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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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2화


“다 아림! 다. “아림이죠?”

율리아나 공주는 언덕 아래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기대감이 한껏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공주님 당신. 저 마을의 당신들은 다림의 장에다 생산품을 내다 팔고 역시 다림의 장에서 필수품을 사오지만, 그래도 이름없는 마을일 뿐이오.”

“그럼 다

아림이군요!”

“……어째서?”

“물건이 오가는 곳에선 사람도 오가는 거죠. 저 마을의 처녀는 다림의 총각이랑 결혼할 테고, 반대도 가능하겠죠. 사람이 오가면 같은 땅이에요. 왜 냐고 물을 거죠? 땅 이름은 사람이 붙이는 거니까.”

데스필드는 다시 격파되었다고 생각했고, 이젠 슬슬 익숙해진다고도 느꼈다.

“흐음.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 저 마을에 들렀다가 마을의 당신들이 다림에 장보러 갈 때 동행할까 생각중이오. 여의치 않다면 당신들은 저곳에서 쉬고 본인만 다림으로 가도 되고, 공주님 당신께서 화한이라도 써주시면 본인이 다림의 카밀카르 상관에 전달하지. 그럼 상관의 당신들이 육두마차 라도 보내주겠지? 여행의 마지막은 편하게. 데스필드의 규칙 8조 2항쯤 된다고 해둡시다.”

“와아, 좋아요. 찬성!”

오스발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찬성을 표시했고,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과 율리아나 공주 모두의 찬성은 데스필드에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그들이 결사반대했다 하더라도 결국 데스필드의 의지대로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 사실을 말 하는 대신 늦봄의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언덕길에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봄꽃들은 꽃향기와 떨어져 부패하기 시작한 꽃잎들의 냄새가 뒤섞인 그 말할 수 없이 퇴폐적인 향취를 뿜어대고 있었다. 철탑의 해변을 벗어난 이후 계속되는 이 화창한 날씨는 그들의 여행길 마지막에 베풀어지는 축복 같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콧노래라도 나올 것 같은 기분에 당황해했지만 그 기분을 마음껏 즐겼다. 봄은 스스로에 만취하여 게으른 옹알이를 하고 있었고 일행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만 춘의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저 언덕 중간의 돌무더기에 앉아 있는 병사들의 싱그러운 얼굴에서도 봄의 아름다움이…………….

“멈춰!”

율리아나는 생각했다. 어쩌자고 저 얼굴들이 싱그러워 보인다고 생각했을까? 내가 봄에 취했나 봐. 일행은 일단 그 명령에 따라 멈춰 서며 어이없어 하는 눈으로 병사들을 관찰했다.

‘6명의 병사들이다.'(오스발)

6명의 지저분하고 무례한 형제들이다.'(파킨슨 신부)

‘정찰대 정도로 여겨지는 6명의 잔뜩 긴장한 병사들이다.'(율리아나 카밀카르)

‘다벨 산 강철로 생각되지만 그 형식은 록소나 형식의 가벼운 모습으로 상당히 전략적 제휴가 된 복장을 하고 있고 숏 소드로 무장한 5명의 억센 병 사당신들과, 복장은 같지만 롱 소드로 무장하고 5명의 부하들에게 자신이 지휘관임을 인식시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 는, 그러나 약한 턱이 의외로 그 소심한 성격을 나타내어주고 있으며, 봄기운 속에 졸고 있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난 우리들을 미리 발견하지 못해서 약간 창피해하고 화가 나 있는 1명의 하사관급 병사 당신이다.'(데스필드)

이상하다. 왜 본인이 공주님 당신에게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데스필드는 알 수 없는 승리감에 의아해하며 자신이 하사관으로 지목한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들 왜 본인을 멈춰 세우는 거요?”

“신분을 밝히시오!”

그 하사관은 데스필드가 예측한 대로 외쳤다. 그래서 데스필드는 심술궂게 대답할 수 있었다.

“왜?”

이 대답은 하사관에게는 충격이었고 그래서 그는 잠시 가련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데스필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입에선 거친 말이 쏟아져나왔다.

“까라면 까! 자식아!”

흐음. 소심한 성격 맞군. 그리고 그 소심한 하사관은 데스필드가 미처 ‘까’보일 가짜 정체를 생각해 내기도 전에 말을 계속했다.

“저 마을 주민인가? 어, 그런데 여행자의 차림을 하고 있군. 안됐지만 저 마을은 관광지가 아냐. 그런데 어디서 오는 여행자지? 아피르 족은 아닐 테 고, 설마 테리얼레이드인가? 거기서 여기까지 그 인원으로 아피르 족을 피해 온 건가? 응?”

율리아나 공주는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하사관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저 병사는 린타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 봐.ᅳ 상대에게 말을 많이 하게 할수 록 좋다. 그것이 진실이면 나에게 유리하고, 그것이 거짓이라도 거짓을 말하는 상대는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어쨌든 나는 대답을 생각할 시간을 버니 까 역시 유리하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로 생각되는 다섯 명의 병사들도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지휘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떠들던 하 사관은 그제서야 모든 사람들이 피아 구분 없이 그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데스필드는 턱을 좀 긁고 하품까지 좀 한 다음 말했다.

“당신 뭐야?”

“이 자식, 까라고 했잖아!”

“당신이 다 말하던걸, 뭐.”

기어코 병사들 사이에서 키들거림이 터져나왔다. 하사관은 서늘한 시선으로 그의 부하들을 바라본 다음 다시 윽박지를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때 하사관의 눈길이 율리아나의 얼굴에 멎었다.

오, 맙소사. 나의 연애 생활이 이렇게 파탄나는구나.

소심한 하사관은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율리아나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자기야, 용서해 줘. 나 이제 다시는 우리 자기를 안기 어려 우리. 아, 참. 나에겐 자기가 없지? 그리고 키들거리던 병사들 역시 그의 지휘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자신의 웃음 소리를 삼키고는 사레가 들려 캑캑 거렸다. 율리아나 공주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곤 그저 난처해하는 미소를 지었지만, 오스발과 파킨슨 신부는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자마자 잔뜩 긴 장했다. 오스발은 당연하거니와 바람의 도시의 신부인 파킨슨 역시 이 외진 곳에서 만난 병사들을 그렇게 신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그냥 웃었다. 그는 소심한 사내가 무리의 지휘자가 되었을 땐 어떻게 바뀌는지 잘 알고 있는 노련한 패스파인더였다. ‘그런 당신 은.’데스필드는 동정심까지 담아 하사관을 바라보았다. ‘스스로도 깔려 죽을 만큼의 도덕을 머리 위에 얹고 다니지.’ 과연 하사관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녀석들, 조용히! 레이디를 무례하게 흘끔거리지 마라! 다벨군의 체통을 생각하도록.”

“다벨군?”

“본관은 다벨 육군 장거리 순찰대(longranger) 소속의 백부장(Centurion) 도나텔이오.”

어쭈, 의외군. 센츄리온이라고? 데스필드는 잠시 다벨 공국의 병사들이 이 먼 다림 근방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그들이 롱레인저라면 그럴 수 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롱레인저라는 이 독특한 편제는 골디란 강 하구로부터 다벨 공국까지 이어지는 검은 황야를 순찰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생겨난 부대였다. 어느 국가 의 땅도 아닌 이 땅은 사람 먹는 아피르 족의 땅이자 도망친 범죄자들이나 강도단의 은거지가 되므로 그 땅에 인접한 다벨 공국으로서는 경계가 필요 한 땅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패스파인더 데스필드요. 그런데 롱레인저라도 너무 멀리까지 온 거 아뇨?”

“군인은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오. 우리가 이곳을 감시하는 이유 같은 건 알 바 아니고 안다 해도 당신들이 상관할 바 아니잖소.”

역시 백부장님 당신은 말이 많아. 그러니까 당신 말은 다벨 육군이 당신들에게 이 땅을 정찰하라고 명령했다는 뜻이잖아. 데스필드는 결론을 내렸 다. 도나텔 당신이 군단장까지 올라가면 본인은 해가 두 개 뜬다 해도 놀라지 않겠어.

“그럼 당신들에겐 본인이나 본인의 패신저들을 멈춰 세울 권한 같은 것은 없는 것이군.”

“잠깐. 패스파인더는 항상 급한 목적을 가진 패신저를 인도하지. 난 당신 패신저들의 용무를 알아야겠는데. 그건 이 황야를 경계하는 우리들의 임 무……!”

혹시라도 저 아름다운 레이디의 이름이라도 들을까 하는 욕심에서 괜한 트집을 잡아보았던 도나텔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의 눈에 파킨슨 신부 의 허리에 매달린 것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런 젠장! 고위 성직자인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렸나. 도나텔이 자신의 말에 대해 내심 후회하 고 있을 때 데스필드가 말했다.

“당신들의 임무야 이해하겠지만 모든 여행자들이 자신의 별에 대해 설명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닐걸. 그래도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곳은 다벨의 영토가 아니고 또한 록소나 협정에 의거한 장거리 순찰대의 치안령으로 생각해 주기에도 너무 멀다는 사실을 지적해 드리지. 비키쇼.”

데스필드가 록소나 협정을 들고 나오자 도나텔은 확연히 드러나는 표정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데스필드는 언젠가 모종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망 명 — 테리얼레이드로의 도망도 망명이라면 — 을 결심한 한 록소나인을 인도하며 록소나 협정에 대해 주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도나텔 백부장 은 데스필드가 록소나 협정에 대해 그런 게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데스필드는 롱레인저들이 옆으로 비켜서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고 다른 사람들도 그 뒤를 따랐다. 정찰대원들은 주춤거 리며 물러났다. 일행들이 정찰대원의 곁을 거의 지나쳤을 무렵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도나텔 백부장은 공주의 시선을 느끼곤 경악했다. 공주는 젊은 백부장에게 ‘제 일행인 패스파인더가 조금 무례했었죠?”라는 내용의 시선을 보내었고, 도나텔은 그 시선을 ‘나는 오늘밤 장미 한 송이를 갖고 싶네요. 당신을 바라볼 때의 내 마음처럼 붉은 장미를. 오늘밤 그 입술에 장미를 물고 내 방 발코니로 올라와주지 않겠어요?’ 어쩌고 하는 말로 해석해 내었다. 도나텔 백부장이 그녀의 발코니가 어디 있는지는커녕 그녀의 이름조차도 모른 다는 사실을 간신히 떠올렸을 때 공주 일행은 이미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도나텔 백부장은 그들이 산굽이를 돌아 숲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한 시선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태연하게 걸어가던 데스필드는 다벨군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자 갑자기 멈춰 섰다. 일행들은 멈춰 선 그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데스필드는 오스발의 어깨를 움켜쥐며 말했다.

“계속 걸어가도록 하게. 본인………… 가야 할 일이 있군. 빌렸던 것을 돌려줘야 할 시간이야.”

“예?”

“본인이 대지로부터 받은 것, 이제 대지 당신께 돌려주려 하네.”

·쾌변 되세요.”

데스필드는 히죽 웃은 다음 허리를 어정쩡하게 편 모습으로 숲속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나머지 일행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멀어지자 데스필드는 곧 허리를 폈다.

다림 근교의 이곳은 다벨로부터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야, 도나텔 당신. 차라리 팔라레온에 가깝지. 본인은 당신들이 이곳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해.

자칭 최고의 패스파인더는 자신의 패스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일광이 흩어지다 희미해지는 자리 자리마다 뻗은 패스파인더의 길을 따라 데스필드는 걸어갔다. 그의 뒤로 그의 소리와 모습과 냄새는 모두 흩어졌 고 결과적으로 그가 다벨의 롱레인저 주위에 나타났을 땐 그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서 롱레인저들은 한가롭게 잡담을 나 눴다. 데스필드가 첫 번째로 포착한 것은 한 롱레인저의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거 정말 삼삼하던데. 쩝쩝.”

롱레인저들은 왁자한 웃음 소리를 터뜨렸다. 도나텔 백부장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부하들을 바라보았지만 롱레인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음의 끄트머리에서 한 험상궂은 대원이 마을 방향을 흘끔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지.”

웃음 소리는 낮아지고, 잔혹해졌다. 롱레인저들은 말없이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히죽거렸다. 그때 도나텔이 고함을 빽 질렀다.

“이 못된 야만인 놈들! 입에 담지 못할 말이 없구나. 네놈들이 군인이냐, 강도단이냐?”

뒤쪽에 가까워. 데스필드는 도나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목양견이 양을 닮는 거나 마찬가지지. 아피르 족이나 도망자, 강도단 따위의 당신들을 상대하는 롱레인저 당신은 그런 당신들과 비슷해지는 것이 당연하잖아. 하지만 롱레인저들은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의미심장한 말 을 했던 대원이 자신의 부츠 뒷굽으로 땅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보쇼, 선생.”

“도나텔 백부장님이라고 불러, 멍청아!”

롱레인저는 코방귀를 뀌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 뭘 그래. 그리고 날 멍청이라고 부르지 마.”

도나텔 백부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롱레인저를 바라보았다. 롱레인저는 이 황야 지대에서 단련된 사나운 눈길로 도나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기 가짜 신분을 진짜로 착각하지 마. 넌 롱레인저가 아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리한테 상관이나 된 것처럼 으스대면 위험할 텐데, 선생.” 이것을 군대의 명물인 신참 장교 길들이기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데스필드는 자신의 생각을 약간 바꿨다. 롱레인저는 ‘선생’이니 ‘가짜 신분’이니 하 는 말을 했다. 군인이 아니란 말이지? 데스필드는 롱레인저도 아니고 더군다나 군인도 아닌 자를 지휘관으로 모시게 되어 심통이 난 롱레인저를 이해 하게 되었다. 하지만 도나텔의 경우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창백한 얼굴로 롱레인저를 쏘아보았다.

롱레인저는 계속해서 자신은 이 외딴 곳까지 오게 된 이 거지 같은 임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롱레인저도 아닌 댁을 모시고 오는 임무 라니, 전부 다 뒤엎고 싶은 심정이다는 내용의 말을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 끄트머리에 당신의 실종을 설명하는 데는 보고서 한 장이면 충분하다는 내용의 협박을 덧붙였다. ‘아피르 족에게 먹혔음.’ 시체에 대해 구질구질하게 설명하고 자시고 할 필요도 없는, 정말 단순하고 그럴 듯한 보고서이지 않은가?

다른 롱레인저들의 미소가 흉악하게 바뀌는 가운데 도나텔의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소심한 사내가 분노했을 때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데스필드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도나텔의 반응을 기다렸다. 도나텔은 애써 차분함을 가장하는 것이 역력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대장이나 된 듯이 우쭐거리지 말란 말이야. 너희 도시놈들 눈엔 롱레인저가 산이나 들판을 싸돌아다니는 들개 정도로 보이는 모양이지만, 우리 눈 엔 너희들이 울타리 속에서 똥물 뒤집어쓴 채 뒹굴고 있는 돼지로 보여. 물론 그런 돼지는 잡아 먹히기 전까진 자기가 황제라도 된 양 우쭐거리겠지. 소나 말처럼 일 시키지도 않고 때 되면 밥 가져다주니까. 하지만 돼지는 돼지야. 우리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두 눈을 부릅뜬 채 롱레인저를 쏘아보던 도나텔이 입을 열었다.

“고맙기 짝이 없는 조언이군.”

도나텔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데스필드는 문득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소심한 사내가 화를 내게 되면 정도라는 것이 없다. 반드시 누 군가가 다치게 될 것이고, 그건 당사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도나텔은 이제 몸 전체를 떨며 말했다.

“이 나도, 그리고 잘나신 롱레인저도 아닌 내가 너희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실도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들어봐. 이 들개놈아. 나 또한 너희들 따위를 끌고 다녀야 된다는 사실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아! 좋아. 정리할 건 정리하자고. 덤벼봐, 바크. 결투다!”

도나텔의 말에 분노하던 롱레인저들은 마지막의 ‘결투’라는 말에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흥분하면 곧장 결투니 어쩌니 외치는 작자들의 평균 수명은 길 수 없다. 데스필드는 성격이 모나긴 했어도 사람 자체는 괜찮은 롱레인저들이 그를 대충 교육시켜 주 길 바라기로 하곤 몸을 돌렸다. 설마 죽이지야 않겠지. 저런 막간극 따위나 공연하고 있을 거라면 뭔가 알아낼 기회는 없겠군.

몸을 돌려 걸어가던 데스필드의 귀에 바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심이쇼, 휘리 선생?”

데스필드의 걸음이 멈춰졌다. 휘리라고?

데스필드는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어디서 저 이름을 들었더라? 확인해 봐야 되는 건가. 데스필드는 할 수 없이 다시 몸을 돌려 롱레인저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도나텔 – 휘리는 이미 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물론 진심이다. 위아래도 모르고 앞뒤도 없는 네녀석의 천박한 심보가 어디 있는지 말해. 그 부분을 도려내고 거기에 군인 정신을 집어넣어 줄 테 니까.”

“썅.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데, 좋아. 돌아가서 뭐라고……….”

“절대 비밀로 해주지. 덤벼!”

데스필드가 바라보는 가운데 바크는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마치 난처하다는 듯이, 하지만 심술궂음도 한껏 드러나는 얼굴로 숏 소드를 뽑아들었다. 흐음,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양대 구경거리 중 하나인 싸움 구경이라. 좋아, 감상해 줄까. 다른 롱레인저들도 데스필드의 생각에 동감인지 왁자하 게 떠들며 옆으로 물러나 두 사람에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데스필드는 아예 구경하기 편한 자세로 앉아서 둘의 결투를 기다렸다.

한가로운 심정으로 결투를 기다리던 데스필드의 유일한 걱정거리라면, 그의 패신저들이 자신에게 변비 증세가 있다고 오해해 버리는 것이었다. 바크는 히죽 웃으며 숏 소드를 몇 번 휘둘렀다. 그 사나운 기세에 휘리는 몇 번이나 움찔거렸다. 하지만 휘리는 검 끝을 바크의 목에 겨냥한 채 제자 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바크는 제법이라는 듯이 웃고는 앞으로 한 발 걸어갔다. 짧고 단순한 동작이지만 휘리의 검 끝은 흐트러졌고, 그 순 간 바크는 숏 소드를 휘둘러 휘리의 검을 세차게 쳐내었다.

흔들린 순간에 친 것이라 휘리가 다시 자세를 바로잡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던 데스필드는 당혹했다. 휘리는 롱 소드를 눕혔다가 손 목을 강하게 비틀며 찌른 것이다. 어쨌든 데스필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본 것이 아니라 확실친 않지만.

바크는 튕겨나간 오른손을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목젖에 와닿아 있는 칼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지만 그의 퀭한 두 눈이 그의 심정을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휘리는 그 눈을 향해 말했다.

“여긴가?”

“뭐?”

“네녀석의 천박함이 있는 곳이 여긴가? 잘라줄까?”

“이, 썅!”

바크는 욕설을 쏟아내며 숏 소드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번번히 휘리의 화려한 방어에 휘말려들어 분쇄되었다. 데스필드는 방어가 저토록 근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본인의 생각이 잘못되었군. 휘리 당신은 최소한 칼 맞아서 명 끊길 일은 없을 것 같군. 그런데 저렇게 수 준 높은 검술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조금 전엔 그렇게 떤 거지?

바크와 휘리의 칼싸움을 보고 있던 데스필드는 어렴풋이 자신의 의문에 대한 대답을 떠올렸다.

저 소심한 당신은 싸우게 되는 상황은 무서워하지만, 실력이 있기 때문에 싸움 그 자체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말이 맞나? 데스필 드의 무언의 질문에 대해 휘리는 화려한 검술로써 대답했다. 휘리의 칼몸에 손목 급소를 맞은 바크는 검을 거의 놓칠 뻔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제기랄!”

칼날로 맞았다면 손목이 잘렸을지도 모른다. 바크는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수단이 거의 고갈된 듯 ‘잠시 물러나 사태를 관망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크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자마자 휘리는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바크의 눈이 휘둥그레진 찰라, 세차게 뻗어나간 휘리 의 롱 소드는 바크의 손등을 찢어놓았다. 데스필드는 무심코 박수를 칠 뻔했다.

“으윽!”

바크는 칼을 떨어뜨리고는 손등을 움켜쥐었다. 롱 소드를 휘둘러 검신에 묻은 피를 뿌린 휘리는 뒤로 조금 물러났다. 휘리는 바크가 다시 검을 쥐길 기다리는 모습이었지만, 바크는 손등을 움켜쥔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휘리는 그제서야 한숨을 내쉬며 롱 소드를 다시 검집에 꽂았다. 그의 목소리 는 – 데스필드는 소리 없이 신음을 토했다 다시 떨리고 있었다.

“교훈이 되길 바라. 바크.”

그리고 휘리는 몸을 돌렸다.

데스필드는 혀를 찼다. 저 얼간이 당신, 등을 보여? 죽으려고 작정했나? 구경하고 있던 롱레인저들은 물론이거니와 바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모습이었다. 소리 없이 검을 집어올린 바크는 그것을 검집에 넣는 대신 앞으로 뻗었다. 그러나 그때 데스필드는 또다시 자신의 생각을 바꿔야 했다.

바크는 볼 수 없었지만, 데스필드는 휘리의 입매가 조금 올라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런, 등뒤에서 덤비길 기다리는 건가? 그래서 바크 당신을 더 비참하게 해주겠다고? 하긴, 그런 꼴을 당하면 다시는 덤벼들 마음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

과연 바크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을 때, “개자식, 죽인다!” 휘리는 부드럽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허리를 뒤틀며 롱 소드를 휘둘렀다. 그리고 충분 히 고려된 그 검은 날아오는 바크의 숏 소드의 궤적에 수렴되고 있었다. 비록 데스필드는 풋내기 소행이라고 비웃었지만 휘리가 패기만만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어리석은 놈!”

그때 아무도 원하지 않던, 적어도 바크는 절대로 원했을 리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

풀뿌리에라도 걸린 것인지 아니면 조금 전 흘린 자신의 피를 밟고 미끄러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바크의 발디딤이 갑자기 흔들렸다. 느긋한 심정 으로 검을 휘두르던 휘리는 그래서 그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휘리의 롱 소드는 빗나간 바크의 숏 소드를 다시 빗나갔고, 바크는 이제 자신의 검이 아니라 그 목을 휘리의 검에 던지게 되었다. 최후의 순간 바크는 찢어질 듯 벌어진 두 눈으로 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휘리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잔인한 감각은 손끝에서부터 바크의 죽음을 확실히 전달해 오고 있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한 휘리는 자신의 롱 소드에 목이 꿰인 채 쓰러지지도 못하는 바크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바크는 자신의 피로 만들어진 진홍빛 웅덩이 속에 무릎을 꿇은 채 푸 르르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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