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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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0화


불침번을 서던 오스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 위에서 노려보는 눈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고, 그 순간 오스발은 그 명령보다 더 강력한 것은 노스 윈드 함대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 속에서 그 명령을 따랐다. 그를 일어나게 한 나무 위의 눈빛은 다시 명령했다.

‘그들을 떠나라.’

‘저는 불침번입니다.’

‘그들을 떠나라.’

나무 위의 눈빛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오스발은 머뭇거리며 자신의 배낭과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지팡이를 들어올릴 때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공주의 얼굴은 종일 계속된 도보 여행의 피로 때문에 약간 창백해 보였다. 오스발은 자신의 손이 잠깐이나마 멈칫한 이유를 거 의 정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주의 파리한 얼굴은 나무 위의 눈빛에 거의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간단히 요약되었다.

나를 떠나지 마.

오스발은 당장이라도 떠날 듯한 모습으로 제자리에 정지했다. 양쪽의 명령은 서로 배치되는 것이었고, 그것은 오스발을 몹시 괴롭혔다. 오스발이 겪 고 있는 갈등의 재미있는 점은 오스발 그 자신의 생각은 개입되지 않은 갈등이라는 점이었다. 나무 위의 명령과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이 내리는 명령 은 아름다울 만큼 단순화되어 있었고 그만큼 강력했으며 그래서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 평온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오스발은 자신의 몸이 찢어질 것 같다는 생각까지 떠올렸다.

순간, 나무 위의 눈빛이 움직였다.

오스발은 그 모습을 똑똑히 보진 못했다. 하지만 시야 한구석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흰 장막은 곧 그의 시야 전체를 가렸다. 몸무게의 상실감. 오스발 은 자신의 몸이 누군가(무엇인가?)에 의해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오스발은 천천히, 하지만 강인한 몸짓으로 그를 휘감아 끌어올리고 있는 무엇인가의 저리도록 차가운 감촉에 진저리쳤다.

오스발은 눈을 떴고, 잠시 후 자신이 아직까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는 하얀 건물의 바닥에 누가 던져둔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를 둘러싼 건물의 흰빛이 그를 몹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벽도 희고 천장도 희고 바 닥도 하얗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모습이었지만, 그 백색이라는 것이 턱없이 이질적이었다. 대리석이나 벽도제의 흰색과 달리 그 백색은 깊이 가라앉으며 동시에 겉으로 떠오르는, 마치 빙산과 같은 흰빛이었다. 초점을 맞춰보기 어려운, 짙은 흰색. 규칙적인 벽면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고체들(가구?)이 아니었다면 오스발은 자신이 얼음 속에 갇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머뭇거리며 일어난 오스발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벽을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벽에 부딪힐까 봐 – 벽의 백색은 그 정도 로 짙었다 천천히 걸어간 오스발은 허공을 더듬듯이 손을 내밀어보았다. 벽의 감촉을 느낀 순간 오스발은 안도하며 다시 당황했다. 오스발은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손을 끌어당겼다.

그의 손끝으로 스며드는 감촉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었다.

오스발은 다시 손을 뻗어보았다. 확실했다. 날카로운 섬뜩함으로 시작되지만 곧 부드러운 따스함으로 바뀌는 금속 특유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금속 이 어떻게 이런 빛을 낼 수 있단 말인가. 오스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몸을 돌렸다.

흰 여자가 그를 보고 있었다.

겸연쩍음으로 오스발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저,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에, 마님?”

흰 여자는 오스발이 사용한 호칭에 빙그레 웃었고, 오스발은 다시 얼굴을 붉혀야 했다. 희고 풍성한 옷 속에 파묻힌 여인은 조그마했고 그런 조그마 한 체구의 사람만이 그럴 수 있는 모습으로 고고했다. 베틀에 걸린 씨실처럼 가지런한 실버블론드 속에 파묻힌 흰 얼굴은 약간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오스발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무지한 노예인지라 귀하신 분을 어떻게 불러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에, 레이디? 데임?”

여인의 소리 없는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허둥거리던 오스발은 여자가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혹시 말씀을 못하십니까?”

“바라미.”

머나먼 변방의 야만인들이 득시글거리는 자유호의 노잡이들 중에서도, 오스발은 여인이 말한 단어를 말하는 노예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스발은 잠시 멍한 심정으로 여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금 후, 오스발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임을 깨달았다.

“바라미…………… 님이십니까?”

“내 이름들 중 하나다. 너에겐 그걸 줄까 하는데, 마음에 드는지.”

“글쎄요. 낯설게 느껴집니다. 무슨 뜻인지요?”

바라미의 미소가 이번엔 의아한 듯이 바뀌었다.

“그 이름에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데. 어떻게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물었으니 대답하지. 그건 ‘희망하는 자’라는 뜻의 엘핀이다.”

엘핀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오스발은 어떤 가정 하나를 떠올렸다. 바라미를 유심히 관찰하던 오스발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혹시, 엘프이십니까?”

그러나 바라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거지?”

“죄송합니다. 엘핀이라는 말씀에 그만 그렇게 추측했습니다. 저는 오스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프가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인간’ 오스발 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 기분이 드는군요.”

“내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나?”

“바라미 님이 사람이시라면, 사람은 제 생각보단 신에 더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스발의 아첨이라고 볼 수 있는 말에 바라미는 쓴 미소만 지었다.

“네가 실제의 모습보다 훨씬 더 박약하게 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오스발. 그리고 라미라고 부르면 더 좋겠구나. 바라미라는 이름은 너무 엄숙하게 들려서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점잖아지려 애쓰게 되거든.”

“알겠습니다, 라미 님. 그런데 저는 어떻게 이곳에 와 있는 거죠? 아니, 그것보다 먼저, 이곳이 어디인지 제게 설명해 주실 수 없을까요?”

라미는 오스발의 눈에는 그저 흰 덩어리처럼 보이는 물체에 천천히 앉았다. 오스발은 포용력을 최대로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의자로 인정할 수 는 없었지만, 라미가 그곳에 앉아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이고 적절해 보인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순 없었다.

“나는 조금 전 네가 벽을 만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도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네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짐작하지 못한다는 거냐?”

“짐작하지 못합니다.”

“괴로운 노릇이구나.”

“예?”

라미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며, 덧붙여 하고 싶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 행위를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기는 싫은 경우를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말을 듣는 당사자에겐 즐겁지 않은 일이 그럴 ― 음?”

오스발은 자신의 말 끄트머리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라미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어젯밤 잠들기 전 데스필드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말을 듣는 당사자 2인칭? ‘우리’라는 말에는 2인칭과 합쳐지는 우리와 3인칭과 합쳐지는 우리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오스 발은 라미와의 대화 중 자신이 뭔가를 포착했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차라리 떠올리지 말걸. 그럼 잃어버린 줄 도 몰랐을 텐데.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오스발은 또 하나의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건 과연 어젯밤의 일인 것인가?

“아지랑이를 겨냥하는 건가?”

“예?”

라미는 친절하게 설명했다.

“너에게 다시 의심의 건덕지를 줄지도 모르지만….. 그건 엘핀 관용구의 직역이다. 떠오를 듯 말 듯한 생각에 사로잡힌 모습을 말하는 싶을 때 엘핀 에서는 아지랑이를 겨냥한다고 말하지.”

“아, 예. 그렇습니다. 조금 전 뭔가를 떠올렸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군요.”

“떠올리지 못하면 슬플 것 같나?”

“아니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

“철탑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느냐?”

라미는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삼았다. 오스발은 대답에 앞서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이 방이 이토록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를 하나 더 발견했을 뿐이 었다. 문, 혹은 창문은 없었다. 그렇다면 나나 이 여자는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거지?

“모릅니다.”

“오 왕자의 검에 대해서는 아느냐?”

“모릅니다.”

“처음부터 설명해야겠군.”

그러나 라미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요 속에서 오스발은 문득 자신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오스발은 어디선가 낮고 날카로우며 떨리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라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예?”

“내 목적, 내 이유……… 그런 것들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었다. 너를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필요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내가 나 의 목적, 반왕(anti-king)의 도래를 막으려는 모든 나의 노력 따위를 설명해 봤자, 너는 내가 너에게 하려는 행동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테지.” 

“제게 무슨 행동을 하시려는 겁니까?”

그러나 라미는 오스발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금단의 사지(四肢)를 가진 무서운 맹수…………… 이 왕자의 땅에서 태어날 수 있는 왕에게는 무리 중 우월하여 무리 전체를 보살필 수 있는 왕이라는 의 미는 전혀 없다. 그것은 반왕. 그냥 맹포한 야수일 뿐. 그것을 막는 것은 분명히 가치 있는 일.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여도………… 내가 혼 자말을 하고 있었나?”

“그렇습니다.”

“미안하군. 난 대개의 경우 혼자 있기에 이렇듯 다른 이와 함께 있어도 혼자말을 하곤 하는구나.”

“혹시 제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까?”

라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젠 너를 더 괴롭혀서는 안 될 것 같구나. 내가 널 희롱했다고 생각하지 말아다오.”

오스발은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가 라미라고 여기고 있던 것은 이제 라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라미의 모습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쉬식거리는 목 소리였지만, 지금껏 오스발이 들어왔던 라미의 목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내 일을 계속하기 위해 살아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라는 자양분이 필요하다. 너에겐 아무런 유감도 없다. 단지 너는 내 손 닿는 곳 을 지나고 있었을 뿐이다. 믿어줄진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동정한다.”

오스발의 목구멍 안쪽이 급속도로 뜨거워짐과 동시에, 그의 손끝은 차가워졌다. 오스발이 등으로 벽을 밀어붙이는 무의미한 짓을 계속하는 동안 라 미는 그 희고 단단해 보이는 삼각형의 머리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뒤로 물러나던 오스발의 손이 길고 단단한 것에 닿았다. 오스발은 경련하듯 자신의 지팡이를 움켜쥐며 일어났다. 그러곤 지팡이를 앞으로 겨누며 어 젯밤 자신을 나무 위로 끌어올린 것을 똑똑히 보았다.

불타오르는 것같이 창백한 거대한 뱀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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