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5장 : Royal blood’s gift – 6화
산장 밖으로 나온 휘리는 홀스터에서 핸드건을 잡아뽑는 연습을 하고 있는 파킨슨 신부와, 그리고 그때마다 죽을 힘을 다해 그 포구 앞에서 벗어나 려 애쓰고 있는 오스발과 데스필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휘리가 보기에 파킨슨 신부는 핸드건을 빠르게 뽑는 연습을 하는 척하며 고의적으로 오스발, 혹은 데스필드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고 데 스필드와 오스발도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이리저리 몸을 날리거나 있지도 않은 꼬리가 빠질까 겁나는 속도로 달리고 있느라 바 빠서 제자리에 멈춰서 신부에게 항의를 할 겨를은 없는 듯했다. 지금도 데스필드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며 외치고 있었다.
“우, 썅! 그 연습인가 뭔가 좀 그만할 수 없으셔!”
“신부님, 신부님! 부디 연습은 저기 산장 뒤편에서라도………… 으아악!”
“이 자식들아, 너희들을 맞출 일은 없다고 했잖아! 왜 날 못 믿어!”
“10로드는 되는 목표물도 맞추지 못한 포수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으란 거요!”
“신부님을 믿습니다만, 그 핸드건은 믿을 수가 없군요!”
잠시 현관에 서서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던 휘리는 파킨슨 신부의 말대로 그에게 인사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미친 듯이 달리고 있던 두 사내는 자기들 사이로 차분히 걸어가는 휘리를 보고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휘리는 신부의 말대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렸 다.
“저 핸드건은 장전이 안 되어 있습니다.”
데스필드와 오스발의 필사의 도주가 멎는 순간 파킨슨 신부의 손도 딱 멈췄다. 오스발은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고, 데스필드는 온몸을 떨며 분노 어린 목소리로 으르릉거렸다.
“신…… 부…… 님…… 당…… 신!”
“그래서 말했잖아? 너희들을 맞출 일은 없다고. 신부가 설마 거짓말 할까. 아하! 날씨 한번 좋다. 흠흠.”
뒷짐을 지며 헛기침을 하는 신부를 보며 데스필드는 방금 생니를 뽑힌 사람 같은 얼굴이 되었다. 곧이어 데스필드는 자신의 옷깃을 잡아뜯으며 발광 하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젠 신부님 당신까지도 본인을 격파해! 으아아!”
데스필드의 절규는 그 자신만 이해하는 말이었기에 당연하게도 누구의 동정도 끌어들이지 못했다. 휘리는 절규하는 데스필드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 스발에게 잠시 눈인사를 보내었다.
“여행 즐거우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아름다운 레이디를 그분의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땅에 주저앉았던 오스발이 그 인사에 답례하기 위해 일어났을 때 휘리는 이미 언덕을 내려가고 있었다. 휘리의 뒷모습을 보던 오스발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밝아보이는군요.”
발광하고 있던 데스필드가 고개를 돌렸다.
“응? 본인 말인가?”
잠시 딸꾹질을 하던 오스발은 간신히 손을 들어 오솔길 저편으로 희미해지는 휘리의 뒷모습을 가리켜보였다.
“아뇨….. 저 사람 말입니다. 조금 전 신부님과 함께 고해하러 들어갔을 때는 퍽이나 어두운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잖군요. 아마도 고해를 끝내 어 마음이 후련해진 모양이죠.”
“잠깐. 그러고 보니 산장 안에 공주님 당신이 계셨지?”
“예. 주무시고 계셨습니다만.”
순간 데스필드의 눈에서 야릇한 빛이 흘렀다.
“어라? 저 당신, 혹시 잠자는 공주님 당신의 입술을 시음해 봤다거나 한 건 아닐까? 아니면 당신의 두 팔로 공주님 당신의 칫수를 재어봤다거나 혹 은 그 이상의…..”
“서, 설마요?”
“아냐. 그렇잖다면 밝아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분명히 아름다운 레이디 어쩌고 했으렷다? 깡패나 다름없는 신부님 당신이 저 친구 당신에게 훌 륭한 목자 노릇을 해줬다고는 죽어도 믿을 수 없고, 그러니까 저 당신이 밝아졌다면 그건…… 응? 왜 그렇게 손짓을 하는 거야? 뒤? 뒤가 어째…………… 으 윽!”
일격으로 데스필드를 쓰러뜨린 파킨슨 신부는 근엄한 얼굴로 주먹을 매만지며 돌아섰다. ‘저 가련한 이가 희망을 얻었다면, 그건 물론 여기 있는 나 의 덕분이리라!’라고 외치는 듯한 신부의 뒷모습을 보며 오스발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나 땅에 엎어져 있던 데스필드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두 팔 위에 턱을 괸 데스필드는 심술 사나운 눈으로 신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헤. 죽어도 못 믿어.”
“하하. 데스필드.”
“분명히 공주님 당신이야. 흐음. 어쩌면 저 친구 당신은 고귀한 피의 선물이라도 받았나 보지. 쯧쯧. 그건 위험한 건데.”
물론 데스필드는 자신이 말한 ‘위험’이 실제로 발생할 위험에 반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밝은 기분에 휩싸여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 휘리는 어렴풋이나마 그 위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러나 휘리는 당장은 그 위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다고 거듭 되뇌이고 있는 것은 그의 입술에 와닿았던 율리아나의 감촉이었다.
“우하하하하!”
다람쥐나 지빠귀 등이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들은 그날 종일토록 오솔길을 걸어간 그 미친 인간에 대한 토론을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인간은 왜 나무를 끌어안고 웃어댄 걸까?’ ‘나무를 사랑하는 거야.’ ‘그럴까. 그럼 그 인간은 왜 풀잎을 뜯어 머리 위로 날리곤 했던 거지?’ ‘물론, 풀잎을 미워하 는 거야.’
다람쥐나 지빠귀 등에게 토론거리를 던져주며 걸어가던 휘리가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것은 오솔길 저편으로 마을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 작했을 무렵이었다. 휘리는 내려가면서 웃음을 멈출 것인지 웃음이 멈추고 나서 내려갈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그냥 나무 아래에 주저앉았다.
길가의 나무들이 만들고 있는 회랑의 천장에서 광선이 되어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보며 휘리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정돈되는 호흡 속 에서 휘리는 자신이 들었던 말을 되새겨보았다.
‘모든 권위가 아버지를 힐난한다 해서 당신마저도 아버지를 힐난하고 그 아버지의 종속물인 자신을 힐난하지는 마세요. 당신은 권위의 종속물도 아 니고 아버지의 종속물도 아니에요.’
그것은 해방 선언이었다.
데스필드의 판단은 정확했다. 휘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재능을 펼쳐보이는 상황은 무서워하고 꺼려 왔다. 그러나 공주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는 이미 휘리를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있었다. 이제 휘리는 제국의 종속물로서 그의 아버지를 비난할 필요도, 교회의 종속물로서 그 자 신을 스스로를 얽맬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죄의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를 필요가 없었다.
‘당신이 추구하고픈 선을 추구하세요.’
상쾌함까지도 느껴졌다. 나는 무엇의 종속물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뿐. 얼마나 단순한가. 그래. 난 할 수 있고 하고 싶 다. 진짜 한번 해보고 싶었다.
휘리는 그 본성부터가 탤런트였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재능을 마음껏 보여주는 그 자체에 항상 매료되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 었다. 그가 다벨군의 촉탁을 받아들여 롱레인저들을 이끌고 이 남쪽 땅까지 내려온 것도 기실 그의 성격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휘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힘껏 외쳤다.
“제기랄, 이건 최고의 공연이라고. 스테이지는 대륙 전체다!”
휘리의 고함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오솔길 위로 날아올랐다. 태어난 이후로부터 가져온 죄의식의 종속에서 벗어난 사내의 외침은 강렬함을 넘어서 처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공연이 끝나면 당신을 찾아가겠습니다. 내가 만나본 가장 지혜로운 조언자인 유리 양을.
물론 휘리는 바로 그 순간 율리아나가 오스발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붙잡았어야죠! 우아아. 앙. 난 바보야. 그 유명한 가수를 만났는데 노래 한 번도 듣지 않고 보냈어. 난 바보야!’ 등으로 외치며 휘리의 말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야 없었다. 굳건한 동작으로 오솔길을 내려가는 그의 얼굴은 차가운 희열에 물들어 불길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덕과 언덕 너머, 멀리 다림 시의 불빛이 가물거리는 숲속에서, 노스윈드 선단의 두캉가 선장은 뒤뚱거리며 일어났다.
두캉가 선장은 먼저 코를 한번 씰룩인 다음 횃불 하나를 들어올렸다. 해적들이 횃불에 비친 320파운드의 거구를 보고 비명을 질러대자, “으악! 괴물 이다!” “아니, 내가 보기엔 두캉가 선장님인데. 뭐 특별히 다를 바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두캉가는 다시 한번 코를 씰룩인 다음 파리를 쫓는 것처럼 손을 휘휘 휘저어보였다. 바다사자호의 선원들은 사납게 낄낄거렸다.
선원들의 웃음을 뒤로 한 채 두캉가는 뒤뚱거리며 언덕 정상으로 걸어갔다. 어떤 각도에서 그의 동작은 마치 걸음마를 덜 배운 아기가 아장아장 걷 는 것처럼 보이는데, 본인은 품위 있게 걷느라 그렇게 보인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해적들은 모두 안짱다리에 통통한 팔다리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고 확신을 담아 믿고 있었다. 두캉가가 정상 가까이에 다가섰을 때 횃불빛 저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시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그렇네. 키 선장.”
“그렇다면 위험합니다. 돌아가십시오. 두캉가 선장.”
두캉가는 돌아가는 대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고서야 두캉가 선장은 자신이 횃불을 가져왔음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쩔쩔매다가 그냥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키의 손이 나타나 그 횃불을 살짝 뺏었다.
“그것을 들고 앉아 있을 생각이었습니까.”
두캉가는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자네도 앉게. 이야기 좀 하세.”
키는 잠자코 큼직한 돌멩이들을 모은 다음 그 사이에 횃불을 꽂아넣고는 바닥에 앉았다. 두캉가는 손을 비비며 말문을 열었다.
“이 꼭대기에서 뭐하고 있었나?”
“다림을 보고 있었습니다.”
키의 목소리는 공허했고 그 때문에 두캉가는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흐음. 흠. 아무래도 놓친 것 같지?”
“예. 그들은 다림에 들어간 듯합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키는 대화의 단락을 이상스럽게 여기며 두캉가를 바라보았고 두캉가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두캉가는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봄인데도 꽤 춥군. 나는 이런 계절엔 데샨 카라돔 해를 좋아한다네. 물이 정말 멋있지.”
“항구도 아름답지요. 카라돔 항은 목하 황금항이라 할 만하지요.”
“그렇지, 그렇지. 황금항이라. 다른 때도 물론 좋지만 너무 더워지기 전 지금의 카라돔 항은 최고지. 항구에 배를 정박시키고 해먹에라도 누워 밤바 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면, 난 때론 내가 남자가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럴 땐 여자도 싫다는 말이야. 옷을 입었건 벗었건 간에.”
말을 끝낸 두캉가는 크게 웃었고 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웃음의 끝에서 두캉가는 코를 한번 씰룩였다.
“데샨카라돔에 가고 싶군.”
“오스………… 공주만 잡으면 돌아가겠습니다.”
두캉가는 키가 꺼내려다가 삼킨 말에 주의했지만 그것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미 놓친 것 아니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다만 두캉가는 이 렇게 물었다.
“공주를 잡아야 될 이유는 뭔가?”
“공주는 카밀카르와 필마온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건 전에 들었네. 그리고 자넨 말하지 않았지만, 이 늙다리 해적은 그녀가 검독수리의 성채에 들어가는 순간 인질이 된다는 것 정도도 짐작할 수 는 있네.”
키는 해묵은 해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빨리 죽을수록 좋습니다. 살아 있는 공주는 골칫거리입니다. 그녀가 살아서 카밀카르로 돌아가면 카밀카르와 필마온의 제휴가 다시 시작됩 니다. 그녀가 카밀카르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그녀가 살아 있을 가능성만 있다면 언제든 카밀카르는 필마온으로 협조 요청서를 소나기처럼 쏘아보낼 수 있습니다. 율리아나 공주는 명명백백한 상황에서 확실히 사망해야 합니다.”
“흐음. 복수는 어떻게 되나? 아, 자네의 검이 아니라 발도 로네스 경의 복수 말일세. 필마온은 신부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내세울 수도 있잖은가.”
“그 경우 발도 로네스는 교회 기사단인 필마온 기사단을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기사단은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개인적인 복수에 이용한다면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자네가 말했듯이 성사의 수호를 위해서라면?”
“공주가 죽으면 불가능합니다. 율리아나 공주가 죽은 이후에 필마온이 움직인다면 그건 누가 보더라도 성사의 수호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교회는 복수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일 교회가 복수를 용납했다면 선교사를 죽였던 이교도나 야만인들은 모두 보복을 당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 습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만이 성사의 수호라는 명분이 가능합니다.”
두캉가는 코를 씰룩인 다음 입을 다물고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동안 키는 땅바닥에 세워놓은 횃불을 응시하고 있었 다. 두캉가는 마침내 불평하듯이 말했다.
“허, 참.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이 드는군. 옛날의 나는 보이는 배는 모조리 잡아 족치고 고급 선원들을 붙잡아서 몸값을 받으면 그걸로 그만이었어. 자네와 같이 하게 된 것이, 이토록이나 골 복잡하게 만드는 자네와 같이 뛰기로 한 것이 과연 괜찮은 선택이었는지 의심스럽군.”
“흥. 당신은 잘못된 선택을 어떻게 바로잡습니까?”
키는 냉랭한 미소를 지었고, 두캉가는 그 미소를 슬쩍 피하며 히죽 웃었다.
“그냥 골 복잡하다는 것뿐이야. 나에겐 기회만 오면 자네 멱을 따버리겠다는 결심 같은 건 없어.”
말의 끝머리에서, 두캉가는 오닉스가 앉아 있는 방향을 슬쩍 돌아보았다. 하지만 미약한 모닥불들과 어둠 너머로 오닉스 나이트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두캉가는 푸념하듯이 말했다.
“차라리 제독이 되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나.”
“두캉가 선장.”
“이봐, 그냥 우리 모두를 지배해 버리라고.”
키는 입을 다물었다. 두캉가는 흔들리는 횃불빛에 비쳐 붉게 도드라진 키의 얼굴이 어쩌면 저다지도 차게 보이는지 모르겠다고 되뇌었다.
“자네의 매끄러운 대답을 듣고 있으니 그런 짐작이 확실해지는군. 준비를 많이 했지?”
“준비?”
“그래. 준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자넨 설명을 요구하는 어느 선장이 찾아올 것을 대비해서 들려줄 말을 준비해 뒀을 거야. 뭐 자기 자신 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준비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고, 어쨌든 다른 선장놈들은 묻지도 않았지?”
“이렇게 물어온 건 당신이 처음이긴 합니다.”
“그래. 나 역시 물어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어. 왜 그런 줄 아나? 나는 설명을 듣든 듣지 않든 내가 결국 자네에게 찬성하게 될 것을 알아. 다른 선장들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자네가 우리의 우두머리가 아니니, 난 이렇게 자네에게 물어봐야 돼. 자네에게 동의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귀찮아. 귀찮은 일이라고. 그냥 우리를 지배해. 다른 작자들을 자신과 평등하게 대해 주겠다는 거, 고상한 성품이라는 건 나도 잘 알아. 하지만 평등은 기호품 “이야.”
“기호품?”
“평등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이 아냐. 그 사람이 원하는 만큼 대접해 주는 것이 평등이야. 이 늙은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체득한 지혜 이니 믿어도 좋을 걸세. 사람은 평등에는 관심이 없네.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따라서, 각자가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주면 사람들은 자기 들을 평등하게 대해 준다고 좋아하는 거야. 여기서 배신스러운 문제는 자신이 받는 대접에 만족할 줄 아는 고귀한 작자는 별로 없다는 점이지만. 어 쨌든, 스스로의 대가리를 굴리느니 자네의 지휘를 받는 것이 훨씬 속 편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해적놈들에겐 자네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평등하게 대해 주는 거야.”
늙은 해적과 최악의 해적 사이로 밤바람이 한 올 스쳤다. 횃불빛이 잠시 까불거리다가 다시 고요해졌다.
“문제가 많습니다.”
“오닉스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잘못 안 걸세. 그의 자존심은 자네가 그를 완전히 지배할 때 충족될 걸세. 그가 지금 자네에게 으르릉거릴 수 있는 건 자네 둘이 같은 위치이기 때문이야. 그것이 그를 괴롭히고 있는 거지. 그는 자신을 패배시켰던 자가 여전히 자신의 동료로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 는 걸세. 자네가 그를 완전히 지배해 버린다면 그는 오히려 만족할 것이고 자네 멱을 따버리려는 생각도 포기할 걸세. 그럼 우리 모두는 퍽 행복해지 겠지.”
“하리야 선장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신부님? 글쎄. 그가 신을 섬기므로 지상의 지배자를 인정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네. 그는 이미 페가서스호를 지배하고 있어. 따라서 그는 무리 없이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지배자도 받아들일 걸세. 그는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조화시킬 줄 아는 원숙한 사내야. 다른 선장들, 그러니까 돌탄이나 킬리, 트로포스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고……”
두캉가가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키가 그의 말을 받았다.
“알버트 선장은?”
두캉가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반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쳇. 그는 반대하고 자시고 할 수 없는걸. 그 일 이후로 그에게서 무슨 말을 들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어. 빌어먹을. 그가 물수리호를 지휘하고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노릇이야.”
“하지만 물수리호의 선원들은 그를 여전히 선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수리호를 확실히 지휘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아시잖습니까. 과연 그가 그의 배나 그의 선원들을 타인에게 맡기겠습니까.”
“하지만 알버트 선장은, 물수리호는 자네의 지휘를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어. 거기다가 미노 만에 정박하고 그의 선원들을 이 탐색에 합류시키기까 지 했어. 알버트 선장 역시 우리 모두들처럼 자네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였다 하더라도 그의 배나 그의 선원들에게도 유익한 지시를 내려주는 동료는 얼마든지 받아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의 배와 선원을, 그리 고 그 자신을 지배하겠다고 든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어떤 맹세를 했는지를. 그런 식으로 맹세한 이상 그가 타인에게 물 수리호를 넘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두캉가는 거칠게 말했다.
“그럼 물수리호는 제외해 버려.”
키는 잠시 말을 멈춘 채 두캉가를 바라보았다. 절벽 위를 제멋대로 횡행하는 바람은 횃불을 마구 흔들고 있었고, 두캉가의 검은 얼굴은 횃불빛 속에 서 작열하는 석탄더미처럼 보였다. 해풍은 그의 눈가에 망목 좁은 그물 같은 잔주름을 만들어놓았고 짠바람에 수없이 담금질된 그 몸은 그의 고향의 특산품인 질긴 생고무처럼 보였다. 키는 씁쓸하게 말했다.
“내게 책임을 지울 생각입니까.”
“부정하진 않겠네. 자넨 분명히 떼장이 어린애처럼 굴고 있어. 마음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책임을 사양하겠다는 거지. 그래. 자네가 우리들 중 하나 일 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들을 지배하게 된다면 자넨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겠지. 자넨 그걸 잘 알아. 하지만 난 오래전부터 자네 가 우리들 모두를 지배해야 된다고 생각해왔네.”
“두캉가. 나는 싫습니다.”
미약한 횃불에 밝혀진 공간 전부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두캉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프러포즈를 던졌고 거부를 받았군.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프러포즈를 던진 녀석들이 항상 취하는 자세를 따르겠어. 마음이 바뀔 때까지 기다리 지. 실제적인 이야기나 하세.”
“예. 두캉가 선장.”
“어쩔 텐가? 공주는 이미 다림에 들어갔어. 거긴 테리얼레이드 같은 곳이 아냐. 난 오늘 내내 자네에게서 정지 명령이 나오길 기다렸지만 자넨 그런 말을 하지 않더군. 그렇지만 내일도 계속 걸어간다면 틀림없이 다림의 병사들에게 들킬 거야.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혼자 가겠습니다.”
잠시 키의 대답을 기다리던 두캉가는 키가 이미 대답했음을 깨달았다. 키의 대답을 되뇌어보던 두캉가의 얼굴이 곧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키는 땅에 꽂힌 횃불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말하신 대로 이런 대규모의 인원을 끌고 갔다간 당장 들킬 겁니다. 하지만 나 혼자라면 상관없을 겁니다. 다림에 잠입해서 노예와 공주를 죽인 후 복귀하겠습니다. 오히려 잘되었군요. 수많은 다림 시민들이 공주의 죽음을 증명해 줄 테니까. 그 동안 이곳에서 기다려주시든, 아니면 당신의 선원들 을 데리고 미노 만으로 돌아가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다른 선장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두캉가는 기어코 노성을 지르고 말았다.
“정신나갔나! 자넨 제국의 공적 1호야. 들키는 순간 그들은 자넬 찢어 죽이려 들 거라고!”
키는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겠지요. 현상금 때문에 내 팔이나 다리 하나라도 가지려고 아우성이 벌어질 테니까, 찢겨 죽는다는 말은 정확한 것 같습니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돌아가세!”
키는 우울한 얼굴로 두캉가를 바라보았다. 두캉가는 흥분하여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미노 만으로 돌아가자고! 자넨 할 바를 다했어. 사실 우리야 남해의 제해권이 어디로 가든지 알 바 아니잖아! 어느 놈이 남해를 주물럭거리든 마찬 가지야. 우린 우리 나름대로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키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뭔가 다른 말을 해야 될 것으로 판단한 두캉가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라이온 때문인가?”
키의 얼굴에 약간의 감탄이 떠올랐다.
“알고 있었습니까?”
“그 녀석 때문이군! 그래서지? 제기랄, 그 놈 때문에 남해를 청소해 줄 생각인 건가? 나는 그런 짓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
다음 순간 키가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두캉가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키는 땅에 꽂혀 있던 횃불을 힘껏 짓밟았다.
두캉가가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린 것과 불티가 팍 피어오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짧은 순간 키의 얼굴이 환해졌다가 곧 암흑 속에 잔영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두캉가가 다시 팔을 내렸을 땐 횃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사방은 완벽히 캄캄했다. 두캉가가 키의 행동과 어둠 양쪽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암흑 저편으로부터 키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시오. 두캉가 선장.”
두캉가는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그 너머 어딘가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키의 모습을 떠올리자 두캉가는 입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금 전 키의 얼굴이 떠올랐던 방향을 향해 힘들게 말했다.
“이보게, 키 선장……”
“두캉가.”
나오려던 말은 두캉가의 입천장쯤에 말라붙었다. 복수가 뽑힐 때 소리가 나던가? 두캉가는 복수가 뽑히는 광경을 많이 보진 못했기에 잘 떠올릴 수 없었다. 하지만 어둠 너머 저편에 있을 키의 모습을 생각할 때 두캉가는 복수를 손에 쥔 그의 모습 이외엔 떠올릴 수 없었다.
“드래곤의 이빨을 세지 마시오.”
메마른 키의 목소리가 어둠을 예리하게 갈라놓았다. 두캉가는 간신히 일어났다. 달빛조차도 제대로 볼 수 없는 두캉가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 어, 생각은 없네. 키. 미안하군. …………용납하느니 어쩌느니 했던 건 아무 뜻도 없는 말이었어. 그냥……… 미안해. 난………… 어, 돌아가겠네.”
두캉가는 힘없이 돌아섰다. 그러곤 더 비참해지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두캉가 선장은 자신의 근시를 저주하면서 멀리 보이는 모닥불을 겨냥하며 힘들게 언덕을 내려갔다.
키는 검푸른 어둠 속에 홀로 서서 말없이 두캉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키는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복수를 다시 검집에 꽂아넣으며 몸을 돌 렸다.
정말 죽였을까? 키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 수 없었기에 키는 눈앞에서 두캉가 선장의 모습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어둠은 그에게 많은 도 움이 되진 않았다.
암흑은 그에겐 너무 익숙했다.
별들이 불타오르는 검푸른 하늘 아래, 풀잎의 그림자가 춤을 추는 새까만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느닷없이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아…………
거친 밤바람은 키의 코트 자락을 사정없이 펄럭거리게 한 다음 다림을 향해 휘몰아쳤다. 마치 키 그 자신의 분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