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2장 : 미노-대드래곤의 성지 – 8화
아홉 척의 배는 일렬로 선 채 안개 사이로 난 통로를 조용히 흘러갔다. 뱃전에 와 부딪히는 물결 소리도 고요했다. 그러나 식스는 불길한 기분을 온 몸으로 느끼며 배 옆의 안개를 바라보았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안개지?
안개의 통로는 변함없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로 흩어져 진로를 가로막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안개는 마치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트로포스가 헤쳐놓은 곳과 다른 안개더미 사이에는 마치 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다른 배들의 선장들 역시 주위의 안개를 쏘아보거나 아니면 물길 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식스는 언짢은 기분으로 갑판에 몰려선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선원들은 모두 잡담도 없이 조용히 주위의 안개를 바 라보고 있었다.
식스의 눈이 좌현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노잡이 오스발의 모습이 식스의 눈에 들어왔다. 오스발은 뱃전에 팔을 괴고는 다른 해적들과 같이 꿈틀거리는 안개를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놈이 왜 갑판에 있는 거지? 식스는 당황하여 오스발을 바라보았지만 오스발 자신이나 그의 옆에 있는 해적들 모두 오스발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대 해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식스는 어리둥절했다.
‘키 선장님은 분명히 쇠사슬을 채우지 말라고 하셨지. 그렇지만 이동의 자유도 주셨던가?”
식스는 혼란스러웠다. 저놈이 갑판에 올라와도 되던가, 안 되던가? 노잡이가 왜 갑판에 올라온단 말이지? 잠깐, 노라고? 언제부터인가 노 젓는 소리 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뱃전에 와 부딪히는 잔물결 소리뿐이었다. 식스는 힘들게 자유호의 좌우를 바라보았다. 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식스는 고개를 더욱 힘들게 돌려 다른 배들을 바라보았고, 선단의 모든 배의 노가 정지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가 왜 정지했을까. 그런데 노가 움직여야 되나?”
식스는 더욱 당혹했다. 노가 왜 움직여야 하지? 노가 뭐지? 노. 바닷물을 젓는 것. 노가 바닷물을 저으면? 식스는 배의 노가 바닷물을 저어야 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노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지?
식스는 주춤거리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돛은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이 고요한 안개 속에는 바람이라곤 한점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해적선들은 모두 돛을 늘어뜨리고 노는 정지시킨 채 조용히 안개 속을 흘러가고 있었다. 식스는 그 사실에서 불안을 느꼈지만, 불안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지 어 식스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곳은 배. 배가 뭐지? 식스는 고민하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배가 무엇 이든, 내가 무엇이든, 그 사실이 나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식스는 마음속으로부터 일어나는 약간의 저 항을 느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것은 그만의 경험은 아니었다.
아홉 척의 배는 자신을 잃은 선원들을 태운 채 유백색의 안개 사이로 끊임없이 흘러갔다. 무겁게 늘어진 돛은 움직일 줄 몰랐고, 선원들은 배의 작은 흔들림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며 초점을 잃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스는 눈꺼풀이 무겁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눈꺼풀을 감을 수 없었기에 식스는 좌현에서 오스발이 느닷없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스발은 팔을 위아래로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들 정신 차려요! 정신 차리라고요!”
자유호의 선상에서 노잡이 오스발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뛰어다녔다. 그가 아무리 고함을 질러도 해적들의 멍한 얼굴은 바뀌지 않았 다. 해적들은 오스발이 부르면 고개를 돌리기도 했고, 쳐다보면 마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오스발이 어떤 행동을 보이든지 간에 해적들 의 반응은 그 행동으로 끝났다. 오스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선교 위로 뛰어올랐다.
“1등 항해사님! 1등 항해사님!”
식스는 멍하니 오스발을 바라보았고, 오스발은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다가 실수로 식스를 밀고 말았다. 그러자 식스는 주저앉았고,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이 기막힌 심정으로 식스를 일으켜세우자 식스는 멀거니 서 있었다. 오스발은 공포스러워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 주승강구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스발은 고개를 돌렸다.
주승강구에서는 키 드레이번이 검을 뽑아든 채 맹렬한 동작으로 뛰쳐나오고 있었다. 오스발은 키 드레이번이 그의 검 ‘복수’를 뽑아든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감탄했다. 복수는 검신 전체로부터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반사광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 내부로부터 뿜어져나오는 빛이었다.
키는 복수를 단단히 쥔 채, 조금 전 오스발이 그러했던 것처럼, 선원들의 모습을 살폈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선교 쪽을 향했을 때 키와 오스발의 시선이 서로 마주쳤다. 키는 미심쩍은 얼굴로 노예 차림의 오스발을 보다가 그가 누군지 기억해 내었다.
“오스발? 너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냐?”
오스발은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몸에 배인 습관이다.
“아, 저, 선장님, 미노 만을 볼까 해서 갑판에 올라왔습니다. 선장님께서 쇠사슬을 풀어주셔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원들이 갑자기 이렇게……”
“잠깐. 넌 괜찮은 건가?”
오스발은 의아한 얼굴로 키를 마주보았고, 그래서 키는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키는 납득할 수 없었다. 키는 선교를 올라오며 오스발을 노려보았다.
“마법의 힘이 선단 전체를 덮친 것 같군. 노래가 들려왔다면 사이렌(Siren) 년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무런 노래도 없으니 그건 아니군. 그 런데 넌 왜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저, 선장님께서도 괜찮으시지 않습니까?”
키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복수를 들어올렸다. 가까이에서 복수를 보게 된 오스발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두꺼운 복수의 검신에는 무슨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지만 솟아오르는 빛 때문에 오스발은 그 글씨를 볼 수 없었다. 키는 나직하게 말했다.
“이 검이 나를 지키고 있다. 그렇잖았다면 나 역시 당했을지 모르지. 그런데 넌 왜?”
“모르겠습니다.”
키는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오스발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씰룩거렸지만, 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스발의 정수리 를 쏘아보았다. 잠시 후 키는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타 경험이 있나? 아니, 됐어. 어차피 너뿐이니. 가서 타륜을 잡아라.”
“타, 타륜을 잡으라고 하셨습니까?”
오스발은 기겁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돛과 노가 배의 손발이라면 타륜은 배의 머리에 해당한다. 선원들의 농담이긴 하지만, 선상에서 선장이 고주망태가 되어 난동을 부릴 때, 1등 항해사는 선장에게 두들겨 맞으며 그를 달래고 조타수는 선장을 두들겨 팬 다음 침대에 던진다고 한다. 조타수 의 막강한 권한을 잘 나타내는 농담으로서, 어쨌든 조타수의 이 막강한 권한은 지금 키 드레이번이 그러는 것처럼 갈매기에게 고기 대가리 던져주는 것만큼이나 간단히 노잡이 노예에게 수여할 수 있는 성질의 그런 권한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키는 그렇게 했다.
“선장님……?”
오스발은 일개 노예인 자신은 도저히 그런 폭거를 감행할 수 없다는 내용의 눈빛을 담아 키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키는 강철 같은 시선으로 마주 볼 뿐이었다. 오스발은 도리없다는 몸짓을 하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자유호의 타륜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오스발은 다시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는 타륜에 손을 얹은 채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칸나의 얼굴이 순진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감동을 받으 며, 오스발은 칸나에게 깊이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냈다. 만약 제정신의 칸나에게 오스발이 이런 짓을 했다면 아피르 족의 용맹 한 전사 출신인 칸나는 오스발을 글자 그대로 씹어먹으려 들었을 것이다. 아피르 족은 식인종이니까. 하지만 칸나는 오스발이 미는 대로 순순히 옆으 로 비켜섰다. 칸나를 밀어낸 오스발은 타륜에 손을 얹고는 비참한 표정으로 키를 바라보았다.
키는 고개를 조금 끄덕이며 말했다.
“일단은 그대로 잡고 있어.”
그리고 키는 몸을 돌려 선교를 내려갔다. 갑판에 내려선 키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주의 깊게 다른 배들을 관찰했다. 아홉 척의 배는 유령 같은 선원 들을 태운 채 나란히 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키는 옆을 지나가고 있는 배들의 갑판원들을 향해 고함을 질러보았지만, 선원들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본 키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오닉스! 돌탄! 킬리! 제기랄, 다들 어떻게 된 건가. 트로포스! 하리야! 두캉가!”
키는 선장들의 백치 같은 얼굴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선장들은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해초처럼 흐느적거렸다. 선단의 좌우를 둘러싼 하얀 안개는 커튼처럼 무겁게 내려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시 선교로 돌아온 키는 오스발을 뚫어지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치 저 강력한 사나이들도 제정 신이 아닌데 넌 왜 까딱없냐고 묻는 듯한 시선이었고, 그래서 오스발은 목을 움츠렸다. 키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잘 들어라. 모두들 제정신이 아닌 이상, 너와 나 둘이서 아홉 척의 배와 사천여 명의 인원들을 구해야 한다. 알았나, 오스발? 노예라는 핑계는 통하 지 않아. 서툰 행동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아, 알겠습니다. 선장님.”
“좋아. 타륜은 좀 더 넓게 쥐어라. 내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가 명령이 내려지면 즉각 움직이도록.”
오스발은 고개를 끄덕였고 키는 한심스러운 기분을 애써 누르며 지휘할 수 있는 선원이 노잡이 노예 한 명뿐이라는 이 황당한 사태에 적응하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