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7화
“대드래곤의 성지라고? 안개의 성지라고 하지, 그래.”
미노 만의 짙은 안개를 마주 대하고 있는 한 척의 롱 갤리어스 위에서, 애꾸눈의 사내가 남아 있는 한쪽 눈을 잔뜩 찡그린 채 투덜거렸다.
롱 갤리어스는 자유호처럼 이상할 정도로 좁은 선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유호가 거의 터릿 갤리어스라고 착각될 정도로 긴 선장 때문에 선폭 이 좁아보이는 것에 비해 볼 때 이 배는 통상적인 롱 갤리어스의 선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좁은 선폭을 가지고 있다. 눈밝은 뱃사람이라면 이 롱 갤 리어스가 대륙에서 가장 빠른 배를 만들어내는 전통을 가진 자마쉬의 조선소에서 설계되었음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숙련된 함선 설계가가 본다면 이 배에서 30여 년 전 위명을 떨치던 한 함선 설계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로드니 라일름 리드클리프. 이 속도에 미친 설계가의 서명인 3L 은 함명인 ‘질풍’ 바로 아래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질풍호의 선장 트로포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의 안대를 만지작거렸다. 처음 왼쪽 눈을 잃고 안대를 착용하게 되었을 때 익숙지 않은 느낌 때문에 만지곤 하던 것이 그만 버릇이 된 것이다. 트로포스는 배 앞의 해원 가득히 깔린 안개를 바라보며 다시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드래곤 한 마리가 숨어 있어도 흔적도 없겠는걸. 아니, 수십 마리가 숨어 있다고 해도 난 믿겠어.”
그의 등뒤에 있던 질풍호의 해적들은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노스윈드의 선단을 가로막고 있는 미노 만의 안개는 농밀한 정도를 넘어서 차라리 하얀 산처럼 보였다.
선단에서 가장 빠르다는 이유로 척후선의 역할을 맡았건만, 까마득한 높이로 바다 전체를 뒤덮은 미노 만의 안개 앞에서는 질풍호의 그 놀라운 속도 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질풍호는 미노 만의 입구에서 어영부영하다가 후발대에 따라잡히는, 척후선으로서는 꽤나 창피스러운 지경에 빠져 있었다.
트로포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질풍호의 뒤쪽으로는 노스윈드의 선단을 구성하는 거함들의 나머지 일곱 척과 레보스호까지 합쳐 여덟 척의 배가 미노 만의 입구를 가득 메운 채 정 렬해 있었다. 장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총배수량만 6,000,000파운드에 달하는 위용인 것이다. 그런 굉장한 광경을 보던 트로포스의 시선이 흑기사호의 검은 선체에 이르렀을 때였다. 트로포스는 문득 오른쪽 눈을 꿈틀거렸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위의 선원들에게 말했다.
“이봐, 저기 흑기사호 좀 봐주게. 무슨 연기 같은 것이 보이는데?”
눈밝은 선원 하나가 대답했다.
“예. 오닉스 나이트 선장님께서 부적을 태우고 있습니다.”
“논다. 놀아.”
트로포스는 혀를 차고는 다시 다른 배로 시선을 옮겨갔다. 흑기사호 왼쪽의 페가서스호의 이물에는 하리야 선장이 그 특유의 찌푸린 얼굴을 더욱 찌 푸린 채 서 있었다. 그랜드머더호에서는 킬리 선장이, 그랜드파더호에서는 돌탄 선장이 각자 이물에 서서 트로포스의 머리 너머 안개를 바라보고 있 었다. 보급선인 물수리호와 바다사자호는 조금 뒤로 쳐진 상태였다. 노스윈드의 전투함들이 그 뱃머리에 각자의 위대한 선장들을 세우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고 불러줄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부적을 태우고 있는 오닉스의 모습 때문에 풍경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전투함들의 한가운데에는 자유호와 레보스호가 떠 있었다.
자유호에는 항상 그렇듯이 키 드레이번 대신 식스 1등 항해사가 근엄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고, 레보스호의 선상에서는 벼락출세한 라이온이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트로포스는 식스의 모습에 주목했다. 잠시 후, 식스의 입이 뭐라고 움직였다. 자유호의 기수는 재빨리 기를 휘저었고 트로포스 는 그 깃발 신호에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조심스럽게’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어쨌든 전진 명령이었다.
“제기랄! 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라니.”
미노 만은 정규 항로가 아니기 때문에 트로포스호에는 미노 만의 물길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암초나 곳이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지독한 안개 속에선 미리 발견하기도 힘들다. 자칫하면 해안 절벽에 배를 가져다 박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선원들은 불안한 얼 굴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어떡하죠?”
트로포스는 찡그린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선원들을 돌아보았다.
“할 수 없군. 죽는 것이 싫냐, 마법이 싫냐.”
“마법이 싫습니다.” 대답은 이구동성으로 터져나왔고, 그래서 트로포스는 히죽 웃었다. 질풍호의 선원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의 선장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 잠시 후 트로포스가 입을 열었을 때 선원들의 표정은 공포로 바뀌었다.
“그런데 난 죽는 것이 더 싫어. 내 지팡이를 가져와.”
레보스호 선상의 라이온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질풍호의 갑판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았다. 진귀한 광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질풍호의 갑판 원들은 갑판을 텅 비워둔 채 배의 양쪽 뱃전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들은 소리 없이 아귀다툼을 하며 조금이라도 더 뒤로 물러나려 노력하고 있었기 에 잘못하면 그대로 바다에 떨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갑판 가운데로는 한 불행한 선원이 동료들을 사열하는 듯한 모습으로 외롭게 이물을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오만상을 찌푸린 채 걸어가는 선원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에는 길다란 지팡이가 공손히 들려져 있었다.
라이온은 피식 웃었다.
“그건가? 흐음. 난 찬성이야.”
트로포스는 선원에게 건네받은 지팡이를 짚고는 질풍호의 이물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질풍호의 선원들은 몇몇 호기심이 과도한 선원들을 빼놓곤 모두 고물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트로포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지팡이를 두 손을 쥐고는 앞으로 내밀었다.
트로포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질풍호의 선장 트로포스가 마법을 쓸 결심을 한 것이다. 술에 취했을 때 트로포스는 술주정 삼아 자신이 하이낙스에게서 마법을 배웠느니 어쩌니 하 지만, 선단의 그 누구도 그 말을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트로포스가 마법을 쓸 줄 안다는 것은 사실이며, 지금 쓰려고 하고 있다. 라이온은 트로포스 가 어쩌다 포로로 잡은 마법사에게 마법을 배우고 그의 지팡이를 빼앗은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곤 한다. 트로포스라면 그럴 수 있다. 그렇게 잔인하 다는 의미가 아니다. 겁도 없이 단순히 호기심만으로 마법을 배워볼 정도로 무모한 성격이라는 의미다. 트로포스의 마법은 될 때와 안 될 때가 불규 칙하기 때문에 라이온의 의심은 타당하다 하겠다.
자유호의 선상에서, 식스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트로포스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트로포스가 굳이 마법을 선택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분한 주의와 약간의 행운만 있다면 트로포스에게는 저 정도의 안개라도 뚫고 지나갈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법을 쓴다면, 그가 마 법을 사용하여 걷어내려는 것은 저 엄청난 안개라기보다는 대드래곤의 성지로 들어가게 된 해적들이 느끼는 불안 심리일 것이다. 그래서 라이온과 마찬가지로 식스 또한 트로포스의 행동에 무언으로 찬성을 보내었다.
하지만 트로포스의 행동에 반대표를 던지는 사나이가 있었다.
“저놈! 또 불법 마법을 쓰는 게냐! 그 흉측한 흑마법 멈추지 못해!”
페가서스호의 선상에 우뚝 서 있던 하리야 선장이 노성을 터뜨렸다. 하리야는 선단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 확성기를 사용할 필요 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말 그대로 쩌렁쩌렁 울렸다. 하지만 곧 그의 목소리에 화답한 것은 트로포스가 아니었다.
“이퐈, 신푸! 흑마펍으로푸터 우릴 치켜야치? 우리 선탄을 위해 키토라토 촘 올려추케나. 커헐헐!”
이 함대에서 저렇게 지독한 자마쉬 사투리를 쓰는 건 한 사람뿐이다. 하리야 선장은 고개를 홱 돌려 그랜드파더호를 바라보았다. 그랜드파더호의 선 장 돌탄과 그 선원들은 한결같이 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하리야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야 선장은 끙! 하는 신음을 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 고는 고개를 숙였다. 라이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하리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아요. 하리야.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이 막돼먹은 놈들 중 누구 하나 감사라도 할 줄 압니까? 이놈들은 당신을 더욱 놀릴 뿐이라고요. 젠장, 나도 놀리고 싶어진단 말입니다! 하지 말아요!’
하지만 하리야는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명석하고 침착하며 존경할 만한 무수한 장점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리야가 노스윈드 선단의 조롱거리가 되 는 것은 바로 저 버릇 때문이다. 고개를 돌린 라이온은 다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이번에는 성공한 모양이다. 라이온은 그렇게 판단했다.
트로포스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두 손에 쥐어진 지팡이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고, 트로포스는 안간힘을 다해 그것을 고정시켜 두고 있었다. 그의 눈은 천천히 뒤집히고 있었고 입가로는 걸쭉한 타액이 흘러내렸다. 트로포스는 침방울을 튕기며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자신들의 선장의 그런 모습을 본 질풍호의 선원들은 모두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무릎을 꿇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하고 있었다. 그때 트로포스가 찢어지 는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아 불어라!”
라이온은 무의식중에 상체를 뒤로 눕혔다. 누군가가 등뒤에서 떠미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주춤거리며 중심을 회복한 라이온은 위를 바라보았다. 구름이 휘몰아 움직이며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그 빠른 움직임을 보던 라이온은 상공에 불고 있을 바람의 세기를 추측해 보곤 헛바람을 삼켰다. 곧이어 수면 위로도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배가 롤링을 시작하자 라이온은 다시 비틀거려야 했다.
그러나 선단을 덮친 돌풍은 앞으로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의 후류풍 정도였을 뿐이다. 질풍호의 선수에 꼿꼿이 선 트로포스는 이를 악문 채 앞으로 바람을 쏘아내고 있었다. 그의 옷은 사납게 나풀거리고 있었고 그의 지팡이에선 이제 파르스름한 빛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트로포스의 몸에서 뿜어 져나오는 돌풍은 눈에 보일 정도로 거세었다.
“주여, 미혹에 물든 당신의 자손을 용서하소서. 당신의 크나큰 분노를 모르는 자를 용서하소서. 당신께 돌아갈 자손을 용서하소서…………”
하리야는 선단 전체의 해적들을 위해 신 앞에 대속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고마워하고 있는 해적은 별로 없었다. 담대한 해적들은 불안감 속에서도 트로포스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하아앗! 모두 날려버려라!”
날뛰는 야생마의 고삐를 잡아채듯 트로포스는 힘있게 바람을 끌어당겼다. 사방으로 흩어지던 돌풍은 트로포스의 손에 쥐인 장대한 채찍이 되어 안개를 후려갈겼다. 질풍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는 갈가리 찢겨져 흩어졌고, 전방 수마일에 걸쳐 푸른 바닷물과 검은 해안 절벽의 윤곽이 드러났다.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그대로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씩씩하게 외쳤다.
“빌어먹을 해적놈들아, 가자!”
“예! 선장님!”
질풍호의 노예장은 즉시 북을 두드렸다. 노들이 바닷물을 때리자 질풍호는 갈라진 안개의 틈 사이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리고 이 장대한 광경에 감 동받은 다른 배의 해적들 역시 불안감을 멀리 떨쳐버린 채로 질풍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이 굉장한 볼거리를 연출하여 다른 해적들의 불안감을 날려보낸 트로포스만은 개인적인 불안감을 느끼며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왼손 손등에는 흰색의 작은 점이 다섯 개 있었다. 트로포스는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고, 잠시 후 피부 밑에서부터 솟아나듯 여섯 번째의 점이 생겨나는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여섯 개의 점은 마치 시계 문자판의 1시부터 6시까지의 위치처럼 트로포스의 손 등 위에 반원을 그리고 있었다.
‘제기랄, 또 생겼어. 열두 개가 되면 도대체 무슨………….’
트로포스는 불안한 눈으로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지팡이는 이제 평범한 보통의 지팡이처럼 그의 손에 공손히 쥐어져 있었다. 트 로포스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쳇. 열한 번만 쓰고, 그러곤 바다에 처넣어버리는 거야. 그럼 제까짓 게 어쩔 거야.’
트로포스는 자신이 말하는 ‘제까짓 것’이 누군지 몰랐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트로포스는 불안감 없는 얼굴로 다시 전방의 바다 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