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3화
안개에 파묻힌 미노 만 위로 밤의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별빛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해적들은 손에손에 횃불을 든 채 갑판에 도열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노스윈드 선단의 사나운 선장들이 모 두 단정한 옷차림을 한 채 자유호의 갑판 위에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리야 선장은 손에 성전을 펴든 채 조용히 기도문을 읽고 있었고, 다 른 때라면 조롱을 보내었을 해적들은 오늘만은 하리야 선장의 그런 모습에 감사했다. 지독한 안개와 암흑 속에 그들은 주눅들 대로 주눅들어 있었지 만, 하리야 선장만은 온화한 태도로 기도문을 읽고 있어 주위의 해적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때 승강구로부터 키 드레이번이 올라왔다. 새옷이 불편해서 계속 꿈지럭거리고 있던 돌탄 선장은 재빨리 허리를 폈다. 키는 해적들을 주욱 둘러보 았다. 키의 시선이 오닉스의 마스크 위에서 잠시 멈췄다. 횃불빛밖에 없는 암흑 속에서 오닉스의 눈빛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키는 오닉스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잠시 후 오닉스가 시선을 돌리는 것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키는 트로포스를 향해 명령했다.
“트로포스 선장. 시작하세.”
트로포스는 왼손엔 그의 지팡이를 들고 오른손엔 횃불을 든 채, 자유호의 이물을 향해 걸어갔다. 이물에는 특별히 준비해 둔 신호용 대포가 놓여 있 었다. 트로포스는 엄숙한 동작으로 심지에 불을 당겼다. 잠시 후 미노 만이 통째로 진동할 듯한 무시무시한 포성이 울려퍼졌다.
같은 시각, 레보스호의 선실에선 잘 깨지는 화물이나 된 것처럼 정성스럽게 묶여 있던 슈마허와 라스가 이를 갈고 있었다. 대포 소리를 들은 라스가 신음처럼 말했다.
“라오코네스를 부르려는 것이군. 미련하고 무례하고 무식한 해적놈들, 대드래곤께 대포를 쏘다니!”
자유호의 갑판 위에서 트로포스는 속으로 쉰까지 센 다음 다시 대포를 장전하고 불을 붙였다. 다시 한번 안개를 뚫고 무시무시한 포성이 울려퍼졌 다. 류트를 다루기에 음감이 남달리 좋은 킬리는 대포의 반향음을 들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백년 전에 빠졌던 시체도 떠오를 지경이군.”
킬리는 수면 가까이에서 대포를 쏘면 익사한 시체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인용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이온이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는 모자라죠. 800년 전의 대드래곤을 깨워야 하니까.”
킬리는 아무 대답 없이 조금 창백한 얼굴이 되었고, 말을 꺼낸 라이온 역시 섬뜻한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일곱 번째인가 여덟 번째의 대포가 발사될 때까지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라이온은 맥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엄정한 자세로 서 있던 해적들 역시 자세를 흐트러뜨리며 웅성거렸다. 키는 꼼짝도 하지 않고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닉스는 그런 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오닉스가 앞으로 한발 내디뎠을 때였다.
“하늘이다!”
식스의 고함에 해적들은 아연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키 드레이번도 입술을 깨물었다. 왜 위로부터 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지? 키는 턱 을 한껏 쳐들었다.
그리고 해적들은 자신들이 대드래곤의 크기에 대해 심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리를 들어올렸던 해적들은 자신이 아직 고개를 반도 들어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혹해하며 머리를 더욱 힘껏 젖혔다. 그러곤 안개 너머로 보이 는 밤 하늘에 지금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별 두 개가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별은 가장 밝은 별보다 훨씬 더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고 어떤 별보다 거대했다. 아래턱을 덜덜 떨며 그 별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온은 문득 자신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걸 어떻게 ‘두 개의 눈’이 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저건 별이다! 하지만 검은 안개더미 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엄숙함으로 그들을 굽어보고 있는 그것은 두 개의 눈이었다. “오, 신이여!”
하리야의 손에서 성전이 털썩 떨어졌다. 오닉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마스크를 벗고 싶은 지독한 충동을 느끼며 그것을 움켜쥐었다. 요란한 소리에 고 개를 돌린 킬리는 갑판에 주저앉아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돌탄을 발견했다. 미리 경고를 받았던 횃불잡이들마저도 몸을 심하게 떨어 횃불이 춤을 추 었다. 그때 까마득한 곳으로부터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나는 일몰의 왕라오코네스……”
목소리를 들은 순간 키는 발작적으로 복수의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간신히 자제력을 회복한 키는 간신히 검을 뽑지 않을 수 있었 다. 만약 그가 칼을 뽑았다면 제국은 마침내 가장 큰 시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키는 칼자루를 꽉 움켜쥔 채 위쪽을 향해 외쳤다.
“일몰의 왕 라오코네스! 순간을 지배하기에 영원을 지배하는 위대한 존재여! 나는 키 드레이번이오!”
라오코네스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키는 라오코네스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의심스러웠다. 마치 산꼭대기 위의 사람에게 고함을 지르는 기분 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 노스윈드의 해적들에게 그것은 절대로 ‘잠시’가 아니었다- 라오코네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인간은 그의 제국을 넘을 수 없다. 이곳은 너희들의 제국이 아니다. 돌아가라.”
라오코네스의 대답을 듣는 순간, 키는 가슴이 뻥 뚫리는 통쾌함을 느꼈다. 라오코네스는 800여 년 전의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키는 칼자루를 놓으며 외쳤다.
“나는 제국과 상관없소! 나는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란 말이오! 하하하!”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던 두 눈에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다른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라오코네스는 사실을 말하는 차분함으로, 하지만 판결을 내리 는 단호함으로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네가 아무런 허락도 없이 나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돌아가라. 일몰의 왕이 두 번씩이나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 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넌 전세계를 상대로 네가 스스로의 목숨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으리라.”
해적들은 벌벌 떨며 그들의 선장을 돌아보았다. 키는 숨을 깊이 들이쉰 다음 크게 외쳤다.
“미안합니다만 나는 두 번째의 권고를 받아들일 마음도 없고, 위대한 일몰의 왕에게 세 번째의 권고를 말하는 수고를 끼쳐드릴 생각도 없습니다. 나 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당신의 영토를 지날 생각입니다.”
“대가? 너는 드래곤에게 어떤 대가를 준비했느냐.”
키는 어떻게 하면 뚜쟁이처럼 말하지 않을 수 있나를 놓고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내용이 내용인지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키는 간단하게 말하기 로 결심했다.
“처녀요, 아름다운.”
말을 끝낸 키는 비참해지는 기분을 억누르며 라오코네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자유호를 내려다보았 다. 어차피 보이는 것은 붉게 타오르는 두 개의 눈뿐인지라 라오코네스의 움직임을 볼 수는 없었지만. 라이온은 메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라오코네스 의 대답을 기다렸다.
라오코네스는 키 드레이번처럼 짧게 말했다.
“받겠다.”
자유호의 해적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돌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히스테릭하게 웃어대었고, 그래서 킬리는 그 런 돌탄을 달래어야 했다. 괜찮아. 울지 마. 코풀어. 흥. 윽! 그건 농담이었단 말야. 진짜로 코를 푸냐? 그리고 키는 고개를 돌려 식스에게 명령했다.
“일항사 율리아나 공주를 데리고 오도록.”
식스는 대답한 다음 승강구를 달려내려갔다. 이제 한결 안심하게 된 라이온은 키 드레이번에게 다가서며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선장님. 왜 이런 깊은 밤을 선택하신 겁니까? 간덩이가 부은 소리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낮이었다면 제국의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을걸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만.”
키는 잠시 침묵했다. 조바심을 느낀 라이온이 다시 질문하려 했을 때 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율리아나 공주가 잡아먹히는 광경을 보고 싶으냐.”
라이온은 입을 다물었다. 키는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을 부하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라오코네스의 공포에 질 려 있는 해적들이지만 언젠가는 그들의 선장이 드래곤에게 공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키는 그 광경을 해적들에게 각인시키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리라. 라이온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승강구 쪽에서 재빠른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온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는 거지? 승강구에서 나타 난 것은 조금 전 아래로 내려갔던 식스 1등 항해사였다. 식스는 혼자였고,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적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식스는 키에게 다가섰다. 그러고는 키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서 낮게 소근거렸다. 키의 표정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키는 즉각 몸을 돌려 승강구 쪽을 향해 달려갈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대로 달려가는 대신, 키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라오코네스를 향 해 고함 질렀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여! 죄송합니다. 사정이 생겨서 시간이 좀 필요하겠습니다.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다시 찰나가 영원이 되는 희한한 시간의 흐름이 있은 후, 대드래곤은 대답했다.
“기다리겠다.”
라오코네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키 드레이번은 즉시 승강구로 뛰어들어갔다. 라이온은 키의 뒤를 따라가는 식스의 어깨를 붙잡으며 낮게 속삭였다.
“무슨 일입니까?”
식스는 라이온이 지금껏 본 것 중에서 가장 끔찍한 표정을 지은 채 낮고 거칠게 말했다.
“공주가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