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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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3장 : 악마의 밤 – 12화


키 드레이번은 교회 정문을 향해 날카롭게 외쳤다.

“지금쯤 눈치 챘겠지. 저항은 무의미하다. 밖으로 나와, 오스발!”

당연하지. 뒤에서 듣고 있던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법석을 떨었는데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귀머거리일 테지. 하지만 라이온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젓고 싶었다. 왜 선장은 율리아나가 아니라 오스발을 부르는 거지?

교회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키는 입매를 일그러뜨린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부수고 들어가.”

“안 됩니다. 키 선장님. 이곳은 교회입니다.”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점잖지만 단호한 어조로 반대하고 나선 이는 하리야 선장이었다. 키는 하리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어쩔까?”

“제가 들어가서 설득해 보겠습니다.”

“먼저 날 설득해 봐. 갑자기 자네의 설득력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지는군.”

하리야는 키가 농담을 하는 것인지 알기 위해 그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속마음을 짐작게 하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 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원래부터 대화라는 인간 생활의 크나큰 일부분과 별 관련이 없는 사내가 행동에 나섰다.

무거운 발자국 소리에 하리야가 고개를 돌렸을 때, 오닉스 선장은 이미 그 살벌한 도끼를 단단히 쥔 채 교회의 정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 다.

“오닉스!”

하리야의 외침은 절절했지만 오닉스는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속력을 더 높였다. 오닉스는 검독수리의 관문이라도 때려부술 듯한 기세로 도끼를 치켜 올렸다.

그때였다. 정문을 노려보던 오닉스의 시야 한구석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닉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고 정문 옆의 창문이 순간 불그스름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박살나며 교회 안으로부터 불덩어리가 튀어나왔다.

화르르르! 공기를 불사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날아든 화염은 오닉스의 몸을 강타했다. 오닉스의 거체가 위로 떠오르는 모습은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 같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을 목격하는 무서움을 해적들에게 선사했다. 콰당탕! 검은 갑옷이 땅에 부딪히며 지독한 소음이 일어났다. 몇몇 해적들 이 비명을 지르며 오닉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닉스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물론 신음하나 내지 않았다. 라이온은 오닉스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는 점에는 아무런 불 만도 없었지만, 저렇게 씩씩하게 일어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라이온은 오닉스에게 진지한 어조로 묻고 싶어졌다. 이봐, 오닉 스 나이트. 불덩어리에 맞아서 그렇게 나가떨어진 사람은 살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지 않나? 우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좀 죽어주시지? 그때 예배당 안쪽으로부터 라이온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낭랑한 목소리를 통해 들려왔다.

“그건 경고용이었어. 안 죽으니 걱정 마. 하지만 또다시 다가오면 풋내기 요리사의 음식만큼이나 새카맣게 탄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게 될지도 몰라. 그리고 요리라는 측면에서, 난 가끔 실수를 하는 편이야. 어머! 나의 실언.”

그것은 어쩐지 다른 상황에서 듣고 있으면 유쾌해질 것 같은 여인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포위한 해적들 중 유쾌한 기분을 느끼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빠진 얼굴을 한 채 서로를 바라보던 해적들 사이에서 기어코 비명이 터져나왔다.

“마, 마녀다! 마녀가 있어!”

“……………칵! 마법사다!”

교회에선 항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나왔다. 교회에 마법사라니? 하리야는 어이없는 얼굴로 교회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에도 교회 안의 여마법사는 계속 말했다.

“포위를 풀고 빨리 물러나. 그쪽을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야. 테리얼레이드 내에서 그런 모습을 하고 돌아다니다니, 리더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제정 신은 아닌 것 같군.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물러나. 다른 곳에서라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든 나 알 바 아냐. 하지만 테리얼레이드 교회에 대해서라 면, 너희들은 이 교회의 못 하나, 벽돌 하나도 건드릴 수 없어.”

세실은 기세등등하게 협박을 가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가중되는 초조함을 느꼈다. 무법 도시 테리얼레이드는, 바로 그렇기에 자신을 지키는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내부의 서로들끼리는 서로 찔러대건 어쨌건, 외부의 세력에 대해서는 단결하여 대항하는 것이 테리얼레이드이다. 테리얼레이드 의 어떤 무법자도 저렇게나 많은 무장 인력이 도시 내에 들어서는 것을 좌시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히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저 사내들은 그런 저항 따위 받지도 않았다는 모습으로 테리얼레이드 중심부의 이 교회까지 와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러나 다음 순간, 세실은 이 상황의 불가사의함이 단숨에 사라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사내들의 선두에 서 있던 새카만 외투를 걸쳐입은 사내가 커다란 검을 뽑아들었다. 그런데 그 검은 지금이 밤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사내 의 손 안에서 파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장검을 본 순간 세실은 그 검의 전설적인 이름을, 그리고 전설적이라는 면에서 그 검에 뒤지지 않는 그 소유자의 이름을 동시에 떠올릴 수 있었다.

“복수…………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키는 세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대신 교회의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실은 다급하게 외쳤다.

“키 드레이번이 육지에 오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잠깐! 당신, 여자들이 터프 가이를 좋아한다고 믿는 거야? 천만에. 그렇게 씩씩하게 다 가오면 오히려 정나미 떨어진다고. 제길, 멈춰! 멈추지 않을 거냐!”

독한 마음을 먹게 만드는 녀석이 난 싫더라. 세실은 마법의 힘을 불러내는 순간에도 짧게 투덜거린 다음,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키 드레이번 주위의 마법장(magic field)에 접촉했다. 그러곤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예상대로 키 드레이번 주위의 마법장은 극히 위축되어 있었다. 정말 엘핀 마이스터가 저 칼을 만든 것일까? 그래서 세실은 다른 방법으로 키를 저지하기로 마음 먹었다.

세실의 의도는 교회에서부터 불어닥치는 광풍이 되어 키를 습격했다.

거침없이 걸어가던 키는 갑작스러운 바람의 저항에 잇소리를 내며 허리를 낮추었다. 세실은 키를 대상으로 마법을 쓰는 대신 교회 주위의 공기에 대 해 마법을 구사했고 그 공기들은 돌개바람이 되어 키를 밀어붙였다. 마법이 아닌 자연적인 바람이었기에 제아무리 명검 복수라도 그 소유자를 보호 하지는 못했다. 결국 키의 두 발이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키는 욕설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해적들은 크게 당혹해하고 무서워했지만 오닉스만은 그 마스크 속에서 히죽 웃었다. 다시 세실의 낭랑한 목소 리가 울려퍼졌다.

“자, 키 드레이번. 바다에서라면 몰라도 육지에서는 당신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걸. 이 누님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키는 그만 눈이 뒤집힐 것 같았고, 그 사실은 다른 해적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중 특별히 화가 난 사내가 앞으로 나섰을 때, 해적들은 평소 에 가졌던 꺼림칙함도 잊은 채 환호를 질렀다. 트로포스는 기다란 지팡이를 단장이나 되는 것처럼 휘두르며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하나밖 에 없는 눈은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마쉬 개는 자마쉬 개로 상대하고, 마법사는 마법사로 상대하는 법이라지? 자, 마법의 저울 바늘은 누구를 가리킬지 알아보자!”

트로포스는 힘있게 쥔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고는 주문을 외웠다. 트로포스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자 세실은 헛바람을 삼켰다. 해적들은 느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세실은 교회 주위의 마법장에 일어나는 변화를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독기가 묻어날 것 같은 음침한 모습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흑마법의 기운이었다.

세실은 신음처럼 말했다. 

“불법 마법사….”

그러나 세실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분노를 느꼈다. 흑마법의 모든 부분이 음험하지만, 교회의 면전에서 흑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실에게 거의 패륜에 가까운 지독한 직업 윤리 위반으로 느껴졌다. ‘네녀석이 아무리 불법 마법사라 하더라도, 어떻게 교회 앞에서!’ 세실은 분노 속에서 민첩 하게 주문을 영창했다.

트로포스의 지팡이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 작은 흔들림은 곧 트로포스의 손을 뿌리치고 튀어나갈 것만 같은 격렬한 진동으로 바뀌었다. 트로 포스는 허연 눈자위만 드러낸 채 숨가쁜 신음을 뱉어내었다. 키와 몇몇 담대한 선장을 제외한 해적들은 모두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으며 그런 사실에 대해 창피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세실이 고요함과 차분함으로 주문을 외워나갔다.

교회 안팎의 마법장은 각자 세실과 트로포스의 지배 하에 들어섰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신이 상대방의 지배 하에 있는 마법장을 잠식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마법장 내에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마법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조금 전 세실이 그렇게 했듯이 자신의 마법장 내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서로 달랐다.

“그 온유함으로 가인의 머리카락을 날리고 그 분노로 일천의 함대를 압도한다, 질풍!”

세실은 조금 전 키를 공격했을 때처럼 또다시 질풍을 불러내었다. 공기는 사방에 있기 때문에 바람은 다른 마법사의 지배 하에 있는 마법장을 침입 하려 할 때 가장 쉽게, 그리고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연력이다. 하지만 트로포스는 전혀 엉뚱한 것을 불러내었다. 그리고 트로포스가 불러낸 것 에 대해 세실은 아연함마저 느꼈다.

“가장 순수한 분노여, 벼락!”

교회의 지붕은 높고 뾰족하지. 세실이 불러낸 바람에 의해 날려가면서도 트로포스는 씩 웃었다. 트로포스가 불러낸 벼락은 그의 의도대로 높고 뾰족 한 교회 지붕에 내리꽂혔다. 짧은 순간 밤이 추방되며 해적들은 망막에 남은 빛의 잔상에 진저리쳤다. 그리고 곧 온몸을 울리게 하는 우레 소리가 울 려퍼졌다. 꽈르르릉!

엉겁결에 눈을 질끈 감았던 세실은, 하지만 곧 의심 속에서 눈을 떴다. 왜냐하면 트로포스가 바보가 아닌 이상 건물 안에 있는 세실을 맞추기 위해 벼락을 불러내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눈을 뜬 세실은 실제로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람을 다루는 것도 어렵지만 벼락은 조절이 거의 불가능하다. 마법사가 벼락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벼락을 불러내어 어딘가를 때린다기보단 벼락이 잘 떨어지는 장소가 있을 때 불러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저 불법 마법사는……………?

그때 교회 바깥에서 하리야 선장이 노성을 내질렀다.

“이 사악한 놈! 교회에 벼락을 떨어뜨리다니, 신의 분노가 두렵지도 않은 게냐!”

“이왕이면 좀 일으켜주고 말하면 어떻겠나?”

바람에 의해 나가떨어졌던 트로포스는 낑낑거리면서도 하리야를 향해 이죽거렸다.

세실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파킨슨 신부가 간신히 새로 만들었던, 그래서 피뢰 장치나 단단한 마감 공사 같은 것이 아직 더해지지 않아서 부실한 교회 지붕이 이글거리며 불타고 있었다. 이런 맙소사, 저놈 날 태워버릴 생각이었군!

세실과 모든 해적들, 심지어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테리얼레이드의 밤의 사내들까지도 넋빠진 표정으로 불타는 교회 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기적을 만들어낸 트로포스만은 씁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힐끗 바라보았다. 혹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트로포스의 소망을 무시하며 나타난 흰 점은 시계 문자판의 7의 위치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트로포스는 낙천적이 되기로 결심했다. 열한 번이니까 앞으로 네 번은 더 쓸 수 있군. 여덟 번째는 좀 더 신경 써야겠어. 그러나 조금 후 들려온 주위 의 웅성거림에 고개를 들었을 때 트로포스는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여덟 번째가 곧장 다가온 것이다.

“계절의 하얀 수의, 겨울 하늘의 우수, 눈꽃이여!”

“말도 안 돼!”

트로포스는 악을 쓰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 되고도 남았다. 봄의 향취가 물씬 묻어나는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갈피로부터 희디흰 눈폭풍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이온은 기겁하며 온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쏟아져내린 눈은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차가움보다 수백 배는 더 차가웠다. 그리고 라이온이 평생 본 것 중에서 가장 거대한 눈송이들이었다. 거의 흰 꽃송이라고 착각될 만큼 거대한 눈송이들은 모두 교회 건물 을 향해 수렴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위로 쏟아지는 흰 눈꽃들은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극히 매혹적이었지만 해적들은 공포를 먼저 느꼈다.

광포하게 일어난 흰 수증기가 교회 위로 솟구쳐오르는 가운데 눈꽃의 집중 공격을 받은 화염은 순식간에 사그러들었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부터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그 선장에 그 부하로군. 숙녀를 대하는 에티켓에 자신이 없으니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치함은 십대나 저지르는 귀여운 실수 아냐?”

키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지만 트로포스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트로포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지팡이를 부여잡았다.

“젠장, 귀엽다고 했나? 그렇다면 애교 좀 더 떨어줄까? 벼락아, 번개여!”

트로포스의 고함은 눈폭풍 속에 번득이는 벼락이 되어 테리얼레이드 교회를 강타했다. 쾅쾅거리는 천둥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벼락들은 한 점을 향 해 쏟아지는 폭포처럼 테리얼레이드 교회의 뾰족한 지붕으로 수렴되었다. 하지만 어떤 강력한 벼락이라 하더라도 눈을 태울 수는 없다. 트로포스는 격노하여 지팡이를 쳐들었지만 그때 키 드레이번이 트로포스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관둬. 이젠 충분하다.”

“선장님?”

트로포스는 입술을 깨물며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키는 그대로 교회 정문을 향해 외쳤다.

“이봐, 마법사! 당신의 힘은 잘 알겠군. 하지만 당신도 언제까지 우리 모두를 막아낼 수는 없다. 더욱이 나는 절대로 막을 수 없을걸. 마법사들에겐 익숙지 않은 것이고, 마법사와 그걸 하는 사람도 얼간이라지만, 어때? 협상을 해볼까.”

키의 말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다름아닌 트로포스였다. 흠칫하는 표정으로 키의 뒷모습을 보던 트로포스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형성되기 시 작했다. 그리고 트로포스의 생각은 순식간에 외침이 되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잠깐 기다리십시오!”

키는 고개를 돌려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으로 키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내 자존심을 생각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안쪽으로부터 비아냥거리는 기색이 완연한 세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지지 않았다고? 이번엔 얼마나 터프한 모습 보여줄 생각인데?”

“넌 상상도 못했던 것일 게다!”

트로포스는 속으로 뒷말을 이었다. 나 역시 상상도 못해 봤던 것이야. 과연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트로포스는 곧 자신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 었다. 할 수 있어. 나는 마법사야! 트로포스는 이를 갈면서 지팡이를 힘껏 들어올렸다. 곧이어 벌어진 광경은 다시 한번 조롱을 보내려 들었던 세실로 하여금 그 조롱이 목구멍 어디쯤에서 걸려버리게 만들었다.

“으아아압!”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로포스는 지팡이를 땅에 꽂았다. 뭉툭한 지팡이는 마치 예리한 창날이라도 되는 것처럼 땅을 파고들어 꼿꼿이 섰다. 트로포 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다음 두 손으로 지팡이를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거침없는 주문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눈송이 몇 개가 트로포스의 어깨와 머리에 떨어졌지만 트로포스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뱃속에서 불덩이가 굴러다니는 듯한 통증이 느껴 졌음에도 불구하고 트로포스는 주문을 멈추지 않았다. 오로지 세실만이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아무도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트로포스의 주문은 이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이 미친놈, 당장 멈춰! 아무리 불법 마법사라도 그런 짓은 할 수 없어!”

세실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 그 순간, 트로포스의 주문은 이 세계와 또다른 세계 사이의 장벽에 날카로운 흠집을 만들었다. 그리고 트로포스가 영 창한 금단의 주문은 저 세계의 ‘무엇’을 포착했다. 가닿아서는 안 되는 것. 접근해서는 안 되는 것. 그러나 트로포스의 주문은 모든 금기와 모든 슬픔 을 꿰뚫고 그것에 직접 가닿았다.

“됐어!”

트로포스는 눈을 번쩍 떠 핏발선 눈동자를 보이며 외쳤다. 바로 그 순간 트로포스가 붙잡은 ‘그것’의 분노에 찬 포효가 테리얼레이드의 하늘 위로 길 게 울려퍼졌다.

“……!”

라이온은 핼쓱해진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바라본 하늘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었던 포효는 불타는 증오와 폭풍 같은 분 노 이외에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외침이었다. 그것은 소리조차 아니었다. 그때 교회 안으로부터 세실의 신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프, 프, 프린스 오브 구울(Prince of ghoul)!”

하리야 선장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리야는 급히 트로포스를 돌아보았고 그가 눈을 뒤집은 채 하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며 헛바람을 삼 켰다. 이 사태에 대한 어떤 설명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주위의 해적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트로포스가 입을 열자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그리고 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닌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해냈어! 구울의 위대한….. 왕자여!”

하리야는 재빨리 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키는 벌써 복수를 뽑아든 채 하리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키는 넋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하리야의 얼 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리야! 지금 트로포스 놈이 불러내는 것이 뭔가? 구울의 왕자라고?”

“그, 그렇습니다. 구울의 왕자, 언데드의 수호자, 판데모니엄(Pandemonium)의 하이마스터……막아야 합니다!”

하리야의 마지막 말은 그냥 찢어지는 비명 비슷했다. 열풍이 휘몰아치고 메스꺼운 냄새들이 진동하는 가운데 밤하늘은 암적색으로 이글거렸다. 키 는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신학자나 악마 숭배자놈들이나 관심 가질 멀미 나게 기나긴 호칭 같은 건 집어치우고 말해. 트로포스가 뭔가 골치 아픈 것을 불러내었단 말이지? 그런데 트로포스가 그 녀석을 알면서 불러냈다는 것은, 그 녀석을 지배할 자신이 있기 때문 아닌가?”

하리야는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너무 기가 막힌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배한다고 하셨습니까? 인간이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를? 차라리 고래를 지배한다고 하십시오!”

“그거면 대답이 됐어.” 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외쳤다. 

“오닉스! 놈을 기절……………” 

바로 그 순간,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지상에 도래했다.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자들이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형상에서 빗나가 있고 색채에서 일탈해 있었으며 단지 그곳에 서 있 다는 것만으로 이미 모든 신의 피조물에 대한 끔찍한 모욕이었다. 신이 창조한 어떠한 빛도 그것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 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피조물도 볼 수 없을지언정 신을 느끼는 것만큼이나 악을 느끼는 데 민감한 인간들만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암흑을 덮는 암흑이었고 불을 태우는 불이었다. 그림자를 감추는 그림자였고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었다. 교회 속에서 세실은 경탄과 공포 중 어느 감정에 몸을 맡겨야 될지 몰라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마법사가 지옥의 권세를 이 땅 위에 직접 불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부활하지 않은 바에야.

지상에 도래한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는 또다시 노호했다.

“……!”

신이 창조한 어떤 바람도 그것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는 없었기에 테리얼레이드의 하늘 위로는 실제로 어떤 소리도 울려펴지진 않았다. 하지만 인간 은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일곱 지배자들의 하나인 자의 목소리였다. 고막이 터져나가는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 사이로 구울의 왕자의 목소 리가 울려퍼졌다.

“우둔의불꽃을넘어서이다지도무례한짓을한것은도대체어떻게생겨먹은놈인가.”

아무도 입을 열 생각을 못하는 가운데, 트로포스는 두 팔을 벌리며 기성을 질렀다.

“나요, 구울의 왕자여!”

구울의 왕자는 무한한 경멸이 가득 담긴 눈으로 트로포스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조그마한가슴속에자신의파멸을이끌수있을정도로치명적인용기를담을수있다는사실이경탄스럽구나미력한인간아네놈이정녕모래알을던져대양에 소용돌이를만들려했다는말이더냐.”

트로포스는 눈가에 흘러넘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낸 다음 외쳤다.

“그렇소! 구울의 왕자여, 판데모니엄의 하이마스터여! 그리고 나는 해냈소. 바로 내가 신의 창조물들 사이에 당신을 서게 했단 말이오. 그것을 인정 하시오!”

라이온은 자신의 턱이 모조리 부서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를 부딪히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구울의 왕자는 트로포스의 말에 비웃음으로 대답했다.

“인정한다어리석은놈그리고네소망역시알고있다너스스로도그진정한의미를모르는소원을.”

구울의 왕자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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