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2화
황혼의 골디란 강물 위로 빛의 박편들이 넘실댄다.
강가의 바위에 앉아 있던 데스필드는 속눈썹에 와닿는 노을을 뿌리듯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그의 심사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물오른 들꽃 하나를 꺾어든 데스필드는 꽃잎을 하나씩 뜯어 강물을 향해 뿌리기 시작했다. 노란 꽃잎은 석양 속에서 선홍색 불티처럼 강물을 향해 날 아갔다. 마지막 꽃잎을 뜯어낸 데스필드는 빈 꽃대궁을 입 속으로 던져넣었다.
꽃대궁을 깨물자 쓴 수액이 입 안을 적셔왔다. 데스필드는 꽃대궁을 질겅거리며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흘끔 바라보았다.
“본인은 저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군.”
그의 푸념을 들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에 율리아나와 오스발, 파킨슨 신부 중 아무도 데스필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진맥진한 모 습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동시에 데스필드를 향해 소리 없는 원성을 보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으로 유유하게 강 물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지팡이에 간신히 의지한 채 기진맥진한 몰골로 도착한 일행은 저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파킨슨 신부는 아예 흙바닥 에 드러누운 채 헐떡이며 말했다.
“네가 사람이냐?”
데스필드는 별 대답 없이 석양만 바라보고 있었고, 오스발은 데스필드가 앉아 있는 바위 옆에 기대어 있는 네 개의 배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스필드는 다른 일행들이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며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그날 정오 무렵부터 일행의 배낭을 모두 짊어진 채 걸어왔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오스발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헛구역질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오스발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괴로운 신음을 내고 있는 율리아나 공주를 보게 되었다. 오스발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율리아나에게 다가갔다.
“심호흡 해보세요.”
“심호흡.”
“아직은 여유가 있으신 모양이군요.”
율리아나는 머리를 들어올리곤 힘없이 웃었다. 그러곤 데스필드를 향해 말했다.
“이보세요, 데스필드.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걷는 거죠?”
데스필드는 대답 대신 다시 길가의 꽃 하나를 꺾더니 율리아나에게 던졌다. 꽃을 받아든 율리아나는 얼굴을 살짝 돌리며 수줍게 말했다.
“당신 마음은 고맙지만 난 당신에 대해 잘 몰라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런 프로포즈는 너무 성급한 것 같지 않……”
데스필드는 신음처럼 말했다.
“씹어보시오.”
율리아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꽃을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공주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율리아나는 조심스 럽게 꽃을 씹으며 말했다.
“우 ᅳ 웁. 이걸 씹으면 잘 걷게 되나요?”
“아니.”
“그럼 힘이 나는 약초인가요? 피로를 없애주는 꽃인가요?”
“아니, 아니.”
“그럼 뭔데요?”
“그냥 들꽃이오.”
“그럼 왜 씹으라고 하셨는데요?”
“그럴 듯해 보일 것 같아서.”
율리아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낄낄거리며 일어나더니 배낭들을 다시 들어올렸다. 가슴 앞뒤로 배낭을 메고 양팔에 배낭을 하나씩 든 데스필드는 입 안에 든 꽃을 어떻게 할지 몰라하는 율리아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도 씹고 있소, 유리 당신? 별로 맛이 없을 텐데.”
“으으, 데 — 스- 필 – 드!”
“하하. 그건 각성제 효과도 약간 있지만 그것보단 마른 입 안을 적셔주는 효과가 있지. 맛이 떫어서 침이 괴거든. 쉬었으면 일어나 걸어들 갑시다.”
데스필드의 말에 파킨슨 신부는 몸을 꼬기 시작했고, 오스발은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율리아나는 먼산을 바라보며 노을이 참 아름답다느니 대 자연의 품속에 안겨 있는 이의 행복이 어쩌니 하는 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데스필드는 그들을 재촉하고 독려하고 심지어 모욕했지만 소용이 없었 다.
여행 나흘째, 여행식과 약간의 물만으로 끼니를 떼우며 쉼없이 걸어온 일행들은 탈진 상태였다. 파킨슨 신부를 향해 계속 그렇게 누워 있으면 낭심 을 걷어차겠노라고 엄중히 경고하다가 니 뜻대로 하시라는 대답을 듣게 된 데스필드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이거 보쇼들. 물가에서 자면 안 된단 말이야. 한밤중이나 새벽쯤에 짐승 당신들이 물 마시러 올 거라고. 여긴 지형도 더러워. 딱 한 시간만 더 걸어 갑시다. 예?”
“한 시간만 더 걸으면 어디쯤에 도달할까요?”
“아, 그러니까 한 시간쯤 더 걸으면…… 젠장! 발 당신, 말 돌리려는 거야?”
“너 참 잘 걷는다. 어떻게 배낭 네 개를 짊어지고도 말만큼이나 빠르게 걷는 거냐?”
“신부님 당신 말마따나 본인이 악마 당신의 사생아인가 보지, 뭐. 말 돌리지 말고 어서 일어나쇼!”
“삶이란 무엇일까요. 데스필드?”
“유리 당신!”
넌더리를 내던 데스필드는 결국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간단한 생각이기도 했다.
데스필드는 배낭 네 개를 짊어진 채 뒤도 돌아보지 않는 모습으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그의 등을 향해 서라는 둥, 어딜 가냐는 둥, 심지어 첫눈 에 반했다는 망발까지 일삼으며 데스필드를 붙잡으려 몸부림치던 일행은 잠시 후 슬픈 얼굴을 한 채 일어나야 했다.
데스필드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도 일행은 저마다 설마 한 시간이나 더 걷겠느냐고 생각했지만, 데스필드는 정확하게 한 시간을 더 걸어감으로써 일 행과의 약속을 지킴과 동시에 일행을 배신했다. 그래서 데스필드가 혼자서 야영터를 찾고 장작을 모으고 불을 피우고 옥수수 가루를 물에 풀어 그것 을 끓이는 동안, 일행은 증오스러워하는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는 배은망덕한 짓을 계속했다. 물이 끓을 무렵,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오스발이 질 문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겁니까? 누군가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건 우리 쪽이지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요?”
“발 당신은 그래도 체력이 괜찮은 편이군.”
오스발은 거의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율리아나와 파킨슨 신부를 돌아보곤 피식 웃었다. 뼈대가 제대로 굳기 전부터 갤리어스의 노를 저어왔던 그도 데스필드의 한없는 체력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데스필드는 모닥불의 세기를 조절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식량 때문이야. 다림에 도달할 때까지 제대로 보급이 안 되거든. 패신저를 굶겨 죽일 수는 없잖아.”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저희들의 배낭엔 모두 사흘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고, 또 제 경험으로는 이 시기에 야외에서 먹을것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신같이 숙련된 패스파인더에겐 더 쉬운 일일 텐데요?”
데스필드는 모닥불 너머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그 눈길을 침착하게 받아내며 말했다.
“알면 겁나는 이유가 있습니까?”
“쩝. 이 계절에 검은 황야를 어정거리는 건 위험하거든.”
오스발은 세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피르 족 때문입니까?”
“으음. 아피르 족 당신들의 성인식이 이 시기거든. 아피르 족의 성인식에서 소년 당신은 먹을것도 없이 칼 한 자루만 들고 혼자서 부락을 빠져나오 지. 배가 몹시 고플 거야. 본인의 패신저들을 영양가 높고 잡기도 쉬운 먹거리로 간주할 당신들이 주위를 배회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기분좋은 일은 아니지.”
오스발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데스필드는 싱긋 웃고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하지만 아피르족 당신들은 괜찮아.”
“괜찮다고요?”
“본인이 말한 대로 아피르 족 당신들은 소년이고 혼자 다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덜 위험한 건 아니지. 성인식 무렵의 아피르 족 소년 당신은 이미 능 숙한 사냥꾼이고, 사냥 대상에 인간이 포함된다는 점을 본다면 능숙한 암살자이기도 하지. 잘 드는 단검 한 자루로 아피르족 당신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하지만 그래도 혼자니까 함부로 덤비지는 못할 거야. 사실 아피르 족 당신들보다 더 큰 문제가 있지.”
오스발은 데스필드가 내미는 그릇을 받아들며 되물었다.
“더 큰 문제?”
하지만 데스필드는 옥수수죽만 퍼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스발의 성격의 여러 면 중에서 집요함에 해당하는 부분은 없었고, 그래서 오스 발은 잠자코 배를 채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식사 후, 오스발은 데스필드가 품속에서 낡은 주머니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데스필드는 주머니에서 하얀 가루 같은 것을 한 움큼 꺼내더니 야영지 주위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게 뭡니까?”
“뿌려두면 좋은 거.”
“어떻게 좋은데요?”
“잠도 잘 오고 꿈도 멋진 걸 꾸게 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땐 피부도 고와지지.”
오스발은 그냥 웃어버릴 뿐 더 이상 질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 정신을 차린 파킨슨 신부가 데스필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파킨슨 신부는 고 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뭐야, 이건. 백반이냐?”
“정신 차리셨소, 신부님 당신?”
“그 비싼 걸 왜 땅에 뿌리는 거냐?”
“뱀 때문에, 뱀 당신이 이걸 싫어하거든. 일어나셨으면 저녁 드쇼. 아, 자기 전에 꼭 다리 주물러두는 것 잊지 말고. 그리고 발이 부어버릴지도 모르 니 신발은 신은 채 주무쇼. 벗었다간 내일 아침엔 신지도 못해.”
데스필드는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를 전달한 다음, 장작들 중 실팍한 것 하나를 들어 몽둥이처럼 다듬어놓고는 나무 등걸에 기대어앉았다. 오스발 은 그가 불침번을 설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곤 공주를 깨워서 뭐라도 드시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더없이 슬픈 표정으로 일어나서는 저녁을 우적거렸다.
한밤중, 오스발은 윙윙거리는 바람 소리 속에서 깨어났다. 오스발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데스필드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얼마 못 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요.”
“많이 잤어. 이제 발 당신이 아침까지 불침번 좀 서게. 유리 당신이나 신부님 당신은 아무래도 오늘밤은 푹 재워야겠네. 발 당신의 체력을 인정한다 는 말이니 불평하진 마.”
“알겠습니다. 주무시죠.”
“으음. 그리고 삭정이 모아올 생각은 말아. 불씨는 본인이 잘 살려놨으니까.”
“그런데 왜 꼭 ‘당신’ 입니까?”
누울 자리를 대충 매만지던 데스필드는 오스발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나, 발 당신?”
“데스필드 씨는 2인칭이든 3인칭이든 전부 당신으로 일관하시는군요. 눈앞의 사람을 대상으로 그 말을 사용하실 때는 상대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목적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없는 사람까지도 그렇게 지칭하시는군요.”
“그래서 왜? 발 당신은 2인칭과 3인칭을 잘 구별하나?”
“무슨 말씀입니까?”
데스필드는 잠자리에서 돌멩이 하나를 들어 멀리 던졌다.
“지금 발 당신과 본인이 쓰고 있는 제국 표준어에는 ‘우리’라는 말이 있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예? 그거야 1인칭 복수형이잖습니까?”
“복수형 같은 소리하고 있네. 본인이 여럿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주면 알겠군. ‘우리는 그를 도와야 한다’와 ‘우리는 너를 돕겠다’의 두 문 장을 비교해 봐. 두 문장의 ‘우리’는 서로 의미가 다르지. 앞의 ‘우리’는 1인칭과 2인칭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야. 하지만 뒤의 ‘우리’는 1인칭과 3인칭 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지.”
“아, 그렇군요.”
“그 두 가지의 ‘우리’는 분명히 의미가 다른 것인데도 불구하고 제국 표준어에서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있어. 알겠나? 따라서 ‘우리’라는 말을 쓸 때 발 당신도 2인칭과 3인칭을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구별은 합니다. 말이 같을 뿐이지.”
“본인도 구별은 해. 똑같이 ‘당신’이라고 부를 뿐이지.”
오스발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껄껄거리며 말했다.
“숙제로 내줄 테니 본인의 말을 생각해 보게. 이건 발 당신이 불침번을 서는 동안 졸음을 쫓아줄 좋은 고민거리가 될 것 같군. 그럼.”
말을 마친 데스필드는 모닥불 옆에 대충 쓰러져서는 곧 잠이 들었다. 오스발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뻐근한 목을 몇 번 돌리고는 데스필드가 앉아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숲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바람 소리는 제법 드세었지만 그들이 자리잡은 야영지는 바람을 별로 타지 않았다. 노잡이의 자격으로나마 오랫동안 배를 탔기에 오스발은 별을 헤아려볼 수 있었다. 사수의 별자리 멜바골이 그 화살촉을 서녘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봄의 일출이 다가오기엔 좀 멀고 사람들 은 꿈의 산 중턱을 헤매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어든 달빛으로는 잠든 일행을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오스발은 그들의 평안한 숨소 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행을 둘러보던 오스발은 암흑 속에서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빛의 파편을 바라보던 오스발은 그것이 데스필드가 뿌려둔 백 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스발은 바다뱀 이외엔 뱀을 그다지 많이 보진 못했지만 그것이 가지는 공포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뱀 들이 저걸 싫어한단 말이지. 백반들이 잘 뿌려져 있는지 확인한 오스발은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댄 채 데스필드의 말을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