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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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4화


이른 아침, 다림 교외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세실은 하품을 하면서 해적들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트로포스의 상태를 보기 위해 다가선 세실은 트 로포스의 손이 모포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손을 다시 집어넣어 주려던 세실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세실은 트로포스의 손을 들어보였다. 질풍호의 해적들은 세실이 가르켜보이는 것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실이 들어올린 트로포스의 손등엔 아홉 개의 하얀 점이 둥글게 배열되어 있었다.

“상처라기엔 너무 규칙적이군. 문신? 초승달인가?”

“하얀색 문신은 잘 쓰지 않습니다, 마녀님 — 으윽!”

“마법사다! 음? 그런데 이건 뭐야.”

세실은 자신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 지팡이에 징벌당했던 젊은 해적이 머리를 감싸쥔 채 불평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트로포스 선장님의 지팡이입니다.”

“어? 아아, 맞아. 그날 이 녀석이 이걸 휘두르는 걸 봤었지.”

“저, 혹시 마 법사님께서는 좀 덤벙거리는 성격 아니십니까?”

젊은 해적은 뜨끔해하는 세실의 얼굴과, 무엇보다도 그의 정수리를 겨냥하여 올라가는 지팡이를 보면서 자신의 짐작이 맞다고 생각했다. 세실은 옆 으로 휙 피하는 젊은 해적을 흘겨보며 지팡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벌써 거기까지 눈치 챘어? 집요한 관찰은 맹목적 사랑의 시작이라던데. 나 사랑하나 보지?”

젊은 해적을 뇌사 상태에 빠뜨려놓은 세실은 자신이 내려놓은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멋적게 웃었다. 마법사들에겐 다른 마법사의 지팡이를 건드리는 것이 금기에 해당한다는 사실은 굳이 말해 줄 필요 없겠지. 불법 마법사에게 무슨 예의를 갖출 필요가 있겠느냐는 변명거리 그녀 스스로도 우습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를 되뇌이며 세실은 젊은 해적에게 질문했다.

“이봐. 너희 선장・・・・・・ 이봐! 정신차리고 대답해.”

“가, 가까이 오지 말아요! 전 절대로 마녀와는 싫뎅!장엄한 소리가 울려퍼진 직후 젊은 해적은 고꾸라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젊은 해적은 머리를 움켜쥔 채 생각했다. 손버릇도 나빠. 세실 은 지팡이를 내려놓으며 질문했다.

“나도 손자뻘 되는 꼬마는 관심없어.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대답해라. 너희 선장 뭐 바뀐 거 없냐?”

“예. 이젠 잠꼬대도 하시는 거 같고 뒤척거리기는 하시는데 일어나지는 않으시는군요. 혹시 언제 일어나는지 알려주실 수 없습니까?”

“흐음. 한번 더 해봐야겠군. 어이, 꼬마. 가서 노스윈드 좀 데려와라.”

젊은 해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실은 젊은 해적의 얼굴이 이상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저, 마 법사님. 키 선장님은 안 계시는데요.”

“안 계시다니? 그게 뭔 말이야?”

“키 선장님은 어젯밤에 떠나셨습니다.”

세실은 물끄러미 젊은 해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세실은 미심쩍은 얼굴로 질문했고 키 드레이번이 어젯밤 홀로 다림으로 출발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 순간 세실은 라이온을 찾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라이온 !라이온! 어디 있어!”

불편한 자세로 잠들었던 서 슈마허는 갑자기 들려온 세실의 고함에 놀라 잠을 깼다. 그때 잠이 덜 깬 그의 귀에 라이온의 잠꼬대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나…………… 여기 있어. 율리아나………… 어서 이리로……………”

순간 서 슈마허는 머리로 피가 몰리는 기분을 느끼며 동시에 라이온을 때려 죽이려 마음 먹었다. 물론 불가능했다. 철탑 앞에서 키를 공격한 이후로 슈마허는 꽁꽁 묶인 채 라이온에게 끌려다니고 있었고 지금도 온몸이 결박당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를 묻어버리자는 의견이 높았음에도 불구 하고 슈마허가 생매장당하지 않은 것은, 그가 몸값을 요구할 수도 있는 중요 인질이기도 하거니와 레보스호 선원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기 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라이온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슈마허의 머릿속엔 그런 은혜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슈마허는 고래고 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쿠아아악! 이 XX하고 XX해 버릴 XX야!”

세실의 고함에 놀라 얼떨떨해하던 해적들은 그 고함에 뒤이어 들려오는 욕지거리에 기막힌 얼굴들이 되었다. 고함과 욕지거리의 이중창은 마침내 라이온을 깨우는 데 성공했고 그때쯤 슈마허의 발악을 들은 세실 역시 라이온의 위치를 찾아내었다.

“라이온! 노스윈드가 혼자서 다림으로 떠났다고?”

풀린 눈으로 세실을 보던 라이온은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몸을 긁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슈마허는 왜 저렇게 씩씩거리는 거지?”

불편한 자세로 고함을 너무 많이 내지른 슈마허는 얼굴이 붉어진 채 씨근거릴 뿐 라이온의 질문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실은 슈마허의 상태엔 관심없었다.

“왜 혼자 보낸 거야!”

“혼자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그런다고 혼자 보내냐!”

라이온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여자에게 추궁당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결혼이라는 대형 사고를 친 사내들은 도대체 어떤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할 까 궁금해하던 라이온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세실. 혹시 그런 사람 아는지 모르겠어요. 설득하기 위해 뭔가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이미 설득당하는 건 반드시 이쪽이 되고 말 거라는 생각을 들 게 하는 사람.”

세실은 라이온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라이온의 말은 마치 그녀가 잘 아는 누군가에 대한 말 같았다. 세실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많진 않았어.”

“있긴 있군요?”

“그래.”

“그럼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군요.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되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후 뒤통수를 내려치는 방법이 좋지.”

“다음엔 그 방법을 써보죠.”

“제기랄, 그래서 어쩔 거야? 그냥 가만히 기다릴 거야?”

라이온은 대답하려다가 잠시 시선을 옮겼다. 세실은 그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고 신화 시대에서 걸어오는 듯한 장대한 사내들이 그들에게로 다가 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이 먼저 도착해서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껑충한 하리야 선장이 구슬픈 얼굴을 하고 손엔 성전을 든 채 걸 어왔다. 두캉가 선장이 도착하자 킬리 선장과 돌탄 선장은 옆으로 조금 옮겨 자리를 내주려다가, 곧 머리를 내두르며 조금 더 움직였다. 오닉스 선장 은 잘 때도 벗지 않는 그 마스크를 쓴 채 조금 떨어진 곳에 방관자처럼 섰다. 그리고 나머지 선장들은 그의 그런 태도를 이해한다는 듯이 이리 와서 앉게 등의 말은 하지 않았다. 미노 만에 남아 있는 알버트 선장, 그리고 의식 불명인 트로포스 선장과 다림으로 사라진 키 선장을 제외한 노스윈드 해 적의 선장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아무런 약속이나 부름의 말은 없었지만 그들은 조용히 모였고, 그 모여앉은 사내들을 보며 세실은 새삼 감탄 하고 말았다.

말없이 모였던 것처럼, 회의 역시 무턱대고 시작되었다. 하리야 선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그래, 어쩌지?”

“민첩하코 머리 찰 토는 애틀 몇 명 모아서 포내치. 무슨 일이 일어나튼 일탄 알아야 퇴니까.”

“감시조라고 해야 되나, 경호조라고 해야 되나?”

“감시조.” ᅳ 짧은 웃음들.

“쳇. 바람난 서방 감시하는 여편네라도 되는 것 같군.”

“오닉스 선장이 ‘정확하다’라는 손짓을 보내던데요.” -조금 긴 웃음들.

“미노 쪽에도 몇 명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거리가 먼걸, 신부님. 말이라도 타지 않는다면.”

“말이 있어도 우리 중에 그런 짐승 탈 줄 아는 놈이 몇 있겠나.”

“아! 내가 탈 줄 압니다.”

“왜 차네 말이 믿키 어려운치 모르켓쿤, 라이온.”

“탈 줄 안다니까요. 말이 없어서 문제지.”

“그래. 어차피 말은 못 구해. 다림에서 구하는 건 위험하고 달려간다 해도 너무 늦어.”

“무슨 조처를 취하려면 이 인원만으로 처리할 것을 각오해야 돼.”

“누굴 뽑지?”

“크컨 내카 코르지.”

“좋아.”

“그럼.”

하리야 선장은 두 손으로 성전을 쥔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오닉스는 몸을 돌려 걸어갔고 돌탄 선장과 킬리 선장이 그 뒤를 이었다. 잠시 후 기도를 끝 낸 하리야 선장이 두캉가 선장과 함께 부하들에게로 걸어갔다. 라이온은 다시 하품을 하다가 세실의 멍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으헷? 왜 그런 얼굴 하고 있으신 거요, 마법사님?”

“허! 야,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거 분위기가 너무 묵직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너희네들 분위기는 항상 이러냐?”

껄껄거리며 일어나던 라이온은 그때까지도 짐보따리처럼 팽개쳐져 있던 슈마허가 무서운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이온 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왜 그래?”

“…………너 무슨 꿈 꿨냐?”

“꿈? 어라. 그러고 보니 아주 기분좋은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무슨 꿈이더라, 그게?”

“기억해 내지 마!”


파킨슨 신부는 열렬히 외쳤다.

“왑. 왑왑!!”

“왑왑왑.왑왑..”

데스필드는 대답하면서 어쩐지 자신들이 혼족이나 된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스스로에 대해 한심해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시 말했다.

“왑왑!왑, 왑왑? (최고급 패스파인더라는 놈이 밧줄 하나 풀어낼 재주도 없냐?).”

“왑. 왑왑왑. (본인도 화장실 급하긴 마찬가지요.).”

“왑? 와와? 왑왑 왑왑왑? (뭐? 바지 쪽? 거기 뭐 숨겨놨냐?).”

“와. 압 압왑압압왑. ・와왑!? (뭐, 아직 싸버릴 정도는 아니오. …………어딜 더듬는 거요!?).”

부리나케 피하는 그래봐야 온몸이 기둥에 묶인지라 약간 꿈틀거리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ᅳ 데스필드를 보며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뭔가 오해했 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파킨슨 신부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재갈을 질겅거렸다. 하지만 어찌나 꼼꼼한 솜씨로 묶여 있 는지 벌써 몇 시간째 그걸 씹어댄 이와 입술만 아파올 뿐 재갈이 느슨해지는 기미는 없었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온몸의 힘을 빼고 기둥에 몸을 기대 었다.

키 드레이번은 파킨슨 신부에게서 몇 마디 말을 들은 다음 점잖게 그를 기절시켰다. 머릿속으로 벼락이 쳤다고 생각한 파킨슨 신부가 다시 눈을 떴 을 때, 그는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채워진 채 무슨 기둥 같은 것에 묶여 있는 자신과 데스필드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곳곳에 서 있는 기둥이라든지 휑뎅그렁한 공간으로 미루어보아 그들이 갇혀 있는 곳은 무슨 창고인 듯했다. 창문은 없었지만 밝기로 미루어보아 대 낮인 것 같았고, 그래서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간혹 멀리서 사람들이 내는 소음 같은 것이 들려오긴 했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설령 가까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입에 재갈이 채워졌으니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누군 가가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와 그들을 발견하지 않는 이상 탈출은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지 여러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이라곤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기에 이렇게 사람 기척이 없는 거지?” 조금 전까지 파킨슨 신부의 주된 연구 과제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의 연구 과제가 조 금 바뀌어 있었다. ‘사람이 안 먹고 얼마나 버틸 수 있던가?’ 격심한 배고픔과 갈증 때문에 파킨슨 신부는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신학교 시절 금 식 훈련을 하기도 했던 파킨슨 신부였지만 온몸이 묶인 채 맞이하는 공복감과 갈증은 지독한 것이었다. ‘사람이 하루 굶는다고 해서 죽을 리는 없다. 게다가 난 사흘 동안의 금식도 해봤지 않은가.’ 아무리 되뇌어보아도 뱃속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왔고 입안은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꼼짝도 못하도록 묶여 있는 것은 활동량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만찮은 중노동이다. 힘없이 주위를 둘러보던 파킨슨 신부는 건물 안이 조금 전보다 훨 씬 어두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맙소사, 벌써 밤인가? 그럼 하루 종일 갇혀 있었던 건가?

그때 파킨슨 신부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파킨슨 신부는 눈을 부릅떴다. 어둑어둑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커다란 문에 달려 있는 조그만 출입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더욱 자세히 바라본 파킨슨 신부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손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랜턴 같은 것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환한 빛이 비 치며 창고 안이 밝아졌다. 랜턴을 들고 있는 것은 부두 노동자 같은 옷을 걸치고 머릿수건을 한 남자였다. 파킨슨 신부는 목청껏 외쳤다.

“! (여기요, 여기!).”

“왑왑. 왑 왑아아왑. (관두쇼. 키 드레이번 당신이오.).”

“! 왑, 아아아! (데스필드! 그래, 우린 살았어!).”

데스필드는 측은하다는 듯이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뒤통수를 기둥에 기대었다. 희열에 찬 표정으로 다가오는 랜턴 빛을 보던 파킨슨 신 부는, 그래서 랜턴 빛 위로 떠오른 얼굴을 본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키 드레이번은 아무 말 없이 랜턴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기둥 뒤로 돌아가 파킨슨 신부의 손을 풀어주었다. 신부의 몸은 여전히 기둥에 묶인 채였지 만 어쨌든 손은 쓸 수 있게 되었다. 키는 신부 앞에 랜턴과 보따리 하나를 내려놓고는 무슨 상자 같은 것으로 걸어갔다. 상자 속에선 복수와 키의 코 트, 그리고 커다란 가방 같은 것이 나왔다. 키는 상자 위에 코트를 깔고는 그 위에 걸터앉았다.

파킨슨 신부는 쓰린 손목을 문지르며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신부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복수를 뽑으며 말했다.

“패스파인더의 손을 풀어줘라.”

파킨슨 신부는 머뭇거리며 데스필드의 손을 풀어주었다. 종일 묶여 있던 손이 퉁퉁 부어 데스필드의 손을 푸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간신히 손이 풀린 데스필드는 재빨리 재갈을 풀어내곤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 또한 자신의 재갈을 풀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키를 바라 보았지만 키는 복수를 손질하고 있을 뿐 그들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데스필드는 명령하지도 않은 일을 하려니 꺼림칙하다는 듯이 키를 쳐다보며 그들 앞에 놓인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순간 반가운 냄새가 그들의 코끝 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빵과 소시지, 선원용 비스킷, 말린 과일, 그리고 치즈와 작은 술병까지 있었다. 데스필드도 이번엔 먹으라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았다. 하루 동안의 굶주림 후에 맞이하는 이런 진수성찬은 그들로 하여금 기둥에 묶인 자신들의 초라한 신세를 거의 잊게 만들었다. 데스필드는 입 안 가득히 음식물을 우겨넣으며 유쾌하게 말했다.

“하! 내어놓는 음식을 보면 그 당신의 인품을 거의 짐작할 수 있지. 당신이 좋아지려고 하는데, 그래?”

키는 여전히 복수의 손질만 계속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스필드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데스필드는 속으로 ‘해적선이 든 어쨌든 선장은 선장이구나. 선장 당신쯤 되니까 포로에게 주는 음식이라도 이 정도는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고상한 모습 보여주는 거 아니겠어’ 등으로 생각하며 희희낙락해하고 있었다. 그만큼이나 노골적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파킨슨 신부 역시 반가워하는 것이 분명한 얼굴로 식사에 매진했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가 식사를 끝내고 치즈 덩이를 사이좋게 나눠 질겅거리고 있을 무렵, 키는 복수를 다시 검집에 꽂고는 그들을 향해 돌아앉았 다. 그리고 그제서야 파킨슨 신부는 자신이 큰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젠장. 잘 대접받고 나서 화를 낼 수야 없잖아. 그 래서 파킨슨 신부는 좀 어정쩡한 태도로 질문했다.

“흐음. 우리가 얼마 동안 갇혀 있었던 거지?”

“하루.”

“어, 그 동안 뭐하고 돌아다녔지? 다림 시내를 돌아다녔나? 어떻게 들키지 않았지? 아, 그리고 여긴 도대체 어딘가?”

키는 앞쪽의 질문은 전부 무시하고 마지막 질문에만 대답했다.

“부두 창고. 당신들이 있던 잔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지.”

“그런데 무슨 부두 창고에 순찰 하나 안 들어오는 거지?”

키는 차분한 태도로 자신이 부두 창고를 빌렸다고 대답했다. 데스필드와 파킨슨 신부는 어이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그들이 창고에 갇혀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데스필드는 어떤 상회의 신용장도 가지고 있지 않을 키가, 더군다나 명망 있는 상인으로 행세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작자가 도 대체 무슨 재주를 부려 화물 창고를 빌릴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보다 더 급한 질문이 있었다.

“그래, 우릴 어쩔 건가?”

“오스발과 율리아나를 죽인 후 죽이겠다.”

키는 일부러 더 잔인하게 말하지도 않았고 가식적인 태연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날이 추우면 얼음이 언다고 말하는 것처럼 단조롭게 말했다. 그 래서 데스필드는 씹던 치즈를 삼키고 한번 더 베어물었을 때에야 목이 메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파킨슨 신부는 숨막힌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인질. 들켰을 때를 대비한.”

“아니, 왜 지금 죽이지 않느냐는 질문이 아니라 왜 우릴 죽인다는 건가?”

“이유가 필요한가?”

이 자식 확실히 돈 놈이구나. 파킨슨 신부는 차분해지는 마음과 급격히 흥분하여 끓어오르는 마음 양쪽을 오가며 헐떡였다. 데스필드는 주의 깊게 키의 얼굴을 살폈지만 그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인단 말이야?”

랜턴 빛 속에 떠오른 키의 얼굴에 재미있어하는 표정이 잠시 스쳤다.

“그럼 이유 있는 살인이라는 것도 있단 말인가? 살인에는 이유가 없어.”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파킨슨 신부는 버럭 화를 내었지만 키는 그 대답에 곧 흥미 잃은 얼굴이 되었다.

“내가 질문할 차례인 듯하군.”

“잠깐! 내 말에 대답해라. 난 내 목숨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냐. 네녀석은 정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거라고 말한 거냐?”

“어떤 놈이라도 찬성하고 순순히 목숨을 내어줄 ‘이유’라는 걸 알면 좀 가르쳐주겠나. 내겐 쓰일 일이 많을 것 같군.”

키는 단숨에 대답했고 파킨슨 신부는 말문이 막힌 채 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그런 ‘이유’라는 것은 없다. 그것이 어떤 이유이든, 설 령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동조하는 이유라 할지라도 살해될 자는 그 이유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살인에는 이유가 없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라.”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흘끔 바라본 다음 대신 대답했다.

“질문이 뭔가, 노스윈드 당신?”

“너한테 묻지 않았다. 신부가 대답해. 교회의 계획은 뭐지?”

무안을 당해서 풀이 죽었던 데스필드는 뒷부분의 말에 솔깃하는 표정으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파킨슨 신부는 당혹 어린 말투로 반문했다. 

“교회의 계획이라니?”

“말해.”

“젠장, 뭘 말하란 말이야!”

키는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이 되었다. 목소리는 높이지 않은 채 키는 짓씹는 어조로 말했다.

“법황의 계획을 지껄이란 말이다. 이곳이 아니면 더 이상 교회에겐 기회가 없을 것이다. 분명히 필사적인 계획이 있겠지. 그러니 교회가 카밀카르 대사관 안에 있는 그녀를 어떻게 후려낼 작정인지 말해라. 메르데린 컬렉션의 경매에서인가? 아니면 미사 때인가? 그렇잖으면 대사관에 대한 정면 습격인가? 어느 쪽인가!”

경악 속에서 파킨슨 신부는 잠시 눈앞에 있는 자가 아델토의 화신은 아닌가 의심했다. 악마가 아니라면 저 모든 사실을 알 리가 없고 지상에 있는 악 마라면 아델토뿐일 것이다. 하지만 잠시 후 파킨슨 신부는 악마가 해적이 되어 해적 선단을 몰고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사실을 떠올렸 다. 파킨슨 신부는 가까스로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무슨 말이냐? 성하께서 왜 공주님을 납치한다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싶다는 거냐? 말해 주지. 검독수리의 성채 안에서 으스대며 멋대로 법황을 깔아뭉개는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에게 찬물 끼 얹어주기 위해서다. 모른다는 소릴 더 지껄이고 싶다면 어젯밤 네놈이 질러대던 고함에 대해 먼저 설명해 봐. 왜 교회를 버리겠다고 말했었지? 교회 가 무슨 버림받을 짓을 했다는 거지?”

오, 이 벼락맞을 입이여. 파킨슨 신부가 아득한 자기 혐오에 빠져 있는 동안 데스필드는 키의 말에 대해 재빨리 생각해 보았다. 자칭 최고의 패스파 인더의 두뇌가 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데, 그리고 거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쥐덫 다섯 개. 대사관저를 습격하기엔 적고, 경매 장엔 입장도 못할 꼬락서니인,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비무장인 교회 안이라면 지독한 실수는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깡패놈 다섯 명 – 대입시켜서 완 성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찰나였다.

파킨슨 신부는 다시 얼굴을 굳혔다. 그 얼굴을 보던 키 드레이번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입을 안 열겠다는 건가? 얼간이짓 하지 마라. 넌 지금 이유 없이 내게 반항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주가 안 전해진다는 건가? 넌 교회에 협력하겠다는 거냐?”

“……넌 어쩔 거냐. 해적놈아.”

“무슨 뜻이지?”

“교회에 협력할 거냐? 교회의 계획을 알려고 드는 이유가 뭐냐? 그 계획을 돕겠다는 거냐, 훼방놓겠다는 거냐? 너의 의도를 말해 봐.”

“내 이유는 나에게만 이유다. 네겐 말해 봐야 이해되지 않겠지. 하지만 나에겐 교회의 계획을 도울 생각은 별로 없다는 것은 말해 줄 수 있겠군.” 파킨슨 신부의 얼굴에 약간의 반가움이 지나쳤다.

“공주님을 구할 거냐?”

“그녀가 그렇게 받아들일진 모르지.”

“제길, 단순하게 말해! 공주님을 구할 거냐? 넌 내 실언을 이미 들었어. 그럼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알 것 아닌가! 난 그녀를 구하길 원한다. 주님의 손길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따라서 내게서 뭔가를 들어내려면 내 소망을 참고하는 편이 좋을 거야.”

“교회가 그녀를 노리고 있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이군.”

“그렇다! 그리고 난 내 상관들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하지만 용납할 순 없다. 오스발이 내게 말해 줬었지. 그는 신부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부 살해는 살해가 아니라고. 살해의 목적이 한 인간의 말살이라면, 죽어서 순교자로 추서된 그분들은 영원히 말살되지 않기 때문에 그 목적에 부합될 수 없다고.”

데스필드는 오스발의 이름이 말해진 순간 키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인 것을 보았다. 하지만 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또 말했지. 순교는 강요되는 것이라고. 그래. 그 말이 옳아. 하지만 신도에게 순교를 강요하는 것은 신도의 마음속에 있는 교회다. 그 교회 가 원할 때 신도는 죽음 아닌 죽음도 택하는 것이다. 성 페이루스, 성 바이올 모두 마찬가지지. 그분들은 자신의 마음속의 교회를 위해서 순교하셨지. 바깥의 교회가 아냐!”

바로 그것 때문에 헷갈렸던 거요, 핸솔 추기경님. 그래요. 나는 그분들의 태도에 공감하오. 그 외롭고 무서운 곳에서도 자기 속의 교회를 잃지 않으 셨던 그분들에게. 그리고 나 또한 그리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오.

“따라서 펠라론은 그녀를 죽일 수 없어. 내가 버린 것은 펠라론이다!”

“대단한 연설이었다. 신부.”

“감사하군. 하지만 내 말 안 끝났어. 교회도 그녀를 죽일 수 없거늘, 너 따위 지저분한 해적놈이 그녀를 어떻게 할 수는 없어. 그러니까 이제 말해라! 네 의도는 뭐지? 넌 무엇을 바라는가!”

“그녀를 죽일 거야.”

도저히 어울리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더군다나 누군가를 죽인다는 저 끔찍한 말에 대해 그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은 절대로 도덕적인 반응이라 고 할 수 없겠지만, 데스필드는 그만 킥킥거리고 말았다. 그리고 파킨슨 신부 역시 기가 막혀서 화도 못 내는 얼굴로 키 드레이번을 쳐다보았다. 그러 나 조금 후 파킨슨 신부는 악이 받쳐 외쳤다.

“이 자식아! 그럼 가만히 있으면 되겠구나!”

“가만히 있는다?”

“네가 가만히 있어도 교회가 그녀를 죽여줄 테니까, 너는 풀어주면 교회의 계획을 훼방놓을 것이 분명한 나를 이대로 감금해 두기만 하면 되겠군. 그렇잖아!”

키는 음울한 얼굴로 파킨슨 신부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았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겠다. 제안 하나 하지.”

파킨슨 신부는 씩씩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키는 단조롭게 말했다.

“넌 그녀를 구하길 원한다. 그리고 난 그녀를 죽이길 원한다. 언뜻 정면으로 대치되는 목적인 것 같지만 난 이 두 가지 소망에서 공통점을 발견한다. 즉 너와 나 모두 교회의 계획을 분쇄하길 원하지.”

“아아, 성 이디오테우스여! 직접 죽이고야 말겠다는 건가? 남이 죽이는 꼴은 못 본다고? 네놈은 확실하게 미친 놈이구나.”

“좋을 대로 생각해. 어쨌든, 그렇기에 난 협력을 제안한다.”

“협력이라고?”

“서로 협력하지. 교회의 계획을 분쇄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 순간이 지나면 협력은 끝이다. 핸드건을 돌려줄 테니, 등뒤에서 나를 쏴도 상관없 다.”

파킨슨 신부는 멍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우울하게 웃으며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좋아하실 거 없으쇼, 신부님 당신.”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데스필드는 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똑같은 결론으로, 그 순간이 지난다면 노스윈드 당신은 등뒤에서 신부님 당신이나 본인을 찌를 수도 있다는 말이겠지. 그럴 테지?”

“말하나마나 아닌가.”

“껄껄껄! 거참 공정해서 마음에 드는군. 솔직한 당신이 좋지.”

데스필드의 웃음 소릴 들으며 파킨슨 신부는 머릿속의 정리를 끝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다른 의문만을 불러일으켰다.

공주를 구하는 그 순간까지 협력. 그리고 둘은 그때부터 적이라. 일견 말이 되는 것 같지만 완전한 헛소리다. 키 드레이번은 원한다면 고문이든 뭐든 동원해서 파킨슨 신부에게서 필요한 사실을 짜낼 수 있다. 파킨슨 신부는 자신의 의지력을 신뢰하지만 그것에 대해 환상을 품지는 않았다. 어쨌든 키 드레이번은 파킨슨 신부의 의지력에 무슨 환상을 가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 얼간이는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겠다는 거지? 파킨슨 신부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렸다.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겨냥하고 있어야 했던 순간을 떠올렸을 때 신부는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다시 느꼈다. 그 러나 신부의 기분과 별개로, 그때도 그랬다. 키는 스스로를 위험에 몰아넣었다. 아니, 따진다면 제국의 공적 제1호가 다림에 들어온 것부터 그렇다. “어떤가.”

메마른 목소리에 파킨슨 신부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공기 속에서 키의 두 눈이 그를 응시하며 빛나고 있었다. 동물의 눈처럼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 그 순간 파킨슨 신부는 깨달았다. 율리아나 공주는 이미 깨달았었고, 자신은 타성적으로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을 뿐인 사실을. 이놈은 침착하게 돌아버린 놈이다………………

파킨슨 신부의 대답은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왔다.

“좋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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