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6장 : Bladerunner – 5화
새벽부터 내린 비는 아침 무렵 가랑비로 바뀌어 있었다.
다림 수도원의 높은 종탑으로부터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미사일이다. 그래서 가랑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날 새벽부터 야수나 다름없는 아이들에게 새옷을 입히기 위해 전투를 치른 끝에 녹초가 된 부인네들이, 역시 녹초가 되어 있지만 빳빳하게 세워진 옷깃 속에 파묻힌 얼굴엔 당장이라도 장난거리를 찾아낼 궁리를 하고 있는 두 눈이 번득이고 있는 아이들의 손을 쥐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런 부인 네와 아이들 곁에는 근엄한 얼굴을 똑바로 세운 채 마치 그 부인네와 아이들이 자신의 죄악의 증거나 되는 것처럼 외면하며 걸어가는 엄숙한 얼굴의 가장들도 보인다. 그리고 그런 보편적인 미사 참배객들 사이로 어쩌다 뭍에 오른 김에 몇 년치의 미사를 한꺼번에 치를 작정을 하고서 걸어가는 선원 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들 사이사이론 진귀한 구경이나 되는 것처럼 혀를 빼문 채 인파를 바라보는 이교도 선원들의 모습도 보인다. 비관세 자유 무 역항인 다림이기에 그런 모습들이 신도들을 그렇게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주님께로 향하는 길이라고 해서 평등한 것은 아니다. 걸어가는 참배객들은 마차바퀴 소리가 날 때마다 짜증을 부리며 물론 속으로만 — 황 급히 옆으로 비켜서야 했다. 이런 대로에서 마차를 질주시키는 정신나간 마부는 없지만 마차바퀴가 물을 튀겨올려 신도들의 깨끗한 외출복을 더럽힐 위험은 충분한 것이다.
다시 들려오는 마차바퀴 소리에 염증을 내며 비켜서던 행인들은 뜻하지 않은 광경에 놀라 탄성을 질렀다. 장난거리를 찾아 방황하던 아이들의 눈빛 도 지나가는 마차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경쾌해 보이는 승용마차였다. 얼핏 보기에도 준마임이 분명한 네 마리의 록소나 산 백마들이 기운찬 동작으로 마차를 끌고 있었다. 그렇게 화려 한 마차는 아니었지만 자유항 다림의 약아빠진 시민들이 그냥 화려하기만 한 싸구려와 진짜 명품을 구별 못할 리는 없었다. 그것은 진짜 명품이었다 – 바큇살 아래에서 튀어오르는 물방울들마저도 보석처럼 보일 정도의.
대형 마차라면 차장석이라고 불러야 될 위치, 그렇지만 이런 승용마차에선 하인석으로 구분되는 자리에 앉아 있던 오스발은 행인들의 감탄을 보며 멋쩍은 기분을 느꼈다. 하인석은 마차 뒤의 트렁크 위에 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퍽 높은 편이었고 마차 지붕 너머로 전방까지 볼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발치에 있던 뒷창문의 커튼이 치워지며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이 보였다.
“비 오는데 괜찮아요?”
오스발은 대답에 앞서 소박하게 감탄했다.
율리아나는 화장을 하고 있었다. 미사에 참배하는 길이라 진한 화장은 아니었지만 원래 기막힌 용모인지라 화장을 하자 말 못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스발은 문득 신부님이 율리아나 공주님 때문에 미사 순서를 잊지는 않을까 하는 재미있는 생각을 해보았다.
“괜찮습니다, 공주님. 빗방울이 들지 모르니 커튼을 닫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그리고 율리아나는 몸을 팔짝 뛰어올렸다. 율리아나는 의자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는 창턱에 팔을 얹고 오스발을 올려다보았다.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을 못 보게 해요. 그러니 당신 눈에 보이는 거 나한테 말해줘요.”
마차 안쪽에서 신음이 들려오는 것을 들으며 오스발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율리아나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언젠가 약속했죠? 치마 입고 내 앞에서 엉덩방아 찧기로, 당신 다리 사이가 보이긴 하지만 지금은 바지니까 무효.”
마차 안에서는 보다 강도 높은 신음이 들려왔다. 오스발은 다리를 슬며시 옆으로 꼬며 당혹한 미소를 지었지만 율리아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 했다.
“많이 젖었군요. 정말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공주님. 배에서 빗물은 좋은 식수입니다. 물론 너무 많이 오면 곤란하겠지만 이런 가랑비는 뱃사람이라면 대개 좋아할 겁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말해 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냥 해본 소리예요. 뻔하겠죠, 뭐. 당신은 안 보이겠지만 지금 폴라 대사가 내 치맛자락 끌어당기고 있거든요. 저러다 치마 찢어먹겠네.” 다시, 신 음. “똑바로 앉아야겠어요.”
커튼이 닫혔다. 커튼을 향해 미소 지어보인 오스발은 얼굴을 들어 빗물을 마셨다.
의자에 똑바로 앉은 율리아나는 폴라 대사의 비난 어린 얼굴을 보며 싱긋 웃었다. 폴라 대사는 한숨을 쉬었다.
“레이디의 교양에 대한 교훈적인 헛소리를 해야 되나요?”
“우우우.”
·좋아요. 공주님. 우아하게 처신해 줄 정도의 배려는 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그러겠어요. 그런데 본국의 배는 언제 오죠?”
“오지 않아요. 공주님.”
“예?”
“아, 당장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본국과 연락이 되었는데, 거기선 시간을 아끼자는 말이 오가는 모양이더군요.”
“시간을 아낀다니오?”
“본국에선 다시 혼수품을 장만한 다음 함대를 출발시킬 계획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곳에서 공주님을 태운 다음 페리나스로 향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공주님의 혼삿길이 약간 지체된 것처럼 행동하게 될 거예요. ……공주님. 풀죽은 얼굴 하지 마세요. 카밀카르를 다시 보고 싶으신 것은 이해합니다만.”
율리아나 공주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보이던 명랑함이 싹 사라졌다. 율리아나는 떼쓰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잖아요. 혼수품을 다시 준비하는 건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제가 그곳으로 갔다가 페리나스로 가도 되잖 아요. 이곳에서 카밀카르로 가는 상선 아무거나…………”
“뭐라 해도 신부가 혼삿길에서 다시 본가로 돌아간다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간은 그렇게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공주님이 생각 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빨리 준비가 끝날 거예요.”
“그렇게나 빨리?”
“예. 사실 잃은 것은 레보스호 한 척이고 다른 두 배는 안전하게 돌아갔으니까요. 레보스호에 실려 있던 것 정도만 다시 준비하면 되는 거죠.”
율리아나 공주는 물론 자신의 고국이 배 한 척을 채울 보화쯤은 어렵잖게 준비할 수 있는 거대해 운국 카밀카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전 다시는 카밀카르를 보지 못하는 것이군요.”
폴라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나는 의자에 몸을 던지며 마차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고요 속으로 가느다란 빗소리가 스며 들었다.
키는 비에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곤 팔짱을 꼈다. 그는 마치 비를 피하는 것처럼 예배당 입구의 악마상 아래에 서서는 무심한 표정으로 교회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선 파킨슨 신부가 쭈그리고 앉아서 돌바닥에 그려지는 동그라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킨 슨 신부가 문득 말했다.
“핸드건은 언제 돌려줄 건가.”
“조금 후에.”
키 역시 파킨슨 신부처럼 앞만 바라보며 대답했다. 파킨슨 신부는 비에 젖은 앞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가 아냐. 잘못 질문했군. 정말 그걸 돌려줄 건가? 받자마자 자네 뒤통수를 날려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런 시도는 나에게 자넬 죽일 이유를 주는 행위가 될 거야. 그리고 그 이유는 자네에게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을 것 같군. 그러니 내게 죽임당하 는 이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시도하라.”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지적인 대답은 좀 하지 마. 네놈이 정말 미친 건지 아닌지 자꾸 혼동되니까. 파킨슨 신부가 다시 뭐라고 할 무렵 빗방울 저편으로부터 데스필드가 걸어왔다.
데스필드는 키와 파킨슨 신부를 보지도 못한 것처럼 지나쳐서 그대로 인파들과 함께 예배당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서기 직 전의 짧은 순간, 데스필드의 눈이 파킨슨 신부를 살짝 향했고 그의 고개가 약간 끄덕여졌다. ‘당신들이 오는군.’
파킨슨 신부가 일어났다. 그는 잠시 내키지 않은 듯이 키를 바라보다가 그를 부축했다. 키는 자연스럽게 왼손을 신부의 어깨에 얹으며 오른손은 코 트자락 안으로 집어넣었다. 파킨슨 신부는 몇 개의 천 너머로 핸드건의 포구가 자신의 오른쪽 허리를 찌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키는 왼쪽 다리가 굳어버린 사람처럼 쩔뚝거리며 예배당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수반에서 손을 씻은 후 키는 사람들의 흐름과 함께 걸어가면서 데스필드의 위치에 주목했다. 잠시 후 키와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뒷자리에 앉는 데 성공했다. 왼쪽 다리를 구부릴 수 없었기 때문에 키의 앉음새는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광대한 예배당을 주욱 둘러보 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양쪽 벽면의 특별석이 폐쇄되어 있었고 그곳엔 무슨 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잡동사니와 자재들이 쌓여 있었다. 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제단 바로 앞쪽에 임시 특별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특별석이라곤 하지만 평신도들의 자리에서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되 는 위치였다. 핸솔 추기경이라고 했던가? 머저리 같은 놈이군. 교회는 이 자리 배치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할걸. 특별석이 공사중이었다는 변명이 과연 얼마나 통할지 궁금하군.
그때 그의 등뒤가 조금 요란해졌다. 비에 젖어 약간 짜증스럽게 두런거리던 사람들이 순수한 탄성과 한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키는 살짝 고개를 돌 렸다.
“세상에, 저기 좀 봐!”
“저기 저 여자!”
예배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다림의 큰누님’과 함께 걸어오는 정체 모를 미녀에게 집중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막힌 미모에 감 탄했지만 폴라 대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상인들이나 각국 대표부의 공무원들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당황했다. 그들은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 실에 당황했고 그래서 폴라 대사와 그 미녀가 수반에서 손을 씻는 동안 재빨리 눈짓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봐, 폴라 대사 옆의 저 여자 누구지?”
라트랑 문화원의 부장이 당황해하며 던진 질문에 레모 상관 서기는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네도 보인단 말이야? 다행이군. 천사가 보이길래 죽을 때가 된 줄 알았어.”
그리고 ‘레모’는 ‘록소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록소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팔라레온’을 바라보았고 ‘팔라레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마쉬’를 바라보았다. ‘자마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우스’를 바라보았고………… 폴라 대사 일행이 수사의 안내를 받아 특별석에 앉았을 무렵 ‘사트로니 아가 간신히 그 릴레이를 끝내었다. 사트로니아 대사관 무관은 2년 전 본국에서 느꼈던 강렬한 인상을 떠올리며 낮게 소리쳤다.
“맙소사! 율리아나 공주야. 키 드레이번에게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탈출한 모양이군!”
다음 순간 기품 있는 정장을 하고 앉아 있던 많은 점잖은 사내들이 전혀 점잖지 못한 몸짓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화장실의 위치를 가르쳐주고 싶어질 만한 ᅳ을 하며 안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폴라 대사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며 배부른 미소를 지었다.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점잖은 복장을 하고 온 각국의 고위 인사들이 이 소식을 어서 본국 에 전달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모습은 장관이랄 수밖에 없었다. 다림의 큰누님이 율리아나 공주와 함께 미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에는 이런 모습 을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담겨 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은 미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그들의 자리로 다가오려는 몸짓까지 해보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핸솔 추기경이 복사들과 함께 등장했다. 예배당은 간신히 조용해질 수 있었다.
도리언 수도원장 대신 경매건으로 다림을 내방한 핸솔 추기경이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오늘 모인 많은 고위 사절들 중엔 그 때문에 참석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잣나무 가지를 흔드는 복사들과 함께 제단으로 걸어가면서, 핸솔 추기경은 아무래도 오늘 미사의 주인공 노릇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었다. 그 고위 사절들의 관심은 모조리 특별석 귀퉁이에 앉은 율리아나 공주에게로 집 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율리아나 공주가 기막힌 용모의 소지자가 아니었다 해도 오늘의 주인공은 그녀다. 오늘은 모든 의미에서 그녀의 날인 것이다.
교회 밖의 마차에 앉은 채, 오스발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눈을 감고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선 떨어지는 빗방울을 받 아 마시고 있었다. 이 자극적이고 아름다운 행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오스발은 정신적으론 약간 멍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으로 뭔가 이물적인 간지러움이 느껴졌다. 오스발은 그 느낌에 집중해 보았고 잠시 후 그것이 어떤 종류의 관찰을 의미하는 것임 을 깨달았다. 그가 본 무엇.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그것이 빗물을 받아 마시느라 방심한 그의 머릿속으로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뭘 봤었지?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조금 전의 자세를 취해 보았다. 이렇게 의자에 앉아서, 마차 지붕 너머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으로 다림 수도원의 거대한 모습이 점점 다가오고…… 이 마차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이 그곳에 있었다. 오스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시선들 중에 낯익은 것이 있었다. 그게 뭐였지? 다음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비웃는 듯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누군가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 려왔다.
순간 오스발은 자신이 본 것을 한꺼번에 떠올렸다. 조금 전 마지막 모퉁이를 돌기 전, 골목길의 귀퉁이에 서 있던 사내. 마치 비를 피하려는 것처럼 손을 들어올리며 몸을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스발은 그 얼굴이 사라지기 직전 그 눈을 보았었다.
‘거기 얌전히 앉아서 뭐하고 있나, 오스발 당신?’
오스발은 고개를 돌려 성당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핸솔 추기경은 기품 있는 동작으로 미사를 접전했다. 마치 자신의 교회인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심술궂게 기대했지만 핸솔 추기경은 통성기도를 드리며 성전을 훔쳐보지는 않았다. 그가 추기경이자 이름난 고문학자인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별로 놀라지 않았지만 추기경이란 사냥하고 연회를 주관하는 성직자라고 생각하던 이들은 이 모습에 감탄하거나 ‘열심히 외웠나 보군’ 하는 식의 시니컬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자신감 있는 태도는 분명 그들을 감명시켰다.
통성기도와 맹약기도가 끝나고 봉헌의식이 시작되기 전, 핸솔 추기경은 법도대로 뒤로 조금 물러났다. 복사들이 다시 잣나무 가지를 들어올리자 신 도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잣나무는 주님의 나무다. 복사들은 신을 대신하여 신도들의 맹약을 받아들였음을 표현한다. 아름다운 소년들이 그들의 손엔 거칠어보이는 잣나무 가지를 흔들며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숙인 신도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 모습은 어쩌면 미사 의식 중 가장 아름다 운 장면일지도 모른다.
잣나무 가지를 흔들며 돌아다니던 복사 소년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숙인 한 건장한 신도의 옷깃이 벌어졌던 것이다. 소년은 사내의 가슴팍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차가운 금속성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분 명 단검의 자루였다. 소년의 손이 허공에서 멎은 순간, 사내 역시 낌새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복사 소년과 암살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맞 닥뜨려졌고, 그 험악한 시선에 질려버린 소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제단 뒤에서 이 모습을 보던 핸솔 추기경의 미간이 살짝 일그 러졌다…………….
“카, 칼?!”
순간 암살자는 단검을 뽑아들며 몸을 솟구쳤다. 예기치 못한 사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음 순간 일어선 다른 사내들의 동작이 너무 불규칙적이 었다. 단검을 들킨 암살자는 의자를 박차고 뛰어올랐고 그의 손이 복사 소년의 어깨를 쓸고 지나간 순간 소년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으아아악!”
암살자는 그대로 몸을 돌려 특별석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미 신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암살자에게는 불행하게도 이 예배당 안에는 노회한 사내들이 너무 많았다. 거친 수부들, 다림 상인들, 그리고 각국의 대표부로 뽑힐 정도로 노련한 사내들. 그들은 당황 속에서도 순간적으로 움 직이며 암살자를 압박했고 역시나 풋내기는 아니었던 암살자는 특별석으로 뛰어가는 대신 의자 위로 솟아올랐다. 신도들이 고함, 혹은 비명을 지르 기 직전, 그들의 머리 위로 길다란 고함이 울려퍼졌다.
“누가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을 막는가!”
그들의 아내나 딸이라 하더라도 사내들의 움직임이 덜컥 멎어버린 것을 지나치게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포의 기류가 흐르며 악취가 풍길 정도였 다. 사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을 때,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내 하나가 의자 위의 키 드레이번에게 천으로 둘러싸인 무엇인가를 던졌다. 키 드레이 번은 받아든 것을 풀어헤쳤고 그러자 그 안에서 화려한 롱 소드가 튀어나왔다. 키 드레이번은 롱 소드를 위로 들어올리며 다시 고함 질렀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이 복수의 밥이 될 것이다!”
무시무시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키 드레이번은 의자 위에서 뛰어내렸고 그 주위에 있던 사내들은 기겁한 모습으로 물러났다. 성당 안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비무장이었고 더군 다나 키 드레이번이라는 이름에 질린 상태였다. 혼란과 비명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밟아 죽일 듯한 모습으로 도망쳤고 그래서 키 드레이번과 다른 암 살자들은 탄탄대로를 달리듯 예배당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달려가는 그들 앞쪽으로 폴라 대사와 율리아나 공주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있었다. 폴라 대사는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도망치세요, 공주님 – !”
그리고 폴라 대사는 암살자들의 진로를 막아서며 두 팔을 좌악 펼쳤다. 그런 그녀를 보며 키 드레이번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복수를 들어올렸다. 폴라 대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
비명과 소음이 가득한 가운데서도 이상하게 잘 들리는 낮은 목소리가 있었다. 복수를 휘두르며 달려가던 키 드레이번은 그 목소리에 멈춰 서고 말았 다. 다른 암살자들 역시 멈춰 섰고 혼란 속에서 허둥거리던 신도들 역시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고요 속 에 갑자기 빗줄기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키 큰 사내가 예배석 위에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산책 도중이었다는 듯이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태평한 모습으로 사내는 물끄러미 암살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키 큰 사내는 주머니 속에 든 왼손을 천천히 뽑았다.
마술 같았다. 사내의 왼손을 따라 롱 소드가 나타났다. 주머니에 낸 구멍을 통해 다리에 묶어둔 검을 뽑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자명했지만 혼란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의 눈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즉 ‘바지 주머니에서 롱 소드를 꺼내는’마술처럼 보였다. 암살자들 역시 다른 신도들처 럼 숨을 멈춘 채 그 경이로운 모습을 바라볼 뿐 움직이지 못했다. 키 큰 사내가 롱 소드를 완전히 뽑아들었을 때 몇몇 사람들은 그 롱 소드가 키 드레 이번의 손에 쥐어쥔 복수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욱 거세어지는 빗소리 속에서, 롱 소드를 뽑아든 사내는 예배석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 키 드레이번의 앞을 막아섰다.
“키 드레이번이라고 했나.”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지만 그 목소리엔 무서운 분노가 담겨 있었고 그래서 예배당 내의 사람들은 그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소름 끼치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때, 사람들의 귀에 이 사태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하하하!”
폴라 대사는 기막힌 얼굴로 율리아나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황당해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나 공주는 겨우 손으로 입을 가로막았을 뿐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키 드레이번과 암살자들은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침착을 되찾을 수는 있었다. 키 드레이번은 복수를 사납 게 휘두르며 외쳤다.
“그렇다! 나는 자유호의 선장, 제국의 공적 제1호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이다! 감히 남해의 제왕인 나를 가로막다니, 죽고 싶은 게냐!”
그 목소리의 담긴 엄포는 가공할 수준이었지만 율리아나 공주는 이제 쓰러질 지경으로 웃어대었다. 신부들과 대사들과 신도들 모두가 키 드레이번 의 목소리와 공주의 웃음 소리 때문에 갈피를 못 잡고 당황해하고 있을 때 키 큰 사내가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천박한 원숭이 같은 놈………….. 북풍(Northwind)을 향해 부는 북풍도 있는가.”
“뭐라고?”
콰루루룽! 거세어지던 빗줄기 사이로 기어코 낙뢰가 떨어졌다. 세상이 초절적인 백색으로 가득 찬 순간 키 큰 사내가 천둥을 닮은 목소리로 외쳤다.
“한번 더 키 드레이번이라고 주장해 보라. 나, 키 드레이번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