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2화
다림 교외에 있던 노스윈드 해적들에게 키 드레이번의 처형 소식이 전해진 것은 새벽 무렵이었다. 정찰을 위해 다림 시내에 보낸 해적이 포고문을 발견하고는 목숨을 걸고 성벽을 넘어 그들에게 달려왔던 것이다. 해적은 성문 경비병이 쏜 화살에 다리를 다쳤지만 쉼없이 밤길을 달려와서는 선장 들에게 포고문을 전달하고서야 졸도했다. 포고문을 읽은 하리야 선장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아찔함을 느꼈다.
“제기랄! 내일 제4시라고?”
라이온은 입에 거품을 물고 다림으로 쳐들어가자고 외쳐대었다. ‘지금 당장 다림으로 쳐들어가서 총독관저에 불을 지르고 키 선장님을 구출해 온다. 그리고 약속을 저버린 글라두스 총독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것이 라이온의 기나긴 외침 속에서 선장들이 파악해 낼 수 있는 짧은 의미였다. 밧 줄에 묶인 채 그 회담을 듣던 슈마허는 저 완벽하게 미친 놈의 목표가 된 글라두스 총독에게 연민을 느꼈다.
킬리 선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해, 라이온.”
“왜 말이 안 퇸타는 커야!”
라이온이 외치기도 전에 돌탄 선장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킬리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이 망할 친구야. 지금은 성문이 닫혔단 말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도 성문은 열리지 않을 거야! 그런 처형이 있을 땐 항상 성문은 봉쇄되고 주요 도로는 경계된단 말이야. 강제 돌파? 이런 인원이 성벽 가까이 다가가면 당장 들킬 테고 그 경우 우린 총독 관저는커녕 성문도 돌파하기 힘들 거야.”
“퇴튼 안 퇴튼 밀어풀쳐 포는 커야! 토리카 없잖아!”
“그러다 다 죽자고! 전부 다 죽잔 말이냐!”
“……이 캐 같은 타림 총톡 차식. 판트시 폭수할 컷이타!”
돌탄 선장은 오열하며 외쳤다. 킬리 또한 앞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리야는 계속 바라보면 글자가 바뀔지도 모른다고 믿는다는 듯이 포고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두캉가 선장은 망연한 얼굴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오늘만은 그 거대한 체구가 왠지 왜소하게 보였다. 다른 해적 들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서로를 쳐다보거나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다. 그때였다.
콰앙! 선장들이 기겁하며 돌아본 곳에서는 오닉스가 나무를 후려친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오닉스가 주먹을 들어올렸을 때 해적들 모두는 나무 껍 질에 새겨진 선연한 주먹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분노로 온몸을 떨던 오닉스는 짤막한 손짓을 매우 힘들게 보내었다.
‘키 드레이번을 구해야 한다.’
자신도 모르게 손짓을 보내려던 하리야 선장은 곧 정신을 차리곤 말을 했다.
“어떻게 말인가?”
‘모른다. 하지만 구해야 한다.’
“지금 억지 부릴 땐가, 오닉스 선장?”
‘억지가 아니다! 키 드레이번이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대사를 생각하라!’
대사 선장들의 얼굴에 의심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닉스는 다시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대사는 말했다. 자신이 더 이상 철탑의 주인이 아니라고. 키 드레이번이 철탑의 주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올 주인을 위해 철탑을 지키고 있겠다 고 말했다. 키는 비웃었지만, 대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철탑의 무시무시한 공명 속에서 해적들은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율리아나 공주와 그 일행들이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도 해적들은 그 뒤를 쫓기 는커녕 자신들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러니 키와 대사의 싸움에 뛰어드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래서 무수한 해적들이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키와 철탑의 인슬레이버는 온세상에 그들 둘뿐인 것처럼 싸웠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 중 하나만이 남아야 되는 것처럼 싸웠다.
키가 부러진 오른팔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다면 인슬레이버는 철탑의 진동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키는 몇 번이나 대사의 하얀 몸에 붉은 검 흔을 그었지만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대사는 그 거대한 몸으로 키 드레이번을 옥죄려 들었지만 번번히 키를 놓쳤다. 고통 때문이기도 했지 만, 복수 때문에 섣불리 다가서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싸움은 의외의 이유 때문에 조속히 끝났다. 무수한 군대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패배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들으면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 때문에. 훗날 슈마허는 그 사태에 대하여 ‘우수한 무장은 병참으로 싸우는 법’ 어쩌고 하는 논평을 덧붙였지만 그때마다 라이온은 한심스 러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대사는 허기를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대사의 움직임이 이상스레 느려진다고 여긴 키는 한 차례 검을 맹렬히 휘두른 다음 몸을 뒤로 빼내었다. 대사는 쫓아오기는 했지만 동작은 완연히 느려져 있었고, 그래서 곳곳에 빈틈이 보였다. 키는 세차게 몸을 날려 대사의 턱 아래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복수를 크게 쳐올렸다.
“크가아아갓!”
대사가 사납게 몸부림치는 바람에 키는 깔려 죽을 뻔했다. 간신히 몸을 빼낸 키는 복수를 높이 들어올렸지만, 그러나 내려치지는 않았다. 키는 그 자 세 그대로 온몸을 꼬아대며 요동치는 대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대사의 목엔 시뻘건 자상이 생겨 있었고 거기서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키의 눈엔 이해할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갑자기, 대사의 모습이 변했다.
땅을 뒹굴던 대사의 모습이 문득문득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마치 두 개의 그림이 빠르게 겹쳐지는 것처럼. 키는 재빨리 복수를 앞으로 내밀었 지만 복수는 불타지 않았다. 적대적인 마법을 쓰려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키는 잠자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대사는 오스발이 이미 보았던 모습으로, 그러나 해적들은 처음 보는 모습으로 변했다.
해적들은 목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하얀 여인을 보며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대사의 그 말이, 키 선장님이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의미였나? 돌아올 때까지 지키겠다고 했을 뿐이잖아?”
‘대사다! 젠장. 우리가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어진 그 기나긴 뱀이 무엇을 쉽게 말했겠는가?’
해적들은 오닉스가 던진 의문에 버거워했고 몇 명은 숨가빠하기까지 했다. 이야기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흘러가자 가련한 해적들은 모두 하리야 선장을 바라보았다. 신부님? 그러나 하리야 선장 역시 성전을 꼭 움켜쥐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던 해적들의 시선이 갑자기 한 곳으로 몰렸다. 그들 모두가 거의 동시에 그들의 불가사의한 동행을 떠올렸던 것이다. 킬리 선장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마녀님! 우릴……… 으악!”
“마법사다! 이 망할 자식아, 마법사란 말이다!”
킬리는 부주의의 대가로 커다란 혹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당장은 더 급한 용건이 있기에 잠시 혹에 대해서는 잊어두기로 했다. 킬리 선장은 애걸하는 어조로 외쳤다.
“마법사님! 우릴 도와줄 수 없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모두를 다림 시내로 날려보내 주신다거나 다림의 성벽을 무너뜨려주신다거나…..”
“이런. 넌 내가 하이낙스인 걸로 착각하는 거냐?”
“젠장, 그때는 때아닌 눈발도 부르고 폭풍도 불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그렇게 쉽게 느껴지나? 그건 엄청난 일이었다. 이 멍청아. 트로포스라는 저 맛간 녀석이 있어서 내가 별로 빛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 정도의 마법사가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줄 아나? 그랬다간 너희놈들은 예전에 박살났을 것이다. 제국이 나 정도의 마법사 한 명만 배에 태워보냈어도 폭풍 으로 너희들 전부를 침몰시킬 수도 있었을걸.”
하리야 선장이 침중하게 말했다.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뭐?”
“그랬던 적이 있었단 말입니다. 마법사 세실. 말씀하신 대로 한 명은 아니었습니다만, 어쨌든 데샨 카라돔의 마법사들이 우릴 공격했던 적은 있습니 다. 트로포스 선장이 막았죠. 그 때문에 우리가 마법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했었나 보군요.”
세실은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저 애꾸눈 녀석이…………?”
세실은 멍한 표정으로 트로포스를 바라보았다. 트로포스는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누워 있었고, 세실은 그 얼굴에서 데샨 카라돔의 마법사들을 대적했 던 위대한 마법사의 풍모를 찾지 못해 심히 당황해야 했다. 킬리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어쨌든, 도저히 방법이 없단 말입니까?”
“응? 없어. 내 지팡이가 있었다면 뭔가 수를 내어볼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지팡이? 트로포스의 지팡이를 쓰시면 되잖습니까!”
“허어 — 이 바보야. 다른 마법사의 지팡이는 쓸 수 없어.”
킬리 선장은 대답하는 대신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른 선장들도 기막혀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해적들을 바라보던 세실은 문득 조금 전 킬리의 머리에 혹을 만들 때 자신이 무엇을 썼던가를 떠올렸다.
세실은 헛기침을 하며 트로포스의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말했다.
“흠. 크흠! 어, 그러니까 이런 용도로는 쓸 수 있다 하더라도, 에, 그러니까 이런 용도로도 써서는 안 되는 거지만, 그러니까 마법사의 지팡이는 그 수족 같은 것이라, 음음. …그런 눈으로 사람 쳐다볼 거야, 정말!?”
“마법사 세실. 다른 마법사의 지팡이를 쓸 수는 없다고 하셨는데, 그건 불가능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무례함을 말하는 겁니까?”
“너희들은 자기 칼을 다른 사람이 만지게 하나?”
“그건 무례함이지요. 타인의 검을 써야만 되는 상황이라는 건 있습니다. 그럼 당신도 트로포스 선장의 지팡이를 쓰실 수 있겠군요? 트로포스 선장도 분명히 찬성할 겁니다.”
“젠장, 불가능할 거야. 내가 조금 전에 수족이라고 그랬지? 팔이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팔을 잘라다 붙이면 그 팔을 쓸 수 있겠나?”
세실리아는 협박이나 으름장을 기대했기 때문에 하리야 선장의 간절한 부탁은 그녀에게 약간의 감동을 주었다.
“한번 시도나 해주십시오, 제발. 저희들은 반드시 키 선장님을 구해야 합니다.”
“……도대체 왜지? 그는 너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자기 멋대로 다림으로 들어간 거야. 그런 주제에 그 자에게 자길 구해 달라고 말할 자격 이 있을까?”
“아마 그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틀림없이 원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우리가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면 오히려 화를 낼 겁니다. 그런 사내죠.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그에게 집착하는 거지?”
“마법사 세실. 당신은 저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 아실 텐데요.”
뭘 안단 말이야? 라고 되묻지는 못했다. 세실은 모닥불빛 속으로 떠오른 하리야의 붉은 얼굴을 보며 침묵했다. 모닥불 속의 잔가지들에서 탁탁거리 는 소리가 두드러졌다. 불길의 일렁거림에 따라 하리야의 얼굴이 계속 바뀌어갔다.
“인생의 어느 국면들에서, 갑자기 모든 것을 뛰어넘어 단숨에 영혼의 끝까지 도달해 버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낯선 고요함에 놀라고 있을 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소리, 평소 때는 무수한 잡념들의 파도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려옵니다. 제게는 그런 때가 세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 소리를 들은 것은 키 드레이번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당신에게도 분명히 그런 때가 있었을 거라 믿습니다.”
세실은 가슴을 에는 충격 속에서 하리야를 마주보았다. 세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리야 선장은 세실의 눈에 고이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모닥불빛 속에 한없이 반짝이는 눈물을 보며 하리야 선장은 낮게 속삭였다.
“있었군요.”
“그래. 있・・・・・・었지.”
하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세실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마법사 세실?”
“그러지 못했어……… 못 들은 척했어.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어. 난………… 그럴 수가………… 무서웠어………… 그럴 수가 없었어. 미안해………… 너무 무서워……”
세실리아는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채 하리야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있었던 것은 하리야 선장의 엄숙한 얼굴이 아니 었다. 그녀는 제국의 공적 제1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국의 공적 제1호는 두 명. 공교롭게도 그녀는 두 명 다 알았고, 바로 그 순간에도 세실은 두 명 의 사내들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다음 순간, 세실은 트로포스의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키는 여덟 시간째 같은 자세로 돌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 사실에 대해 별로 신경 쓰고 있진 않았다. 대해적은 철탑에서 대사와 나누었던 대화 를 생각하고 있었다.
키는 상처 입은 대사의 요구에 응했다. 그래서 키는 다른 해적들을 모두 바깥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철탑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해적들은 모두 우 려를 표시했지만 키는 두 팔로 가볍게 바라미를 들어올린 다음 철탑을 향해 걸어갔다.
철탑의 금속벽을 통과할 때는 키도 약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 벽을 통과한 오스발의 모습을 떠올렸다. 키는 거침없이 나아갔고, 잠시 후 그는 바라미를 껴안은 채 사방이 흰 건물 안에 서 있었다.
바라미는 한손을 힘겹게 들어올렸고, 키는 그녀가 가리킨 곳에 바라미를 앉혔다. 바라미는 눈을 감은 채 호흡을 조절하는 듯했고 키는 잠시 그 모습 을 내려다보았다. 사방이 온통 하얀 이 건물 안에서는 바라미의 하얀 옷이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더욱 끔찍하게 보였다. 키는 바닥에 떨어진 핏방 울들과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피에 대한 혐오감이나 공포는 아니다. 하얀 세상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색깔들이었다. “앉으시지요.”
키는 고개를 들었다. 바라미는 두 눈을 뜬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곤 코트 자락을 치우며 무엇인지 모를 조형물 위에 털썩 앉았다.
키는 바라미를 바라보았고, 재미있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라미의 목에 나 있던 상처가 줄어들어 있었다. 그녀의 옷을 섬뜩한 색깔로 물들이던 피도 많이 사라져 있었다. 키가 바라보는 동안 상처와 피들은 모두 사라졌다. 키는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고, 거기에 여전히 피가 묻은 것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바라미는 여전히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그 모 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복수 때문일 겁니다.”
키는 말라붙은 피를 털어내듯 두 손을 탁탁 친 다음 손을 내렸다.
“데려다줬으니 이젠 가보고 싶군. 용건은 더 없나?”
· 질문하지 않습니까?”
“무슨 질문을?”
“무수한 질문이 가능할 텐데요. 왜 덤볐는가, 너는 누구인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관심없어.”
“그럼 이렇게 급히 떠나시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관심은 어디를 향하는 거죠?”
“오스발을 쫓아야 한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키는 다시 다림의 감옥으로 돌아왔다.
거무튀튀한 돌바닥 위로 길게 그어진 흰 선이 나타났다. 그 선은 열린 문에서 새어들어오는 빛이었고, 순식간에 직사각형으로 바뀌었다.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래? 밤새 한숨도 안 잔 건가?”
키는 고개를 들어 피로한 눈으로 앞을 보았다.
새벽도 지나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공기의 냄새는 청명했고 사위에서 따스한 기운이 스물거리며 기어나오는 봄의 아침이었다. 감옥의 돌벽 도 봄은 막지 못했다. 키에겐 처형일 아침이었지만, 키는 거기에도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직사각형 빛의 저편에 검은 그림자들이 떠올랐다. 검은 그 림자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네 명의 간수들이 파이크를 쥔 채 감방을 경계하는 동안 두 명의 간수가 감방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스스로의 악운에 대해 슬퍼하는 얼 굴이었다. 키는 두 손을 들어올렸고, 그러자 두 명의 간수들은 맹렬히 뒤로 물러났다.
“수갑을 풀 것 아닌가?”
간수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키를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왔다. 그들은 키의 수갑을 풀고 다리의 족쇄도 풀었다. 키는 천천히 일어났다. 간수 중 하 나가 말했다.
“팔을 뒤로 돌려주십시오………… 선장님.”
키는 간수를 내려다보았다. 밧줄을 들고 있던 간수는 고개를 약간 숙였지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키는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간수는 키의 손을 뒤로 묶었다. 키는 감방 밖으로 나왔고, 두 명의 간수들은 양쪽에서 키의 팔을 붙잡았다.
탕탕탕!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려대는 소리에 놀란 오스발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조금 후 노크 소리를 배경으로 더 엄청난 소리가 들 려오기 시작했다.
“오스발! 오스발, 어서 일어나요! 공주가 노예를 깨운다면 그거 얼마나 웃기는 일이 될 건지 상상 못해요! 어머? 이거 무슨 소리죠?”
“치,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소리였습니다. 공주님. 아이고, 머리야. 도대체 왜 직접 오신 겁니까? 보통 이럴 땐 하인을 불러 ‘오스발을 오라고 해라’ 하시는거라 생각됩니다만?”
오스발은 한손으론 뒤통수를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 힘겹게 바지를 꿰어입었다. 그 동안에도 율리아나 공주의 다급한 목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다른 하인들? 다 나갔어요. 그리고 우리도 빨리 나가야 해요!”
“예? 다 나가다니오?”
“키 드레이번이 처형된대요!”
오스발은 기겁하며 되묻는 대신 재빨리 옷을 입기로 했다.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은 오스발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율리아나 공주가 치마폭에 주 먹을 파묻은 채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손 괜찮으십니까? 그런데 키 선장님이 처형된다고요?”
“그래요! 조금 후, 어, 네 시간 뒤에!”
그리고 율리아나 공주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오스발은 황급히 물러났고 방 안으로 들어온 율리아나 공주는 사방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핸솔 추기경이 어젯밤 총독부를 기습 방문했어요. 무슨 공갈 협박을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날치기로 처형이 결정된 모양이에요. 우리들도 오늘 아침에서야 겨우 확인했어요. 이미 성문 봉쇄령이 내려져 있었고 오늘은 강아지 한 마리도 다림을 들락날락하지 못해요. 다림의 치안 헌병들은 모두 패검한 채로 요소요소에 배치되었고요. 이렇게 급하게 처형하는 건 아마도 해적들이 다림에 잠입하기 전에 키 드레이번을 처형하기 위해서인가 보지 요. 하지만 사실 해적들의 전언은 이미 도착했어요!”
“전언이 도착했다고요?”
“예! 어젯밤에 폴라 대사님이 총독부 방문하신 것 아시죠? 바로 그때 해적들의 전언을 받게 되신 모양이에요. 해적들은 키를 처형할 경우 다림을 지 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내용의 협박을 보냈었어요. 그리고 폴라 대사님에겐 자기들의 체포를 감행할 경우 대사관을 습격해서 나를 죽이겠다는 협박 을 보내었고요. 그래서 대사님은 지금 그 처형을 연기시킬 방법과 나를 도피시킬 방법을 찾느라 미쳐가고 있어요. 그리고 나는 지금 속이 메슥거리고 요. 으윽. 갑자기 왜 이런 거지?”
“그야………… 한 자리에 가만히 안 계시고 계속 빙글빙글 돌면서 말씀하셔서 그러신 겁니다. 여기 좀 앉으시지요.”
오스발은 의자를 끌고 와 공주를 앉혔다. 율리아나는 호흡을 가누며 힘겹게 말했다.
“대사님이 대사 관저의 관료들과 하인들뿐만 아니라 상관 사람들까지 모조리 끌어와 대책 논의중이라 저쪽은 난리도 아닌 모양이에요. 난 거기 끼 지도 못하고, 불안해서 누구랑 이야기는 해야겠는데 전부 다 앞을 가로막으면 찔러버리겠다는 얼굴을 한 채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그래서 제게 오신 겁니까?”
“그래요. 어쩌죠? 우린 어쩌면 좋을까요?”
우리? 오스발은 그 말에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대사님과 대사관의 관리님들께서 좋은 대책을 마련하실 겁니다. 제게 물어보신다면… 마실 거라도 좀 가져올까요? 아니, 그것보단 공주님 방으 로 가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좀 다른 건 없어요?”
“글쎄요. 키 선장님이 네 시간 뒤에 처형된다고 하셨습니까? 그럼 처형을 연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겠군요. 총독님께 직접 부탁해도 안 됩니까?”
“사라졌대요. 어디에 숨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글라두스 총독님은 연락망을 다 끊어놓고 있어요. 아마 처형장에 나타날 때까진 숨어다닐 생각 인가 봐요. 그리고 다른 총독부의 관리들은 우리 쪽 사람들이 찾아갈 때마다 술래잡기를 시키고 있고요. 그건 저기 가서 물어보쇼. 담당자가 지금 자 리에 없는데요. 미리 약속하셨나요? 그거요? 금시초문이군요. 내 소관 아니니 요기 가서 물어보시죠. 어라? 아까 만났던 분이네. 무슨 일이죠?”
“아아………… 그럼 반드시 키 선장님을 처형할 결심인가 보군요. 그럼 다른 해적들의 공격을 피해 공주님이 도피하실 길을 찾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 오스발.” 대답하는 목소리에 율리아나 공주와 오스발은 고개를 돌렸다. 폴라 대사가 문가에 서 있었다. 깔끔한 복장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 얼굴엔 피로가 가득했다. 폴라 대사는 목례하는 오스발을 무시하면서 율리아나 공주에게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공주님. 가시죠. 준비하셔야지요.”
“준비? 무슨 준비요?”
“오스발의 말대로 처형 연기는 힘들 것 같아요. 도피로 확보를 명령해 뒀어요. 당장은 할일이 없으니, 근사한 구경거리는 놓치지 않도록 해야겠지 요.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처형되는 장면을 봤다는 건 분명 오랫동안 자랑거리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