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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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16화


희끄무레한 안개를 뚫고 보트들이 천천히 노를 저었다. 보트장들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암초와 절벽 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공주 와 오스발을 찾기 위해 출동한 보트들이 먼저 길을 잃을 지경이었기에 노스윈드 선단의 아홉 척의 배에는 랜턴과 횃불을 활활 지펴놓았다.

선단의 보트를 모두 출동시켜 오랜 시간에 걸쳐 안개 속을 뒤졌지만 해적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지리한 시간이 흘러 마침내 새벽이 되었을 때, 그랜드머더호의 보트들을 지휘하고 있던 킬리 선장은 수면 위를 떠다니는 물건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교환된 후 미노 만을 수색하 던 보트들은 모두 킬리 선장의 보트 주위로 몰려들었다. 몰려든 보트들을 향해, 킬리는 바다에서 건져낸 구명 부이를 들어올렸다.

그랜드파더호의 보트를 지휘하고 있던 돌탄 선장은 구명 부이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린 채 말했다.

“파쳐 축은 걸까?”

킬리는 대답 대신 보트를 전진시켰다.

해가 떠올랐을 때 그들은 안개를 뚫고 느닷없이 나타난 해안 절벽에 깜짝 놀랐다. 해안 절벽을 바라보던 돌탄은 절벽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 는 조그마한 시내를 발견했고, 잠시 후 해적들은 강 하구에 형성된 좁은 모래톱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해안에 상륙한 해적들은 모래톱 위에 찍힌 발자국도 발견할 수 있었다. 트로포스는 우울한 얼굴로 모래톱 위에 찍힌 발자국을 관찰했고 그것이 크고 작은 두 종류의 발자국이라는 것을 알아차 렸다. 트로포스는 한층 더 우울한 얼굴로 돌탄을 돌아보았다.

“자네가 하겠나?”

“왜 내카? 식………… 1등 항해사에게 시켜. 크게 일항사의 일이야.”

그래서 자유호의 보트들을 지휘하던 식스 1등 항해사는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아 눈에 핏발이 선 모습으로 기다리던 키 드레이번에게 돌아가서는 율 리아나 공주와 노예 오스발이 상륙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하는 꺼림칙하기 짝이 없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식스의 보고를 들은 키는 아 무 말 없이 선장실로 돌아간 다음 조용히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런 사후 대책을 듣지 못한 식스는 한층 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며 수색중이던 해적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태양이 정오의 위치를 지날 무렵, 밤 새도록 수색에 나섰던 해적들은 그것도 대드래곤의 성지 바로 앞인지라 머리끝까지 긴장된 상태에서 수색하던 해적들은 녹초가 되어 잠들었 다. 하지만 라이온은 난동을 부리지 않도록 꽁꽁 묶어두었던 슈마허와 라스를 풀어주기 위해서 피로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찾아갔다. 거의 하루 동안 묶여 있었던 라스 법무대신과 슈마허는 분통을 터뜨릴 기운도 없이 축 늘어진 모습으로 일어났다.

라이온은 그런 두 사람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공주는 탈출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는 바다를 가로질러 상륙하는 데까지 성공한 거 같군요. 덕분에 우리는 현재 미노 만 앞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라이온은 두 사람의 열렬한 호기심을 뿌리치지 못했기에 피곤함을 무릅쓴 채 사태의 전말을 대충 설 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감탄의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좀 차가워지자, 라스는 800년 만에 일어났던 대드래곤이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그것도 어둠 과 안개 속에 몸을 거의 가린 채 인간과의 회견을 마쳤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제국의 학자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당신네들의 5대 조부까지 비난의 향연장으로 끌어내었을 거요.”

라이온은 우울한 얼굴로 라스를 바라보았다. 라스는 점잖은 얼굴로 말했다.

“800년 전의 역사, 800년 전의 약속, 800년 동안 쌓여왔을 그의 철학과 무한의 지혜. 우리가 거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군. 그런데 우리 시대의 마지막 현자와 나눈 이야기가 그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들뿐이라니.”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집어치워, 라고 말하는 대신 라이온은 핏 웃었다.

“라오코네스와 고담준론이라도 나눠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저 역시 퍽 아쉽습니다. 지혜로운 라오코네스라면 희희낙락하고 있는 법무대신의 입 을 한번에 다물어지게 만들 수 있는 말이 뭔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지금 제겐 그런 마법의 말이 꼭 필요하거든요.”

라스는 입을 다물었고, 라이온은 그런 라스에게 잔인한 미소를 지어준 다음 말했다.

“공주가 달아났다는 이야기에 몹시 즐거운 모양입니다만,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이 황량한 미노 만에서라면 노련한 뱃사람도 생존할 수 있다고 장 담하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공주가 어떻게? 공주에게 사냥 기술이 있습니까, 야영 기술이 있습니까? 그녀는 부러진 칼토막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 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탈출이죠.”

라스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슈마허가 말했다.

“노예 하나가 같이 달아났다고 들었다만.”

“흐응. 그렇네, 슈마허. 노잡이지. 꼬마였을 때 배에 팔려서 이날 이때까지 노만 저은 녀석이지. 사람이 넘치는 도시에 던져놔도 굶어죽을 녀석이고, 어쨌든 절대로 모험가 타입은 아니지. 거친 황야에서의 생존 확률을 비교한다면 공주와 막상막하일걸. 나라면 그런 녀석에게 희망을 걸진 않을 거 “야.”

슈마허는 라스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입을 꽉 다물고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는 말이다. 라이온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배부르게 웃었다.

“공주는 살아나기 힘들 거요. 그녀는 대드래곤을 피해서 훨씬 더 비참한 죽음을 찾아간 것이오.”

라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그의 등을 향해 슈마허가 말했다.

“한 가지 알려줄까.”

라이온은 제자리에 멈춰서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슈마허의 눈 속에 재미있어하는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졌다. 슈마허는 팔짱을 끼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잘 알겠지만 율리아나 공주께서는 애서가시지. 공주께서 부러진 칼 한자루 가져가시지 않았다고 했나? 허나 대신 그분께서는 만 권의 책에 달하는 지식을 가져가셨다. 그것은 수십 명의 조력보다 더 강력한 힘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뭐? 책?”

“그래, 책. 그분께서는 천문학의 지식으로 밤하늘을 그분의 나침반으로 삼으실 것이며, 박물학의 지식을 통해 낯선 사물을 파악하실 것이며, 지리학 의 지식을 통해 지평선과 언덕 너머의 앞길을 예측하실 것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역사학의 지식을 통해 그보다 훨씬 어려운 길을 걸어갔던 영웅의 지 혜와 용기를 이끌어내실 수 있으실 것이다. 자, 어떤가. 라이온? 실로 수십 명의 조력에 값하지 않을까?”

슈마허는 빙긋 웃었고, 라스는 탄성을 질렀고, 라이온은 조금 전 그들이 짓고 있던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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