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1화
데스필드는 바위 위에 꼿꼿이 선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명의 성직자가 그의 등뒤에서 심히 괴이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데 스필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팔짱을 낀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결국 파킨슨 신부가 약간 짜증 섞인 말투로 질문했다.
“인마, 뭐 하는 거냐? 바로 저기에 있는 도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갑자기 눈이라도 멀었냐?”
데스필드는 앞만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신부님 당신. 옆에 추기경 당신께서도 계신데 부디 성스러운 단어 좀 사용해 보실 생각 없으쇼?”
파킨슨 신부는 데스필드의 충고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지랄하네.”
데스필드는 웃음을 터뜨렸고, 핸솔 추기경은 자신의 하위 성직자를 꾸짖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를 놓고 잠시 고민했다. 데스필드는 몸을 돌리곤 10 분 동안 서 있었던 바위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돌아갑시다.”
“뭐야?”
“우회하자고 말해 드릴까?”
“저 도시를 돌아가자는 거냐? 너 제정신이야?”
“저 도시 이름은 판도요. 어쨌든 돌아갑시다.”
“왜 돌아간다는 거야? 저기, 판도? 판도에서 누구라도 죽였냐?”
데스필드는 어깨를 으쓱일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다림 탈출 이래로 엿새 만에 만난 도시였다. 파킨슨 신부의 말을 따른다면 ‘살아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고 패스파인더라는 놈들이 어떤 종자인지 깨달을 수 있었던 엿새’였다. 성 직자가 두 명이니 신의 도움이야 넘치도록 기대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신의 도움 이외엔 아무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데스필드는 두 성직 자가 굶어 죽지는 않은 상태를 유지하게 해놓았다. 죽을 정도로 배가 고프긴 했지만.
“패스파인더는 본인이오. 펠라론까지의 패스는 본인이 긋는다는 말이지. 펠라론까지 가고 싶다면 본인 말을 따라요.”
“설명해 봐, 인마. 펠라론까지 가려면 저기서 뭐라도 보급을 해야 되지 않겠냐?”
“파킨슨 신부님의 말이 옳소. 데스필드 군. 판도의 교회에 부탁한다면 우리에게 승용 수단을 제공해 줄 거요. 그런데 왜 판도를 우회해야 된다는 거 요?”
데스필드는 아무 말 없이 배낭을 들어올렸다. 그 배낭이라는 것이 걸작인데 새와 도마뱀, 혹은 무엇인지 모를 고깃덩이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새 매의 공작(Duke of sparrowhawk)의 무구 정도로 착각될 물건이었다. 두 성직자는 지난 엿새 동안 먹어왔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보며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배낭을 둘러맨 데스필드는 두 성직자를 돌아보았다.
“패스파인더는 패스를 그을 뿐이지 패스를 설명하진 않습니다. 추기경 당신. 본인은 이렇게만 말해 드릴 수 있소. 본인의 패스를 따르고 싶지 않다 면, 얼마든지 저기로 내려가쇼. 하지만 패스파인더가 긋는 패스는 패신저의 패스요. 간단히 말하자면, 본인은 당신을 위해서만 패스를 그을 뿐이지 본인을 위해서 패스를 설정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오.”
데스필드는 파킨슨 신부를 바라보았다.
“본인이 저기서 누굴 살해했냐고 물었소? 흐응. 만일 그랬더라도 저기를 들르는 것이 패신저를 위한 올바른 패스라고 판단되었다면 본인은 저기로 갔을 거요. 제길, 누구한테 따지는 거요? 본인도 저기로 들어가서 좀 쉬고 싶단 말이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모든 엄마 당신들이 아들 당신들에게 하 는 말 비슷하지만, 다 당신들을 위해서란 말이오. 본인이 긋는 패스는 당신들 때문에 생기는 거다, 이 말이지.”
파킨슨 신부는 잠깐 동안 데스필드의 말을 정리해 보았다.
“펠라론까지 가려는 우리의 목적 때문에 저기를 우회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인 거냐?”
“그렇소.”
“그럼, 네 판단에 따른다면 우리가 저길 지날 경우 펠라론에 갈 수 없다 이 말이지?”
“아하.”
파킨슨 신부는 한숨을 내쉬고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젠장. 별수없군.”
핸솔 추기경은 당황한 얼굴로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파킨슨 신부는 이미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걸어가고 있었고, 데스필드 역시 몸을 돌려 걸 어가고 있었다. 산등성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도시를 우회하는 방향이었다. 핸솔 추기경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뒤를 따랐다.
파킨슨 신부와 데스필드를 따라가던 핸솔 추기경은 잠시 고개를 돌려 산 아래 판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엔 좀 넘칠 정도의 갈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핸솔 추기경은 아무리 극한 상황이라도 지난 엿새 동안 그를 살려놓았던 인물의 말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무절제한 사람은 아니었다. 핸솔 추 기경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힘겹게 걸어갔다.
바탈리언 남작은 우필을 들어 코끝을 간지럽히며 말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자넨 단신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에 대항하여 제국 최고의 미녀를 구출해 내었다, 이 말인가?”
“지나치게 극적으로 요약되는 것 같군요. 정말 그렇게 쓰실 생각이라면 전 난처해하게 될 것 같습니다.”
오스발의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던 바탈리언 남작은 씩 웃었다.
“자네의 난처함과 별개로, 카밀카르에서 용서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쓰긴 어려울 거야. 주인공을 공주님으로 바꾸면 되겠지. 이렇게 말이야. 공주님 께서는 단신으로 제국의 공적 제1호에 대항하여 자신의 자유를 되찾았고, 그의 억압 속에 고생하던 노예도 구출해 내었다고.” 바탈리언 남작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남작의 입에선 술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를 보게.”
“무슨 말씀이신지.”
“글은 죽어 있어.”
“글이 죽어 있다고요?”
“아, 언어라고 해도 되겠지. 언어는 죽어 있어. 언어는 사실에 종속된다고 생각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언어는 사실의 근사치를 가질 뿐이지. 우 리는 절대로 세계를 표현할 수가 없네. 우리가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도구인 언어는 죽어 있어. 죽어 있는 것으로 살아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예에 ᅳ.”
약간 긴 오스발의 대답을 들으며 바탈리언 남작은 붉어진 눈가를 문질렀다.
“아, 좋아. 예를 들어보지. 자네가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 봐. 저 뒤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아리따운 공주의 초상화를 그린다고 치지. 자네가 정녕 악마의 재주를 빌려서 완벽한 그림을 그렸다고 치지. 하지만 그 그림을 완성한 순간, 그 그림은 이미 공주님과는 무관한 그림이 되네. 왜냐하면 공주 님은 변화할 테니까. 하다못해 늙어가기라도 할 테니까. 그렇다면 자넨 절대로 공주님을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 되지. 내 말 맞나?”
“예.”
“그렇다면 고정된 것으로 움직이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거지. 이해되나?”
“예.”
“말이나 글은 그림과 마찬가지로 고정된 것이야. 그것으론 절대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어. 왜냐하면 세상은 움직이는 거니까. 우리가 사용할 수 있 는 어떤 표현 방식으로도 세상을 표현할 수 없으니, 우린 세상을 모르는 거야. 절대로 알 수 없지. 하지만 우린 멋대로 언어를 사용해대며 세상을 표 현하는 척하지. 열정적인 청년은 무수한 조바심과 애달픔을 거친 끝에 처녀에게 말하지.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헛소리! 그 청년은 절대로 자기 감정을 처녀에게 표현하지 못해. 그 청년이 표현한 건 고작해야 자기 감정의 근사치뿐이야. 그 청년이 보낸 번민의 세월들에 묵념하자고.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시간을 낭비했단 말이야.”
오스발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 깊은 숲속을 흐르는 안개가 말들의 발치를 휘감아돌고 수레바퀴에 휘말려 흩어지고 있었다. 바탈리언 남작은 계 속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
“레우스에 살았던 어떤 궤변론자가 생각나는군. 그 작자는 세상을 인식하기 위한 사고의 출발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가 이런 말을 했지. ‘나는 생 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럴 듯한 말이군요.”
“그럴 듯한 궤변이지. 사실 말도 안 되는 모순문이야. ‘생각한다’는 것은 움직임이야. ‘존재한다’는 것은 고정이고. 이 궤변론자 역시 ‘생각’이라는 과정으로 ‘존재’라는 순간을 설명하고 있어. 그 궤변론자가 어떤 종류의 생각을 했든지 간에 생각을 시작했을 때의 그 작자와 생각을 끝내었을 때의 그 작자는 서로 다른 존재야. 하다못해 생각이 바뀐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 궤변론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일 수 는 없어. 병신!”
오스발은 여전히 앞만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다음은 누구입니까.”
“응?”
오스발은 무심히 고삐를 쓰다듬었다.
“열정적인 청년, 레우스의 궤변론자, 그 다음은 누구입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우필을 잔뜩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우필은 소리 없이 부러졌고 남작은 그것을 마차 옆으로 팽개쳤다. 남작은 오스발을 돌아보았지 만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스발의 옆얼굴뿐이었다.
“자네 너무 똑똑해.”
“별말씀을.”
“아니. 지나치게 똑똑해. 아무도 내 문제를 이렇게 빨리 파악해 내진 못했어.”
“남작님께서 다 말씀해 주신 겁니다.”
“난 취했어.”
남작은 시무룩한 동작으로 잉크병과 종이 뭉치를 코트 속에 쑤셔넣고는 다리를 길게 뻗었다. 마차 벽에 기대어 누운 남작은 회청빛 아침 하늘을 올 려다보았다. 길게 끄는 새들의 지저귐이 숲의 나뭇가지를 차고 날아오른다. 남작은 입 속에 남은 말 찌꺼기를 뱉어내듯 반복해서 말했다.
“난 취했다고.”
“남작님.”
남작은 마차 벽에 초라한 모습으로 기대어 다리를 덮었던 코트 자락을 이불처럼 끌어올렸다.
“왜 그러나?”
“전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남작님의 훌륭한 저작도 읽지를 못했군요. 하지만 남작님은 훌륭한 작가이실 겁니다.”
“병 주고 약 주는군, 노예여. 방금 난 내 문제를 자네에게 다 간파당했네. 자기 칼을 믿지 못하는 무사가 과연 훌륭한 무사이겠는가?”
“그러면 어떻습니까.”
바탈리언 남작은 대답이 없었다. 자욱한 안개 속에 곤충들의 노랫소리는 맑고 검은 나무들의 표면에 매달린 이슬은 아스라한 반짝임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남작은 오스발의 목소리가 풀벌레의 노랫소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작님께서 죽은 과거보다 살아 있는 현실을 더 사랑하시는 것은 짐작합니다. 역사가가 아니라 연대기 작가가 되시기로 결심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남작님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지 못하신 것도 압니다. 예, 언어는 말해진 순간부터 고정 되겠지요. 어떻게든 이 아름다운 지금을 표현해 보려 해도, 그것은 표현된 순간부터 죽은 과거가 되겠지요.”
남작은 졸음에 취하여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작은 어쩌면 자신이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거기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오스발 의 목소리는 이제 산들바람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그래도 남작님은 훌륭한 연대기 작가이십니다.”
“어째서?”
“지금을 사랑하시니까요.”
남작은 다시 입을 닫았다. 아침은 어쩌면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시린 새벽이 한없이 숲속으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하늘을 덮은 숲의 정 수리는 어두운 그림자로 안개 속에서 꿈틀거렸다. 오스발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내밀어진 오스발의 손엔 우필이 쥐어져 있었다.
남작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오스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 때문인지 아침 안개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은 오스발이 조용히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받으십시오.”
바탈리언 남작은 우필을 받아쥐었다. 오스발은 우필을 쥔 남작의 손을 그의 가슴에 얹어주고는 코트 자락으로 덮어주었다. 오스발의 나직한 속삭임 을 들으며 남작은 잠이 들었다.
“당신은 연대기 작가입니다.”
파란 하늘과 파란 수면 사이로 흰 점이 날아다닌다.
키는 자유호의 선교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편에는 싱잉 플로라의 화분이 난간 위에 놓여 있었다.
자유호의 선장과 노래하는 꽃은 나란히 앉아서 다림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하늘 속을 까불거리고 춤추며 날고 있는 것은 갈매기가 아니다. 갈매기보다는 더 가벼운 것. 더 경쾌해서 더 우아한 것이다.
키는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연사(操鳶) 하나가 곶의 머리에 서서 다림의 앞바다를 향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자유호에서는 충분히 먼 곳이었지만 특별히 숨기고 싶어하는 것 은 아니다. 밤하늘에 검은 연이 아닌 바에야 연이라는 것은 원래 숨길 수도 없는 물건이다. 저곳에서 연을 날리고 있는 카이트플라이어(Kiteflier)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키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른손을 뻗어 싱잉 플로라의 꽃잎을 살짝 쓰다듬었다.
난간 아래쪽 갑판에서는 노스윈드 해적의 선장들이 위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팔라레온과 다벨이 전쟁중이었답니다. 그래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이라고? 누가 누굴 친 건데?”
“다벨입니다.”
라이온의 말을 듣던 선장들의 얼굴에 비웃음과 조롱기가 떠올랐다.
노스윈드 함대는 다림 총독부를 흉내내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창의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이 창의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림의 모든 질서를 바꿀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따라서, 공격 이틀 후 다림 시민들은 자신이 정복당했는지 의아스러워해야 했다. 다림 시내에서는 해적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정정. 최소한 정복자의 후광을 견장처럼 달고 다니는 해적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회를 찾아가서 물건을 구입하고는 정중한 태도로 ‘계산은 자유호의 장부 앞으로 달아두십시오’라고 말해서 상회 주인을 질리게 만드는 ‘선원’들만이 있었다.
그러나 상인들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바뀌는 빈도는 급속히 낮아졌고, 점차 다림 시민들은 앞바다에 떠 있는 노스윈드 선단을 다른 배들과 마찬가 지로 여기게 되었다. 물론 노스윈드 함대의 대포들은 모두 다림시의 요소요소를 조준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그 날 이후로 한번도 불을 뿜지는 않았다. 재건과 복구의 현장에서 그들의 선장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뭐. 의리 문제 아니겠어?’ 하며 군자연한 태도를 보이는 시민들이 늘어가는 가운데 다림 의 지식층들은 이 현상에 대해 비웃으며 ‘사랑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면 강간도 애정 표현이 되는 법인가’라고 빈정거렸다.
그러나 다림 시민들의 보편적인 반응이 부드러웠다는 것과는 별개로 다림의 수뇌부들과 노스윈드 선장들, 즉 실제로 ‘화약통 위에서 카드 게임을 해 야 했던 이들에게 그 이틀 동안은 하루가 한 달 같은 나날들이었다. 그들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알력을 포탄 삼아 상대방에게 포화 사격을 해대었고 그들에게 있어 ‘1024년 다림 노스윈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다. 노스윈드 함대의 선장들이 부하들에게 엄한 금족령을 내린 것 역시 다림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질 발생이나 정보 누설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피도 없고 비명도 없고 연기도 없는 전쟁을 수행하느라 지친 선장들은 지금 자유호의 갑판에 모여 앉아서 라이온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라 이온은 그들에게 레보스호의 화물과 배를 팔아치우러 나갔다가 한 상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삭구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하리야 선장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 로드 메르데린이 칼을 뽑았단 말이지. 구체적인 건 없나, 라이온 갑판장?”
레보스호를 매각하기로 결정했기에 다시 자유호의 갑판장으로 돌아온 라이온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그냥 다벨군이 팔라레온에 침입했고, 팔라레온은 응전 준비중이라는 말뿐이더군요. 그래서 그 친구는 화물선 출입이 통제된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고 있었습니다.”
“천챙 물차 창사하케?”
“아니오, 돌탄 선장님. 눈치를 보아하니 팔라레온의 밀값이 폭등하기 전에 사두려는 것 같더군요. 전쟁이 장기화되면 팔라레온의 밀값이 오를 것은 당연하잖습니까?”
“그래, 뭐라 대답했나?”
“예. 킬리 선장님. 다림항에서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는 건 다림 총독부라고 대답해 줬습니다. 만족하는 것 같더군요.”
선장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에 주저앉은 채 뱃전을 기대고 앉아 있던 두캉가 선장은 허리까지 앞뒤로 흔들며 말했다.
“잘했어. 음. 상대가 다벨이라면 로드 데자크는 해군을 필요로 하진 않겠군.”
“용병? 어림없는 소리입니다. 팔라레온은 레갈루스의 원성을 들어가면서까지 우릴 고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리야 선장이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두캉가 선장은 뒤꼭지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근래 보기 드문 전쟁이잖나.”
“그러니까 잘된 겁니다. 팔라레온이든 다벨이든, 아니 다른 어떤 나라들이든 간에 전쟁 때문에 당장은 우리들에게 신경 쓰진 못할 겁니다.”
“응? 숨어 지내자고? 자넨 지금 4,000명이나 되는 인원을 한 곳에 숨겨두자고 말하는 건가? 젠장. 밥 한 끼 먹을 때마다 대가리가 터지겠다.”
“숨어 지내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림을 타고 앉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두캉가 선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다림을?”
“예. 어차피 레갈루스인들은 이 땅을 목숨 바쳐 지킬 조국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나라의 대표부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들, 그러니까 남 해 항로에 자신들의 이권이 걸린 나라들 대부분은 다림이 남해 항로의 거점 역할만 충실히 해준다면 만족할 겁니다. 그러니까 차제에 다림 총독부를 해체시키고 이 도시를…………”
하리야는 잠깐 숨을 돌렸다가 단숨에 말했다.
“우리 나라로 만드는 겁니다.”
선장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하리야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 내용에 놀라고 그 내용을 말한 사람에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하리야는 야심이나 열정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순수한 논리를 말하는 사람 특유의 무관심한 어조로 말했다.
“이건 기회라고 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솔직히 우리들에겐 거점 항구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어촌 하나를 정복해 겨울을 나 고 봄이면 떠나는 방식은 문제가 많았습니다. 아니, 거기에 앞서 언제까지 해적질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뜻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 도시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땅은 그 주인조차 탐내지 않는 땅입니다. 여기서는 탐낸다는 의미가 좀 다르게 사용됩니다만. 어쨌든 좀더 나가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팔라레온과 다벨이 전쟁중이라면 당장은 육로를 통해 이 땅을 수복하려 들 세력은 없는 것입니다. 해로라면, 글쎄요. 난 여러분들이 두려워하는 해상 세력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장들은 일단 사나운 미소로 하리야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리야는 조용히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따라서 우린 이 땅을 우리 나라로 선포한 다음 당분간은 걱정 없이 지킬 수 있습니다. 이곳을 타고 앉으면 해적질은 더 쉬워지거나 아예 하지 않아 도 됩니다.”
“그럼 하리야 신부님은 다림국의 추기경이 되는 거요? 아, 농담입니다.”
어줍잖은 농담을 던졌던 킬리 선장은 곧 후회했다. 하지만 하리야는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런 망령된 말은 하지 마시게, 킬리 선장. 그럴 수야 없지. 그리고 다림이라면………… 그 이름은 바뀌어도 좋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드레이번은 어떤가?”
선장들은 이제 더 이상 하리야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당혹과 경악, 그리고 약간의 기대감도 담은 채 지금껏 조용히 있었던 키 — 혹은 키 1세, 신생 왕국 드레이번의 초대 국왕? ㅡ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여전히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장들의 시선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메인 마스트에 기대어 서 있던 오닉스가 더 못 참겠다는 듯이 발을 들어올렸다.
꽝! 갑판을 울리는 요란한 소리가 났지만 키는 하늘만 바라보며 말했다.
“시끄럽다.”
그리고 키는 입을 다물었고, 선장들은 불쌍하게도 더 당혹해 버렸다. 그들은 키의 저 말이 오닉스를 향한 것인지 하리야를 향한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때 킬리 선장이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킬리 선장은 갑자기 라이온을 노려보기 시작했고 그러자 돌탄, 하리야, 두캉가, 오닉스 선장 역시 라이온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라이온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선장들을 둘러보았다.
‘나보고 어쩌라고요?”
‘깐죽거려 봐. 자네 특기잖아.’
‘킬리 선장님 ! 난 복수에 맞아 죽고 싶지는 않다고요!’
‘명복을 빌어주지. 빨리 해!’
라이온은 또다시 선장들을 죽 둘러보았다. 하지만 노스윈드 선단의 선장들이다. 도대체 이가 들어갈 상대가 아니다. 선장 회의라 그 도끼를 가져오 지 않은 오닉스조차 그 마스크만으로도 살벌함을 넘치도록 조장하고 있었다. 결국 라이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키를 올려다보았다.
“선장님이 국왕이 되신다면 전 하렘에서 상임 근무하고 싶습니다만.”
노스윈드의 선장들이 정신적으로 졸도하는 사이에, 키가 고개를 돌렸다. 키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지만 라이온은 그 무표정이 두려웠다. 하지 만 키는 하리야 선장을 내려다보았다.
“가능성이 얼마 정도라고 보나.”
선장들 대부분의 얼굴이 밝아졌지만 하리야는 반색하지 않았다.
“야심가는 열에 열, 회의주의자는 열에 두셋 정도라 말할 것 같습니다. 방해가 될 수 있는 건 필마온 기사단과 카밀카르 정도인데……
“내부 방해는?”
“다림 시민 대부분의 동향은 온건한 편입니다. 다림 시민들이라고 해봐야 은퇴 선원이나 상인들이 대부분이고 여기 토박이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지배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거꾸로 누구의 지배도 마다하진 않을 겁니다. 지배자가 충분히 온화하다면. 그리고 우린 온화해질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외부는?”
“카밀카르는 일단 레보스호의 포로를 돌려줌으로써 조용히 있게 할 수 있습니다. 필마온 기사단은 공주의 생존, 또한 그 생환이 확실시되는 이상 교 회기사단의 자격으로 페리나스를 벗어나진 못할 테니 역시 상관없습니다. 육지에서의 이점에 대해선 조금 전에 말씀드렸습니다.”
“명분은?”
“다림 내에서 끌어낼 수 있습니다. 현재로선 두 가지 정도가 떠오르는군요. 첫 번째는 정복자의 당연한 권리 주장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다는 점이 장점이군요. 두 번째는 다림이 얼마나 취약한가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건 직접 보여줬으니 받아들이는 쪽도 납득하기 쉬울 겁니다. ‘노스윈드의 무력과 다림의 부를 결합시켜 멋진 나라 만들어보세’ 정도를 표어로 할까 합니다.”
“지지 기반은?”
“외부적 지지 기반은 다벨, 혹은 팔라레온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전쟁에 협력하는 대가로 국가 수립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면 될 것입니다. 또한 전 쟁의 흐름을 잘만 이용하면 다벨이나 팔라레온의 권력 재편성에서 떨어져 나온 축들을 포섭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부적 지지 기반은 없어야 합 니다. 당분간은 군림하지 않으며 통치하던 다림의 전대 지배자들의 전철을 밟아야 할 테니까요.”
키는 질문을 멈추고 물끄러미 하리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하리야는 그런 키의 시선을 조용히 받아내었다. 다른 선장들은 조금 전 들었던 것을 이 해해 보려다가 정신적 소화불량에 걸려 신음하기 시작했다.
하리야를 보던 키의 눈이 두캉가 쪽으로 돌아갔다. 키의 입매가 조금 올라갔다. 키는 미소 짓고 있었고, 그 미소를 보며 두캉가는 생침을 삼켰다. 다 음 순간 키는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으론 싱잉 플로라의 화분을 잡고, 왼손으론 뱃전을 짚었다.
파라락. 코트 자락이 춤을 추었다.
키는 선교에서 부두까지의 상당한 높이를 뛰어내렸다. 불과 얼마 전에 팔이 부러지고 핸드건에 피격된 사람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키는 신음 하나 내지 않았다. 키 드레이번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회의는 시들해졌고, 선장들은 서로를 훔쳐보거나 어깨를 으쓱이다가 하리야를 쳐다보았 다. 하지만 하리야는 아무 말 없이 항구 저편으로 사라지는 키의 등을 바라보았다.
질풍호의 선장실에 앉아 있던 세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트로포스의 손을 들어올렸다.
“이상하군. 이 녀석 손등의 점이 원래 열 개였나? 아홉 개였던 것 같은데. 야, 인마.”
“제 이름은 야, 인마가 아니고 스우입니다, 마녀… 으윽!”
“그리고 나는 마법사다, 마법사! 도대체 마법사라는 말이 그렇게 입에 안 붙냐?”
‘그거야 지팡이 휘둘러대는 당신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생각밖에 안 나니까 그렇잖아. 이 마녀야’라고 말하는 대신 젊은 해적 스우는 입술을 비죽거 렸다. 세실은 다시 트로포스의 손을 들어올렸다.
“알았다, 꼬마야. 그러니까…………”
“스우입니다.”
“그래, 수. 너희 선장 손등에 점이 아홉 개 아니었냐?”
잇몸이 튀어나올 정도로 입술을 비죽거리던 스우는 지팡이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선 황급히 트로포스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스우는 그 점 이 몇 개였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스우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고 세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잘못 기억했겠지. 신경 썼더니 배가 고프군. 그거 이 친구 줄 거야?”
스우는 들고 있던 죽그릇을 황급히 뒤로 숨겼다. 하지만 곧 스우는 죽그릇을 탈취당하고는 정수리를 쥔 채 통곡해야 했다. 숟가락질 몇 번에 죽그릇 을 비운 세실은 스우에게 그릇을 넘겨주며 말했다. “다시 해와.” 그리고 세실은 선장실을 나섰다. 그녀의 등을 향해 ‘환자 먹일 음식을 훔쳐먹음으로 써 피도 눈물도 없음을 증명한 그대 이름은 마녀!’ 등의 악담을 소리 없이 외치던 스우는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질풍호의 갑판으로 올라온 세실은 날렵한 동작으로 뱃전 위에 뛰어올랐다. 질풍호의 뱃전에는 부두를 향해 널판이 놓여 있었고, 세실은 그 위를 걸 어내려갔다. 항구 저편에서 복구 작업중이던 노동자들은 해적선에서 내려오는 여인을 보며 놀라워하거나 눈살을 찌푸렸다. 세실은 그들이 자신을 ‘부두의 꽃’ 정도로, 즉 정박중인 배의 고급 선원들이 노리갯감 삼아 배로 끌어들이는 여자 정도로 생각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무 상관하지 않 았다. 원할 때마다 마실 수 있는 공기가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듯이, 원할 때마다 평판을 바꿀 능력이 있는 자는 평판에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태평하게 걸어가던 세실은 자유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자유호의 갑판과 부두를 연결하는 널판 위로 바다사자호의 두캉가 선장과 페가서스호의 하리야 선장이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내려오고 있었다. 자유호에 올라가기 위해 그들이 널판을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던 세실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대화 일부를 듣게 되었다.
“제독이라고요?”
“그랬네. 그런데 자넨 아예 그를 왕으로 만들겠다고까지 말했단 말이야.”
“그래서 그가 당신을 그렇게 본………….. 마법사 세실?”
세실을 발견한 하리야 선장은 빠른 걸음으로 널판을 내려왔다. 세실은 팔짱을 끼며 하리야를 쳐다보았다.
“뭔 이야기들 나눴기에 그렇게 화들짝 놀라는 거지? 왕이 어쨌다고?”
“별말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갈 생각이셨습니까?”
“응.”
“자유호엔 무슨 일로?”
“별일 아냐. 키 드레이번에게 황제가 되라고 권해 볼까 해서.”
두 선장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한 채 세실을 바라보았고, 세실은 그런 선장들을 흘겨 봐준 다음 널판을 걸어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두캉 가 선장과 하리야 선장은 한숨을 내쉬곤 각자의 배로 돌아갔다.
자유호의 갑판 위에 올라간 세실은 제일사장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다림 시내를 바라보는 라이온을 발견했다. 세실은 라이온에게 걸 어갔다.
“여어, 라이온. 뭐하고 있나?”
라이온은 그윽한 시선으로 다림 시내를 보며 말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훔쳐간 도둑, 하지만 용서할 수밖에 없는 도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아, 내 마음을 강탈해 간 아름다운 도둑 율리아 나………… 보고 싶어라.”
“대뇌에 치질 걸린 소리 그만하고 이야기나 해봐.”
“무슨 이야기?”
“어쩔 생각이야? 계속 다림에 죽치고 앉아 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여기에 노스윈드국을 세우자는 말까지 오가는 모양이군. 정말 그럴 생각인 가?”
라이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실을 돌아보았다. 발밑이 바로 바다인 제일사장 위였지만 라이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몸을 돌렸고, 그래서 세실은 잠깐 조마조마해야 했다.
“어라. 그건 방금 나왔던 말인데 어떻게 알았습니까? 마법?”
“내가 마법 써서 뭘 훔쳐들었다면 네게 묻고 있겠냐.”
“나라라는 것이 기분 내킨다고 해서 세우고 말고 할 것은 아니잖습니까.”
“음? 너 라이온 아니지?”
“하하. 나는 보잘것없는 갑판장일 뿐입니다. 그런 거창 무쌍한 일은 선장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런데 그거 물어보러 여기 온 겁니까?”
“쳇, 말 돌리기는. 좋아. 그건 다른 작자에게 물어보지. 내 용건이나 말하지. 『제국백과사전』이 있다고 들었는데.”
라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먹지도 못할 책 비싸기는 엄청나게 비싸더군요. 예. 저기 레보스호에 있습니다. 레보스호에 실린 것 중 팔 만한 건 다 팔았는데 그건 아직 처치 곤 란이군요.”
“그거 좀 보자.”
라이온은 잠시 세실을 바라보았다. 『제국백과사전』의 열람이 키 선장이나 식스 일항사의 허락을 받아야 되는 일인지 고민해 보던 라이온은, 잠시 후 자신이 그런 허락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다운 방식으로 고민을 끝낸 라이온은 경쾌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라이온의 안내를 받아 세실은 레보스호의 특별 화물실로 향했다. 배에 대해 그다지 익숙하다고는 할 수 없는 세실도 레보스호의 특별 화물실에 실려 있는 백과사전을 보곤 잘도 실었다고 생각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이거 실을 때 균형 맞춰 싣느라 고생했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뭐 조사하실 생각입니까?”
“응.”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몇 놈 붙여드릴 수 있습니다만?”
“필요없어. 바쁠 테니 가봐.”
라이온은 세실에게 인사한 다음 갑판 위로 올라갔다. 세실은 잠시 팔짱을 낀 채 특별 화물실 내의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암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습기를 피하기 위해 율리아나 공주의 장서들은 상자에 들어 있었는데 한 상자에 대개 20권 남짓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상자가 60여 개 가까이 실려 있는 것이다. 황당한 심정을 애써 가눈 세실은 라이온에게 건네받은 화물 목록을 뒤적이며 자신이 원하는 책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