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7화
데스필드는 눈가를 문지른 다음 다시 땅바닥을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이 뭘 찾는지 알지 못했지만 찾게 된다면 뭔지 알게 될 것이므로 그건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반 시간 가까이 땅을 관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데스필드는 두 손을 들기로 결심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율리아나는 멍한 얼굴로 데스필드를 마주보았다. 마치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보다 못한 파킨슨 신부가 입을 열었다.
“그가 어딘가로 갔다면, 최소한 그가 어딘가로 걸어간 발자국은 남아 있어야 하잖아.”
“날아갔나 봐.”
“뭐라고?”
“발 당신, 날아갔나 봐. 발자국이 안 보이는데. 아니면 발자국을 지우며 떠나갔든가.”
“떠나갔다고요?”
데스필드는 자신의 말 끝에 이어지듯 튀어나온 뾰족한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율리아나의 말이 계속 이어졌 다.
“발이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그렇잖다면 왜 배낭과 지팡이도 사라진 거지? 만일 발 당신의 짐이 남아 있었다면 본인은 이 사태를 아피르 족 당신의 소행으로 여겼을 거야. 성인 식을 치르기 위해 마을을 나온 아피르 족 소년 당신이 불침번을 서고 있던 발 당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낚아채어 갔다는 거지. 받아들이기 쉬운 추리 지. 하지만 그 경우라면 발 당신의 짐은 남아 있어야 돼.”
“짐도 가져갔을 수 있잖아요!”
“아피르 족 당신은 발 당신의 짐이 어느 것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율리아나는 말문이 막힌 채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직 노예 당신은 떠난 거야. 만일 발 당신이 떠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납치된 것이라도 흔적이 없으니 어떻게 찾아볼 수가 없어.”
데스필드 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빠르게 말했다.
“이제 떠나야겠군.”
“떠난다고요? 기다리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그럴 순 없어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이렇게 내팽개치듯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래요, 수색을 해봐요.”
“그러지 뭐. 그럼 유리 당신은 북쪽으로, 파킨슨 신부 당신은 남쪽으로, 본인은 동쪽으로 가지. 뭐든 발견하게 되면 대포를 쏴서 신호하고, 다른 곳 으로 갔던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10분 간격으로 계속 쏘면 되겠군. 아, 대포가 없나? 그럼 연기 신호를 보내지.”
율리아나는 입을 앙다문 채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그런 공주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잠시 후 공주는 고개를 떨구었다.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이건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성의 문제인 것 같은데.”
“필요성?”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흘끔 바라본 다음 말했다.
“가능성은 있지. 만약 본인이 유리 당신과 파킨슨 신부 당신을 내버려두고 전적으로 발 당신만 추적한다면, 며칠 안에 발 당신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경우라면 거꾸로 당신들이 미아가 된다는 말씀. 당신들은 패스파인더의 도움 없이 다림까지 갈 수 있나?”
“당신이 그를 찾을 때까지 기다린다면.
“식량은 어떻게 조달할 건가? 게다가 아피르 족 당신은? 그건 너무 어려운 선택이야, 유리 당신. 그래서 본인은 필요성을 물어본 것이고.”
“무슨 말씀이죠?”
“본인이 접수한 계약은 이러하지. 파킨슨 신부 당신과 유리 당신과 발 당신을 다림까지 안내하라. 그런데 발 당신이 없어졌지. 이 시점에서 본인은 패신저에게 묻겠어. 그 계약은 반드시 세 사람 모두를 다림까지 안내해야 되는 건가, 아니면 그 중 특정 인물만 다림까지 안내하면 되는 건가? 그리고 후자의 경우라면, 과연 본인이 다림까지 반드시 데려가야 되는 그 특정한 패신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지?”
말을 끝낸 데스필드는 율리아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율리아나는 풀죽은 얼굴이 되었다.
“짐작하면서 묻는 거죠?”
“아아. 어려울 건 없지. 신부님 당신은 유리 당신과 발 당신을 위해 길을 나선 거야. 그러니까 신부님 당신은 제외. 발 당신은 전직 노예였다더군. 역 시 제외. 남은 건 하나뿐이지. 본인의 짐작이 맞다면, 율리아나 카밀카르 공주님 당신.”
율리아나 공주는 이끼 낀 나무 등걸에 주저앉았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묵묵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의 무릎만을 내려다보았다. 나뭇가지 사 이로 새어든 봄 햇살이 그녀의 무릎에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율리아나는 두 손을 모아 천천히 들어올렸다. 마치 떨어지는 햇살을 담아올리듯. 그러 나 조금 후 율리아나는 그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신음처럼 말했다.
“……………난 그를 버리고 갈 수 없어요.”
파킨슨 신부가 공주 앞으로 다가섰다. 신부는 오른손을 들어 공주의 어깨 위에 얹었고, 그래서 공주가 소리 없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킨 슨 신부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데스필드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를 기다려주거나 찾을 여유가 없습니다.”
“신부님.”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다림의 카밀카르 상관에 도착하시는 일만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오스발은 저를 자유호에서 구출해 주었어요. 그 은혜를 잊을 수는 없어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내부의 조력이 있었기에 탈출하실 수 있었던 것이군요. 그렇다면… 예, 오스발 군을 찾아보는 일은 공주 님께서 다림에 도착하신 연후에 데스필드에게 부탁하시면 될 겁니다. 우리 같은 짐이 없어지면 데스필드는 훨씬 더 수월하게 그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렇잖은가, 데스필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데스필드는 율리아나를 바라보고는 짐짓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당연하잖수, 신부님 당신. 추적을 하려면 추적만 해야지, 보모 노릇까지 병행해서 할 수는 없어. 어중이떠중이 추적대보다야 본인이 혼자 움직이는 편이 훨씬 낫지.”
“데스필드의 말을 들으셨죠? 공주님께서 그를 찾길 원하신다면,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데스필드를 홀가분하게 만들어주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신부님?”
파킨슨 신부는 말을 꺼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율리아나는 이미 궁금해하는 얼굴로 신부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원해서 우리 곁을 떠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를 찾지 않는 것이 그를 위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율리아나는 뭐라고 말할 듯이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신부의 말은 그녀 스스로도 의심해 보고 있었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이 길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명성이나 야망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오스발이 과연 공주님과 함께 다림에 도착하여 포상을 받길 원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귀찮다는 이유로 그것을 팽개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유호의 노예였습니다. 제국의 공적 1호의 부하였다는 사실이 그를 성가시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노예에게는 주인의 죄를 물을 수 없어요. 단검에게 살인의 죄를 물을 수 없는 것처럼.”
“물론 대개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주인이 키 드레이번입니다. 하다못해 자유호의 정보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를 괴롭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카밀카르 해군이라면 오스발 군을 키 드레이번에 대한 정보원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를 윽박지르거나 고문해서라도 노스윈드 함대의 정보 를 짜내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율리아나 공주는 선량할지는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파킨슨 신부가 말하는 가정들은 그녀 스스로 이미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들이었다. 그리 고 율리아나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를 보호하겠다는 결심까지 이미 세워두었다. 그렇기에 율리아나는 신부의 말에 동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에게는 신부가 말하지 않은 가설이 있었고,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바로 그 가설이었다.
만일 그가 자유호로 돌아가버린 것이라면?
그 가설은 그녀에게 대단한 설득력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보아왔던 오스발의 모습들이 그 가설을 지지하고 있었다. 자유를 비웃기에 자유로 돌아가 려는 자유에 예속된 노예.
‘그럴듯해. 진짜 그럴 듯해.’
다림이 얼마 남지 않은 이때, 데스필드라는 훌륭한 보호자가 그녀를 안전하게 다림까지 데리고 갈 것이 확실해진 순간 오스발은 부담없이 자유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대로 다림으로 출발한다 하더라도 율리아나는 그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스발이 그녀를 버리고 간 것 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녀에게 주고서 보답도 받지 않고. 그것은 동정일까? 그 당당한 노예는 엉터리 자유를 누리는 바보 공주를 불쌍히 여겼을 뿐, 보답 같은 것은 처음부터 바라지도 않은 것일까?
파킨슨 신부는 율리아나 공주가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자 나직이 그녀를 불러보았다.
“공주님?”
그 순간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고함을 내질러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나쁜 자식! 만일 그런 것이라면, 그래서 돌아간 것이라면, 좋아. 맘 편한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노나 저어! 가짜 자유나 누리고 있는 바보 공주를 비웃으며…………… 당당한 노예로…………. 당당… 한…… 으흑!”
안타깝게도 파킨슨 신부나 데스필드는 공주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공주가 외친 말은 카밀카르와 같은 유서 깊은 몇몇 왕가들에만 남아 있을 뿐 지금은 대륙의 대부분에서 잊혀진 말이었기 때문이다. 데스필드는 당황한 나머지 액을 쫓는 손짓까지 해버렸지만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추측을 확인 해 보기로 했다.
“공주님? 그건 엘핀입니까?”
“가요!”
율리아나는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파킨슨 신부가 뭐라고 말하려 했을 때 공주는 이미 배낭까지 짊어진 채로 걸어가고 있었다. 신부는 화급히 자신의 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예. 공주님. 우리들이 다림에 도착한 다음 데스필드가 그를 찾아줄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찾지 않겠어요!”
“예? 아, 예. 공주님. 오스발이 원해서 떠난 것이라면, 그것이 더 좋겠죠. 그는 이제 한적한 곳을 찾아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노예에게 는 크나큰 행운……”
율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걸어갔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도 공주에게 말을 거는 대신 바쁘게 걸어가야 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 라보던 데스필드는 자신의 짐을 들어올렸다. 발걸음을 떼기 직전, 데스필드는 갑자기 그들의 야영지를 뒤덮고 있는 나뭇가지들의 지붕을 바라보았 다.
어지럽게 얽혀 있는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늘 조각들이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황금빛에 가까운 연초록색으로부터 가장 어두운 갈색까지를 망라하는 복잡한 천정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데스필드는 고개를 약간 가로저었다. 다음 순간 데스필드는 이미 파킨슨 신부의 뒤를 따라 재빨리 발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