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3화 [1권 끝]

랜덤 이미지

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13화


파킨슨 신부는 그의 손에 쥐어진 핸드건에 놀라는 해적들을 보며 진한 연대감을 느꼈다. 그 핸드건에 경악한 사람들 중엔 그 자신도 분명 포함되기 때문이다.

테리얼레이드에서 포교 활동중인 그에게 이 볼품없는 쇳덩이를 전해주기 위해 펠라론에서 사자가 왔을 때, 파킨슨 신부는 그 사자가 추기경의 지위 를 가진 인물임을 깨닫고는 기절할 정도의 충격 때문에 예법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파킨슨 신부는 곧 더 놀라야 했다. 그 추기경은 자신이 가져온 물건에 비한다면 그 자신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던 것이다. 그 추기경은 자신에게보다는 핸드건에 더 예 의를 차려달라고 부탁하는 듯한 동작으로 그것을 그에게 건네었다.

“당신이 이따위 쇳덩이보다 현금을 지원해 줬으면 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오.”

핸솔이라고 자신을 밝힌 그 추기경은 먼저 파킨슨 신부의 속마음을 지적하여 그로 하여금 얼굴을 붉히게 만들었다. 빙긋 웃던 핸솔 추기경은 곧 정 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 영웅 분투중인 법황청의 공식적인 평가요. 그리고 나 역시 형제가 수행하고 있는 일이 실로 영웅 분투라 불릴 만한 일이라는 점 에 동감하오 땅이 다름아닌 테리얼레이드임을 아셨을 때 법황 성하께서는 당신에게 이것이 전달되기를 원하셨소. 법황청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들은 그 대덕고승 여러분들 중 특히 심장이 안 좋으신 분들의 건강을 걱정해야 했다는 것만을 말해 두겠 소.”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그 핸드건을 쥐어보려 했다. 그러나 핸솔 추기경의 손이 재빨리 다가와 그의 손을 쳐내었 다. 파킨슨 신부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핸솔 추기경은 재빨리 사과했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형제여.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보물이자 동시에 지극히 위험한 물건이오. 이 물건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쥐었을 땐 더욱 그러 하고. 그래서 말인데…………” 

그리고 핸솔이 던진 질문은 파킨슨 신부를 퍽이나 의아하게 만들었다. 

“혹시 포술에 대해 아시오?”

파킨슨 신부는 핸솔 추기경이 약간 과장하는 버릇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세상에, 대포라니. 하지만 파킨슨 신부를 지도하기 위해 추기경을 따라온 핸드건 마이스터 죠르지오 신부의 지도 하에 처음 그것을 사용해 보았을 때 파킨슨 신부는 좀 더 경고해 주지 않은 핸솔 추기경을 원망했다. 핸드건은 표적이었던 물통을 박살냄과 동시에 그의 손목을 부러뜨렸던 것이다.

파킨슨 신부가 즉사한 해적들을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리는 동안, 하리야 선장은 라이온의 야비한 강요에 못 이겨 그 핸드건에 대해 대충 설명했다. 

“말해 줄 테니 허리 좀 그만 찌르게, 라이온! 저건 말 그대로 손 안의 대포야. 교회의 보물이지.”

해적들은 더욱 파리한 얼굴이 되어 뒤로 물러났다. 대포라는 말에도 놀랐지만 그들을 정말 겁나게 만든 것은 그것이 교회의 보물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이 느끼는 우려를 간략히 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저걸 맞으면 직통으로 지옥행인가? 다행히도 파킨슨 신부는 그들의 의문을 해소시켜 주었다.

“이것은 신성 펠라론의 무구다! 이 무구의 무서운 위력을 똑똑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나에게 대적하려 한다면,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 주겠 다. 이 무구에 명중된 이는 세상의 종말이 찾아올 때까지 안식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는 유령이 되리라!”

역시 나에게는 설교사의 재능이 있단 말이야. 바람의 도시의 벼락맞을 형제들에겐 통하지가 않지만.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망상에 히죽 웃었지만 해 적들에겐 그 죄없는 웃음이 끔찍하게 무서운 것으로 여겨졌다. 삽시간에 파킨슨 신부와 해적들의 간격이 5로드 정도로 벌어졌다. 데스필드와 율리아 나 공주는 그 틈을 타 다시 한번 철탑을 면밀히 관찰했지만 아무데도 여닫히는 곳을 발견할 수 없는 희한한 건물이라는 사실만 발견했을 뿐이었다. 하리야는 키의 활활 타오르는 눈을 훔쳐보고는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신부님. 이 미천한 자는…………” 

하리야는 잠깐 말을 끊어야 했다. 그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신부의 왼팔이 빙글 움직이며 핸드건의 포구가 그를 겨냥 했기 때문이다.

“하리야라고 합니다. 신부님께 감히 여쭙건대, 악마나 상대해야 할 그 끔찍한 무기를 신의 자녀에게 겨누십니까.”

“파킨슨 신부다. 조금 전의 그 말을, 너희 해적들이 피로 물든 그 검을 버리고 회개하여 신의 선량한 자녀로 돌아갈 의사를 가졌음으로 해석해도 되 겠나?”

뭐 씹은 듯한 하리야의 얼굴을 보며 파킨슨 신부는 다시 한번 설교사로서의 자신의 재능에 뿌듯해했다. 그때 킬리 선장이 재빨리 하리야에게 다가왔 다.

‘저거 재장전 시간 얼마입니까?”

하리야는 잠시 동료 선장의 호담함에 감동하고 그 무지에 슬퍼했다. 대포라면 당연히 가지는 재장전 시간을 노려보겠다는 그 의지는 가상하지만, 더 군다나 무주고혼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까지도 무릅쓰는 그 용기는 겁날 지경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하리야는 ‘저 귀한 물건은 재장전 시간이 없어. 연 속으로 발사될걸’이라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킬리는 두려움 반 감탄 반의 표정으로 그 핸드건을 돌아보았다. 그때 이 대립의 핵심이랄 수 있는 인 물이, 그러나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인물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신부.”

파킨슨 신부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율리아나 공주의 표현에 감탄했다. 과연. 저게 침착하게 돌아버린 얼굴이라는 것인가?

키 드레이번이 신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두 눈은 어떻게 보면 착잡한 심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고 어떻게 보면 상대방의 명줄을 단숨에 끊어낼 급소를 찾아 신부의 몸을 더듬는 것 같았다. 검은 코트 자락 안쪽으로 부러진 팔을 숨기고 있지만, 그것은 동정을 일으키는 모습이라기보다는 그의 모습을 더 무서운 것으로 만드는 이상한 일탈이었다. 균형과 대칭이 신의 선물이라면 불균형과 파격은 악마에게서 기인한 것. 키 드레이번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파킨슨 신부는 물론 신앙인이었다. 하지만 겉멋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인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 공적 제1호를 진감케 했다는 명예 를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것을 개인적인 야심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것이, 제국의 강대국들 중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교회의 일원이 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킨슨 신부는 무심히 그랬다는 듯이 핸드건을 돌려 키 드레이번을 겨냥했다.

“파킨슨 신부다.”

두려움에 떨던 해적들도 이 대담한 도발엔 벌컥 성을 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 자신은 파킨슨 신부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쏘지 못할 대포로 아무나 겨누지 마라, 신부.”

파킨슨 신부는 씨익 웃었다. 다음 순간 신부는 석궁의 그것을 닮은 핸드건의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콰아아앙!”

모든 공포는 두 번째 겪었을 때부터가 더 무섭다. 최초의 놀람이 배제되고 순수한 공포만 느끼기 때문이다. 핸드건의 포구로부터 불꽃과 포성이 울 려퍼졌을 때 해적들은 늘상 들어왔던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오줌을 지릴 정도의 공포를 느꼈다.

“과연 재장전이 없군.” 등의 말을 중얼거릴 수 있는 킬리 같은 사람은 일부 선장들뿐이었다. 그리고 키 역시 날아간 핸드건의 포탄이 자신의 머리카 락 몇 올을 자른 다음 창공으로 사라져간 후에도 물끄러미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실수했음을 인정했지만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쏘지 못한다고 했나?”

“그래. 방금 확인된 듯이.”

쳇. 아무나 제국의 공적이 되는 건 아니군. 파킨슨 신부는 경의를 담아 왼팔을 조금 내렸다.

“서툰 짓을 했음을 인정하지. 하지만 너 역시 나를 너무 밀어붙이지는 않는 것이 좋을걸.”

키는 대답을 보류한 채 잠시 파킨슨 신부의 어깨 너머로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 눈길을 피하려던 율리아나는 곧 스스로를 다잡고선 그 눈길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키는 율리아나의 커다란 눈에서 수만 가지 생각들을 읽어낼 수 있었지만, 공주는 그러지 못했다. 공주를 바 라보는 키의 시선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말에 해당하는 눈길이었다. 율리아나는 이상한 눈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키가 말했다.

“그럴 생각은 없다. 최소한 율리아나 공주가 이리로 올 때까지는. 그리고 또 한 가지.” 라이온은 흠칫하며 키를 돌아보았다. “그 노예는 어디 있지?”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리고 공주님은 절대로 보낼 수 없다. 데스필드! 공주님을 모시고 떠나자.”

“신부!”

“움직이지 마!”

그러나 키 드레이번은 움직였다. 그는 왼손으로 복수를 뽑아든 다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러나 그 이상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세실 이 그의 왼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멈춰, 멍청아! 복수도 저건 막을 수 없어. 저건 마법이 아니라고!”

그때 겨우 세실을 알아본 파킨슨 신부는 당황했다.

“세실 자매? 그 해적놈들 사이에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세실은 잠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 말보다 행동을 더 선호하는 몇 명의 사람들이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는 시간에 행 동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며 왼팔만으로 세실을 내팽개친 키 드레이번이었다. 놀라운 힘이었지만 어쨌든 그건 한 팔이 부러진 사내에게 추천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키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릴 때 두 번째 사내가 조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행동에 돌입했다.

“야아아압! 공주님, 달아나세요!”

슈마허는 앞으로 돌진하여 키의 등에 매달렸다. 건장한 사내가 온몸으로 감행하는 이런 종류의 습격에 키가 아닌 다른 자라도 도리없이 무릎을 꿇어 야 했을 것이다. 모든 해적들이 노성이나 비명을 터뜨렸을 때, 그 자신만은 어떠한 소리도 낼 필요가 없었던 자가 해적들 앞으로 뛰쳐나왔다.

오닉스는 두 손으로 쥔 배틀 엑스를 목 뒤로 넘긴 채 앞으로 뛰어나왔다. 파킨슨 신부의 핸드건이 허공을 움직인 짧은 시간, 오닉스는 왼쪽 다리를 뒤로 들어올리며 두 팔을 앞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그런 희한한 투척 자세가 요구하는 대로 앞으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곧 오닉스는 신부의 왼 팔에 의해 생기는 사각 속으로 뛰어들게 되었고, 따라서 신부의 핸드건은 채 포착하지도 못한 과녁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오닉스의 거체가 등으로 부터 떨어지는 모습은 굉장했지만 파킨슨 신부는 무서운 기세로 날아오는 배틀 엑스를 피하느라 그 모습에 감탄할 경황이 없었다.

라이온은 오닉스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인다고 생각했다. 

“오닉스 이 자식!” 

신부로 하여금 키 드레이번에게 핸드건을 발사하게 만드려는 것이냐? 그 러나 무서운 회전과 함께 날아간 배틀 엑스는 신부의 어깨 너머로 사라져 갔고 그 모습을 보며 라이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그러나 칸나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콰아앙!

배틀 엑스가 철탑을 강타한 순간 행동하던 자와 무의미한 고함을 지르던 자, 그리고 그 중 아무것도 못하고 오로지 당황하고 있던 자들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철탑은 무서운 공명음으로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반쯤 일어나던 오닉스는 마스크를 움켜쥐며 다시 주저앉았고 키를 깔아뭉개던 슈마허 역시 그 소리 때문에 키를 놓칠 뻔했다. 시체가 되어서라도 키를 붙잡을 모진 결심을 했던 슈마허로서는 더 욱 분통 터지는 일이었지만, 공주와 데스필드 역시 주춤거리느라 달아날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oooooo!

진동은 확실히 커지고 있었다. 이제 두 발로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것은 고막보다는 정신 그 자체를 공진시키는 진동이 었다. 하리야 선장은 탑의 울부짖음이 어쩐지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휘저어진 물 속의 나뭇잎들처럼 무너지는 사람 들 중에서 세실의 가늘고 뽀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복수, 복수를!”

어렴풋한 정신 속에서 하리야는 세실의 말을 들었다. 복수를 어쩌라고? 복수로 저 진동을 막는다? 두 손을 땅에 짚은 채 개처럼 헐떡거리던 하리야 는 키 드레이번을 보았다. 하지만 키는 슈마허에게 붙잡혀 있었고 이 끔찍한 진동이 없더라도 오른팔이 부러진 그가 슈마허를 뿌리칠 방법은 당분간 은 없을 듯했다. 그에게 기어가려던 하리야는 그의 왼손에서 떨어져나와 땅에 뒹굴고 있는 복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여, 저 검을 쥘 수 있는 자 는 그 외엔 아무도 없나이다. 그런 미친 작자는…… 에, 한 명 있군요.

라이온은 복수를 집어들었다.

“으아아아아! 화아아-끈하군!”

저런 미친 자식! 하리야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복수를 쥔 라이온의 손이 점점 그 자신의 목을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복수의 검 끝이 라이 온의 목젖에 거의 가닿았을 때, 라이온은 입술을 깨물며 외쳤다.

“라이온 가라사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사이는 급속도로 식는 법! 우리, 약간의 멀어짐으로 우리 관계에 그리움의 색채를 더해 볼까나?”

그리고 라이온은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았다. 회전의 끝에서 원심력이 가득 실린 복수를 놓아버리며 라이온은 외쳤다.

“꼭 편지해!”

편지를 보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이온의 손을 벗어난 복수는 무서운 속도로 철탑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오닉스의 배틀 엑스 와는 달리 처음부터 탑을 겨냥했던 그 검은 대단히 높은 궤도로 날아갔다.

복수는 철탑의 중간부를 관통했다.

맞고 튕겨나오거나 꽂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뚫고 지나갔다. 마치 그 부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소음은 오히려 복수가 철탑을 관통한 직후 들 려왔다. 콰강, 캉! 키앙! 금속통 안에 돌멩이를 던져넣었을 때와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철탑 안에서 여기저기에 부딪히는 복수의 모습을 그 려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진동이 사라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하나둘씩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잔뜩 겁먹은 목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 목 잘릴 뻔했잖아! 그런데…………… 이건 복수?”

그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반응을 일으키는 낯익은 목소리였다. 사람들의 대표로 뽑힌 적은 없지만, 어쨌든 율리아나와 키 드레이번은 동 시에 그 목소리의 소유자의 이름을 외쳤다.

“오스발!”

그리고 사람들은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철탑의 표면 위로 사람의 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박제해 둔 사슴 머리? 흰 금속면 위로 튀어나온 머리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공포에 잠겨들었다. 그 머리가 효수되어 성벽에 걸린 사형수의 머리와 다른 점은 그것이 표정을 지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두 가지 표정을 연속해서 지어보였다.

“공주님! ・・・・・・윽. 키 선장님?”

해적들은 그제서야 키를 껴안고 있던 슈마허를 뜯어내었다. 슈마허는 무섭게 반항했지만 수십 개나 되는 해적들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키가 주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사이, 율리아나 공주는 머뭇거리며 오스발의 머리를 향해 말했다.

“아, 오스발. 잘 있었어요? 에, 보통 이 인사는 두 번 할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두 번 해야겠는데, 당신 목 아래도 잘 있나요?”

“빨리 뛰쳐나가지 않으면 목 아래는 잡아먹히겠군요.”

의외로 침착한 대답과 달리 오스발은 맹렬하게 앞으로 뛰쳐나왔다. 오스발의 몸은 조금 전 복수가 그랬듯이 철탑의 표면을 간단히 관통하여 공중으 로 뛰어나왔다. 데스필드는 재빨리 두 팔을 벌려 볼품없이 떨어지는 오스발의 몸을 받아내었다. 결과적으로 두 사내 모두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지 만 덕분에 오스발의 목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해적들이 어쩐지 박수를 보내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리던 것도 잠시, 그들은 오스발이 빠져나왔던 구멍(?)으로 또다른 것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구멍으로부터 기어나오는 뱀의 모습을 수만 배로 확대해 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고히 솟은 하얀 철탑의 표면 위로 뻗어나오는 희고 굵은 뱀의 모습은 철탑이라는 나무가 그 가지를 뻗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가지는 무서운 힘으 로 꿈틀거리며 철탑을 휘감았다. 아직껏 계속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긴 몸은 철탑을 완전히 한바퀴 휘감은 뒤에도 그 끝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칸나는 기어코 비명을 질렀다.

“대사아앗!”

“으아아아!”

칸나의 외침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경직해 있던 해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 역시 각자의 칼과 핸드건을 하늘로 겨냥 한 채 공주와 오스발을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흰 뱀은 아래에서 떠드는 조그마한 사람들을 무시한 채 철탑을 휘감는 동작만을 계속했다. 이윽고 철탑을 세 번 휘감은 뱀은 아직까지도 뱀의 몸 나머지는 철탑 속에 숨어 있었다 그 머리를 하늘 높이 쳐들어올린 다 음 아래를 굽어보았다.

잿빛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삼나무 굵기의 흰 뱀을 보며 고대에 기원한 공포를 느끼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댕댕이덩 굴처럼 휘감긴 뱀의 몸 아래, 철탑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그 금속성의 몸으로 뱀의 무게를 버티는 듯했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이리저 리 흩어지는 개미떼 같은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던 대사의 시선이 약간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엔 키 드레이번이 서 있었다.

키는 움직이지 않았다. 배짱이나 만용은 이 자리에 개입되지 않은 듯했다. 키는 약간의 호기심마저 느껴지는 시선으로 가만히 대사를 올려다보고 있 었다. 초점 없는 뱀의 시선으로 키를 바라보고 있던 대사는 갑자기 머리를 조금 움직였다.

철탑의 한 부분을 뚫고 복수가 휙 튀어나왔다.

던져진 것처럼 공중을 날아온 복수는 키 드레이번의 앞쪽 땅에 꽂혀 그 칼자루를 조금 흔들었다. 키는 왼손을 뻗어 복수를 잡아 뽑고는 의아한 듯 대 사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느껴야 되는진 알 수 없지만, 키 드레이번은 대사의 이 행동을 마치 결투 상대자에게 검을 던져주는 모습 같다고 느꼈 다.

확인해 볼까.

키는 복수를 뒤집어 칼집 쪽으로 가져갔다. 순간 대사의 머리가 심하게 요동쳤고 철탑을 휘감고 있던 그 몸에선 비늘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험악하게 울려퍼졌다. 선장들을 제외한 해적들은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각 배의 선장들은 무릎이 꺾이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키는 희미한 미소 같은 것을 지었다. 그는 느긋한 동작으로 다시 복수를 앞으로 빼어든 다음 갑자기 위로 들어올렸다. 꼿꼿이 세워진 복수의 칼 끝은 대사를 겨냥하고 있었다.

대사의 요동이 멈췄다. 키의 미소는 더 뚜렷한 것이 되었다.

“선장님!”

“물러나라, 모두들. 그리고 선장들께서는 부하들을 간수해 주길.”

그러나 언젠가 하리야가 평가했듯, 라이온은 아직까지 선장으로서의 자각이 부족했다.

“저 괴물이 원한다 하더라도, 선장님은 왜 저 괴물의 뜻을 따르는 겁니까?”

“나도 원하니까. 라이온. 그리고 레보스호의 선원들을 간수하도록.”

침착하게 라이온의 말에 대답한 키는 갑자기 시선을 옮겼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공주 일행이 그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키의 시선을 느낀 그들 역 시 제자리에 멈춰서 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만지작거리며 애써 키의 시선을 피하려 했 지만 그 의미는 뚜렷이 알 수 있었다.

다음은 너희들이다. 거기서 기다리도록.

코트 자락이 거칠게 나부낀 순간, 키는 복수를 쥔 왼손을 뒤로 눕힌 채 대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에 있던 대사의 머리는 벽력 처럼 내리꽂혔다. 해적들의 신음과 비명이 요란한 가운데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핸드건을 들어올렸다.

<2권에서 계속>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