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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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화


기적의 도시 펠라론.

이곳은 신화가 현실과 공존하는 도시이며 기적이 일상으로 통하는 도시다. 고금을 통틀어 무수한 모방 시도가 있었건만 아직도 지상에 펠라론과 조 금이라도 비슷한 도시는 건설되지 않았다. 펠라론은 펠라론이며 그곳에 고고히 서 있는 것만으로 이미 신을 증거하는 도시다. 그러나 지리학적인, 혹 은 정치사회학적인 주석이 필요하다면 이곳은 신앙의 주인이자 신의 사도인 법황이 지배하는 ‘실질적 영토라고 말할 수 있다.

‘뜨거운 비의 법황’ 유릴란드로부터 1700여 년. 펠라론은 단 한번도 침범당하지 않았다. 대륙이 제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때도, 혼 족의 반란 이 대륙 전역을 유린했을 때도, 그리고 가깝게는 제국의 공적 1호 대마법사 하이낙스가 대륙에서 제국을 없애버리기로 결심했을 때도 펠라론만은 끄 떡없었다. 펠라론은 영원의 도시이며 기적의 도시이며 불멸의 도시이다.

그러나 펠라론 또한 인간들이 사는 도시였다. 그곳 역시 정의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의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 역시 용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용서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 역시 치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펠 라론 또한 울고 웃고 노여워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도시였다.

그리고 펠라론의 중앙 유릴란드 언덕에 우뚝 서 있는 법황청의 화려한 발코니에서 영원의 도시를 굽어보고 있던 퓨아리스 4세 역시 신의 놀라운 조 화보다는 인간의 개탄할 만한 죄악 쪽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부활의 법황’ 퓨아리스 4세. 속명, 로데인 백작.

법황으로 선출된 직후 놀랍게도 죽은 인간을 살려내는 기적을 보임으로써 기적의 도시 펠라론의 시민들마저도 경악하게 만든 남자. 펠라론의 시민 들은 ‘폭우의 법황’ 라우스 5세가 보였던 3일 동안의 폭우도 경험했고 ‘은혈의 법황’ 오펠 2세가 은빛 피를 흘리는 것도 목격했다. 하지만 로데인 백 작이 법황에 선출되었을 때, 한번도 깨어진 적 없었던 전통의 힘을 믿고 있었던 펠라론의 시민들 중에서도 신임 법황이 이렇게나 놀라운 기적을 보이 리라고 예상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로데인 백작은 대관식에서 멋대로 퇴장한 다음 선대 법황 퓨아리스 3세의 유해가 누워 있는 침대를 찾아 가 그를 살려내었다.

이 전대미문의 사건은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모여든 추기경들과 주교들과 수사들과 각국의 대사와 고위 인사로 구성된 축하객들, 거의 1,00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눈에 똑똑히 목격되었다. 그들의 경악이 얼마나 놀라웠는지는 당시 펠라론에 체류중이었던 유명한 연대기 작가 바탈리언 남작 이 남긴 수기의 다음 글귀가 잘 나타내어 준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넘치는 비판주의와 회의주의와 불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신화 시대로부터의 철퇴였다.”

일반적으로 고귀하다고 칭해지는 무수한 사람들과 그 중 드물게 섞여 있는 진실로 고귀한 이들이 말문이 막힌 모습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로데인 백 작은 부활한 선대 법황 앞에 무릎을 꿇고 법황의 홀을 바치며 말했다.

“성하. 저들이 주인의 허락 없이 멋대로 이것을 저에게 주는군요. 그래서 저는 그 주인에게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때 ‘다리 달린 붕어의 법황’ 퓨아리스 3세, 즉 그의 즉위 직후 펠라론 강에서 다리 달린 붕어가 잡혔다는 기적을 보였기에 재위 기간 전체를 통틀 어 제국의 여러 왕들뿐만 아니라 펠라론 시민들에게조차 조롱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던 법항은 생애 최후로(혹은 죽고 나서야) 사람들을 감동시켰 다. 퓨아리스 3세는 침대에서 일어난 다음 로데인 백작의 발등에 키스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하. 당신은 이미 선별된 신의 대리인임을 몸소 증명하셨습니다. 저는 제 값없는 목숨의 부활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신의 대리인인 당신을 경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기적을 찬양합니다.”

당시 현장에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 중 감동하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다. 퓨아리스 3세는 그로부터 한 달 동안이나 더 생존하였고, 부활 한 법황을 보기 위해 제국 전역에서 구름처럼 모여든 순례자와 왕족과 귀족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평안한 얼굴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신 임 법황은 존경과 사랑을 담아 선대 법황의 법명을 사용할 것임을 공표했다. 퓨아리스 4세, 부활의 법황의 탄생이었다.

긴 상념의 끝에서, 퓨아리스 4세는 혼자말처럼 말했다.

“웃기는 이야기지.”

“저도 웃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성하.”

그의 등뒤로부터 잔잔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퓨아리스 4세는 여전히 창 밖만 내다보며 말했다.

“부활의 법황? 뭐가 부활의 법황이란 말인가.”

“그야 성하께서 존경과 사랑을 담아 선대 법황 성하를 부활시킨 것에서 비롯된..

“천만에. 제국을 부활시키라는 말이지.”

잔잔한 목소리는 입을 다물었다. 퓨아리스 4세는 화려한 법의 대신 셔츠 한 장만 걸친 단출한 모습을 한 채 발코니에 팔을 괸 방만한 자세로 법황궁 앞의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을 오가는 많은 시민들이 법황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펠라론의 시민들 중 당혹하거나 불쾌해하는 사람은 아 무도 없었다. 법황 가까이에 살기 때문에 오히려 펠라론의 시민들은 법황 또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법황의 법명은 항상 제국민들의 요구를 담거나 그들의 요구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어. 법황 라우스 5세의 폭우는 정화를 의미하지. 애져버드의 전 횡으로 오염된 교리와 제국을 정화하라는 거야. 법황 클레인의 즉위 때 나타났던 청동뿔의 사슴은 어떤가. 혼 족의 반란에 대항하여, 제국의 양민들 이여. 무기를 들라. 대충 그런 의미지. 그렇다면 부활의 법황은?”

잔잔한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퓨아리스 4세는 약간의 짜증스러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낙스의 약간 거칠다고 할 수 있는 애무 때문에 빈사 상태에 빠진 제국을 부활시키라는 의미지. 간단해. 그렇잖은가, 플로라?”

“그 이름은 말씀하시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하.”

퓨아리스 4세는 고개를 돌렸다.

알몸의 여인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법황의 집무실에 드나드는 고위성직자들이나 각국 대사들이 당황하지 않게 하기 위한 헐렁한 초록색 가운이 준 비되어 있었지만 여인은 그것을 옆의 테이블에 놓아둔 채 알몸으로 햇빛, 혹은 법황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수줍음은 양자 어디에도 없었다. 법황의 눈이 아래로 떨어졌다. 건장한 사내의 손바닥 안에 감춰질 듯한 여인의 조그마한 발은 커다란 대야에 담겨 있었다. 마치 시골 처녀들이 더운 여름철 몸을 식히기 위해 시냇물에 발을 담그는 것처럼.

퓨아리스 4세는 플로라의 복사뼈 근처에서 찰랑거리는 물을 보다가 말했다.

“물이 다 되어가는 것 같은데. 더 부어줄까?”

“어찌 감히.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성하.”

“앉아 있어. 힘들게 걷는 걸 보느니 내가 하는 편이 나아.”

플로라가 당황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이, 퓨아리스 4세는 집무실 구석으로 휘적휘적 걸어가서는 커다란 물동이를 들어올렸다. 플로라에게 돌아온 법황은 그녀의 흰 다리에 물을 부었다. 하인의 행동을 묵묵하게 수행하는 법황을 보며 플로라는 고개를 숙였다.

“황공합니다, 성하. 무례를 용서하옵소서.”

“관두지. 난 인간의 법황이지 식물의 법황은 아니야. 게다가 정원사의 일은 법황의 취미로는 환영받는 편이지. 적어도 부유한 성직자를 파문시켜 재 산을 압수하거나 악마도 잘 이해 못할 해괴한 죄목을 만들어내거나 과부 신도들에게 질척한 축복을 내리는 일이나………….. 성직 매매보다는 훨씬 낫잖 아.”

역대 법황들의 악덕을 나열하던 퓨아리스 4세는 마지막 부분에 묘한 뉘앙스를 붙이며 싱긋 웃었고 플로라 역시 엷은 미소로 대답했다.

“메르데린 공작으로선 슬픈 일이겠군요.”

퓨아리스 4세의 웃음의 양상이 조금 바뀌었다. 비웃음이었다. 이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선 요즈음 펠라론의 시민들에게 좋은 화젯거리를 제공해 주 고 있는 한 야심 찬 사나이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있다.

사나이의 이름은 프란체스코 메르데린. 다벨 공국의 지배자인 메르데린 가문이 내어놓은 최대의 야심가다. 그러나 야심가일 뿐이었다. 능력이 수반 되지 않는 야심은 그 소유주에게 심인성 질병만을 제공하며, 그 점에서 볼 때 메르데린 공작은 아파서 이가 북북 갈릴 정도의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사내의 터무니없는 야심은 다벨 공국만으론 충족되지 못했고, 그 야심의 상한선은 안타깝게도 제국이었다.

“펠라론이 누대에 걸쳐 팔아온 독점 상품이 있으니, 나 여덟 자리의 금액으로 그놈에게서 그것을 사겠네, 어쩌고 하는 내용의 노래가 요즘 메르데린 공작의 애창곡인 모양이야. 여기서 말하는 ‘그놈’은 공작이 경의를 담아 나를 부르는 이름인가 봐. 어제 연회장에서 핸솔 추기경이 멋지게 흉내를 내 는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그 모습을 보던 다케온 대사는 너무 웃다가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였어.”

법황의 흉내는 그럴 듯했지만 플로라는 이름난 학자인 핸솔 추기경이 성대모사를 하는 광경을 잘 떠올릴 수 없었다. 그래서 플로라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성하. 메르데린 공작을 희롱하시는 행동을 그만두시면 어떨까요.”

“글쎄. 돕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그것이 어떻게 돕는 것이 되나요. 그의 야망이 헛된 것임은 그를 제외한 모든 이가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추기경의 위를 줄 수 없음을 명확 히 하시는 것이 그와 다벨 공국 양자를 위해 좋지 않을까요?”

“그의 야망이 헛된 것이라 했는데, 어째서 그렇지?”

어리둥절해진 플로라는 법황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법황은 조용히 미소 지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하께서는 제가 놓친 무언가를 질문으로 일깨워주시려 하시는가 보군요. 그럼 대답해 보겠습니다. 메르데린 공작이 설령 추기경의 위를 획득한다 하더라도 다케온, 록소나, 팔라레온의 3국을 병탄하지는 못할 겁니다. 공작은 추기경만 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 믿는가 봅니다만. 혹여나 그 세 나라가 추기경의 권위에 굴복하여 그의 발 아래 무릎꿇는다 하더라도 그는 누대의 전략가들이 지적해 왔던 다섯 번째의 검이 아닙니다. 공작은 자신 이 다섯 번째의 검이라고 믿는 모양입니다만. 가장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이루어져 그가 오 왕자의 검을 하나로 모을 수도 있더라도 철탑의 인슬레 이버가 있습니다. 공작은 그녀가 보이지 않나 봅니다만. 따라서 그의 야망은 헛된 것입니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라. 아피르 족은 대사라고 부르는 모양이던데.”

“혐오스러운 이름입니다.”

“나는 아피르 족처럼 그녀의 본명을 몰라. 그대가 나에게 그녀의 본명을 가르쳐줄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 나 역시 대사라고 부를 수밖에. 그럼 그대 의 말을 요약해 볼까. 메르데린 공작이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선 추기경 지위의 획득, 삼국의 병탄, 다섯 번째 검의 획득, 대사의 격파라는 네 가지 문제를 풀어야 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혹여나 내 도움으로 첫 번째 문제를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두 번째 문제의 해답이 되지 못하며, 세 번째와 네 번째의 문제는 거론할 가치도 없 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줄 듯 말 듯하며 그를 애태우는 건 희롱하는 짓이라는 거지?”

“그런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예?”

퓨아리스 4세는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엉덩이를 얹었다. 그 책상은 희대의 가구공 질베르트의 걸작으로서 질베르트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게거 품을 물며 발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질베르트는 15년 전에 죽었으며, 설령 그가 되살아나 이 광경을 본다 해도 퓨아리스 4세는 의자에 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법황이 의자에 앉는다면 플로라에게 쏟아지고 있는 햇살을 가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퓨아리스 4세는 플로라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했다.

“플로라. 네가 말한 대로 내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더라도 삼국은 코방귀만 뀌겠지. 그러면 다벨 공국은 삼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처참한 꼴이 될 거야. 그러나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럼 그는 추기경 자리를 포기하고 곧장 전쟁을 일으킬 거야. 결과가 똑같아. 어느 경우에라도 무익한 전쟁이 일어날 거야.”

“아아.”

“나는 곡예사를 흉내낼 수밖에 없어. 플로라. 내가 어느쪽으로 기울더라도 전쟁이 일어나겠지. 나에게 남은 수단은 메르데린 공작으로 하여금 추기 경 자리가 꼭 필요한 것인 양 계속해서 착각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줄 듯 말 듯 냄새를 피워대는 것이지. 아직까진 성공적이었 지만………… 후우. 언제까지 그를 착각 속에 묶어둘 수 있을진 모르겠군………”

법황은 말꼬리를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라는 법황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신앙의 구심체이자 신의 대리인인 고귀한 이가 이런 서툰 정치 곡예로서만 그의 신도들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 사실에서는 서글픔마저 느껴졌다. 제국에게 힘을 빼앗기고 하이낙스에게 권위를 강탈당한 지금, 펠 라론은 지금껏 큰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감각을 힘겹게 연마해야 했다. 그러나 외교관의 감각은 쉽게 체득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플로라는 생각 했다. 어쩌면 퓨아리스 3세는 바로 이런 사태를 예견했기에 성직자가 아닌 로데인 백작을 지명한 것일지도. 그녀가 그 사실을 지적하려 했을 때 퓨아 리스 4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법황은 다시 플로라를 바라보았고 플로라는 고개를 살짝 숙여 법황의 시선을 피했다. 법황은 플로라의 녹색 머릿결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재미있으니까. 그 천치를 가지고 노는 것 재미있잖아.”

“지당하신…… 예?”

플로라는 그만 멍해진 얼굴로 법황을 올려다보았다. 법황은 손을 뻗어 그런 플로라의 볼을 살짝 꼬집어주곤 큰소리로 웃었다.

“성하!”

퓨아리스 4세는 껄껄 웃으며 뒤로 도망치는 시늉을 해보였고, 플로라는 이 고귀한 이가 보여주는 천진난만한 행동에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법 황은 미소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자, 내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니 이젠 네 차례야.”

“성하?”

“하이낙스는 어떤 작자였지?”

플로라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퓨아리스 4세는 두 손을 목 뒤로 돌려 손가락을 깍지끼며 말했다.

“그의 머리는 얼마나 명석했기에 제국을 박살낼 수 있었지? 그의 손은 얼마나 강력했기에 쥬르노 산을 쥬르노 평원으로 바꿔버릴 수 있었지? 그리 고 그의 마음은 얼마나 뜨거웠기에 싱잉 플로라를 리포밍시킬 수 있었지?”

리포밍된 싱잉 플로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초록빛 속눈썹이 초록빛 눈동자를 가렸다.

“성하. 저는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 이걸로 여섯 번째인가 일곱 번째인가. 잘 모르겠군. 대단한 고집이야, 플로라.”

“죄송합니다. 성하.”

퓨아리스 4세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밑으로 숙여지는 대신 플로라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에겐 하이낙스의 모든 것이 필요해. 플로라.”

“저를 거두어주신 것도 그 때문임을 잘 압니다.”

퓨아리스 4세는 플로라의 말에 흠칫했다.

“저를 배은망덕한 꽃이라 하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꽃이 아니라 사람이겠지.”

아냐. 사람이라면 발을 물에 담그고 햇살을 쬐고 있을 필요는 없는 건가. 법황은 약간의 혼란을 느꼈고, 그 혼란을 떨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조금 가 로저었다.

“그리고 배은망덕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고. 나는 너에게 관상식물에게 바라는 것 이상은 바라지 않아. 이런! 내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고 있 군. 쯧쯧.”

법황은 머쓱한 얼굴이 되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그때 문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퓨아리스 4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도 퓨아리스 4세는 꼼짝하지 않은 채 플로라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플로 라는 가운을 들어올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성하?”

똑똑. 퓨아리스 4세는 긴 한숨을 내쉰 다음 빠르게 고개를 돌려 문을 향해 말했다.

“그 문 단단하지?”

가운을 걸치던 플로라는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시 후 문 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성하.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비서관의 복장을 완벽하게 갖춰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레이엄인가.”

비서관 그레이엄은 가볍게 무릎을 꿇었다. 법황에 대한 예를 표시함과 동시에 플로라로 하여금 가운을 걸칠 시간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기에 그레이 엄은 천천히 일어났다. 덕분에 그가 일어났을 때 플로라는 초록색 가운으로 몸을 가린 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레이엄.”

그레이엄은 붙임성 있게 고개를 끄덕여보일 뿐 아무 말 없이 법황에게 다가서서는 몇 장의 종이를 건네었다. 그리고 그레이엄은 조용히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문을 닫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플로라는 그레이엄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저를 싫어하시는 걸까요.”

“응? 무슨 말이야?”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이 방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셔서……”

“그건 그가 번잡한 말들은 악마의 소행이라고 믿는 착한 신도라서 그래. 그리고 네 일광욕을 방해하는 시간이 길어질까 봐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곧장 나간 것이기도 하고.”

“그런가요.”

플로라는 다시 가운을 벗으며 문 쪽을 향해 목례를 해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 짓던 법황은 곧 그레이엄이 가져다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퓨 아리스 4세는 서류를 읽어내리며 혼자말처럼 말했다.

“물론 그가 싫어하는 점도 없지 않아 있지. 그 친구는 나체의 여인이 법황의 집무실에 앉아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법황에 대한 기묘한 소문이 퍼 질까 봐 우려하고 있어. 그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해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그 역시 그런 의 심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본인에게 물어보면 완강히 부인하겠지만. 흐음, 재미있군.”

플로라는 관상식물답게 법황이 보고 있는 서류에 대한 호기심을 표현하지는 않기로 했다. 하지만 퓨아리스 4세는 왼손으로 서류를 탁 치며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예?”

“조금 전 우리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줬던 사나이 말이야. 메르데린 공작, 그 친구가 자신이 호언하던 여덟 자리의 금액을 만들어내 기로 한 모양이군.”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메르데린 컬렉션. 그 가문의 보물이었던 고서적들 알지? 공작의 선조들이 알았다간 무덤 속에서 통곡할 일이지만, 어쨌든 그걸 경매에 붙이기로 한 모양이군. 다림의 카밀카르 상관에서.”

“펠라론이나 란셀에서 경매를 실시한다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다림이 더 가깝잖아. 책이라는 건 부피가 크고 습기에도 약하기 때문에 대량으로 이리저리 싣고 다니기 힘든 물건이지. 그리고 다림의 카밀카르 상 관이라면 다케온의 다이아몬드 졸부들이나 다벨의 철강 귀족들도 몰려올 테니 꽤 흥미진진한 경매가 가능할 거야.”

“그런가요. 고민스러우시겠군요. 메르데린 공작이 정말 여덟 자리의 금액을 마련하게 되면 어떻게 추기경 자리를 거절하실 건가요? 게다가 거절을 하면 그 돈을 전쟁 자금에 보태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텐데.”

법황은 플로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혐오스럽기 그지없다는 시선으로 서류를 노려보았다.

“선배님들이었다면 사용할 수 있었던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경매장에 이단심판관을 파견하는 방법이 대표적이겠군. 그 서적들 중 불온 서적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단심판관이 서적들을 모두 조사할 때까지 경매를 중지시키는 거지. 그 컬렉션이 만 권이라지?”

“만 권의 책 속에서 이단의 몇 구절을 찾아내는 일이 비록 흥미롭긴 하겠습니다만… 그 방법은 사용할 수 없겠군요.”

“그래. 메르데린 공작 자신도 달가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시대 착오 운운하며 반대하고 나설 테지. 세속에 대한 법황청의 지배권 확대 시도로 여길 테니까. 젠장, 젠장.”

법황은 내키는 대로 불경스러운 말을 중얼거리며 언짢아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플로라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런데 다림의 카밀카르 상관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테리얼레이드에서 가까운 곳이군요.”

플로라는 그 지명을 말하며 하이낙스에 대한 추억 몇 가지를 떠올렸다. 하이낙스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도시이며 하이낙스의 몰락 이후엔 그 잔존 세 력의 구심점이 된 도시.

그러나 그녀는 테리얼레이드라는 말이 나온 순간 퓨아리스 4세의 눈에서 불꽃이 번득인 것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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