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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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3화


“노스윈드는 뭘 하고 있는 거지? 황혼을 감상하려면 방향이 잘못되었잖아.”

냄비를 젓고 있던 세실은 국자를 들어올려 키 드레이번의 뒷모습을 가리켜 보이며 질문했다. 키 드레이번은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시커먼 동쪽 하늘 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작을 모으다가 흘끔 고개를 돌린 라이온은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화내고 있는 거죠.”

“화내고 있다고?”

“바람과 파도와 해류와 간조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사내가 언덕과 강물과 숲과.. 그리고 절벽을 맞닥뜨렸을 때 느낄 기분이 달리 뭐겠습 니까?”

세실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난 사흘 동안 키 드레이번은 다림이 동남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행들에게 무조건적인 동남행을 명했고, 그래서 절벽 끄트머리에서 석양을 맞 이하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바다의 사나이였던 키는 돌아간다는 개념에 대해서는 좀 약했다. 바람이나 해류를 타게 되면 좋은 일이고, 그렇잖다면 노 잡이를 닦달하면 그만인 갤리어스는 거의 언제나 목적지를 향하는 직선 항로를 택할 수 있다. 하지만 땅에서는 고작 반 마일의 거리라도 돌아가야 할 경우가 있었다. 지금 키가 처해 있는 경우가 그러했는데, 키는 지금 몇 발자국 더 동쪽으로 전진하기 위해 내일 하루 종일 절벽을 내려가는 길을 찾아 야 할 처지에 빠져 있었다.

세실은 넓은 등 전체로 석양빛을 받고 있는 키를 바라보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세계의 모습에 대해 화를 낼 수 있는 자는 두 가지 부류밖에 없어. 대부분은 자신의 모습에 대해 화를 내지만.”

“천치와 영웅은 세계의 모습에 대해 화를 내죠.”

세실의 말을 받은 것은 율리아나 공주의 호위대장이었던 기사 슈마허였다. 세실은 슈마허에게 미소를 지어준 다음 다시 냄비를 젓는 일에 골몰했다. 하지만 슈마허는 좀 더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법사님께서는 키 드레이번이 그 중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흐음. 제국을 위해선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잖을까? 천치를 공적 제1호로 여기고 있다면 제국이 너무 불쌍하잖나, 서 슈마허.”

슈마허는 분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저런 날강도를 영웅으로 여기란 말씀이십니까?”

라이온이 지휘하는 무리에는 레보스호의 선원들이 상당수 섞여 있었기에 슈마허의 이 대담한 발언에 대한 반응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원래부 터 해적이었던 자들 중 얼마가 으르렁거렸고 원래 카밀카르의 수병이었던 자들 중 얼마가 고개를 끄덕인 정도였다. 그리고 노성을 지르거나 엄격한 명령으로 무리의 분위기를 장악할 수도 있었던 라이온은, 그러는 대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세실을 바라봄으로써 세실을 어이없게 만들고 동료 해적들을 좌절시켰다.

“슈마허의 말이 옳지 않습니까, 마법사님? 키 드레이번 같은 바다의 날강도를 영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허! 글쎄. 지금 나로선 키가 영웅인지 아닌지보다 네가 미친놈인지 아닌지가 더 궁금하군. 이크! 타겠다. 일단 이거나 좀 먹자. 천치든 영웅이든 사 람이 밥을 먹어야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화를 낼 수 없단 말이다.”

곧 레보스호의 선원들은 그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깨끗이 잊게 되었다.

다른 배의 선원들도 즐거운 저녁 식사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자유호의 선원들은 자신의 선장을 제외한 채 식사를 해도 되는지 몰라 당황해했다. 그들 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자유호의 1등 항해사인 식스는 미노 만에 남아서 함대를 지키고 있었고, 그들의 갑판장이었던 라이온은 레보스호의 선원들 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유호의 선원들은 그들과 선장 사이의 명령 계통을 두 단계나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머뭇거리며 주눅든 모습 으로 저녁 식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해적들이 저녁 식사를 끝내고 부른 배를 부여잡은 채 행복한 고양이 흉내를 낼 때까지도 키 드레이번은 절벽에 선 채 동쪽으로 펼쳐진 검은 황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유호의 조타수 칸나가 그 거대한 몸을 일으킨 것은 해적들이 지핀 모닥불빛이 절벽 위를 수놓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무도 그의 움직임을 볼 수는 없었다. 오직 그를 둘러싼 암흑 그 자신만이 칸나를 볼 수 있었다. 무수한 해적들의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 를 알아보지 못하는 가운데, 칸나는 절벽 끄트머리로 다가갔다. 그가 눈을 빛내며 이리저리 둘러볼 때였다.

“칸나, 무슨 일인가.”

칸나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 잠시 후 어둠 속에서 키 드레이번의 얼굴이 홀연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칸나는 그의 선장이 그의 바로 앞쪽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검은 코트 자락과, 무엇보다 그의 냉정함이 그를 가리고 있었다.

칸나는 잠시 뭐라고 말해야 될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나 키가 그를 구해 주었다.

“서 있지 말고 거기 앉거라.”

칸나는 앉았지만 키가 기대하던 자세는 아니었다. 천천히 무릎을 꿇은 칸나는 키 드레이번이 앉아 있던 바위의 옆에 엎드렸다. 키는 그런 칸나를 이 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칸나는 땅에 이마를 대며 말했다.

“미안하다. 선장.”

“나를 절벽으로 인도한 것 말인가?”

“그렇다. 선장.”

“나는 사람이 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지는 않는다. 칸나.”

“선장. 미안하다.”

“신경 쓰지 마. 너로서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돌아온 고향이잖은가. 그리고 나는 너에게 바닷길을 가늠하는 재주를 바라는 것이지 패스파인더의 재 능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돌아가 쉬도록.”

키는 다시 절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조금 후 키는 눈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려야 했다. 칸나는 여전히 이마를 땅바닥에 댄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너에게 가라고 명령했다. 칸나.”

“그렇게 화낼 줄 몰랐다. 선장.”

“무슨 말인가?”

“나 진짜로 잘못 이끌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이렇게 절벽 위에서 발이 묶여 있지. 됐으니까 가!”

“아니 나 진짜로 잘못 이끌었다니까, 선장.”

키는 짜증스러움을 느끼곤 고함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호통을 치는 대신, 키는 칸나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이럴 녀석이 아닌 데? 그래서 키는 칸나의 말을 되짚어보았다.

“진짜로 잘못 이끌었다?”

“그렇다.”

“의도적으로 잘못 인도했다고?”

“의도적? 그렇다.”

다음 순간 칸나는 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키 드레이번은 놀랍게도 왼손 하나만으로 칸나의 뒷덜미를 부 여잡고는 단숨에 들어올린 것이다. 자칫하면 칸나의 목이 부러질 정도의 무서운 힘이었다. 목의 고통과 숨막힘으로 컥컥거리는 칸나의 얼굴을 향해, 키는 짓씹는 듯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뭐라고 했지?”

“미, 미안. 커걱. 제발………… 놔줘!”

키는 칸나를 놔주었지만 칸나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키는 다시 한번 괴력을 발휘하여 칸나를 앞으로 던져버렸다. 땅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완전 히 뒤집혀 날아가는 진귀한 경험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칸나는 고통을 느낄 사이도 없이 일어나 앉아야 했다. 칼 뽑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부러진 오른팔 대신 왼손으로 뽑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키 드레이번이 복수를 뽑아 칸나의 목에 복수를 겨누는 데는 찰라의 시간밖에 소요되지 않았 다. 얼어붙은 칸나를 향해, 키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비수나 되는 것처럼 사나운 기세로 말했다.

“이유를 말해, 말해서 나를 납득시켜, 나를 납득시켜서 네 목숨을 구해, 당장!”

“대, 대사(Grand snake) 때문이다!”

“뭐라고?”

“대사, 대사 때문이다. 가면 죽는다. 가면 죽는다!”

“대사가 뭐야?”

“대사, 대사다. 그건 사람이 아니다. 그건, 그건.”

칸나는 당장이라도 목뼈를 끊어버릴 듯이 겨눠진 복수의 검 끝에 신경 쓰느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다른 때였다면 칸나는 이런 칼붙이에 겁먹을 사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의 목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키 드레이번이었다.

키는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천천히 복수를 거둬들였다. 칸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런 칸나를 노려보던 키는 다시 바위 위에 앉으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 가며 말해. 대사가 뭐야?”

칸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키가 자신의 분노를 더 억누르기 힘들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무렵, 칸나는 마침내 자신 이 표현하고픈 말에 해당하는 제국어를 생각해 내었다.

“인슬레이버.”

“뭐?”

“철탑의 인슬레이버. 그거다. 철탑의 인슬레이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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