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13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수면으로 미끄러졌다.
수평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진 해역으로 날아든 갈매기들은 탐욕스러운 노래를 부르며 자맥질을 해대었다. 물론 배의 파편들을 주워모아 유족들에 게 전달해 주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바닷속에서는 탐욕스러움에 있어 갈매기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남해의 상어들이 허연 몸을 뒤집어가 며 시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가끔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지만, 해적들이 던진 구명 부이를 붙잡고 올라오는 이들은 적었다. 그들 대부분이 전투에 의해 부상을 입은 채로 바다에 떨어진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유호의 1등 항해사 식스는 자유호의 선교에 우뚝 선 채 레보스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보스호에 실려 있는 엄청난 양의 화물은 도저히 자유호로 옮겨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식스는 레보스호를 통채로 끌고가기로 결정했다. 레보스 호를 끌고가기 위해선 레보스호의 선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라이온에게 그 일을 맡긴 지금 식스는 분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입술을 꾹 다문 채 레보스호를 쏘아보고만 있었다.
라이온은 자신을 바라보며 분을 삭히고 있는 식스의 눈길을 충분히 느꼈고, 그래서 더욱 즐거운 마음으로 식스의 비위를 박박 긁는 일을 수행했다. 라이온은 기세좋게 외쳤다.
“다음 녀석!”
꽁꽁 묶인 채 갑판에 무릎 꿇려 있던 카밀카르 전투병들 중 한 명이 해적들의 손길에 의해 일으켜세워졌다. 병사는 증오가 담긴 눈으로 라이온을 바 라보고는 해적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직접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레보스호의 오른쪽 뱃전에는 라이온이 ‘감별사’라고 부르는 판자가 바다를 향해 길 게 내밀어져 있었다. 당당하게 걸어간 병사가 판자 위에 발을 올리자, 라이온은 그 병사의 등을 향해 지금껏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지겨워하는 기색도 없이 말했다.
“자, 묻겠다.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병사는 고개를 돌려 라이온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지옥에서 만나지.”
라이온은 실망한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지막은 자신의 취향대로 걸어가도록 배려한다는 원칙을 세워두었기에 라이온은 포로의 등 을 칼로 쑤셔대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병사는 천천히 판자 위를 걸어갔다. 뱃전에 와 부딪히는 잔물결 소리와 늦은 오후의 햇살만이 고요히 떨어져내 리는 가운데 병사는 뒤로 팔이 묶인 채 수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판자 끝에 선 외로운 병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어 붉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짧은 정적 후 병사는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고, 곧 판자 위에서 병사의 모습은 사라졌다. 풍덩! 물소리가 들려올 뿐, 배 위의 아무도 뱃전으로 머리를 내밀어 수면 위에 그려지는 파문이나 물보라를 보지는 않았다.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고, 라이온 역시 고개를 숙여 사 내의 저승길이 편안하기를 기도했다. 짧은 기도를 마친 라이온은 곧 표정을 바꾸며 외쳤다.
“다음!”
해적들에 의해 일으켜세워진 병사의 얼굴은 어려보였고, 게다가 얼굴 근육 전체를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라이온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병사를 바 라보았다. 젊은 병사는 걸음을 떼지 못했다. 해적들은 라이온을 한번 쳐다본 다음 젊은 병사의 겨드랑이에 팔을 쑤셔넣었다. 젊은 병사는 발을 질질 끌면서 판자 쪽으로 끌려왔다.
“젊은 친구. 상어가 될 텐가, 상어밥이 될 텐가?”
젊은 병사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몇 번 움직였지만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나올 뿐이었 다. 그러나 라이온은 그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어넣어.”
“아, 아냐.”
“집어넣어!”
라이온은 젊은이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크게 고함 질렀다. 해적들은 재빨리 사내의 등을 떠밀었고, 젊은 병사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갑 판에 남아 있던 병사들의 얼굴 위로 무서운 공포와 침묵이 동시에 흘렀다.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기도 가 아니었다.
“죽는 것까지 도와줘야 되는 자네에겐 삶의 대가가 너무 무거울 걸세, 친구. 자네가 방랑하기에 이 세상은 너무 황량해.”
짧은 침묵 후 고개를 든 라이온은 다시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라? 슈마허로군.”
슈마허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라이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상처입은 어깨에선 피가 엉겨붙어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해진 채 다리를 떨 고 있었다. 그러나 슈마허를 바라보는 라이온의 눈에는 아무런 동정심도 없었다. 라이온은 오로지 기대감만을 담은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 속에 슈마허는 다리를 끌면서도 힘겹게 뱃전을 향해 걸어갔다. 슈마허가 떨리는 다리로 판자 위에 서자, 라이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자, 용맹한 서 슈마허. 상어가 되겠는가, 상어밥이 되겠는가?”
피를 많이 흘린 슈마허는 몽롱한 정신 속에 판자를 내려다보았다. 바다는 붉었다. 먼저 떨어져간 병사들은 익사하기도 전에 포악한 남해의 상어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래서 바다는 오후의 햇살 속에서 더욱 붉은 빛깔을 띠고 있었다.
슈마허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햇살은 따스했지만 슈마허는 어깨를 떨고 있었다.
“상어가 되겠다.”
“그래. 잘 알겠 뭐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라이온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슈마허는 판자 위에서 몸을 돌려 라이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어가 되겠다.”
라이온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슈마허를 보았지만 역광 때문에 그 얼굴을 잘 볼 수 없었다. 라이온의 입술이 일그러지며 갑작스럽게 폭언이 튀어 나왔다.
“이런 개같은 새끼를 봤나, 섬겨야 할 레이디를 강탈당한 기사가 목숨을 구걸하는 거냐?”
“그렇다.”
“좋아, 이 자식아. 넌 특별 대우다. 내 밑에 넣어서 귀여워해 주지. 그놈 당장 판자 위에서 끌어내!”
해적들은 슈마허를 판자 위에서 끌어내렸다. 그때까지 간신히 버티던 슈마허는 판자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갑판 위에 쓰러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슈 마허를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던 라이온은 턱짓을 했다.
“저놈 데리고 가서 치료해. 반드시 살려놔야 돼. 알겠냐?”
슈마허는 다시 거칠게 일으켜졌고 해적들의 손에 의해 선실로 끌려갔다. 침을 뱉으려던 라이온은 이 배를 끌고가야 된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도로 침 을 삼켰고, 그래서 기분이 더욱 지저분해졌다.
“제기랄, 다음!”
그러나 잠시 후 라이온은 탄복할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라이온은 속으로 슈마허에게 경의를 보내었다. 지금까지 줄곧 바다로 뛰어들던 카밀카르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 이다. 지휘자의 변절을 본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충성을 지켜야 할 필요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많은 수의 병사들이 판자 위에서 도로 내려왔 다. 라이온은 판자 위에서 내려오는 병사들의 얼굴에서 아주 뚜렷한 두 개의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지휘관인 슈마허도 변절했다. 내가 왜 개죽음을 당해야 하나?
더 이상 판자 건너기가 필요없게 되었다. 카밀카르 병사들은 앞다투어 해적이 될 것을 맹세했다. 라이온은 이마를 싸쥐고는 남은 병사들을 모두 풀 어줄 것을 명령했다.
풀려나는 병사들을 보던 라이온은 몸을 돌려 판자 쪽으로 걸어갔다.
해적들과 병사들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라이온은 판자 끝까지 걸어갔다. 마치 빠져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판자 끝에 선 라이온 은 저물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망할 놈. 나는 죽어가면서도 객기 부릴 줄 아는 놈이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