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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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1권 – 4장 : 철탑의 인슬레이버 enslaver – 9화


율리아나 공주는 두 가지 행동으로 동행인 두 남자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첫째로, 그녀는 출발한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파킨슨 신부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둘째로, 그녀는 오전 내내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감으로써 데스필드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공주님 당신, 원래 잘 걸으시는 편이 아닌가 의심해 보려고 해도, 어제까지는 그렇게 걷지 않으셨잖소?”

“…..”

“공주님 당신, 원래 귀머거리이신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려고 해도, 어제까지는 말씀 잘하셨잖소?”

“………”

데스필드는 화를 내보는 일에 대해 고려해 보다가 일단 자신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율리아나 공주의 옆으로 다가선 데스필드는 그녀 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화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공주는 그의 말을 들으며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듣지 못해서 무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그로서는 무엇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지만, 깊은 생각에 빠진 얼굴로 걷고 있었다.

패스파인더들이 대개 그렇지만, 데스필드 역시 고요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직업상 여러 부류의 패신저들과 함께 긴 여정을 걷는 일이 많기 때 문이다. 봄 햇살 속에서 고요히 걷는 일은 많은 상념을 조장하는 행위였고, 그래서 데스필드는 자신의 상념들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려야 했다. 데스 필드가 파킨슨 신부에게 시비를 걸어서라도 이 못마땅한 고요함을 타파하고 말겠다는 난폭한 결심을 떠올렸을 때쯤, 율리아나는 갑자기 멈춰 섰다.

미처 대비하지 못해서 그녀를 한참이나 지나치게 되었던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는 당황해서 몸을 돌렸다. 공주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2년 전이야.”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주님?”

“2년 전. 성 요를룸의 축일 다음날. 사트로니아 국립도서관. 특수 열람실 두 번째 책장의 세 번째 칸. 흑갈색 장정. 오 왕자의 검.

당황해하고 있던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가 어렴풋이 책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쯤, 율리아나는 갑자기 입을 틀어막으며 고함 질렀다.

“철탑의 인슬레이버!”

데스필드의 입매가 굳었다. 그의 변하는 얼굴을 보며 율리아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날 속였죠? 날 속였죠? 불가피한 일이었다, 당신을 위해서였다, 배째라, 셋 중 아무것도 앞에 달지 말고, 예 아니오로만 빨리 말해요. 날 속였죠?” 데스필드는, 어울리는 일은 아니겠지만 헛웃음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예. 그리고 본인은 배를 어쩌라는 끔찍한 말은 별로 붙이고 싶지 않은걸. 그런데 아피르 족 당신이나 본인 같은 사람 말고는 대사 당신의 이야기를 아는 당신은 거의 없는데 공주님 당신이 어떻게 아는 거요?”

“열심히 취미 활동에 매진한 결과죠. 조금 전 말했듯이 2년 전인가 사트로니아 국립도서관에서 논문 하나를 읽었어요. 아마 그들 자신도 거기에 그 런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를 만큼 낡은 논문이었는데, 저자가 린타더군요. 그래서 끝까지 읽었죠. 별로 재미없는 논문이지만, 어쨌든 오 왕자의 검이 모 이지 않는 이유로 린타는 대사라는 것을 들고 있더군요. 난 황당한 이야기도 다 있구나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그런데 어젯밤, 나는 당신이 백반을 뿌 리는 모습을 봤어요. 그건 그냥 보통 뱀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건가요?”

데스필드는 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엔 아니오라고 대답해야겠군. 좋아요. 인정하지. 대사 당신이 오스발 당신을 잡아갔을 거요.”

“그럼 대사라는 것이 진짜 있는 것이군요?”

데스필드는 당황하여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자신이 속아넘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주는 그의 속을 떠보기 위해서 다 아는 척하 며 물어왔던 것이다. ‘테리얼레이드에서라면 모르는 당신이 없는 본인이, 이 풋내기 공주 당신에게 당하다니!’ 데스필드가 소리 없이 오열하는 동안 에도 율리아나 공주는 추리를 계속했다.

“그렇다면, 백반을 뿌려두었는데 어떻게 그녀는 오스발을 잡아갔을까? 잠깐. 분명히 어젯밤 우리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나무가 많은 곳에서 잠들었 죠. 그렇군요, 나무군요!”

“으으윽. 그래요. 백반을 뿌려두는 것이 좀 모자랐어. 대사 당신이 나무를 타고 올 거라는 생각을 못했단 말이야. 오늘밤부터는 나무가 없는 곳을 택 해야겠어.”

율리아나는 두 눈동자 가득히 담긴 의혹으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오늘밤부터?”

“그래요.”

“난 이제 그가 왜 사라졌는지 알아요. 대사가 잡아갔겠죠. 그리고 난 그가 어디 있는지도 알아요. 철탑에 있겠죠. 따라서 난 이제 내가 무엇을 할지 알아요. 그를 구하겠죠!”

“대사 당신에게서? 젠장. 오 왕자의 검이 하나로 모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공주님 당신이 다섯 번째의 검이라도 된다는 거요? 분명히 말해 두겠는데, 본인은 대사 당신의 신경을 긁을 일은 하나도 하지 않을 거요! 사실 본인은 오스발 당신만 잡혀간 것을 다행으로 여긴단 말이오.”

“데스필드. 제발! 찾아가서 말이라도 해봐야죠.”

“뭐라고요? 말이라니?”

“대사에게 말이에요! 대사에게 부탁해 봐요. 예?”

데스필드는 어처구니없는 투로 대답도 하지 않았고, 율리아나는 온 얼굴을 찡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거의 간절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끼여들 었다.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건지 좀 말해 줄 사람 없을까요?”

“신부님!”

율리아나는 껴안기라도 할 듯한 얼굴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짧은 순간, 정말 그러면 어쩌나 하는 생각까지 떠올렸지만, 공주 는 그를 껴안는 대신 빠른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 생각은 어떠세요?”

“에, 기초적인 것입니다만, 생각을 말하려면 먼저 생각의 재료가 있어야겠다고 생각됩니다.”

“대사 말이에요, 대사! 오스발은 대사에게 잡혀간 거예요.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를 구해야 해요. 그렇잖아요?”

파킨슨 신부는 황당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뱀에게 잡혀갔다고요? 뱀이 사람을?”

“대사라는 건, 에, 그냥 대사예요. 그게 사람인지 동물인지 반신(demigod)인지 자연이 의도한 바 없이 우연히 만들어낸 알 수 없는 피조물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그것은 사람을 잡아먹어요. 정말 커다란 뱀이 그렇듯이 몇 개월에 한 번씩. 맞죠?”

마지막의 질문은 데스필드에게 던져진 것이었다.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본인은 몰라요. 누가 대사 당신의 곁에서 식사 횟수를 체크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지만 아피르 족 당신들은 그렇다고들 하더군.”

“내가 읽은 논문에도 아피르 족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었어요. 음? 잠깐. 그럼 당신이 그렇게 서둘렀던 건?”

데스필드는 항복하는 심정으로 대사의 저번 사냥 이후로 몇 개월이 지났다고 대답해 주었다. 율리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다면 그녀는 몇 개월 더 굶어야 할 거예요. 날씬해지라죠! 철탑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공주님 당신!”

데스필드는 으르릉거리듯 외쳤다. 뭐라고 맞대꾸할 기세로 입을 열던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입을 다물곤 데스필드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조금 후 데스필드는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도대체 공주님 당신 지금 뭐하는 거슈?”

“어, 그러니까 강렬한 눈빛 보내고 있는 건데요?”

“뭐요?”

“이럴 때 내 강렬한 눈빛을 바라보던 당신이 진지한 목소리로 ‘진심인 거요?” 라고 말하면 되는데.”

“……진심인 거요? 젠장. 눈빛인지 뭔지 좀 그만 보내고 말로 하쇼! 박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눈빛인데 뭘.”

“히이잉. 어쨌든, 진심이에요.”

“그럼 본인은 이렇게 말해야 하는 건가?”

데스필드는 과장된 동작으로 팔짱을 낀 다음 공주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한 명의 노예 당신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걸 생각입니까?”

“그래요.”

“하! 재미있었소이다, 공주님 당신. 이제 다림으로 출발해도 되겠소이까?”

데스필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배낭을 추슬러올린 다음 오늘도 파킨슨 신부의 배낭과 공주의 배낭까지 메고 있는 상태였다 꼼짝 않는 공주의 곁을 지나쳐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단호하기까지 한 걸음걸이와 달리 그의 두 귀는 뒤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열 발자국 남 짓 걸어갔을까, 데스필드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기대하던 소리가 들리지 않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그를 부르지도 않았고 그의 뒤를 따라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양쪽이 다 아니라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데스필드는 조금 더 기다려보았 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데스필드는 화를 참으며 몸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줘요, 데스필드.”

데스필드는 던지기 싫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공주님 당신. 본인이 멈춰 설 것을 알았소이까?”

“어릴 때 고양이를 길러봤거든요.”

“뭐요? 고양이?”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듯이 거만하게 떠나가는 고양이일수록 반드시 뒤를 돌아보지요.”

이 대답에 파킨슨 신부는 폭소를 터뜨렸고, 데스필드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본인이 왜 고양이요?”

“처음 볼 때부터 알았는 걸요. 고양이는 전부 ‘당신’이지요. 그 주인까지도.”

율리아나 공주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고, 파킨슨 신부는 이제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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