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5화

랜덤 이미지

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5화



텅 빈 공주의 감방을 바라보며 아연해하고 있던 키와 식스, 그리고 라이온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아래쪽에서부터 노예들의 비명과 함께 ‘불이야!’ 하는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키는 이를 드러내며 짓씹듯이 말했다.

“아래쪽이군. 일항사! 선원들을 데리고 와! 라이온은 나와 함께 공주를 붙잡는다.”

“이 깜찍한 공주. 불을 지를 생각을 다하다니, 대단한데?”

탄복하는 듯한 내용과는 달리 라이온은 으르렁거리며 말하고는 즉시 사다리를 향해 달려갔다. 노갑판에 내려선 키와 라이온은 치솟아오르는 불길에 주춤했다. 불길 저편으로는 쇠사슬에 묶인 노예들이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키는 재빨리 외투를 벗어서는 불을 끄기 시작했다. 역시 같은 행동을 하던 라이온은 바닥에 쓰러진 노예장을 발견했다.

“이놈! 공주에게 당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군!”

입을 꾹 다문 채 불을 끄고 있던 키는 머리 위로부터 식스와 선원들의 것으로 짐작되는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외투로 상체를 가리며 불길 속 으로 뛰어들었다. 불길을 뛰어넘은 키는 외투를 팽개치고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노예의 멱살을 붙잡아 당기며 말했다.

“여자 어디로 갔나!”

경악 때문인지, 혹은 제국어를 모르는 야만족 출신이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예는 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키 드레이번이 분노한 동작으로 복수를 뽑아들었을 때였다. 그 옆의 노예가 악을 쓰듯이 외쳤다.

“저쪽입니다!”

키는 노예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이물 쪽에 거의 다다른 키는 멀리서 희끄무레한 것이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후 키는 그것이 율리 아나 공주와 또다른 사내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멈춰라!”

키의 고함에 율리아나 공주는 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 옆에 서 있던 사내는 율리아나 공주의 어깨를 끌어당겨 재빨리 노 위에 앉 히며 말했다.

“계단 난간 타보신 적 있습니까? 비슷한 겁니다.”

“그런데 난 계단 난간을 타본 적이 없…”

“잘됐군요! 이건 사실 계단 난간이 아니거든요.”

키는 사내의 목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그때 사내는 공주의 등을 밀었고,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노 위를 미끄러져 내 려갔다. 공주가 노구멍으로 사라지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돌렸다. 키는 이를 악물며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오스발! 네놈이!”

“죄송합니다, 선장님.”

우아하게도 오스발은 가벼운 목례까지 보낸 다음 발 옆에 놓아두었던 물건을 집어들었다. 키는 그것이 구명 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스발은 그 것을 겨드랑이에 낀 채 노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놈! 멈춰라!”

급히 달려가 노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본 키의 눈에 노의 끝에 매달려 첨벙거리고 있는 공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키는 지체없이 노 위에 뛰어올 랐다. 노를 밟으며 달려오는 키의 모습을 보자 율리아나 공주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그때 공주의 등뒤의 물 속에서 오스발이 느닷없이 솟아올랐 다.

“안 돼!”

키는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쳤지만, 그 전에 오스발이 먼저 공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키의 손이 공주에게 닿기 직전, 두 사람은 그대로 물 아래로 사라졌다. 공주를 놓친 키는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졌다. 재빨리 노를 움켜쥔 키는 사나운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잠시 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이 키의 눈에 보였다. 구명 부이에 매달린 공주와 오스발이었다. 오스발은 구명 부이를 끌며 안개 쪽 을 향해 헤엄쳐 가고 있었다. 노의 물갈퀴에 매달린 채, 키는 포효하듯 외쳤다.

“오스바아아알!”

노의 물갈퀴에 매달린 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키 드레이번을 발견한 라이온은 재빨리 구명 부이를 집어던졌다. 다시 배 위로 올라온 키는 젖은 옷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갑판 위로 달려올라갔다. 갑판 위에선 선장들과 해적들이 당황에 빠진 모습으로 웅성거리고 있었지만, 키는 그쪽 으로는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곧장 이물로 달려갔다. 이물에 선 키는 고개를 한껏 꺾어 대드래곤의 얼굴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을 쳐다보며 외 쳤다.

“라오코네스! 안개를 거둬주시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는 말없이 키를 내려다보다가 마땅찮은 어투로 말했다.

“이유는?”

“당신에게 바칠 처녀가 방금 배 밖으로 뛰어나갔소! 안개를 거둬주셔야만이 수색이 가능하오.”

해적들은 경악했다. 율리아나 공주가 배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해적들 중 몇몇은 뱃전을 향해 달려가 먹물 같은 바다를 향해 횃불을 비춰보기도 했 고 어떤 선장은 보트를 향해 달려가기도 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부터 라오코네스의 나직하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나에게 바칠 대가를 잃은 것이군?”

라오코네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유쾌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며 정말로 즐거움을 느끼는 해적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개 구리를 앞에 둔 뱀의 유쾌함 같은 것이었다. 키는 눈살을 찌푸렸고 그런 키를 향해 라오코네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나로선 처녀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다.”

라이온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재료가 떨어져서 특급 요리인 ‘율리아나 공주’는 드실 수 없겠군요. 대신, 맛은 좀 떨어질지 몰 라도 포만감을 드릴 것이 분명한 ‘사천 명의 해적’ 풀 코스는 어떨까요? 순식간에 허무맹랑한 말을 만들어낸 라이온은 자신의 생각에 웃어야 할지 울 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대부분의 해적들은 라오코네스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키는 안간힘을 다해 말했다.

“대드래곤 라오코네스여…………”

“그 검의 장인을 봐서, 이대로 돌아가는 것은 허락하겠다. 물러가라.”

라오코네스는 키의 말을 끊으며 말했고, 그래서 키 드레이번은 그의 말을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잠시 후 라오코네스의 말을 이해한 키는 눈 을 부릅뜨며 자신의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검・・・・・・ 이 복수 말이오?”

허공 속에서 불타고 있던 라오코네스의 두 눈이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폐를 적셔오는 것 같은 습한 공기 속에 키 드레이 번과 해적들은 헐떡거렸다. 라오코네스의 말은 머나먼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인간이여. 너는 그 검의 소유자인 만큼 그 검의 검신에 있는 글귀를 알 테지. 800년 만에 처음 찾아온 손님에 대한 선물로서 그 글을 주고 싶군.”

키는 거친 숨소리만 낼 뿐 대답하지 않았다. 라오코네스의 모습은 이제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안개와 어둠 속에서 라오코네스의 목소리는 둔한 울림으로 전달되어 왔다.

“복수는 복수를 원하는 자에게 복수한다.”

그리고 라오코네스는 사라졌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