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5화 – 홍수 18 : 바바지의 선물
바바지의 선물
승희는 숨이 턱에 닿을 만큼 숨 가쁘게 자신들이 묵고 있는 오 두막으로 달려갔다. 준후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승희는 왜 바이올렛이 헛간 같은 곳에서만 자신들을 묵게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보안상의 이유로 사람이 별로 드나들지 않는 곳에 거처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 같았다.
바이올렛은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승희의 투시력을 막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누추하고 목욕 시설이 없는 곳이라야 했 으니까! 물론 쫓기는 입장이라 사람 눈에 띄는 곳을 피해야 한다 는 암묵적인 약속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바이올렛도 승 희가 이런 와중에 팔자 좋게 밖으로 나가 목욕을 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승희가 숙소로 돌아왔을 때 불은 꺼져 있었다. 승희는 마음을 졸이면서 숙소의 문을 탕탕 두드렸다. 잠시 후에 천만다행으로 준후가 눈을 비비면서 나왔다.
“어, 언제나갔어요. 누나?”
“응?”
승희는 준후의 모습을 보자 안심이 되어서 잠시 입을 열지 못 했다. 그때 준후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아까 바이올렛 할머니가 왔어요. 난 누나가 화장실 간 줄 알고 그렇게 말했는데……………. 말이 안 통해서 손짓 발짓 하느라 혼 이 났어요.”
“아, 그래? 잘했어!”
“어, 그럼 화장실 갔던 게 아니었나요?”
“아니, 아니. 맞아. 그런데 그 할망구가 뭐라고 하든?”
“내일 아침이면 바바지 님이 들르는 사원에 가야 한다고 말하 고는 바로 나갔어요.”
원래 승희의 계획은 준후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준후와 함께 바이올렛을 잡아 족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바바지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마음을 바꿨다.
‘수다르나!’
그랬다. 승희는 수다르사나를 얻어야 했다. 승희는 바이올렛 이 수다르사나에 욕심을 내고 있고, 그 때문에 신력을 몸에 봉인 한 자신을 일에 끌어들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 러나 당장 바이올렛을 잡아 족친다면 바바지를 만날 길은 막연 해진다. 나중에 바바지를 만날 수 있을까? 승희는 아니라고 생각 했다. 그렇게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바이올렛 같은 늙 은이가 여태껏 미루어 왔을 리가 없다. 분명 바이올렛은 꾸미는 것이 있다. 자신과 바이올렛이 둘 다 없으면 수다르사나를 얻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고 승희는 믿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까? 준후가 옆에 있으니 바이올렛 정도의 늙은이가 아무리 본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해도 지금 들이닥치면 충분히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수다르사나를 얻을 길은 멀어 진다.
‘바이올렛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승희는 마음을 다잡았다. 처음부터 함정에 빠질 것을 각오한 상황이니 그것이 함정임이 밝혀졌다 해도 그보다는 수다르사나를 얻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아직은 준후에게도 알리지 말자. 내가 준후와 떨어지지만 않 으면 된다. 지금 상대할 수 있다면 나중에도 상대할 수 있겠지.’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고 승희는 생각 했다. 그리고 준후에게 내일부터 절대 자기 옆에서 떨어지지 말 라고 했고, 준후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채 고개를 끄덕였다. 승희는 투시력을 통해 박 신부와 현암의 무사를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둘은 무사했다. 이때 승희의 머리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바이올렛이 자신의 옷에 그 이상한 문양을 새긴 것 이라면 그 옷을 입지 않은 것을 의심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급 하게 오느라고 원래 자신의 옷을 버려두고 왔으니…………, 승희는 옷을 찾으러 갈까 싶었지만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옷 가방을 챙기지 못하고 왔으니 갈아입을 옷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없지.’
결국 짜낸 변명이 햇볕이 따가워서 겉옷을 걸쳤다고 둘러대는 것이었다. 바이올렛이 승희의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는 일 이지만……………. 준후는 여전히 승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 고 눈을 비비다가 다시 잠들었다. 승희는 자고 있는 준후 옆에 앉 아 눈을 빛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났다. 새벽녘에 중국에서 이륙한 백호의 비행기 는 자전 방향과 반대로 서쪽으로 갔기 때문에 비행기가 도착할 때의 인도의 시간도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새벽녘이었 다. 다른 사람들, 특히 주기 선생과 성난큰곰은 아무래도 부상을 입은 몸으로 무리를 한 탓에 피곤했는지 죽은 듯 잠을 잤고 최 교수나 아라, 현암도 의자에 몸을 깊이 묻고 꼼짝하지 않았다. 박 신부는 도구르와 이야기를 하느라 눈도 붙이지 못했다. 도 구르는 입을 열지 않은 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박 신부 는 나직한 목소리로 도구르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면서 백호는 조종실로 돌아갔다. 중국에서 간 신히 이륙하기는 했지만 인도의 공항에 내리는 것도 큰일이었 다. 중국에서 이륙할 때 행선지를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인도 측과 무선 교신도 하지 못했고 그것은 비행기가 뜬 다음에도 마 찬가지였다. 공항과 교신이 이루어진다면 당장 수사관이나 정보 기관 요원들이 들이닥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백호는 공항 상 공에 거의 도달했을 때, 교신하여 비상 착륙 허가를 받아 낼 심 산이었다. 아무리 인터폴이 빨라도 무전 연락 내용이 수사관들 에게 전달될 쯤이면 이미 착륙을 끝낸 후일 것이고, 또 그들이 공항까지 도착하려면 그보다 더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했다. 계 획대로만 된다면 공항을 빠져나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백호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조종석 옆 좌석에 앉았다가 문 득 월터 보울을 떠올렸다. 월터 보울을 통해 현암과 박 신부 등 과 연락을 취하려 했지만, 지금 이렇게 그들과 만나 함께 행동하 게 되었으니 월터 보울에게도 연락해 이제 별일이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백호는 부랴부랴 손을 놀려 기 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승희와 준후 그리고 바이올렛은 험한 산길을 헐떡거리며 올라 가고 있었다. 바바지가 내려온다고 하는 사원으로 가기 위해서 였다. 바이올렛은 숨을 몰아쉬면서 산을 오르고 있었고 준후도 별말 없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승희는 무섭게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출발하기 직전에 바이올렛이 했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그 옷은 어디서 났지요?”
“햇볕이 따갑기도 하고……………. 이걸로 얼굴을 덮으면 남의 눈 에도 덜 뜨일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오랫동안 옷을 못 갈아입으셨을 텐데…”
그 말에 승희는 바이올렛이 자신의 힘을 막아 둔 바로 그 당사 자라는 심증을 굳혔다. 그렇다면 세크메트의 눈도 십중팔구 바 이올렛이 훔쳐갔을 것이다. 승희는 당장이라도 바이올렛에게 달려들고 싶었지만, 터져 나오려는 속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아직은 참을만해요.’
승희는 최대한의 연기력을 발휘하여 옷을 갈아입었다는 사실 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무의식중에라도 투시력이 발휘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만에 하나라도 바이올렛이 승희 가 힘을 되찾은 것을 알게 되면 수다르사나를 포기하고 도망칠 지도 몰랐다. 바이올렛이 아무리 잘나고 힘을 숨기고 있다 해도 자신의 옆에는 준후가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비해 힘과 능력 이 배가된 준후에게 맞서 쉽사리 이길 수 없음을 바이올렛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올렛은 승희가 수다르사나를 얻어 낸 뒤, 준후가 승희 곁에 없는 틈을 타서 수다르사나를 빼 앗으려 할 공산이 가장 컸다.
셋은 어느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섰다. 저만치 앞장서 가던 바 이올렛이 커다란 바위 저편으로 사라지자 승희가 그 뒤를 따라 올라가려고 하는 준후를 잡아끌었다. 준후는 몸을 휘청하며 넘 어질 뻔했으나 곧 균형을 잡고 왜 그러냐는 듯 승희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승희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준후야, 잘 들어. 난 다시 힘을 찾았어.”
“네? 야! 그러면…….”
준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소리를 지르려는 것을 승희는 얼른 틀어막았다.
“쉿! 조용! 소리 내면 안 돼!”
준후는 말도 못한 채 휘둥그레진 눈만 껌벅였다. 승희는 준후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풀어 주었다.
“내 힘을 막은 것이 누구인지 알았어. 저 늙은 할망구야.”
“네? 아니 그럼……”
준후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승희는 준후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지금 저 할망구가 알아채면 곤란하니까!”
“잘 들어. 저 할망구는 수다르사나를 얻으려고 우릴 이용하고 있는 거야. 저 할망구는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어. 확실해!” “그렇지만…….”
“틀림없어!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 그 수다르사나 는 꼭 내가 얻어야 해. 절대 저 할망구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구!” “누나, 의심이 지나친 것 아니에요?”
“아냐! 흠…………… 준후야. 너는 날 믿지?”
“네! 그럼요.”
“그럼, 끝까지 믿어 줘. 저 할망구는 네가 나한테 떨어져 있는 틈을 이용해 수다르사나를 빼앗으려 들 거야. 분명해!”
“그렇다면 ・・・・・・ “
“자, 평소처럼 태연하게 행동해. 그리고 내가 방금 한 말을 명심해. 가급적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 줘. 경계를 늦추지 말고!
그리고 만약 나와 같이 있지 않게 되더라도 항상 주의를 기울여 줘. 내 말 알겠니?”
“알았어요. 그런데 잠시만요. 누나가 힘을 되찾았다면 이것만 알려 줘요. 신부님이랑 현암 형은 어떻게 되었나요? 무사한가 요?”
준후가 바이올렛이 올라간 위쪽을 살피면서 애타는 듯 묻자 승희는 씩 웃으면서 한쪽 눈을 슬쩍 감아 보였다.
“염려 마. 무사하니까!”
승희의 말에 준후는 힘이 난 듯, 승희에게 고개를 까닥해 보이 고는 바이올렛이 먼저 간 위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가 멈 칫하더니 승희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누나도 조심하세요. 근데 수다르사나를 얻으면 뭐에 쓰려고 그러세요? 누나도 무기나 힘이 필요한 건가요?”
승희는 애초에 마음먹은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수 다르사나를 얻은 다음에 그것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말해도 늦 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자신이 내린 판단이 옳은지 아닌지 스스로 도 확신하지 못해 입이 간질거리기는 했지만 승희는 꾹 눌러 참 으며 말했다.
“나중에 말해 줄게. 중요한 것은 절대 그걸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거야.”
승희는 준후를 뒤에서 밀어 올려 주면서 조그맣게 속삭였고 준후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만치 위에서는 차가운 웃 음을 짓고 있던 바이올렛이 준후의 손이 바위 자락에 올라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안색을 바꾸었다.
“뭐라구요? 승희가?”
현암은 놀라 소리쳤다. 백호는 방금 월터 보울과의 전화 통화 를 통해 승희가 월터 보울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 종실로 현암을 불러 그 사실을 말한 것이다.
“승희가 어떻게 월터 보울에게 전화를 한 것일까요?”
“그건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승희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그간 승희에 대해 걱정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 화통화가 됐다면 일단 안도는 되었다. 현암이 백호에게 물었다.
“승희에게는 투시 능력이 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승희 씨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네?”
“생각해 보십시오. 승희 씨는 투시 능력이 있지요. 그런 투시 능 력이 있다면 뭐하러 전화를 걸어서 연락처를 묻는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우린 투시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한테 뭔 가를 알려 주기 위해 연락을 취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세크메트의 눈이 있지 않습니까? 무엇하러 그런 전화를 한단 말입니까?”
“하긴 나도 그것을 이미 며칠 동안 손에 쥐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승희의 반응이 느껴진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현암은 말을 끊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승희에게는 투시력이 있으니까 우리의 상황은 세크메트의 눈 이 없어도 잘 알 거라고 지레 짐작했고, 어쩌면 바이올렛이 마스 터의 분신이라는 것도 이미 알아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 보니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는지도 몰라요. 여하튼 그 문제를 떠나서 승희가 전화까지 한 것을 보면 무사한 것은 분 명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문제입니다. 승희 씨는 월터 보울한테 무슨 메시지가 있 느냐고 물었어요. 승희 씨가 월터 보울에게 어떤 메시지가 남아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암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승희의 투시력으로 알아낸 것이 아닐까요?”
“승희 씨에게 투시력이 살아 있다면 월터 보울한테 어떤 메시 지가 남아 있느냐고 물었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냥 투시력으로 읽어 내면 그만일 텐데요.”
현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요. 승희는 여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우리 마음을 들여 다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고 설령 마음을 읽는다 해도 우리 가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면 읽어 낼 수 없지요. 있지도 않은 것을 알아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승희가 물어본 것이 아닐까요?”
백호는 한참 동안 고심하더니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월터 보울이 승희 씨의 전화를 받은 것은 꽤 됐습니다. 그러 나 두 번 다시 그 전화번호로는 전화가 걸려 오지 않았어요. 상 식적으로 판단해 보세요. 만일 승희 씨가 우리가 처해 있던 위 기상황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내어 통화를 한 것이라 면 그 즉시 전화를 해 보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월터 보울 씨 에게 전화를 했으니까 전화 옆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고, 승희 씨 입장에선 번호만 몇 번 더 누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는 현암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백호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전화를 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태껏 연 락 한번 되지 않은 건 자연스럽지 못했다.
“전화가 통화중이었거나 혹시 연결이 안 될 확률은 없나요?”
“그 번호는 위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두 번은 교신이 안 될 수도 있지만 서너 번 건다면 어디에서나 반드시 통화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월터 보울 씨에게 전화가 온 것은 언제쯤이랍니까?”
“시차가 달라서 정확한 건……………. 기다려 보십시오. 음….잠깐만요. 환산해 보면 약 아홉 시간 전입니다.”
“그러면 도구르와 모 선생이라는 사람이 우리 비행기에 뭔가 술수를 부렸을 때가 아닐까요? 그들이 쳐들어온 것은 네다섯 시 간 전이지만 술수를 부리기 위해서는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을지 도 모르니까요. 모 선생이 술수를 부리면 무전 연락까지도 두절 된다고 도구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 분명 그렇게 말했죠. 그러나 그때 안 되었다고 해도 지금 은 연락을 해야 했던 것 아닙니까?”
“음, 그렇군요.”
현암도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무전 연락이 안 된다 해 도 세크메트의 눈이 있지 않은가? 아직까지 세크메트의 눈으로 통신하는 것은 어떤 주술적인 방해를 받아도 안 된 적이 없었다. 물론 세크메트의 눈을 가졌다고 해도 손에 쥐고 있어야 통신이 가능하니 항상 연락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전 화가 안 될 경우에는 당연히 시도해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
승희 씨가 세크메트의 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난데없는 백호의 말을 듣고 현암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 다. 백호의 말마따나 세크메트의 눈을 잃어버릴 정도라면 문제 는 심각했다. 현암과 백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데 조종실로 주기 선생이 들어오면서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내가 방금 아라의 목걸이를 보았는데 나 말고도 몇 번 저 목걸이를 통해 조요경의 수를 쓴 자가 있더 군.”
“뭐라구?”
“내가 쓴 힘 말고도 희미하게 뭔가가 느껴지더란 말야. 누가 조요경 술수로 이쪽 상황을 본 것 같아. 나만큼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 누군지도 분간이 되나?”
“물론 대강 분간할 수 있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말야. 사람의 기운이란 비슷하면서도 나름대로 특징이 있는 것이니까. 내 생각엔 그걸 쓴 사람이 준후가 아닌가 싶어.”
현암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준후가?”
“그래. 그러니 문제가 묘하다는 거지. 내가 듣기로 승희 씨와 준후가 동행했다는데…………… 맞나?”
“그래.”
“승희 씨는 투시력이 있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 면 틀림없이 그 수를 쓴 사람은 준후밖에 없는데 왜 준후가 잘 알지도 못하는 조요경 술수를 써서 이쪽 동정을 살폈을까? 전에 내가 병상에 있을 때 그 애가 문병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준후 는 조요경 술수가 뭔지 잘 모르고 있었어. 그런 애가 조요경 술수를 썼다는 건….. 물론 장한 일이긴 하지만 무진장 고생을 했을 거야. 주술 부리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
“그러니 이상한 거지. 준후가 그토록 죽을힘을 다해 조요경으 로 이쪽 상황을 알려고 했다는 게……………. 옆에 승희 씨가 있었어. 투시력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인물이 말야. 승희 씨가 간단히 알 아낼 수 있는 것을 준후가 죽을힘을 다해 알아내려 했다는 건 둘 중 한 가지뿐이야. 첫째, 두 사람이 헤어져서 서로 간에 안부를 모르고 따로 헤매고 있다는 것, 둘째, 승희 양이 투시력을 못 쓰 고 있다는 것!”
현암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다면 그것 은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희가 투시력을 못 쓰게 됐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투시력을 못 쓰다니?”
“나도 거기까진 몰라. 그게 내 능력의 한계니까 말일세. 원래 머리를 쓰는 건 잘난 현암, 자네 차지잖은가? 하하하. 그러니 잘 판단하게나.”
현암은 이런 판에도 자신을 약 올리는 주기 선생에게 화가 났 지만 겨우 참았다. 주기 선생의 말과 백호의 말을 종합해 보면 결국은 이런 결론밖에 나올 수 없었다. 승희와 준후는 세크메트 의 눈도 잃어버리고 투시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쩌면 헤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승희는 간신히 알아낸 월터 보울의 전화번호마저 마음대로 쓸 수 없을 정도의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 서두릅시다!”
현암이 말하자 백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곧 탄식하듯 말했다.
“하지만 승희 씨와 준후가 어디 있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공항에 내린다 해도…………….”
“공항에 내릴 필요는 없습니다!”
현암은 단호하게 말을 하고는 사태를 곰곰이 추리해 보았다. “바이올렛은 시타 교수와 어떤 방법으로든 연락을 취했을 겁 니다. 백호 씨, 어서 시타 교수의 연락처를 알아내어 곧장 비행 기로 그 부근을 날아 주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이 어느 정도의 거 리 안에 들어온다면 박 신부님이 알아내실 수 있을 겁니다.” 현암의 이야기를 들은 주기 선생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박 신부님이? 그분 레이더를 가지셨나, 아니면 승희에게 배우셨나?”
“그 방법이 가장 빠를겁니다.”
현암은 주기 선생의 말을 못 들은 척 한쪽 귀로 흘리면서 백호에게 말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내에 설치된 위성 전 화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음!”
승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이제 목적지에 거 의 다 와 간다는 바이올렛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이제까지의 산길 과는 달리 반쯤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계단이 듬성듬성 박혀 있 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어떤 사원이 나타날 것인가 상상해 보 았다. 그러나 계단 위로 올라서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황량하 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그곳은 나지막한 산봉우리의 중턱쯤 에 위치해 있었는데, 산을 깎아서 그렇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원 래의 지형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은 학교 운동장 정도 되 는 넓이의 평지였다. 그리고 그 한쪽 끝, 벼랑 바로 앞쪽에는 케 케묵은 작고 낡은 건물 하나가 있었고, 그 앞에는 꾀죄죄하고 남 루한 복장을 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지 떼들의 회합처럼 보여서, 승희가 연상했던 ‘고 결한 바바지’를 떠받들고 있을 것이라는 애초의 짐작과는 너무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
“여기가 맞나요? 바바지 님과 만날 수 있다는 곳이요?”
승희가 광장을 쳐다보면서 옆에 있는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맞아요. 호호호……. 예상 밖인가요?”
바이올렛은 승희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웃음 속에 여태까지 직접적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차가운 기운이 배어 있는 것 같아서 섬뜩했다. 바이올렛은 사원과 거기 모여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고 나서 승희에게 말했다.
“모두 바바지 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온 사람들이지요.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만나게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겁니다.”
“자격이라구요?”
“그렇죠. 자격이라고 한다면 자격이랄 수도 있죠. 다시 말해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만나고, 아닌 사람은 못 만나게 되는 겁니다. 호호호.”
“그 자격이란 걸 구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 것 아 닙니까?”
“간단해요. 저 사원 안으로 혼자 들어가서 자신의 소원을 이야 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바바지 님이 그 이야기를 듣지요. 마음이 온전치 못한 자는 사원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어요. 호호호.”
“누가 지키고 있다가 못 들어가게 막나요?”
“그런 것은 없어요. 그냥 못 들어가지요. 저렇게 수백 명이 이 곳엘 찾아오지만 저 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중 한 사람 나올까 말까 해요. 제 생각에 승희 씨는 큰 문제가 없을 테지만요.”
승희는 속으로 이 정도면 듣고 싶은 것을 다 들었다고 생각했 다. 그러고는 차갑게 웃으면서 바이올렛에게 한국말로 말했다.
“여긴 바이올렛 씨도 초행일 텐데…………. 참 잘도 아시는군요.”
승희가 차갑게 말하자 바이올렛의 안색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바이올렛의 굳은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승희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 나서 준후의 팔을 잡아 자신의 옆으로 당겼다.
“이제 보니 한국말도 잘 알아들으시는군요. 호호호. 이제 어서 본색을 드러내시지!”
준후는 그동안 둘이 하는 대화 내용을 잘 알지 못했지만 방금 승희의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 다. 준후는 승희가 잡아당기자 얼른 자세를 잡으면서 벽조선과 부적을 소매 속에서 꺼내 양손에 쥐었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예 상과는 달리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입에선 놀랍게도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호호호. 내가 모르고 있었던 줄 아나? 차라리 이게 편하지. 호호호.”
손가락으로 승희를 가리키면서 말하는 바이올렛의 목소리엔 어느새 웃음기가 가셔 있었다.
“잘도 벗어났군그래.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아나? 어제부터 알고 있었어. 부적은 어떻게 알아내고 떼어 냈지?”
승희는 대답하는 대신 큰 소리로 물었다.
“세크메트의 눈도 네가 가져갔지?”
“그렇다. 나에게는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잠시 맡아 뒀지. 아, 흥분하지는 마라. 내가 멋진 제안을 하나 하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 네가 수다르사나를 가지고 나오면 교환하기로 말야. 어때?”
“내가 호락호락하게 그걸 가지고 나올 것 같아?”
“네가 안 가지고 나온다구? 호호호.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글 쎄…………. 내 말대로 하는 게 좋을걸? 어서 가지고 나와.”
뻔뻔스럽게 지껄여 대는 바이올렛의 말에 승희는 치를 떨었지 만 그 말은 승희 마음속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승희는 마음 속을 간파당한 것 같아 순간적으로 움찔했고 느물느물한 바이올 렛의 표정을 보고는 화가 나 큰 소리로 말했다.
“가지고 나와도 네게는 안 줘!”
바이올렛은 코웃음을 치면서 몇 발자국을 걸어 벼랑 가로 갔 다. 수백 미터는 될 듯한 깎아지른 벼랑의 저 아래에는 물이 굽 이쳐 흐르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그곳으로 가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세크메트의 눈이었다.
“어, 저거!”
“자! 어서 갔다 와. 안 그러면 이건……………. 호호호. 좀 찾기가 힘들지 않을까?”
승희는 그런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앞뒤 가리지 않고 소리쳤다.
“버려! 버려 봐! 이 음흉한 할망구야!”
놀란 준후가 말했다.
“누나! 하지만….”
“어서 버려 봐! 십 년이 걸려도 찾으면 될 거 아냐! 설령 못 찾는다 해도 까짓 것 없어도 돼! 기왕이면 내가 밀어 주련? 엉? 이 개만도 못한 늙은이야!”
승희는 정말로 화가 난 듯, 기세등등하여 바이올렛에게 성큼 성큼 다가가려고 했다.
“오호!”
바이올렛은 당황한 기색 없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뭔가 느껴지는데? 호호호. 현암인가 하는 멍청이구먼. 호호호.”
“뭐야?”
승희는 자기 마음속에 떠올린 현암에 대한 생각이 바이올렛에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말을 듣고는 소리를 꽥 질렀다.
“그 멍청이…………. 금방 이리로 올 거야. 호호호. 자, 저길 봐라. 저만치 비행기가 오고 있는 게 안 보이나? 호호호.”
“뭐라구?”
승희는 놀라운 반, 반가움 반의 심정으로 하늘을 살펴보았다. 바이올렛의 말대로 하늘 저편에서 조그마한 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나지막한 산봉우리가 틀림없네!”
박신부가 힘겹게 말했다. 비행기의 기내는 성스러운 빛의 오 라로 충만해 있었고 박 신부는 힘이 드는지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백호가 시타 교수에게 전화 통화를 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래서 박 신부가 새로 얻게 된 영능력을 있는 힘을 다해 끌어내 간신히 승희와 준후가 있는 곳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백호와 도구르는 그러한 박신 부의 모습을 보면서 경외하는 마음에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백 호는 몇 차례 박 신부의 오라를 보았지만 지금만큼 밝고 휘황하 며 보는 사람의 마음속까지 깨끗하게 만드는 오라는 보지 못했 다.
박 신부는 힘이 들었는지 그 말 한마디만 하고는 기도하는 자 세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았고 오라의 휘황하던 광채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박 신부 옆에 앉아서 아래의 상황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있던 현암이 굳은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백호 씨, 낙하산 있습니까?”
“네. 그런데 그건 왜………….”
“승희와 준후가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일 분 일 초가 급합니다. 어서 가야겠습니다.”
백호는 현암의 얼굴과 손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현암의 손엔 세크메트의 눈이 들려 있었다. 틀림없이 뭔가 알아냈으리라.
현암은 바이올렛, 아니 마스터의 흉계를 세크메트의 눈을 통 해 잠시 동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일일이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방법은 단 한 가지, 일 초 라도 빨리 도우러 가는 것밖에는 없었다.
“현암 씨, 낙하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현암은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현암은 박 신부의 모습을 살폈 다. 박 신부도 같이 갔으면 했지만 박 신부는 탈진에 부상까지 겹쳐 차마 그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현암이 백호의 질문 에 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해요.
“안 됩니다. 낙하 경험도 없이 이렇게 지형이 험한 산에서 낙 하산을 잘못 조종하면 기류에 휘말려 큰 낭패를 당할지도 모릅 니다! 계곡에 빠져 조난당하거나 벼랑에 부딪혀 잘못하면 목숨 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백호 씨, 그건 다음 문제입니다. 내가 낙하산을 입을 동안, 빨 리 조작법을 알려 주세요.”
백호는 더 말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조종사에게 외쳤다.
“산봉우리 위쪽으로 기수를 돌리도록! 풍속을 고려하여 낙하 예정지를 산출하게!”
“넷!”
명령을 마치고 난 백호가 현암에게 말했다.
“그러면 나도 가겠습니다. 이 비행기에 실린 낙하산에는 비상용 소형 무전기가 달려 있으니 그걸 켜고 반드시 내 지시대로 따 라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현암 씨?”
현암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주기 선생과 성난큰곰도 같이 가겠다고 자원했다.
“내 전인이 위험하다는데 내가 안 갈 수는 없잖소?”
나도 가겠다. 내가 바이올렛에게 속았다니 믿을 수 없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야겠다.
“두 분도 낙하할 줄 아십니까?”
“잘난 현암이가 한다면 나도 할 수 있어. 문제없으니 염려 말라구.”
난 할 수 있다.
백호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걱정스럽다는 듯 낙하산을 꺼내 오라고 요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도구르가 자신도 가겠다 고 말했다.
“나도 가겠소. 알고 싶소. 내가 믿었던, 내 목숨을 구해 준 수호자가 과연 선인인지 아닌지………….”
백호가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돼!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백호는 도구르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했다. 그리고 낙하산을 챙겨 입고 다른 사람에게도 입는 법을 서둘러 설명했다. 설명을 마치고 난 백호가 요원에게 말했다.
“이봐, 신부님을 돌봐드리고 이 사람을 잘 감시하도록! 서툰 짓 하지 못하게 말일세.”
“강풍이 불지도 모르니 고도를 더 높여 상승해야 합니다. 이 낙하산은 사각형이니 잘 조종하면 산봉우리에 바로 내리는 것도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자, 그럼!”
백호의 얼굴엔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승희는 바이올렛의 말대로 비행기가 다가오자 놀람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곧 가라앉히고 코웃음을 치며 바이올렛 에게 대들듯 말했다.
“후후후. 우리 편들까지 오니 넌 이제 틀렸어. 더 이상 협박은 통하지 않아. 건방지게 나에게 협박을 하려 들다니……………. 수틀리 면 너랑 세크메트의 눈이랑 같이 벼랑으로 던져 버릴 거야!”
하지만 바이올렛은 아무 대꾸도 않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서 있 을 뿐이었다. 승희가 작은 목소리로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저 음흉한 할망구, 잘 살펴보구 있어. 감히 날 협박하려 하다니…………. 난 얼른 사원 안에 들어갔다 올 테니까.”
“근데 정말 벼랑으로 떨어지려고 작정하면 어쩌죠?”
준후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만히 보니 준후를 믿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혼자서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저 할망구가 또 무슨 연극을 해서 준후를 속일지도 몰라.’
승희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맞부딪치면서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준후야, 그럼 아예 우보법으로 저 할망구를 꼼짝 못하게 해 버려. 그렇게 해도 네가 행동하는 덴 지장이 없지? 그러고 나서 세크메트의 눈을 빼앗으면 되잖아.”
“한 사람 정도는 땅에 붙여 놓아도 큰 힘이 들진 않아요.”
“같은 패거리를 숨겨 놨을지도 모르니까 조심하고…………. 특히 바이올렛을 잘 감시하고 주변도 잘 살펴. 알았지?”
“염려 마세요. 근데 정말 현암 형이랑 다들 올까요?”
승희는 점점 다가오고 있는 비행기를 보았다. 비행기는 그 근 처를 선회하는지 산봉우리 주위를 한 바퀴 빙 돌고 있었다.
“오면 좋고…… 안 와도 괜찮다. 그것보다 저 할망구부터 붙 여놔.”
준후가 수인을 맺고 발을 탕 하고 구르자 바이올렛의 몸이 뻣 뻣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덜렁대던 승희도 이번만은 조심스럽게 바이올렛에게 다가가 가만히 살펴보았다. 바이올렛의 몸은 완전 히 굳어져 있었다.
“바보 같은 할망구. 너 따위에게 당할 줄 알아?”
승희는 바이올렛의 손에서 세크메트의 눈을 빼앗으려 했으나 손가락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조여져 있어서 벌어지지를 않았다. 더구나 바람이 불어오는 벼랑 끝에 손을 내밀고 있어서 자칫 잘 못하면 미끄러져 떨어질 수도 있었다. 몇 차례 시도하다가 승희 는 포기하기로 했다.
“에이! 나중에 빼앗자. 그럼, 준후야 들어갔다 오마.”
승희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면서 사원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승희나 준후가 무얼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그러다 승희가 사원 문 앞으로 다가가자 그때서야 사람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듯한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승희 는 텅 빈 구멍 같이 생긴 문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렇지만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가로막고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어 번 더 시도해 보았으나 마찬가지였다.
‘자, 마음, 마음을 비우고……………..’
몇 사람이 승희에게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승희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천천히 문 안으로 들어가려 고 했으나 튕겨 나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가만! 나라고 뭐 마음이 그렇게 깨끗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 잖아?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역시 명왕의 힘을 빌려야 하나?’ 승희는 눈을 감고 마음속의 애염명왕을 불렀다. 처음에는 수 다르사나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인지 쉽게 애염명왕이 나타나지 않았으나 몇 차례 간절하게 부르자 승희는 마음이 차분히 가라
앉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마음 깊은 곳에서 애염명왕의 목소리 가 승희의 부름에 화답을 했다.
들어가게 되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가겠나?
당연히!
정말인가?
물론이다!
나의 뜻이 아니라 그대의 뜻이었다. 명심하라!
그래, 내 뜻이다.
그럼 힘을 빌려 주겠다.
순간 승희의 몸이 붉은빛으로 변하면서 주변에 소용돌이가 일 어났다. 더불어 알 수 없는 기운이 승희의 몸을 중심으로 사방으 로 퍼져 나갔다. 사원 앞에서 승희가 허둥대는 것을 보고 웃던 사람들은 저절로 입을 벌리며 놀랐고, 저만치에서는 준후가 승 희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염명왕의 힘을 빌렸구나. 그런데 이상하군. 여태껏 한 번도 명왕이 누나의 몸 밖으로 자신의 기운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어째서……..’
잠시 후 붉은 기운은 사라졌다. 승희가 사원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누나가 들어갔구나. 그런데 왜 이러지? 불안하네……………. 바이올렛이 과연 아무 대책도 없이 우릴 상대하려 했을까? 이 정도라 면 시시한데?’
준후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른 고개를 돌 려 보니 아까 자신들이 올라왔던 계단 쪽에서 수상쩍고 어두운 느낌의 기운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었다.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 었지만 언젠가 만난 듯한, 가까이하기조차 싫은 어둡고 사악한 기운이었다.
‘누구지?’
준후 긴장하면서 손안의 벽조선을 꼭 쥐고 계단 쪽을 뚫어 지게 응시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얼굴이 드러났다.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준후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뒤를 이어 모습을 나타낸 사람은 준후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 다. 준후는 그들을 보자 양미간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아니, 너희들이!”
“자, 준비하십시오!”
조종사가 낙하지점을 잡았다고 신호를 보내자 요원이 사람들 에게 낙하 신호를 보냈다. 백호가 제일 먼저 뛰고 현암이 가장 나중에 뛰어내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낙하 경험이 많은 백호가 풍향을 감지하고 방향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백호의 뒤를 이어 성난큰곰도 뛰어내렸다. 다음은 주기 선생 차례였다. 현암 은 낙하산을 처음 타 보기 때문에 속으로 매우 긴장하고 있었으 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몸에 맨 낙하산의 줄들을 점검하는데 주 머니 안에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현암은 저도 모르게 고개 를 끄덕였다. 승희가 자신의 생일 선물로 준 지포 라이터였다.
‘승희야, 기다려라.’
라이터를 만지고 나니 승희에 대한 안쓰러움과 함께 이상하게 도 고공에 대한 무서움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점검을 마친 현암 이 눈을 들자 주기 선생이 막 뛰어내리고 있었다.
“현암! 뛰면서 오줌 싸지는 마! 하하하.”
현암은 주기 선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심호흡을 한다 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눈 덮인 산 맥이 보였다. 목적지인 산봉우리도 콩알처럼 조그맣게 눈에 들 어왔고 몹시도 세찬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치고 지나갔다. 머 릿속이 텅 빈 듯한 기분이었다.
“뛰엇!”
요원이 소리침과 동시에 현암은 허공에 몸을 던졌다. 현암이 몸을 던지자마자 귓전에서 무전기를 통해 백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손을 머리 위로! 엎드린 자세에서 균형을 잃으면 낙하산 줄 이 엉킬지도 모릅니다. 고도계를 잘 보시오! 이건 평지에 내리는게 아니니 고도계의 바늘이 붉은 선보다 눈금 두 개 정도 위로 가면 그때 줄을 당기시오!”
그사이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나서 비행기의 문을 닫던 요원 은 뒤통수를 얻어맞아 쓰러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여분의 낙하 산을 집어 등에 메고 있는 것은 도구르였다. 박 신부는 아직 정 신을 차리지 못했고, 최 교수도 감히 도구르를 어떻게 할 틈이 없었다.
사원의 문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선 순간, 승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분명 겉에서 보기에는 허물어져 가는 조그마한 사원에 불과했는데, 그 안은 그렇지 않았다. 무척 어두웠고 하늘에는 별 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사방은 벽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 었다. 무한히 넓은 평평한 들판에 서 있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까? 작은 사원의 내부가 이러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믿어지지 가 않아서 승희는 눈을 비비고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역시 마찬 가지였다.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라.
승희의 몸속에서 애염명왕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목소리를 듣 고승희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딛는 순간, 엄청나게 센 바람이 들이닥쳤다. 승희는 무의식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움 츠렸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날려 버릴 것 같은 기세여서, 어지간히 담력이 센 승희도 놀라서 주저앉을 뻔했다.
겁내지 마라.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 앞으로 똑바로 나아가라.
그래도 승희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렵기도 했고 안 에 무엇인가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 거센 바람 속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간단 말이야!
바람이 어디에 불지?
승희는 깜짝 놀라 얼굴을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러고 보 니 언제 불었냐는 듯 바람은 말끔히 사라졌고 자신은 중심을 잡 지 못한 채 불안한 자세로 서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홀린 것일까? 그럼 모든 게 허상이란 말인가?’
똑바로 앞으로….
승희는 몇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자 커다란 칼날 한 개가 승희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깜 짝 놀랐지만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음, 저것도 허상이겠지? 그렇다면 피할 필요가 없겠군.’
다음 순간 승희는 다리를 휘청하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무언 가가 다리의 힘을 빼 버린 것 같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 칼 날이 승희의 머리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 승희의 발 앞에 떨어졌 다. 떨어져 내린 건 칼날이 아니라 썩은 나무토막이었다.
‘이게 뭐지?’
맞았으면 위험했을 것이다.
내가 이런 나무토막을 맞고 어째서?
너는 그걸 허상이라 생각했겠지? 그러나 허상이라 생각한 것이 실제로 느낌을 주었으면 어쩌겠는가? 두 토막이 났을 것이다.
이깟 썩은 나무토막 때문에 내가 두 토막이 난다구?
그게 아니다. 너의 마음 때문에………….
승희는 썩은 나무토막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승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서 앞으로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그러면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누가 내 마음을 시험하고 있다는 거야?
시험을 받는 건 네가 아니라 바로 나다.
승희는 흠칫하고 놀랐다.
뭐?
그리고 수다르사나를 얻어야 하는 것 역시 네가 아니라 나다.
뭐, 뭐라고! 안 돼! 그건…….
이건 정해진 운명이다. 앞으로 나아가라. 그러면 내가 차근차근 설명 해주마.
준후는 긴장하면서 기운을 끌어 올렸다.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은 전에 대적했던 신동들 중의 한 명인 레그나였고 다른 한 아이는 모르는 아이였다. 그 꼬마가 바로 신동들 중의 하나인 앙그라였지만 준후는 앙그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했다.
“너희들…………… 여기까지 왔나?”
준후는 소리치며 몇 마디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저들이 준 후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천만뜻밖 에도 처음 보는 남자 아이가 준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소 리는 났지만 그 아이는 입을 움직이지 않았다.
“오래간만이군. 신동준후 군.”
목소리를 들은 준후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입을 열지 않 고 말하는, 복화술 수법으로 말하는 그 목소리는 예전에 목숨을 걸고 자신들과 대적했던 자……………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는 그나마 목소리라도 정중했으나 지금은 사악함이 그대로 드러 나 보였다.
“너, 너는 죽었을 텐데……………”
“너희들 덕분에 그렇게 됐지. 하지만 그렇다고 내 뜻을 포기한 건 아니지.”
“수다르사나를 노리는거냐?”
준후는 그들을 노려보면서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벽조선을 획 저었다. 그들의 앞에 검은 기운이 휘익 하며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앙그라, 아니 마스터는 하늘을 바라보며 복화술로 중얼거렸다.
“귀찮은 놈들이 오는군요. 레그나 님.”
마스터가 말하자 준후도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는 네 개의 낙하산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준후의 얼굴엔 밝은 표정이 어렸으나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자 레그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차갑게 씩 웃으며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순간 레그나의 눈이 새빨갛게 빛나면서 싸늘하기 이를 데 없는 요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잘 느껴지지 않았을 테지만 영 안(眼)이 트인 준후는 그 기세가 엄청난 데 놀라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게 뭐야! 레그나가 어째서 저렇게 엄청난 힘을…………… 전엔 저런 기운이 없었는데……………..”
준후가 더욱 놀란 것은 하늘을 보고 난 다음이었다. 방금 전까 지만 해도 낙하산이 일정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오는 걸로 보아 산봉우리 위에 그다지 센 바람이 부는 것 같지 않았는데 레그나 가 눈을 부릅뜨고 나서부터는 낙하산들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이었다.
‘말도 안 돼!’
준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포함한 퇴마사 들도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수백 미터나 떨어진 허공 위 에까지 힘을 발휘할 정도라면 그건 자신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준후가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 사이 한 개의 낙하산이 펄럭이면서 공중에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미친 듯 빙 빙 돌며 다른 낙하산들보다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그만해!”
준후가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벽조선을 휘젓자 검은 기운이 레그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레그나는 크지도 않게 핫 하는 소리를 냈고 그 기운은 돌연 방향을 백팔십도 바꿔서 준후 쪽으 로 날아왔다.
“으앗! 이게 뭐야!”
준후가 놀라서 다시 벽조선을 휘두르자 똑같은 기운이 뻗어 나가 돌아오고 있던 기운과 충돌하여 굉음을 내며 산산이 흩어 져 버렸다. 준후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한참을 날아가 와 당탕 넘어졌다. 고꾸라진 준후에게 몇몇 가닥의 영기가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급령을 끌어모아 벽을 치는군! 그렇다면 작은 놈들이 방해 하지 못하도록…?
“혼자 잘 노는군. 그래, 잘 놀고 있거라. 우리는 우리대로 놀 테니까.”
준후는 마스터의 빈정거림에 대꾸하지 않고 몸을 일으키려 했 다. 순간 우보법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바이올렛이 기억 났다. 좀 전의 충격으로 우보의 방위에서 발을 떼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바이올렛은 기절한 듯 쓰러져 있었다. 준후는 안심하 고리매술의 주문을 외웠다. 이번에는 허공에 리매의 모습이 천 천히 형성되었다. 리매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어 가자 레그나가 허공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작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리매들은 무엇인가에 빨려 들어가듯,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땅 속으로 꺼져 갔다. 준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럴 수가!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마스터는 넋이 나간 듯한 준후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웃었고, 그사이에 하늘에서 내려오던 또 다른 낙하산 한 개가 찌부러지 면서 급격히 하강했다.
“왼쪽의 줄을! 줄을 당겨!”
무전기를 타고 현암의 귓전으로 백호의 말소리가 울려왔다. 돌연 이상한 바람이 맴돌아 치면서 연달아 주기 선생과 성난큰 곰의 낙하산이 찌부러져 빠른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하자 백호뿐 아니라 현암도 정신이 없었다. 바람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데 연 달아 낙하산이 찌부러진 채로 떨어지니 백호는 흥분과 당혹감에 사로잡혀 계속 소리를 쳤다.
“중심을! 균형을 잃지 마라!”
그러나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백호의 낙하산도 푹 꺼지며 밑으로 가라앉는 것이었다.
현암은 수상한 기운을 느꼈다. 이건 예사 바람은 아니었다. 저 아래에서 누군가가 수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조작이 서툰 현암은 흔들리는 낙하산 끈을 당기느라 그 수상한 기운의 실체가 무엇일까 고민할 경황이 없었다. 현암은 무의식적으로 짧고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월향!”
현암이 소리치자 현암의 왼손목에서 월향검이 날카로운 소리 를 지르면서 아래로 꽂히듯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 내려갔다.
“그만해!”
준후는 부적 두 장을 꺼내어 태우고는 눈을 크게 떴다. 레그나 가 자신의 술법을 무참히 깼지만 굴복할 수는 없었다. 방금 자신 의 벽조선 기운을 받아 낸 상대의 희미한 영기를 본 준후는 명목 부로 영안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것이 보였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들이 레그나의 주위에 빽빽하게 벽을 쌓고 있었다. 예전에 홍녀의 백귀야행진을 본 적도 있지만 이건 그것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가 많았다. 더구나 그들은 모두 몸을 극도로 작게 하여 그야말로 자루 속의 콩알만큼이 나 빽빽하게 앞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 놈 한 놈이 약한 것 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
준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저건 인간의 술수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영능력자이고 주술사라 하더라도 한 개인이 부릴 수 있는 영의 수에는 한도가 있다. 한 꺼번에 저렇게 수천 마리의 악령을 일사불란하게 부릴 수 있는 주술사라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저 꼬마가 화난 모양이군. 선물을 주는 게 어떨까요?”
준후는 마스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긴박한 위기감이 느 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마스터가 레그나에게 뭐라고 중얼거리자 떨어져 내리던 세 사람의 낙하산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이었다.
“으앗!”
준후가 놀라는 순간, 월향검이 은빛 섬광을 번쩍이며 무서운 기세로 레그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붉은 눈에 눈동자마 저 사라진 레그나는 당혹해하는 기색 없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 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너를 보고 아바타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조금 다르다. 아바타라는 비슈누 신만이 이룰 수 있으며 앞으로 진정한 아바타라가 나 타난다면 그것은 말세의 칼키뿐이다. 나, 라가는 비슈누 신을 받드는 존 •재로서 사명을 띠고 힘을 빌려 인간의 형상으로 온 것이다. 유배 왔다고 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명? 그렇다면 수다르사나를 찾는 것?
그렇다. 수다르사나를 찾고, 홍수를 막는 일이다.
홍수를 막는다니? 그러면 수다르사나가 홍수와 관련된 물건이란 말인가?
수다르사나는 무지갯빛의 보석을 안고 있다.
순간 승희의 앞에 거대한 해일이 몰아쳐 왔다. 비록 허상이며 감각으로만 느껴지는 것이라 믿었지만, 해일을 맞는 순간 승희 의 몸은 인정사정없이 그것에 휩쓸려 버렸다. 하지만 승희는 애 염명왕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몸이 휩쓸리고 있다 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보석이 어째서?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수다르사나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어, 없어? 응?
앞으로 나아가라.
제길! 명령만 하지 말고 어서 묻는 말에 대답을 해!
바바지는 모든 것을 알고서 수다르사나를 이미 저 앞에 놓아두었다.
너는 수다르사나를 잃을 테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될 것 이다.
무슨 소리야?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수다르사나가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냔 말야?
그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여기 온 순례자들 중에 로파무드라는 여자를 찾아라. 그녀는 떠나가지 않고 여기 있을 것이니……
승희는 답답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물 에 휩쓸린 채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느낌이었으나 무심코 발 을 구르자 발밑에 땅의 감촉이 느껴졌고 일순간 사방이 휑하니 낡을 대로 낡은 텅 빈 방으로 바뀌었다. 승희가 밖에서 보고 상 상했던 사원의 내부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바람과 물과 기타 많 은 장벽을 헤치고 왔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 걸어온 거리는 불 과 십 미터도 안 되었다.
승희의 바로 앞에는 돌로 된 제단이 있었고 그 위에 지름이 약 이십 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편편한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 것은 차바퀴 같기도 하고 쟁반과도 비슷했다. 그것의 가운데에 는 큰 밤알만 한 보석이 무지갯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 주위에 살 이 있어서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바퀴에 해당하는 맨 가장자리에는 섬세한 문양과 함께 이상한 그림과 고문자가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승희는 흥분으로 몸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수다르사나?’
함부로 만지지 마라.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함부로 만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
승희는 수다르사나를 집어 들려다가 애염명왕의 말을 듣고 흠 첫 멈추었다. 수다르사나를 집어 들려는 승희의 손이 따뜻해지 는 느낌이 들면서 점차 붉은색으로 변해 갔다. 애염명왕의 힘이 승희의 손에 맺힌 것이다.
이제 집어 들어라.
승희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다르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승희의 손가락 끝이 닿는 순간, 승희에게 어떤 남자의 메시지가 마음속에 울리는 바람에 승희는 하마터면 수다르사나를 놓칠 뻔 했다.
기적을 바라고 이곳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그 들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마냥 사원을 향해 엎 드린 채 어떤 소란이 일어나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늘에서는 세 사람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심술궂게 준 후의 바로 머리 위에서 서로 부딪히면서………………
월향검이 날카롭게 레그나를 향하여 날아들었다. 순간 준후가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레그나가 날아오는 월향 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작은 손을 앞으로 내뻗었고, 월향은 귀곡 성을 울리면서 레그나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런데………………
“저, 저런! 어떻게……………..”
레그나가 월향검을 손으로 움켜쥐어 버린 것이다. 준후는 마 치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휘청거렸다. 현암의 공력이 들어가 있지 않은 듯했지만 검기가 서린 월향검을 맨손으로 잡다니! 너 무도 놀라서 준후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 준후의 눈에 레그나의 손에 엄청난 영기가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영기는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영들의 집합체였다. 레그나의 손에 수없 이 달라붙어 얽히고설킨 영들이 월향의 검기를 막아 낸 것이다. 그것은 자발적인 행동이나 자기희생이 아니었다. 다만 레그나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준후는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도대체 저놈의 힘은 어느 정도이기에 저렇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들을 제 몸 부리듯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하나의 개체인 영을 그 런 식으로 마구 희생시키는 것에 대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분 노가 들끓었다. 준후의 붉게 충혈된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 혔다.
방벽을 쌓고 있던 영들이 월향을 움켜쥔 레그나의 오른손에 몰린 지금이라면 순간적이지만 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아무 리 막강한 레그나라고 해도 최고의 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바즈 라를 연발로 쏘아 붙인다면……………. 그러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 준후의 머리 위로 세 사람이 떨어져 덮쳐들고 있었다. 그들 을 내버려 둔다면 떨어지는 순간 납작해질 것이 분명했다.
“바람!”
준후는 벽조선을 휘두르면서 수인을 맺은 뒤 연이어 냅다 발 을 굴렀다. 소용돌이 바람으로 떨어지는 속도를 줄이고 주술력 으로 땅을 파도치게 만들어 사람들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의 충격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준후가 머리 위쪽으로 돌개바람을 일으켜 올리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앙그라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스터가 소리를 쳤다.
“없애 주시오!”
마스터의 말이 떨어지자 레그나가 입을 벌리고 기운을 내뿜었 다. 준후는 손과 발로 모두 주술력을 행하는 중이라서 레그나에 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주문 을 외우느라 입조차 열 수가 없었다.
준후가 일으킨 돌개바람은 세 사람의 몸을 말아 올리면서 떨 어지는 속도를 눈에 보일 정도로 약화시켰다. 그와 동시에 준후 는 아랫배에 시큰한 통증을 느꼈다. 레그나의 기운이 아랫배를 강타한 것이다. 눈앞이 아찔했지만 계속 발을 굴렀다. 결국 세 사람은 준후 옆에 서로 엉키면서 떨어졌다. 그중에 현암이나 박 신부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땅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이 그 다지 크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준후는 정신을 잃어 갔다.
준후가 풀썩 쓰러지는 순간 마스터의 시선은 내려오고 있는 네 번째 낙하산으로 향했다. 마스터는 그게 누군지 알았다. 하지 만수다르사나를 찾는 게 더 급했다.
“레그나, 저자와 떨어진 자들을 처리해 주시오. 나는 수다르사나를 찾아오겠소.”
레그나는 표정 없는 붉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꼭 쥐고 있는 월향검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워, 월향!”
현암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뼈를 깎는 고통을 느꼈다. 방금 자신이 쏘아 보낸 월향이 상대의 손에 잡혀 버린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통하게 된 현암 과 월향이라서 떨어져 있더라도 월향이 느끼는 바를 현암도 느 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존재들에 둘러싸여 꽉 끼여 버린 듯 한 느낌과 처절할 정도의 압박, 그리고 저항하기 힘든 어둡고도 음산한 기운이었다. 미친 듯 불어 대는 바람 탓에 마구잡이로 흔 들리는 낙하산 위에서도 현암은 아래쪽의 광경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산봉우리의 뒤쪽에서 흉흉한 영기가 느껴졌고 누군가가 공격을 받고 쓰러 지는 광경이 보였다. 현암이 낙하산과 연결된 비상을 잡아당 기자 낙하산과 분리된 현암의 몸은 쏜살같이 아래로 떨어져 내 렸다. 그리고 주인 잃은 낙하산이 바람에 멋대로 날아가 버린 그 위쪽에서는 또 다른 낙하산 한 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인연이 있는 자여! 나는 깨달음을 찾기 위해 수행하는 자입니다. 지 금 이 물건은 내가 얻고 나서 오랫동안 보관하였으나 이제 때가 온 것을 알아 당신에게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카르마에 정해져 있는 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인연이 있는 자여! 세 가지 일을 명심하시오.
목소리-비록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윽했고 묵직하면서도 맑고 생생하게 울려왔다.
‘이것이 바바지의 목소리인가? 영적인 메시지?’
승희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 수다르사나를 다루면 안 됩니다. 그리고 수다르사나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습니다.
‘아니, 이걸 왜 파괴해 ……………..’
수다르사나의 힘이 쓰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땅의 힘이요, 온 세 상을 휩쓸었던 대홍수의 봉인이기 때문입니다.
‘대홍수의 봉인이라구?’
승희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바바지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당신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수다르사나는 정해진 운명대로 당신 에게 드리는 것이나, 당신의 위기는 어떻든 내가 한 번은 모면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당신과 나의 인연에 대한 나의 작은 선물이겠지 요. 부디 다르마에 충실하시기를………….
그것으로 바바지의 메시지는 끝이 났다. 승희는 한동안 얼떨 떨해서 멍청히 수다르사나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 정적을 깬 것은 애염명왕이었다.
그 말은 바바지가 너에게 남긴 거다. 운명에 따라 행동하는 나에게 그런 말을 남길 필요는 없으니까………
승희는 수다르사나를 천천히 들어 올려 자세히 살펴보았다. 얼마나 오래된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다르사나는 막 만 들어진 물건처럼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무게도 그다지 무겁지 않았고 날도 없었다. 이것이 어떻게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것인 지승희는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바바지가 말한 홍수의 봉인이란 무얼 말하는 것인지, 홍수를 막는다는 것은 또 무얼 의 미하는 것인지…………. 머릿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걸 부숴야 한다구? 그럼 월향은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너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될 것이다. 너는 최선을 다하여 소신껏 행동하라.
가만! 또 들어가려구?
이후에 또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선택하길………….
애염명왕은 승희의 몸속으로 들어가 버린 듯, 느낌이 사라져 버렸다. 승희는 도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 다. 대홍수의 봉인은 무엇이고 기껏 구한 수다르사나가 인간의 힘으로 파괴되어야 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아바타라 가 아니란 말은 무엇이고 로파무드는 또 누구인지…..
“제길! 이게 아니란 말야! 난…………….”
승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데…………. 다만 월향과 현암군을 위해서 그런 것뿐인데, 그런데 이게 뭐야! 뭐냐구!”
승희는 화가 솟구쳐 올라서 점점 크게 소리를 질렀고 목소리 는 사원의 벽에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왔다. 승희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휙 털어 내고는 사원의 문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사원의 문에서 한 아이가 가로막고 서서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바 라보는 것을 보고는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아이의 표정이 너 무도 냉정하고 음침하여 사람의 얼굴 같지가 않았다. 승희는 놀 라서 반사적으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넌, 넌 누구지?”
“나를 벌써 잊으셨나?”
승희는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오래전에 잊어버렸던 목소리, 입을 열지 않고 말하는 복화술사…………. 그건 바로 마스터였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땅이 움푹 파이고 뒤이어 무엇인가가 떨 어졌다. 그 자리엔 마른 흙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났다. 현암이었 다. 현암은 공중에서 ‘탄(彈)’자 결의 수법으로 기를 모아 땅을 향해 내쏘고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떨어지는 충격을 최소화한 다음 뒤이어 남은 공력을 오른팔에 집중하여 땅을 친 것이다. 덕 분에 땅바닥과 충돌하여 납작하게 되는 것은 모면했지만 현암이 받은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반동으로 몸이 붕 튀어 올라서 나가떨어진 충격으로 눈앞이 아찔해지고 온몸이 시큰거리며 말을 듣지 않았다.
먼저 떨어진 세 명에게 다가가 주술을 부리려던 레그나는 뒤이어 현암이 굉음을 내며 떨어지자 흠칫하면서 붉은 눈을 현암에게로 돌렸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준후의 의식이 간신히 돌아왔다.
‘저들이 어째서 나를 가만두는 거지?’
준후는 의식을 차렸지만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준후는 심호흡을 하며 힘을 모았다가 번개같이 뒤쪽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다가 뭔가에 털썩 부딪혀 몸이 더 이상 구르지 않자 깜짝 놀라 상체를 세웠다. 그것은 쓰러진 바이올렛이었고 옆에 는 세크메트의 눈이 떨어져 있었다. 준후는 그것을 얼른 집어 소 매에 넣고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앞서 떨어져 내린 세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몸을 일으키지 못 했다. 뒤쪽에서는 레그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레그 나가 향하는 방향을 보니 현암이 넘어졌다가 몸을 일으키려는 듯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준후는 깊은 호흡으로 욱신거리 는 몸을 추스르며 벽조선을 집어 들었다.
“어서 비켜!”
승희가 큰 소리로 다그쳤음에도 앙그라의 몸속에 든 마스터는 문에서 조금도 비켜서지 않았고 오히려 안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러면 내가 곤란해지거든. 후후후. 어서 그것을 내게 넘겨주실까?”
“못 줘! 빌어먹을……. 이 모든 게 네 계획이었구나!”
“하하하. 너도 꽤 똑똑하구나. 내가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 겠지? 어서 손에 든 걸 내놔.”
마스터는 웃으면서 품에서 부적을 몇 장 꺼내서 손에 들었다. 승희가 언뜻 보니 부적에 그려져 있는 문양이 지난번 자신의 옷 에 새겨져 힘을 봉쇄했던 문양과 흡사했다.
“너・・・・・・ 그건! 그 문양은…………….”
“어디선가 본 듯하지? 후후후. 당연하지. 내가 붙였으니까.”
“네가? 네가 언제 …………. 아니 그럼 네가?”
“나도 상당히 고생을 했지. 내 카르마에도 정해지지 않았던 여자흉내를 내 가면서 말야.”
승희는 기가 막혔다. 그렇다면 바이올렛은 마스터의 영혼이 조종하던 꼭두각시였단 말인가?
“이리 내.”
“안 돼!”
승희는 그것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후끈 열기가 느껴지면서 수다르사나가 손에 꼭 맞게 잡혔다. 마치 수다르사나 스스로가 손안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수다르사나의 중앙에 있는 보석이 빛나면서 이상한 기운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그것을 본 마스 터가 놀라면서 다가오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곧 스산하게 웃으면서 승희에게 말했다.
“그것을 던지려고? 하하하. 던지려면 던져 봐. 그건 엄청난 위 력이 있어. 아마 날 날려 버리겠지. 그리고 나 말고도 저 밖에 있 는 수백 명의 순례자들까지 쓸어버릴 거야. 던질 수 있으면 던져 봐.”
“거짓말! 이까짓 게 뭐라고!”
“믿겨지지 않으면 안 믿어도 좋아. 던져 봐. 여기 있는 수백 명 이 모조리 먼지가 되어서 없어질 테니 …………. 그래도 난 괜찮아. 또 다른 몸으로 옮겨가면 그뿐이야.”
중얼거리는 마스터를 승희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노려보았 다. 승희에게 마스터의 협박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고 무섭지 도 않았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마스터라는 것만이 중 요했다. 이 모든 일의 흉계를 꾸민 장본인일 수도 있는…… 승 희의 머릿속에 놈이 바이올렛으로 변해 있을 때 같이 룽페이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일이 기억났다. 그때 룽페이는 저런 놈에게 서 어머니의 모습을 느꼈다. 어떻게 저런 놈에게서 …………….
“너…… 그때 룽페이에게 무슨 짓을 했지?”
“그놈 말인가? 섣불리 입을 놀리려 하기에 ……………. 어차피 죽을 놈이었으니 조금 시간을 앞당겨 주었을 뿐이지. 흐흐흐.”
승희는 더 이상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 신과 현암은 눈을 벌겋게 뜨고도 코앞에서 룽페이를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악함을 지닌 마 스터에 대한 분노가 승희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감정까지 휩쓸 어 버렸다.
“너 같은 건 너 같은 놈………….”
승희는 살기를 품고 천천히 수다르사나를 들어 올렸다. 그러 자수다르사나에서 솟아나던 빛이 밝아지면서 사방이 우르릉 울 렸고 낡은 사원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조금씩 허물어졌다. 마스 터도 그 기세에 놀라서 조금씩 뒷걸음질을 했다.
“수…………… 수다르사나의 힘을 정말로 끌어내다니! 넌…..”
승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승희에게는 아무런 상 념이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맹목 적인 분노만이 불처럼 거세게 타오르고 있었다. 승희가 천천히 수다르사나를 들어 올리자 기세만으로 사원이 요란하게 흔들리 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스터가 놀라서 사원 밖으로 뛰쳐 나간 순간 사원의 돌 지붕이 한꺼번에 허물어지면서 수다르사나 를 높이 들고 있는 승희의 머리 위를 덮쳤다.
기가 막히게도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수백 명의 순례자들은 고개 드는 사람 하나 없이 땅에 엎드린 채 사원을 향하고 있었다.
현암은 눈을 부릅뜨고 먼지로 엉망진창이 된 채 자신에게 다 가오고 있는 레그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레그나보다는 레그나 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월향검을 보고 있었다. 월향검은 특유의 귀곡성조차도 내지 못하고 그녀의 작은 손에 잡혀 있었다. 현암 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기는 했지만, 추락의 충격을 줄이려고 최고 술수라 할 수 있는 ‘탄’ 자결을 발휘하느 라 공력을 많이 써 버린 상태였다. 화 노인이 전수해 준 천정개 혈대법으로 공력 순환을 지 않았다면 일어서 있는 것조차도 불가능했을지 몰랐다. 온몸의 뼈와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 었으나 겨우 참고서 레그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그 순간 다가오던 레그나의 붉은 눈이 번쩍하고 빛났고 현암 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자신이 서 있던 발밑의 땅이 요란한 소리로 폭발하며 움푹 패는 것이 보였다. 현암은 속이 철렁했다.
‘저게 대체 뭐지? 폭약이라도 묻어 둔 건가?’
레그나의 눈이 다시 자신에게로 향하자, 현암은 연달아 뒤로 재주넘기를 하여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는 세 번이나 연속으로 현암이 짚거나 디딘 자리가 아까와 똑같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면서 움푹 파였다.
‘이럴수가! 이건 거의 ‘탄’ 자결만큼의 위력이다!’
그때 몸을 굴리면서 준후가 뛰어왔다.
“현암 형! 무사했군요! 승희 누나는 수다르사나를 얻으려고 사원 안으로 들어갔어요.”
“수다르사나?”
“고대의 가공할 무기예요! 크리슈나가 사용했다는…………. “
“조심해!”
준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레그나의 시선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현암은 얼른 준후를 안아 올리면서 몸을 날렸고, 준후가 있 던 곳은 폭발음이 나며 움푹 패어 버렸다. 또다시 공격이 빗나가 자 레그나는 노여운 듯 괴성을 질렀다. 현암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몸에 기를 모았다. 준후가 현암에게 빠른 말로 이야기했다.
“바이올렛은 바바지에게서 수다르사나를 얻으려 여기까지 승 희 누나를 유인했던 거예요. 그리고 저들은 미리 이곳에서 잠복 하고 있었던 거구요.”
“바바지가 누구야?”
“인도의 대기, 대성인이에요. 수다르사나를 보관하고 있었 는데 승희 누나에게 내줄 거예요. 누나는 명왕의 화신이니까요.”
미리부터 많은 것을 추리해 두었던 현암은 준후의 짧은 말에 모든 것이 해결되는 듯 머리가 맑아졌다.
“그래서 마스터가 승희를 끌어들인 거군!”
현암이 무심코 내뱉은 말에 준후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요?”
“바이올렛이 마스터였어. 아니, 마스터의 영혼이 들어간 사람 의 형체, 인형이었어.”
현암이 말하는 순간, 레그나는 붉은 눈을 번쩍였고 현암은 준후를 안은 채 레그나의 공격을 피했다. 준후가 소리쳤다.
“현암 형, 같이 공격해요!”
“그러자!”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후는 현암의 품 안에서 박차고 나가면서 멋지게 한 바퀴 돌아 땅에 내렸다. 그러고는 발을 굴러 방위를 밟고 소리쳤다.
“받아랏!”
준후는 겁화의 불줄기를 오행의 술수 중 바람의 술수에 담 아 레그나에게 길게 내쏘았다. 바람을 탄 멸겁화의 불줄기는 무 서운 기세로 레그나를 향해 번져 갔고 이것을 보자 레그나도 비 명을 지르며 몸을 돌렸다.
“꺄악!”
레그나의 입에서 어린 여자아이의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레그나가 입을 벌리면서 숨을 내뿜자 숨결이 검은 기운으로 변하여 준후의 불줄기와 부딪 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줄기를 가로막았다. 두 기운은 순 식간에 두세 차례 서로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힘이 부 치는지 방위를 밟고 있던 준후의 발이 뒤로 주르르 미끄러졌다.
“현암 형! 지금!”
준후가 안간힘을 다하면서 소리를 치자 기를 끌어모은 현암 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팔에 남아 있는 팔성의 공력을 집 중하여 레그나의 오른손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레그나는 오른손으로는 월향검을 쥔 채 그 힘을 막고, 입으로는 기운을 뿜 어준후의 멸겁화의 불줄기를 대적하면서 또다시 왼손을 들어 현암의 무시무시한 주먹에 맞섰다.
살과 살이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콰쾅 하는 폭음이 울렸다. 흩날리는 먼지 사이로 현암이 뒤로 날아 떨어졌고, 레그나는 비 틀거리면서 균형을 잃었다. 현암의 가공할 만한 공력이 실린 주 먹을 정통으로 받고도 레그나가 단지 휘청거리기만 하는 것을 보고 준후는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더욱 힘 을 가하여 멸겁화의 기운을 밀어 보냈다.
준후가 내뿜은 불기운의 힘이 강해지면서 레그나의 기운을 뚫 고 좌아악 밀려 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레그나가 균형을 잡으면서 훅 하고 새로 기운을 내뿜자 어이없게도 준후 의 멸겁화의 기운은 단번에 흩어져 버렸고, 준후 또한 레그나의 기운에 휩쓸려 데구르르 뒤로 굴렀다. 그때 준후는 자신의 몸을 밀어내는 차가운 기운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저, 저건! 인간이 아냐!’
현암은 입가에 가는 핏줄기를 흘리면서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 켰다. 자신과 준후가 양면에서 합동 공격을 했는데도 레그나가 끄덕도 없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스터의 생전 모습도 비슷 했지만 이건 그보다 더 무심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월향검을 두 고 물러설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현암이 공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땅이 흔들리는 듯한 굉음을 내면서 사 원 건물이 내려앉았고, 사원 안에 승희가 있다는 것을 떠올린 준 후는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마스터는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놀란 눈으로 무너지는 사원을 보고 있었다. 낡은 사원은 그야말로 기둥 하나 남기지 않고 폭삭 무너져 납작해졌다. 중앙에는 여전히 승희가 수다르사나를 높이 치켜든 채 서 있었다. 수다르사나에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휘 황한 빛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개의 치 않고 땅에 엎드려 있던 순례자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리며 양손을 높이 쳐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함성과 주문 소리와 파 장이 사방을 휩쓸면서 지나갔다. 다음 순간, 모든 순례자들이 합창하듯 긴 주문을 웅얼거리기 시작했고 수백 명이 동시에 외우는 주문 소리는 사방을 가득 메웠다. 그러자 기세등등하던 레그 나가 몸을 움찔거리면서 순례자 쪽을 노려보았다.
현암과 준후는 멍한 표정으로 레그나와 순례자들을 번갈아 보 다가 레그나의 모습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레그나 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 갔다. 금발이던 머리가 검은색의 흑발로 마치 물감이 번지듯 물들어 갔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뻗어 나오더니 팔다리가 길게 늘어나는 것이었다. 오른손은 여 전히 월향검을 쥐고 있어서 변해 가는 것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왼손에서는 손가락마다 손톱이 길게 돋아나 날카롭게 번 썩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순례자들의 주문이 파도처럼 덮쳐 오 자 레그나의 모습은 순식간에 원래의 어린아이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준후와 현암은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레그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인파를 헤치면서 마스터가 서 있는 무너진 사원 쪽으로 달려갔다. 현암과 준후도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러 나 둘은 달리는 것을 곧 멈추어야 했다. 순례자들이 갑자기 현암 과 준후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현암과 준후는 영문도 모른 채 놀란 눈으로 순례자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고 악의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현암은 순례자 들이 앞을 막아서자 급한 김에 영어로 뭐라고 말했으나 순례자들은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한 노인이 현암 의 앞으로 나서 영어로 말했다.
“안심하시오, 이방인들이여.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것 이오. 수다르사나가 나타날 것이라고 바바지 님께서 말씀하셨 고, 그대로 이루어졌소. 이제는 우리가 그 주인을 도울 것이니 걱정을 버리시오.”
현암이 물었다.
“여러분은 누굽니까?”
“나는 바바지 님의 열아홉 번째 제자 사툼나라고 하오. 여기 이 사람들은 모두 당신들을 돕기 위해 와 있었던 것이오. 우리의 기도가 울리는 한 주술은 사용할 수 없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러고 보니 엄청난 힘을 지녔던 레그나가 변신을 하려다가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방해를 받고 원래대로 돌아갔던 것이 떠올 랐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현암은 그 기억과 사툼나의 눈빛을 보고 그들을 믿기로 작정하였다.
마스터는 무너진 사원의 폐허 위에 서서 군중들을 향해 뭐라 고 고함을 질렀으나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또 한번 뭐라고 외치자 순례자들의 중간쯤에서 누군가가 일어 나 마스터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둘의 대화가 이곳에서 쓰는 말 이라 현암은 알아듣지 못했으나 마스터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아까 현암에게 가만히 있어 달라고 부탁했던 사툼나였다. 마스터는 사나가 하는 말을 아무 대꾸 않고 들으며 점차 안색이 변했다.
승희는 사원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넋이 나가 있다가 마스 터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는 정신을 차렸고, 수다르사나를 치켜 든 채 마스터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마스터는 이상하게 도시툼나와 이야기를 한 이후에 눈에 띌 정도로 불안해했다. 승 희가 눈에 힘을 주며 마스터에게 말했다.
“마스터, 이제 각오해라.”
“……”
“가만, 그전에 내 한 가지만 더 묻자. 수다르사나에게 죽은 자 를 살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게 정말인가? 그래서 네가 이걸 그 토록 얻으려 하는 것인가?”
마스터는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도 기가 꺾이지 않고 승희에게 코웃음을 쳤다.
“흥! 그걸 왜 묻지?”
“대답해! 그러면 살려 줄 수도 있다. 이걸로 널 치면 네가 아무 리 영혼만 남았다 해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
“나는 몸 따위에는 관심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살아나는 것 따위의 비루한 일이 아냐. 그걸로 칼 속에 들어 있는 여자를 살 리려 했느냐? 하하하…………. 몸도 없이 죽은 자가 살아나리라 생각했어? 그런 것은 세상에 없다. 이 바보 천치야!”
승희는 눈앞이 아찔하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설 마설마 했지만 자신은 마스터에게 놀림을 당한 것밖에는 안 되 었다. 승희가 바이올렛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마스터는 궁여지책 으로 승희가 현암을 생각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되는 대로 거짓 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승희의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눈물이 볼 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미안해, 현암군. 일이 마음같이 되질 않네.’
승희는 눈물이 맺힌 눈을 크게 뜨고 마스터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가기 시작했다. 비록 승희에게 힘이 없고 그나마 지금은 수 다르사나를 잡는 데 애염명왕의 힘 전부가 들어가 있어서 신력 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 기세만으로도 마스터는 뒤로 조금씩 물러섰다. 그때 마스터의 앞을 가로막고 서는 게 있었다. 레그나였다. 모습은 작은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붉은빛을 띤 그대로였다. 승희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레그나의 오른손에 월향검이 쥐어져 있었다. 승 희가 월향을 보고 깜짝 놀라자 마스터는 승희의 심사를 알아차 리기라도 했다는 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더 다가오지 마라! 가까이 오면 이 칼은 박살이 날 것이다. 칼 이 박살 나면 안에 있는 영혼도 당연히 같이 으스러지는 것이지.” 마스터가 레그나에게 무어라고 속삭이자 레그나는 월향검을 양손으로 거머잡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어떤 힘으로 도 상하게 할 수 없었던 월향검이 조금씩 굽혀지는 것이었다. 그 것을 보고 승희는 어쩔 줄 몰라서 망연히 다르사나를 든 채 걸 음을 멈추었다. 승희가 보기에 마스터가 수다르사나를 두려워 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 같았고, 그로 미루어 볼 때 수다르사나로 한번 내려치면 놈은 박살이 나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레 그나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레그나가 월향검을 꺾어 버리기 전 에 적중시킨다면 월향검을 도로 찾고 마스터도 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은 현암이나 준후처럼 재빠른 사람이 아니 었다. 일격에 실패한다면…………. 승희는 월향검의 봉인을 풀어 현 암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모든 것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현암의 눈앞에서 월향검을 꺾이게 한다면…………….
현암은 월향검이 구부러지는 것을 보고는 막무가내로 뛰어들 려 했으나, 속사정을 모르는 순례자들이 현암을 잡았다. 주저하 는 현암의 눈에 울고 있는 승희가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 라도 달려가 구하고 싶었지만 고민하고 있는 승희의 앞에서 자 신이 뛰어드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것은 승희였다.
‘그래. 승희가 잘해 주겠지. 이건 승희의 일이다.’
현암은 스스로를 자제하면서, 이제야 앞의 상황을 보고 뛰어 나가려는 준후를 붙잡았다.
“준후야, 이건 승희 일이야. 승희에게 맡기자꾸나.’
준후는 현암의 말을 듣고는 제자리에 섰다.
한편, 자리에서 일어나 마스터와 이야기를 하던 사툼나는 곧 큰 소리로 승희를 향하여 영어로 말했다.
“마하라가 다르사나를 도로 거두어들이실 이여. 제 말이 들 리십니까? 알아들으실 수 있습니까?”
승희는 월향을 보고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서 있어서 처음에는 사툼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들리시지 않습니까?”
다시 사툼나가 소리를 지른 후에야 승희는 살짝 고개를 끄덕 였다. 사툼나가 안심한 듯 말했다.
“예정된 분이시여. 아무 염려 마시고 그대의 뜻대로 행하소서.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바바지 님의 명을 받들고 기다리고 있었 나이다. 우리의 힘과 수다르사나는 예정된 분에게 내리시는 바 바지 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악의 힘을 모두 봉쇄할 것 이니 저자를 징벌하소서. 바바지 님은 예언을 남기셨습니다. 수 다르사나로 인해 모든 것이 예정대로 될 것이라고…………. 이 우둔 한자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악행의 때는 끝났습니다! 저자의 악행도 종말을 맞이한 모양입니다. 저자는 한때 『베다』를 수련하 던 바바지 님의 제자였지만 이젠 악에 물들어 세상을 더럽히려 는 자입니다.”
그 말을 어렴풋이 알아듣고 현암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탄 성을 질렀다. 현암은 바바지를 잘 알지는 못했으나 제자인 사툼 나의 눈에서 느낀 맑은 기운과 순례자들의 주문이 레그나의 엄 청난 힘까지 억제할 정도로 강한 것을 보고 바바지의 경지가 대 단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바바지의 제자로서 그토 록 힘에 집착했으니 과거 마스터가 그렇게 강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순례자들의 기도 소리는 산 전체를 울리듯이 윙윙거렸고 마스터와 레그나조차도 안에서 버티고 있기 힘든지 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문제는 승희였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의 힘까 지 있으니 이 자리에서 마스터와 레그나를 처단하지 못하면 간 교한 마스터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월 향, 그리고 현암은…………….
승희는 눈물을 삼키며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사툼나?”
“예, 예정된 분이시여.”
“당신을 비롯해서 저 사람들은 모두 내가 수다르사나를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린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마하라가.”
“바바지 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나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수다르사나를 얻는 자의 명을 들으라하셨습니다.”
“당신은 수다르사나의 비밀을 아나요?”
사툼나는 머리를 조아리며 승희가 묻는 말에 차분하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그것은 땅의 힘의 열쇠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이걸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나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승희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수다르사나 를 치켜든 손을 내려놓았다. 승희의 몸에서 뿜어 나오던 살기가 가시자 수다르사나의 빛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순례자들 사이에 놀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고 사툼나조차도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데 승희가 마스터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그럼 가져가라. 이 더러운 놈아. 대신 월향을 풀어 줘.”
그 말은 사툼나나 다른 순례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었 지만 현암과 준후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현암은 놀란 나머지 잡 고 있던 순례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안 돼! 승희야!”
승희가 막 수다르사나를 내놓으려 하는 순간이었다. 승희는 현암의 목소리가 들리면서 현암의 모습이 자기 앞으로 뛰어나오 자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서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무사했구나……………. 바보야.”
“승희야! 저놈에게 그것을 주어서는 안 돼! 놈은 틀림없이 그걸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거야!”
“현암 군!”
승희가 큰 소리를 질렀다. 현암은 말을 이으려다가 난데없이 승희가 다그치는 소리에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월향을 죽이고 싶어? 공연히 정의파인 척하지 말고 솔 직해 봐. 안 그래도 정의파란 거 아니까.”
“승희야.”
“난 몰라. 세상의 운명도 모르겠고, 이게 뭔지도…………… 힘이 뭔 지도 몰라. 다만 월향이 죽으면 넌 슬퍼할 거 아냐? 그리고 너는 죽더라도 월향을 지키고 싶어 하잖아. 너라면 어떻게 할 거 같아, 응?”
승희는 이어서 마스터를 향해 소리쳤다.
“어서 바꾸자!”
그러자 마스터가 슬슬 웃으면서 승희에게 말했다.
“먼저 수다르사나를 이리 다오.”
“월향검부터 풀어 줘!”
“수다르사나부터 달라니까?”
“너를 어떻게 믿고 먼저 주겠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레그나가 그쪽으로 가서 현암에게 월향검을 주겠다. 너는 이리로 와서 나에게 수다르사나를 주도록 해라. 그러면 되지 않나?”
“그걸 넘겨주면 안돼! 승희야!”
현암이 소리치자 승희는 눈물 젖은 얼굴로 현암을 돌아보면서 웃음을 띠고 말했다.
“현암 군이 다시 찾아 줘. 그러면 되잖아. 안 그래? 나와 약속 해. 저걸 되찾아 준다구. 만약 내가 잡혀 있다면 현암 군은 어떻 게 했겠어. 응?”
그런 승희의 모습에 현암은 가슴이 미어졌다. 평소 승희는 자 신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랬다. 승희가 지금 취하는 행동은 입장이 바뀌었을 경우에 자신이 취할 행동이기도 했다. 그리고 준후나 박 신부라도 똑같이 취했을, 남들이 볼 때엔 그야 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 다. 현암은 고개를 푹 숙여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현 암은 승희에게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반드시 되찾아 줄게. 그리고 승희야, 정말로・・・・・・ 고맙다.”
그 말을 듣자 승희는 웃으면서 천천히 수다르사나를 든 채 마 스터 쪽으로 걸어갔다. 마스터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교환이 이루어진 다음 우리가 여기서 무사히 나 가도록 사툼나에게 말해라. 너희도 물론 우리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더러운 놈! 똑똑하기도 하구나.”
“칭찬을 해주니 고맙군.”
“좋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도 너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대신 너희도 수상한 수작을 부리면 안 된다. 우리 편이 더 세다는 걸 명심해.”
“나를 악당이라고 여기겠지만 나도 약속은 지킨다.”
“맹세해! 인마!”
“맹세한다. 내가 약속을 어길 때는 몸이 가루가 될 것이다. 됐나?”
“너는 이미 죽은 놈 아냐?”
“좋다. 그럼 다시 맹세한다. 내가 약속을 어길 때는 몸과 영혼 이 다 같이 가루가 될 것이다. 됐느냐?”
서슴없이 맹세를 하는 것을 보니 마스터도 어지간히 다급한 모양이었다. 승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툼나에게 외쳤다.
“사툼나!”
“예.”
“나는 지금 저자에게 수다르사나를 주고 무언가를 교환하기로 했어요. 그건 매우 중요한 거라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들은 교 환이 끝난 뒤 저들이 무사히 물러설 수 있게 해 주세요.”
“네?”
“당신은 바바지 님께 내 말을 들으라고 명령받았다면서요? 그럼 그대로 하세요.”
“마, 마하라가..”
막 정신이 든 박 신부는 낙하산을 메며 조종사에게 서두르라 고 소리치고 있었다. 도구르에게 기습을 당해 정신을 잃었던 요 원도 정신을 차린 후였다. 그 요원은 박 신부에게 정말 괜찮으냐 고 물었다.
“이래봬도 장교 출신이네. 실전에도 참가했고 점핑도 여러 번 했네. 나이는 들었지만 염려 말게.”
박 신부는 늦지 않기를 희망하면서 낙하산 점검을 끝마쳤다. 박 신부에게 아래쪽의 산봉우리에서 미칠 듯 타오르는 악의 기 운이 느껴졌다. 그것은 결코 인간의 것도 이 세상의 것도 아니 었다.
‘저건 악마야. 악마 그 자체다. 어떻게……………..”
박신부는 심호흡을 하면서 숨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저런 것이 나타날 수 있을까? 내가 가지 못하면 아무 도 막지 못해. 저놈은 힘으로 상대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어. 오 오! 신이여……. 때가 온 것입니까?’
박신부는 속으로 기도하면서 요원에게 눈짓을 했고 요원은 머 뭇거리다가 비행기의 문을 열었다. 따가운 바람이 박 신부의 얼 굴에 몰아쳐 오자 박 신부는 성호를 그은 뒤 아래로 뛰어내렸다.
사툼나는 놀란 듯했으나 잠시 후 순례자들을 향해 뭐라고 말 했고 순례자들은 웅성거렸지만 이윽고 한편으로 길을 텄다. 준 후도 순례자들 사이를 헤치고 나와 현암의 옆에 바싹 붙어 섰다. 승희는 조심스럽게 마스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고 마스터가 눈짓 을 하자 레그나도 현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한 사람이 사이로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도구르였다.
“수호자! 당신이 ・・・・・・ 당신이 수호자인가?”
도구르의 등장에 현암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마스터도 마찬가 지였다. 도구르를 본 적이 없었던 승희는 무슨 일인지 몰라 의아 해했다.
“당신이・・・・・・ 당신의 목소리는 수호자의 것이다. 아무리 억양 을 숨겨도 알 수 있다. 나는…………… 나는 뒤에서 모든 것을 들었다.”
수호자의 정체를 알고 싶어 비행기에서 뛰어내린 도구르는 순례자들의 뒤에 서서 승희와 사툼나 등이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것이다. 자세한 내막까지야 알지 못했지만 비행기 안 에서 박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수호자의 정체에 대해 의심을 가 졌던 도구르는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믿고 있던 수호자가 악인이 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도구르는 그것을 믿 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 이다.
“당신은 나에게 정의를 위해 힘쓰라고 말했소. 그리고 나를 살려 주었소. 나는 그 때문에 저들을 해치려 갖은 수를 썼지만 저 들은 나를 해치지 않았소.’
“내 말대로 물러서라.”
그렇지만 도구르는 마스터의 말을 듣지 않고 옆에 있는 레그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당신은 이야기했소! 저들은 사악한 힘으로 사람들을 괴롭히 는 악마와 같은 무리들이라고…………. 그러나 당신과 같이 있는 이 아이, 이 아이는 사람이란 말이오? 누가 더 사악한 힘을 사용하 는 자요?”
자꾸만 도구르가 말을 붙이자 마스터가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물러서라고 했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마스터가 손가락을 퉁기는 순간, 격심한 고통을 느낀 도구르 는 휘청거리면서 배를 감싸 안았다. 뒤에서 준후가 안쓰러운 듯 중얼거렸다.
“주술은 쓸 수 없을 텐데…………….”
그 말을 듣자 현암도 나직하게 말했다.
“저건 최면이지. 주술이 아냐.”
“듣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어서 비켜!”
도구르는 아픔을 참으면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 이용하기 위해 살려 준 것인가? 아니 ・・・・・・ 그것도 거짓말이었단 말인가?”
마스터는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순간에 도구르가 뛰어들자 화 가 치밀었으나 간신히 참으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어서 비켜라. 너는 지금 저들에게 속고 있다. 지금은 그런 것 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내가 나중에 설명하마.”
그 말에 도구르는 주춤거리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 자 마스터는 다시 손가락을 튕겼고 도구르는 통증에서 해방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물러서서 저들을……………”
그 순간, 도구르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이 소리를 지르며 마 스터에게 달려들었고 레그나가 도구르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 자 도구르는 월향검을 쥐고 있는 레그나의 오른손을 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레그나의 작은 몸이 허공에 마구 휘둘렸다. 이를 보고 현암과 준후가 뛰어나가려 했으나 어느새 레그나는 허공에 매달린 채 왼손으로 도구르의 얼굴을 할퀴었다. 도구르의 얼굴 이 처참하게 찢기면서 선혈이 사방으로 튀었다. 도구르가 털썩 쓰러지자 레그나는 날렵하게 땅에 뛰어내리면서 피로 물든 왼손 을 혀로 맛있다는 듯 핥았다.
“…… ……!”
더 이상 참지 못한 준후가 레그나를 향해 뇌전을 날렸고 레그 나는 뒤로 물러서면서 뇌전을 왼손으로 후려쳤다. 놀랍게도 준후의 뇌전은 방향을 꺾으며 땅에 꽂혔다. 레그나가 씩 웃으며 붉 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멀리 떨어져 있는 준후의 몸이 핑글 돌면서 그 자리에 곤두박질쳤다. 이를 보고 현암이 앞으로 달려 나가려 하자 레그나가 월향검을 쥔 오른손을 협박하듯 앞으로 내밀어 보였고 현암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치사한…….”
“아직 흥정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
마스터가 조소 섞인 말을 하는 순간, 순례자들의 뒤편에서 눈 부신 불줄기가 십여 가닥 솟아오르면서 무서운 기세로 레그나에 게 달려들었다.
“괴물아! 이거나 먹어랏!”
불줄기를 보고 준후가 소리를 질렀다.
“주기 선생!”
레그나는 현암을 협박하기 위해 오른손을 내밀고 있던 참에 열두 개의 불줄기가 솟아오르자 왼손을 내밀면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열두 개의 기운은 산산이 허공에 흩어졌지만 그 뒤에 숨었던 네 가닥의 더욱 빛나는 기운은 확 퍼졌다가 용솟음 치면서 레그나의 오른팔로 달려들었다. 레그나는 막 기운을 뿜 었던 터라 그 기운들을 피하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눈부신 빛줄기가 솟아올라 사람들은 잠시 눈을 뜨지 못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은빛의 물체 하나가 번쩍이면서 솟아올랐다.
꺄아악!
월향검이 빠져나가자 레그나는 미친 듯 소리를 지르면서 입에 서 기운을 내뿜었고 월향검은 기운에 휘말려 아래로 떨어져 내 렸다. 현암은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솟구쳐 월향을 받고 난 뒤 레 그나의 기운에 휘말려 폐허 더미에 우당탕 처박혀 버렸다. 그때 마스터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재빨리 품에서 뭔가를 꺼내어 흩 뿌렸다. 순간적인 일로 인해 순례자들이 기도 소리를 멈추자 술 수를 부린 것이다. 승희는 아찔하면서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 다. 몸에 여러 장의 부적이 날아와 붙은 것이다. 부적에 뒤이어 마스터가 승희의 손에 들린 수다르사나를 노리고 뛰어들었고 준 후도 그것을 막기 위해 같이 몸을 날렸다. 마비된 승희의 손이 수다르사나를 떨어뜨리는 순간 준후가 조금 더 빠르게 수다르사 나를 집었다. 그러나………………
“으아악!”
수다르사나를 잡은 준후의 손이 바지직 타들어갔다. 마치 시 뻘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맨손으로 잡은 것 같았다. 고통을 이 기지 못하고 준후는 수다르사나를 놓치고 말았고 그 수다르사나 를 마스터가 잡았다. 마스터의 손도 타들어 갔으나 마스터는 아 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수다르사나에서 미친 듯한 빛 이 뿜어져 나오면서 주변은 소용돌이치는 바람과 흙먼지로 가득찼다. 준후는 몸이 굳어 버린 승희를 끌고 옆으로 굴러서 간신히 마스터의 옆을 피했다. 땅이 흔들리면서 수다르사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스터는 앙그라의 몸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앙그라의 손 은 뼈가 드러날 정도로 수다르사나의 열기에 타들어 갔으나 마 스터는 여전히 수다르사나를 놓지 않았다.
“우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