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4화 – 홍수 17 : 도구르의 비밀
도구르의 비밀
현암은 창가에 앉은 채 피로에 잠시 눈을 붙이고 졸다가 왼팔 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살펴보니 월향이 조금씩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왼쪽 팔목에 감은 칼 집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아니, 왜?”
현암은 월향이 왜 그러는 것일까 하고 말을 하려다가 말을 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창가로 눈을 돌 렸다. 몇몇 복면을 한 남자들이 기척도 없이 비행기 쪽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어?”
현암이 놀라서 옆에서 잠들어 있는 박 신부를 깨우기 위해 몸 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요란한 총소리가 나면서 현암이 내다보 고 있던 창문이 퍽 소리와 함께 깨어져 나갔다. 저격용 총인 것 같았다. 현암은 반사적으로 옆에서 잠들어 있다가 놀라서 눈을 뜬 박 신부를 몸으로 덮어 쓰러뜨리고는 총소리에 놀라 몸을 일 으키려던 아라와 최 교수를 양손으로 덜미를 잡아 몸을 일으키 지 못하도록 찍어 눌렀다. 그러는 순간 비행기의 문이 휙 하고 열리면서 몇 명의 남자들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뛰어들 자마자 인정사정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경기관총을 겨누었다. 현암이 미처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였다. 그대로 총알이 쏟아지기 직전에 박 신부가 아직 힘을 채 끌어 올리지는 못한 오라 구체를 몇 개 내쏘았고 방아쇠를 당기려던 남자들은 난데없는 빛의 덩 어리를 맞고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현암은 몸을 굴리 면서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발목이 걸린 남자들이 우당탕 소 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러나 일행 중 조금 뒤쪽에 처져 있어서 박신부의 오라 구체에 맞지 않은 한 남자가 현암이 휘두르는 다 리를 피해 위로 뛰어올랐다가 떨어져 내리면서 현암의 발목을 찍어 밟았다. 발목뼈가 어긋나는 것 같은 통증이 날카롭게 느껴 졌다. 몸을 뒤틀면서 일으키려 했지만 앞에서 현암에게 다리가 걸린 자들이 우르르 자신의 몸 위로 넘어지는 바람에 몸을 돌리 지 못했고 그 바람에 넘어지는 남자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현 암의 발목을 밟은 남자는 재빨리 총부리를 박 신부 쪽으로 겨누 고 발사하려 했으나, 그 순간 조종석에서 문을 열고 뛰쳐나온 백 호가 발차기로 남자의 등을 냅다 후려갈겼고 그자는 미처 총을 발사하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 순간 최 교수가 그자에 게서 총을 빼앗아 들고 크게 외쳤다.
“저, 전부 손들어!”
최 교수가 소리를 지르자 비행기 안으로 들어 왔던 남자들은 일순 주춤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은 했어도 비행기 안은 넓지 않 았고 복면의 남자들 사이에 백호와 현암도 끼어 있어서 최 교수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최 교수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이번 에는 뒷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복면의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백호는 그자들이 달려오는 것을 보았지만 앞문으로 들어온 또 다른 복면의 남자 한 명과 싸우며 다른 자들이 안에 들어오지 못 하도록 막고 있어서 몸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자가 최 교수에게 날아들면서 돌려차기로 한 방을 먹이자 최 교수는 용기를 낸 보 람도 없이 총을 떨어뜨리고 비행기의 유리창에 얼굴을 비비면서 쓰러져 버렸다. 그자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것을 쓰러져 있던 박 신부가 재빨리 가방을 던져 맞혔고, 그 찰나의 틈을 타서 박신 부는 오라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오라 막이 커다랗게 부풀어 가자 현암과 박 신부, 최 교수 등 은 오라에 밀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들어갔지만 다른 자들은 비 틀거리며 밀려났다. 그 순간 현암이 기합 소리와 함께 힘을 모 아서 자신을 덮어 누르고 있던 서너 명의 남자들을 튕겨 내 버 렸다. 그자들은 튕겨나면서 다시 박 신부의 오라 막에 부딪혀 픽 쓰러졌다.
백호는 아직도 문을 봉쇄하면서 어떤 남자 한 명과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싸우고 있었다. 현암이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박 신부도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복면의 남자들과 대항할 준비를 갖 추었다. 그때 낯익은 영어의 목소리가 비행기 안에 울려 퍼졌다.
“모두 저항하지 마라!”
현암과 박 신부 등은 아차 싶었다. 뒷문으로 들어온 또 다른 한 남자가 아라의 덜미를 움켜쥔 채 총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 꼬마는 저세상으로 간다!”
그 목소리를 듣고 기내로 들어오려던 자를 걷어차버린 후 몸 을 돌린 백호가 소리를 질렀다.
“너는 도구르!”
도구르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아라는 앙탈을 부리면서 도구르 의 손목을 깨물려고 했지만 도구르는 그냥 아라의 덜미만을 꽉 붙잡은 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벽 쪽으로 붙어 서라!”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이건 불법적인 침입…………….”
“벽 쪽으로 붙어서라고 말했다!”
도구르는 백호의 항의를 묵살하면서 이번엔 아라의 머리에 총 을 겨누었다. 그사이 복면의 남자들은 일어나 각각 한 사람씩을 맡아서 경기관총을 겨누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백호와 박 신부, 현암, 최 교수와 막 끌려 나온 조종사와 요원까지 일곱 명은 창 가에 등을 돌린 채 붙어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중에 백호가 강력하게 항의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미쳤군! 공항 안에서 총소리를 내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아 무리 중국 측에서도 이들을 데려가고 싶어 한다지만 이런 식으 로 나가는 것을 과연…………….”
그러자 도구르는 크게 웃더니 총구를 위로 향하게 한 뒤 몇 방을 쏘아댔다. 요란한 총소리가 비행기 안을 가득 메우자 백호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도구르는 다시 총구를 아라의 머리에 들이대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까지 할 필요는 없다. 밖에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테니…….”
도구르의 말을 듣고 박 신부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심상치 않 은 기운이 비행기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 었다. 필경 저쪽에서도 무슨 수를 써서 예전에 준후가 썼던 것과 비슷한 수법으로 비행기 안에서 나는 소리를 차단시킨 것 같았 다.
“비행기의 소리를 ………………”
“소리뿐만 아니라 무전도 차단되었다. 이제 너희는 고립되었 으니 더 이상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도구르가 여유 있게 말하는 사이에도 도구르의 팔목에 잡혀 있는 아라는 속절없이 계속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아라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을 도 구르는 알지 못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어서 끝내시오.”
도구르가 말하자 복면의 남자들은 철컥거리면서 총을 장전했 다. 현암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저들은 정말 쏘려고 하는 것이다. 현암은 총구가 겨냥되자 풀썩 아래로 주저앉으면서 몸 을 돌려 뒤에 있는 복면 남자를 후려치고는 왼팔을 들어 월향검 을 내쏘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한 동작이었다. 월향검이 귀곡성 을 지르면서 날아가자 다른 사람들은 놀라 흠칫했고, 특히 백호 와 맞싸우던 자는 월향검의 위력을 아는 듯 몹시 놀라는 것 같았 다. 월향검은 도구르에게 똑바로 날아 들어갔고 현암은 공력을 모아 무서운 힘으로 총을 겨눈 자들을 우르르 밀쳐냈다. 그러나 도구르는 대비라도 해 둔 것처럼 월향검이 무서운 기세로 날아 드는 데도 개의치 않고 아라를 번쩍 쳐들어서 자신의 앞을 막았 다. 그러자 날아들던 월향검이 꺄악 소리를 지르면서 궤도를 틀 었으나 비행기 안이 너무 좁은 탓에 미처 방향을 다 돌리지 못하 고 비행기의 천장에 박혀 버렸다.
“같은 수법에 또 당할 줄 아나? 움직이지 맛!”
도구르가 고함을 치자 현암과 다른 사람들도 흠칫할 뿐 더 이 상 움직이지 못했다. 순간의 정적이 비행기 안을 감쌌다. 그때 뭔가가 문 쪽에서 휙 하고 집어 던져져 도구르와 퇴마사들의 사 이에 철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니!”
도구르가 데리고 왔던 모산파의 주술사 모 선생의 기절한 몸 뚱이였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도구르가 놀라고 있는데 문 쪽에 서 엄청난 거구의 남자가 결코 좁지 않은 비행기 문을 비집고 서서히 들어왔다. 모두가 그의 출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구르와 같이 온 사람들은 그 사람의 덩치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퇴 마사들은 놀라움에 …………. 그 사람은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할 인디 언의 주술사 성난큰곰이었던 것이다.
너희야말로 움직이지 마라.
성난큰곰은 마음속에 소리를 울리게 하는 특유의 표현법으로 모두에게 똑똑히 느껴지도록 말했다. 그러면서 몸에 힘을 주자 성난큰곰의 몸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옷의 단추가 떨어지 면서 벌어진 옷깃 사이로 무섭게 발달한 팽팽한 근육이 보였고, 부상 때문에 몸에 감았던 붕대와 깁스가 두두둑 소리를 내며 끊 어져 나가는 것이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복면의 남자들은 당황한 몸짓으로 난데없이 나타난 거한에게 총을 겨누었으나 성 난큰곰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장난감은 함부로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니다.
한 복면의 남자가 총을 쏘았으나 총알은 핑 소리와 함께 성난 큰곰의 몸에 맞고 튕겨 비행기 안을 핑핑 소리를 내며 돌다가 바 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괴, 괴물…….””
복면의 남자들과 도구르가 놀라서 주춤거리는데 그들의 눈앞 으로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도구르가 깜짝 놀라 스쳐 지나 가는 그림자를 향해 총을 겨누려 했으나, 그 그림자는 겨누려 하면 유령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해서 도저히 겨눌 수가 없었 다. 그러다가 돌연 눈앞에 펄럭하며 금빛과 붉은빛이 교차로 번 쩍하는 것을 느낀 순간, 도구르는 허공을 날아 뒤로 떨어지고 있 었다. 자신의 몸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을 도구르는 떨어지고 난 다음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란 도구르가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굴려 불을 끄는 동안, 그 그림자는 언제 빼앗았는지 아라를 안은 채 모습을 드러내더니 몸을 돌리고 킬킬거렸다. “천하무적 현암 씨도 당할 때가 있구먼. 킥킥킥.”
주기 선생이었다. 주기 선생이 힐기보법과 십이지신술로 도구르를 간단하게 제압해 버린 것이었다. 현암과 박 신부 등은 방금 벌어진 일들이 믿어지지 않아서 망연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사 이 벌써 성난큰곰은 거의 장난 놀 듯, 전의를 상실한 복명의 남 자들을 장난감처럼 집어 올려서 무지무지한 주먹으로 한 대씩 가볍게 쳐 기절시킨 뒤 한구석에 물건 쌓듯 쌓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길・・・・・・”
백호가 놀라며 말하자 주기 선생이 우스운 듯 큰 소리로 웃고 나서 아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라는 쓰러져 있는 최 교수에 게 달려갔다.
“이건 내가 시작한 일이오. 내가 끝을 맺어야지.”
이번에는 현암이 평정을 되찾으면서 천장에 박혔다가 돌아온 월향검을 왼팔에 꽂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어떻게 알았지?”
주기 선생이 아라를 가리키며 웃었다.
“잊었나. 저 아이의 목걸이에다 조경술을 걸었던 게 누구인지를 그것만 있으면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어도 이쪽 일은 훤히 알 수 있지.”
주기 선생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몸에 붙은 불을 다 끈 도구르 를 보더니 깃대를 빼 들었다.
“벌써 불 다 꼈나? 그럼 재미없지.”
주기 선생이 십이지번을 다시 도구르에게 향하자 한 줄기의 불길이 뻗어나가 도구르에게 덮쳐들었다. 간신히 끈 불이 다시 몸에 붙자 도구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렸다.
“또 끄라구. 그럼 또 붙여 줄게.”
현암과 박 신부는 눈살을 찌푸렸다. 박 신부가 도구르에게 가 려고 했으나 주기 선생이 그 앞을 막아섰다.
“잠깐만요, 신부님. 안 죽일 테니 염려 마세요. 저놈이 수작을 부리면 오붓하게 이야기할 틈이 없거든요. 그러니 제게 맡기시길….”
박 신부는 곱지 않은 눈으로 주기 선생을 보았으나 앞으로 나 가지는 못하고 멈추어 섰다. 그러자 현암이 소리쳤다.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현암이 말하자 주기 선생은 박 신부에게 하던 것과는 딴판으로 언성을 높여서 소리를 질렀다.
“뭐가! 뭐가 잘났다고 내게 충고하는 거야! 내가 안 도와줬으면 벌써 벌집이 됐을 주제에!”
“도와준 것은 고맙다. 그래도 이런 짓은 하지 마!”
현암이 말하자 주기 선생은 또 설교냐는 듯 짜증나는 얼굴을 짓다가 딴소리를 했다.
“그럼 날 형님이라고 불러.”
현암은 어이가 없었다.
“뭐?”
“내가 구해 줬으니 형님이라고 부르란 말야. 그럼 불도 안 지를게.”
“지금 장난하자는 건가?”
현암이 핏대를 올리는 사이 어느새 박 신부는 도구르에게 다가가서 몸에 붙은 불을 껐다.
“괜찮은가?”
“저리 저리 갓!”
도구르는 발악을 했으나 박 신부는 고개만 설레설레 흔들고는 말을 이었다.
“왜 우리를 그토록 쫓는 건가?”
도구르는 박 신부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예상외로 박 신부가 꿈쩍도 하지 않자 악을 썼다.
“수호자의 뜻이다! 놔!”
“수호자?”
도구르는 급히 입을 다물고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광기 서린 눈으로 박 신부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 박 신부가 놀라서 뒤로 물러서려는데 도구르가 수류탄을 꺼내 들었다.
“모두…………… 같이 가는 거야!”
도구르가 수류탄을 꺼내자 주기 선생이 제일 먼저 기겁을 했다.
“으악! 또 폭탄이냐? 폭탄은 싫어!”
박 신부도 놀라서 뒤로 더 물러섰다. 도구르가 눈을 빛내면서 안전핀에 손을 댔다.
“너희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야! 모두 같이, 같이 가자!”
순간 현암은 온 신경을 집중하여 왼팔을 내뻗었고, 그러자 월 향이 귀곡성도 지르지 않은 채 무섭게 날아들었다. 도구르는 얼 른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으려 했지만 안전핀이 뽑히는 순간, 월 향이 수류탄의 윗부분을 반으로 잘라 버리고 지나갔다. 수류탄 의 폭약이 담긴 아랫부분이 털썩 하고 땅에 떨어졌고 그 서슬에 상처를 입은 도구르의 피가 투둑 바닥에 떨어졌다. 도구르는 그 것을 보고는 허망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한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면서 서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그런 도구르를 보면 서 현암은 말없이 되돌아온 월향검을 받아 들었고 박 신부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듯 도구르에게 다그쳐 물었다.
“우리가 왜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
박 신부의 목소리를 들으며 백호는 비행기 밖의 상황을 유심 히 살폈다. 성난큰곰이 모 선생의 진을 깬 이후에도 이들은 성난 큰곰에게 총을 쏘았기 때문에 공항 쪽에서도 총소리를 들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공항 측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백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백호는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비화시키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고, 가능하다면 조용하게 처리하 고 싶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백호는 눈을 돌려 복면한 사람들을 무의식적으로 훑어보았다. 그런데 복면 남자 중 한 사람-자신과 탑승구 부근에서 싸웠 던의 눈빛이 어딘가 낯익었다. 백호는 그자의 복면을 벗겼다. 웨이였다.
“웨이 씨, 당신까지…………. 그렇다면 이번 기습은 중국 측의 공식적인 입장입니까? 전쟁을 하자는 것인가요?”
웨이가 괴로운 듯이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건 내 개인적인 행동이었소.”
백호는 눈빛을 빛냈다.
“그러면 같이 온 사람들은 웨이 씨의 친구나 가족들인가요? 아니라면 중국에서는 개인이 잘 훈련된 사병 집단을 데리고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까?”
웨이는 절망의 나락에 빠진 것 같았다. 아무리 중국 정부라고 해도 다른 나라의 외교 전용 비행기를 습격했다는 것은 상부에 받아들여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백호가 이 일을 외교 문제로 비화시키면 중국 정부에서는 웨이와 여기 탄 요원들의 모든 기 록을 삭제하고 그들이 ‘테러리스트’이며 중국 정부와는 전혀 관 계가 없다고 나올 것이 뻔했다. 그럴 경우 이들의 생사여탈권은 한국 정부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는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백호는 웨이의 표정을 보고 그의 생각을 반쯤은 짐작할 수 있 었다. 그러나 웨이가 모르는 사실도 한 가지 있었다. 웨이는 백 호가 한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알았으나 실은 자의적으로 퇴마사들을 위하여 행동하는 중이라는 점이었다. 그 것이 백호의 약점이었고 그 때문에 이번 일을 크게 비화시킬 입 장이 되지 못했다. 백호는 이 일을 어떻게 긍정적인 면으로 이용 할 수 있을까 궁리해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성난큰곰의 목소리 가 울려왔다.
저 남자도 의지가 굳은 사람이다. 무리하게 하지는 마라.
백호는 성난큰곰도 남의 마음을 읽고 남에게 마음속으로 이야 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쉽지 는 않았지만 성난큰곰을 향해 생각을 모아 보았다. 이러다 보면 그럭저럭 백호도 마음속으로 대화하는 데 익숙해질 것 같았다.
이 일로 우리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소만………….
그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저 남자는 여차하면 자살할지 도 모른다.
백호는 도구르를 바라보았다. 도구르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 처럼 주저앉아 있었고, 박 신부는 그런 도구르를 계속 들여다보 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복면을 한 중국 요원들을 결박 하는 중이었다. 저쪽에선 현암과 주기 선생이 말다툼을 계속하 고 있었다.
백호는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판단을 내렸다. 그래, 모든 것은 일단 도구르의 책임으로 돌리자. 그리고…………….
“웨이 씨, 당신의 이번 일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스 스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면 나도 당신들을 속인 바 있소. 우리 타협하지 않겠소?”
“나에게는 그럴 권한이 없소.”
“권한이 없는 사람이 총을 난사하며 돌입한단 말입니까? 그런 권한을 가지는 것이 타협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것은 내 자의적인 일이었소.”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이 비행기에 저 능력자들을 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는 않았겠군요?”
“그렇소. 아직 하지 않았소.”
“좋습니다. 앞으로도 하지 마십시오. 지난번에 당신은 이들을 놓쳤고, 그 후로 이들을 보지 못한 겁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 면 우리도 이번 일은 없는 것으로 하겠소.”
“그러나………….””
“물론 당신은 상부에 보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 면 당신은 어떻게 우리가 이 비행기 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되 었는지, 어떻게 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지, 또 왜 탄 환의 흔적이 남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당신이라면 그런 짓은 하지 않겠소.”
웨이는 입술을 깨물면서 고민하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이제 자신에게 이 게임은 끝난 것이다.
“좋소. 당신이 이겼소. 그러면 우리를 놓아주시겠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공항에 연락하여 우리를 즉각 출발하게 해 주시오. 더 기다릴 여유가 없고 솔직히 여기 있다는 것 자체 가 불안합니다. 물론 우리를 추적하지도 말아야겠지요.”
“알겠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우리도 나름대로 자위할 증거 는 필요합니다. 도구르 씨는 우리와 같이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백호가 도구르를 데리고 가려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 다. 첫째로 중국 공군이 비행기를 격추한다든가 하는 위험에 대 비한 인질을 잡아 놓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지나치게 자신들 을 추적하는 도구르를 그냥 놓아둘 수가 없기 때문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도구에게 뭔가 이상한 느낌이 왔기 때문이다. 지금 박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도구르에게는 인터폴의 임무 말고도 비밀이 있는 것 같은 냄새가 났고, 그것을 시간적 여유를 갖고 알아내고 싶었다.
“도구르 씨는 프랑스의 경위이자 인터폴의 요원입니다. 인질 이 필요하다면 내가 남겠습니다.”
“그건 우리의 선택 사항입니다. 웨이 씨의 의사가 어떻든 우리 는 그래야겠소. 도구르 씨의 행방에 대해서는 웨이 씨가 잘 둘러 대도록 하시오.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이 비행기 안에 같이 들어왔다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겠지요?”
“그럼 됐소. 어서 공항 관제탑에 연락을 취해서 우리를 떠날 수 있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빨리 가 버리는 편이 당신 으로서도 속 편하지 않습니까?”
백호가 다그치듯 말하자 웨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웨이와 그 부하들이 밖으로 나간 후에도 박 신부는 넋을 잃은 듯 앉아 있는 도구르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도구르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지 퍽 초췌한 모습이었고 십 년은 더 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런 모습의 변화 때문에 도구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박 신부는 자세히 살펴보다가 도구르의 손목을 잡았다. 도구르는 몸을 흠칫하면서 박 신부의 손에 잡힌 손목을 빼어 내려고 했지만, 박 신부는 도구르의 손목 을 꼭 틀어쥐고 자세히 손바닥과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가도구르의 얼굴로 눈을 돌려 눈꺼풀을 뒤집어 보려 했다.
“뭐 하는 거야! 당신은……………”
그러나 도구르는 이상하게도 엄숙하게 보이는 박 신부의 눈빛 과 마주치자 꼼짝하지 못했다. 박 신부는 도구르의 눈동자를 살 피더니 이번에는 배 부위를 만져 보았다. 도구르는 불안한 듯 눈 을 굴렸으나 저항은 하지 못했다. 박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 말했다.
“중증이군요. 아직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멘.”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이전에 의사였습니다. 당신,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겁니까?”
“무슨 말이야? 어떻게 움직이다니?”
도구르는 소리를 질렀으나 눈빛에는 무엇인가 숨기는 듯한 기 색이 역력했다. 그것을 보고 박 신부가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눈 을 빛냈다.
“당신, 누가 당신의 몸에 무슨 짓을 했지요?”
“너희가 내 몸에 불을 붙이지 않았나?”
“그것 말고 말이오! 당신의 병은…………….”
도구르는 무슨 소리를 지르려다가 간신히 억제한 듯,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않겠다! 죽일 테면 죽여!”
“혹시 당신이 말한 수호자가 당신에게?”
도구르는 입을 꽉 다물고 눈까지 감은 채 박 신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난큰곰이 박 신부에게로 다가와서 박신부에게 마음을 전달해 왔다.
이 사람, 뭔가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이 뭔지는 잘 모르겠다.
박 신부도 입을 열지 않고 마음속으로 괴로운 듯이 대답했다.
이 사람은 벌써 죽었어야 할 사람이오. 아멘!
성난큰곰은 박신부가 전해 온 생각에 놀랐는지 눈을 부릅떴다.
“헉! 이, 이건…….”
승희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벗어 들었던 윗옷을 땅에 떨어 뜨렸다. 사우나탕에 들어와서 목욕을 하려고 탈의실에서 윗옷을 벗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머릿속 이 아찔해졌기 때문이다. 현기증이나 어지러움 같은 것은 아니 었다.
“보・・・・・・ 보여! 느껴져!”
놀랍게도 윗옷을 벗자 그동안 캄캄하기만 했던 자신의 투시력 이 되살아나는 듯한, 그래서 간절히 마음속으로만 바라고 있었 던 수많은 정경들이 눈앞에서 폭발하듯 나타났다. 아직 신경을 집중하지 않은 상태여서 뒤죽박죽인데다 두서가 없었지만 연희 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 박 신부의 굳은 얼굴, 현암의 성난 듯한 모습 등이 뒤섞이면서 모자이크처럼 폭발적으로 떠올랐다가 점 멸되어 갔다.
“이, 이게 대체…………
승희는 갑자기 나타나는 영상들에 혼란스럽기도 했고 힘이 폭 발할 정도로 늘어난 것 같아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서 몸을 휘청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기뻤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 승희의 귓전에 낯익은 음성이 울려왔다. 승희가 아주 잘 아는 승희의 몸속에 있는 존재의 음성이었다.
봉인을 조심하라. 그리고 다르마에 충실하라. 때가 거의 이르렀으니…….
‘애염명왕!’
승희는 혼란스러운 속에서도 정신을 집중하여 모처럼 나타난 애염명왕에게 이야기를 걸려고 했다. 그러나 애염명왕은 승희가 부르는 소리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뒤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 한 마디만 남겼을 뿐이었다.
때가 되어 간다. 너와 나의 모든 것들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다르마에 충실하라. 그대 스스로의 의지를 굽히지 않기를………….
‘나의 의지라구?’
그러나 애염명왕의 목소리는 승희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린 듯,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는 썰물이 밀려가듯, 혼란스러웠던 승희의 머릿속이 맑아져 갔다. 승희는 그것이 애 염명왕이 해준 일이라 생각했다.
‘고마워. 뭔지는 모르겠지만……………’
승희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벗어 두었던 윗옷을 집어 들었 다. 목욕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준후에게 달려가 자신의 힘이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옷 자락에 손을 대자마자 찌릿하는 묘한 느낌과 함께 맑아졌던 자 신의 머릿속이 다시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어라랏! 이게 뭐야!’
승희는 깜짝 놀라면서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옷을 떨어뜨 렸다. 그때서야 승희는 애염명왕이 조심하라고 말했던 ‘봉인’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 그 봉인이란 게 내 옷이었단 말야? 너무 오래 안 갈아입어서 그런 건가?’
승희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볼펜을 꺼내 그 끝으로 옷을 이 리저리 휘저으면서 살펴보았다. 한참을 살피자 옷의 한쪽 구석에 조그맣게 무슨 얼룩 같은 것이 묻어 있는 것이 보였다. 가만 히 보니 그것은 자신으로서는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자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승희는 시험 삼아 그 문자에 살짝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그러자 다시금 머릿속에 캄캄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놀라서 얼른 손가락을 떼었다.
그럼 누군가가 내 옷에 이 문자를 새겨서 투시력을 없앴단 말 인가? 그러면….
승희는 매섭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의 안 쪽에다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최근까지 자신과 같이 있 었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준후와 바이올렛.
‘역시 바이올렛 짓이구나. 어쩐지 수상하다 했더니 이 늙어빠 진 꿀돼지 같은 여자가…………….’
승희는 그동안 투시가 안 돼 고통스러워했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서 입술을 깨물면서 바이올렛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 27…….
‘캄캄해! 블랙서클 놈들과 똑같아. 그럼, 그 돼지도 레그나처 럼 블랙서클의 일당이었단 말인가?’
승희는 더 이상 투시를 계속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이 수상 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의외였다. 자신도 바이 올렛의 마음속을 몇 번 보려고 시도했지 않은가? 그때는 어떻게 속여 넘길 수가 있었던 것인지…………. 승희는 당황하면서도 그 와중에 현암과 박 신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모았다.
‘휴, 무사하구나. 자세한 투시는 나중에 하고………………’
우선 준후에게 달려가서 상의를 해야 했다. 준후는 강하기는 하지만 아직 어리고, 더구나 바이올렛이 그렇게 흉물스러운 여 자라는 것은 모르고 있으니 방심하고 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도 몰랐다. 승희는 몸을 일으키고 탈의실 안을 둘러보다가 막 들 어오는 어느 인도 여자의 옷을 다짜고짜로 빼앗아 걸치고는 밖 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물론 그 여자가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 었는지는 모르지만 ‘쏘리!’라고 한마디는 해 주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좀비처럼 주술력으로 살아 있는 인형이란 말인가?
성난큰곰은 박 신부의 말을 좀처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러나 박 신부는 고개를 젓고 성난큰곰 대신 도구르에게 말했다.
“당신은 인터폴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감정으로 우 리를 대하고 있소! 맞지요?”
도구르는 대답하지 않고 잠깐 고개를 들어 박 신부를 노려보 다가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버렸다. 박 신부는 대답을 기다렸 으나 도구르가 말이 없자 말을 이었다.
“수호자의 명령 때문이오? 그가 우리를 없애라고 했나요?”
도구르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 신부도 무언가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의 몸에는 이상이 있소. 간 질환일 것입니다. 맞나요?”
“사실 당신이 움직이고 있는 것조차 신기한 일이오. 혹시 당신 이 말한 그 수호자가 당신을 고쳐 주었소? 그래서 당신이 수호자 의 명을 따르는 겁니까?’
“수호자님의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더러운 가짜 성직자!”
“글쎄요. 당신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정식 성직자는 아니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의사로서 말하는 것이니 대답해 주 세요. 당신은 중증의 간 질환에 걸렸는데 수호자가 신기한 힘으 로 낫게 해 주었지요? 그래서 당신은 수호자를 따르는 거구요. 맞습니까?”
도구르는 고개를 돌려 박 신부의 눈빛을 피했으나 도구르의 태도는 박 신부의 말을 인정하는 듯했다.
“수호자가 우리를 없애라고 하던가요?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수호자가 당신을 낫게 해 주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좋을 대로 생각하시오.”
“도구르 씨, 현실을 직시하시오. 수호자가 누구인지 아십니 까? 그리고 그가 정말 당신을 도왔다고 생각합니까?”
“그분은 너희들과는 달라! 위선으로 뭉쳐진 너희와는……………. 그분은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움직일 수 있게 해주셨다.”
박 신부는 착잡한 기분에 빠졌다. 도구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도구르는 수호자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호자를 믿고 그가 내리는 명령은 무엇이든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병이 나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았으니까 움직이는 것 아닌가? 예전의 나는 병상에서 꼼짝 도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보다시피 지금은 살아서 활동하고 있 지 않은가! 그것도 아주 건강하게!”
“근래에 병원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건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약이라 해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병을 치료하여 몸에서 몰 아내는 약도 있지만 순간적으로 고통만을 없애서 마치 나은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약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약입니 다. 당신의 경우에는…………….
“닥쳐!”
도구르는 소리를 질렀다.
“공연한 말을 만들어 내지 마! 마약을 먹고 죽을 사람이 살아 났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어! 터무니없는 말로 수호자님을 중 상모략하지 마라!”
“당신 말대로 수호자가 당신을 낫게 해 주었다면 어째서 몸에 부기가 있고 간경화가 무섭게 진행된 것이 그대로 내 손에 느껴지는 걸까요? 도구르 씨.”
“그만! 그만두란 말야!”
도구르는 고개를 미친 듯 저으며 소리쳤다.
“그만둬!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나는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 어. 그들만을 험한 세상에 내버려 두고 나 혼자 저세상에 갈 수 는 없어. 그럴 순 없다구. 그래, 네 말대로 수호자님이 악마라고 하지. 그런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아. 하루라도 더 살 수 있다면 다 른 건 아무래도 괜찮단 말야! 알았어? 응? 영혼의 안식이니 구원 이니 그런 종류의 소리는 듣기도 싫어! 나는 단지 …………..”
박 신부는 눈을 지그시 감고 도구르의 말을 듣고 있었다. 도 구르의 말을 들으니 박 신부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 래, 누구나 살고 싶어 한다. 가까운 사람과 헤어지기 싫고 자신 이 살던 세상과 이별하고 싶지 않은 법. 도구르의 행동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 신부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여겼다.
“도구르 씨,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박신부는 입을 열고 나자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신은 아까 수류탄을 들고 자폭하려고 했습니다. 당신의 말 대로라면 그건 납득이 안 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삶이 중요한 것이라면 어째서 그 보답이라는 이유로 자신, 어쩌면 남의 생명까지도 같이 버리려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도구르는 뜨끔한 모양이었지만 낮은 어조로 슬픈 듯이 말했다.
“날 훈계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은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일에 앞서서 자신의 병 을 고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 병원도 나를 고치지 못했소. 난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 었단 말이오!”
“암이나 백혈병에 걸렸다가도 특별한 치료 없이 치유되는 경 우도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입니다. 살 수 있 다는 희망을 의지로 밀고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 어째서 삶에 대해서는 그만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까? 어 째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고 남에게 의탁하고 그 말만 믿으려 합니까?”
“그러나 나는 가망이 없다고 했소. 어떤 치료도 효과가…………….”
“약이나 치료 없이도 의지가 강하면 치유되는 경우가 있지만, 아무리 좋은 약을 써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절대로 완치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 몸을 무리하게 혹사시키고 있습니 다. 수호자는 당신을 완치시킨 것이 아닙니다! 고통만을 없애고 오히려 몸을 무리하게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당신이 살고 죽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약 그에게 당신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있 었다면 정말로 병을 낫게 할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는 오로지 당신의 몸에서 고통만을 느끼지 않게 하고 몸을 혹사 시키는 주술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했지 요? 그러나 간 질환으로 사람이 금방 쓰러져 죽는 일은 드뭅니 다. 당신에게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았다고 믿고 정상인처럼 이렇게 몸을 혹사한다면 당신이 살아 있는 시간은 역으로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라도 더 살게 해 주었다고요? 그게 아닙니다!”
“뭐, 뭐라고?”
“지금 당신에게는 절대적인 안정과 치료,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 살아 나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수호자의 말이 필 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나에게 생명을 주겠다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갖 사악한 술법과 남 의 피로 생명을 연장하는 주술이 있지만,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 닙니다. 나는 영생을 얻고자 힘을 악용하다 비참하게 된 경우를 많이 보아 왔습니다. 좀비나 구울 같은 괴물이 되어 버리거나 그 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 버린 자들도 보았습니다. 당신은 그런 삶 을 바라는 것입니까? 썩어 문드러진 존재이거나 육신조차 갖지 못하고 지각마저 마비된 어둠의 존재로 살고 싶은 것입니까? 그 러한 자들조차도 결국은 더욱 참담하게 소멸되어 갔습니다. 당 신이 살고 싶다고 한 것은 단지 숨을 쉰다는 그런 의미뿐인가요? 당신은 당신으로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만・・・・・・ 그만해!”
도구르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 자리에서 엎어지듯 머리를 땅에 박고 귀를 막았다. 박 신부도 흥분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 서 습관적으로 성호를 그었다. 현암이나 주기 선생, 성난큰곰까 지도 그러한 도구르와 박 신부를 말없이 바라보았고, 둘이 나눈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라만이 최 교수의 품 안에서 눈동자 를 굴리고 있었다.
조용한 정적 사이에서 도구르의 흐느끼는 소리가 비행기 안을 채웠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비행기는 웨이가 서둘러 알선해 준 공항의 이륙 신호를 받고 활주로로 나아가고 있었다.
“저들은 어떤 부류의 악당들인가요? 도구르를 인질로 잡다 4…….”
서서히 이륙하는 비행기를 보면서 웨이의 옆에 서 있던 모선 생이 억울하다는 듯, 웨이에게 말했다.
“나도 모릅니다. 악당인지 아닌지………. 그러나 위험한 존재들 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소. 비검술을 쓰고 강기 같은 것을 퍼뜨리고…………. 나도 비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모산파의 술수에 한 가닥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저들은 그런 정도를 초월하 는군요.”
“아마 저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거요. 핵미사일이라도 쏘기 전에는……………
모 선생은 눈을 빛내면서 생각하다가 웨이에게 물었다.
“저대로 가게 놓아둘 겁니까?”
“일단은 할 수 없지요. 그러나 그대로 두지는 않을 거요. 저들 의 항로가 밝혀지는 대로 추적할 계획이오.”
“추적이요?”
“우리만이 아니라 이 일에 관심을 가진 나라들은 많소. 그리고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가 저들의 힘을 독점하는 것을 원치 않을 거요. 그렇다면 아무도 갖지 못하게 만드는 수밖에………….”
“그러면?”
“곧 인터폴을 중심으로 각국의 요원이 저들을 추적할 것이고, 공동 작전을 펴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나도 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나도 데려가주시오!”
웨이는 고개를 돌려 모 선생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왜 가고 싶어 하는 거죠?”
“도구르는 내가 큰 신세를 진 사람이오. 더구나 나는 이번에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소. 모산파의 명예와도 관련된 문제요. 그러니 ……….”
웨이가 모 선생의 말을 중단시키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그보다는 저들에게서 뭔가 알아낼 것이 있을 것 같아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건・・・・・・.”
“그만두시오. 당신도 저들처럼 전 세계 정보기관들에게 쫓기 는 신세가 되고 싶소?”
모 선생은 말문이 막힌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웨이는 다시 웃음기를 지우고 어두운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어. 저들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세상이 전부 미쳐 버린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