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7장 : 죽지 않는 선장 – 4화
아직 혼란이 가시지 않은 다림에서는 많은 것들이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것은 특히 외부 성문들에서 두드러졌다. 치안 헌병대는 모두 해적들과 싸우 다가 전사하거나 무장 해제를 당한 상태였고 성문지기들은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성문들은 폐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열려 있었다. 다림 의 북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해가 저무는 지금, 이곳마저 장악될 경우 다림에서 빠져나갈 길이 요원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북문 을 통과하고 있었다.
마차를 가져올 수 있었던 이들은 북문을 통과하자마자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그들은 대개 가까운 팔라레온 쪽으로 방향을 잡고 밤새도록 달려갈 참 이었다. 그러나 마차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다가오는 밤을 두려워하며 힘든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마부를 흘끔 올려 다보았지만 마부들은 성가시게 굴 경우 치어버리겠다는 투로 으르렁거리며 달려갈 뿐이었다. 그러나 좌절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피난길에 나선 이들은 대개 근교의 농가나 작은 마을에 친척이 있다거나 가까운 곳에 별장이나 산장이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달아날 곳이 없었던 이 들은 피난길에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지금 이 시간에도 다림의 집에서 떨고 있을 것이다.
한 대의 마차가 또다시 행인들의 곁을 지나쳤다. 별 기대 없이 마차를 바라보았던 피난민들은 어둠 속에서도 두드러지는 그 마차의 거대함에 잠깐 놀랐다. 마차는 그 거대함에 어울리는 빠른 속도로 멀어져 갔고 그 흙먼지에 콜록거리던 피난민들은 어느 고관의 마차겠거니 생각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다림 시에서 꽤 멀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주위가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속력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부 는 투덜거리며 등불을 켰다. 그때 마차 안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멈춰 선 건가요, 바탈리언 남작님?”
등불이 밝아지며 바탈리언 남작의 얼굴이 드러났다. 남작은 마차 안쪽을 향해 말했다.
“달이 떠오를 때까지는 더 속력을 내기 어렵습니다. 말들도 쉬어야 하니 천천히 달려갈까 합니다, 공주님.”
“네. 그런데 우린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요?”
“팔라레온입니다. 공주님.”
잠시 말을 멈췄던 바탈리언 남작은 이 기박한 운명의 여인에게 뭔가 위로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달이 떠오른 후 힘껏 달리면 내일 아침 무렵까지는 국경을 넘어 팔라레온의 나소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누구 마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능이 꽤 좋군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푹 주무십시오.”
어두운 마차 안에서 율리아나 공주는 힘없이 웃었다. 잠이 올까? 글쎄. 율리아나 공주는 지금껏 기대어 있던 어깨에서 몸을 일으켰다. 상대방의 얼 굴을 보려 했지만 캄캄한 암흑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율리아나 공주는 어둠을 향해 무턱대고 말했다.
“우리 참 끔찍하게 도망다니는 운명이군요. 다림에 들어선 다음엔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둠 속에서 오스발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공주님.”
“폴라 대사님은 괜찮으실까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까 공주님과 저를 마차에 태울 때의 대사님의 얼굴은 그렇게 불안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음. 그럴 거예요. 키 드레이번이라도 ‘다림의 큰누님’을 치면 카밀카르 선원들의 원수가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오스발은 ‘키 선장님은 카밀카르의 공주를 납치한 적도 있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낮에 보아두었던 의자 밑을 더듬었다. 율리아나 공주는 탁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기대감에 찬 얼굴로 어둠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오스발이 켠 랜턴에서 환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아, 남작님. 이 안에 불을 켜도 되겠습니까?”
“좋도록 하게. 어차피 밖에도 불을 켰네.”
오스발은 랜턴을 들어 마차 지붕의 고리에 걸었다. 황홀해하는 눈으로 마차 지붕을 바라보던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오스발은 의 자 아래에서 꺼내든 와인 병을 보며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이 마차의 주인은 애주가이신 듯하군요. 음식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율리아나 공주는 갑자기 허기가 지는 것을 느끼며 배를 움켜쥐었다. 나무잔 몇 개를 찾아낸 오스발은 먼저 공주에게 술을 건넨 다음 마부석 쪽의 창 문을 열고 바탈리언 남작에게도 한 잔을 건네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반색을 하며 술잔을 받아들었다.
“아아! 정말 마음에 드는 마차로군. 목이 칼칼하던 참인데. 어라? 맙소사. 이 마차의 주인과 본격적으로 사귀어보고 싶은 생각이 다 드는군. 술에 대 한 안목도 정말 좋은데!”
오스발은 미소를 지어준 다음 율리아나 공주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더 큰 미소를 지었다. 공주는 이미 잔을 비우곤 손수 자기 잔에 와인을 따르고 있 었다. 오스발의 미소를 본 율리아나는 혀를 살짝 내밀었다.
“볼 거 안 볼 거 서로 다 보여준 사이니 야유하기 없기.”
“와인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해요. 자! 당신도 마셔요.”
오스발에게 술병을 건넨 율리아나는 자신의 잔을 홀짝거렸다. 오스발은 자신의 잔을 채우는 대신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볼드윈 저택에서도 그렇고, 공주님께서도 퍽 애주가셨던 모양이군요.”
“나도 내가 이렇게 술 잘 마실 줄은 몰랐어요. 히히.”
달이 떠오를 무렵, ‘키 드레이번 짜아 – 식. 약오르지? 난 지금 술까지 마시며 룰루루 달아나고 있단다. 잡아봐! 잡아봐!’ 어쩌고 하며 중얼거리던 율리아나 공주는 의자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오스발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율리아나를 덮고 랜턴을 갈무리한 다음 마부석 쪽으로 나왔다. 바탈리언 남작은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 술 더 없나?”
오스발은 반쯤 남은 병을 남작에게 건네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이것밖에 남지 않았군요.”
“하하. 이런. 내일 아침엔 퍽 고생하시겠군. 잠드시기 어려웠을 텐데 잘됐다고 해야겠군.”
대화는 중단되고 마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이 정적 속으로 흩어져갔다. 오스발은 문득 아직까지 감사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감사드립니다, 남작님. 경황중이라 말씀하시진 못하셨지만 공주님께서도 틀림없이 남작님께 고마워하실 겁니다.”
남작은 술 한 모금을 마신 다음 피식 웃었다.
“별말을. 나 역시 전쟁을 피해 달아나는 처지 아닌가. 같은 처지지 뭐. 그런데 자네와 자네 공주님 말인데, 퍽 이상하게 대화를 나누더군?”
“예?”
“공주님께서는 자넬 마치 친우이거나 한 것처럼 대하더군. 자넨 공주님의 노예였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카밀카르 왕궁의 노예일 텐데, 시녀라 면 혹 가까울 수도 있다지만 남자인 자네가 어떻게 공주님과 친한 사이인지는 짐작되지 않는군, 그래.”
“전 카밀카르 왕궁의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공주님의 노예가 된 건 최근의 일이죠.”
“응? 설마 그래서 어려워한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정반대던데. 공주님 주무시니 말하는 거지만 그녀는 자네를 오라비나 되는 것처럼 따르던걸. 자네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진 않았지만 말이야.”
“글쎄요. 제가 공주님을 모시게 된 사연에 대해 남작님께 말씀드리는 것을 공주님이 원하실지 모르겠군요.”
“하하! 알았어. 공주님께 직접 여쭤보지. 됐나?”
“그러시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좋도록 하게.”
“왜 제게 관심이 많으신 겁니까?”
“관심이라.”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고 바탈리언 남작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어두운 길만 바라보았다. 재촉하는 법이라곤 없는 오스발은 역시 물끄러미 전방만 바 라보았다. 그래서 바탈리언 남작은 자신이 끊었던 말을 스스로 이어야 했다.
“고삐 좀 잡아주겠나?”
“말씀드렸다시피 전 마차를 다룰 줄 모릅니다만.”
“괜찮아. 길은 곧고 힘껏 달릴 일은 없으니 그냥 쥐고만 있으면 되네. 말들이 길을 벗어나려 들면 길 쪽으로 조금씩 당겨주면 되네.”
오스발은 고삐를 받아들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기지개를 켜듯 등받이에 몸을 기대곤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남작은 코트 바깥 주머니에서 종이 뭉치를, 그리고 코트 안주머니에서는 우필과 잉크병을 꺼내었다. 오스발은 재미있어하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탈리언 남작은 종이를 접어 단단하게 한 다음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우필을 몇 번 까불거렸다.
“오늘의 일을 적어둘 생각이네. 원래는 키 드레이번의 처형을 주된 테마로 정할 생각이었지. 키 드레이번이 처형될 때 그 장소에 있었으니 난 정말 행운아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내 행운, 혹은 불운은 그 정도가 아니었던 모양이야. 뱃사람도 아닌 내가 노스윈드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 직접 목격 하게 되다니. 다림 시민들에겐 참으로 미안하고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좀 흥분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될 것 같군.”
“예. 문객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연대기 작가라고 자칭할 때가 더 많지. 연대기 작가가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역사와 현실 중 현실 쪽에 더 관심이 많다는 점에선 야심가와 같지만, 관찰하고 해석할 뿐 참여할 수는 없다는 점에선 역사가와 같은 사람을 말하 네.”
“왜 참여하시지는 않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잉크병을 열었다.
“관찰자로 우수한 이가 있고 행동가로 우수한 이가 있네. 난 전자야. 내겐 재능과 행운이 있거든. 내 행운이야 오늘 일어난 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 겠지. 이 굉장한 사건 속에 휩쓸리지는 않지만, 관찰하고 있네. 그리고 이렇게 기록도 남길 수 있잖나.”
오스발은 무심코 말했다. “모두가 당신…………”
“응?”
“아니, 별 말 아닙니다. 쓰시는 데 방해되겠군요. 조용하겠습니다.”
“아, 고맙네. 불빛이 영 시원찮군.”
전방을 밝히기 위해 매달아둔 작은 등불을 조명 삼아, 바탈리언 남작은 대해적 키 드레이번의 다림 급습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손가락에 닿아오는 우필의 감각은 언제나 그를 황홀케 했고 종이가 사각거리는 소리는 그에게 더없는 안온함을 주었다. 다시 술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남작은 시원스레 첫 줄을 썼다.
‘그 노예는 무심한 시선으로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책임질 것 없는 자의 거만함과 무리지을수록 우매해지는 인간의 약점을 이해하는 자의 서글픔 으로……?’
우필이 멈췄다.
바탈리언 남작은 당혹한 심정으로 자신이 쓴 글을 바라보았다. 오스발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종이를 흘끔 바라보았지만 그가 기대하던 일, 즉 종 이에 잉크 방울이 떨어졌다거나 하는 일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스발은 다시 마차 전방을 바라보았다.
“자네 페이노 읽을 줄 모르나?”
“그렇습니다. 남작님.”
바탈리언 남작은 오스발의 옆얼굴을 조금 바라보았지만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은 내리지 못했다. 오스발은 그저 자신의 주의력 전부를 마 차 모는 데에만 집중시키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다시 자신이 쓰던 글을 바라보았다.
이걸 지워야 하나? 하지만 남작은 연대기를 씀에 있어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은 우러나오는 대로의 감상을 작위의 관 속에 쑤셔넣는 일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잠시 갈피를 잃고 방황하던 우필은 곧 다음 문장을 쓰기 시작했고, 남작은 만족하기로 했다.
핸솔 추기경은 암담한 얼굴로 앞쪽의 숲을 바라보았다. 숲이라는 건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일 뿐, 추기경이 보고 있는 것은 어둠 뿐이었다.
핸솔 추기경은 농부 차림이었다. 다림 탈출 당시 추기경은 경황 중에도 재빨리 법복을 벗어 수행원에게 입히는 기지를 부렸다. 해적은 그 화려한 법 복을 보고는 수행원을 끌고 갔고, 덕분에 핸솔 추기경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다림 바깥까지 나와서야 간신히 숨을 돌린 핸솔 추기경이 가장 먼 저 한 행동은 근교의 농가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법복은 벗어버렸지만 고급 셔츠와 바지는 표적이 되기에 충분했거니와 도망치기에 적합한 복장도 아니었다. 물론 빨랫줄에서 옷가지를 들어올릴 때 핸솔 추기경은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입고 있던 셔츠와 바지는 농가에 벗어두고 왔기 때문에 도둑 맞은 쪽에서도 크게 화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농부의 옷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여전히 핸솔 추기경이었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길을 잃은 채 끝이 없는 숲을 보며 당혹해하고 있었다.
굶주린 어둠이 미쳐 요동치는 숲은 추기경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발목을 쥐어흔들었다. 별빛도 스며들지 않는 밤의 숲속에서, 핸솔 추기경은 마치 장 님처럼 앞을 더듬어가며 걸어야 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감각이 예민해져 시야를 대신한다는 것은 호사가의 헛소리다. 물론 예민해지기는 한 다. 하지만 소리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증폭되어 들려오는 소리들은 사람을 혼란시킬 뿐이다. 익숙지 않은 도보에 그런 혼란까지 더 해지자 핸솔 추기경은 빠르게 지쳐갔다. 정신은 혼미해지고 판단력은 고갈되어 갔다. 그래서 핸솔 추기경은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것 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묻겠다. 그쪽의 당신은 뭐야?”
핸솔 추기경은 가까스로 그것이 바람 소리나 우석거리는 덤불 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 여보시오! 거기 누구 있소? 나 좀 도와주시오.”
“어라? 신이여. 내 귀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건 핸솔 추기경의 목소리 같은데?”
또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추기경은 그 목소리를 알 수 있었다.
“파킨슨 신부요?”
갑자기 굳센 손아귀가 추기경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핸솔 추기경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끌려갔고 조금 후 마법처럼 드러나는 불빛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어떻게 불빛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핸솔 추기경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힘겹게 외쳤다.
“파킨슨 신부!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형제가 나를 구원하셨소!”
조그마한 모닥불 저편에 앉아 있던 파킨슨 신부는 추기경의 반가워하는 태도에 놀랐다. 물론 자신의 생존조차 미심쩍게 만드는 캄캄한 암흑 속에서 몇 시간을 방황한 핸솔 추기경에게 파킨슨 신부에 대한 적의를 떠올릴 여유가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파킨슨 신부는 멀뚱히 추기경을 바라보았고, 추기경의 이상한 복장에 다시 한번 놀라야 했다.
“추기경 예하. 도대체 그런 복장을 하고 이런 숲속에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모르고 있었소? 그렇군. 당신 언제 다림을 떠났소?”
“어제입니다.”
“그랬군. 기절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오늘 오전, 노스윈드 함대가 다림을 쳤소!”
“예?”
그때 추기경을 끌고 온 사내, 데스필드가 갑자기 끼여들었다.
“그럼 그 소리가 역시?”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를 흘끔 돌아보곤 말했다.
“우린 멀리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듣고 다림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럼 그게 진짜 대포 소리였습니까?”
“그렇소. 노스윈드의 해적들이 몰려와 다림을 공격하고 키 드레이번을 구했소. 그래서 난 수행원들과도 헤어진 채 이렇게 도망쳐야 했고.”
“상당히 고생하셨겠군요. 수행원들도 없이 이렇게 도피중이시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핸솔 추기경은 헐떡이며 데스필드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ᅳ.”
“본인은 데스필드입니다.”
“아, 데스필드. 혹시 물 좀 마실 수 없겠소?”
데스필드의 물통을 다 비우고 농축 식량 이틀치까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서야 핸솔 추기경은 간신히 음식 섭취보다 조금 고차원적인 활동을 할 정도의 기력을 회복했다. 땔감을 더 구하기 위해 데스필드가 자리를 비우자, 핸솔 추기경은 약간 원망스러워하는 눈으로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왜 달아나셨던 거요, 신부.”
계속 대답을 생각하고 있었던 파킨슨 신부는 쉽게 대답할 수 있었다.
“할말 없습니다.”
“파킨슨 신부!”
핸솔 추기경은 버럭 고함을 질렀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저 씁쓸한 얼굴로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갑자기 내지른 외침 때문에 추기경은 몇 번 쿨럭거리 고서 말했다.
“신부. 난 당신에게 돌아가라고 했소. 그런데 당신은 되돌아와 나를 방해했소. 그것도 키 드레이번을 이끌고 돌아왔지. 그러곤 그 사실에 대해 아무 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시 사라졌소. 지금이라도 뭔가 자기 변명을 해볼 생각은 없는 거요?”
“어느 것에 대한 변명 말입니까. 테리얼레이드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무시한 것? 키 드레이번을 데리고서 암살 현장에 나타나서 그의 이름을 빌린 암 살을 방해한 것?”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요? 배교할 작정이요?”
“배교라고!”
파킨슨 신부는 버럭 고함을 지르며 추기경을 쏘아보았다. 핸솔 추기경은 흠칫하며 신부의 허리 쪽을 바라보았지만, 파킨슨 신부의 손은 바짓자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숨 돌린 핸솔 추기경은 학자다운 태도로 말했다.
“당신이 무슨 판단에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는 대충 짐작하오만, 법황을 배신하는 자는 종단 전체를 배신하는 거요.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은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배교자가 아닙니다.”
“독신자의 말투처럼 들리오. 파킨슨 신부. 당신은 법황청을 배신했지만 주님의 뜻은 배신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모든 이단자는 자신이 주님에 직 접 닿았기에 법황청을 무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당신은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그것 역시 모든 이단자들이 하는 말이지.”
파킨슨 신부는 이를 악물었다. 핸솔 추기경은 쐐기를 박듯 말했다.
“그래 가지고선 어떻게 이단이 아님을 증명할 것이오? 당신이 이단이고 배교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소?”
“법황청은 어떻습니까.”
“무슨 말이오?”
“추기경 예하의 말씀대로라면 법황청 역시 이단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법황청 역시 자신이 주님에 닿아 있다고 말할 테니까요. 그래 가지고서 법황청 이 어떻게 이단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핸솔 추기경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학자였다.
“파킨슨 신부. 그것은 신학교 초년생의 연구 주제도 되지 못하오. 당신은 모든 이단을 펠라론과 같은 수준에 놓고 있소. 그것으로도 이미 크나큰 죄 이지만, 좋소. 일단 넘어갑시다. 당신 말은 그러니까 이단과 법황은 모두 자신이 주님에 닿아 있다고 주장하므로 그것만 가지고는 서로 상대방을 이 단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소?”
파킨슨 신부는 아무 말 없이 핸솔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핸솔 추기경은 한숨처럼 말했다.
“당신 역시 그런 질문의 대답은 알 것 아니오.”
“압니다.”
“아니, 난 당신이 말하길 원하오. 그 대답은 무엇이지?”
파킨슨 신부는 다시 바짓자락을 움켜쥐었다. 핸솔 추기경은 아무 말 없이 신부의 대답을 기다렸다.
“법황은 우리 주님의 이름을 가지며………… 기적으로써 그 이름을 증거합니다. 다른 이단자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소. 따라서 우리 주님의 현재 이름은 퓨아리스요. 그리고 주 퓨아리스의 이름을 가졌기에 법황은 다른 이단자들을 이단자로 규정지을 수 있는 거요. 그리고 당신이 배신한 이는 주님의 이름을 가진 자, 법황이오. 그래도 당신이 주님의 배신자가 아니라고 할 거요?”
파킨슨 신부는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키 드레이번을 쏘고 다림 교회를 빠져나올 때만 해도,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믿음을 가지 고 있었다.
‘교회는 내 안에 있다.’
하지만 기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부활의 법황 퓨아리스 4세는 부활의 기적을 보였고 그것으로써 신의 이름을 정했다. 신의 이름은 퓨아리스다. 따 라서 파킨슨 신부는 퓨아리스를 배신함으로써 퓨아리스를 배신했다. 핸솔 추기경의 논리에 대하여 파킨슨 신부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에겐 신념이 있습니다.”
모든 이단자들 또한 그들의 신념을 가지고 있소. 핸솔 추기경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짧게 말했다.
“기도하시오, 파킨슨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