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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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8장 : 불은 바람을 부른다 – 2화


늦봄의 어지러운 낙화 속에 언덕길은 게으른 졸음에 빠져 있었다.

해원으로부터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언덕을 올라오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키 드레이번의 넓은 어깨엔 꽃잎이 꽤나 쌓여 있었다. 철쭉, 벚꽃,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봄은 자신이 피워낸 생명들의 열기 속에 오히려 사그라들고 있었고 조만간 협죽도의 붉은빛 속에 여름이 찾아들 것 같다. 키는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오른손에 든 화분을 흔들거리며 언덕길의 나머지를 천천히 답파했다.

언덕 정상에서 약간 아래쪽, 바닷바람을 잘 받는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카이트플라이어는 큼직한 얼레를 가슴 높이에 들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지만 그 아득한 저편에서는 하얀 연이 나 풀거리고 있었다. 키는 멈춰 서서 옷에 붙은 꽃잎을 털어내었다. 탁, 탁. 늙은 카이트플라이어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과 키의 눈이 잠깐 부딪혔다. 조연사는 키의 오른손에 들린 화분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연사는 곧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는 잠시 그의 구부정한 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바람이 어떻습니까.”

카이트플라이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글쎄. 뱃사람이신가?”

“그렇습니다.”

“지금은 그저 그렇지만, 썰물 때쯤엔 출항하기에 괜찮은 바람이 불 것도 같구려.”

“누군가 당신께 청탁을 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없소. 그냥 심심해서 나와본 거라오. 이 늙은이도 염치가 있는데 모두들 복구 때문에 바쁜 시내에서 빈둥거릴 수가 있어야지.” 키는 정상 부근의 바위 위에 코트를 던지고 화분은 바위 옆에 놓았다. 따스한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키는 바위에 앉은 다음 흐트러진 머릿결을 가 다듬었다.

“노인장께선 얼마 동안 연을 날리셨습니까?”

“그럭저럭 50년쯤 된 것 같소.”

“계속 이곳에서?”

“물론이오. 진짜 조연사는 항구에 매이는 법이라오.”

“군대의 카이트플라이어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그건 조연사가 아니오. 연재주꾼이지. 진짜 조연사는 자기가 처음 연을 날린 항구에서 죽을 때까지 연을 날리는 법이오. 등대지기처럼. 등대지기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빛을 다루고, 조연사는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바람을 잡아내지. 같은 거요. 나는 다림 항의 바람들은 전부 내 자식처럼 잘 안다오.”

“그러십니까.”

조연사는 왼팔을 들어 허공을 찔렀다.

“그래요. 저쪽, 마치 돛대 같은 나무가 서 있는 곳 보이시오? 저쪽에 있는 녀석이 제일 착한 녀석이오. 심지가 굳고 절대로 성질을 부리는 일이 없어 요. 태풍이 불 때도 저 녀석만 도와주면 입항이 가능하지. 반대로 저쪽 부두 창고 쪽에서 오른쪽으로 휘는 놈, 저놈은 성격이 너무 괄괄하지. 오늘은 잠잠하지만 저 녀석이 만일 기세가 오르면 헤비 갤리어스라도 바다 밑에 처박아버리지. 게다가 저놈은 음흉해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고 불어닥치 곤 해서 골치 아픈 놈이오.”

“이야기?”

“이 실에 대고 이야기하지. 난 지금 댁하고만 이야기하고 있는 건 아니오.”

“지금 바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조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키는 수평선 가까운 곳에서 반짝거리는 빛의 파편들에 시선을 맞춰보았다. 바래어진 하늘빛 속에 연은 제멋대로 까불거 리고 있었다. 시답잖은 세상의 시답잖은 소음은 언덕 중턱에서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고, 바닷바람 속에 곳은 고요했다.


요란한 바람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하늘 저 높은 곳을 떠다니던 붉은 연이 갑자기 미친 듯이 춤추는 모습은 마치 바람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착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카이트플라이어의 보고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하팔 장군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장에서 뼈 가 굳은 그다. 조연사의 보고를 들을 것도 없이 곧 바람이 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언덕 아래에서 전령이 달려 올라왔다.

“보고합니다. 카이트플라이어는 곧 안개를 치워버릴 강력한 바람이 불 것이라 말했습니다.”

하팔 장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부관이 희열을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군요. 안개가 사라지면 강 건너편에서 놈들이 어떤 얼굴이 될지 궁금합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하팔 장군은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하팔 장군의 전략을 처음 들을 때는 불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던 부 관이었다. 5,000명의 투란 군단에 판도의 2,000명의 중장보병과 반델에서 달려온 1,000명이 더해져 팔라레온은 8,000명이라는 대군이었고 만약 이 대군이 포진하는 틈을 노려 다벨군이 강을 건너왔다면 하팔 장군은 싸워보기도 전에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다.

팔라레온군의 진형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부채꼴이 될 것이다. 하팔 장군의 부관이 처음에 난색을 표명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장을 가로 지르는 강이 다벨군과 팔라레온군 가운데로 흐르고 있었고, 하팔 장군은 강 이쪽 편에 길다란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펼쳤다. 당연히 포격과 궁병 위 주의 장거리 공격 진형이며, 십자포화가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진형이다. 실제로 하팔 장군은 초승달의 양쪽 끝부분, 그러니까 진형의 최 우익과 최좌익에 20문씩의 대포를 배치했다. 하지만 이 진형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가 어렵기 때문에 초승달의 한쪽 끝을 공격당하면 다른 쪽 끝에 서 도와줄 수가 없는, 방어적 측면에서 취약한 진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진하는 순간이 극히 위험한 진형이다.

하지만 하팔 장군은 자신의 모국에서 전략적 요충지가 되는 지역들의 특성을 상세히 알고 있었고, 그래서 판도 지방의 안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 었다. 전장을 뒤덮은 안개 속에서 팔라레온군은 여유 있게 참호를 파고 포진을 마칠 수 있었다. 안개 때문에 팔라레온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다벨 군은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팔 장군은 안개만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진형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선 전장의 확산을 막는 일이 무엇 보다 절실하다. 그렇기에 하팔 장군은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진형의 중심점으로 삼았다. 여울목 때문에 다벨군은 공세밀도를 한 점에 집중시킬 수밖에 없고 팔라레온은 바로 그 한 점을 모든 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다. 하팔 장군은 자신이 펼쳐낸 이 장대한 전략을 소박하게 표현했다.

“토끼굴에서 튀어나오는 토끼를 한 마리씩 때려잡는 식이지. 애들 코 묻은 돈 뺏는 기분이지만, 이 싸움은 내가 잡았어.”

부관은 아직 적당한 동의와 졸렬한 아부의 중간점에 자신의 자존심을 합일시키는 재주는 터득하지 못한 젊은 나이였고, 그래서 늙은 상관의 기분을 맞추어주진 못했다.

“너무 낙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일순간 화를 낼 뻔했지만 하팔 장군은 곧 화를 억눌렀다. 그 역시 젊은 시절엔 그저 반대하기 위해 상관에게 대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하팔 장군은 부드럽게 말했다.

“다른 계획이 있다면 말해 보게. 안개가 곧 걷힐 테니 빨리 말해 주면 좋겠군.”

부관은 당혹하여 고개를 숙였다. 물론 싸움을 앞두고 부관을 의기소침한 상태로 만들어둘 필요는 없다.

“당장 그런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일단은 내 계획을 도와주게. 나에겐 자네의 그 침착함과 냉정함이 필요할 거야.”

부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팔 장군의 노련한 장수다운 모습이 한껏 빛난 순간, 전장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안개가 엷어지고 있었다.


늙은 조연사는 뜬금없이 말했다.

“다벨과 팔라레온이 전쟁을 벌였다더군. 혹시 그 이야기 아시오?”

“들어봤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들 싸우는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벨의 프란체스코 메르데린은 황제병에 걸린 사내입니다만.”

“어, 황제가 되고 싶어한다고? 나도 그 말 들어봤소. 그럼 왜 제국을 안 치고 팔라레온을 친 거요?”

키는 늙은 조연사의 소박한 질문에 대해 비웃지는 않았다. 대신 어린애도 아마도 귀족가의 어린애여야겠지만 대답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제국을 칠 정도의 힘이 없으니까 그렇겠지요. 팔라레온의 밀밭을 가지면 그는 더 강해지지 않겠습니까.”

“아아, 그런 건가. 맞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조연사는 한가롭게 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다가 말했다.

“그럼 그 다음엔 제국을 치겠군?”

“곧장 그러기는 어려울 겁니다. 록소나의 말이나 다케온의 다이아몬드까지 얻는 편이 좋을 겁니다. 팔라레온을 가지면 록소나나 다케온은 치기 쉽 겠지요.”

“오호라, 그렇군, 그래. 이크! 이놈아. 줄 좀 놓거라.”

뒤의 말은 바람에게 건넨 말일 것이다. 낚시꾼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실을 감았다 풀었다 하던 조연사는 잠시 후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했다.

“원, 그놈 성깔하곤. 그래, 그 다음엔 제국을 치겠네?”

“어쩌면 그렇겠지요.”

“그럼 그 공작님은 황제님이 되는 것이고.”

“예.”

조연사는 갑자기 얼레를 들어올렸다. 얼레가 빠르게 회전하며 실이 주르륵 풀려나갔다. 연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조연사는 얼레를 천천히 잡아당겼 다.

“그럼 공작님은 행복해지겠군.”

“어쩌면.”

“그럼・・・・・・ 공작님, 아니 황제님은 그 다음엔 뭘 할까.”

“그 다음?”

“그 다음 말이오.”

“심심할 테니, 바람 좋은 언덕을 찾아 연을 날릴지도 모르지요.”

늙은 조연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킬킬거렸다.


하팔 장군은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전장의 치열함은 이성의 한 조각마저 질식 시켜 사그라들게 하고 있었다. 창검의 희디흰 번득임 위로 선홍빛 얼룩이 번지고 육신의 일부였던 것들이 생기 잃은 고깃덩이의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하팔 장군은 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휘리 노이에 -스!”

하팔 장군의 장대한 전략, 즉 안개를 이용한 진지 배치, 그 배치를 통해 얻어낸 좁은 전장, 그리고 그 좁은 전장인 여울목으로 집중시킨 공세각도, 집 중된 공세각도를 통해 이루어낸 십자포화………… 등의 모든 전략을 휘리는 단 하나의 계책을 사용하여 깨어버렸다. 시간의 지배.

다벨군은 시간을 선점해 버렸고 그러자 모든 것을 선점하게 되었다. 안개가 완전히 걷히기 직전의 극히 미묘한 시점에 다벨군은 400기의 중장기병 을 갑자기 도하시켰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고 있던 하팔 장군에게, 갑자기 들려온 철벅거리는 물 소리는 불길한 조종 소리처럼 느껴졌다.

다벨군 중장기병의 도하 시점에서 여울목은 아직 안개에 휩싸여 있었고, 그래서 팔라레온 포병들은 목표를 보지 못한 채 황급히 발사해야 했다. 명 중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그리고 도하를 끝낸 중장기병이 좌우로 갈라져 돌격을 시작한 순간 거짓말처럼 안개는 걷혀버렸다.

10초 늦었다.

그리고 하팔 장군은 그 10초의 차이를 되찾을 수 없었다. 포병과 궁병이 높이를 얻었을 때, 보병이 거리를 얻었을 때(밀착했을 때), 그리고 기병이 속 도를 얻었을 때 그들은 최고의 위력을 나타낸다. 안개 걷힌 평원을 돌진한 중장기병들은 팔라레온 궁병대와 포병대를 단숨에 치고 들어간 다음 포병 대를 압박했다. 강과 적군 사이에 끼여버린 대포들은 제대로 발사도 못한 채 제압당했고 그러자 중장기병들은 그대로 팔라레온군 뒤쪽으로 뛰쳐나갔 다. 그리고 강 저편에선 다벨군의 경장보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중장기병의 뒤를 이어 도하해 온 다벨 경장보병들은, 그러나 전방의 적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조금 전의 중장기병들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하팔 장군은 어이가 없었다. 이미 제압한 곳에 왜 보병을 돌격시키는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라 생각하던 하팔 장군은 다음 순간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들은 경장보병이 아니었다. 그들이 팔라레온 포병대 자리에 뛰어든 순간, 팔라레온의 포병대는 급반전하여 팔라레온의 본진을 사격하기 시작했 다.

포성과 함께 본진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다벨군의 포병이었다. 다만 포를 가지지 않았을 뿐. 포병의 느린 속도를 상쇄하기 위해 포병에게서 포를 제외시켜 버린 휘리 노이에스의 전 술은 상식을 몇 단계나 뛰어넘는 부대 운용이었다. 초승달 모양이었던 팔라레온군은 그 양쪽의 포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짐으로 인해 포위진 속에 스 스로 갇힌 형국이 되었다. 뒤로 돌아간 다벨군의 중장기병들은 퇴로를 차단한 채 뒤쪽에서 압박해 오고 있었고 전방은 강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다. 하팔 장군은 결심을 해야 했다.

“돌격! 앞으로 돌격!”

하팔 장군은 본진 좌우에 있던 판도 기지군과 반델 기지군을 전방으로 돌격시켰다. 다벨군의 중장기병들이 후방을 공격하기 전에 강을 넘어가 적의 본진을 치려는 의도였다. 포병들을 향해 돌격하려던 판도 기지군과 반델 기지군은 총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을 향해 돌격했다.

“와아아아아!”

하지만 하팔 장군이 잃었던 10초는 아직까지도 휘리의 것이었다. 전방으로 돌격하는 팔라레온 중장보병들은 측면으로부터 가해지는 포격에 그대로 노출되어야 했다. 자연 팔라레온 중장보병의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었고, 여울목에서는 이미 다벨 중장보병들이 검을 빼어든 채 침착하게 도하해 오 고 있었다.

도하를 끝낸 다벨 중장보병들과 팔라레온 중장보병들이 맞닥뜨렸다. 검과 검이 부딪히고 분노의 외침과 고통의 비명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팔라레온 중장보병들은 측면 사격을 받으며 돌격했던 여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격돌 직후부터 팔라레온 중장보병들은 뒤로 밀리기 시작했 다. 다벨 중장보병들이 팔라레온 중장보병들을 압박하기 시작했을 때, 강 저편에서 드디어 다벨 경장기병들이 마지막으로 뛰쳐나왔다. 다벨 경장기 병들은 오로지 그들만이 가능한 신속함으로 다벨 중장보병의 뒤를 돌아 팔라레온의 본진과 포병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10초의 차이는 다시 뒤집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포위진이 완성된 것이다.

곳곳에서 팔라레온군의 지휘관들이 쓰러져 갔다. 사방에서 포위된 팔라레온군은 꼼짝할 수 없었고 그런 팔라레온군을 향해 다벨군의 포병들은 여유 있게 사격을 해대었다. 명중률은 기막힐 정도였다. 사면 포위된 상황에서 하팔 장군 역시 검을 뽑아들고 사병처럼 싸워야 했다. 하팔 장군의 참모들 역시 작전 지휘가 아니라 장군의 보호를 위해 싸워야 했다.

이미 승부는 난 것이고 혈로도 보이지 않았다.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보병을 베어낸 부관이 외쳤다.

“달아나셔야 합니다!”

하팔 장군은 무서운 눈으로 부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부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부하들이 저곳에 있다.”

“장군님, 달아나셔야 합니다! 이 마당에 적군에게 총사령관을 잡았다는 명예까지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만은 피해야 합니다! 팔라레온을 생각하십 “시오!”

하팔 장군이 조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이 부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장수들의 생사가 승전과 패전의 경계선이라면 총사령관의 탈출 여부는 전 투와 전쟁의 경계선이 될 수도 있다. 이 패배한 전투를 패배한 전쟁으로까지 확대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팔 장군은 달아나야 했다. 장군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하를 배신하는 짓이다. 하팔 장군은 무서운 고뇌로 눈동자를 불태우며 전방을 응시했다. 하지만 장군의 참모진들은 이미 장군의 말고삐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사령관님!”

하팔 장군은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짧은 명령이 오고간 후 팔라레온군의 수뇌부는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전원 후퇴하라! 후퇴하라! 집결지는 반델 기지다. 후퇴하라!”

이 경우 후퇴 명령은 당연히 항복 명령이다. 포위진 속에 갇혀 있던 팔라레온군 대부분은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렸다. 달아나던 하팔 장군과 참모 진들도 그 모습을 보며 분노할 수 없었다. 하팔 장군은 다시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휘리 노이에 – 스!”

“저길 보십시오!”

부관이 증오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전장 저편의 언덕 위를 본 하팔 장군 역시 머리로 피가 솟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다벨의 사령관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중장보병 약간 명의 호위를 받으며 몇 기의 기사들이 초연히 서 있었다. 그 가운데로 진초록빛 갑옷을 걸친 기사가 전장 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잘 보였다.

“다벨 사령관………… 휘리 노이에스인 듯합니다. 음유시인인 척하는 모양이군요, 망할 자식!”

혼란스러워하던 하팔 장군은 처음엔 부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후 하팔 장군은 부관이 휘리 노이에스의 갑옷을 이야기하는 것을 깨달았다.

휘리 노이에스는 음유시인들의 케케묵은 전통 중 하나를 따르고 있었다.

전장, 혹은 분쟁 지역을 지나가게 될 때 음유시인은 한시적으로 초록빛 옷이나 초록빛 스카프 등을 걸친다. 그 의상은 음유시인이 적의나 분노가 아 닌 스스로의 맹세를 위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의 즐거움과 기쁨을 노래하는 것과 똑같이 슬픔과 분노도 노래하겠다는 음유시인의 맹세. 그들은 초록빛 옷을 입고서 전장을 돌아다니며 공격하지도, 공격받지도 않은 채 모든 것을 관찰한 다음 승자의 영광을 노래하고 패 자의 슬픔을 위로한다. 어떤 의미에서, 음유시인의 초록빛 옷은 전쟁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상복이다. 이 경우에는 의미가 다르겠지만, 어쨌든 휘리 노이에스는 자신이 무장의 자격이 아니라 음유시인의 자격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리라.

그 순간 하팔 장군은 깨달았다. 자신이 왜 도망가기를 주저했는지.

그는 가수에게서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휘리 노이에스! 간다!”

부관은 기겁했지만, 이미 하팔 장군은 언덕을 치달아 오르고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던 다벨 기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라레온의 참모진들은 총사령관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하팔 장군을 따라잡지는 못했다. 아니,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하팔 장군은 무서운 속도로 언덕을 치달아 올랐다.

“오라! 와서 내 검을 꺾어보라, 휘리 노이에스!”

하팔 장군의 검이 마상에서 언덕 위를 향해 곧게 뻗었다. 일순, 진초록빛 갑옷을 걸친 이의 오른손이 하늘로 올라갔다. 휘리 주위에 있던 보병들이 각자 창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석궁을 꺼내어 하팔 장군을 겨냥했다.

“하팔 장군님 !”

하팔 장군의 부관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며 그의 상관이 쓰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쿼렐들은 장군의 늙은 육체를 사정없이 유린하며 그를 말 위에서 내팽개쳤다. 하팔 장군은 땅에 떨어지고 나서 한참 동안 굴러 내려왔고 언덕에는 붉은 길이 만들어졌다. 마침내 회전을 멈춘 장군의 모습 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흙먼지와 피, 그리고 꺾어진 채 꽂혀 있는 쿼렐들 속에서 장군의 몸은 사람의 육신이 아닌 부패한 고깃덩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부관이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휘리의 손짓에 따라 다시 날아온 쿼렐 중 하나가 악마의 인도를 받은 것처럼 그의 눈 속으로 날아들었 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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