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혼세편 4권 6화 – 홍수 19 : 블랙엔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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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혼세편 4권 6화 – 홍수 19 : 블랙엔젤


블랙엔젤

돌풍의 소용돌이가 일어나 순례자들은 중심을 잡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마스터의 옆에는 레그나가 주기 선생의 제황사신번에 얻어맞아 시커멓게 그을린 오른 손목을 잡고 짐승 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크아악!”

그 소리가 울리자마자 저만치에서 주기 선생의 몸이 허공에 솟아올랐다가 땅으로 인정사정없이 패대기쳐졌다. 염동력이나 정신동력 같았는데 현암과 맞설 정도의 술수를 지닌 주기 선생 을 일격에 패대기칠 정도라면 그 기세는 놀랍다고 할 수 있었다. 주기 선생이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지자 레그나는 짐승처럼 포효했고 몸에서 가공할 만한 검은 기운이 폭발처럼 퍼져 나갔 다. 동시에 레그나의 몸이 아까 현암과 준후가 보았던 것처럼 늘 어나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길어지고 머리칼이 흑발로 바뀌 면서 잠깐 사이에 십여 년 이상의 나이를 먹어 가는 것처럼 보였 다. 검은 기운이 레그나의 몸을 깃털처럼 감쌌고 레그나의 등에 는 검은 기운 두 갈래가 날개 모양으로 맺혔다. 간신히 승희를 끌고 뒤편으로 물러났던 준후는 그 모양을 보고는 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저.. 저건 인간이 아냐! 악…………… 악마!”

레그나가 월향검을 잡고 있기 위해 묶어 두었던 수백 수천의 악령들이 이제 잡고 있을 것이 없게 되자 사방으로 마구 퍼져 나 가는 것이 영안이 트인 준후의 눈에 보였다. 그들은 이제 인간의 모습 같지도 않게 변해 가는 레그나의 외침에 따라 소용돌이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초치검 사건 때 겪었던 악몽이 그 보다 몇 배 더 크게 재현되는 느낌이었다. 그때 십여 명의 술사 들이 있었어도 막아내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것과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적의 수가 많았고 우리 편의 수는 적었다.

준후는 미처 생각을 가다듬기도 전에 악령들이 벌 떼처럼 덮 쳐오는 것을 느끼고 벽조선을 휘둘렀다. 다른 한편에서는 현암 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월향검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통증 이 심했고 공력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현암은 심상치않은 기운들이 달려든다는 것은 알 수 있었어도 영들을 알아볼 영안은 트여 있지 않았다. 현암은 오른손으로 월향을 쥐고는 있 는 공력을 월향검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월향검은 기운을 차린 듯, 귀곡성을 울리면서 검기를 담고 무섭게 회전하면서 현암의 주위를 맴돌며 현암을 보호했다.

승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순례자들은 달려드는 악령들을 막기 위해 주문을 외우기도 하고 손발을 휘두르기도 했다. 그러나 악령들의 숫자는 봇물 터진 듯 점점 늘어만 갔다. 도대체 레그나가 무엇이기에 그리도 엄청난 숫자의 악령들을 부 릴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툼나는 소리를 치면서 순례자들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그 누 구도 기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기 선생은 일어서지 도 못하고 땅에 누운 채 깃발을 휘둘러 악령들을 쫓고 있었다. 마스터는 수다르사나를 쥔 손이 타들어 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하하하! 이제 됐다! 바보 같은 너희 인간들은 끝장이다. 에 메랄드 태블릿의 비밀과 수다르사나의 힘을 합치면 ……………. 하하 핫!”

레그나는 이제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는 흉측했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창백하고 요염함을 띤 성숙한 얼굴로 변해 있었고, 금발의 곱슬머리는 삼단같이 길고 치렁치렁한 흑발로 바뀌어 있었다. 키도 훨씬 커지고 늘씬한 몸에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을 옷처럼 걸치고 있었으며, 등에서는 검은 기운 이 뭉쳐 마치 검은 날개가 달린 것처럼 펄럭거리며 움직였다. 오 싹할 정도로 요염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입술에 는 긴 송곳니가 살짝 뻗어 있고 손톱이 칼날 같은 곡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돋아 있는 것이 으스스한 느낌을 주었다. 그런 모습으 로 레그나는 서서히 준후가 쓰러져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준후는 노려보는 레그나의 눈길과 마주치자 온몸이 굳은 것처 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벽조선도 움직일 수 없었고 수 인을 맺거나 주문을 외울 수도 없었다. 마치 뱀의 눈초리를 맞은 쥐처럼 준후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준후에게 레그나가 긴 손톱을 뻗치려는 순간, 저편에서 고함 소리와 함께 빛줄기가 날 아왔다.

“없어져랏! 요물!”

주기 선생이었다. 주기 선생은 깃발을 있는 대로 꺼내어 부채 처럼 펴들고 레그나를 향해 십이지신의 술수를 모두 발휘해 빛 줄기를 쏘았다. 그동안에도 주기 선생은 악령들에게 물어뜯겨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있었으나 자신의 몸을 방어할 생각은 않 고 준후를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하지만 주기 선생이 쏘아 보낸 십이지신술의 빛줄기들은 레그나의 눈빛과 마 주치자마자 뒤로 돌아 주기 선생에게로 덮쳐 들어갔다. 주기 선생은 힐기보법을 펼쳐 피하려 했으나 그만 두 줄기의 빛에 적중되어서 비명을 지르면서 나가떨어졌다. 그때 거대한 그림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총알같이 레그나에게 달려들었다. 성난큰곰이 었다.


레그나의 눈길이 사라지자 준후는 정신을 차렸으나, 이번에는 눈길 대신 레그나의 손톱이 준후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준후는 몸을 피하려다 순간 자신의 뒤에 승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준후의 머릿속에 항상 자신의 옆에 있어 달라고 했던 승희의 말 이 생각났고, 준후는 손톱을 자신의 어깨로 받았다. 손톱이 어깨 에 푹 박혀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아찔한 아픔을 느꼈지만 있는 힘을 다해 벽조선을 휘둘렀다. 그러나 벽조선에서는 기운이 나 가지 않고 헛되이 바람만 일어날 뿐이었다. 준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레그나는 준후에 어깨에 박혀 있는 손톱을 빼지 않고 다른 손 의 손톱으로 준후의 얼굴을 찌르려고 했다. 그때 귀곡성을 울리 면서 월향이 쏜살같이 그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레그나는 언뜻 뒤로 손을 뺐으나 레그나의 손톱 한 조각이 검기에 잘려 나갔다. 그때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레그나의 뒤를 덮치더니 양팔을 뒤 로 휙 잡아 뺐다. 그 서슬에 준후의 어깨에 박혔던 손톱이 빠지 면서 피가 튀었다. 레그나는 성난큰곰의 무지무지한 힘에 팔이 뒤로 당겨지자 소리를 지르면서 등에 있는 날개와 같은 기운을 퍼덕거렸다. 그러자 강신술로 몸을 굳히고 있는 성난큰곰의 얼 굴과 몸에 칼로 벤 듯한 상처가 생기면서 사방으로 피가 튀었고 삽시간에 성난큰곰의 얼굴과 상반신은 깊은 상처들로 만신창이 가 되었다. 그러나 성난큰곰은 하늘을 향해 길게 고통의 비명을 지르면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월향검이 레 그나의 몸을 그으면서 지나가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레그나의 몸 에 옷처럼 둘러진 검은 기운이 월향검을 맞받아쳐 냈다. 이때 그 쪽으로 몸을 날리려던 현암의 마음속으로 성난큰곰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저 칼로 이 괴물을 나와 함께 찔러라. 정면으로 찔러야 들어간다!

어서!

그러면 당신도 죽어!

그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어서!

그건 안 돼!

어서!

현암은 이를 악물고는 레그나의 팔을 노리며 월향을 조종했 다. 아무리 그래도 성난큰곰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귀곡성을 울리면서 월향검이 레그나에게 덮쳐 들어갔으나 레그 나는 성난큰곰의 거대한 몸을 뒤집어 업어치기식으로 내던졌고 성난큰곰은 레그나의 팔을 잡은 채 땅에 머리를 찧었다. 날아들던 월향검은 서둘러 호선을 그으며 방향을 바꾸려 했으나 성난 큰곰의 거대한 등에 깔려 함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저 칼을! 그걸 어서!”

마스터는 레그나가 놀라울 정도의 힘으로 네 사람의 공격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는 의기양양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하 늘에서 내려와 땅에 늘어지는 낙하산 하나를 발견하고는 곧 조 용해졌다. 바람에 부풀었던 낙하산이 서서히 꺼져 들어가자 그 뒤에 맺혀 있던 빛도 보였다. 연녹색의 오라……………. 박 신부였다. 

“저………… 저 신부 놈이! 블랙엔젤!”

마스터가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수백 명의 순례자들 은 악령들과 엉켜 정신없이 헤매고 있었고 현암을 뺀 승희와 준 후, 주기 선생과 성난큰곰은 움직일 수조차 없는 상태였다. 레그 나는 성난큰곰을 끝장내려 하고 있었고 현암은 그것을 막기 위 해 레그나에게 달려들려던 참이었는데 마스터가 소리를 친 것 이다. 레그나, 아니 블랙엔젤은 마스터가 소리를 지르자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면서 낙하산을 떼어 내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박신 부를 쳐다보았다. 순간 블랙엔젤이 노여움에 겨운 소리를 질러 댔다.

박신부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않았다. 다만 입으로 기도문 을 읊으면서 순례자들의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올 뿐이었 다. 순례자들에게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 신부가 지나가는 곳에 있던 악령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물러섰다. 마치 고무 래로 흙을 밀어내는 것처럼 박 신부 주위의 오라 부근에 있는 악 령들은 아우성을 치며 뒤로 물러서서 자기들끼리 엉키고 난장 판을 벌이며 도망쳤다. 영안이 트인 준후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악령들은 블랙엔젤에게로 밀물처럼 달려들어 블랙엔 젤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박 신부는 계속해서 다 가왔고 수백 수천의 악령들을 몸에 두르고서도 블랙엔젤은 검은 날개 모양의 기운으로 자신의 앞을 가리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 러섰다. 박 신부는 준후의 옆에 도달하자 블랙엔젤쯤은 안중에 도 없다는 듯이 허리를 굽혀 의식을 잃은 성난큰곰을 살펴보며 준후에게 말했다.

“준후야, 괜찮니?”

준후는 구세주처럼 나타난 박 신부가 반갑고 기뻐서 왈칵 박 신부에게 안겼다.

“신・・・・・・ 신부님!”

“저놈은 악마야. 블랙엔젤이라고 하지. 저놈과는 힘으로 싸우 면 절대 이길 수 없단다. 그건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기 때문 이지. 저놈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적을 공격한단다.”

그러나 준후는 박 신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널찍한 사제복 자락이 그토록 안온한 느낌을 줄 줄은 몰랐다.

블랙엔젤이 시커먼 기운을 박 신부의 등에 내뿜었으나 박신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블랙엔젤의 기운은 박 신부를 맞히 기 직전에 방향을 틀어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박 신부는 평온 한 표정으로 몸을 돌려 블랙엔젤에게 말했다.

“사악한 어둠의 피조물아……………. 이 세상에 어째서 나왔는가?”

놀랍게도 블랙엔젤은 간드러진 여자의 음성으로 말했다. 

“나오고 싶으니 나왔고, 나올만 하니 나왔지. 그걸 모르겠어?” 

교태와 원망이 철철 넘쳐흐르는 목소리였다. 그 말은 소리로 들리는 것이었지만 어느 나라의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뜻은 익숙한 자신의 언어처럼 그대로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리고 뭐? 사악한 어둠의 피조물? 너 참 제 멋대로구나? 너 무심해. 너무하네. 호호.”

“신의 섭리를 어기는 너희는……………”

“아 참, 짜증나.”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이상한 교태 와 간드러짐이 넘쳐서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녀는 말했다. “신의 섭리를 어기니 사악한 어둠의 존재란 거야? 신의 섭리 가 뭔데? 뭔지나 알아? 너희 인간들 멋대로 갖다 붙이는 바보짓 말고. 신이 정말 뭘 원하시는지 너흰 알아? 응?”

블랙엔젤은 덧붙였다.

“그런 너희가 맘대로 정한 섭리라 해도, 너희는 안 어겨? 그러면 너희야말로 사악한 어둠의 피조물이겠네? 멸망당하기에도 충 분할 만큼.”

“그때가 임하면 피하지 않을 것이나, 그것을 막아 내어 스스로 를 고치는 것이 인간의 길이다. 인간이 행한 잘못이 있다 해도, 그것을 스스로 깨닫고 고쳐나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길이다.”

박신부가 차분히 말하자 블랙엔젤은 눈을 찌푸렸다.

“너희는 마음대로 선과 악이란 것을 정하고, 멍하니 그대로 따 르고 있지. 너희가 말하는 선과 악은 너희들 내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냐.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너 희의 선이라지만, 약자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율법이잖아.” 

“자연의 율법조차도 신의 섭리는 아니다.”

“하. 맹랑한 소리네?”

“자연의 율법이 완전한 것이라면, 산 것들은 완전한 상태로 머 물러야 한다. 그러나 자연은 계속 변하고, 발전하며, 인간도 그러하다.”

“그럼 너희 인간이 완전하단 거야?”

“그렇지 않지만 그러도록 애쓸 뿐이다. 인간은 신의 섭리가 무 언지 정확히 깨닫지 못하고 있고 실수도 끝없이 범하지만, 적어 도 크게 보아서는 신의 섭리에 합당하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너흰・・・・・・! 쓰레기일 뿐이야! 세상을 좀먹는 쓰레기! 아무 힘도 능력도 없는 바보 같은 쓰레기들이………….”

“그러면 너희는 뭐지? 너희도 피조물이다. 너희는 버림받은 피조물일 뿐이지. 쓰레기가 뭐지? 쓸모없어서 버림받은 물건이다. 너희야말로 그 말에 어울리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함부로 주절거리면…”

블랙엔젤이 분노를 드러내는데도 박 신부는 차분히 말했다. 

“나는 경전의 지혜를 믿는다. 오래되어 명확하지 않고 비유로 감춰져 있어도 그 내용은 진실을 담고 있지. 너희는 강하고, 많 은 면에서 우리보다 우월하다. 그러나 신은 너희를 내치시고, 우 리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삼았다. 한때 너희는 천사라 불렸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흑암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일 뿐이다. 너 희는 그것 때문에 우리를 미워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 지. 그러나 너희들조차 신의 섭리하에 있다. 스스로 신의 섭리에 맞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조차 섭리를 따라갈 뿐이다. 너는 우 리 인간을 쓰레기라 부르지만, 너희는 쓰레기만도 못해. 조롱밖 에 할 줄 모르는 가련한 존재들.”

블랙엔젤이 울부짖듯이 소리쳤다. 

“닥쳐!”

박신부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 며 경문을 외웠다. 그러자 블랙엔젤은 소리를 지르면서 날개를 퍼덕여 앞을 가렸다. 그 순간 앙그라가 털썩 쓰러지면서 손에 들 려 있던 수다르사나가 허공을 날았고, 동시에 블랙엔젤의 주위에 커다란 돌개바람이 희뿌연 먼지를 일으켜 사방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박 신부는 경문 외우기를 그치지 않았고 잠시 후 바람이 잦아들자 블랙엔젤이 있던 자리에는 곱슬곱슬한 금발의 작은 여자아이 한 명만이 쓰러져 있었다. 저만치에는 손 이 거의 타 버린 앙그라가 쓰러져 있었다. 바람이 사라진 후 박 신부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준후와 달려온 현암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가는가 보다.”

현암이 쓰러져 있는 앙그라와 레그나를 보고 말했다.

“마스터는요?”

“사라졌다. 그 원반 같은 물건에 영을 씌어서 도망친 거겠지. 블랙엔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저 두 아이는 죽었나요?”

박신부가 슬픈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현암은 울적해진 듯 고개 를 숙였고 박 신부는 가엾게 이용당하다가 죽은 두 아이에게로 가서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쓰러져 있던 도구르의 얼굴 상처 를 손보기 시작했다. 도구르가 희미하게 신음 소리를 내자 박신 부가 조용히 말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출혈이 심합니다.”

박신부가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한 후에 덧붙였다.

“그러나 이 상처보다는 당신의 병이 더 중합니다.”

“수호자・・・・・・ 수호자는?”

“그자는 이미 죽어 영만 남았소. 본명은 우리도 모르고 그냥 마스터라고 부르지요. 그자는 달아났소.”

“신 신부님……………”

“말씀하십시오.”

“놈이 내 몸에 무슨 술수를 부렸다면 ・・・・・・ 그걸 없애 주십시오.”

“그러면 큰 고통이 올 겁니다. 당분간은……………”

“그놈 덕을 입을 마음은 없어요. 제발…………”

박 신부는 고심하는 눈치더니 도구르의 배에 손을 얹고 기도 했다. 박 신부의 손에 보일락 말락 한 빛이 맺혔고 도구르는 피 에 젖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곧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프지 않습니까?”

“아프지만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믿으세요. 가족들을 생각 하시길…………. 아멘.”

도구르는 편안한 표정으로 땅에 누웠다. 그사이 승희는 준후 가 부적을 제거해 주어 몸을 일으켰고, 눈을 뜬 승희의 앞에는 사툼나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승희는 머리가 아픈 듯, 이 마를 만지면서 사툼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마하라가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수다르사나도 빼앗겼으니 나에게 절하지 마세요. 그리고 날 마하라가라고 부르지 말아요. 난 승희라고 해요.”

“슝히이?”

“승희!”

“슝히…….”

승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됐어요. 그냥 마하라가라고 불러요.”

승희는 웃을 수도 말 수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사툼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엄숙한 기색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마하라가 수다르사나도 중요한 것이지만 그 주 인은 분명 당신입니다. 당신이 사원에서 수다르사나를 가지고 나왔고 사원은 허물어졌습니다. 지금은 빼앗겼지만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게는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저에 게는 로파무드라 불리는 딸이 있습니다.”

“로파무드?”

승희의 머릿속에 비밀을 알고 싶으면 로파무드를 찾으라고 했 던 애염명왕의 말이 떠올랐다. 사나가 승희의 얼굴을 보면서 말했다.

“제 딸은 이제야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에 바바지 님 이 말씀하셨습니다. 라가라쟈의 화신을 만나면 로파무드도 복락 을 얻을 것이라고…… 이제 예언이 실현될 것입니다.”

사툼나가 손뼉을 치자 몇 명의 순례자들이 천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그 여자는 잘 걷지 못하고 비틀거 렸다.

“가련한 제 딸 로파무드입니다.”

사툼나는 로파무드의 얼굴을 가린 천을 떼어 내었고, 그 순간 승희를 비롯하여 준후와 현암, 박 신부마저도 깜짝 놀랐다.

로파무드의 눈은 초점이 전혀 없어서 인형 같아 보였다. 피부 는 다소 검은빛을 띠고 있었으며 인도식으로 화장을 하고 코걸 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 모습은 승희와 완전히 똑같았다.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 자승희는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 로파무드?”

승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사툼나가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딸은 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합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 고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모두가 카르마에 의한 것. 이제 예언이 이루어졌으니 당신에게 기대합니다. 제 딸을…………… 제 딸을 구해 주십시오. 마하라가 서두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이십 육년을 기다려 온 일입니다. 마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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