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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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3화


처형장으로 향하는 대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고작 어젯밤에 포고령이 나왔다는 것만 놓고 본다면 대로를 가득 메운 구경꾼의 인파는 놀랄 만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 모두는 폴라 대사가 말한 것 과 같은 이유로 대로에 나왔을 것이다. 키 ‘노스윈드’ 드레이번. 제국의 공적 제1호가 처형되는 것이다. 대중의 절대수는 언제나 모레보다 더 먼 미래 를 볼 수 없는 자들이 차지하고 있고, 약삭빠른 다림 시민들이라 해도 그 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고 환호하며 처형장 을 향했다. 그리고 드물게 섞여 있는 자들, 즉 모레보다 더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은 아직까진 이 상황에 대해 근심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밝은 눈을 가졌기에 키 드레이번이 전무후무한 함대전의 결과로 붙잡힌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볼 수 있었고, 그래 서 노스윈드 선단의 절대수는 아직 그대로라는 사실도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빛과 속삭임을 던졌다. ‘키 드레이번 의 칼 이름이 뭐였지?’

그렇지만 그들은 밝은 눈을 가졌기에 제국의 공적 1호의 처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잔존 해적들의 복수가 꺼림칙하긴 하지 만, 노스윈드 해적들도 그 구심점인 키 드레이번이 없다면 분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 자위하며 그들은 애써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대로를 메 운 얼굴들은 전부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마차 뒤편의 전망 좋은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오스발은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마차가 다림 총독부에 면한 중앙 광장으로 향하면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광장으로 통하는 네 개의 대로 중 하나만이 개방되어 있었는데 그 입구에서는 일종의 병목 현상이 생기고 있었 다. 치안 헌병들이 입구를 막고는 엄한 얼굴을 한 채로 소지품 검사를 하고 있었다. 무장은 절대 반입 금지였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민들은 무 기를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검사의 손길은 엄했다. 그러나 카밀카르 대사관의 마차와 그 호위병들은 광장의 다른 입구 봉쇄된 세 개의 입 구 중 하나 – 로 들어섰다. 그곳을 막고 있던 치안 헌병들은 카밀카르 대사관의 마차를 통과시켰고 그러자 마차는 곧 총독부 계단 앞에 설치된 임시 귀빈석 근처에 서게 되었다.

폴라 대사와 율리아나 공주가 마차에서 내렸다. 오스발은 재빨리 공주를 부축했다. 대사관의 호위병들은 마차와 함께 총독부 뒤편의 마당으로 물러 났고 그들은 두어 명의 호위병과 함께 치안 헌병의 안내를 받아 귀빈석으로 안내되었다. 오스발은 율리아나 공주의 뒤편에 섰다.

폴라 대사는 자리에 앉기도 전부터 바쁘게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모모 영사님, 반갑네요. 모모 사무관님. 나오셨군요. 모모 지배인님. 키 드레이번이 처형되다니 마침내 제국으로선 큰 시름을 더는 일이군요. 졸도해 버릴 정도로 복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아무렴요. 그렇다 마다요. 아, 이 분은 라힘턴 전하의 삼공주님이신 딜비움 그랜다이 레보라 아크 리 바레린 길리데아 율리아나 카밀카르 공주님이십니다. 오! 이 분이 바로 세기의 신부님이시군요. 운운.

오스발은 그런 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었기에 조용히 주위를 관찰할 수 있었다. 광장 중앙에는 커다란 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위엔 삼엄해 보이는 교수대가 높이 서 있었다. 치안 헌병들은 일정한 선을 긋고는 구경꾼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퍽이나 힘 들어했는데, 다림 시민들의 질서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구경꾼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장 주변의 높은 건물들에선 사람들이 창문 밖으로 미어터질 듯이 고개들을 내민 채 광장을 구경하고 있었고 심지어 옥상이나 지붕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오스발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귀빈석의 한 모퉁이였다. 오스발처럼 한가롭게 주위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 주위의 사람들이 친근한 태도로 말을 걸려는 것으로 보아 저명한 사람인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한두 마디로 가볍게 대답할 뿐 어느 한 곳에 주의를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에게 애 써 말을 붙여보려 드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남자의 눈이 오스발과 마주쳤다.

남자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남자는 스르륵 일어나더니 오스발을 향해 곧바로 걸어왔다. 오스발은 혹시 똑바로 바라보았다고 화내는 건 아닌가 생 각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안녕.”

안녕? 오스발은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조금 전 어떻게든 그와 대화하려 들던 많은 이들의 눈에 의아 함과 약간의 분노가 스치는 것을 보며 오스발은 어깨를 움츠렸다.

“안녕하십니까. ……서.”

“아, 바탈리언 남작일세. 자넨 이 레이디의 하인인가?”

“이 분의 노예인 오스발이라고 합니다.”

그때 간신히 대화의 고리에서 벗어난 율리아나 공주가 동그래진 눈으로 오스발과 바탈리언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바탈리언 남작은 미소를 짓고는 허리를 숙였다. 무슨 뜻인가 의아해하던 율리아나 공주는 조금 늦게 손을 올렸고 남작은 그 손등에 키스했다.

“바탈리언 남작이라 합니다.”

“율리아나입니다.”

“아! 세기의 신부님이시군요.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바탈리언 남작은 다시 오스발을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말할 듯이 오스발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래도 장소도 그렇고 여건도 좋지 않다고 생각 한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오스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스발이 이 행동의 의미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때 남작은 이미 율리아나에게 인사한 다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오스발에게 손짓했다. 오스발은 허리를 숙였고 율리아나 공주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분이 다림에 있을 줄은 몰랐군요, 오스발, 바탈리언 남작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거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전 오늘 처음 저 분을 뵙는 건데요.”

“그래요? 바탈리언 남작을 모르나요?”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태도를 보아하니 나보다 당신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던데. 흐음. 나 속상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해 하는 거라고요. 우리 시대 최고의 문객이 왜 세기의 신부를 앞에 놓고 그 하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요? 저 남작은 당신이 날 구해낸 건 모를 테 니 그게 궁금한 것도 아닐 텐데.”

오스발은 대답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미소 지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런데요, 혹시 노스윈드 해적들이 보여요?”

“공주님.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저는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없군요.”

“으흠 그런데.”

정숙을 요하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사람들의 머리가 전부 총독부 건물로 향했다. 그 정문으로부터 몇 명의 관리들과 함께 글라두스 총독이 걸어나왔다. 폴라 대사는 관복을 차려입은 글라두스 총독의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참기 어려웠고 그건 다른 고위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글라두스 총독 역시 자신의 모습에 비웃음을 보내고 싶지만 참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함성이 터져나왔다.

“다림 총독 만세!”

“글라두스 총독 만세!”

도대체 글라두스 총독이 환호받을 일을 한 것이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흥분한 군중들은 환호를 보내었다. 글라두스 총독은 황당했지만 대충 손을 흔들어주곤 율리아나 공주가 있는 귀빈석 쪽으로 걸어왔다. 귀빈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총독은 그들에게 눈인사를 던지며 자 신의 자리로 걸어갔다. 폴라 대사는 글라두스 총독이 그녀의 앞을 지날 때 총독을 사납게 노려보려고 결심하고 있었지만, 총독은 그녀를 외면한 채 재빨리 지나쳤다.

글라두스 총독이 제자리에 앉자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렸다. 마침내 총독부 건물에서 무장병들이 걸어나왔다. 나팔 소리도 소용없이, 그 모습을 본 군 중들은 열광에 못 이겨 미친 듯한 소음을 질러대었다. 이윽고 무장병들의 뒤편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키 큰 사내가 팔을 뒤로 돌린 채 두 명의 병 사들에게 둘러싸여 걸어나왔다.

광장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나팔수들은 그들의 자부심에 굉장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나팔수들 자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숨 소리마저 죽이며 키 드레이번을 쳐다보았다. 너무 기괴한 고요함. 키를 둘러싸고 걸어오던 무장병들도 이 침묵에 당황하여 흠칫거리거나 주위를 둘 러보곤 했다.

그러나 키는 멈추지 않았다.

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왔다. 광장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애 울음 소리 하나라도 들릴 법한데 ・어린애를 사형장에 데려온 생각 부족한 아낙네들도 꽤 많았다.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키 드레이번만은 그런 고요함이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 은 걸음걸이로 걸어내려왔다. 뒤로 돌린 두 손은 묶여 있다기보단 뒷짐을 지고 있는 것 같았다.

탁,탁,탁, 경쾌한 발자국 소리가 유달리 잘 들리는 건 광장이 그토록 조용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당황에서 풀려난 병사들이 허둥지둥 키의 뒤를 따르려 했을 때, 키는 이미 교수대가 놓인 단상 앞에 서 있었다. 교수대를 흘끔 올려다본 키는 가볍게 뛰어 단상 위에 훌쩍 올라섰다. 사람들은 교수대를 돛대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키의 동작은 갑판 위를 달리는 가장 유쾌한 선원의 발놀림처럼 경쾌하 고 가벼웠다. 일련의 춤 같던 키의 동작이 멎었다.

그리고 키는 오만한 시선으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군중들은 당혹했고 두려움까지도 느꼈다.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고, 그 중 한 명이었던 바탈리언 남작은 크게 감명받았 다.

“내 생애에 일자와 다수의 전통적 역학 관계가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더군다나 자신이 처형될 교수대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볼 수 있을 줄은……”

조금 후 뒤처졌던 병사들이 단상 위에 올라오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겨우 당황에서 헤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다림 시민들은 키 드레이번이 홀로 교수 대 위에 서 있었던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그들 남은 생애 동안 결코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다림 총독부의 관리 하나가 헛기침을 해대며 교수대 위로 올라왔다. 두루마리를 펼쳐든 처형 관리는 몇 호흡을 고른 다음 그것을 읽어내렸 다.

먼저 처형 관리는 키 드레이번의 죄상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죄상들에 대해 제국 각국의 재판소에서 내려진 판결들을 나열하면서 그 사 이에 레갈루스 재판부가 내린 판결을 슬쩍 끼워넣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작게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레갈루스 재판부가 키 드레이번에게 내린 판결 은 금고 3년형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키 드레이번이 레갈루스의 사략 함대로 활약하던 시절 그의 죄목을 대부분 삭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키 드레이번은 시종일관 상대방을 무시하는 듯한 무표정으로 처형 관리의 발표를 청취했다. 죄상과 처벌의 목록을 다 읽어내린 처형 관리가 키 드레 이번을 교수형에 처하고 그 시체는 여덟 토막 내어 제국 변방 곳곳에 보낸다고 말했을 때도 키의 얼굴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처형 관리는 사방이 고요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키의 무표정한 얼굴을 향해, 처형 관리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그럼, 죄인은 남길 말이 있는가?”

키의 얼굴에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씨익 웃었다.

“그대들의 장수를 기원한다.”

처형 관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 극악무도한 죄인이 마침내 참회하고 감동적인 고별사를 남길 생각인 것이군.

“그리고 너희들의 나날이 질병과 상처와 배신과 증오와 사고와 재난으로 점철되기를. 남자들이 일군 모든 밭엔 독초와 덤불만이 가득할 것이다. 여 자들이 가진 모든 신생아는 일그러진 형상의 기형아일 것이다. 살아서 맛볼 수 있는 모든 저주를 받은 끝에 아비는 자식의 손에 맞아 죽고, 자식은 아 비의 발에 밟혀 죽으리라. 아내는 남편의 검에, 남편은 아내의 독에 죽으리라. 내 모든 저주가 끝날 때까지 죽음은 허락되지 않는다. 저주를 피하고 싶은 놈들은 지금 자기 목을 찌르라고 권하고 싶군.”

처형 관리는 하얗게 된 얼굴로 주춤 물러났다. 군중들 대다수도 신음이나 약한 비명을 질렀고 그들 가운데 섞여 있던 담대한 선원들도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의 저주를 들으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율리아나 공주는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무섭다고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키는 목청껏 웃었다.

“으핫하하하!”

처형 관리는 생침을 삼킨 다음 옆으로 눈짓을 보내었다.

단상 옆에서 기다리던 도리언 원장이 단상 위로 올라와서는 성전을 펼쳐들었다. 키는 도리언 원장이 왜 종부성사를 자청했는지 짐작했지만 아무 말 도 하지 않고 대신 날카로운 비웃음만을 보내주었다. 찔끔한 표정이 되었던 도리언 원장은 호흡을 몇 번 고르고서야 성전을 읽었다.

성전의 봉독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모두 몸가짐을 바로했다. 그들로서는 성전의 구절을 들으며 키의 저주를 잊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 스발은 성전 구절엔 별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무심히 광장을 둘러보았다.

‘혹시 데스필드나 파킨슨 신부가 이 자리에 오지는 않았을까?

오스발은 사람들의 얼굴들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하지만 오스발은 곧 눈의 피로를 느끼고는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늘을 본 오스발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건너편 건물의 지붕 위에서 웬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주위로 뭔가가 자꾸 움직였다.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던 오스발은 손을 들어 이마 위에 펼쳤다. 그제서야 오스발은 사내가 양손에 작은 깃발을 들고 그것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때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도리언 원장의 봉독을 듣고 있던 키의 눈이 매섭게 움직였다.

휘리리리

어디선가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 ・광장이 고요했기에 간신히 들리는 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올렸을 때, 오스발은 갑자기 사내가 흔드는 깃발의 의미를 깨달았다.

율리아나는 뒤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을 덮치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다.

“쿠콰아아앙!”

사람들은 고막이 터지는 기분을 느끼며 귀를 틀어막았다. 다림 총독부의 3층이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유리창이 박살나고 벽이 붕괴되며 파편들이 거대한 폭포수처럼 광장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그때 거의 숨돌릴 틈도 없이 폭음이 다시 들려왔다.

“쿠콰아아앙!”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총독부 옆건물의 지붕 부분이 파괴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굵은 서까래와 기왓장들, 그리고 벽돌과 흙먼지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솟아오른 파편들은 군중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비명이 울렸다. 파편들 사이를 뚫고 바탈리언 남작의 고함이 길게 울려퍼졌다.

“바다! 바다에서 포격을 하고 있다 — !”


누가 뭐래도 노스윈드 함대 최고의 관측사는 그랜드파더호의 포수장 그레고리였고, 생애 최고의 관측을 성공시킨 지금 그레고리는 희열에 들떠 깃 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크하하하! 좋아!아주 정확한 조준이다!”

다림의 내항에서 망원경을 들여다보던 식스 일항사가 엄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좋다! 조준 유지! 2탄 발사!”

“2탄 발사!”

복창과 함께 자유호에서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로 지령이 전달되었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초탄을 발사했던 포수들은 승리의 환호를 내질 렀다. 순식간에 장약이 투입되고 포환이 장전된 다음, 강철의 레이디의 포구에서 다시 길다란 불꽃이 토해졌다. 콰쾅쾅!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숨죽 인 채 대기하고 있던 롱 갤리어스들의 노가 일시에 움직였다. 흑기사, 자유, 페가서스, 질풍의 네 척의 롱 갤리어스가 건현 위까지 물보라를 튀어올리며 다림의 항구를 향해 돌격했다.

거의 동시라 할 만한 시점에 네 명의 포수장들의 신호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림항은 그 이름이 붙여진 이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무자비한 포 격을 받게 되었다.


휘리리 릭! 휘파람 소리 같은 탄도음이 울려퍼진 직후 다시 광장의 건물 두 채가 반파되었다. 콰쾅! 목이 찢어져라 내지르는 비명 속에서 사람 들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율리아나 공주를 덮쳤던 오스발은 일단 안전하다고 생각되자 재빨리 공주를 일으켜세웠다. 그때 폴라 대사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저기! 저기!”

폴라 대사가 가리키는 방향은 광장으로 통하는 입구 중 조금 전 그들이 들어왔던 입구 쪽이었다. 오스발은 그곳에서 쏟아져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전율을 느꼈다. 포격에 의해 수라장이 된 입구엔 치안 헌병들이 도망치고 없었고, 그래서 웃통을 벗은 해적들은 무인지경을 달리듯 귀빈석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심해에서 기어올라온 악마들처럼 보이는 해적들의 선두에는 라이온이 온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비켜라- 앗!”

교수대 위에 있던 키는 재빨리 움직였다. 쿠콰아아앙! 항구 쪽에서 또다시 끔찍한 폭음이 울려퍼졌을 때 키는 넋이 나간 도리언 원장을 걷어찼고 원 장은 허둥거리다가 단상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키는 단상에서 뛰어내려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그곳이 가장 사람이 적은 쪽이었지만, 동시에 강철 의 레이디의 조준점이기도 했다. 반대편 건물의 지붕 위에 서 있던 그레고리는 기겁하며 깃발을 휘둘렀다.


발사 준비를 끝내고 방화 방패 뒤에 몸을 숨겼던 포수들은 비명을 질렀다.

“조준 변경이라니? 제기랄!”

그랜드파더호와 그랜드머더호의 포수들은 모두 똑같은 선택을 했다. 그들은 방화 방패 뒤에서 뛰쳐나와 온몸으로 대포에 부딪혔다. 갈비뼈가 부러 질 정도의 충돌을 감행한 포수들 덕택에 강철의 레이디는 발사 직전에 가까스로 궤도가 바뀌었다. 강철의 레이디는 총독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명 중시켰다. 그리고 그 중 한 발은 공교롭게도 치안 헌병대의 폭약 창고를 강타했다. 콰와아앙! 천지가 뒤집히는 굉음이 울려퍼졌다. 터릿 갤리어스의 해적들은 다림 시에서 솟아오르는 거대한 화염을 보며 미친 듯한 함성을 질렀다.

그 동안에도 네 척의 롱 갤리어스들은 다림 항구에 집중 포화를 가하며 부두에 접근했다. 항구의 건물들과 창고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불꽃과 포연 이 피어올랐다. 파편이 춤을 추고 바다에선 물기둥들이 치솟아올랐다. 보트를 내릴 시간이 없었던 전함들은 아예 동체 충돌을 하듯 부두에 접안해 들 어갔다. 네 명의 조타수들은 무서운 집중력으로 타륜을 거머쥐었다. 자유호의 칸나가 내지른 기성이 꼬리를 길게 끌며 솟아올랐다.

“끼요오오옷!”

전함들이 부두에 닿자 해적들은 각자의 무기를 꼬나든 채 부두를 향해 뛰어내렸다.


글라두스 총독은 자신의 호위병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고는 싱긋 웃으며 검을 들어올리는 사내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어, 어떻게 들어왔나, 라이・・・・・・온 군?”

라이온은 조소하듯이 말했다.

“아아, 알고 보니 다림은 항구더라고요, 총독님. 성벽을 못 넘으면 바다로 들어오면 되지, 뭐. 만 저편에서 여기까지 헤엄치느라고 죽는 줄 알았습니 다.”

“저, 저 배들은 뭐지? 어떻게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건가?”

“미안하지만 대답할 새가 없어. 어이! 너, 너! 총독님을 모셔라!”

부하들에게 총독을 맡긴 라이온은 호위병의 검 하나를 집어든 다음 총독부 계단을 향해 뛰어올랐다. 계단 위에서는 키 드레이번이 잔해와 파편 속에 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온은 환호했다. 

“키 선장 – 임!”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간 라이온은 키를 부축했다. 키는 짤막하게 감상을 말 했다.

“미친놈.”

“맙소사, 이건 꿈이야! 선장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인정해 주시다니!”

키는 신음을 흘렸고 라이온은 껄껄 웃으며 존경하는 선장의 결박을 끊어내었다. 손목을 주무르는 키를 향해 라이온은 조금 전 주워든 롱 소드를 그 에게 건네준 다음 다시 계단 아래를 향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해적들은 도륙을 즉각 중지하고 각자 귀빈석에서 아무나 거머쥔 다음 질질 끌다시피 하며 계단 위로 뛰어올랐다. 인질들을 앞세우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해적들은 잠시 후 총독부 건물을 장악했다. 그레고리는 총독부에 대한 포격을 완전 중지시킨 다음 그 주위에 대한 포화 사격을 지시했다. 결 과적으로 총독부 주변은 불바다가 되었다.


페가서스호의 갑판에서 부하들의 하선을 독려하던 하리야 선장은 고개를 돌렸다. 갑판에 주저앉은 세실리아는 흐트러진 머릿결을 쓸어올리고 있었 다. 하리야 선장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마법사 세실.”

“아까도 말했지만 감사는 알버트 선장에게 해.”

“그 친구…………… 정말 살아 있는 것입니까?”

“자네만큼이나 그렇더군.”

하리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수리호를 돌아보았다. 헤비 갤리어스인 물수리호는 바다사자호와 함께 조금 뒤처진 수면에 떠 있었다. 물수리호의 갑판에서 알버트 선장의 모습을 본 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도 마법사님이 불러일으킨 바람이 아니었다면 제 시간에 도달하지 못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키 선장님께 가보겠습니다.”

“이봐!”

뱃전을 향해 달려가던 하리야는 고개를 돌렸다. 세실은 갑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첫 번째는 뭐였어?”

“예?”

“세 번째는 키를 만났을 때라고 했잖아. 첫 번째는 뭐였지?”

하리야는 잠시 의아한 눈으로 세실을 보다가 곧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처음으로 성전을 완독했을 때였습니다. 그 이후로 전 제 인생의 키를 주님께 맡기기로 결심했죠.”

“그럼 두 번째는?”

하리야는 갑자기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린 채로 말했다.

“처음으로 여자와 잤을 때죠.”

유쾌한 웃음 소리를 들으며 하리야 선장은 뱃전을 뛰어넘었다.

4,000여 명의 해적들의 공격 앞에 다림항은 지리멸렬하게 무너졌다. 치안 헌병을 위시한 다림의 병력 대부분은 성벽 봉쇄를 위해 도시 외곽으로 돌 려져 있었기 때문에 다림 시내는 공백에 가까웠다. 별다른 저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해적들은 다림 시내를 철저하게 파괴하며 진격했다.

포로의 입장으로나마 그 모습을 관전하게 된 슈마허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제국의 전술학에서 포격과 돌격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상식 이었지만, 해적들은 그 상식을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포화 사격으로 전면을 압박하고, 해적들이 전진하면, 대포는 조금 전 해적들이 있던 자리를 강타한다. 어떻게든 고약한 해석을 해보려던, 즉 칼로 등을 찔러대는 짓이라고 생각해 보려던 슈마허는 조금 후 그 생각을 깨끗이 포기했다. 전진과 병행해서 이루어지는 함포 사격은 빠르게 전진하는 해적들의 후방이 취약해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적의 방어 밀도를 낮추며 기동 방어를 저지함과 동시에 아군의 공세력을 배가시키는, 그야말로 꿈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완벽한 지원 사격이었다. 슈마허는 자신의 감상에 솔직 한 성격이었고 그래서 노스윈드 함대의 사격을 혼자서 관제하고 있는 킬리 선장을 보며 아낌없는 환호를 ᅳ 속으로만 ・보내었다.

제4시에 시작된 해적들의 공격은 정오가 조금 지난 제8시 무렵, 다림 총독부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한 상륙조와 총독부를 장악하고 있던 침입조가 합류하는 것으로 거의 마무리되었다. 몇몇 해적들은 재미 삼아 다림 총독부의 레갈루스 국기를 내리고 해적 깃발을 게양하려 했지만 선장들은 그것 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다림에 있는 무수한 국가의 대표부들을 놓고 볼 때 현 시점에서 다림 총독부를 와해시켜 버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선장들은 다림 총독부 자체는 존속시키되 그것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대표부들과의 대화 창구로 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처리가 거의 완료된 것은 일몰이 가까워오는 제11시 무렵이었다. 선장들은 손수 검을 들고 대표부들을 찾아가 치외법권을 인정받 은 채 얌전히 있을 것인지 그 주춧돌까지 파괴될 것인지를 놓고 선택할 것을 종용했고, 대부분의 대표부들은 전자에 찬성했다. 산발적인 전투도 마무 리되었을 무렵, 해적들은 총독부 주위의 잔해들 사이에 캠프를 설치했다. 미노 만에서 선장들을 따라 상륙했던 해적들의 경우에는 참으로 오래간만 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게 되었다며 즐거워했다.

다림 점거가 끝난 시점에서 하선을 명령받은 식스 일항사는 인질들의 처리를 맡게 되었고, 곧 각국의 고위 인사들로 구성된 인질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 인기를 얻게 된 자신에 대해 난감해했다. 그리고 킬리 선장은 함대 지휘를 위해 앞바다에 남았고 돌탄 선장과 오닉스 선장은 다림 치안 헌병들의 무장 해제를 감독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적황색으로 물든 다림의 대로를 걸어가는 키 주변에는 하리야 선장과 두캉가 선장이 몇 명의 해적 과 함께 따르고 있었다. 키는 걸어가면서 무거운 눈을 들어 두캉가 선장을 바라보았다.

“설명을 들어봅시다.”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수단과 목적. 먼저 수단부터 들어봅시다. 도대체 어떻게 미노 만에 있어야 할 함대가 저기 있는 겁니까?”

키는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황금빛 저녁 바다를 가리켰다. 아직도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들 사이로 노스윈드 함대의 전함들이 검은 실루엣으로 그곳 에 떠 있었다. 두캉가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리야 선장 자네가 설명하게. 난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도 잘 잡히지 않는구먼.”

키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리야는 차분하게 말했다.

“어젯밤, 저희들은 키 선장님의 처형 소식을 듣고 마법사 세실에게 조언을 부탁했습니다. 마법사 세실은 자신에게 지팡이가 없어 큰 힘을 사용할 수 없으니 기절한 트로포스의 지팡이를 사용해 보겠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킬리 선장이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상한 소리?”

“킬리 선장은 싱잉 플로라의 노랫소리가 들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뛰어난 청력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잘 알지만 다른 자들은 아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다림 근처에 싱잉 플로라가 있을 까닭도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킬리 선장은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단호한 태도로 우리들이 바다 쪽으로 행군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키 선장님이 처형될 판인데 다림 쪽이 아닌 바다 쪽으로 가야 된다고 주장하니, 우리들이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진 짐작하시겠지요.”

“흐음.”

“그러나 킬리 선장은 자기만이라도 바다로 갈 것이며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 자는 키 드레이번의 배신자라고 외치며… 발광을 하더군요. 지금 생각 해 보니 참 우스운 모습이었습니다. 킬리 선장이 그런 모습을 보이다니. 하지만 그때 저희들은 상심하고 당황하고 분노하고 있었고, 그런 우리들에게 킬리 선장의 그런 모습은 마치 선지자의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킬리 선장은 억지로 우리들을 바다로 행군시킬 수 있었습니다. 불안과 공포와 혼 란뿐인……… 끔찍한 밤을 지나 해안선에 도착한 우리가 본 것은 수평선 저편에 떠 있는 불빛이었습니다.”

“그게 우리 함대였다고 말하려는 거냐?”

“우리 함대였습니다. 불빛 신호를 보낼 때까지도 전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보트를 타고 배에 오른 저희들도 그것을 제일 먼저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식스 일항사는 닷새 전에 미노 만을 출발했다고 하더군요.”

“닷새 전에?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알버트 선장 덕분입니다.”

“아아!”

하리야 선장의 대답에 키는 신음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멀리 다림의 앞바다에 떠 있는 노스윈드 함대를 바라보았다. 일몰의 황금빛 바다 에 떠 있는 검은 배들 가운데서 물수리호를 발견한 키는 잠시 말없이 그 배를 바라보았다. 두캉가 선장은 감탄하며, 하지만 두려움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말대로였어, 키 선장. 그는 역시 물수리호를 지배하고 있었어.”

“예.”

“닷새 전, 물수리호가 갑자기 미노 만을 떠났던 모양입니다. 물론 식스 일항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볼 수는 없었죠. 그리고 식스 일항사는 우 리들에게는 정말 반가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물수리호를 뒤따라 움직이기로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닷새 전은……”

“내가 잡힌 날이지.”

“그 대답을 듣자니………… 정말이지 소름이 쫙 돋더군요.”

하리야 선장은 지금도 두렵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서 마법사 세실이 트로포스의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정말이지 진짜 마법사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시더군요. 마법사 세실은 바람을 불 러내었지만 그건 트로포스가 불러내곤 했던 미친 듯한 강풍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함대 전체를 무서운 속도로 진격시키는 강력한 순풍이었습니다. 함대의 속도를 계산한 항법사들은 전부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더군요.”

“얼마였는데?”

“30노트였습니다.”

키의 걸음이 멈칫했다. 키는 하리야를 돌아보았지만 지금 농담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대신 키는 신음처럼 말했다. “30노트라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린 시간 내에 다림 앞바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의 상황은 아시는 대로입니다.”

“아아.”

그 사이에 세 선장과 해적들은 다림 수도원에 도착했다. 키는 대화를 중단하고는 예배당으로 걸어들어갔다.

예배당 안에는 몇 명의 해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손하게 인사하며 자리를 비켰다. 키는 예배당의 중앙 복도를 걸어갔다. 수반에 손을 씻 던 하리야는 그런 키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도리언 원장의 말대로, 중앙 복도에는 한 수도사의 시체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수사의 목에는 그 가련한 자의 묘비라도 되 는 것처럼 복수가 꼿꼿이 서 있었다. 방치된 후 닷새가 지난지라 시체의 모습은 바라보기 힘들 정도였다. 조금 늦게 걸어온 하리야 선장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도사가 아닌 일반인의 시체라도 성별된 묘지에 안치하는 것은 교회로서 당연한 도리이거늘………… 복수가 두려워 이렇게 개돼지나 되는 것처럼 팽 개쳐두다니. 참으로 교회의 수치군요.”

“헤. 팽개친 것이 아니라 그냥 건드리지 않고 놔둔 것 같은데.”

“그게 그거잖습니까, 두캉가 선장. 키 선장님의 말대로라면 그들은 브라도 경이 도착할 때까지 이렇게 놔둘 생각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사자에 대한 지독한 모욕입니다.”

교회에 대해 개탄하던 하리야는 품에서 성전을 꺼내면서 키에게 말했다.

“복수를 뽑아주시겠습니까, 키 선장님?”

키는 아무 말 없이 수사의 시체로 걸어갔다. 천천히 복수의 칼자루를 거머쥔 키는 잠시 그것을 쥔 채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뽑아들었다. 시체는 사후 경직이 아니라 부패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복수는 간단히 뽑혀나왔다. 키는 복수를 한 손에 쥔 채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하리야는 조금 주 춤하다가 곧 기도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이제 목적을 들어볼까요, 두캉가 선장.”

기도를 드리고 있던 하리야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키는 여전히 복수의 검신만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하리야는 복수가 다시 검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키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에 신경이 쓰였다. 두캉가는 그 거대한 몸을 긴 의자에 앉히며 땀을 닦았다.

“목적…………, 목적이라고 했나, 키 선장?”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야겠지. 자넨 우리 공동 재산이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해적들 사이에서 킥!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렸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키는 엄지손가락으로 복수의 검신을 쓰다듬고 있었다. 물 론 키의 손가락은 베이지 않았다. 그리고 온 대륙을 통틀어 키가 한 행동을 따라했을 경우 베이지 않는 사람은 키 자신을 제외한다면 한 사람밖에 없 다. 두캉가 선장은 큼직한 손가락들을 서로 깍지껴 그 위에 두툼한 턱을 올려놓고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모두가 자네 것인 것과 마찬가지로.”

“늙은 선장 냄새에는 악마도 고개를 내저으며 도망친다던가요.”

“저런! 그럼 그때 그 친구가 악마였나 보군. 왠지 달아나는 꼬락서니를 보니 엉덩이 쪽에 뭐가 덜렁거리더라고.”

키는 싱긋 웃었다. 키의 손이 한 바퀴 회전하며 검광이 번득인 순간 복수는 다시 칼집 속으로 돌아갔다. 하리야는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키는 정문을 향해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리야 선장. 기도가 끝나거든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을 전부 불러내어 그들의 형제를 정중히 장사 지내게 하라.”

“예, 키 선장님.”

“그리고 도리언 원장은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알아서들 차기 원장을 선출하든지 원장 대리를 뽑든지 하라고 해.”

하리야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키는 이미 어떤 대답도 듣지 않겠다는 투로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리야 의 귀에 두캉가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늙은이는 무슨 꼴을 당할꼬.”

“예?”

두캉가는 깍지낀 손가락에 낀 커다란 반지로 턱을 긁적거렸다.

“그 불쌍한 원장 나리는 언감생심 키의 목숨을 노렸으니 자기 목숨을 내놓게 되었지. 그럼 나는 키에게 뭘 내놓아야 될지 걱정된단 말이야.”

“당신이………… 왜 키 선장님께 뭔가를 내놓아야 된다는 겁니까?”

두캉가는 빙긋 웃었다. 서쪽으로 난 창문으로 저무는 햇살이 마지막으로 번득였다.

“때가 되면 자네도 알게 될걸세. 자네 운명도 내 운명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터이니.”

해가 졌다. 예배당은 급히 찾아든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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