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4화 [2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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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리스 랩소디 2권 – 9장 : 구름이 고요속을 흐를 때 – 4화


철벅, 철벅.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불빛은 한 젊은 사내의 발 앞을 비추며, 동시에 사내의 속을 뒤집었다. 불빛 속에 드러난 하수구의 구정물은 검게 번들거리고 있었고 온갖 기괴한 것ᅳ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싶지는 않은 이 그 위로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사내는 얼굴에 손수건을 두르고 있었지만, 냄새의 공격은 가멸찼다.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음식물 썩는 냄새였고 분뇨 냄새와 생선 썩는 냄새가 복합적인 풍미를 더하고 있어 사내의 얼굴빛을 퇴색 시키고 그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사내는 잠시 멈춰 서서 뱃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이로써 열 번째 시도였다. 잠시 후 사내는 굳은 결심이 엿보이는 동작으로 발걸음을 뗐다. 씩씩하 게 내딛는 발걸음에 구정물이 튀어올랐고 사내는 곧 자신이 열한 번째 시도를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내는 갑자기 코를 벌름거 렸다.

짠 냄새가 느껴졌다.

사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질퍽거리고 끈적거리는 하수구 속에서 용케도 미끄러지지 않았지만 덕분에 바지는 엉망이 되었다. 잠시 후 사내는 자신 이 하수구의 끝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별빛이 떨어지는 밤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하수 배출구 옆으로 걸어나온 사내는 쥐어뜯듯이 손수건을 풀어헤치고는 바다의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물론 하수 배출구 바로 옆인지라 냄새는 아직도 굉장했지만 지금껏 그 안을 걸어왔던 사내는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펫속이 깨끗이 씻겨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아직 까지도 랜턴을 들고 있다는 것을 사내가 깨달은 것은 시간이 좀 지난 후였다. 사내는 자신의 멍청함을 꾸짖으며 황급히 랜턴을 껐다. 그들에게 들키 지 않기 위해 하수구를 이용하는 끔찍한 노고를 기울였는데, 이 멍청한 불빛 때문에 들킨다면야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또다른 남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이제야 불을 끌 결심을 했소?”

젊은 사내는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어느새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사내는 푸르스름한 달빛 속에서 어떤 남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 다. 등뒤에서 말을 건 남자는 젊은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을 보고는 두 손을 올려 자신이 비무장임을 보였다. 젊은 사내가 검을 내리자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달빛뿐인지라 얼굴의 모습까지는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사내는 확인해 보기로 했다.

“누구요?”

“큰누님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오.”

“아아. 그러십니까. 저는……”

“관두쇼, 젊은이.”

몸에 밴 예의 때문에 자기 소개를 할 뻔했던 사내는 얼굴을 붉혔다. 이목구비도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 그에게 퍽 다행스러웠을 것이다. 남자가 다시 말했다.

“말과 짐은 저쪽 숲에 있소.”

남자는 그렇게만 말하고 곧 몸을 돌렸다. 어느새 남자는 저 멀리 언덕 쪽으로 사라졌다. 젊은 사내는 남자가 가르쳐주었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숲 사이로 말의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쪽으로 곧장 다가가는 대신 주위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 의 관찰 끝에 사내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고 판단했다. 사내는 말에게로 걸어갔다.

말은 갑자기 다가온 사내를 경계했고, 그래서 사내는 곧장 말에 오르는 대신 그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을 진정시켰다. 말의 목을 문질러주던 사내는 나무 둥치 아래에서 짐을 발견했다. 사내는 손에 들고 있던 랜턴을 짐 속에 집어넣었다.

말은 곧 진정했다. 올라타도 되겠다고 판단한 사내는, 그러나 등자에 발을 올리기 전 바다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숲 사이로 보이는 다림 앞바다에는 노스윈드 선단의 커다란 전함들이 고요히 떠 있었다. 말 이외엔 보는 눈이 전혀 없었기에, 사내는 노스윈드 선단을 향해 신사답지 못한 손짓을 해보 였다. 해적들의 감시망을 뚫고 다림을 빠져나왔다는 것이 너무 통쾌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말에 올라탄 다음 키 드레이번이 다림을 떠난 날짜를 감안해 보았다. 거리는 꽤 될 테지만 사내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키 드레이번은 어떻 게 율리아나 공주를 찾아야 할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율리아나 공주가 어디로 향할지 안다고 믿었다. 왕자의 땅은 모두 전쟁중이므로, 율리 아나 공주는 이루미나 공주가 있는 라트랑으로 향할 것이다. 폴라 대사도 그 추측에 동의했다.

50만 데리우스의 몸값으로 풀려난 지 반나절 만에, 기사 슈마허는 키 드레이번을 전심전력으로 방해하고 율리아나 공주를 보호할 것을 자신에게 맹 세하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홀로 떠나는 길이 그에겐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해적들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또한 키 드레이번이 홀로 떠났다는 사 실이 곧 무기이기 때문에 폴라 대사 역시 그 혼자 살며시 떠나는 것을 승낙했다. ‘제국 어느 곳에서든, 주위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곧 나의 전 우가 되어주리라. 저 키 드레이번 앞에서! 슈마허는 활발하게 달려갔다.


팔라레온의 투란궁.

완만하게 뻗은 렉세리온 언덕 위로 푸른 궁전의 모습이 아름답다. 군주가 바뀌어도 건물은 남는다. 어쩌면 진정한 지배자는 건물일지도 모른다. 군 주는 다른 곳에 있을 때보다는 궁전에 있을 때에 가장 군주답다. 그리고 피지배자들은 군주를 보기보다는 군주가 있는 건물을 본다. 그 점에서 볼 때, 렉세리온 언덕의 정상부를 모두 차지하다시피 하는 투란궁의 아름다운 모습은 참으로 지배자답다. 투란궁의 발코니에 앉아서 렉세리온 언덕을 내려 다보고 있는 휘리 노이에스의 모습이 위엄 있어보이는 것도 아름다운 건물의 영향이 클 것이다.

물론 아무도 휘리의 지배자다움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한 일은 아직도 팔라레온인들의 가슴속에 공포로 자리하고 있었다. 휘리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너머를 바라보았다.

“귀하의 목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거기에 대해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대답을 하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지금 귀하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보이는군요.”

다케온의 특사는 평온한 태도로 대답했다.

“칠 겁니까?”

휘리는 자신이 한방 먹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어쨌든 상대방은 특사로 뽑혀올 정도의 인물이다. 첫만남에서 외교적, 혹은 사교적인 모든 예의를 벗 어부치고 맨몸으로 덤비는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을 뽑아보낸 다케온에 대해, 휘리는 잠시 경의를 느꼈다. 그래서 휘리 노이에 스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니오. 다케온을 치진 않을 겁니다.”

“대신 뭘 원합니까?”

“다이아몬드.”

휘리는 이런 식의 벌거벗은 대화가 맘에 들지는 않았다. 세련되지 못해. 다케온 식이라는 거냐? 휘리 노이에스는 잠시 네그리파 다케온 백작이 키 드레이번에게 했다는 그 제안은 역시 풍문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현실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그런 황당한 제안을 했을 리는 없다…………. 다케온 특사는 평온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말했다.

“얼마나?”

“얼마나가 아니고 얼마 동안입니다.”

다케온 특사의 얼굴이 처음으로 붉어졌다. 특사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채굴권을 원하는 겁니까?”

“1년이면 충분합니다. 아, 그리고 난 동남동녀는 쓰지 않을 거요. 직접 광부를 사서 내 손으로 파겠습니다.”

“그런 뜻이었군요.”

“당신은 전권 특사지요? 그럼 지금 대답해 주시겠소?”

“어디를 원합니까?”

“브라이트썸.”

“…..반년 동안.”

“7개월이면?”

“반년입니다. 다른 대답은 없습니다.”

휘리는 항복한다는 듯이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좋아요. 5개월 동안.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록소나와의 전투에서 행운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케온 특사는 그제서야 얼굴을 좀 펴며 술잔을 들어올렸다. 술잔 속에는 특사가 휘리 노이에스에게 선물한 라트랑 와인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휘 리도 잔을 들어 특사와 건배했다.

술을 한 모금 마신 다음 특사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질문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내 개인적 관심사 때문에 하는 겁니다.”

휘리는 그러시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께서도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당신이라는 존재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혹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원래 무인이 아니었잖습니까? 어떻게 그런 변신을 하게 된 겁니까?”

“천사의 도움이 있었지요.”

―휘리는 자신이 가장 정확한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케온 특사는 휘리가 대답을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특사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기 로 결정했다. 아쉬운 노릇이었다. 만일 특사가 약간의 유머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 천사의 생김생김이 어떠했냐는 질문 정도는 해볼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 휘리는 특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휘리가 제대로 대답하지 않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다케온 특 사는 정중히 인사하고 발코니를 떠났다.

특사가 떠나자 휘리는 의자를 뒤로 돌린 다음 발코니 난간 위에 두 발을 얹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투란궁에 휘리의 초록빛 옷은 잘 어울렸다. 짙푸른 하늘에 구름은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 새하얗다. 그때 발코니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있었다.

“장군님. 소사라입니다.”

휘리는 고개를 약간 돌려 소사라를 바라보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국의 하늘은 아름다웠다.

“무슨 일인가. 서 소사라?”

“다케온 특사가 역관으로 떠났습니다. 명령해 주십시오.”

“명령이라니, 무슨?”

서 소사라는 잠시 당황하여 그의 상관을 바라보았다.

“특사를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다니, 무슨 말이야? 나는 그에게 더 볼 일이 없네. 자넨 무슨 볼 일이 있나?”

휘리의 대답은 초여름의 바람처럼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 소사라는 바보가 되어보기로 결정했다.

“그를 붙잡아 억류시켜야 하지 않습니까? 빌레스 국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응? 내가 마왕과 무슨 약속을 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서 소사라는 입을 쩍 벌린 채 휘리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무슨 약속이냐니? 다케온의 주의를 끌어 빌레스 국왕의 침입을 용이하게 해주고 빌레스 국왕이 움직이면 그에 보조를 맞추어 함께 다케온을 치기로 한 약속…………. 잠시 후, 소사라는 폭발적인 웃음을 막기 위해 입을 움켜쥐었다.

“크, 크큭. 예. 아, 하하하. 알겠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서 소사라도 메르데린 스쿨의 기사였다. 그는 휘리의 생각을 깨달았고, 놀라움이 동반된 즐거움으로 그 계획을 음미해 보았다. 하늘을 바라 보던 휘리의 입매도 조금 올라갔다. 뜻이 통하는 사람과 일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서 소사라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마왕이 지독한 소리를 해대겠군요.”

“노탐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늙은이는 할말이 없을 거야.”

“잘 알겠습니다. 방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물러나겠습니다.”

“수고하게.”

서 소사라가 떠나고 발코니는 거의 완벽한 정적 속을 떠다녔다. 이제 다가온 초여름을 상징하는 풀벌레의 윙윙거림은 소음이라기보다는 정적에 새 겨진 어떤 무늬 같았다. 휘리는 미간을 조금 문질러보았지만 곧 맥없이 그 손을 내렸다. 팔라레온의 하늘은 깊었다.

휘리는 푸른 하늘에서 유리와 비슷하게 생긴 구름을 찾아보다가 잠이 들었다.


같은 시각, 또 한 명의 장군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노장군은 발랄한 젊은 장군처럼 구름에서 연인의 모습 따위를 찾지는 않았다. 그의 늙은 눈매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암운이었다. 무수한 전장에 서보았고 수많은 위기 속에서 자신을 추스렸고 적개심에 불타는 적의 검 아래 맨손으로 서본 경험까지 있었지만, 지금처럼 노장군의 가슴속이 답답했던 적은 드물었다. 공포나 위기라면 신물이 나도록 겪었지만, 지금 노장군에게 다가오 는 감정은 그 성격부터가 다르다.

남해의 하늘을 바라보던 노장군은 고개를 조금 떨구었다. 그러고는 조금 전 읽었던 지령서를 다시 펼쳐보았다. 작고 화려한 글씨는 그가 존경하는 젊은이 -모든 노인이 그렇듯이, 노장군 또한 젊은이를 존경하는 일은 드물었다. 따라서 이 경우는 꽤 특이한 축에 속한다ᅳ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지령서는, 노장군이 알고 있는 젊은이답지 않게 약간 지리한 설명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노장군은 아마도 그 역시 심적 부담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 서 이런 긴 설명을 쓰고 말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젊은이는 약간 성급하지만 나름대로 치밀한 논리를 통해 상황을 설명한 다음 약간 버거운 요구로써 지령서를 끝내고 있었다.

‘대사를 찾으십시오. 그가 다섯 번째의 검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지만 장군의 짐작대로 휘리 노이에스에 의해 그녀가 이미 살해되었다면, 장군 께서는 다섯 번째의 검을 꺾고 네 왕자의 검을 원래대로 돌려놓으십시오. 전에 말씀드린 대로, 본토의 뒤치다꺼리는 제가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십 시오.’

노장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미련 없이 지령서를 찢었다.

북풍은 아니었지만, 지령서의 조각들은 뱃전을 뛰노는 바람을 타며 바다로 떨어져 갔다. 노장군은 밧줄을 움켜쥐며 몸을 돌렸다. 저 멀리 서 있던 선 장이 제독의 시선을 느끼곤 몸을 꼿꼿이 세웠다. 노장군은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항로 그대로 고정.”

호시탐탐 노장군에 대한 자신의 존경심을 나타낼 기회만 노리고 있던 선장은 그야말로 대포처럼 고함 질렀다.

“알겠습니다, 제독님!”

바스톨 장군은 아무래도 제독이라는 직함은 자신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잠깐 머쓱해했다. 명령을 내리는 선장에게서 몸을 돌려 다시 하늘을 돌아본 바스톨 장군은 구름의 움직임을 더듬었다. 구름의 움직임은 편안하고, 한가로웠다. 하지만……………

구름의 움직임이 평온하다 해서 바람마저 평온할까.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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