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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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1장 : 제국의 공적 – 4화


레보스호의 공포의 원인인 자유호의 선교에서는 한 사내가 조용하면서도 엄격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의 다른 해적들이 추격자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사나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것에 비해 볼 때 사내의 조용한 태도는 이질적으로까지 보였다. 하지만 사내 는 다른 해적들의 난동을 말리지는 않았다. 해적들이 사납게 구는 이유는 다가올 전투를 대비하여 전투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의 뒤편으로 다른 사내가 다가서며 말했다.

“이보세요, 식스. 놈들이 흩어지고 있는데요?”

식스는 순간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하마터면 그의 주위를 감도는 엄격함이 깨질 뻔했지만 식스는 간신히 자신을 자제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식스는 노스윈드의 함대에서 그로 하여금 울화통을 터뜨리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내를 향해 말했다.

“여러 번 말했지만, 다시 말하겠네. 1등 항해사님이라고 부르게. 라이온 갑판장.”

라이온 갑판장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적 함대는 산개하고 있습니다. 식스 1등 항해사님.”

식스는 거의 라이온의 멱살을 붙잡아 바다로 던질 뻔했다. 하지만 품위 없는 행동을 경멸하는 그의 뿌리 깊은 근성이 다시 한번 라이온의 목숨을 구 했다. 식스는 그 상황에서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온화한 말투로 말했다.

“미안하군. 다시 말하겠네. 직함만으로 충분하네.”

“아아, 그렇습니까? 잘 알겠습니다. 1등 항해사님.”

앞니가 몽땅 드러나는 큼직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온을 향해 식스는 소리 없이 악담을 퍼부어대었다. 망할 놈. 누구는 여섯 번째 아 들로 태어나고 싶었는 줄 아냐? 줄줄이 다섯 명의 아들을 뽑아대다가 여섯 번째의 아들을 낳게 되자 그만 이름을 지어내기 귀찮아진 우리 부모님이 그런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 내 잘못이냐? 사십 평생을 그런 이름으로 불린 것으로 족하거늘 네놈까지 내 이름을 가지고 놀아?

그러나 식스는 그런 자기 변명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식스는 엄격한 어투로 라이온에게 명령했다.

“중앙의 적선을 추격한다.”

라이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저 배가 가장 빠른데요?”

“나는 지금 자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네. 명령하는 것이야. 복창, 전속력으로 중앙 적선을 추격한다!”

“………가운데 배를 X빠지게 따라간다.”

라이온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복창하고는 분노에 미친 식스가 검을 휘둘러대기 전에 재빨리 앞갑판으로 도망쳤다.

분명한 목표물이 정해지자, 여덟 척의 해적선은 이제 본격적인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해전에 대비하여 돛은 모두 접혀지고 대포에는 포탄이 장전되었다. 그리고 자유호 갑판 아래의 노예장은 히스테릭한 기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자, 돌격이다! 우물쭈물거리는 놈은 살을 발라놓겠다!”

최고로 격앙된 자유호의 노예장은 레보스의 노예장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노예들을 격려했다.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에 이어 가죽 채찍이 살에 감 기는 그 형언할 수 없이 끔찍한 소리가 울려퍼지자 노예들은 죽을힘을 다해 노를 끌어당겼다. 노예들의 발목에 매어진 쇠사슬들은 격심한 배의 움직 임과 노예들의 몸놀림으로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절그렁거렸다. 예리한 채찍 소리와 둔중한 쇠사슬의 절그렁거림, 그리고 노를 끌어당기며 용을 쓰 는 노예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들이 한데 뒤섞여 자유호의 갑판 아래쪽을 괴기스럽고 끔찍한 분위기로 물들였다.

“당겨! 당겨! 이 빌어먹을 놈들, 덥냐? 더워? 좋아! 너희 인자한 노예장님의 특별 선물이다.”

노예장은 채찍을 집어던지고는 옆에 놓아두었던 물통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바가지로 물을 퍼 노예들에게 뿌려대기 시작했다. 거대한 노를 당기 느라 후끈 달아올랐던 근육과 피부 위로 느닷없이 찬물이 쏟아지자 노예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을 느끼며 신음을 뿜어내었다. 하지만 감히 비 명을 지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통과 한기로 경련을 일으키면서도 노예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노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비명이 나오지 않는 이 상 독려는 실패라고 생각하고 있던 노예장은 더욱 그악스럽게 물을 뿌려대고 고함을 질렀다.

“당겨! 당겨!”

노예들은 이제 몽환 상태에 빠진 채 기계적으로 노를 끌어당겼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상대방이 침몰하든 이 배가 침몰하든, 어서 이 추격이 끝났으면. 그래서 더 이상 노를 젓지 않아도 되게 된다면…..

그때 좌현에 앉아 있던 노예 하나가 노를 놓았다.

갤리어스의 노는 전체가 하나가 되어 움직였을 때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지만, 최고 가속 상태에서 하나의 노라도 그 움직임이 흩어지면 상당히 치명 적일 수도 있는 파급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노예가 놓아버린 노는 당장 앞에서 당겨지는 노에 부딪히고 뒤에서 다가오는 노에 걸리며 큰 소동을 일 으켰다. 노예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고 노를 놓아버린 노예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노예는 겁먹은 표정으로 외쳤다.

“오스발? 오스발! 무슨 짓이야?”

그러나 오스발의 얼굴을 본 순간, 노예는 그가 노예장의 폭력에 맞서 단호한 이상주의에 입각한 만민평등의 구호를 몸으로 외치거나, 혹은 치명적 허무주의에 입각한 자살 충동을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창을 쿵쿵 울리며 다가온 노예장이 시뻘게진 얼 굴을 한 채 채찍을 높이 들어올렸을 때 그 점이 명확해졌다.

오스발의 상체가 앞으로 스르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풀썩. 오스발은 두 팔을 펼친 채 자신의 노 위에 쓰러졌다. 높이 들어올려진 노예장의 채찍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멈칫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노예는 온힘을 끌어모아 간신히 말했다.

“노예장님. 오스발 이놈, 기절한 거 같은데요………….”

자유호의 선교 위에 우뚝 서 있던 1등 항해사 식스는 좌현에서 일어나는 노의 움직임을 보며 대로했다. 어찌나 대로했는지, 식스는 평소에는 구사하 지 않는 격한 언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나쁜 놈들!”

식스가 자신이 구사한 언어의 폭력성에 질려 굳어 있는 동안, 라이온 갑판장은 보다 직접적인 행동을 선택했다. 라이온은 당장 갑판 위로 몸을 날려 서는 승강구의 해치를 열어제치고 머리를 갑판 아래로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그 포악성이나 다채로움에 있어 식스가 구사한 폭언과는 상대도 되지 않는 폭언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었다. 식스는 그런 라이온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갑판 아래에 있던 노예장은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라이온은 그렇게 우선 노예장에게 지옥 같은 욕설부터 한참 퍼붓고 난 후에야 이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 개놈의 자식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 저, 라이온 갑판장님. 노예 하나가 갑자기 기절해서……”

“기절? 너 지금 기절이라고 했냐? 그게 어느 나라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말은 아냐! 나는 그 말 몰라! 이 자식, 네놈이 대신 노를 잡아서라 도 당장 원상복구햇! 그렇잖으면 이 해역의 상어들은 오늘 저녁 식사로 머저리 노예장을 포식하게 될 거다! 아, 그리고 난 상어놈들과의 오랜 근린 관 계를 고려해서 그 노예장을 ‘요리’한 후 가져다 바칠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

오스발을 기절한 상태대로 해체하기로 마음 먹고 있었던 노예장은 라이온의 다그침 때문에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노예장은 황급히 오 스발의 쇠사슬을 풀고는 그의 몸을 질질 끌어내었다. 그러고는 그 스스로 오스발을 대신하여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라이온은 그제서야 만족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올렸다. 콰앙! 라이온이 걷어찬 해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익숙하지 않은 노역 때문에 노예장은 당장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꽉 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해괴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보는 노예들 의 눈에는 결코 동정심이라고는 볼 수 없는 흥미로운 눈빛이 반짝거렸다.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노예장은 가물거리는 정신 속에서 결심했다. 으아 아, 오스발 이놈! 깨어나기만 해봐라! 그러나 노예장의 그런 살기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오스발은 묵묵히 맡은 바 기절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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