 있을지도 모르겠네. 가보자!”

승희는 쫓기고 있는 자신의 처지도 망각하고 바삐 걸음을 옮 겼다. 아무리 형편이 급해도 먼지와 땀에 찌든 몰골로 지내고 싶 지는 않았다. 화장도 고쳐야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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